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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의 한국소설, 혹은 경계를 넘어서는 글쓰기의 열망

  • 작성일 2006-06-01
  • 조회수 6,093

 

[창간 1주년 기념 특별좌담]


2000년대의 한국소설, 혹은 경계를 넘어서는 글쓰기의 열망



사회자 : 손정수(문학평론가)

토론자 : 손홍규(소설가), 김중혁(소설가)

         김애란(소설가), 한유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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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수(이하 ‘사회자’) : 오늘 좌담은 웹진《문장》 창간 1주년을 맞아 한국문학의 현재를 젊은 작가들과 함께 살펴보는 기획좌담입니다. 특히 이번 좌담은 최근 한국문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로부터 문학 생산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자리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자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네 분의 소설가를 모셨는데요, 김중혁 씨, 손홍규 씨, 김애란 씨, 한유주 씨,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표정


사회자 : 시대에 따라서 문학의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 최근에는 이 변화가 대단히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날 한국문학은 지난 시대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같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장르가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성격이 이전 시대와는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날 우리 소설의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몇몇 장면들을 이야기하면서 전체적인 지형을 조금씩 그려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선 김중혁 씨부터 과거와는 달라진 요즘 문학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현상들, 작품들, 제도들을 이야기해 주시죠.


김중혁 : 제가 80년대 학번이기 때문에 그 말을 하기에 제일 적당한 사람이긴 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전 소설들은 ‘이것이 어떤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식의 감(感) 같은 것이 잡혔는데, 최근 소설들은 그런 것이 별로 없어요. 소재나 방식이 자유로워진 것 같고, 그 중에서도 소재가 제일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예전 소설은 정치적 현실과 사회적 상황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 적어진 것 같습니다.


사회자 : 그 말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 소설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문제 삼았다면 2000년대 소설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오히려 더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상상이나 꿈이라든가, 어떤 소설들은 외계가 등장하기도 하고…….


김중혁 : 김애란 씨나 한유주 씨는 어떤 책들을 보면서 소설 공부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예전에 임철우, 이인성, 최수철 같은 선배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소설 공부를 했습니다. 요즘 소설가 지망생들도 그런 작품들을 보나요?

 

김애란 : 우리 세대에게도 이전의 텍스트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또 분명히 어떤 울림과 감동을 주는 건 사실입니다. 그것이 혹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역사나 고민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학’이기 때문에 줄 수 있는 뭔가가 있고, 제 작품 안에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저 스스로도 몰랐는데, 그것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계보’가 있고 또 소설을 공부할 때 바깥에서 만들어졌거나 혹은 스스로 형성된 텍스트의 질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도 그것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텍스트들이 훨씬 다양해진 느낌입니다. 사다리나 그물을 타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놓인 징검다리들을 되는 대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다 보니까 강을 건넜고, 건넌 뒤 ‘아, 여기는 여기였고, 저기가 거기였네!’라고 깨닫는 순간도 있는 것 같구요.  


사회자 : 예전에는 장르간의 경계도 뚜렷했고, 문학을 공부하려면 앞시대나 동시대의 문학을 통로 삼아 진입했는데, 요즘은 진입하는 통로가 더 다양해지고 서로 얽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문학에 접근하는 통로 자체가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해졌다고 할 수 있겠죠. 손홍규 씨는 네 분의 작가 가운데서는 기존의 소설적 전통에 가장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80년대 문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손홍규 : 우물을 파려고 열심히 삽질을 했는데 10m, 20m, 30m 파도 물이 안 나오니까 모두들 우물파기를 멈추고 떠나갔지요. 우물 판 자리와 버려진 삽만 남아 있는 풍경이 90년대 풍경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의미로 제 소설이 기존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고 많은 작가들이 제각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기존의 소설적 전통을 이어가는 것도 하나의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선배들이 버리고 간 삽을 주워서 다시 우물을 파는 자세로 글을 쓰는 것 말이지요. 변화의 시초가 제 학번 대(代)인 것 같습니다. 제가 93학번입니다. 그때에 정치권력도 군부에서 문민으로 넘어왔고 또 포스트모더니즘이 화두로 떠올랐던 즈음이지요.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문학적 표현방식들과 창작의 방법들,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세상과의 괴리감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할 것인가, 습작기를 지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때도 ‘광장’이나 ‘밀실’ 같은 표현을 많이 썼습니다. 광장으로 가던 시대가 있었지만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밀실도 들여다봐야 하고, 결국에는 광장이라는 것도 그 안에 밀실을 품고 있거나 광장처럼 커다란 밀실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 문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변화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 시대 문학의 전제는 여전히 유효한가?


사회자 : 80년대부터 이어오던 문학적인 전제들이 여전히 유효한가, 이런 문제에 대한 생각도 다를 텐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 손홍규 씨 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특히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손홍규 :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런 식의 소설들이 80년대 주류였잖아요. 주류란 때린 사람들입니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가니까 다시 주류가 비주류가 된 격인데, 한때 때렸던 사람들이니까 맞는 게 고통스럽기도 할 겁니다. 80년대 선배들이 90년대에 갈피를 못 잡고 헤맨 것 같습니다. ‘뭐가 유효한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은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어떤 시대든, 어떤 작품이든, 좋은 작품, 좋은 소설이라는 것은 통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한유주 씨도 이전 시대의 문학적 전통과 어떤 면에서 상당히 가깝게 닿아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문학으로 넘어오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작품 경향이 어떤 지점에 놓여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고민을 나름대로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한유주 : 김중혁 씨가 무슨 소설을 봤는지 궁금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고등학교 시절 오정희 선생님과 이인성 선생님의 소설을 좋아했었어요. 그리고 그때 영화 붐이 일었는데 그 때 많이 본 영화가 제 소설에도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이전 시대의 문학과 제 것이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성장 배경이나 살아온 장소, 국가,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영향을 받고 있고 영향을 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지만 도덕 문제에 관심이 많고, 적어도 글은, 그런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도덕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쓰고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옛날 것들, 지나간 문학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소설을 그렇게 안 보는 분들도 많다고 들었고 사석에서 “잠꼬대 같은 소설 쓴다, 몽상 아니냐, 꿈 같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저는 그런 문체나 태도를 취한 거예요. 전략적인 것은 아니지만요.


사회자 : 제가 앞에서 한유주 씨 작품이 ‘이전 시대 문학적 전통과 어떤 면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한 것은, 가령 80년대 문학의 한 갈래가 모더니즘 계열의 시와 소설이었는데 그 작품들이 했던 일은 언어를 가지고 하는 전위적인 실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실험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현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기 때문이죠. 손홍규 씨한테 80년대 문학적 전통이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는 80년대에 운동으로서의 문학의 측면을 질문한 것이고, 한유주 씨께는 이 전제들, 이런 언어의 실험이 지금도 유효하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한유주 : 적어도 저한테는 유효하다고 봅니다. 굉장히 고민이 많이 되는 부분인데 언어를 사용할수록 그 의미가 적확하지 않다는 것을 계속 깨닫게 됩니다. 언어 문제는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예요.


사회자 : 한유주 씨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하면, 최근 봄호 문예지를 읽다 보니 김원일, 이청준, 박완서 선생님처럼 연배가 높은 분들의 작품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혹시 이런 현상의 원인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독자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그러니까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독자들이 잘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네 사람 가운데 한유주 씨가 특히 민감할 듯한데요.


한유주 : 가독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저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는 등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작품 수도 많지 않고요, 소설이 허구를 바탕으로 한 서사라고 정의를 내리면 거기에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는 것 같거든요. 읽히든 그렇지 않든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저도 서사를 잘 다루고 싶은 욕심은 많은데, 전통적인 소설 방식에만 소통 가능성의 여부가 달린 것은 아니잖아요. 새로운 글쓰기만큼이나 새로운 읽기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회자 : 김애란 씨 경우는 어떻습니까?


김애란 : 소설의 표정이 달라졌다고 해도 얼굴 자체가 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게 영향을 주는 텍스트들이 다양해진 만큼 소설의 표정 역시 풍부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전 선배들이 붙잡고 있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는데요, 역사 바깥에 서고 싶은 의지가 제게 있다고 하더라도 앞선 흐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좀 어정쩡한 것이 있고, 그 안에서 약간 제가 기웃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여전히 사회적인 폭력이 사라지지 않았고 자신에 대한 물음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어정쩡한 틈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 상상이나 환상과 같은 무언가로 변신한 느낌도 들고요.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소통에 대한 자의식

 

사회자 : 예전에는 어떤 특정의 문학적 경향이 있고 이 경향이 새로운 경향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시점 이후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앞에 있던 것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경향들이 덧붙여지면서 확장되고 여러 겹들이 공존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우리 문학의 층이 두터워졌다는 것이죠. 최근 우리 소설에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가 젊은 작가들이 등장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가령 한유주 씨나 김애란 씨, 김유진 씨 등 80년대 생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흐름들이 더 빠르게 진행되지 않나 싶어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소설을 쓰면서 생기는 의식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은 경험도 쌓이고 경륜을 가지고 써야 한다는 의식이 일반적이고, 실제로 그것을 위한 체험과 경험 쌓기를 일종의 소설 수업이라고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시선들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시선들과 자주 부딪히지는 않습니까? 김애란 씨의 경우는 어떤가요.


김애란 : 약간 이중적인 기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20대 작가가 드물어서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젊음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과 함께 망설임과 의심도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하나의 언어로만 쓰는 것이 아니니까……. 직관으로 얻어지는 것도 있고, 공부해서 얻어지는 것도 있고, 몸에서 나오는 말들도 있는데, 소설에 따라 그 작품이 요구하는 언어가 달라질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말이 그 이야기에 적합하다면 그 이야기가 그 말을 원했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경험 이전에 우리가 왜 그런 말과 그런 이야기를 불러오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자 :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 문제도 있고, 또 그와 관련된, 그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소통의 장벽들도 있는 것 같아요. 한유주 씨는 어떤가요? 요즘 소설들이 예전에 비해 쉬워지는 경향도 있는데 한유주 씨는 이런 경향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최근 한유주 씨 소설에는 그런 것에 대한 자의식 같은 것이 읽히곤 하던데요.


한유주 :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한테는 지금 25살이라는 시간이 삶의 최대치잖아요. 지금 아니면 휘발되고 말 것 같기에, 한국에 사는 20대로서 가지고 있는 것을 지금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80년대에 태어났고, 그 뒤로 제가 겪은 큰 사건이나 거대한 경험 같은 것은 2001년 9?11테러밖에 없었거든요. 제 나이는 별다른 경험을 겪지 못한 나이인데요, 이런 것을 쓰기에는 지금이 오히려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자 : 또 우리 문학의 새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가 나이에 맞는 작품을 쓰는 것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측면입니다. 80년대 소설은 남자 작가가 썼는지 여자 작가가 썼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고, 이 소설을 쓴 사람의 연배가 어느 정도 되는지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소설들은 작품을 보고 작가의 성별을 확인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워졌고, 나이 역시 작품 속에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아요. 가령 우리가 같이 모여 있지만 김중혁 씨 같은 경우에는 한유주 씨보다 11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문학적 경향으로 본다면 어떤 사람이 더 젊다 이야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변화를 김중혁 씨는 어떻게 실감하나요?


김중혁 : 김애란 씨의 소설을 예로 들어보면, 20대 초?중반 여성의 목소리를 김애란 씨가 내 주었기 때문에 한국소설의 지평이 굉장히 넓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봐왔던 여성작가들의 소설에는 30대 초반의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왜 김애란 씨의 소설 같은 작품이 지금까지 없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동안 작가의 경험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치고받고 싸우는 과정 속에 있는 20대의 소설이 좀 드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식의 소설들이 많이 나오면 한국소설이 좀 더 많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고 목소리도 더 다양해질 것 같습니다. 한유주 씨는 자신의 독자층이 없다고 하지만 제 생각에는 한유주 씨의 몽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게 가독력이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주제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사회자 : 김애란 씨 소설에는 주인공이 남성인 경우가 더 빈번합니다. 지금은 여성 작가, 여성문학이라는 말을 잘 쓰지는 않지만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여성으로 글을 쓴다는 의식을 두 분이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애란 : 성을 떠나서 이름도 별로 없습니다. 어떤 인물들을 불러올 때 ‘민수야’ 혹은 ‘철수야’ 하고 이름을 불렀을 때보다 ‘그’라고 부르거나 ‘그녀’라고 부를 때 저한테 그 인물이 훨씬 가깝게 느껴집니다. 이름을 먼저 부르면 인물이 정말 타자처럼 느껴지는데 ‘그’라고 부르면 그 사람 이름을 내가 천천히 만들어주면서 알아간다는 느낌이 소설을 쓰는 도중에 생깁니다. 왜 순희, 명수, 영희라는 고유명사보다 보통명사가 저한테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에게 와서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인 듯해요. ‘현대는 익명성 사회’라는 것을 의식해서 그렇게 쓴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성하고도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성이나 남성, 모든 인물들이 저한테 “내가 누군지 얘기해 줄래?” 하고 다가오는 괄호들처럼 느껴지고, 그게 제가 좋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것 같아요. 앞으론 어떻게 될지 저도 궁금합니다.


한유주 : 저는 여자든 남자든 그냥 ‘그’를 쓰는데 먼저 ‘그녀’가 ‘그’와 정확히 대칭되는 호칭이 아닌 것 같아서 그렇고요, 주어를 일부러 삭제하는 경우는, 제 안에는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인물들이 있다고 생각해서이거든요. 단지 남성과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은 목소리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이 제게는 더 중요한 듯싶어요.


사회자 : 최근에는 오히려 남성들이 남성으로서 글을 써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두 사람의 경우에는 젠더와 관련된 문제를 어떻게 느끼고 있나요.


손홍규 : 일단 제 소설은 다분히 서사 위주고 이야기를 많이 풀어내려고 하다 보니 목소리가 남성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쓰고자 하는 한편의 소설이 있다면 그 소설의 틀 내에서 가장 적합한 목소리를 고민하다 보니 때로는 아이가, 때로는 여자가, 때로는 남자가 될 수 있고 성이 없는 색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데요, 평소에 그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김중혁 : 제가 쓴 소설에서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남자입니다. 개인적으로 단편소설이 제 개인의 확장 같은 것이라서 여성이 주인공이 돼버리면 굉장히 불편하더군요. 영화 〈매트릭스 3〉에서 스미스가 계속 복제되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나’라는 것이 복제되어서 그들이 서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설정할 때가 제일 편합니다.



한국소설에서 이름이 사라지고 있다?


사회자 : 김애란, 한유주 씨 이야기에도 나왔는데 최근 소설에서 의미 깊게 생각되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고유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물들의 이름도 없어요. 예전에는 1인칭이더라도 이름을 가졌지만 김중혁 씨 소설에는 이름들이 없지 않습니까. 80년대 소설이나 옛날 소설을 보면 다 이름이 있습니다. 「무진기행」하면 윤희중이 있고 하인숙이 있고, 다 이름이 있죠. 여기서는 손홍규 씨 소설이 상대적으로 인물들이 이름을 갖는 비중이 큰 것 같고 나머지 세 작가는 거의 이름 없는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의식한 결과인지 아니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이야기를 해보죠.


김애란 : 처음에는 사실 의식하고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상품의 고유명사들은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 작품에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상품이나 사물들 고유명사는 더 풍부해진 반면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름은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것은 소설에서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미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아이디를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이름이 아니라 취향이나 이름을 구성하는 다른 것들을 궁금해 하고, 그것으로 소통하려 합니다. 재미없는 말이지만 인터넷문화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상품의 이름이 구체적인 건, ‘소비에 있어서 나의 욕망은 아주 구체적’이라는 환상 때문일 것 같습니다. 내가 만일 뭔가 원한다면 그것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어느 회사, 어떤 라인의 몇 호 제품’이라는 식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요. 이름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인물의 성격이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소설가가 그 인물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이름하고 성격의 관계보다는 단지 이름만 삭제되거나 흐려지는 느낌이 듭니다.


손홍규 : 저도 1인칭 소설 같은 경우는 이름을 거의 부여하지 않습니다. 예전 소설은 반드시 이름을 부여했는데, 우리 시대의 흐름과 닮아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은 부여받는 것입니다.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한테 준 것입니다. 자기 이름에 집착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기 아이디, 별명에는 집착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만든 것이니까요. 무언가가 나에게 규정되어 있고 뭔가 항상 해왔던 것들만 해야 된다는 것이 지겨웠습니다. 다만 그것을 깨뜨리고 나가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주춤주춤 했습니다. 여기에 없지만 박민규 같은 작가는 나이는 많지만 우리 문학의 외연을 넓혀준 사람입니다. 조금씩 서로의 개성과 특징을 가지고 자기의 소설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많아집니다. 


김중혁 : 전 이름을 안 쓰는 이유가 굉장히 단순합니다. 이름 짓는 게 너무 귀찮아요. 이름을 지어보려고 고민을 많이 하다가 결국은 못 짓습니다. 1인칭으로 소설을 쓸 때도 누군가 나를 불러야 하잖아요. 어떻게 안 부르고 넘어갈 수 없을까, 그러다 보면 별명을 생각해내게 돼요. 이름을 지어버리면 어떤 이미지의 사람을 연상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철수 하면 이런 사람, 영희 하면 저런 사람이 연상됩니다. 그런 연상이 싫기도 하고 이름이 생기는 순간 이름만으로 캐릭터가 고정되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이름을 못 짓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유주 : 일상적인 이름이 소설 안에 들어오면 인물이 평면화된다고 해야 할까, 일차원적인 것 같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이름들이 환영이나 환희 정도였는데요, 얼핏 들으면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전적 뜻을 가진 단어들을 알레고리처럼 사용하는 편이 제게는 더 적절한 듯싶어요.


사회자 :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름들이 있는 인물의 세계는 현실에 대한 환유의 차원에 놓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허구를 통해 현실을 환기시키고 발견하려고 하는 열망에 대응되는 것이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세계라면, 최근 소설들에서는 허구를 통해 현실을 환기하고자 하는, 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유주 씨 이야기처럼 이름들이 현실 속에서 떠올리는 것을 아예 이름 자체가 차단해 버리는, 달라진 문학적 성격에 대응되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뉴미디어 시대 문학적 상황의 변화


사회자 : 잠깐 인터넷 이야기도 나오고 했는데 이전 시대의 문학이 문학의 소재나 모티프를 현실 속에서 흡수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 경로가 넓어졌고 다양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작가들은 소설의 모티프, 동기들을 어떤 관계 속에서 접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김중혁 : 영화나 대중문화에 가장 먼저 문학적 반응을 보인 것이 우리 세대였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영웅본색〉을 보면서도 저것이 문학의 모티프로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포스터모더니즘이 들어오고 몇몇 선배 작가들이 대중문화를 소재로 쓴 소설을 보면서, 아, 저런 것도 문학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먼저 문화를 경험하고 이후에 그게 모티프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게 우리 세대라면, 요즘은 문화를 접하는 순간 문학의 모티프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대학교 때 시네마테크를 돌면서 희귀 비디오를 빌려보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오락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영화에서는 모티프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주로 책이나 음악에서 많이 얻는 편입니다.


손홍규 : 저는 TV에서 〈가족애의 발견〉이나 〈인간극장〉과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뭐 하러 소설을 쓸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전 선배들처럼 소설이 혁명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안 읽으면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었습니다. 〈가족애의 발견〉같은 드라마를 보면 소설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그렇다 해도 제가 소설가인데 자기를 부정해버리면 안 되잖아요. ‘나는 무엇을 쓸까’라고 물었을 때, 그 답은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의 문학을 두고 이전의 문학에 비해 가볍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과거의 소설가들이 무임승차한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자체의 갈래가 가진 특징을 극대화시켜서 소설이 우리 사회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인문학에 편승해서 소설과 소설가들이 살아남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느 정도는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금 소설의 기본으로 돌아가고 소설 자체로 돌아가는 것은 가볍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소설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과거처럼 소재들과 주제가 한정되어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어렵습니다. 너무 많기 때문에 겪는 혼란이지 본질적으로 소설이 몰락해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소설 같은 것들, 소설적인 것들을 보면 무조건 쓰려고 합니다. 듣는 얘기라도, 지나가다 보는 것도 이야기가 될 것 같은 것들을 쓰려고 합니다.


김애란 : 저 같은 경우는 소재를 오히려 일상적인 것에서 찾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계속 가로등이 신경 쓰인다, 저게 계속 날 신경 쓰게 만들면 가로등이 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도 있습니다. 일상적인 것에서 주는 작은 우울들이나 기쁨들이나 이런 것들을 신뢰하는 편이구요. 계속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만, 우선 저는 주위의 작은 것들이 줄 수 있는 공감과 일상적인 부분을 더듬는 일에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심심하면 다른 세계로 점프도 해보고, 딴 생각도 하고 그랬던 것 같고요.


한유주 : 소재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제가 제일 할 말이 없는 것 같은데요, 소재를 그저 생각들에서, 내 감각들에서 가져온다고 하면 어떨까 싶어요. 제게는 음악이 중요한 소재지만, 무슨 교향곡 몇 번, 그렇게 곡명(曲名)을 제 글에 그냥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듯싶고요, 음악을 글 전체에 통째로 녹여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어떤 스타일이나, 음악의 형식적인 면을 차용한달까요.


사회자 : 외부를 향해 출발했던 시선이 소설적 의식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는 과정이 상당히 여러 경로를 접속해서 형성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가운데 90년대에는 대중문화와 소설이 접속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있었는데, 2000년대 소설은 그런 것은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에 비례해 블로그나 여러 가지 이 시대의 매체들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뉴미디어 이야기가 나왔는데 실제로 활자매체의 영향력 자체는 20세기 이래로 꾸준하게 하향 추세를 그려왔고, 활자를 가지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대해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것을 어떤 방식으로 의식하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중혁 : 저는 종이책이 아닌 것으로는 글을 거의 못 읽습니다. 블로그 같은 것도, 특히 스크롤의 압박이 심한 것은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구닥다리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활자가 찍혀 있는 종이가 주는 매력은 어마어마하고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혹은 피디에이(PDA), 전자책 이런 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볼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에는 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부동산 대책을 담은 전자책이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소설을 담기에는 아직까지 턱없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종이책을 읽을 때는 밑줄을 긋고, 책을 포개놓고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책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행동과 감정들 모두가 책을 읽는 행위입니다. 그런 여백이 사라지는 순간 소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적응이 잘 안 되는 편입니다.


손홍규 : 저는 지금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씁니다. 잡문 같은 것은 컴퓨터에 쓰기도 하는데 소설은 다 원고지에 쓰거든요. 동물적이죠. 잉크 냄새가 좋고, 손 움직여 쓰는 것이 좋고, 만년필이 지날 때 나는 삭삭 소리가 좋습니다. 뉴미디어가 우리 삶에 전반적으로 걸쳐 있기도 하지만 삶 전체를 볼 때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TV 본다고 제 삶이 풍요로워진다거나 인터넷을 한다고 제 삶이 현대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습니까. 또 어떤 것이 새로 나올지도 모르고. 그것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버린다면 어떻게 삶을 통찰합니까.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요?


김중혁 : 손홍규 씨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만약에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는데 그 글이 바로 활자화되어, 피디에이 문자인식처럼, 그렇게 바로 저장이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손홍규 : 그래도 아닐 것 같아요. 원고지에 다 써서 나중에 워드로 옮기는 재미도 있는데.


사회자 : 제가 어떤 글에서 김애란 씨 소설을 두고 포스트잇 글쓰기다 했는데, 김애란 씨는 어때요?


김애란 : 독서과정 자체가 창작과정과 비슷한 것 같고, 독서의 과정이 시각적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일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만져보고 냄새 맡고 밑줄도 긋고 접기도 하고 잠도 잤다가 읽는 모든 과정 자체가 독서에 포함된 것입니다. 저 역시 활자문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영화든 게임이든 작품을 구성하는 데 작품 외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오잖아요. 문학은 다른 장르의 기초 예술일뿐더러 작가가 자기의 온전한 세계를 표현할 수도 있고 장르적 한계도 덜한 것 같습니다. 저는 낙관적입니다.


한유주 : 뉴미디어를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 이면성, 다면성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활자의 매력은 저도 충분히 느끼는 바거든요.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하는 이유


사회자 : 어쨌든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은 소설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네 분의 작가가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한다면 최근의 소설은 예전 소설들에 비해서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계몽시키는 등 여러 가지 줄 것이 있었는데, 지금의 문학은 뚜렷하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것은 줄어들었다는 느낌입니다. 요즘 소설이 가벼워졌다고 지적하는 것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문학이 왜 존재해야 하느냐, 소설이 왜 존재해야 하느냐는 물음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들어보겠습니다.


김중혁 : 제가 그리는 세계는 도구에 대한 반성인 것 같아요. 새로운 기기들과 문명들을 보면서 과연 이게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하는 반성을 스스로 하게 되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생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바나나주식회사」였던 것 같은데, 도구가 진보할수록 사람들의 감각은 점점 더 퇴화되는 게 아닐까, 물건들이 많아지면서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고 있는가, 그런 반성들을 담고 싶었어요. 요즘 통신업체의 광고 있잖아요. ‘문자 메시지를 없애주세요, 긴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사진 기능을 없애주세요,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그런 식의 반성 같은 것이 지금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손홍규 : 저는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들 문학은 독자를 잃어가고 있고 자기들 안에서도 갈팡질팡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작품성, 예술성과 더불어 대중성을 확보해서 문학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고들 하시는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도 예술영화도 있고 대중영화도 있습니다. 대중영화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고 좋은 작품도 있습니다. 〈왕의 남자〉가 사회적 이슈가 됐잖아요.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천만 명 정도 봤으면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반성이라든지 새로운 가치라든지, 바뀐 것이 없잖아요. 그냥 여자 닮은 남자배우 하나 뜬 것이죠.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아나서 멋진 작품을 써 낸다고 해서 그것이 삶의 패러다임, 삶의 양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설 자체로 돌아가는 것, 겉으로 보기에는 왜소하지만 소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대중성이니 예술성이니 하는 말들은 아무 소용없고 소설 자체로만 중요합니다.


김중혁 : 〈왕의 남자〉를 천만 명이 봤는데도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고 하셨는데,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 천만 명의 생각을 한꺼번에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소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예술은 전체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 아니고 개인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 같아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때문에 예술이 위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왕의 남자〉는 그럴 만큼 좋은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인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한 거겠죠. 만약 훌륭한 작가가 대단한 작품을 쓰면 그 작품을 읽은 개개인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서 20년, 30년이 지나면 사회도 바뀌지 않을까요.


손홍규 : 원칙적으로 그 말에 동의합니다. 물론 천만 명이 봤다고 해서 획일적으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김중혁 씨는 문학이 어쨌든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잖아요. 저도 그것에 동의를 하는데, 말하자면 그런 소설도 있고 안 그런 소설도 있는 것이잖아요. 획일적으로 그런 소설만 좋다고 할 수도 없고, 나쁘다고 할 수도 없거든요. 〈왕의 남자〉를 나쁜 영화라고도 할 수 없거든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야 한다고나 할까. 자꾸 소설이 어떻게 될 것인가 얘기를 하다보면, 소설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마음이 좋지 않죠. 가라타니 고진의 어법에 따르자면, 전통적 의미에서 소설은 없는 것이다, 뭔가 새로운 장르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왜 굳이 소설이라고 하려고 하느냐 이런 얘기잖아요. 저도 그런 생각입니다.


사회자 : 김애란 씨는 가볍다는 지적을 많이 받지 않나요?


김애란 : 젊다든가, 발랄하다는 수사가 있긴 한데요, 가벼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가벼움이 어떤 효과나 전략으로 쓰이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 줄 수 있는 것들이 줄어간다고 했는데, 다르게 표현하면 문학이 줄 수 있는 것이 다양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성만큼은 어느 정도 긍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요, 미디어가 넘쳐나니까 대중들이 대개 수동적이고 쾌락적인 사람들처럼 오해되는데, 사실 인간은 생각에 중독된 존재라는 말을 인상 깊게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인간은 생각 혹은 사고에 중독된 존재들이고 그걸 가장 잘 줄 수 있는 분야가 문학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사회자 : 지금 70년생 작가들과 80년대생 작가 두 사람에 차이가 있단 생각이 들어요. 손홍규 씨 같은 경우에는 현실에 대한 의식이 잘 드러나는 편이고, 김중혁 씨 소설 속 인물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행태의 예술에 대응되는 행위들이 윤리차원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는 김애란 씨나 한유주 씨의 작품에 그에 대응되는, 그러니까 소설쓰기의 개인적 차원, 사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적인 차원과 관련되는 지점이 있다면 두 사람에게서는 그게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한유주 : 저를 구성하는 어떤 부분이 사회적이거나 윤리적인, 타자적인 부분으로 환원될 수 있고, 또 환원되지 않고 남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뭘 하는지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가만히 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응시한다고 해야 할까. 응시하는 과정을 글로 쓰기로 마음먹었고,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참여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동네》에 쓴 글을 봤는데…… 제 나름대로 응시하는 과정 자체가 참여라고,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김애란 : 우리가 달라지기 이전에 세계 자체가 변신해서 다가오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방식도 달라져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자본주의를 외계인이라 상상하는 영화가 있는 것처럼. 제가 만약 상상 속이나 내면 안으로 들어간다고 치면 그것 역시 사회 안에서의 상상인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할 때 고민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이게 왜 소설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구요, 내가 어떤 위치에서 얼마만큼 얘기를 할 수 있고, 어떨 때 진실할 수 있을까도 고민을 해요. 고작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편의점에서 물건 가지고 얘기하는 단상밖에 얘기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런 고민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얘기들을 하고 싶어요.



미래를 향한 글쓰기의 열망


사회자 : 네 분의 작가들은 다들 책을 한 권씩 냈거나 곧 낼 계획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단의 반응들도 있었고 대중들의 반응도 어느 정도 드러난 상황인데, 이제 또 다른 국면으로 이 작업들을 이어나가야 하는 단계에 놓여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데요, 첫 번째 소설집에 묶였던 작품들의 경향에서 어떤 방향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 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관련해서 생각하고 있는 우리 문학, 우리 소설의 미래상, 또 넓게는 우리 사회의 미래상도 짚어보면 어떨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손홍규 :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환상적인 상황, 사건, 인물들을 통해서 그것들이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을 환기시켜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를 두고 리얼리즘 문학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우회하는 방법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우회했다기보다는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봐요. 그래서 그런 단편들을 썼고, 첫 소설집으로 묶은 겁니다. 겨우 소설집 한 권 내놓고 방향전환 한다는 것이 우스운 얘기긴 합니다만 저는 환상을 수용했던 게 적극적인 인식이고 대응방식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더 상처라든지 내부와 같은 걸 깊이 응시했어야 했는데 눈이 아파서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좀더 현실에 천착하고 세밀하게 세상을 보는 그런 글을 쓰려고 합니다. 첫 작품집 내고 나서 바뀐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로 글 쓰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생각은 비슷한 것 같아요. 결국 세상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는 문제를 떠나서 말이죠. 저는 문단에 나와 독서의 폭을 넓혔을 때 다른 경향의 소설들을 읽고 굉장히 놀랐어요. 기성작가든 제 또래의 작가든 누구든, 느끼는 놀라운 점이 뭐냐면 그들은 천상 소설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였죠. 이야기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작가들이 다루는 사람들은 다 비루하고, 상처받고, 고통 받고, 그런 인물들이더군요. 여기서 재벌들 이야기나 ‘세상은 살 만하다’라고 쓰는 분은 없잖아요. 지금까지 회피하려고 했던 것들을 이제는 똑바로 지켜보고 좀더 부드럽고 좀더 세밀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


사회자 : 김애란 씨 소설의 인물들은 갈수록 어려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김애란 : 첫 단편집이 나온 뒤 고민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세계와의 거리 사이에서 당황하는 것도 같고요……. 거리 자체를 너무 넓게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과 밖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사이에 고무줄 같은 선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면서 고무줄 놀이하듯 왔다갔다 조금씩 변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구성하는 수집물 중에서 어떤 한 부분을 가지고 오해하거나 투정하거나 감탄하지 말아야지 생각합니다. 지금은 꼭 변화에 대한 강박은 갖지 않고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선 안에서 뛰어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 저는 한유주 씨 소설을 읽으면서 예전에 비해 진폭이 많이 줄어들었다, 가닥을 잘 모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유주 : 습작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처음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직 책은 안 나왔는데, 등단할 때는 막연히 제 책이 서점에 있는 것을 봐도 무심하게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부끄럽기만 해요. 제 책이 서점에 있다고 생각하면 저 혼자 있을 때도 얼굴이 붉어지고 그러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자신에 대한 검열이 강해요. 잘 쓰고 싶고요, 잘 모아가고 있다면 다행이구요.

 

사회자 : 아까 우리 문학의 미래상이나 우리 사회의 미래상에 대한 물음을 잠깐 던졌는데 질문을 너무 어렵게 한 것 같습니다. 쉽게 바꿔보면, 문학 독자들이나 문학에 관계하는 사람들, 이런 나를 바라보는 외부의 대상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중혁 : 제가 가장 최근에 책을 낸 사람인 것 같군요. 처음에 소설을 쓸 때는 이것을 누가 읽을까에 대한 생각을 거의 안 했습니다. 책을 내고 나니까 누군가 읽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니까 누군가 사긴 사는구나 싶더라구요. 독자라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됐습니다. 소설 쓰기가 독자들에게 교양을 심어주거나 계몽을 하거나 하는 그런 차원의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블로그라는 것이 개인의 생활과 생각이 집결되어 있는 것인데 저는 제 소설이 블로그처럼 제가 조금씩 커가고 넓어지는 과정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제 소설을 한 편 두 편 읽을 때마다 ‘내 주위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새로운 세상에 이렇게 대응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라고 싶은 것은 많은 작품들이 외국어로 번역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외국에 번역되는 한국 작품들을 보면 한국의 특수성에 의해서 선정되는 것이 많은데 외국 사람들도 한국에서 동시대성을 발견할 수 있으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한국의 손홍규, 김애란, 한유주라는 작가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구나, 그런 것이 오히려 더 새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의 특수성도 필요하지만 동시대성에 좀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런 번역이 많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김애란 : 독서는 사람들이 ‘기꺼이’ 하는 노동 같아요. 장르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관에 갈 때 사람들은 보통 이완을 위해 가는 경우가 많은데 독서는 어깨도 눈도 아프고 시간도 들여야 되고 허리도 아프고 정신과 아울러 육체에 굉장한 노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하는 노동인데 왜 그것을 기꺼이 할까 생각들을 해보면서 고민들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사회자 : 대담 중에도 나왔지만 성이 구획해 놓은 테두리 내에서 글쓰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방식으로 세대의 경계도 예전에 비해 많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또 국민국가나 공동체의 경계도 소설 속에서는 자유롭게 넘나드는 장면이 점점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나이, 성별, 계급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한 사람의 생각이나 존재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 나간다면 우리 시대 작가들의 경계를 넘어선 글쓰기에 대한 열망들, 그 열망의 궤적들이 그런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증거로 남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점에서는 문학에 관계하는 여러 작가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대목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들 좌담이 처음이었고, 저 역시 이런 것을 많이 해본 경험이 없어서 서툴렀습니다. 네 분 모두 고생들 많았습니다.《문장 웹진/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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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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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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