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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 작성일 2005-09-22
  • 조회수 5,717

 


깊이의 부재에서 새로움에 대한 강박까지


김언 : 자신과 소통이 안 된다고 해서 남들도 소통이 안 될 거라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안 읽힌다고 하는데, 제 경우엔 김행숙 시인의 시집을 너무나 쫄깃쫄깃하게 잘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통이라는 잣대로 문학적인 평가를 하는 태도는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여기서 소통이 안 되는 것이 저기 가서는 너무도 잘 소통되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요.


엄경희 : 여기서 독자의 범위란 시인과 비평가만을 얘기하는 듯합니다. 시라는 것이 개인의 독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이 시대 시의 독자가 시인 자신과 비평가로 한정되고 말았다고 하더라도―이런 코드들이 문학이라는 장을 벗어났을 때 얼마만큼 소통될 수 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쉬운 시가 꼭 좋은 시는 아니지만, 소통은 문학이 외면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요즘처럼 시인들이 다른 시인들의 시를 참조하면서 시를 쓴 시대도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소통과 관련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고전적인 정의에서 세계를 자아화한 장르인 시가 동일성 미학의 완벽한 성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균열과 파탄을 분출하는 시들 역시 서정시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근대 이전에도 서정시는 동일성에 대한 갈망과 그것의 좌절을 노래해 왔으니까요. 동일성 미학이든 타자성 미학이든, 인간의 내면세계를 기록하는 현대시는 모두 서정시에 속할 것입니다. 전자 문명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강화되는 현실에서 자연에 대한 상상력과 문화?문명적 상상력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에 대한 비판적 점검을 좀더 밀고 나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엄경희 : 자연을 중심으로 한 상상력,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이라기보다는 서정을 두고 얘기해 본다면, 이는 인간에 대한 섬세한 이해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서정적, 정서적 언술은 철학적 사유와 마주칠 수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덧붙여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서정성이 선(禪)적인 것으로 가는 경향에 대해서입니다. 선적인 것으로 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서정의 마지막 관문이 그것인가 질문하게 됩니다. 다른 방식은 없는가, 선적인 것에 문을 두드리는 포즈도 이제는 보편적인 방식이 아닌가 말하고 싶습니다.

문화?문명적인 상상력에 대해 말하자면, 독자로서 그 시들을 읽을 때 고통스러움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환상시를 읽으면 전반적으로 악몽, 지옥, 공포가 공통적인 인자로 발견됩니다. 왜 어두운 환상만 있는가? 시대가 어두우니까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가로질러서 밝은 환상도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등장하는 소재는 왜 획일적인가. 특히 신체를 다루는 방식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신체를 적나라하게 시의 전면에 내세워본 적이 없습니다. 몸에 대한 언급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바로 신체 절단, 분해, 해부에 돌입했습니다. 이것이 현대성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계에서 아름다운 신체, 혹은 아름다운 에로티즘을 몽상하는 것이야말로 도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모두 신체를 찢어발기지 않으면 안 되는가? 신체를 다루는 방식이 도식화되고 기계화될 때, 아무리 신체를 파괴적으로 다룰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자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환상적 이미지를 최초로 목격하는 순간 그 과장은 자극이 될 수 있지만, 그것 또한 도식화되면 그 과장을 주도하는 의도가 신선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획일화된 신체적 상상력과 연관해서 우리 시의 ‘언어 순화’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속한 육두문자의 남용이 시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폭력적 현실을 암시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언어가 남용될 경우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어를 반복해서 접하게 되면, 도발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지겹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을 금하자는 뜻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남용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소통 문제와 관련해서, 시가 길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통적인 문법에서 벗어나 시가 길어지면 도발적인 것 같지만, 수다스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가 길어지면 자연히 서사적?서술적으로 되기 마련입니다. 환상적 서술시의 내용을 보면 거칠게 말해 ‘악몽과 공포에 갇혀 있는 존재, 악몽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는 존재’라는 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획일적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화의 생성 면에서 볼 때, 예를 들어 톨킨의 소설이 게임이나 다른 문화 양식을 만들었다면, 우리의 경우는 게임이나 영화가 먼저 생산되고 문학이 그 다음을 잇는 역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생성 배경이 역순이라면 자생력이 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지면을 통해 김행숙 시인의 시를 말하면서 짧게 언급했던 적이 있는데, 환상시가 얼마만큼 기억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시간을 견뎌낼 수 없는 문학은 사라지고 마는데, 여기서 시간은 독자의 기억입니다. 길고 악몽적인 이미지의 각 편들이 기억을 견뎌낼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소통의 방식과 독자의 기억은 유기적으로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난해하다고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상의 시는 기억에 각인시키는 강렬한 장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리듬의 감행은 불편하지만, 이상의 시를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과 새로운 것, 그리고 미래의 시……


사회 : 모더니즘 시들이 빠져 있는 비슷한 가상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중요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에 관한 시들도 기존 시들에 무임승차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개성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단이 참조해야 할 중요한 사안일 것입니다.


김언 : 이런 말이 있지요. '시는 그 시대의 가장 예민한 촉수이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시가 그 시대에 가장 더디 오는 촉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럼 맨 먼저 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시가 아니라 오히려 르포나 산문 같은 보고서가 아닐까 싶은데요, 경향을 불문하고 많은 시인들이 보고서와 시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내 몸이 가느냐 못 가느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일차원적인 보고가 마치 시인 것처럼 둔갑해서 나오는 걸 많이 봅니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상상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새로운 어법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저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육화되어 나온 말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현란한 장면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애니메이션 같은 장르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똑같은 스토리에 똑같은 상상력이라면, 이제는 편안하게 누워서 애니메이션을 보지 골치 아프게 시를 들여다보지는 않습니다. 현란한 시각을 대신할 수 있는, 아니 이겨낼 수 있는 어법이 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시를 읽는 즐거움이나 가치가 생기니까요. 그리고 그 어법이나 문법은 결국 자신의 몸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몸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단순한 사실 나열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고유의 육화된 문법도 없고 오로지 단순한 보고서만 남습니다. 특히나 이건 실험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이 생각해봐야 될 문제입니다. 자신의 말이 단지 새로운 장면만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어법으로 나오는 것인가. 이걸 고민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상한 장면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개성이 안 됩니다. 그것은 이제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어법으로 튀어나올 때 비로소 한 시인의 개성이 자리잡는 것이겠지요. 많지는 않지만, 최근 첫 시집을 낸 젊은 시인 몇몇은 분명히 그런 어법이 몸에서 배어나오고 있습니다. 반가운 일이지요.


김행숙 : 시류는 어떤 점에서 시대성을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결국 교체될 수 있는 시, 반복에 떨어지는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미학적인 자살일 것입니다. 해야 할 것 같은 말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과 그 방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현대 사회의 속도화된 체계 속에서 시는 별개의 산물인 듯하지만, 시 역시 그 흐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시가 지닌 새로움의 유효 기간도 짧아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문화의 확산과 후기 자본주의사회 시스템의 강화 속에서,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망해 보면서 오늘의 좌담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엄경희 : 인간을 다루는 시선이 보다 따뜻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문적 인식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시를 왜 써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결부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문학에는 자학, 초초, 불안, 부정의식이 스며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 문학은 정신적인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가, 자긍심이 있었던 문학의 시기는 있었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마다 문학의 효용가치는 달랐습니다. 이 시대는 정서적으로 황폐화되어 있습니다. 외부의 어떤 것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즉 정서를 가라앉히고 닦아주고 인간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심어주는 것이 오늘날 문학의 중요한 소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소통 방식은 전적으로 시인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창작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기능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언 : 다소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시인이란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다리를 놓는 자’라는 말도 있듯이, 멀어 보이는 이쪽과 저쪽을 어떻게든 이어주는 자가 저는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과 문명, 인간과 자연, 자본과 반자본, 어떻게 보면 화해하기 힘든 이 둘 사이에 기꺼이 몸을 던져 넣는 자가, 그래서 시가 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만큼 힘든 일이고 앞으로도 요원한 먼 미래의 일일 수도 있지만, 그 미래조차 당겨오는 것이 시인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지금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이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다르게는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봐도 그렇고,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태도입니다. 오로지 한 가지 종류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 개체군이 위험한 경우도 없습니다. 내부에 여러 가지 다양한 씨를 심어놓는 노력, 그래서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건 한 시인이 살아남는 방식이면서 앞으로 우리 시단이 살아남는 방식과도 직결된다고 봅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해 좀더 유연하고 좀더 너그러운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행숙 : 지양해야 될 것은 자기복제를 포함하여 동일한 욕망에 갇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독자가 다수의 독자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문학은 기꺼이 소수의 욕망이나 꿈을 추구하고 또한 개발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시의 다양한 색깔과 세계는 중요할 것입니다.


손택수 : 다른 것들에 대한 긍정, 다양한 개성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언적 개성들이 다채로우면 다채로울수록 우리 시도 풍요로워지겠지요. 다만 다른 것과 새로운 것들에 대한 다른 규정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새롭다고 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보들레르의 「회복기의 환자」를 보면, ‘죽음의 문턱까지 간 사람은 모든 것을 기억하기를 열망하는 존재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는 회복기의 환자와 같이 시인들의 의식이 꽃피어야 하겠습니다. 광화문의 도로 소음 측정기 옆에서 울리는 매미 소리와 북한산에서 울리는 매미 소리는 분명 다른 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매미라면 어떤 울음소리를 내야 할 것인가, 양극단이 서로에 대해 거울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 : 미래의 시에 대한 제안이자 화두로써, 김언 시인의 다양성, 김행숙 시인의 소수의 욕망, 손택수 시인의 회복기의 환자와 같은 자세, 엄경희 선생님의 따뜻한 긍정과 인간의 자긍심 등이 모두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오늘 좌담이 최근 시의 지형도 그리기에서 근대문학의 형질 변화와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한 비판적 점검을 거쳐 ‘미래의 시’를 엿보는 지점에까지 다다랐습니다. 오늘 나온 생산적인 이야기들을 여기 계신 시인들의 시를 포함해 미래의 우리 시작품 속에서 읽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네 분 선생님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문장 웹진/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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