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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아픔을 껴안은 모더니스트

  • 작성일 2006-02-23
  • 조회수 3,998

 

대담 김규동(시인)

 진행?정리 고운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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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근황

시인 김기림과의 만남

평양종합대학 시절

월남 이후, 서울에서의 생활

박인환, 김수영과의 인연

시세계의 변화

문단의 원로로서 후배 문인들에게



 

 


함북 종성, 그리고 어린 시절


고운기: 오늘은 김규동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1925년에 태어나셔서 1948년에 등단하시고 현역시인으로 활동하시는 우리 문단의 가장 큰 어른이십니다. 작년에 『느릅나무에게』를 출판하신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지나온 생활의 문단 이야기, 시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뜻 깊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지요? 작년이 우리 나이로 여든 하나 되셨는데 『느릅나무에게』라는 시집을 내시고 현역으로 활동하시며 정정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김규동: 책을 낸다는 것은 생각을 해 볼 일인데 책을 너무 자주 낸 것 같아 한참 만에 내었습니다. 평소에 시를 발표하는 것 보다 책을 낼 때에는 긴장이 됩니다. 300편중에서 80편 골라내었습니다. 

고운기: 여든이신 선생님께서 긴장 된다고 말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늘 대담이 영상으로 남기는 중요한 자료인 것 같아 여러 가지를 정리하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25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셨는데요. 그곳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김규동: 우리 반도의 끝이고 두만강이 흐르는 고장입니다. 기차의 기적소리와 두만강의 뱃노래 소리가 들리던 조용한 마을입니다. 부친이 그 고장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함경도 끝에 바람이 세고 두만강이 흐르고 농사는 잘 안되는 고장이었습니다.

고운기: 종성을 찾아보니 시인 윤동주의 집안도 그곳이었습니다.

김규동: 윤동주의 집안도 거기 살았는데 합방되면서 간도로 이주했습니다. 문익환 선생 댁도 간도로 넘어갔습니다. 간도 용정에는 김약연 선생이라는 독립 운동하는 어른이 계셨는데 일가를 간도에 모아서 개척하셨습니다. 저의 부친께서 김약연 선생의 제자입니다. 문익환 선생의 아버지와 저의 아버지와 동기 동창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의학을, 문익환 선생 아버님은 목사를 하셨습니다. 김약연 선생 댁에 가면 병풍이 있는데 그 글씨가 저희 아버지가 쓴 글씨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글씨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을에 농민들의 치료비가 들어오면 구겨진 돈을 다려서 손수건에 싸서 이불사이에 보관했다가 김약연 선생에게 그 돈을 드렸습니다. 독립자금으로 쓰시라고 드리시면 어머니는 돈을 모아서 남을 준다고 했습니다. 제 부친이 스승에 대해서 예의를 지켰습니다.

고운기: 부친께서 글씨를 잘 쓰셨고 의사이셨기 때문에 그래서 선생님께서도 경성고보를 졸업하시고 처음에는 의과를 택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규동: 아버지께서 저희가 형제인데 저에게는 의과를 하고 아우에게는 내과를 해서 병원을 하라고 유언을 하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할 수 없어서 의과대학에 갔으나 김기림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잊혀지지 않고, 의학은 글 쓸 시간이 없고 잠잘 시간이 없는 것이 의사라는 생각에, 문학이든 의학이든 하나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의학을 포기했습니다. 평양종합대학(지금의 김일성대학)에 편입해서 조선어문학과 2학년에 들어갔습니다.

고운기: 문단에서 아는 분들은 다 아시는데, 선생님께서도 글씨도 뛰어나시고 서각이라는 것을 하셔서 전시회를 하시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규동: 초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형제를 앉혀놓고 글씨를 가르치셨습니다. 잘된 것은 동그라미 해주셨는데 열 개를 받으면 돈을 10전 주시고 고기 만두를 사다먹었습니다. 10전 타려고 열심히 글씨를 썼습니다. 글씨를 잘 쓰니 외과를 하면 수술을 잘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김기림과의 만남에서 평양종합대학까지


고운기: 경성고보에서 김기림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 문학을 하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셨을 것 같습니다. 

김규동: 문학이라는 것, 시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고 나도 저런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기림 선생님이 조선일보의 학예부장을 하셨는데 조선총독부가 폐간시켰습니다. 김기림 선생님이 가실 때가 없으니 함경도에서 경성고보 선생으로 취직이 되신 것입니다. 선생님을 찾아가고 선생님 말씀을 듣고 그렇게 했습니다.

고운기: 김기림 선생이라면 모더니즘이 먼저 떠오르는데 선생님께서도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김규동: 선생님께서는 건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이란 시인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하시면서 건강에 너무 등한하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안 되고…. 술 먹고 27살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체조하고 산에 오르고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문학을 하려면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용악의 아우가 같은 반이었는데 영어를 잘해서 형보다 낫다고 하면서, 형은 낡은 로맨티스즘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47년에 평양종합대학에 편입시험을 쳤습니다. 월북한 학생이 시험쳤는데 혼자 합격했습니다. 나는 이미 한국 문학에 대해서 지식이 너른 편이었습니다. 답을 다 적어서 합격했나 봅니다. 조선어문학과에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1회 졸업생입니다.

고운기: 기억나는 학생이 있으신지요?

김규동: 학생이 20명이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가정 성분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처럼 아버지가 의사이면 쁘디 브르조아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분이 이단이었습니다.

고운기: 1947년이었으면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기 전인데도 심하게 성분을 가렸었나요?

김규동: 당 조직 민주 청년 동맹이 조직이 강화되어서 사상 성분이 좋다 나쁘다가 있었습니다. 1년 동안 평양에서 학교 다니다가 가장 못 견딘 것은 매일 밤 기숙사에서 토론을 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상 토론이었습니다. 김구, 이승만을 타도하자, 미제를 타도하자는 테마를, 범위가 넓지 않고, 매일 밤 해야 되었습니다. 안하면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는데 문학과는 거리가 멀고, 조선어문학과 주로 유물사관, 러시아어 공산당사, 레닌주의, 경제관계도 공부하고…. 조선 문학에 대한 것은 경성제국대학 좌익교수들이 가르쳤는데, 나도향, 최서해 등이었지만 별로 흥미가 없었지요. 저는 김기림 선생님에게서 다 배웠습니다. <문장>지에 다 나온 소설가였습니다. 흥미를 잃었습니다.

고운기: 특별히 기억나시는 조선어문학부 교수님이 계신지요?

김규동: 신창호라는 교수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약간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재미없지?”하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문학교육과 창작 위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김일성대학신문 창간호에 시를 썼습니다. <아침 그라운드> 라는 시였습니다. 장시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대학 떠나며 월남했습니다, 1947년에.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은 종성에 계시고, 아우는 평양 김일성대학 의과에 들어갔습니다.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스물세 살의 단신 월남


고운기: 월남을 가족에게 알릴 기회가 없었는가요?

김규동: 전혀 모르게 했습니다. 아우, 조카들에게 나로 인해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까봐, 문제가 될까봐 그랬습니다. 지난번에 백낙청 교수가 평양을 갈 때, 이번에 같이 가자고 하셨는데, 저만은 빼달라고, 백 선생 입장하고 저는 다릅니다하고 제가 사양했습니다. 저는 혼자이지만 저쪽에는 친척과 내 조카들이 노동당 교육계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남조선에서 큰아버지가 왔다고 하면 하늘이 무너집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통일이 되면 만날 것입니다.

고운기: 1948년 1월쯤에 월남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규동: 김일성대학 교복 입은 채로 월남해서 경찰서에 잡혀가서 고생했습니다. 38선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서 38선 넘을 때까지는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에 교복을 입고 넘어 왔습니다.

고운기: 1948년 1월 상황에서 김일성 대학 교복과 뺏지는 특권층이라는 것이 되겠네요. 문제는 넘은 다음이 문제가 되셨겠네요. 그렇게 단신 월남을 하셔서 23살에 생활을 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김규동: 단지 김기림, 정지용 선생님을 만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을 만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넘어와 경찰서에 나와 김기림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여기는 문인이 글을 쓸 지면이 없다고 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견뎌야지 남조선으로 왔냐고 하셨습니다. 한참 계시더니 다시 못 간다고, 취직해야한다고…, 이력서를 5통 만들어 오라시더니, 노량진의 중학교를 소개시켜 주셨는데, 교장 선생님이 김기림 선생님 친구 분이더군요. 5학년 영어를 가르쳤는데, 수험생 영어이다 보니 어려웠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김 선생, 영어가 짧으니 국어는 어떻겠습니까, 국어 선생자리가 비어있으니 바꾸시오” 하셨습니다. 국어 선생을 2년 동안 하고 6?25가 났습니다.

고운기: 등단하신 것이 1948년, 《예술조선》이라는 잡지에 <강>이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작년 낸 시집 『느릅나무에게』에 실려 있는 <플라워 다방>이라는 시에서, 부제는 ‘보들레르 나를 건져주다’ 이렇게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겠습니다. 1948년 문단의 풍경을 다시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규동: 플라워다방은 문인들이 모이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소문 듣고 찾아가보니, 김동리, 조연현, 김광규 같은 남조선 문인들이라서 생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장>지에 나오지 않던 후세대들로, 조지훈, 박목월도 남조선에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북쪽으로 문인들이 가고 소장파들이 남았습니다. 낙심이 되었습니다. 굵직한 문인들이 없다는 것 때문이었지요. 유치환, 박종화, 김영랑, 모윤숙 시 낭송회 찾아갔는데, 시가 구태의연하고 북조선하고 달랐습니다. 남조선 문인들은 감상적이고, 앞으로보다는 뒷걸음치는 모습이었습니다. 김기림 선생은 “너무 서두르지 말게, 친구는 아무나 사귀지 말게, 너무 덤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랑 놀면 조그만 사람이 되고 만다. 답답한 친구들인데, 정지용 선생을 괄시를 하는 패들이거든. 조연현은 정지용 문학을 손재주로 하는 시를 쓰다 보니 빨갱이가 되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정지용 선생이 “남조선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했다고 합니다.

고운기: 사상성이 강했다고 하면 김기림이 강했겠는데요.

김규동: 김동리나 문예파들이 이를테면 정지용, 김기림을 학대한 것이지요.

고운기: 문인들은 선생님이 김기림 제자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불편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김규동: 김일성 대학에 다녔다는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빨갱이라고 취직이 안 됩니다.

  


 

박인환, 김수영과의 인연

 

고운기: 등단을 하시면서 선생님이 가진 시세계의 방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김규동: 모더니즘이었지요. 김기림 선생님의 시론이 꽉 차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데, 쓰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문단의 상황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고, 친구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박인환, 김수영을 만났습니다. 박인환은 1949년, 김수영은 1951년에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니 다 알고 대뜸 나를 보고 “너 김기림의 제자이지”라고 하면서, 김수영은 “김기림 무섭지 않아”라고 말했고, 박인환은 “김기림은 엘리트야. 배울 점이 있지만 다는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명동에 나오면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다방에서 박인환을 만났습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훤하게 생겨서 정지용 선생이 영화배우 하라고 하셨고, 누구에게나 친교를 잘 맺고 사교술이 능했습니다.

고운기: ‘후반기’ 동인을 만들 무렵이신가요? 

김규동: 그 직전이었습니다. 박인환을 만나게 된 것이 김기림 선생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조병화가 있었습니다. 박인환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고운기: 전쟁이 터져 그 기간 동안은 어려운 생활을 하셨을 텐데요.

김규동: 인민군이 서울에 왔을 때 피난 안가고 학교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사흘 만에 들어왔는데 잡아가지는 않았습니다. 학교에는 좌익 선생만 남았습니다. 나중에 수복이 된 다음 교장 선생님만 잡혀가고 저는 잡혀가지 않았습니다. 교장 선생님 덕분에 두 번 다 천만 다행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1?4후퇴 때 조지훈, 조병화와 함께 부산으로 갔습니다. 3년 동안 부산에서 사는데 거기서 ‘후반기’ 동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연합신문 기자를 했는데, 저보고 모든 연락을 맡으라고 해서 ‘후반기’ 동인지를 도맡아 했습니다.

고운기: 방향이나 성격이 어떠셨는지요?

김규동: 순수문학, 문예파, 청록파 여기에 대한 비판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문학에 대한 노선을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순수파나 청록파를 비판하자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습니다. 연합신문에 우리 회원들의 글을 싣는데 매일 비판이 있었습니다. 문총 문인들의 모임, 박종화나 모윤숙 같은 이들이 우리 보고 해체하라고 했습니다. 김동리의 소설을 비판도 했습니다. 김동리, 조연현, 박두진, 박목월이 우리를 싫어했습니다. 길에서 만나도 인사를 안했습니다.

고운기: 그 분들이 모두 한국 문학의 거장이 되고, 문단의 권력이 되었는데요.

김규동: 거장이 되었지만 그 사람들의 문학의 실체가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용이 있는 문학을 하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운기: 그 분들의 70년대 이후에 작업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시나요?

김규동: 그 이후의 발전이 없습니다. 그 분들의 무게들은 이북에 간 작가들이 한 일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경향파, 프로문학의 행적이나 분량이 어느 정도 무게가 가는데 비해서, 박태원만한 업적이 김동리에게는 없습니다.

고운기: 60년대 이후, 문단 권력이라는 그들에 의해 한국의 현대문학사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김규동: 시야가 좁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제자들의 시야가 좁고. 미당도 많은 사람들을 길렀지만 능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운기: 최근에 과대평가된 시인과 과소평가 시인 이야기가 나왔지요. 과소평가된 시인으로 박인환이 있었는데요. ‘후반기’ 동인이었던 조향, 김경린 등도 크게 평가 받지 못하고, 거론도 안 되고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규동: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하면 주목받지 못합니다. 조향도 종래의 상식을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 가치를 생각하면 에즈라 파운드처럼, 같은 것을 하지 말고 다른 것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단이 필요한데 그러면 유명해지지 못합니다. 미당을 따라야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고운기: 김수영과의 만남 이후에도, 김수영은 ‘후반기’동인은 아니지만, 문단에도 박인환과 김수영의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요. 박인환에 대해 김수영이 비판을 했는데, 박인환은 김수영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않았더군요. 실재는 어떠했는지요?

김규동: 김수영은 민중에 대한 감정이 거리가 없는데, 박인환은 민중과 나와의 거리가 있습니다. 책에서 배운 모더니즘의 분량이 많은 데 비해 김수영은 생활에서 가진 모더니즘이 풍부하고 감정이 많습니다. 박인환은 너무 서구화되고 김수영은 한국적인 모더니즘입니다. 김수영은 양계를 했는데 노동을 하면서 일상 생활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인환은 취직을 한 적도 없고, 민중하고 밑바닥 생활의 접촉이 없었습니다. 4?19 이후까지 박인환 시인이 살아 계셨어도 현실에서 김수영처럼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서구적인 문체, 서구적인 사고, 서구적인 속도?문명?변화 이런 것에의 흥미이지, 김수영의 땀 냄새 나는 흥미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손잡을 수 없습니다.

고운기: 우스갯소리로, 김수영은 콤플렉스가 있어서 박인환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두 분 사이에 그런 것이 있을까요?

김규동: 김수영은 민중적이고 박인환은 주지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고운기: 선생님의 시 <존재와 말>에서 김수영과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5?16 직후 박정희 장군을 두고 김수영과 내기를 하였다는 구절이 있는데요, 

김규동: 김수영은 시세를 판단하는 능력이 없고, 공포라는 관념이 있어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6??25에서 온 것이지요. 인민군에 포로 되었다가 나왔고, 빨갱이라는 관념이 있어서, 말하는 것과 판단하는 것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김수영은 미군이 나와서 박정희 붙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미국은 이미 다 알고 허락해준 것이야”라고 했는데도 김수영은 오진했습니다.

고운기: ‘내내 박정희를 무서워하다 죽었다’고 쓰셨는데, 민중문학?참여문학을 했는데, 글을 쓰면서도 속으로 무서워했나요?

김규동: 그런 글을 발표한 것은 기자들 쫓아오니까 되었지요. 만일 그런 것이 없으면 발표 못했습니다. 그 무렵에 민중적인 기풍이 흘렀습니다.

고운기: 50년대 이후 선생님은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하셨습니다.

김규동: 한국일보가 창간되면서 문화부장을 했습니다. 그러다 월급을 많이 주겠다고 해서 출판사로 갔습니다. 하지만 한국일보 문화부장 때는 신이 나서 일을 했습니다.

고운기: 해방 후에 신문의 신춘문예가 부활한 것도 한국일보입니다.

김규동: 창간 때부터 매일 시를 실었습니다. 사주 장기영 씨 자신이 시를 좋아했습니다. 시를 쓰려다가 경제 쪽으로 간 분이시라 그렇습니다.

 

시세계의 변화

 

고운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에서도 변화가 있고 생활에서도 변화가 있습니다.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 1955년의 『나비와 광장』은 선생님의 대표적인 시집이고, 『현대의 신화』라는 시집을 내셨어요. 그리고는 『죽음 속의 영웅』을 낼 때까지 그 사이 20년이 걸렸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 왜 공백을 두셨는지요? 

김규동:  4??19 혁명이 날 무렵 세상이 바뀌고 오늘의 생활이라는 것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민족 혁명, 애국주의가 젊은이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순수한 학생의 가슴에서 나왔습니다. 시를 알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고 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가 닿지 않았습니다. 언어 자체를 바꿔야 하는데, 서양문학은 민중생활이라던가 사회상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나로서는 그런 언어를 못 쓰게 되었지요. 15년이 지나고, 『죽음 속의 영웅』에 실린 <북에선 온 어머님 편지>를 썼는데, 꿈에 어머니가 편지한 내용을 받아 적었습니다. 한국일보에 발표했는데 시가 좋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1971년에 그 시를 중심으로 해서 완전히 길이 달라졌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속의 영웅』이라는 것은 죽음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진실한 시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언어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민중의 언어를 살아가는 데서 체득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입니다.

고운기: 이후 <어머님 전상서>를 발표하셨는데, 이쪽 길을 잡아서 일관되게 작품의 길을 가셨습니다.

김규동: 문학으로서 예술작품으로서의 결함이 있습니다. 감상주의, 애국주의, 센티멘탈리즘을 배제하지 못합니다. 얇은 감상주의라 할 때, 확고한 역량을 가졌는가 할 때,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모더니즘 변화를 이야기했는데, 둘을 아우르는 것이야말로 총체적인 것이다, 모더니즘과 민중문학이 있을 때 결함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민중문학은 근대정신이 없고 근대정신이 있으면 민중성이 약하고 그렇습니다. 김수영은 접근된 시인입니다. 그 사람의 실험이 근사하게 맞았고 성공한 경우입니다.

고운기: 선생님 입장에서 근사한 작품을 어떤 작품으로 생각하십니까.

김규동: 앞으로 써보고 싶습니다.

고운기: 이런 작품은 어떠신지요? 『느릅나무에게』중에서 <저승 사람들 오시다>라는 작품인데요. 이 작품은 함경도 사투리가 소화된 것, 평생에 그리시는 고향의 이야기가 작품 속에 절절하게 담고 있는 것이 전통과 모더니즘의 시적인 기법이 너무 농밀하게 조화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규동: 감사합니다. 모더니즘 기법의 제일 으뜸가는 것이 속도감이지요. 문법, 문장의 속도감,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는 힘의 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문장을 써도 실감나게 쓰고, 산문을 쓴 것을 보면 실감이 납니다. 박종화의 문장처럼 알맹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박태원의 「천변풍경」에는 심리가 있고 사회학도 있습니다. 문학이 이런 것을 가리면 안 됩니다. 미당에게는 모더니즘이 아닌 나쁜 재주가 있습니다. 기술이 있습니다. 그 기술이 발달해서 장난의 시가 많습니다. 미당은 장난이 시의 절반입니다. 거짓말이라도 시가 재미있으면 읽힙니다. 허무맹랑한 말을 놀래게 하고 재미있게 하고, 그러면 읽히는 것입니다. 반모더니즘의 반모더니즘입니다. 장난이라도 고급스럽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아픔을 등한하지 말자, 이런 모더니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단으로 문제의식을 심화시켜야 합니다. 영국, 프랑스 시인은 분단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들보다 강한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 전쟁 때 참전하던 문인의 기백, 정신의 행동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걸 늘 의식했습니다. 박정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하니까 끌려서 들어갔습니다.

고운기: 80년 이후 많은 후배를 보셨을 것입니다.

김규동: 후배들이 귀엽고 참 참답게 보였습니다. 모더니즘에 대해서 이해를 안하는 것에 대해서는 섭섭했습니다. 서양 책을 보지 않습니다. 서양 것도 보아야 합니다. 문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운기: 서양 위주로 너무 보아서, 그런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김규동: 구체적인 것이 머릿속에 없는 것입니다. 행동력이 없고. 책을 많이 읽고 행동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책을 많이 봐도 공염불입니다. 써먹어야 합니다. 민중문학의 흐름은, 생활의 체험은 풍부한데 다른 나라 사람의 말을 보려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고운기: 마무리로 두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느릅나무에게』는 1989년의 『오늘밤 기러기 떼』이후 16년 만의 시집입니다. 시선집을 내시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신작시로 내신 시집이라 대단히 놀라워했었습니다. 

김규동: 망설이다가 냈지요. 후배들이 책을 달라고 하는데 줄 책이 없습니다. 또 ‘책을 내십시오’ 가족들이 그랬습니다. 책을 내는 일은 끔찍한 일입니다. 뒷날에 보게 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300편 발표한 가운데 83편 골라서 냈지요. 그냥 내고 말았습니다. 이제 시집을 낸다면 열 편이나 스무 편의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확실하게 심판을 받고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문단의 원로로서 후배 문인들에게

 

고운기: 저도 20, 30대의 젊은 시인의 시를 잘 읽지 못합니다. 요즘 시인들의 작품을 보시는지요? 

김규동: 보내오는 것을 포함해 한 달에 중요한 출판사 시집까지 30여 권을 봅니다. 월간지 계간지 시들 봅니다. 시인들의 시는 경향이 달라지고, 중년들에겐 노선이 있지만 젊은 시인들은 노선이 없고 언어가 다르고 재미있습니다.

고운기: 요즘 젊은 시인들의 장점이 모더니즘 수업을 받았는데 선생님 보시기에 미더워 보이시는지 어떠십니까?

김규동: 혼돈스럽다는 추상적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회의 전문세대의 반영이 아닌가 합니다.

대화 생활의 직접적인 반응으로 보여지고 확실성을 기대하지만 없습니다. 그런 것이 불안감,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재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막연하다는 것, 앞도 없고 뒤도 없다는 것, 통일성이 없어 보입니다.

고운기: 남북관계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으신지요?

김규동: 북한은 집단 농장과 탄광을 보여주어야 상호 이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집단 농장의 생활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도 다녀왔지만 누구와 대화했습니까. 노동당 사람들과 대화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개방을 원한다면 농장을 개방하고 탄광을 개방해야지요. 그것을 저쪽에서 고민을 많이 하겠지요. 세계가 나가는 길이 그것은 아닙니다. 개방을 해야 합니다. 자유를 부여해야 합니다. 자유로워야지요. 규정에 박힌 틀에서 써야 하는데 그렇게 문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북조선에서는 노동당 문학밖에 할 수 없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문학가동맹 심사를 받았는데 글을 배운 스승이 김기림이라고 하니, “김기림이 남조선에서 무엇을 외칠 수 있소”라고 말했습니다. “김 동무, 우리가 통지하리다” 그래서 “언제하십니까” 하니 “일주일 기다리라”고 해서 나왔습니다.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에게 글을 배웠다고 하니 문학가동맹에 가입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운기: 마지막으로 김기림 선생을 뵌 적이 언제이신지요?

김규동: 월급을 받아 암탉을 사서 이화동까지 안고 가서 드시라고 하고, 6?25가 터져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갔는데, 사모님이 눈물 흘리시는데, 닭이 아직 마당에 매여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모님께서 우셨습니다. 반동으로 몰려 붙들려갔습니다.

고운기: 오늘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문장 웹진/200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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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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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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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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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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