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보는 미래 SF
- 작성일 2024-10-01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142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소일렌트 그린>>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소일렌트 그린>>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소일렌트 그린>>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로 부각되는 것뿐이지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인구 감소를 걱정하며 초고령화 사회가 일으키는 변화에 시달리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요즘 시대에 누군가 “인구 문제”라고 하면 <<소일렌트 그린>> 시대처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식량 부족으로 세상이 망한다는 상황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지금 “인구 문제”라고 하면 정반대로 청년 인구, 어린 인구의 부족을 말한다. <<소일렌트 그린>>이 예상했던 미래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나는 SF 영화를 통해 미래의 위험을 경고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SF는 그 소재로 미래에 대한 상상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래에 걱정되는 사실을 포착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제법 많기는 하다. 작가에 따라서는 자신이 지금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이렇게 망할 거다, 라고 강조하고자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일렌트 그린>>의 제작진 중 일부는 아마 1970년대에 인구가 너무 빨리 늘어나고 있는 것이 걱정이며 거기에 관심을 갖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SF물을 보다 보면, SF의 틀 속에서 자신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드러내고자 하는 사례가 자주 보인다. 작가가 혼자서 쓰는 SF보다는 여러 제작진이 참여하는 SF 영화 혹은 출판사나 기관에서 기획하는 주제별 SF 단편집, 소재별 SF 앤솔로지에서도 이런 경향은 자주 보인다는 느낌도 받는다. 아마도 이렇게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은 대목이 있으면 같은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사업을 진행시키거나 투자를 받기가 쉬워서 그런 것 아닐까? 정치인이나 사상가 같은 사람이 “내가 하자는 대로 안 하면 나라 망한다. 어떻게 되냐면……”이라고 말하기 위해 자기 말을 안 들은 미래를 표현하는 SF를 추천할 때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이런 방향의 SF물은 일정한 불변의 수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좀 이상한 이야기이기는 한데,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망하는 이야기”, “온 세상이 비참한 재난으로 불행해지는 이야기”를 일부러 보고 싶어 한다. SF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것도 있다. 나는 전공이 환경안전공학이기 때문에 가끔 기후 변화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강연 행사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런 행사에 가보면, 청중 중에 “오늘 저 사람은 강연회에서 얼마나 기후 변화로 우리 세상이 빨리 비참하게 망하는지 이야기해 줄까? 기대된다.”라는 태도를 갖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볼 때가 종종 있다. “정말 오늘은 무시무시한 피해가 발생해서 세상이 기후 변화로 곧 다 끝장난다는 이야기를 아주 우울하고 섬뜩하고 끔찍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묘하게 바라는 사람들을 나는 여러 번 만났다.
그런 생각으로만 본다면, <<소일렌트 그린>> 같은 영화는 한결 힘이 빠진 영화다. 1970년대에 2022년을 예상했기에 이미 지난 시대를 보고 있는 SF이며 그렇기에 더 이상 미래를 예상하고 경고하는 기능은 약하다고 볼 만하기 때문이다. 이미 <<소일렌트 그린>>에서 예상한 미래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은 더 이상 “손재수가 들 거다.”라고 경고하는 점쟁이나 “여기에 투자 안 하시면 바보다.”라고 떠드는 펀드매니저처럼 미래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는 가치 없는 SF가 되는 것일까? 무의미한 헛소리를 주워 삼기는 내용이라고 무시할 만한 SF가 되나?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
우선 SF는 거기서 다루고 있는 예상이 현실에서 얼마나 잘 맞든, 안 맞든 그 이야기 속 세상을 가정하고 벌어지는 사건들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시리즈에 나오는 환상의 마법 세계가 현실에 없으며 미래에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도 그 소설 속에서 그런 세상이 있다 치고 이야기를 펼쳐 보이면, 우리는 그 가정을 받아들인 뒤에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즐기고 그 내용에 감동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록 <<소일렌트 그린>> 속, 인구가 너무 많아서 세상이 망한 2022년이 실제 세상으로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영화 속 세상에서는 일종의 환상 속 세상으로 그런 세상이 생겼다고 치고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영화나 소설은 펀드매니저의 분석 보고서와는 달리 미래의 주식 시세를 예측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 내용의 모든 부분이 가치가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현실 세계와는 달라졌다고 해도, 이야기 속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의 곡절과 그 곡절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들만으로 사람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내가 옛날 SF를 좋아하는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옛날 SF가 미래를 정확히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SF의 재미나 가치가 줄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종종 나는 그 덕택에 그 SF의 가치가 더 늘어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틀린 SF라서 도리어 더 볼 만해지는 점이 있다는 이야기다. <<소일렌트 그린>>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협력해 영화를 만들었고 개봉 당시에 영화가 예측하는 미래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던 관객들이 많았던 경우에는 그 색다른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소일렌트 그린>>처럼 틀린 SF를 통해서 지금과는 아주 달랐던 옛 세대들의 사고방식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명확히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미래가 망하는 암울한 경고를 다룬 SF만 가질 수 있는 특징도 아니다. 미래를 밝고 긍정적으로 예상한 SF에서도 우리는 과거의 기대와 희망을 엿볼 수 있다.
1990년대에 나온 한국 SF 소설들을 보다 보면, 그중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그 첫머리에 “200X년 통일 한국 정부는 뭘 어쩌기로 시작했다.”는 말이 나온다.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10년쯤 지나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거니 하는 상상을 품었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2020년이 되면 어린이도 우주선에 몰래 숨어들어 머나먼 우주 저편의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꿈꾸었던 <<2020 우주의 원더키디>>에는 우주 탐사 기술의 빠른 발전에 대한 꿈이 담겨 있다. 1999년이 되면 지구에 충돌할 소행성이 날아오지만 우주선을 보내서 핵폭발을 시켜 막아내는 내용을 다룬 1998년에 개봉된 영화들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정신 차리고 시급한 문제를 풀기 위해 다 같이 힘을 모으면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의 멸망조차도 막아낼 수 있다는 꿈이 담겨 있다.
하나 더 이야기해 보자면, 이런 미래를 말하는 옛이야기들을 볼 때, 우리는 우리 생각이 과거에 어떻게 틀렸는지 알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무엇을 잘못 예상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상상이 틀렸는지, 어떤 걱정은 지나치게 많이 했고 어떤 기대는 지나치게 적게 했기 때문에 미래를 잘못 예상했는지 되짚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과거의 SF를 보며 고민해 보는 일은 틀린 문제를 오답노트에 정리하며 우리가 왜 틀렸는지 고민해 보는 일과도 비슷하다. 답안지를 제출해 두고 막연히 잘 찍었거니 상상하는 일보다야 어쩌면 틀린 답을 살펴보며 되돌아보는 일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부정적인 미래를 훨씬 자주 이야기 속에 풀어 놓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본능적인 부정성 편향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좋으므로 쉽게 눈길을 끌 수 있다는 이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다못해 SF 영화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밝은 미래 세계를 표현하는 것보다 세상이 다 망해서 황무지로 변해버린 미래를 표현하는 것이 제작비도 더 적게 든다.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행복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생각해 내는 일이 불행한 미래보다 더 어렵다는 문제를 지적해 볼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밝고 행복한 이상적인 미래가 올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런 걸 잘 알 수 있다면, 이미 내가 그렇게 살고 있겠지. 뿐만 아니라 과거의 내가 이미 그렇게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나는 밝고 행복한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다.
밝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 자유, 평등, 복지, 평화 온갖 일들이 다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에 비해 세상이 엉망으로 망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조건만 무너지면 충분하다. 지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잘살고 있는 와중에 어디에서인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전염성 바이러스 하나만 유행하면 세상은 멸망으로 치닫는다. 전쟁도 없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윤택한 세상이라고 해도 어느 날 하늘에서 소행성이 떨어져 지구를 들이받는다면 그것으로 미래는 암울해진다.
여기에 더해서, 요즘 진지하게 문학을 평한다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째 암울하고 쓸쓸한 내용을 다루어야 진지하고 심각한 내용이라고 여기는 경향도 있다. 이러니 세상이 망한 이야기는 더 많이 만들어진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생각할 때 암울한 이야기들을 많이 보는 이유는 실제로 미래가 암울하기만 하다기보다도 이런 이유 때문에 그냥 암울한 이야기 쪽으로 쏠린 결과일 수 있다.
다른 방향에서 옛 SF를 보면, 지금 현재가 과거의 미래 걱정이 낳은 결과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전 세계의 선진국들이 저마다 골치 아픈 인구 문제에 접어든 이유 중 하나는 그만큼 과거에 <<소일렌트 그린>>처럼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너무 걱정했기 때문이다. 인구가 느는 것이 문제다, 문제다, 문제다, 라고 19세기 맬서스의 시대부터 1970년대 할리우드 SF 영화의 시대까지 줄곧 이야기하다 보니, 그에 대한 경계심 탓에 반대로 인구가 뒤집히는 것은 간과해 버렸다.
나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포스터로 만들어져서 전국 각지에 붙어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지금 한국에 나타나는 극도로 적은 신생아 출생 숫자는, “남녀 두 명이 하나만 낳아 기르자”는 그 시절의 정책이 그냥 실현된 것인 셈이다. 국민들은 정부 당국에서 30년 전 사람을 들볶으며 시킨 대로 잘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게 과거에서 미래를 보고 대응한 방식을 돌아보면, 정부 당국은 지금 국민들이 아기를 낳지 않아 걱정이라며 비판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과거의 정책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먼저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옛 SF에서 그려내는 미래 속에 그 옛 시대의 문화가 반영된 결과로 나타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1970년대 작가들이 2020년대를 예상한 SF 속에는 1970년대 취향과 유행을 따라 만들어 놓은 모습이 있으면서도 1970년대 유행 그대로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던 미래의 다른 시대 유행이 담겨 있다. 그 모습은 1970년대 같지도 않고, 2020년대 같지도 않으면서도, 환상 속의 세계도 아닌 것이 그럴 듯한 현실의 예상이고 싶어 했던 묘한 모습이 된다. 이 또한 예술이 나온 시대와 그 시대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노력이 뒤섞여 탄생하는 신선함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우리에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감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추천 콘텐츠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에세이] 불행한 사람이 살고 있다 유진목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이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석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기로 적은 산발적인 산문을 정리하던 중에 어렴풋이 ‘불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불행은 나일까? 곧장 미간이 찌푸려졌다. 글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나는 짐짓 모른 척했다. 수기는 간결하고 가슴 아팠다. 타인의 이야기였다면 거기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나는 정말로 불행하구나.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에 순응했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마침표. 쓰는 행위는 시간을 보내는 고통스러운 방법 중 하나다. 글을 쓸 때면 자꾸만 손목시계의 초침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모든 것을 흘려보낼 수 있으면서도 글을 쓴다. 심지어 그것을 타인에게 공개한다. 그 역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다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벌인 일로부터 태연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온갖 괴로운 일들을 책에 쓰고서 태연하게 살아간다.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한다. 나는 쓰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잊는다. 오로지 살기 위해 고통을 기억에서 지우듯이 그렇게 한다. 한때 내 전부였던 것들을 잊으려고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잊고 난 후에 무엇이 찾아올지 알고 싶어서 쓰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시간을 온통 글을 쓰는데 쓰다가 느닷없이 나타나는 무엇과 맞닥뜨리고 싶다. 이 글은 바로 그때 끝날 것이다. 나는 내심 그때를 기대한다.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 알맞은 때를 기다린다. 나는 내가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짧게 잘라버린 머리카락을 보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원래 모양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거울을 보며 자기혐오에 빠질 나를 생각하며 진저리를 친다. 불행에도 기쁨에도 공평하게 무감해지는 대신 불안을 적극적으로 견뎌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짐작과 가늠으로는 판단해 볼 수 없는 영역에 나의 불안이 있다. 지난 가을에는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11월의 후쿠오카는 여름의 끝자락 같아서 챙겨간 가을 니트들은 모두 캐리어에 넣어 둔 채로 반팔 티셔츠를 사서 입고 발이 퉁퉁 부을 때까지 돌아다녔다.(나는 항상 여행 옷을 챙기는 데 실패한다.) 9월에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이혼을 확정 받았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짧은 질의에 대답하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에게 손을 높이 들어 인사했다. 그날 밤에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 소리 내 울었다. 10월은 어떻게 보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11월이 되자 후쿠오카에 가고 싶었다. 남편과의 좋은 추억들이 있는 곳이었다. 도무지 혼자 갈 엄두가 나지
- 관리자
- 2024-09-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