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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쓰이기 전에 결정된다

  • 작성일 2005-08-23
  • 조회수 4,691

 

대담 정현종(시인)

진행?정리 이선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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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바슐라르에 대한 기억

시는 끊임없는 새로운 출발

시는, 손으로 쓰자


 

이선영 : 안녕하세요. 사이버 문학광장 <작가와 작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시인 정현종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님은 1939년 서울에서 출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올해 초 정년퇴임하였습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장한 그는 시집으로 『사물의 꿈』『나는 별아저씨』『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한 꽃송이』『세상의 나무들』, 시선집『고통의 祝祭』『달아 달아 밝은 달아』, 문학선집『거지와 광인』, 산문집『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시론집『숨과 꿈』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네루다 시선집, 로르카 시선집과 예이츠 시선, 프로스트 시선 등이 있습니다.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그리고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근황


이선영 : 안녕하세요. 요즘 한창 더울 때인데 특별히 더위를 피하는 방법이 있으신지요?


정현종 : 더위는 피하려고 한다기보다는 덥게 지내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본래 여름을 좋아합니다.

이선영 : 선생님께선 올해 초 오랫동안 몸담아 오신 학교를 떠나 오셨습니다. 먼저 오랫동안 하시던 일을 놓으신 심경과 그 후의 근황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정현종 : 홀가분하기도 합니다. 학교에 있을 때에는 시간표에 따라서 살았는데, 거기서 벗어나니 자유롭고 마음도 한가하고 좋습니다. 작업실을 마련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음악도 듣고 손님들도 맞이하고, 가끔씩 제자들도 찾아오곤 합니다.

 

이선영 : 선생님께서는 생업(生業)으로 문학을 가르치시면서 시를 쓴 행복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서보면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절로 생길 텐데요.

 

정현종 : 제자들이 있다는 것, 뛰어난 젊은이들, 재능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함께 공부하는 것이 학교에 있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행운아입니다.

이선영 : 얼마 전 우연히 선생님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시를 써오도록 하고 그 가운데 잘된 작품을 골라 낭송하게 하시는데, 그렇게 선생님에 의해 시가 뽑혀 낭송하게 된 학생은 후일 반드시 시인이 된다는 ‘징크스(?)’가 있다는 일화였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지요? 기형도나 성석제, 원재길, 나희덕 같은 시인들도 그런 일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었는지요?


정현종 : 학생의 작품이 텍스트가 되어 실질적인 지도를 한 것이지요. 학생들이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곤 하는데, 글쎄요, 작품이 읽힌 사람이 반드시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석제 씨는 법대생이면서 청강한 경우입니다. 성석제, 나희덕, 기형도 등은 시도 잘 쓰고 공부도 잘한 뛰어난 학생들이었습니다. 기형도 시를 제가 맨 처음에 읽어서 다른 학생들이 의기소침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선영 :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근작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고 쓰신 시가 있던데, 영화는 즐겨 보시는지요?

 

정현종 : 미국에 있을 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를 몇 편 보고 호감을 갖게 됐습니다. 〈피아니스트〉 역시 관심을 갖고 봤는데, 좋은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시가 나온 것 같습니다.


이선영 : 지금까지 지내 오시면서 결코 해보지 못했던 경험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예를 들면 저 같은 경우는 인라인 스케이트라든가 청룡열차 타기, 수상 스키, 그리고 히말라야 등반과 같이 몸을 혹사시키거나 몸의 균형을 깨뜨리거나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일은 할 용기도 없고 해보고 싶다는 열의나 욕망조차 없습니다. 또한 가난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 본 적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저 자신을 아주 가끔씩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정현종 : 몸의 혹사라고 느끼지 않으니까 그런 일들도 기꺼이 하는 것이겠지요.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을 뿐입니다.

 

시 세계

 

이선영 : 선생님 시에는 ‘술’이라는 시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술잔을 들며’라는 제목의 시도 두어 편 있고,

  

   숨 쉬는 법을 가르치는

   술잔 앞에서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서


   오늘도 나는 마시이느니

   여러 세계를 동시에 넘나드는 몸

   源泉 없는 메아리와도 같은 말

   政治 빼놓으면 참 걸리는 데 없어


   나는 마시느니 오오늘도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서

 

위와 같은 「술잔 앞에서」(『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1989)라는 시도 있습니다. 또 선생님의 초기 시에 속하는 「무지개 나라의 물방울」(『고통의 祝祭』, 1974)에 ‘자기의 色彩에 취해 물방울들은/戀愛와 無謀에 취해/알코홀에, 피의 速度에/어리석음과 時間에 취해 물방울들은/떠 있는 것인가’와 같은 시구에서처럼 ‘취하다’라는 시어 역시 ‘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 자신이 이런 디오니소스적 면모를 갖고 계시거나 혹은 추구하고 계신 것인지, 실제로 술자리를 즐기시거나 술을 즐겨 드시는지요?


정현종 : 좋아합니다. 술자리가 즐거워 많이 마셨고 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백(李白) 같은 시인도 있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자기 일은 그 일에 취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취해야 하는 것이고, 취한다는 것은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억지로 하는 일은 힘이 들지만 재능이 있고 좋아한다면 힘들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취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선영 : 술을 비롯해서 불, 물 이미지도 선생님 시에 많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바슐라르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슐라르와의 친연성, 혹은 관계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정현종 : 바슐라르를 처음 접한 것이 74년 아이오와 대학에 갔을 때 영역(英譯)된 것으로 『몽상의 시학』,『공간의 시학』 두 권을 구해 읽으면서입니다. 그 이후에는 영역된 것을 미국에 갈 때마다 다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곽광수 교수가 번역한 『공간의 시학』, 정영란의 번역인 『공기와 꿈』 두 권의 번역을 가장 좋아합니다. 2년 전에 나온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도 번역이 좋은 경우입니다.

영혼도 궁합이 맞는다고 한다면, 남녀의 사랑이 그렇듯이, 반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산문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은 바슐라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자로서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합리성을 뛰어넘는 시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생의 중반 이후에 시만 읽으면서 시에서 자기의 사상을 이끌어 낸 사람입니다. 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시적 이미지의 현상학’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살아 있는 산문으로 프랑스에서 시인 취급을 받습니다. 바슐라르는 시인들과 영혼이 통합니다. 소질이나 성향이 통해서 서로 이끌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선영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단 두 행으로 된 시 「섬」(『나는 별아저씨』, 1978)은 별다른 시적 장치가 없는 시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흡인력을 갖고 있으며 이 시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선생님 시는 힘들이고 공들여 쓰는 시라기보다는 말하자면 순식간에 아무렇지 않게  ‘내뱉거나 휘갈기는’ 식으로 쓰인 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성장(盛粧)하지 않은 시들은 이상하게 머리에 쏙쏙 들어와 박힙니다. 힘들여 시를 쓰는 시인들은 좀 억울하다는 기분이 들 텐데, 선생님께서 지향하는 시 작법이 있다면?


정현종 : 초기에는 공을 들이고 고치기도 했는데, 후기에는 ‘저절로 익어서 떨어진다’고 하는, 과일이 떨어지듯이 술이 익듯이 생긴 대로 쓴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도 ‘시는 쓰이기 전에 이미 결정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시는 쓰기 전의 삶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았는가, 공부를 했는가 등의 삶의 여러 가지 흔적들과 발걸음들, 결과, 내용이 전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산 만큼 쓴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것입니다. 천의무봉(天衣無縫)하다는 것은 ‘잘 읽히지만 울림이 크다’는 것인데, 나이가 들면 꾸민다는 것,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것이 싫어지게 됩니다. 그런 것은 머리를 쓴다는 것인데 만든다는 것 같습니다. 너무 조작적인 것은 시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섬’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많지만, 모호한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시는 제일 외롭다는 느낌이 있을 때 떠오른 것입니다. 단 한 자도 고친 것이 없고, 두 줄이 하나의 생각이고 이미지입니다. 그때의 심경이 외로움 속에 있었을 때입니다. 시가 쓰이기 전에 결정된다는 것은 마음 상태가 얼마큼 작품을 낳기 위한 테로서의 밀도가 있는가, 정서 감정의 밀도나 생각의 밀도와 통하는 것입니다.

 

이선영 : ‘시는 쓰이기 전에 결정된다’라는 말씀과 ‘밀도’라는 단어를 기억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첫 시집 『사물의 꿈』에 실린 초기 시들은 그야말로 문학청년의 조심성과 소심함, 시에 대한 이상을 드러내듯 관념적이고 무언가에 다소곳이 붙들려 있는 듯한 시들이었는데, 이후 전혀 다른 시 쓰기로 나아가게 된 배경이나 계기가 있으신지요.


정현종 : 초기 시를 관념적이라고 부르는데, 시에는 관념이 없을 수 없습니다. 관념(觀念)은 한자(漢字)로 말하면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논쟁 등이 있었고, 관념이라는 말은 참여문학 쪽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던 말입니다. 초기 시에 한자어가 많은데, 한자어가 추상어이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어느 비평가는 초기 시가 ‘살갑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마음에 드는 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에 관념어, 한자어가 등장한다고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느껴야 하는데 느끼면 관념적인 것도 추상적인 것도 아닌 것입니다. 어렵거나 자신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 관념적이라고 하는데 무책임하고 너무 쉬운 해답을 주는 것이므로 시를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 비평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선영 : ‘관념적’이라는 말처럼 남용 내지 오용되는 말을 신중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는 느낄 수 있지만 그 느낌을 표현하는 작업은 어렵다는 데 시 비평의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시집 『나는 별아저씨』의 뒤표지 글에는 ‘시인은 끊임없이 새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가도 가도 오직 배가 고플 따름인 거지처럼……’이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선생님이 잣대로 삼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나 시작(詩作)에 관한 일종의 제언처럼 읽히는데, 선생님에게 있어 또 하나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광인’이라는 말과 함께 ‘거지와 광인’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정현종 : 시라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인터뷰에서 보면 초현실주의 자서전(biography of surrealism)에서 그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늘 시작이다.’ 모순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모든 예술은 한 편 한 편이 시작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고, 정신의 새로운 시작, 느낌의 새로운 시작, 그것이 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힘입니다. 바슐라르도 ‘모든 시적 이미지 하나하나가 새로운 출발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거지’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빈털터리처럼의 은유입니다. ‘마음의 가난’이라는 말은 진부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런 마음가짐은 진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광인’도 새로운 것과 상관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상하다’고 하고 ‘미친 것 같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아주 새로운 것에 대한 이질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니체의 표현으로는 ‘가치 전복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지배해 오던 가치를 엎는다는 것이지요. 가치에 의해서 유지되고 살아오던 것을 누군가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전복하려고 할 때 ‘광인’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의 새로운 것,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향방


이선영 : “마음이 한가해서 거의 졸린 상태//마음이 한가해서 거의 졸린 상태//아, 거기서 한 천년 살고지고”. 「마음이 한가해서」(『견딜 수 없네』, 2003)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이 시에서처럼 ‘아, 거기서 한 천년 살고지고’ 하실 작정이신지요.


정현종 : 2001년쯤 UCLA에서 두 달 정도 지냈는데 너무 한가로워서 그때 쓴 시입니다. 여행의 미덕은 그런 것일 겁니다. 마음이 단순한 상태를 좋아합니다. 

이선영 : 선생님은 파블로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번역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루다의 시들에 매료되었던 연유인지요. 하지만 선생님 시에는 정작 절절한 사랑의 시라든가 인생에 대한 뼈아픈 고백이나 회한을 짙게 드러내는 시는 없는 듯합니다. 시를 쓰다 보면 그런 ‘유혹이나 함정’(?)에 빠져 들기 쉬운데, 앞으로의 시작 방향은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더불어 의도적 또는 전략적 시 쓰기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정현종 : 제 시에도 연시(戀詩)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시지요.


이선영 :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한 생각과 각별히 관심이나 애정을 갖고 계신 시인이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더불어 지적하거나 당부하실 말씀은?


정현종 :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면, 컴퓨터를 사용해서 두들기지 말고 만년필 등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와 어울리지 않는 기계적인 글쓰기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이나 느낌의 보폭 혹은 공간, 속도 등을 되생각(feedback)하고 되씹어 보아야 합니다. 고요한 공간에서 시가 배태되는 것이므로 기계적인 시 쓰기는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선영 : 일생 시를 써 노시인 내지 대가의 반열에 오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는 한순간 시를 왜소하게 만들 수도 있는, 시 아닌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아니, 시인 역시 세상에 섞여 살고 있는 한 모든 유혹에 노출돼 있는 자들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지요. 오랫동안 시를 써오실 수 있었던 저력 내지 버팀목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정현종 : 글쎄요, 삶 자체가 유혹이기도 하고 시는 그냥 살면서 쓰는 것 아닌가요.


이선영 : 선생님은 우리 시사(詩史)에서 위대한 시인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정현종 : 씨앗을 가지신 분으로 만해 한용운, 비록 한 권의 분량이지만 만해의 정신 속에는 위대해질 수 있는 씨앗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시인들이 있습니다. 소월도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작고한 시인 중에 ‘진짜 시인’은 한용운, 김소월, 윤동주, 이상, 김수영, 그리고 조금 성격이 다르면서 과소평가되었던 천상병, 박용래, 김종삼 등의 시인들이 있습니다.


이선영 : 저에게는 한때 시인 아닌 사람은 마치 다른 인종인 것처럼 보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인과 인간, 그 분기점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면 이상(李箱) 같은 경우는 시인으로서는 탁월했지만 개인적으로 현실에서는 무능한 인간이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천상병, 서정주 등의 시인들도 인간적으로는 불행했거나 한때 과오를 범하기도 했던 분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현종 : 시인이라고 해서 잘못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일제 시대의 이야기는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당의 경우도 자서전에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특별하게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백을 했고 용서를 빌었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때에 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친일한 경우도 있습니다. 미당도 큰 시인입니다. 분량도 많고 질적으로도 현대시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백치이신 분입니다. 예술가들에게는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미당은 우리의 큰 자산입니다. 사람 됨됨이와 작품은 일치하지 않는데, 불일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최종적인 판단, 잣대, 기준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좋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이선영 :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시작 활동 계획과 그 외에 다른 계획이 있으시다면 듣고 싶습니다.


정현종 : 시야 늘 쓰는 것이고, ‘네루다’의 나머지 글을 마저 번역해서 출간할 예정입니다.


이선영 :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 많이 쓰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문장 웹진/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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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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