소설의 피로
- 작성일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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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소설의 피로
양지예
노엘 갤러거의 무대를 보며 음악가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Talk Tonight>. 그의 젊은 시절 방황하던 경험과 더불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한 여인에 대한 곡이다. 노래는 발표한 지 삼십 년 가까이 되어 가고 무대 위 머리 희끗희끗한 노엘 갤러거에게서는 이제 방황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연주자와 합을 맞추는 모습이 흥겨울 정도다. 아련한 원곡의 분위기 역시 세월을 따라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편곡을 입었다.
음악은 어떻게 나에게 올까. 일단 누군가 곡을 쓰고 발표해야 한다. 청자인 나는 플랫폼을 통해 음원을 감상하거나 드물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앨범을 사기도 한다. 음악가에게는 다른 홍보 방법도 있다. 대중음악가라면 뮤직비디오를 찍어 유튜브에 업로드하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때로는 음악과 관계없는 방송이나 행사에도 출연하는데,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역시 주는 새 노래 홍보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신곡은 끊임없이 피로(披露)된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를 좋아할까.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또한 수만 번은 반복하여 들었을 그 노래를 정말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음악가는 본인 노래의 첫 청자다. 작곡에 참여하지 않는 가수라 하더라도 비슷하다. 곡이 만들어지는 영감의 그 순간부터 완성 후 녹음 과정까지 좋은 기억도 싫은 기억도 낱낱이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갈등뿐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창작자 홀로 만드는 음악이란 없다시피 하다. 사람이 여럿 모였는데 과정이 언제나 매끄러울 수는 없다. 드물게 하늘이 내려 준 노래가 어려움 없이 착착 완성된다 한들 매끈한 표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울퉁불퉁 제멋대로이기 마련이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아름답기만 한 창작의 과정은 나로선 상상하기 힘들다.
겉보기를 아름답고 멋지게 만드는 일이란 사실 어렵지 않다. 그저 포장 기술이다. 세상에는 정말 엄청난 포장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실 다지기보다는 포장 기술을 익히는 쪽이 빠르다. 포장이 어렵다면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 피땀눈물을 삭제해 버린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처럼. 바라기만 하면 매끈한 성취가 이뤄질 듯한 환상을 듣는 이에게 심어 주는 요령을 수많은 표어와 마케팅 서적이 알려주고 있다. 이런 요령을 활용하면 가수도 어렵지 않게 싫어하는 노래를 즐거운 듯 피로해 보일 수 있을 터다. 삼사 분 정도 꾹 참아내면 그만이다. 케이팝 아이돌들의 화려한 메이크업과 현란한 조명은 혹시 드러날지 모르는 굴곡을 감추는 역할을 남몰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감정은 가라앉기 마련이다. 설령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격렬했다 해도 반드시 그렇다. 싫어하던 노래를 부르던 중에 즐거운 추억이 생기기도 한다. 기억은 뒤섞이면서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낸다. 날것이던 감상은 무뎌지고 희미해진다. 뜨거울 만치 처절하던 열정도 냉정하게 식는다. 이 변화는 눈에 띈다. 음악에는 피로될 때마다 음악가의 컨디션과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대마다 달라지는 변화는 원인과 결과로 판단할 수 없다. 그저 시간이다. 변화는 시간의 본질이다. 나는 가끔 시간이 음악 속에, 문장 속에 녹아드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음악가는 일단 발표한 노래라도 계속 연습할 수 있다. 음악은 앨범에서 한 차례, 그리고 무대에서 여러 차례 피로되는 덕분이다. 레코드는 고정되어 있을지언정 음악 자체는 무대를 거칠 때마다 진화한다. 그렇게 음악이 또 음악가가 성장하는 과정은 심지어 멋지기까지 하다. 무대에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소설 쓰는 나에게 성장 과정이란 그만큼 멋지지 않다. 나의 성장도 소설의 성장도. 아니, 멋지지 않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때론 추하기까지 하다. 유튜브의 ‘소설 쓰는 브이로그’들이 나에게는 아연하다.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렇게 추해지면서 써내어 발표한 소설이 멋진 완성본이라면 좋으련만. 멋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완성본’이라면 좋으련만. 탈고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나의 소설이 결코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노엘 갤러거가 부러웠다. 노래 또한 완성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음악가는 인생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탈고를 거듭하는 과정을 무대를 통해 보여줄 수 있다. 청자들과 실시간으로 교감하며 함께 작품 자체를 성장시킬 수 있다. 잦은 피로가 주는 커다란 이점이다.
소설 역시 피로된다.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이 그렇다. 하지만 역시 소설의 첫 독자는 소설가 자신이다. 비슷한 점이 있긴 해도 음악에 비할 때 소설의 첫 피로는 내밀하다. 발표 전의 소설을 주변인들에게 널리 읽게 하는 소설가가 과연 있긴 할지 모르겠다. 굳이 꼽아 본다면 발표 전의 소설은 소설가인 나에게 피로되고 편집자에게 피로되고 때로는 또 다른 편집자에게 피로하는 데 그친다. 교류가 있긴 해도 음악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일 대 일에 가깝기 때문에 덜 부끄러워서 좋은 점도 있긴 하다.
일단 발표되고 나면 소설가에게는 수정의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뒤늦게 오류를 발견하거나 신경 쓰여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맘에 들지 않는 문장이 나타나도 어쩔 수 없다. 아니면 소설에 담긴 생각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소설가 개인의 멘탈에 따라서 이건 대재앙이 될 수도 있다. 가수라면 콘서트에서 편곡 버전으로만 노래해도 될 텐데 소설가에게는 그와 상응하는 방법이 없다.
혹 북 토크 같은 기회를 통해 소설에 대해 부연할 기회를 얻는 운 좋은 작가도 있다. 한데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명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소설가는 없을 듯하다. 굳이 발표한 내용을 뒤집거나 그에 부언을 붙이는 건 자존심 상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소설가도 사람인지라 내 소설에 대한 공격이 들어오면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면 그렇게 방어 태세로 지켜낸 내 소설을 나는 좋아하는가. 독자분들께 정말 죄송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위에도 썼듯이 내 소설이란 모조리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좋아하기에 소설은 나보다 너무 큰 존재이다.
아니다. 솔직해지자. 소설가는 음악가와 달리 도망칠 수 있다. 북 토크나 낭독회를 진행한다 해도 소설 전체를 다시 피로할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굳이 자신의 소설을 다시 펼쳐 읽을 필요가 없다. 드문 피로가 주는 장점 아닌 장점이다.
소설이 음악보다 덜 피로되는 이유라면 일단 시간상의 문제가 가장 클 듯하다. 가요 기준 요즘 러닝타임은 삼사 분. 청자가 음악에 집중하든 안 하든 그 시간이 지나면 음악은 끝나 있다. 소설은 다르다. 어쨌든 문자 위로 눈알을 움직여야 하고 뜻을 해독해야 한다. 제아무리 난해한 음악이라도 그 시간이 지나면 끝나기 마련이지만 난해한 소설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다음 단락, 다음 문장, 심지어는 다음 단어로도 넘어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수록 의지에 불타는 독자도 있겠으나 책을 덮어버리는 독자도 많을 터다. 실물 음반 시장이 침체된 요즘, 음악은 물리적 형체를 벗고 자유롭게 어디든 날아다닌다. 일시정지했던 음악도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다시 들을 수 있다. 반면 소설은 아직까지 이북보다 실물 책이 대세인 모양이다. 읽다 덮은 책을 다시 펼치기 싫어하는 마음은 나도 잘 안다. 묵직한 책의 존재감은 어딘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바쁜 시대라 그렇다. 단편소설이라도 공들여 읽다 보면 한 시간이 지나 있기도 한다. 최근에는 짧은 소설을 쓰려는 움직임도 있다. 고백하자면 나도 짧은 소설 쓰기를 시도해 봤다. 처음에는 성격 급한 내게 제격으로 보였다. 결론은 실패였다. 짧은 소설을 쓰기에 나는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시간말고도 소설에는 언어라는 제한도 있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다는 몇몇 노래 가사들이 좀 얄밉다. 음악도 화성과 박자를 알아야 즐길 수 있는 영역이 있긴 하지만 언어의 제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가령 아랍어로 쓰인 소설은 내게 소설이라기보다 멋진 조형물에 가깝다. 애초에 문자 언어는 오랜 기간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해 오지 않았던가. 문자 언어를 무기로 삼은 소설가가 피로 무대가 적다고 해서 불평할 처지는 못 되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소설가가 된 것이 억울해진다. 소설은 21세기와 맞지 않는가. 나는 21세기와 맞지 않는 인간상인가. 스멀스멀 자괴감도 밀려온다.
소설에는 소설 나름의 장점이 있다. 음악이 ‘악흥의 순간’에 집중할 때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하나의 장소로 고정될 수 있지만 시간적 배경은 다르다. 소설 속에서 시간은 반드시 흘러가야 한다. 시간이란 변화다. 소설 한 편은 사랑에 빠지고 배신을 당하고 이별을 한 후에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그다음 순간 격렬한 증오에 타오르는 마음의 변화를 그려낼 수 있다. 놀랍게도 일견 모순되는 모든 입체적 순간마다 인간은 공감할 수 있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짧은 순간순간 소설 속 인물과 공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그 공명의 순간마다 피로될지도 모르겠다. 요즘 같은 무더위라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탓에 끝내 유죄 판결을 받은 한 남자를 떠올리기 적당할 듯하다. 아니면 장마 동안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사돈의 이야기라든지, 이탈리아의 푸른 하늘 아래 낯선 손님과 만나 사랑을 시작한 소년의 이야기라든지.
나는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해진다. 그래서 소설에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에 대해 썼다. 덕분에 누군가는 어스름의 그 순간 분홍 구름을 발견하고 내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속 꼭짓점이 몽골몽골 둥글게 깎여 동그래지는 기분이다. 한편으로 손발이 오그라들면서 어디든 숨을 구멍을 찾고 싶어지기도 한다. 멋지려면 이런 순간을 견디어야 할 텐데 나는 자신이 없다. 멋지지 않은 것은 소설 쓰기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거슬러 올라가면 문장 짓기가 멋지던 시대도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조상들은 유명한 시를 외거나 이러저러한 제한을 두고 문장 짓기를 겨루며 여흥을 즐기지 않았던가. 소설가로서 그런 문화가 끝말잇기나 삼행시 수준에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아쉽다(나에게는 즉흥적으로 문장 짓는 소질이 없음에도).
멋이 있든 없든 나는 나의 할일을 할 뿐이다. 문장을 그러모아 소설을 쓴다. 모든 문장이 소설 속에 잘 녹아들었으면 좋겠다. 따로 두었을 때도 하나하나의 문장이 모조리 멋졌으면 좋겠다. 번역가를 고심하게 하는 문장을 쓰고 싶다. 인공지능이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단어와 문장을 발굴하고 싶다. 잠깐 망설인 기술이 곧 나의 문장을 따라잡게 되더라도. 따라잡힌 그만큼 소설이 더 커졌다고 믿으면서.
맞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상징과 의미를 찾아낼 때마다 소설은 피로의 기회를 널리 얻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변화하더라도 새롭게 의미를 찾아가며 새롭게 피로되는 것이 좋은 소설일지도 모른다. 이에 따르자면 좋은 소설이란 결코 완성되지 않아야 한다. 읽힐 때마다 새로워진다니 그걸 과연 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소설을 완성해야 하지만 결코 완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완전히 오리무중이라면 좋을 텐데 가끔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깨달은 듯한 그 순간, 나는 다시 깨달음에서 멀어져 있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런 나는 멋지지 않다. 소설 쓰기는 멋지지 않다. 아직 소설 쓰는 나를 좋아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쓰는 소설을 좋아할 준비도 되지 않았다. 역시 뭔가 억울하다. 소설가인 나에게도 뭔가 멋진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노엘 갤러거에게도 음악 자체에서 기인한 남모를 고민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너무 잦은 피로 때문에 나 같은 소설가를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걔네는 한번 쓰면 끝이잖아? 똑같은 노래를 나처럼 지겹게 반복할 필요도 없고 말야.” 내가 읽지 못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민하는 록스타는 내 상상보다 훨씬 멋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런 상상을 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소설을 계속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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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서경석(문학평론가, 전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자연의 질서와 공동체의 관습, 그리고 어민으로서의 노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향’인 것이다. 그러니까 떠날 수 없는 세대와, 어떡해서든 떠나야 하는 세대가 완충 세대 없이 맞붙어 버린 경우인데, 하긴, 험한 바다 일은 죽어도 물려주지 않겠
- 관리자
- 2025-06-01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 시인/전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파문과 파도와 파장으로 기록되는 무늬. 무늬를 밀고 가는 저녁 공기와 그것을 완성하는 밤의 지문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기원이기 때문이다. 2.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04)에서 자신의 어두운 밀실을
- 관리자
- 2025-05-01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차별 구성 -1차: 책장 업고 튀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일 시: 2024년 12월 7일(토) 17:30~19:30 ㅇ 장 소: 온라인 zoom ㅇ 참여자 -사회자: 김준현(소설가, 목포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참여자: 이지용(단국대학교 HUSS사업단 연구교수), 이명현(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염승숙(소설가, 문학평론가), 이어진(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웹문예학과 객원교수, 웹소설 작가 레고 밟았어) 〈개회〉 김준현: 반갑습니다. 사회를 맡은 국립목포대학교 김준현입니다. 먼저 이번 좌담의 기획 의도를 다시 짚어 보는 것을 통해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래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는 제도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다양한 ‘콘텐츠’, ‘웹’, ‘크리에이티브’ 관련 전공들이 두 학과 제도를 대체하고 있다. 반대로 전통적인 ‘문학 산실’인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는 점점 다른 교육 체계로 변화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시대, 교육 현장에서 교강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이러한 체제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본다.” 기획 의도는 이러하고, 이러한 의도를 참가자 선생님들과 공유하며 먼저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맥락에서 제 소개를 드리면, 올해 4월부터 국립목포대학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제 전 직장은 서울사이버대학교 웹문예창작학과였고요. 이 기획 의도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야말로 학과의 이름에 ‘웹’이 들어가는 학과였습니다. 제가 올해 4월부터 일하게 된 국립목포대학교도 아마 국립대 최초로 문예창작에 웹소설, 웹문예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고 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문예창작학과 학과장으로 3년 정도 있었고요.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이지만, 웹소설 특화를 표방한 학과에서 두 학기 정도 일한 셈입니다. 4년 정도를 소위 말해 ‘전통적인 문예 창작 교육’이 아닌 새로운 문예 창작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요. 웹소설 작가이기도 하고, 데뷔는 2012년에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가 사회를 맡게 됐고, 패널로 초대받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반갑다는 말씀드립니다.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화면에 떠 있는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들마다 화면이 다를 텐데, 제 화면으로 보기에 제일 위에 떠 계신 분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명현 선생님이십니다. 이명현 선생님 자기소개를 한번 받아 보겠습니다. 이명현: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과 문화콘텐츠를 가르치고 있는 이명현입니다.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2016년부터 근무했고,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면서 고전문학
- 관리자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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