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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이미지스트의 시정신

  • 작성일 2006-04-26
  • 조회수 3,100

 

대담 김종길(시인)

진행?정리 강경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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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근황 

학창시절과 등단 이후 

김종길의 시세계 

여러 시인들과의 인연 

시를 왜 배워야 하는가 

젊은 시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산수유가 가늘게 눈을 뜨고 있다


봄의 초입이다. 김종길 선생님의 집 마당에는 산수유가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 엷은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이 산수유를 닮았다고 느껴졌다. 이층 서재에 들어서자 오래된 책들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싫지 않은 냄새, 시간의 영혼이 배어 있는 냄새인 듯했다.

 



강경희 : 오늘은 김종길 선생님 댁을 찾아왔습니다. 그럼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시를 교과서에서 배우고 자란 세대입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하셨지요?

김종길 : 첫 회에서 이야기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만난 저명한 영미 시인과 비평가 30명 정도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한 달에 한 사람씩 하면 길어지니까 일 년 반 하는 걸로 해서 한 달에 두 명이나 세 명씩 다루는 글을 쓸 예정입니다. 생년 순으로 해서 처음에는 엘리어트를 했고 두 번째에는 윌리엄 엠슨(William Empson)이라고 영국에 처음 갔을 때 지도를 받았던 분을 쓰고, 그 다음은 스티븐 스펜더를 쓸 예정입니다.

강경희 : 저희는 책으로만 접했던 유명 작가들인데……. 선생님께서는 엘리어트를 직접 만나셨을 때 그의 음성이 좋았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보니 듣기에 너무 좋네요. 먼저 시인이신 선생님의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시인으로 등단하신 것은 신춘문예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김종길 :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문(門)」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했지요.

강경희 : 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등단 이전에도 문학 서클 활동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김종길 : 그렇습니다. 최근에 글을 통해 말했던 적도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나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나처럼 자기 인생의 진로를 일찍 정해서 그 일을 후회하거나 변경하지 않은 경우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다섯 살 때였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 우리 집에는 증조부, 증조모, 청상이신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인 다섯 식구가 계셨습니다. 나는 그런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내 할머니께서는 양자를 들이셨는데, 우리 아버지가 할머니의 오촌 양자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두 살 반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어르신들께 나는 더 애틋한 증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 과보호를 받고 자랐습니다. 또래의 아이들과는 어울려 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생활은 증조부의 사랑방에서 보냈습니다. 잘 때도 증조부의 사랑방 옆에서 자곤 했습니다.

강경희 : 증조부의 영향으로 한문학을 공부하셨던 걸고 알고 있습니다.

김종길 : 한학을 하는 집안이어서 그랬습니다. 한문 공부는 우리 나이로 여섯 살이었던 1931년 동짓날부터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입학을 하기 전부터 이미 천자문을 반이나 터득했습니다. 증조부 옆에서 나는 글을 읽는 것을 늘 보았고, 그 때문인지 어깨 너머로 배운 한문 실력으로 다섯 살에 한시 짓는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먹으로 종이에 글씨를 쓰고 놀았습니다. 그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재미있었고, 글 쓰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문을 배웠고, 다시 초등학교에 가기 위해 청송군 진보로 이사를 했습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중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그 곳은 제일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습니다. 옛날에는 못사는 집안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습니다. 대구 사범학교에는 제주도, 경기도 광주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고, 정말 전국 팔도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14대 1의 경쟁을 뚫고 사범학교에 들어갔지요. 거기 다닐 때도 문학 소년노릇을 했습니다. 그때는 보통 일본말로 된 시문학과 일본말로 번역된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말로 된 시나 소설을 많이 읽었습니다. 우리 외가가 이문열과 같은 가문으로 둘째 외삼촌께서 이병갑 선생님이라고, 30년대《시학》동인을 하신 분이셨습니다. 서른둘에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외사촌 형이 혜화전문을 다녔습니다. 외가에 가면 당시의《문장》지를 읽을 수 있었고 서정주의『화사집』, 유치환의『청마시초』, 정지용의 시집 등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 환경이 그래서인지 우리 현대시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던 해에 대구사범을 졸업했습니다. 1945년 3월 안동 서부소학교에 부임해서, 지금은 안동초등학교입니다. 거기에 배치가 되어서 4월부터 7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방학이 되고 8월 15에 해방이 되었을 때 나는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생활 때문에 고민이었습니다. 내가 선생님을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도 없어서 사표를 내고 그 해 10월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시험을 볼 수 있는 학교가 혜화전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들어가려고 국어시험을 보았는데 국어 문제에 고어가 나왔어요. 거기에 합격을 한 날이 11월 24일입니다 거기서 양주동 선생에게 고려가요와 영어를 배웠습니다.

1946년 여름에 전문학교에는 학부가 생겼고 학부 편입시험이 있었습니다. 일제 말기에 중등학교는 5년 다니면 학부에 편입시험 자격을 주었습니다. 학부로 들어가서 여름까지 동국대학교 학부에서 양주동 선생님께 공부를 배웠습니다. 양주동 선생님은 말이 빠르셨는데 두 번 들으니 되풀이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우리나라 국어학이나 시가 문학을 공부하려고 들면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문과로 들어갔습니다. 영어가 시원찮았는데 영시와 영시이론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권위자를 수소문해서 고려대학교 이인수 교수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47년 영문과 편입시험을 쳤습니다.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일본군 군복차림으로 편입시험을 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20여 명이 시험을 쳤는데 영어 시험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명 붙었는데 저였습니다. 47년 9월에 영문과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김종길의 시세계를 논하다


강경희 : 한문학도 그렇고,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군요. 선생님의 시「성탄제」에서 아버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말씀 중에도 아버님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김종길 : 그것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증조부, 증조모, 조모 세 분께서 어머님 대신 역할을 하셨습니다. 어릴 적에 아팠을 때 그 세 어른 정성으로 살았습니다. 「등잔불」이라는 짧은 시에도 들어 있습니다.

강경희 : 등단을 하시고 나서 처음 묶은 시집이 『성탄제』이지요?

김종길 : 혜화전문에 가서 시 습작을 하고 시 쓰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고려대학교 영문과 학생이 되니 일부러 시를 억제했습니다. 고려대학교 다닐 때는 「다리」등 몇 편, 거의 시를 안 썼습니다.

졸업하고 6.25 피난을 하고 52년 봄부터 대구에서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의 강사를 동시에 했습니다. 그래서 시를 별로 안 썼고 53년 성탄제 무렵에「성탄제」를 썼고, 58년에 고려대학교로 다시 올라와서는 다시 잘 쓰지 않았습니다. 60년 4.19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봉변을 당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다음해인 4월 18일에 4?19를 기념하기 위한 시를 고려대학교 신문사에서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해서 「교정의 잔디가 다시 푸르듯」, 「설날 아침에」를 고대 신문에 발표했습니다.

69년에 『성탄제』 시집 내고도 별로 안 썼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많이 쓰게 됐지요. 

강경희 : 『해가 많이 짧아졌다』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선생님의 시는 초기에는 감각적이고 따뜻한 정서를 많이 보이셨습니다.

김종길 : 나를 감각적인 이미지스트라고 말합니다. 이미지에 치중하고 감각에 치중한다는 것은 시라는 것이 느껴서 알 수 있게 쓰는 것이므로 감각적이거나 정서적이어야 시인이라 생각합니다.

강경희 : 저는 「겨울 아침 풍경」이라는 시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김종길 : 그 전에 유럽 갈 때 시베리아 상공에 접어들면서 쓴「낙조」라는 시가 있습니다.『달맞이꽃』에 실려 있는데, 오후 세시였는데 해와 비행기가 서쪽으로 같이 가는데 해가 먼저 가는 풍경을 쓴 글이었습니다.


시베리아 영공으로 접어들면서

비행기와 함께 가던 하오의 해가

마침내 비행기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바이칼호 북쪽 어디쯤일까.

광막한 대지엔 땅거미가 지건만

인가의 불빛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우랄 산맥 위를 지나도

공중에선 낙일이란 없다.

다만 활처럼 휘어진 검은 지평선 위로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시뻘건 낙조,

검은 땅덩이의 상처를 동여매는

흠뻑 피에 젖은 한 가닥 붕대.


러시아,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비행기가 거쳐 가는 유럽의 하늘은

어디나 온통 피를 흘리고 있다.


강경희 : 이런 표현을 보고 선생님을 이미지스트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읽으시는 목소리도 너무 멋지십니다.

『황사현상』에서는 시가 변모하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비판적인 역사관도 느껴집니다.「솔개」는 선비적인 세계관을 보이시는데 시인에게 시적인 변화와 전환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일 텐데요?

김종길 : 시를 적게 쓸 때인 초기시는 이미지 중심으로 시의 예술성을 추구를 했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시에 인생에 끼어듭니다. 예술지상주의 인간주의가 하나의 딜레마인데 예술이냐 인생이냐 에서 예술 쪽에 치중을 했는데 나이가 드니 도리가 없어졌지요.

강경희 : 선생님 시론집 제목처럼, 『시와 삶 사이에서』 동요하셨네요. 젊은 시절에는 작품이 많지 않으시다가 나중에 작품이 많아지셨네요.

김종길 : 나이가 드니 그만큼 예술적 긴장을 유지하기 어렵고 안이해지기도 해서 작품이 많이 씌어지곤 했습니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에서 강 선생님이 마음에 드는 시는 무엇이었습니까?

강경희 : 저는 첫 번째의 「가을」이라는 시가 좋았습니다. 직관과 삶에 대한 혜안이 느껴집니다. “먼 산이 가까이 다가선다”라는 표현은 가시적인 현상뿐 아니라 생의 연륜과 깊이를 느끼게 합니다.

김종길 : 나는 작품을 전에부터 늘 하나의 구조로서 생각했습니다.

“여울을 건넌다.// 풀잎에 아침이 켜드는/ 開學 날 오르막 길.//(…중략…)// 은피라미떼/ 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 아침 풀벌레 소리”

아침 풀벌레 소리를 은빛 피라미떼로, 공감각적인 것이지만, 단순한 이미지로 보지만 거기에도 구조적인 고려가 있습니다. 여름에 물에 닿아 본적이 없는 모래밭처럼 여름동안 뜨거운 모래밭, 여름에 없으면서도 자연히 ‘여울물-모래밭-은피라미떼’ 연결이 됩니다. 그것이 구조입니다.

강경희 : 정형률의 시, 리듬의 어조에도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종길 : 운율, 리듬을 타야 합니다. 시상, 상념이 가락을 타야 합니다. 모더니스트들은 무시를 하지만 무시하는 것도 하나의 리듬이 됩니다.

강경희 : 지적인 긴장과 도사림으로 시를 썼다고 하셨는데요.

김종길 : 적게 썼고 단순해 보이지만 상당히 끙끙거렸습니다. 「황사현상」도 오한, 봄 가뭄, 황사, 일련의 처음부터 유사한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강경희 : 시 창작뿐 아니라 문학이론에 관한 집필도 많이 하셨지요. 

김종길 : 가르치는 처지니까 했고, 젊을 때부터 시 자체도 그렇고 시 이론도 재미있었어요. 대구사범학교 다닐 때 ‘폴 발레리’에 가장 심취했어요. 난해했고 발레리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섬광 같은 것을 느꼈고, 현란한 산문도 난해한 것도 있지만, 잘 모르는 채로 심취했습니다.

발레리는 엄밀하고 경쾌한 글인데, 첫 산문 저술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에 관한 서설』( Introduction a la methode de Leonard de Vinci), 이라는 것인데 다빈치의 좌우명이 ‘완고한 엄밀성’ 입니다. 발레리도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테스트 씨와의 저녁시간』( La Soiree avec Monsieur Teste) '테스트 씨' 의 서문에 나오는 말인데, 발레리의 ‘정확이라는, 정밀이라는 쓰라린 병’이라는 그 어귀는 다빈치의 ‘완고한 엄밀성’과 비슷합니다. 그것을 하나의 쓰라린 병처럼 앓았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것을 소년시절에 심취했습니다.

강경희 : 선생님을 엄격과 절제의 시인이라고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김종길 : 인간적으로는 절제란 유림 사람들의 체질이라고 합니다.

강경희 : 가끔은 외도나 충동적이나 다른 길을 가겠다고 생각하실 법도 한데요.

김종길 : 다섯 살부터 한 번도 딴 생각 해본 적이 없습니다.

강경희 : 선생님의『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보고 저는 다시금 ‘시를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즘은 시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예전에 비해 오히려 힘들어졌습니다. 학생들의 관심이 그만큼 문학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김종길 : 《신동아》에 「시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가 시의 효용, 가치를 이야기했지만, 시는 심미적인 경험을 갖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의식의 확대입니다. 개인은 자신의 세계 속에 틀어 박혀 있는데 자신의 테두리에 벗어나면 사사로움에서 벗어납니다. ‘무사’입니다. 무사의 정신은 중요하고 문학, 비평의 정신에서 중요하다고 봅니다. 일본의 고바야시 히데오의 평론집 중에「무사의 정신」있습니다. 무사의 경지에 이르게 만드는 시, 인간의 높이는 경지에 도달하는데 매개체가 되는 것이 예술입니다.

《현대문학》에 연재했다시피 엘리어트도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을 중시했지만, 두 번째 연재한 윌리엄 엠슨(William Empson) 도 기인인데 그가 사상적으로 가치 있다고 한 것은 자신이 영국 사람이 영국 사람이라는 아이덴티디(identity)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국가나 민족을 초월해서 세계인적인 정신을 중요시했어요. 엠슨은 기독교 세계의 사람이면서 비기독교인이었고, 반기독교였습니다. 대신 불교를 높이 평가합니다. 기독교를 나쁜 종교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속했다는 그 잔인성이 잔인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것을 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공리주의적인 것이지요. 선은 기쁨을 주고, 악은 고통을 주는 것, 공리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하듯이 기독교의 역사가 고약하다고 보았습니다. 불교에는 그런 것이 없어서 높이 평가했습니다. 



시인이 품어야 할 가치와 철학


강경희 : 번역 작업도 많이 하셨습니다. 한시와 우리 시도 많이 번역하셨는데 한국번역문학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지요?

김종길 : 번역이 잘 되기가 어렵고 시의 번역이 어려운데요. 좋은 번역가가 없다는 것이 불만입니다. 좋은 작가를 길러 내야 합니다. 좋은 원작을 만들어야 합니다.

강경희 : 책에서는 성공적인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실적주의와 양적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하셨는데요?

김종길 : 많이 번역하면 좋다고 하면 번역의 질이 보장이 안 됩니다. 번역은 반 창작입니다.

강경희 : 작년에 우리나라가 프랑크푸루트 도서전에서 주빈국으로 초청되었는데요. 노벨문학상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지요.

김종길 : 그 이야기는 그만 했으면 합니다. 자연히 작가, 시인이 있으면 좋은 번역이 나오고 그러면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는데, 노벨상을 목표로 해서 야단법석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노벨문학상은 문학은 예술이기 때문에 꼭 이 사람이 탄다는 보장이 없어요. 작년 대산 재단에서 세계문학 행사에서 마가렛 드레불이라는 여류 소설가가 왔어요. 그녀가 말하기를 상이라는 것은 제비뽑기라고 말했습니다. 상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한국문학이 성숙해진다고 봅니다.

강경희 : 다시 작품이야기로 돌아가지요. 산과 관련된 작품이 많으신데요.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시인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철학을 듣고 싶습니다.

김종길 : 평범한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강경희 :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시요?

김종길 : 인간이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강경희 : 젊은 시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김종길 : 요즘 젊은 시인들이 시집을 많이 보내주는데 일일이 못 봅니다. 더러 보려고 하면 좋은 시인들이 많이 있지만, 뭔가 개성이나 현대성을 추구하느라 너무 괴짜이게 시풍을 보이는 시가 많습니다.

내가 시에서 특수와 보편이라는 말을 했는데, 특수한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데 괴상하게 쓴다는 것은 개인적인 사적인 특수성입니다. ‘무사’의 정신을 가지고 보편성을 가지고 다 통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읽고 공감 할 수 있는 보편성에 유의를 했으면 합니다.

강경희 : 선생님께서는 전통 서정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형률의 시와 기교와 방법론에 대해 고민을 하셨는데, 요즘의 서정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종길 : 특이한 투로 쓰는 시인이 있는데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궁리와 모색하는 결과가 그런 투이지만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는 스스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자기 자신에 박혀 있으면 자신을 모릅니다. ‘무사’와 보편성과 세계정신과 관계가 있습니다.


같이 했던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선생님은 즉석에서 한시 한 자락을 읊으셨다. 구수하고 낮은 목소리. 술 한 잔이 들어갈 때마다 쏟아지는 이야기들. 청춘, 사랑, 문학, 늙음. 선생님의 이야기에 취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밥집 아줌마도, 누렁이도, 엿듣고 있던 북한산도 한껏 달아올라 있는 게 아닌가. 《문장 웹진/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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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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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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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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