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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의 삶에 대한 운명적 긍정과 수용

  • 작성일 2005-06-09
  • 조회수 3,309

 

유성호(문학평론가? 한국교원대 교수)


1. 민중적 자기 긍정의 세계


우리 현대시사에서 신경림(申庚林)은 소외된 민중들의 삶을 따뜻하고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형상화함으로써, 그들의 삶과 인식 그리고 생활적 실감을 가장 핍진하게 보여준 대표적 시인이다. 특히 그가 펴낸 첫 시집 『농무(農舞)』(1973)는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는 농민들의 삶의 세목을 집약적으로 담아냄으로써 한국 시의 사회적 상상력을 한 차원 높인 기념비적 세계로 평가받고 있다. 그 안에는 허물어져가는 우리나라 농촌의 생활적 세부가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고, 그것이 시인의 서사 지향성과 일정하게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사실적 우화(寓話)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두 번째 시집 『새재』(1979)는 그가 일생을 다해 추구한 ‘현대시’와 ‘민중성’의 결합을 민요적 가락에 실어 형상화한 초기 작품집이다. 그 안에 실려 있는 「목계장터」는 그의 이 같은 초기 시세계를 대표하는 명편(名篇)이라 할 것인데, 그만큼 이 시편에는 신경림 초기시가 추구했던 주제와 가락이 전형적으로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1971년 《창작과 비평》에 처음 실렸던 이 작품은, 그 외관만 보아도 민요에 바탕을 둔 전통적 가락과 민중들의 생동하는 정서가 진하게 묻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한강변의 ‘목계(牧溪)’라는 실제 지역에서, 지금은 사라진 장터의 활달한 모습과 거기서 끈질기고도 고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이 시편은 한 시대의 사실적 풍경으로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의 삶과 정서를 기억하고 해석하는 시인의 시적 안목은 매우 우호적인데, 그만큼 이 작품은 떠돌이의 삶에 대한 민중적 자기 긍정의 세계에 도달하고 있는 시편이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 같은 「목계장터」의 세계를 꼼꼼하고도 정확하게 읽고자 하는 하나의 시론(試論)이다.



2. ‘방랑’과 ‘정착’ 사이 혹은 ‘방랑’의 연속


최근 각급 학교 국어 교과서나 문학 교과서에는 신경림의 시편들이 상당수 실려 있다. 그 가운데 「목계장터」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의 단골 메뉴다. 그래서 정상적인 중등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신경림의 「목계장터」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목계장터」를 학생들에게 정확하고도 풍부하게 경험시켜야 할 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으로부터 나는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다. 작품을 가르치는 데서 생겨난 의문점을 담은 질문이었다. 앞뒤 부분을 조금 자르고 그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보통 참고서에서는 방랑의 이미지로서 ‘구름’과 ‘바람’을, 정착의 이미지로서 ‘들꽃’과 ‘잔돌’을 언급하면서 이 시를 “한곳에 정착하여 살고 싶지만 떠돌 수밖에 없는 뿌리 뽑힌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방랑의 이미지만 제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꽃’과 ‘잔돌’을 정착으로 보면 시의 구조가 다 망가진다고 보입니다. 1행?7행까지의 떠남, 8행?14행까지의 잠시 동안의 머묾(떠돌이가 장터 주막에 머무는 것은 일시적이지 정착이 아님). 15?16행에서 결론적으로 떠돌이 의식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요. 참고서의 경우는 대개 “1?7행 : 방랑(떠나는 삶), 8?11행 : 정착(머무르는 삶), 12?14행 : 떠나는 삶, 15?16행 : 떠나고 머무르는 삶”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시의 대구 구조(1?7행, 8?14행) 자체를 무시하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참고서를 보더라도 천편일률적으로 ‘정착’의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나는 이 진지한 질문 앞에서, 익숙하기 짝이 없는 이 시편을 새삼 해석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느냐고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만큼 이 작품의 메시지는 매우 투명하였고, 가락은 명료했으며, 대개 한두 줄로 요약하게 마련인 주제 확정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신중하게 시 전편을 꼼꼼히 뜯어본 결과, 위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작품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난 후 나는 이러한 답신을 그 선생님께 보내드렸다.


선생님 편지를 받기 전까지 저는 「목계장터」가 ‘정착’과 ‘유랑’ 사이의 갈등을 다루었다고 해석되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이 같은 해석이 보편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더군요.


‘구름’과 ‘바람’은 떠남(떠돌이)의 이미지이며 ‘들꽃’과 ‘잔돌’은 정착의 이미지다. 그리고 이 심상 사이에서 방물장수와 떠돌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민중들과 시인 자신의 운명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떠남과 정착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의미망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구름과 잔바람, 방물장수, 떠돌이로 표상된 ‘유랑’의 이미지와 들꽃과 잔돌로 표상된 ‘정착’의 이미지는 이 시의 주제 의식을 이루는 두 축이 된다.


물론 일리가 있겠습니다만, 이 작품은 ‘장터’가 갖는 떠돌이성 혹은 유랑성(아마 김동리의 단편 「역마(驛馬)」도 장터가 배경이었지요! 이효석의 유명한 단편 「메밀꽃 필 무렵」도 역시……)의 의미만 존재한다고 생각됩니다.

그 근거는 대략 이러합니다. 먼저 시의 구조를 볼까요? 이 작품은 치밀한 대구(對句)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행 : 하늘 - 구름

2행 : 땅 - 바람

3?4행 : 청룡 흑룡(1행의 ‘하늘’) - 비 개인(‘구름’), 잡초(2행의 ‘땅’) - 잔바람(‘바람’)

5?7행 : 방물장수

8행 : 산 - 들꽃

9행 : 강 - 잔돌

10?11행 : 산서리(9행의 ‘산’) - 얼굴 묻고(‘들꽃’), 물여울(10행의 ‘강’) - 붙으라네(‘잔돌’)

12?14행 : 떠돌이


이렇게 정확하게 대구가 이루어집니다. 1?7행과 8?14행 사이의 대구는 물론 1?2행과 3행, 그리고 5?7행, 8?9행과 10?11행, 그리고 12?14행도 고스란히 구조적으로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니 시인의 전언은 그대로 ‘방물장수’와 ‘떠돌이’로 수렴(收斂)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름(1행)’과 ‘바람(2행)’이 ‘방물장수(7행)’의 유랑성을 상징하듯이, ‘들꽃(8행)’과 ‘잔돌(9행)’도 ‘떠돌이(14행)’의 어떤 속성으로 수렴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게 시의 구조를 올바로 읽은 것이 됩니다.

마지막 두 행은 다시 순환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1행의 ‘하늘’과 8행의 ‘산’이 다시 나오면서, 각각 ‘바람’과 ‘잔돌’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원래는 ‘하늘’과 ‘산’은 각각 ‘구름’과 ‘들꽃’을 불렀던가요? 상관없습니다. 의미론적으로 모두 등가물들이니까요. 그러니 ‘구름-바람-방물장수/들꽃-잔돌-떠돌이’들은 ‘하늘-땅/산-강’, 그야말로 ‘천지산하(天地山河)’가 명명하는 버려진 존재들의 심상들입니다.


두 번째는 시의 내용적 측면입니다. 여기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는 ‘되라네(되라 하고, 되라 하네)’의 보어(補語) 역할을 하는 단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행 : 구름

2행 : 바람

3?4행 : 잔바람

5?7행 : 방물장수

8행 : 들꽃

9행 : 잔돌

10?11행 : (여기서 일종의 파격으로서) ‘되라네’가 아니고 ‘묻고/붙으라네’라는 다른 동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묻고 붙는 속성은 ‘맵차고/모진’에서 살아남는 떠돌이들의 속성을 상징합니다. 사실 ‘묻고/붙는’ 것은 숨는 것이요 도피하는 것이지만, 떠돌이들로서는 질긴 세상살이에서 살아남는 민중적 서바이벌의 지혜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것이 시인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12?14행 : 떠돌이


‘방물장수’와 ‘떠돌이’는 여기서도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3행의 “목계 나루”와 12행의 “토방 툇마루”, 4행의 “아흐레 나흘 찾아”와 13행의 “석삼년에 한 이레쯤”, 5행의 “가을볕도 서러운”과 14행의 “짐부리고 앉아 쉬는”이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그러니 ‘나루’와 ‘토방’, ‘서러운’과 ‘쉬는’은 각각 동일한 의미망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결국 이 시편의 주제는 ‘방랑과 정착 사이의 갈등’이라기보다는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신산한 삶, 그리고 그것의 운명적 수용’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이상입니다!!!


이렇게 메일을 띄우고 나니 그 선생님은 자신의 의문이 풀렸다고 곧 반가운 답신을 보내오셨다. 나는 그분 덕택에 「목계장터」라는 완결성 높은 시편을 꼼꼼히 해석해보는 망외의 즐거움을 누린 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한 번 찬찬히 시의 내용을 들여다보니까, 그것이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내용 단락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개관(槪觀)해보자.


제1단락(1?4행)은 시인이 유랑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드러낸다. 이때 ‘구름’과 ‘바람’은 시인이 삶에 대해 갖는 유랑 혹은 자유의 의지를 뜻하며,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는 그곳에 전해져오는 ‘용(龍)’의 전설에서 취재한 표현일 것이다. 제2단락(5?7행)은 방물장수의 떠돌이 삶을 노래하는데, ‘아흐레 나흘’은 목계장이 서는 9일과 4일을 말하는 것일 터이며,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에서는 가을볕마저도 서럽게 느껴야 하는 비애가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제3단락(8?11행)은 떠도는 과정에서의 비애와 생존의식을 드러내며, 제4단락(12?14행)은 삶에 대한 깊은 애환을 보여준다. “산서리 맵차”고 “물여울 모진” 시련을 피해 안식을 얻고 싶지만 떠돌이로서의 삶은 그 같은 유예와 도피를 허락지 않는다. 마지막 제5단락(15?16행)에서는 그러한 운명을 궁극적으로 수긍하면서 시를 맺고 있다.


이러한 독해 결과를 스스로 추스르고 나서, 이 시편에 대해 선학(先學)들이 내놓은 의견들을 여기저기서 눈여겨볼 기회가 있었다. 먼저 한계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 시편을 읽고 있다.

 

퇴색해가는 목계 나루에서 방랑과 정착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이 시대의 민중들과 시적 화자의 갈등을 이 시는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 이 시의 화자는 일정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삶의 현장 이곳저곳을 떠도는 나그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나그네는 가진 것 없고, 그래서 항상 짓눌려 살아가는 민중의 표상이다. 이 작품에서는 하늘 땅 산 강과 같은 자연의 풍경들이 의인화된 주체로서 등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화자에게 바람 방물장수 들꽃 잔돌 떠돌이가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이런 표현을 구사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 시의 화자의 억눌린 삶의 애환을 한층 더 강렬하게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다.(『한계전의 명시 읽기』, 문학동네, 2004, 302?303면.)


매우 온당한 관점이자 해석이라 여겼다. 하지만 한교수는 ‘방랑’과 ‘정착’이라는 기왕의 키워드를 전제함으로써, 시 안에서 방랑성의 지속보다는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민중들의 애환을 강조하고 있다.


유종호 교수는 최근의 저서에서 「목계장터」를 해석하고 있는데, 화자를 목계 나루를 들락거리는 떠돌이로 보고, 이 시를 그가 보여주는 떠돌이 충동의 표현으로 읽음으로써, 한결 작품의 사실적 세부에 가 닿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시편을 이해하는 데 유력하게 참고할 수 있는 사실들을 풍부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가령 ‘박가분(朴家紛)’이 고유명사로서 한 시절 널리 쓰였던 분(紛)의 상표였다는 것, “용 가는 데 구름 간다”는 옛 믿음과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가 의미상 연결되고 있다는 것, 서울까지 왕래하는 뱃길 상인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점을 들어 “서울 사흘”을 풀어야 한다는 것 등은 시편의 세목 해석에 대한 유력한 시사를 제공한다.


「목계장터」의 화자는 결코 한량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길과 소롯길이 인간 영혼으로부터 사라져버리고 인간이 제 발로 걷기를 즐기지 않게 된” 현대에 사는 사람들의 역상(逆像)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민요 속의 게으른 주인공이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방랑자와 동류이다. 성장의 신화에 견인되어 한사코 달려오기만 하였던 세대들에게 「목계장터」는 단순한 표박 충동의 표출임을 넘어서 해방과 휴식의 호소로도 읽힌다.(『시 읽기의 방법』, 삶과 꿈, 2005, 197면.)


말하자면 이 시편은 떠돌이들의 삶에 대하여, 한 시절 쉬었다 가자는 비애어린 권유와 호소를 기저(基底)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이면적 전언을 읽어내는 안목이 여기서 다시 한 번 돌올(突兀)하다.

결국 이 시는 ‘목계장터’를 중심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중들의 삶과 생명력을 노래하면서, ‘방랑’과 ‘정착’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방랑’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을 궁극적으로 긍정하고 승인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3. 시사적 연속성의 맥락


이러한 작품 해석과는 별도로 우리는 「목계장터」를 일정한 시사적 연속성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가령 다음에 제시되는 자료들은 소재나 어법, 그리고 화자 설정의 방법까지 「목계장터」와 매우 높은 친연성을 가진 시편들이다. 그것은 박목월의 「산이 날 에워싸고」, 김남주의 「노래」, 그리고 하덕규의 시를 양희은이 노래로 부른 「한계령」등이다.


산이 날 에워싸고/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아들 낳고 딸을 낳고/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산이 날 에워싸고/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꽃이 되자 하네 꽃이/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녹두꽃이 되자 하네//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아랫녘 윗녘에서 울어 예는/파랑새가 되자 하네//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불이 되자 하네 불이/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들불이 되자 하네//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다시 한 번 이 고을은/반란이 되자 하네/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김남주 「노래」


저 산은 내게/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저 산은 내게/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내 가슴을 쓸어내리네//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떠도는 바람처럼//저 산은 내게/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하덕규 「한계령」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자연 사물들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때 자연은 사람에게 때로는 가혹하게 명령하고 때로는 간곡하게 권면하고 때로는 따스하게 위로하고 있다. 가령 박목월의 시편에서 ‘산’은 화자에게 “씨나 뿌리고/밭이나 갈며/들찔레처럼/쑥대밭처럼/그믐달처럼” 살라고 권면한다. 자연에 순응하여 자족적인 삶을 살겠다는 화자의 의지가 그러한 어법을 통해 진하게 전달된다. 그런가 하면 1980년대의 저항시인 김남주는 ‘두메/산골/들판/고을’이 “녹두꽃이 되자/파랑새가 되자/들불이 되자/반란이 되자 하네/죽창이 되자”고 절규하는 형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물론 이것은 조용한 ‘권유’나 ‘위안’이 아니라 매우 격정적인 프로포즈다). 또한 「한계령」은 ‘산’이 화자에게 “울지 말고/잊어버리고/내려가라”는 조용한 낭만적 화해와 위안을 보내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물론 낭만적 목가(牧歌)로서의 서정시(박목월, 하덕규)와 한 시대의 첨예한 저항시(김남주)라는 창작 맥락의 차이를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자연 사물이 인간에게 명령하고 절규하고 속삭이고 권면하는 어법을 동일하게 갖고 있다. 이는 「목계장터」의 언술 방식이 시사적 맥락 속에서 탕진되지 않고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목계장터」의 이면적 전언은 신산한 떠돌이들의 삶을 긍정하면서도, 조금은 쉬었다 가자는 삶의 지혜를 권유하는 데 있을 것이다. 결국 「목계장터」는 197,80년대라는 한 시대를 거쳐 온 우리 모두에게 깊은 경험적 실감을 선사하고 있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집중성 있는 운율과 가락과 숨결로 보여주는 중요한 시편이다.《문장 웹진/2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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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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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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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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