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정의된 의미와 정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문학

  • 작성일 2006-10-31
  • 조회수 3,090


 

정의된 의미와 정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문학




대담 송영(소설가)

진행.정리 전성태(소설가)



intro 

등단 40년을 돌아보며... 

소설의 문학적 특징 

음악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우리는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살았다


전성태  《웹진 문장》 ‘작가와작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송영 선생님을 모시고 재미있는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송영  예, 오랜만입니다.

전성태 간간이 전화 통화는 했습니다만 만나 뵙는 것은 한 4년 만인 것 같습니다. 2002년 무렵 이곳으로 막 이사 오셨을 때 선생님께서 우스갯소리로 여기까지 밀려와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쪽에서 지내시기는 어떠세요?

송영  바깥 출입을 거의 안 하고 지냅니다. 광주에 온 지 4년째 되는데 공기도 맑고 살기 좋습니다.

전성태  최근에 러시아를 석 달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 여행은 괜찮으셨어요?

송영  고생도 조금 했지만 여러 가지로 유익했던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었죠.

전성태  주로 모스크바에 머무셨나요?

송영  고려인 작가 ‘아나똘리 김’ 그 양반의 도움을 받아서 주로 모스크바에 있었지만 모스크바에서 차로 한 네댓 시간 걸리는 라단 지방에서 열흘 정도 머물기도 했어요. 아나똘리 김의 별장이 있는 곳입니다. 아나똘리 김의 소개로 그 지방 작가들도 많이 만났어요. 그리고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장원’ 행사에 러시아 작가들 백여 명이 모였는데 처음으로 그 모임에 참석해서 아주 뜻 깊었어요. 러시아 작가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토론도 하고 서로 얼굴인사도 하고 좋은 얘기도 많이 듣고,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냈어요.

전성태  선생님은 러시아에 네 번째쯤 가신 것으로 아는데 길게는 반년 이상 머문 적도 있으셨잖습니까? 선생님은 러시아와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아요. 선생님께서 음악애호가이기도 하지만 선생님 소설의 우울함 같은 것이 러시아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러시아와 연을 맺고 자주 가게 되는 특별한 사연이 있으신지요?

송영  단일 거주 기간으로는 요번이 제일 길었어요. 나뿐만 아니라 한국의 작가라면 다소간 러시아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저는 소설로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잘 아시지만 러시아는 음악이나 무용, 소설도 그렇고 일종의 문화대국이죠. 어렸을 때부터 러시아의 음악이나 무용, 문학에 대해서 친근감이랄까 호감이랄까 그런 게 있었지요. 이런저런 일로 최근 십여 년 동안 러시아에 왔다 갔다 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사회나 서민들의 생활모습, 또 러시아의 자연과 시가지 풍경, 역사적인 유물이랄까 이런 것들을 보면서 역시 기대에 벗어나지 않았어요. 개인적인 취향으로 볼 때, 특히 현대음악에서 러시아 연주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러시아 연주가들을 좋아하다보니까 친밀감도 더 크게 느껴지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일 많이 갔던 나라인데 지금 또 어디를 가라 하면 선뜻 러시아를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성태  지금까지 여행을 자주 다니셨고, 많은 경우 그 체험을 작품화하셨습니다. 4년 전에 출간한 『발로자를 위하여』는 소비에트 해체 이후 러시아 사회나 지식인의 풍경을 한국작가가 실감 있게 전달한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그 다음에 이라크 쪽을 여행하고 쓴 소설 「모슬기행」 같은 경우도 요즘 중동사태와 맞물려서 다시 의미 있게 읽히는데, 선생님의 소설은 여행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요?

송영  우리가 이십대, 삽십대, 사십대를 보냈던 시절을 생각하면 감옥에서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북으로는 휴전선, 남쪽으로는 바다, 바로 옆에 일본이 있지만 그렇게 교류가 빈번했던 것은 아니었죠. 우리는 반도에 갇혀 살았어요. 우리 사고방식이나 모든 생활형식이 그런 갇힌 사회 속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그런 답답함 같은 게 있어요. 근래 작가들이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 건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나가서 지구보편적인 세계를 좀 구경하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꼈으니까. 『발로자를 위하여』를 이야기하셨는데 주인공이 한국에 귀화해서 활동하고 있지만(주인공 발로자는 박노자 교수를 칭함-편집자 주) 그 당시에 러시아에 갔을 때 그 사회가 대단한 변혁기였지 않습니까?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옮겨오는 전환긴데 우리로 말하자면 그런 격변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굉장한 동류의식이랄까, 이 사람들은 그런 변혁기에서 과연 어떻게 대응하고 살아갈까, 또 사회 각 분야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런 것을 좀 알고 싶었는데 실제로 소설에 제대로 담았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시도를 해봤던 것이죠. 상당히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까 싶고…….

전성태  저는 『발로자를 위하여』를 읽으면서 요즘에 한국에 와 있는 러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생각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작년에 몽골에서 6개월을 지내다가 왔는데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이 과연 고향에서는 어떤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이 한국에 오는 의미는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발로자를 위하여』역시 러시아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정작 저에게는 한국에 와 있는 러시아인들을 실감하는 독서체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 장원에서 가진 작가들 모임을 말씀하셨는데, 아나똘리 김 선생도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선생님도 그 모임에서 주제발표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러시아 작가들의 생활이라든가, 느낌은 어땠습니까?

 



 

송영  구체적으로 생활을 들여다보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나똘리 김은 내가 본 바로는 러시아에서 최고 작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과 생활하면서 많이 배웠죠. 제 입장에서 러시아 작가들 몇 십 명을 한꺼번에 만난 기회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나똘리 김과 한국외국어대학 김현태 교수가 나한테도 모임에서 하나 읽으라고 권했어요. 작가미팅에서는 작가들이 나와서 주장을 하거나 준비해온 원고를 읽습니다. 나는 구경꾼으로 갔는데 하나 읽으라고 해서 「나의 톨스토이」, 러시아말로 「리오 톨스토이」라는 글을 짧게 써서 읽었습니다. 제가 출국 전에 끝낸 장편 중에 『너무 먼 여행길』(계간지 『문학과경계』에 연재-편집자 주) 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잃은 형제의 죽음을 쓴 것입니다. 사실 제가 청년시절에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작가적인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도 어떤 삶을 사유하고 반추하고 반성하는 면에서 톨스토이에게서 대단히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보면, 쉽게 말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적인 주제가 드러나는데,  6?25전쟁에서 학살당한 형 이야기를 쓸 때 살해자의 마을을 취재하면서 내 마음이 자꾸 변하는 것을 느꼈지요. 그것을 톨스토이의 사상과 결부시켜 발표했어요. 러시아 작가들이 거만하고 나 같은 사람을 무시할 줄 알았는데 그 뒤부터는 완전히 태도가 달라져서 나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어요. 심지어는 젊은 작가들이 와서 당신의 소설을 모스크바 서점에서 볼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사실 거리가 먼 얘기죠. 한국소설이 러시아 서점에는 거의 없죠. 그런 질문도 많이 받고, 호감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전성태  이번 여행에서 소설로 하시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습니까?

송영  저는 처음에 취재를 하러 러시아에 가지는 않았어요. 근래에 한국문학번역원이 생겨서 우리나라 작품들, 주로 단편들이 해외로 많이 번역되어 나가죠.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제 작품을 번역하는 사람이 한 분 있어서 그런 영향도 좀 받았고, 러시아와 우리가 통하는 점이 있을 것 같은데 러시아의 문학 현황, 현역작가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 궁금했어요. 어느 나라보다 러시아 쪽이 궁금해서 그런 것을 좀 대강이라도 살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아나똘리 김이 많이 도와줘서 그런 것을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개관도 좀 했고. 앞으로 내 꿈이라면 우리나라 작가들, 주로 현역들 작품을 러시아하고 교류해서 러시아 쪽에 보내주고 싶어요. 특히 내가 그런 충동을 강하게 받은 건 러시아 서점에 갔을 때 일본 작가들이 주요서점의 문학코너를 러시아 작가들과 같은 비중으로 점령하고 있는데 굉장히 쇼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은 문학교류나 번역의 전통을 꾸준히 쌓아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책을 좋아하는 러시아 독자들한테 우리 소설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나 일단 첫 출발은 하고 있는 셈입니다.



송영 문학 40년의 소회


전성태  그 일이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문단으로도 잘 되기를 바랍니다. 선생님께서는 올해로 작가로 데뷔한 지 40년이 되셨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송영  저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전성태  제가 69년생이니까 제가 태어나기 2년 전부터 작가셨어요.

송영  아, 그렇습니까?

전성태  저는 40년이라는 긴 문학적 연조가 잘 상상이 안 되는데, 소회가 어떠세요?

송영  오늘 갑자기 40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평소에 나이 같은 것을 의식 못해요. 또 어떻게 보면 워낙 게으르게 살아와서 굉장히 자책하는 기분이 일단 드네요. 그동안 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앞으로 적은 시간이라도 반성하는 의미에서 효과적으로 써야 되겠어요.

전성태  띄엄띄엄 글을 읽는 독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같이 선생님 작품을 죽 읽어온 입장에서는 굉장한 자기 세계가 깊어져 가는 과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조적으로 말씀하셨지만 그 속도가 오늘날 송영이라는 작가를 있게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로 데뷔할 무렵이나 문학청년 시절에 본인이 평생에 걸쳐 문학을 할 때 어떤 작가의 길을 걷겠다는 상이 있었을 텐데, 40년을 돌아보니까 어떻습니까?

송영  아까 말씀드렸듯이 처음 출발은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해요. 상당히 오랜 장고 끝에 결심을 했어요. 그때 결심하던 장면이 지금도 생각나는데, 대학 4학년 때 글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뒷동산에 혼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뭘 생각했느냐? 밥을 굶더라도 글을 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외국어를 해서 무역이라든가 경제부흥기에 한 역할을 해서 잘 먹고 잘 살 것이냐? 그 문제로 6개월 동안 고민했죠. 제가 외국어대를 다녔는데 외국어를 꽤 했어요. 결국은 밥을 굶더라도 글을 쓰자고 결심을 했지요. 나름대로 비장한 결심을 했던 것인데 돌이켜보니 그동안 시간만 보내고 한 일이 없어요. 그때는 어떤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가 아니라 스탠드에 앉은 관전자가 되자, 그런 것이었죠. 작가라는 것은 행동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추구하고, 반추하고, 관찰하고, 질문하는 존재죠. 내가 어떤 문학을 한다, 무엇을 고발해야 한다는 특별한 주제의식은 없었다고 봐요. 또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문제는 계속해서 자기가 늘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검증하는 것이니까. 작가가 틀 속에 갇혀서 나는 이런 세계를, 가령 가톨릭 작가 ‘모리아크’라면 나는 가톨릭 사상을 전파하겠다, 이런 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기 생각을 놓아두고 어쨌든 나는 존재, 삶 이런 것을 반추하고 질문도 던지고 해보자는 삶의 스타일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전성태  그 말씀 듣고 나니까 선생님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문학적으로는 틀에 갇히지 말고 창작행위를 해야 한다고 했고, 삶에서 검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74년에 「자유실천문인협회 101인 선언」이라고 민주화운동에서 상징적인 사건에 참가도 하셨고, 그때 일로 태동한 작가회의에서 자유실천위원장 직도 맡아 하셨습니다. 남북작가회담 추진을 위해 판문점을 향하다 연행도 되셨고, 최근에는 대추리나 부안 핵폐기장에도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와 실천이라는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혹시나 이런 것들이 요즘 작가들에게도 요구되는지, 아니면 요즘 작가들에게 필요한 실천적 덕목은 어떤 것이 있을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영  요즘 같은 때에 한두 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나왔을 때 문인들 성명 때문에 저 같은 사람도 영광스럽게 안기부에 두어 번, 물론 큰 곤욕을 치른 것은 아니고, 하루 이틀 소풍갔다 온 식으로 체험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공백기가 있었죠. 그러다가 작가회의 이후에 참여해서 몇 년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랬는데 저는 사실은 개인적인 것 같아요. 어떤 사회현상에 단체로 떠밀려 가는 것을 거부하는 개인성향이 강한 편입니다. 1974년 그 당시에는 문인들 최초로 유신에 저항했을 거예요. 그것은 용기의 문제라기보다도 문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자연발생적인 저항으로 생각됩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제가 적극적으로 작가회의 나가서 그때 후배님들도 자주 만나고 했죠. 스페인의 ‘가르시아 로르카’라는 시인이 있는데 그 양반은 프랑코에게 저항하다 총살당했죠. 그 사람은 총을 들고 직접 싸웠으니까. 또 ‘파블로 카잘스’라는 첼리스트는 1960년 동안 프랑코에 저항하느라 스페인을 떠나서 조국에 못 갔죠. 타지에서 객사를 했습니다. 그런 삶이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시인이나 연주가가, 그 사람들이 정치 지망생도 아닌데 목숨을 걸고 또는 일생을 걸고 무엇엔가 저항한다는 것. 그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뭔가 가치가 있지 않겠어요. 1980년대 광주 이후에 작가회의와 거리를 두고 개인적인 칩거생활을 한동안 했어요. 그런 생활을 반성하게 됐죠. 그때는 내가 나가서 적극적으로, 작가로서의 역할이라기보다는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문학과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는 참 복잡한 문제 아닙니까? 그럼에도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 소설이 독자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또는 그렇지 않다는 설왕설래가 있는데 이유를 생각해볼 때 35년에 걸친 군사독재, 또 이승만 때도 마찬가지로 독재시대였죠. 그런 시대와 남쪽은 하나의 감옥이었다는 사실에서 우리 문학도 많이 왜곡된 것이 있지 않을까 해요. 작가들이 냉정하게 현실에 눈을 뜨고 묘사하고 해보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상황, 반도라는 감옥 또 독재.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그 사람을 닮는다고 하잖아요. 근래 소설을 심사하느라 70~80편을 봤는데 거기서 그런 징후들을 봤어요. 오늘날 디지털이 발달해서 굉장하지 않습니까. 기계는 이렇게 앞서가는데 소설 형태나 스타일은 한정돼 있고 정체되어 있는 느낌. 왜 이럴까 생각하면 과거에 지나온 시기의 후유증이 우리 스타일과 정신을 왜곡시킨 점이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 문제로 우리들이 같이 모여서 토론하는 장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더라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문제를 더 생각해봐야겠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문학과 대중은 어떤 관계인가


전성태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시영 선생이 70년대 문학동네 이야기를 시로 많이 쓰고 있는데 거기에 「청진동에서」라는 시를 보니까 선생님이 등장하더라고요. 짧은 시라서 읽어보겠습니다.


송영은 휘파람을 잘 불고

방영웅은 <부용산>을 잘 불렀다

예나 이제나 신 선생님은 추임새를 잘 넣고.

그러나 이제는 모두 지나간 옛일

아무도 그 시절을 기억하지 않는다.


청진동 시절 이야기를 담아놓은 시 같은데요. 그 시절에 문학하던 풍경 좀 들려주시죠.

송영  그때가 박정희 유신과 겹치지 않나 싶어요. 그때 많지 않은 문인들이 모이는 것이 광화문 언저리, 종로 청진동의 방석집이라는 데를 가면 술값도 싸고 하니까 온돌방에 앉아서들 술 마시고 울분을 토하다가 나중에 노래판도 벌어지고 그랬지요. 지금 생각하면 훌륭한 친구들을 그 자리에서 만났던 것 같아요. 난 휘파람을 잘 부는지 몰랐는데 여흥이 벌어지면 문인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즐거운 추억이죠. 그때 몇 사람, 김지하 같은 친구는 창을 구수하게 잘 불렀던 것 같아요. 걸걸한 목소리로. 황석영 씨는 쇼를 많이 했죠. 원맨쇼라고. 지금은 나이 들어서 점잔뺀다고들 안 하겠죠. 그때는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나도 휘파람도 불고 시켜서 노래도 많이 했어요. 김승옥 씨도 가끔 합석을 했는데 ‘목포는 항구다, 여수도 항구다’ 어쩌고 하는 노래를 청승맞게 잘 했던 것 같아요.

전성태  요즘에도 가끔 흥겨운 술자리에 참석하세요?

송영  요즘에는 문인들하고는 거의 없습니다. 요새 젊은 문인들은 내 느낌으로는 우리 시대에 비하면 좀 사무적이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남대문에 가면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거기 가면 가끔 술자리에 합석하게 됩니다. 음악이야기를 나누죠.

전성태  저는 선생님 작품을 처음 접한 게, 고등학교 때였어요. 『땅콩껍질 속의 연가』라는 책을 우연찮게 헌책방에서 구해서 읽었습니다. 지금도 소설 내용이 생생합니다. 방 하나에 이불을 쳐놓고 샐러리맨과 가정부 아가씨가 기괴한 동거를 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였는데요. 사랑이 뒤에는 비극으로 끝나던가요?

송영  헤어지죠.

전성태  그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뒤에 알고 봤더니 그 소설이 당시에 굉장한 베스트셀러였고, 임예진 씨가 처음으로 성인역할을 하는 영화로 만들어져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대중성이라는 것도 겪어본 작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중단편 소설을 보면 그 완미한 미의식 속에서 대중들로부터 탈주하려는 모습도 보입니다. 선생님은 문학과 대중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우리나라 대중 독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영  해답이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저는 러시아를 가면 지하철에서 시민들이 책을 많이 읽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습니다. 그 책도 유행작품이 아니고 본격적인 작품들이었어요. 안톤 체홉의 소설이라든가, 지하철에서 노동자들과 할머니들이 읽는 푸쉬킨의 시집이라든가. 요즘은 러시아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우리나라 현재의 독서환경이나 풍토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죠. 문학이 대중 옆으로 일부러 찾아가야 된다, 이럴 수는 없겠죠. 문학 자체가 그렇다고 어려워지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스타일에 따라서 문학은 어려워지고 까다로워질 수도 있고, 기상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형식을 좇을 수도 있어요. 가령 이상 같은 작가가 있잖습니까. 문학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창작의 세계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런 숙명을 가진 것 같아요. 그것이 대중이나 대다수의 호응이나 지지를 받는다면 그 작가에게 현실적으로 축복이죠. 예술적인 축복이라기보다는. 그렇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가령 글을 열심히 썼지만 10권밖에 안 팔렸다고 해서 예술적인 실패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문제는 영원한 숙제가 아닌가 싶어요. 성급하게 해답을 내린다고 내릴 수도 없는 것이죠. 학교교육이나 사회교육에서 좀더 진지한 작품을 읽고 문학이 일반시민들의 화제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은 갖게 되죠.

 




정의된 어떤 정설에 대한, 의미에 대한 저항

 

전성태  이제 선생님 작품세계를 좀더 깊이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는데요. 「투계」라는 작품으로 등단하셨는데 이 작품은 굉장히 독특하고 알레고리가 풍부한 소설입니다. 저도 대학 시절에 종형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외상, 그것을 통해서 건드리고 있는 우울한 내면풍경에 매혹돼서 통과의례라는 모티브로 소설을 분석하는 글을 쓴 적도 있는데요.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실존적인 고민들이 초기 등단작부터 자기세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계기가 있었습니까? 저는 선생님께서 독일어를 전공해서 전후 실존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도 해봤습니다만.

송영 독일어과를 다녔어도 공부를 거의 안 했거든요. 독일작품은 별로 읽은 것도 없고, 카프카의 작품을 미국에 번역한 사람이 전화로 당신 혹시 카프카를 좋아했느냐고 했는데 사실 카프카는 번역된 단편 한두 편 읽어보지 않았나 싶어요. 잘 기억도 안 나고. 굳이 이야기하자면 대학시절에 실존주의 이론은 흥미롭게 읽은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다양한 책을 섭렵한 것은 아니고, 사르트르, 까뮈 이런 사람들이 쓴 산문들을 상당히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세계 인식의 앵글이랄까 이런 면이 그쪽과 맞지 않는가. 그런 작품들 몇 개, 가령 이오네스코의 「연대장의 사진」 같은 그런 짤막한 단편들이 꼭 실존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존재의 양식이나 존재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면서, 말하자면 스토리텔링은 아니죠. 이야기가 아니죠. 「투계」를 말씀하셨는데 나는 지금도 이야기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도 단편을 쓰려고 시도할 때 보면 스토리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전성태  선생님 작품을 논하는 여러 글들 중에서 김주연 선생님이 정관(靜觀)이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조용히 바라보는 것. 아까 스탠드에 앉아서 관조하는 글쓰기를 말씀하셨는데, 사건보다 내면 갈등을 도드라지게 형상화해내는 부분이라든가, 또 화자를 계속 일관되게 관찰자로 두고 서술하는 형식 같은 것도 선생님 소설의 특징인 것 같거든요. 언젠가 서울 금호동으로 문학기행을 갔을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게 기억납니다. ‘소설에서 확실하고 분명한 의미와 만인이 동의하는 결론을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필수적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선생님의 소설관, 그걸 좀 듣고 싶어요. 아까 우리가 감옥 같은 사회를 살다 보니까 작가도 일정부분 닮아가면서 경직된 창작행위를 해왔는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십시오.

송영  어느 평론가가 몇 년 전에, 내 작품세계를 두고 ‘정의된 어떤 정설에 대한, 의미에 대한 저항’이라고 썼더라고요. 참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의미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향해서 몰려가고, 거기에 반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대개 사람들 싸움이라는 것이 그런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까. 전쟁까지도. 의미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바람직한 소설이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죠. 그것이 있으면 작가들은 존재 의미가 없죠. 그것이 없기 때문에 작가들이 매일 밤잠을 설치며 바람직한 소설을 찾아가는 것이죠. 파라다이스도 예수님은 하늘에 가면 낙원이 전개된다고 하고, 사람들은 내세의 낙원을 꿈꾸잖아요. 지상의 낙원이라는 말도 있고요. 러시아 라단 지방의 아나똘리 김 별장에서 머물 때 그 주변에 카시모프라는 소도시가 있는데 굉장히 유서가 깊은 도시예요. 이슬람 유적도 있고, 몽골군 침입한 흔적도 있고. 소도시를 구경하면서 이 정도가 지상에서 나의 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역사도 생각하고, 러시아의 자연과 숲을 생각하고, 끝없이 넓은 하늘 바라보고, 또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음악도 듣고…… 며칠을 보내면서 이 정도면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낙원이랄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도 벌써 1년 전인데 요즘에 그쪽에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낙원이라는 것이 뭔가 도달해버리면 이미 낙원이 아니죠. 그처럼 소설도 그런 면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이것이 최소한의 소설이다, 소설은 이래야 된다고 하는 순간에 소설의 생명은 끝난다고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주저하게 돼요. 어떻게 보면 소설에 뚜렷한 견해가 없다고 할 수도 있지요. 역설적으로, 굳이 쉽게 표현한다면 열린 정신, 열린 스타일, 열린 형식, 열린 언어로 인간의 현상을 재미있게 그려낼 수 있는 작품이면 좋지 않은가. 그것이 감동을 수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어떤 독자, 어떤 비평가보다도 작가 자신이 더 자유롭고 활달한 정신으로, 언어로, 스타일로 한 편의 장편이든 단편이든 써낼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작가가 발견해낸 진실이지요. 그런 진실을 통해 감동까지 얻어낼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전성태  선생님도 어슬렁거린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소설집 『발로자를 위하여』라든가 최근작 『새벽의 만찬』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서, 어슬렁거리고 독백이 많은 글쓰기가 아주 깊은 문체로 와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읽기도 굉장히 편했고, 깊은 물속 바닥을 보여주는 듯한 정갈한 문체가 형성돼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렸던 겁니다.

선생님 작품에 등장한 인물을 보면 출구가 없는 닫힌 세계, 즉「선생과 황태자」의 군대 영창, 「중앙선 기차」 같은 기차 안, 「투계」의 음습한 집안과 같은 닫힌 공간에 인물이 놓여 있습니다. 이런 실패한 인물들의 내적 고통에 의해 돋보이는 소설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작가에게 어떤 정신적 외상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아직 책은 안 나왔지만 연재한 장편소설에서 처음으로 유년기의 자전을 드러냈다고 하셨습니다.

송영  작년에 『너무 먼 여행길』이라고 아직 제목도 확정 안 했지만 문예지에 소설을 연재했어요. 제 셋째형이 열일곱 살 때(6?25 바로 한 해 전이죠) 고향에서 좌익들의 버스 습격사건으로 타살을 당했어요. 형이 음악도였는데 피아노도 하고 바이올린도 하고, 살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음악을 했을 거예요. 그때 제가 열 살이었는데 형님의 죽음이 나에게 정신적으로 내상을 준 것 같아요. 제가 러시아에서 어떤 음반을 샀는데 「이른 봄의 노래」라는 일본노래를 러시아 트럼펫 연주자가 연주하는 곡이었지요. 55년 전에 그 형이 내 손을 잡고 나에게 가르쳐준 노래예요. 그 노래가 좀 슬픕니다. 봄은 이름뿐이지 겨울과 똑같다는 가사가 있습니다. 55년 만에 노래를 들으면서 형 생각을 했죠. 형에 대해서 빚을 갚는, 형을 생각하는 것을 써야겠다, 형을 위해서 형의 묘비를 쓴다는 기분으로 소설을 썼어요. 아파트에 멍하니 서서 음악을 들으면서 55년 전을 다시 생각해 봤는데, 깊은 내상을 줬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달았어요. 왜 내가 이 노래를 55년 만에 떠올렸을까? 아픈 기억에서 도망가려고 지웠던 기억이라 55년 만에 다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동안 글을 쓰려고 열망했던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아마 열 살 때 받은 충격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됩니다.



 


음악이 어느 날 가만히 귀로 들어왔다


전성태  노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선생님은 음악만으로도 한 자리를 마련해야 할 정도로 클래식 애호가로 알려져 있고, 수준 높은 음악 에세이집도 내셨죠. 음악과 연을 맺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송영  그냥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음악을 접할 기회가 뒤늦었죠. 어렸을 때 형들 덕택에 노래를 몇 곡 배우곤 했지만 특별히 기회가 없다가 이십대가 지난 뒤에 서울에 와서 음악을 듣게 되었죠. 듣는 순간부터 귀에 쉽게 들어왔어요. 내가 이 좋은 음악을 왜 이제야 들었을까. 더 생각해보고 말 것도 없이, 망설일 것도 없이 가만히 있는데 음악이 귀로 들어온 것이죠. 어쨌든 음악을 듣는 것이 나는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연주가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만 듣는 것은 자기가 들을 생각만 있으면 가능하죠.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요. 그것이 큰 기쁨입니다. 좋은 연주가의 연주를 만나서 처음 들을 때 그 기쁨이 상당히 커요. 옛날에 음반이 귀했을 때는 60~70년대에 음반도 수입금지 품목이었기 때문에 듣고 싶은 곡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었어요. 가령 명동의 어느 음악감상실에 멘델스존의 어떤 음반이 있다, 그러면 금호동에서 명동까지 걸어갑니다. 그 한곡을 듣기 위해서 말이죠. 그만큼 그 곡을 듣는 시간에 즐거운 보상이 있었다는 얘기죠.

전성태  음악과 문학이 충돌하는 경험은 없나요?

송영  그런 질문을 종종 받기도 하는데, 가령 시인이라면 흔히들 시와 음악은 같은 장르일 수도 있다고 해요. 저는 소설에서 음악 이야기를 써본 적이 없고, 곡명 하나도 인용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조금 감흥이 다른 것 같아요. 음악은 상당히 순간적이죠. 증발해버리죠. 듣고 나면 사라지죠. 아무리 좋은 음악도 듣는 그 순간뿐이에요. 오래 남지는 않는데 그 순간에 찾아오는 느낌이 굉장히 묘하죠. 휘발유처럼 증발해 버리는 그 여운이 길게 갈 수도 있고…….

전성태  클래식 외에 다른 장르도 좋아하세요?

송영  외국의 민속음악 같은 걸 좋아합니다. 가령 아랍 음악이나 노래, 인도의 노래…… 중국의「쟈스민 꽃」이라는 노래도 엊그제 텔레비전에서 열두 명의 아가씨들이 나와서 토착악기로 연주하는데 아주 아름답대요. 민속음악은 참 좋죠. 유행음악은, 대중음악은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에 민속음악은 상당히 좋은 것 같아요. 남미 쪽의 음악도 그렇고.

전성태  요즘 즐겨 듣는 음악이나 좋은 음악이 있으면 한 곡 추천해 주시지요.

송영  얼마 전에 『바흐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을 냈는데, 바흐의 작품 가운데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있거든요. 여섯 개의 조곡으로 되어 있는데. 요새 첼로가 상당히 대중들에게 알려진 악기가 되고, 구두광고에도 배경음악으로 나오지요. 요즘에 고전음악이 광고음악으로 많이 활용되더라고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나에게 음악을 많이 듣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곡이죠.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곡을 연주한 세계 연주가들의 연주에 대한 감상을 몇 회에 걸쳐 잡지에 쓴 적이 있어요. 마흔 명이 비슷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아마 제가 그 곡을 가장 많이 들은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곡에 대해 책을 하나 썼으면 하고 있습니다. 곡 하나만 가지고 책을 쓴 경우는 흔치 않을 거예요. 연주리스트를 스크린도 하고 에세이 비슷한 것도 쓰고 있죠. 한 반 정도 썼습니다. 이 곡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를 넘어서 우리 인생에 개입된 종교, 사랑, 고통 등 인생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다 관여하고 있습니다. 40여 명의 첼리스트의 연주를 들어본 것 중에서 내 개인적인 기호에 맞는 연주가는 ‘장막스 끌레망’ 이라는 프랑스 사람인데 아마 80세가 넘어서 돌아가셨을 거예요. 그 분의 연주가 나는 아주 좋아요. 왜냐하면, 전부 다 내 표현입니다만, 곡을 연인들끼리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작은 울림과 스케일로 연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막스 끌레망처럼 대지를 진동하는 웅변으로 아주 굉장히 격렬하게 연주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의 연주는 이 곡의 성격에 부합되는 측면이 있고 호흡도 아주 길지요. 이 곡을 좀 특이하게 자기 나름의 음색으로 연주하는 사람이 없을까 기대했는데 그의 연주를 듣는 순간 “이것이다!” 하고 탄복했어요. 내가 기대했던 그 연주였죠. 그 연주 중 6번의 「사라방드」를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사라방드 연결)

전성태  저는 문외한이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웅장한 느낌입니다. 넘어갈 때 약간 거친 터치로 넘어가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어요.

송영  전 선생이 날카롭게 지적했어요. 첼로라는 악기가 원래 그렇지만 장막스 끌레망의 연주가 특히 그렇습니다. 거칠면서 곱지 않고, 거친 대신에 스케일이 크고 중요한 이미지를 강조해서 표현해 주는.

전성태  오늘 말씀을 듣다 보니 선생님의 문학적 위치를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선생님 작품은 대립각이 서 있지 않고 영혼을 위로하고 쓰다듬고 하는, 위무로서 문학이 담당해야 하는 몫을 느꼈어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작품들이 삶이 각박해서 그런지 언어들이 굉장히 예각을 드러내서 문장을 형성하는 그런 것을 경험합니다.

송영  마음에 드는 표현입니다. 내가 했다기보다도 그러고 싶죠. 그렇게 쓰고 싶어요. 대립각이 없다는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드는데 전에 누군가 동료작가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당신 작품에는 증오하는 사람이 없다고. 지금 전 선생이 표현한 대립각이 없다는 것인데,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는 그런 얘기를 나한테 했어요. 감옥소설에도 악인이 별로 없다는 것인데 바로 대립각이 없다는 것이 그런 얘기예요. 내가 꼭 그렇게 잘 썼다기보다는 그런 쪽을 지향하지 않는가 하는 어렴풋한 느낌. 아까 낙원이야기도 그렇고 무엇인가 그런 것과 연관되지 않나 싶네요.



국내외의 문학적 교류를 꿈꾸다


전성태  선생님은  문학을 시기적으로 단락을 짓고 작품 활동을 해 오신 분은 아니잖습니까? 앞으로 작업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송영  40주년이라고 그러는데 그동안 게으름을 많이 피웠죠. 내년에는 번역원 지원을 받아서 미국에서 작품집이 나올 것 같아요.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장편을 몇 편이라도 써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아까 러시아와 문학교류도 이야기했는데 단편소설 교류는 내년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국내 현역작가들의 단편을 모아서 러시아 현역작가와 교류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어느 정도 추진되고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막상 그 쪽에서 물건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막상 내놓으려니 내놓을 게 마땅치 않더라는 것을 느끼게 됐어요. 이것저것 따지고 보니까. 그러니까 글을 쓸 때 단순한 사고방식도 깨야겠고, 그런 방면으로 전 선생과 그 세대들이 많이 노력해야죠. 국내독자들에게 한국소설이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외에서 독자들을 확보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그런 일에 나 같은 사람이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해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전성태  오늘 장시간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가진 독특한 세계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후배들이 있으니 건강히 더 많은 작품들을 창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송영  오랜만에 와서 재밌는 이야기 고마웠습니다. 《문장 웹진/ 2006년 11월》


추천 콘텐츠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 wikisoft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 wikisoft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