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러나 보석(保釋) 없는 유민의 시(詩)
- 작성일 2007-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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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러나 보석(保釋) 없는 유민의 시(詩)
대담 민영(시인)
진행?정리 신용목(시인)
등단 50년, 그 반세기의 여정
신용목 《문장 웹진》 ‘작가와 작가’ 시간입니다. 오늘은 민영 선생님을 모시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민영 안녕하세요.
신용목 기억하실시 모르겠는데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게 6~7년 전에 제가 실천문학사에 근무했을 때입니다. 이순화 편집장 주례도 서시고, 두루마기 입고 왔다 갔다 하실 때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단아한 느낌을 가졌던 것이 두루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민영 내가 원래는 단아하지 않은데 두루마기를 입어서 단아해졌다, 이런 얘긴가.(웃음)
신용목 아무튼 두루마기에 대한 느낌이 저한테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시인이 되기 전이었구요. 여담입니다만 선생님과 제가 40년 차이가 납니다. 문단으로 보자면 선생님은 최고령 시인에 속하시고, 저는 문단에서도 가장 어린 세대입니다. 선생님께서 《현대문학》에 59년에 추천이 완료되셨는데, 추천이 처음 시작된 것이 57년이었으니까 올해로 등단도 50년 세월이 되셨습니다.
민영 세상에! 뭐를 이렇게 오래 쓰냐.
신용목 저보다 지금…. 제가 5년이 갓 지났는데. 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선생님을 모시고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자료도 준비하고 시도 뽑아보고 했는데 이렇게 뽑고 예를 들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으면서 40년이라는 간격 속에서 제가 궁금한 것을 여쭙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민영 그래. 난 무슨 내가 대답하기 힘든 비수 같은 물음을 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어요.(웃음)
신용목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번에 다시 선생님 마지막 시집까지 읽어봤는데, 물론 마지막 시집은 아니죠.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해지기 전의 사랑』(2001, 시와시학사) 시집에까지 유이민의 삶이랄까, 떠돌아다니는 삶이 담겨 있더라구요. 제 세대로 봐서는 그것은 연구할 때나 보았던 것인데 그것을 대선배 시인의 시에서, 그것도 2000년대 이후에 발간된 시집에서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선생님은 철원에서 나셔서 북간도로 갔다가 다시 넘어오신 걸로 압니다.
민영 그러니까 유이민, 유민이라고 해도 되는데, 내가 스스로 선택한 운명은 아니고. 결국은 내가 태어날 때 그 무렵부터 이미 시대적 상황이 나에게 준 것이지. 넌 이렇게밖에 살 수 없어! 아마 이랬을 것 같은데. 물론 나는 그 예언은 못 들었지만. 만약 예언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말과 무관하지 않게 계속 떠돌고 흐르면서 이렇게 살아왔다고 볼 수밖에 없지.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이 다른 사람은 못 겪은 체험도 했다는 의미에서 보람도 되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지 않고. 문학적으로 좌절할 수도 있고, 사람이 살아가는 자체로 좌절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 흐름에 따라서 풀씨가 날아가듯이 그대로 날아가고 다치고 이렇게 넘어지고 일어나고 이러는 과정을 생에서 여러 번 거치다 보니까 오히려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단련시키셔 강하게 만드는 힘이 되고 그것이 오늘까지 나를 지탱하는 하나의 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내가 살던 고샅을 떠나서 타관을 떠돌던 것은 네 살 때니까. 요즘도 더러 어려서 고향을 떠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 경우처럼 완전히 두만강을 넘어서 다른 나라로 가게 된 것은 그렇게 흔하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때가 네 살인데, 네 살이면 기억이 없을 법 한데도 나는 그때 함경선 열차를 타고 눈 밖으로 정거장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보이는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차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고 조선옷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고, 간간이 경찰이 그 사이를, 순사인지 역무원인지 몰라. 그런 사람이 왔다 갔다 하고. 여기는 어디지, 여기는 어디고…. 아! 내가 그때 한문을 알았어. (네 살 때요?) 네 살 때 어머니한테 천자문을 배웠어. (시에서 읽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모자보다 먼저 (만주에) 들어가셨는데 편지가 오는데 국한문 혼용이야. 어머니는 그런 대로 읽는데 나는 진서가 들어서, 한문이 들어서 못 읽는단 말이야. 한문을 진서라고 그랬거든. 엄마 보고 한문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던 모양이야. 아버지 편지를 읽으려면 내가 진서를 알아야 하는데 진서를 아나, 어디! 가르쳐 달라고 해서 어머니가 시장에 날 데려가서, 그때는 길거리에 책을 놓고 파니까 천자문을 사다가 나를 하늘천 따지 해서 가르치셨다고. 물론 하늘천 따지 하는데 깊은 내용은 몰라.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어머니가 부르면 그렇게 공중으로 읽고 했는데. 그게 만주로 가는 기차에서 차 밖에 있는 표지판을 읽었어. 여기는 원산! 여기는 단천! 이랬단 말이지.
그렇게 만주로 갔어. 처음에는 용정이라는 데를 갔어. 아버지가 거기서 셋방을 하나 얻어놓으셨어. 사글세방이었겠지. 우선 여기서 살자. 거기서 몇 달 있었지. 아버지는 집에 잘 안 계셔. 당신은 살 길을 찾아야 하니까 사방을 다니시다가 거기서 120리 되는 저 안쪽 백두산 가까운 데 화룡이라는 곳이 있어. 지금은 화룡진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가셔서 방을 얻어놓으시고 우리를 오라고 해서 어머니와 내가 화룡까지 기차를 타고 갔어. 거기에 사는데 그때 거기 치안이 아주 나쁜 데야. 일본 사람들이 잡았지만 마적도 오고 조선독립군도, 독립군이라는 말은 못 들었지만 오는 등 이상하게 치안이 불안한 데야. 아버지는 마을에 있는 사랑방에 가 계시고 어머니와 난 셋방에 있는데 어떤 때 막 싸이렌이 울리고 호각을 불고 하면 이불 쓰고 가만히 있는 거야. 만주에는 이불을 뒤집어쓰면 총알이 안 뚫린다는 미신이 있어. 물론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새벽에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야, 어제께 마적이 성 밖으로 왔단다” 하셔. 화룡이 네모난 성곽 도시야. 밖에서는 “비적이 왔다, 마적이 왔다” 하지만 비적이 독립군인지 아닌지 우리는 몰라. 뭔가 위협적인 존재라고만 알지. 1919년인가 해서 청산리 싸움이 있었거든. 유명한 곳이야.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 이루어진 곳이고. 그분들은 만주의 오지나 노령 쪽으로 가고,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로 가고 그런 곳이었어. 아버지가 그곳에서 장사를 하셨어. 장사를 괜찮게 하셔서 돈도 버시고.
그렇게 살다가 8?15해방이 됐어. 해방이 되니까, 사실 해방은 우리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때까지 벌어놓은 돈을 은행에 예금을 해놨는데 전부 동결이 돼 한 푼도 못 찾게 되고. 거기서 더 살 수도 없고 고향으로 가야 하는데.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민 아무개가 만주에 와서 돈을 벌었다는데 돈도 못 벌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가야 하나’지. 이렇게 하시더니 울화가 나셔서 덜컥 돌아가셨어. 그것도 어머니는 뒤처리하고 오라 이르고 날 데리고 용정까지 왔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거야. 아버지, 어머니, 나 세 식구인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니 참…. 어머니하고 나하고만 만주 해란강 언덕 위에 모셨지.

신용목 지금도 유골은….
민영 거기 있지. 그런데 못 찾아. 그때 나무로 목비를 하나 세워두고 왔는데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어렸을 때 기억으로 찾기는 힘들지. 7~8년 전에 거기에 갔는데 포기하고 절만 하고 왔어. 산 쪽을 향해서 울면서 엎드려 절만 하고 찾지 못했어.
고향에 돌아와서 한 1년 있었을 거야. 공부를 중단할 수 없으니까. 우리 고향에 제3인민학교가 있는데, 인공 치하지. 인민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다가 거기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했는데. 나중에는 소극적이 되었지만 내가 어렸을 때 성격이 굉장히 적극적 면을 가졌던 모양이야. 친구를 잘 사귀고 발표를 잘하고 소년단 활동도 하고. 그런데 도저히 못 살아. 우리가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못 사니까 한 1년 살다가 어머니가 도저히 여기서는 못 살겠다 이남으로 가자, 하셔서 어머니와 38선을 넘어 서울로 온 것이야. 명동 천주교당 앞에 우리 이모가 살고 있는데 중구 저동 1가 100번지에서 더부살이 했어. 그때는 서울이 피난민 천지였으니까. 뭐 만주에서, 이북에서, 중국에서 온 피난민들 천지지. 그러니까 하나도 부끄러울 것도 겁날 것도 없지. 내가 그때 공부한 것은 만주에서 5학년 다니다가 철원에서 6학년 1학기인가 2학기인가 다닌 것, 그때 서울로 와서 6?25 전에 숭실중학교 석 달 다닌 것, 그게 내가 학교 공부한 것의 전부야. 그 외는 학교 공부를 못했어. 어머니가 쉰 정도 되시니까 내가 가장이야. 내가 벌어서 어머니와 둘이 살아야 했어. 어머니는 노동력도 없고. 이모네 집에 있을 때 그때 가장 하기 쉬운 것이 담배장수야.
신용목 옛날이야기 하시다 보니까 눈물이 글썽거리셔서….
민영 이렇게 통에다가 담배 집어넣고 끈도 있고 이렇게 들고 다니면서 명동에 자주 갔지.
신용목 그때가 열서너 살 무렵이시지요?
민영 열네 살, 열다섯 살. 찻집, 식당에 들어가서 담배를 팔고. 더러 잘 사주기도 하고 짓궂게 이러저러하기도 했지. 그런데 나는 조금도 주눅은 안 들었어. 내가 아무리 이러고 댕기더라도, 잘사는 집 아이들이 와서 저희 아버지 어머니와 돈까스 먹고 있어도 이상하게 난 그런 데 대해서는 강했던 모양이야. 담배 사라 그러고, 껌 사라 그러고. 팔아주면 고맙고 안 팔아주면 그만이고.
그것 하다가 6?25 되기 7~8개월 전에 우리 고향분이 남대문 시장에서 어물가게를 했는데, 당시 어물가게라는 게 마른 오징어, 동태, 양초, 비누 이런 것 같이 파는 가게였어. “우리 가게 와서 가게 봐라. 고생스럽지 않니” 해서 어물가게 점원으로 들어가서 6?25 전까지 그걸 했지. 주인이 10시에 나오면 그때 내가 약수동에서 살았는데 일찌감치 일고여덟시에 나가서 가게 열고. 시골에서 온 장사꾼에게 물건 팔고 다 적어놓고 주인 나오면 그때 가서 50원 받아서 설렁탕 사 먹고 그랬지. 지금 생각해서가 아니라, 평소에 그 생활도 재미있었던 것 같아.
그런 생활하다가 전쟁이 났는데 전쟁 동안 고생을 했지. 서울이 완전히 포위가 됐어. 다리라고는 한강 다리와 천호동 다리밖에 없는데, 다리가 두 개 다 폭격을 당한 거야. 그러니 서울 사람들이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해? 나룻배 타고 잠실이나 마포를 건너 소사 쪽이나 일산 쪽으로 가야 하는데 진짜 힘들었지. 폭격을 뚫고 자루 하나 메고 양식을 꾸러 갔어. 호박이든 감자든 콩이든 뭐든지. 가서 돈 있으면 돈으로, 물건 있으면 물건 주고 바꾸어 와야 했는데 우리가 돈도 없으려니와 물건도 있을 턱이 없지. 다행히 어머니가 재봉틀이 있어 쌀 몇 말 바꿔오고. 내가 자루 메고 소사도 가고 해서 조금 바꿔온 것으로 석 달을 버텼어. 또 약수동 뒷산과 남산으로 다니며 풀잎도 잘라서 먹어보면서 먹을 수 있는 풀잎, 먹을 수 있는 뿌리를 캐 와서 곡식 조금 넣고 끓여 먹었어. 내 속에는 굉장한 낙천성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것도 즐거웠어.
그 기억이 나한테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은 내가 풀 이름을 굉장히 많이 알도록 해준 거야. 대개 사람들이 풀 이름을 잘 몰라. 시인들도 풀 이름과 꽃 이름을 몰라. 요새는 조금 덜하지만, 이름 모를 새가 날아가고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이런 식으로 표현했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야. 내 시에서 보면 알겠지만 나는 그렇게 안 써. 내가 아니까. 전쟁 동안에 그렇게 먹을 것을 찾아 산을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내가 그 많은 풀 이름을 어떻게 알았겠어.
신용목 전쟁 중에는 계속 서울에 계셨어요?
민영 서울에 있었지. 서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 나는 고향이 북쪽인데, 어디 고향을 찾아가. 남쪽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3개월 동안.
신용목 전쟁 기간이 사춘기 때였죠?
민영 사춘기 때였지만 사춘기가 없는 사춘기라서 사춘기라는 느낌도 안 들어.

떠돌이, 시를 만나다
신용목 제가 알기로는 열아홉 살 때부터 시를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민영 그렇지. 사실은 전쟁 동안에 시를 썼는데 도대체 시가 뭔지도 모르고 시를 썼어.
신용목 선생님, 그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어떻게 시를 접하고 쓰시게 되셨는지. 요즘도 인터넷 유목민이라고 하면서 떠돌아다니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선생님처럼 삶으로 체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의 유민, 온라인상의 유민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같은 유민이지만 전혀 다른 형식의 유민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걱정스러워하는 이야기도 많이 들립니다. 그 대안을 사실은 삶의 진실성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그런 친구들이 요즘 시를 쓰는 저 같은 세대인데요.
민영 그건 관념적인 것이지. 그러니까 내가 처음 접한 시집은 우리 시인의 시집이 아니었어. 소월이나 만해라든가 이런 시집은 몰랐어. 내가 처음 시집이라고 산 책이 『영시 100선』이라고 양주동 선생이 영시를 번역한 책이야. 그것을 충무로 2가에 있는 서점에서 샀는데 굉장히 좋더라고. 바이런도 있고, 워즈워드도 있고. 영국 시인들 시 100편. 내가 우리 말에 대해 깊은 인식이 없던 상태에서 『영시 100선』 번역시를 읽었는데 황홀할 정도야. 나중에….
신용목 그게 언제였습니까.
민영 1948년 정도니까 열네댓 살 정도 되었을 거야.
신용목 그것은 직접 서점에 가서. 평소에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가지셨나요.
민영 아니야. 내가 글을 쓰겠다고 했던 것은 소년부터 가졌던 것이니까. 만주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3학년 선생님이 너는 이 다음에 뭐가 되려고 하냐고 했을 때 나는 문학자가 되겠다고 했어. 문학자가 된다고 했지만 시인이라는 말을 몰랐어. 소설가라는 말도 모르고. 그저 문학을 하면 좋겠다,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시를 쓰겠다는 생각도 훨씬 뒤의 이야기야. 열일곱 정도 되어서, 그때는 소설도 있고 시도 있고 수필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야. 이 중에서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나 했을 때 소설은 좀 장황하고 쓰려면 노동력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앉아서 노동을 많이 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돼. 밥 먹고 사는 노동도 해야 하니까. 또 소설은 내 성질에도 안 맞고 해서 시를 선택한 거야. 그때는 이미 소월도 읽고, 미당도 읽고, 육사, 상화 여러분 시를 골고루 읽었을 때지. 나는 시인이 되겠다, 다른 건 안 되겠다, 열여섯 열일곱에 그런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시만 생각했어.
신용목 그래서 그런지 제가 선생님의 시집를 보니 서울에 계실 때 노동현장에 많이 계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보다도 북간도 이야기나 그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더라구요. 선생님이 틀림없이 더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감수성으로 시대를 접하지 않았나, 이런 막연한 추측을 했었는데. 특히 거기서 아까 유목민 이야기를 하셨던 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더라구요. 시 속에 ‘대화하는 계집은 어디로 갔다던, 응 어디로 갔다더라’는 것을 과감하게 삽입하면서 말이지요. 그런 것들이 요즘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좋은 자산이지 않은가 생각해봤습니다.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조금만 더 듣고 시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노동일을 쭉 하셨다고 아는데 그 이야기 세목들을 잠깐만 짚어 주십시오.
민영 노동은 내가 어떤 노동을 하고 싶다고 선택한 것은 아니지. 나는 살아야 하니까 무슨 일이든 내가 해야 해. 보수가 주어지는 일이면 내가 마다할 일이 없어. 말하자면, 똥 푸는 일이라도 했을 거야. 나와 어머니가 살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명제니까. 그것을 위해 “넌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 명령하는 것은 싫지만 이걸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 나는 선택했을 거야. 그래서 선택된 것이 명동의 담배장수, 남대문시장에서의 어물가게 점원, 이런 거지. 전쟁 때 부산 내려가서 3년 있었는데 용산에서 기차 타고 부산역에 가니까 동서남북 갈 데가 없어. 아무도 아는 데가 없고 사람이 없어. 용케 누가 도와줘서 하룻밤은 잤지만.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래서 물어보니까 부두에 가면 일거리가 있다고 하더라고. 부산역 뒤로 제1부두, 그 옆이 제2부두, 제3부두, 제4부두 하고 적기부두가 있지. 제1부두 앞에 가니까 노가다 십장이 사람을 모집해. 안에 들어가서 일할 사람을. 내가 거기 응모했지. 내가 조그맣고 그런 데도 그 사람은 상관 안 해. 머리수만 채워서 들어가면 됐지. 거기 들어가서 밤새도록 배 속에 있는 물건을 크레인해서 망에 씌워 올려오면 저쪽에 하역하는 것, 또 저 밖에서 나오는 걸 자동차에 하적하는 일을 했어. 그런 것을 했지. 그런 것.
신용목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선생님 체구가 작은 편이잖아요. 그때도 평균보다는 작은 편이셨죠.
민영 작았지. 그래도 해.
신용목 그렇게 부산 시절이 얼마나?
민영 3년. 부두 노동을 겨울에서 봄까지 했어. 4~5개월 했는데 못하겠어. 저녁에 들어가서 그 뒷날 아침에 나오는 거야. 낮에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안 와. 몸이 더 나빠지고 해서 3개월 하다가 치웠어.
신용목 또 다른 일은?
민영 신문. 그때 부산 동광동 뒤쪽에 동아일보 지사가 있었어. 거기 가서 가판신문 받아서 팔았지. 50부 정도 받아서, 타블로이드 판 50부니까 크지는 않아. 그것을 가지고 제일 먼저 뛰어가서 파는 거야. 나는 집이 영도 쪽이라서 영도 쪽을 뛰었어. 다리를 건너서 제일 먼저 돌아다녔지. 영도 쪽을 한 바퀴 삥 돌면서 태종대 쪽도 맡고, 다 팔면. 그러다 보니까 단골이 생기고 “학생 참 힘든데 수고하네”라며 먹을 것을 좀 주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여러 달 했어. 그러다가 어떤 노점 빵가게 앞에서 빵을 먹다가 한 친구를 만났어. 그 앞 대한체신협회 인쇄소에서 일하는 이규섭이라는 친구야. 계동상고를 나오고 나중에 인하대학인가를 간 친구야. 그 친구가 나하고 친해졌지. 나는 뒷주머니에 책을 꽂고 다녔거든. 한가하게 집에 들어앉아 읽을 수가 없으니까. 그게 소설책이었어. 그 친구가, “야, 너 이런 책 읽어?” 하면서 “야, 좀 빌려줘!” 그러더라고. 빌려줬지. 그래서 그 친구와 친구가 됐다고. 김동리 선생의 소설 『무녀도』였어. 그런데 그 친구가 “너, 고생 그만해라.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싶다면 우리 회사 소개해 줄게” 하는 거야. 아! 좋지. 그래서 인쇄소에 들어가 해판공 일을 했어.
신용목 그러다가 서울 올라오시고. 그러면서 인쇄업 쪽에 계속 계셨던 것이죠?
민영 그 후 한 16년 동안 인쇄업종에 있었지.
신용목 등단하실 때도?
민영 난 그때 대한교과서라고 하는 인쇄소에 있었어. 대한교과서에서 《현대문학》을 만들어 냈는데, 박재삼이 거기 근무했지. 박재삼 시인은 1952년에 부산에서 이미 인사를 했고, 천상병, 박재삼은 이미 인사가 돼 있었고.
신용목 그럼 어떤 문우 활동을 했습니까?
민영 동인 활동은 안 했어. 부산이라는 데가 빤해. 문학 한다는 사람들이 전부 광복동 아니면 남포동에 모이거든. 그래서 그때 이미 그들하고 다 만났지.
신용목 직접 찾아가셔서?
민영 찾아간 것도 있고…. 박재삼 시인 같은 경우는 김상옥 선생을 통해 알게 됐지.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이 우리 회사에 시집을 만들러 오셨는데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지. 박재삼 시인은 그 김상옥 선생 제자야. 삼천포중학교. 그렇게 다 알게 되었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현대문학》에 조연현, 오영수 선생이 있는데 그 밑에 김부용, 박재삼이 있었어. 나는 만드는 인쇄소에 있고, 이 쪽은 그 앞에 조그만 출판사. 그것도 대한교과서에서 하는 것이지.
추천 받는 것은 나 혼자 했어. 박재삼한테 서정주 선생의 주소를 알아서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작품 보여드리고. 빨리 안 해주시더라고.(웃음) 선생님 댁에 찾아간 지 1년 넘게 작품 가져다 보여주면 “아, 이 사람 시 열심히 쓰는구먼.” 이러고 잘 안 해주시더라고. 그래서 왜 안 해주시나 했어. 아마 내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시를 좀 하이칼라로 써보고 싶다는. 그때가 우리 문단에 모더니즘이니 실존주의니가 서구에서 들어왔을 때야. 젊은 시인들이나 지망생들이 그쪽으로 흘러가버렸던 거야. 나도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썼는데 미당 선생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 거야. 니 길이 그게 아니라고 보신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잘 쓴 것 같은데 선생님 눈에는 안보여. 1년 지나고서야 내가 알았어. ‘니가 눈치보고 남의 것 흉내내고 그렇게 쓰는데, 그러지 말라’ 이 말이야. 니가 가진 것을 써라, 이 말이지. 열아홉에 쓴 시가 있어. 그것을 다시 꺼내서 그 중에 한 편을 재구성하고 손을 봤지.
신용목 여기서 등단작 한번 낭송해 주시겠습니까.
민영 제목이 「동원(童願)」이렇게 됐거든. 소년의 소원이야. 한문으로 썼기 때문에 그렇지.
(낭송)
오디나무 밑동에 오디가 익을 한 철을 살믄 얼굴에는 고운 오디꽃이 핀다는데
황토재 마루턱에 삼복더위를 지내믄 온 몸에는 구수한 흙내음이 배인다는데
웃마을 새악시 사당패 사내에게 받은 일곱냥짜리 반지에 참구슬 같이
저리도 고이 흐르는 별하늘 아래 몸 정히 씻고 스무해를 살았네
외로운 이 몸에도 빛줄이 서려 한마당 환히 피는 꽃이 되어라.
신용목 감사합니다. 이게 50년 전에 쓴 시죠.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민영 처음에는 그 시가 뭐 이렇게 동시처럼 썼나. 마음에 안 들었다고. 그러다가 미당 선생에게 계속 퇴짜를 맞으니까. 이것을 다시 한 번 해서 보여드릴까 해서 다시 썼어. 원칙은 네 줄, 네 줄 해서 5행이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안 돼 있었어. 나한테 그렇게 형식에 대한 뭐가 있어. 요새는 시를 형식을 잘 안취하고들 막 줄 그대로 쓰거나 성냥갑처럼 막 이렇게 문장부호도 안 찍고 하는데 난 그게 싫어. 그런 형식에 대한 것은 지금 사람이 아니라 우리 선배들 가령, 지용이나 영랑이나 다 그런 형식에 대해 생각했지. 요즘 사람들은 그런 형식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게 새로운 것인 줄 알지만 형식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은 시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생각해. 그렇게 하기가 귀찮은 거야.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수공이 들어.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니라 쓴 다음에 그렇게 만드는 데 상당한 수공이 든다고. 시는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종이에 옮겨서 쓴 다음에 그 시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쉽고 아름답게 보일까 하는 수공이 필요한 것이야.
시 쓰는 일은 조각(彫刻)이다
신용목 자연스럽게 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같은데요. 제가 선생님 시를 읽을 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오히려 흠이 될 정도로 형식이나 조밀하게 구성하는데 굉장한 공을 들이시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시더라구요. 요즘 시들은 읽기도 힘드시죠.
민영 읽기도 힘든 것이 아니라 읽을 재미도 없어.
신용목 선생님은 아까 시에 대한 직무유기라는 말씀을 잠깐 해주셨는데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서 지금까지 시라고 믿는 것에 대한 육체가 있잖습니까. 형식이 있고 시라고 믿는 것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시라는 것, 시가 가져야 될 것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민영 먼저 선행될 것이, 나한테는 그런 시가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야. 나도 그렇게 줄글로 써야 효과가 난다는 시는 그렇게 써. 정형으로 쓰지 않아도 되는 시라고 하면 또 그렇게 쓰지. 형식에 얽매이지는 않아. 이것만이 시의 절대적이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러나 시를 써 놓고 봐서 정형으로 쓰는 것이 옳다고 하면 그것을 쓰고, 정형이 아니라면 정형이 아닌 것을 취하는 것이거든. 요새 사람들은 정형으로 쓸 것도 정형으로 쓸 줄 모르고, 우선 그렇게 쓰기가 귀찮고 힘드니까 그대로 하는데 나는 옳은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시는 그래. 더러 요새 일부 사람들은 시가 뭐 좀 너무 쉬워서는 안 되고, 그 안에 있는 전체적인 것이 독자를 혼미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야.
신용목 선생님 말씀은 언어가 가진 결정적인 면을 찾아내서 그것을 결정체로 완성하고 세공하라는 거지요. 어디선가 선생님께서 시 쓰는 것은 조각하는 일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과 같은 말씀을 해주시네요. 요즘 친구들은, 이를테면 우리들이 너무 이렇게 흘러왔다는 것입니다. 시가 시대를 전복하지 않으면 무엇이 전복하겠는가 하는 의문에서 시는 출발하는데, 예전에는 사상으로 전복한다거나 삶의 구체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 전복시켜준다거나 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요즘은 그것마저도 선배들이 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일군의 젊은 시인들 속에서는 언어 자체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더라구요. 선생님 말씀대로 시의 육체가 언어라는 고민이 엇나갔거나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민영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 언어에 대한 전복을 꾀한다는 것은 언어를 불신한다는 것 아니야?
신용목 아뇨, 불신과는 조금 다른데요. 가령 언어 발화과정은 나에게서 시작해서 상대방으로 가는데 사실은 1인칭인 나에서 2인칭으로 가는 것 자체부터 부정한다는 거죠. 시의 모든 발화과정이 왜 1인칭에서 2인칭이나 3인칭으로 가야 하는지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앞에 계신 분이 선생님이면서도 나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1인칭에서 시작해서 1인칭으로 가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말을 하고 내가 듣는 아주 혼동된 것들.
민영 폐쇄적인 길로 가자는 이야기인데 시는 하나에서 시작해서 보다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해줘야 해요. 나 하나의 작가와 상대방에 앉아 있는 또 하나의 나에게만 메시지를 겨우 전달한다면 시가 뭐 하러 존재하는가.
신용목 아무튼 그런 일면이 젊은이들에게 존재합니다. 그런 것들도 선생님 말씀을 통해서 다시 고민해 보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적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쭉 말씀해주셨듯이 작년에 가라타니 고진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작가와 작품은 상호 괄호 치기의 관계라는 것. 작가를 이야기할 때는 작품을 괄호 쳐 놓고 이야기를 해야 되고, 작품을 이야기할 때는 작가를 괄호쳐 놓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 글쓰기라는 거지요. 이 이야기를 듣고 제가 깊게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것들이 선생님 시에, 특히 제가 느끼기에는 유민의 과정으로 크게 반영이 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노동현장에 계셨던 과정을 여쭸던 이유는 거기에 대한 시편들은 오히려 비중이 적게 나타나지 않느냐는 느낌이 있어서입니다.
민영 노동에 대한 것은 세부적으로 쓸 수 없지. 농사지을 때 호미로 땅을 파고,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는 없어. 그러나 내 시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 그런 식으로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시적 정서로 그것이 들어 있어. 유목의 과정이 힘들기는 하지만 유목민이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유목민에게는 굉장한 낙천주의가 있기 때문이야. 그 낙천주의가 없으면 유목민이 유목 일을 못해. 그러나 관념적인 유목민은 노동이 겁나고 무섭고 힘들지. 노동은 신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부분 부분이 어렵고 힘들 때도 있어.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노동은 나에게 굉장한 기쁨과 좋은 체험을 줬어. 노동이 날 키웠다고 생각해. 더러 내 시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노동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스스로 잘 극복하고 살아오면서 지금도 그때 친구들과 더러 전화해. 옛날 인쇄소 친구들.
신용목 그게 노동에 대한 내밀한 긍정성과 낙천성인 것 같은데요. 유민 시도 그렇고 노동현장도 그렇고, 자의에 의해, 선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 삶은 아니잖아요.
민영 아니지. 타의에 의해 주어졌지만 결국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지. 처음에 주는 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은 아니야. 자기가 살아온 시대적인 것이거나 또는 상황적인 것에 의해 주어졌지만 그것을 하는 동안에 자기의 의식으로, 자기 것으로 쟁취하는 것이지. 거기에 상당한 긍정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거지.
신용목 저는 그것을 역사의 현장으로 봅니다. 선생님의 삶의 과정이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유민으로 쫓겨 가는 것도 식민지 상황 때문에 된 것이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노동현장도 전쟁기 이후에 개발로 들어가기 위한 혼란기, 우리 사회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영 시의 삶과 주변
신용목 또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선 당시(唐詩) 번역도 하시고 관심도 많으신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과 아동들에게 역사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더라구요. 고구려 이야기, 이런 것들을 듣고 싶습니다.
민영 그것은 시만 써서는 못 사니까. 수입이 생겨야 하잖아.(웃음) 농담이지만, 그래서 수입이 생기는 일을 하려니까 산문을 써야겠다 싶었지. 사실은 내가 출판사에서 아동물을 많이 했어. 잡지사에도 있었고 여성잡지도 편집하고 했지만, 아동물이 특히 내 마음에 들었지. 역사라는 것은 내가 늘 좋아하는 학문 가운데 하나고. 창비에서 아동물을 시작했어. 윤경렬 선생이라는 분이 신라 이야기를 『삼국유사』에서 뽑아서 그걸 쓰셨다고. 『삼국유사』에서 뽑은 신라 이야기가 나왔는데, 신라 이야기가 있으면 고구려 이야기도 있어야지 싶은 거야. 나는 강원도 철원 사람이니까 고구려고, 내 기질 속에서 신라나 백제보다는 고구려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었거든. 만주에도 있고 그랬으니까. 편집진에게 “고구려 이야기도 써야 하지 않나. 신라 것 있으니.” 쓸 사람이 없대. 그래? 그러면 내가 쓰지 이렇게 했던 것이야. 그때 생각에 윤경렬 선생이 『삼국유사』에서 빼냈으니까 뭐 이런 것을 빼낼 수 있는 데이터가 있을 줄 알았어. 쓴다고 장담을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책이 발견되지 않는 거야. 야사 같은데 조금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돼. 그렇게 하기를 3년이 지났어. 그러니까 “민 선생! 왜 고구려 이야기를 쓴다고 하고 안 써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됐어. 내가 “중국 쪽 길을 텄으니까 갔다 와서 쓸게” 이렇게 해놓고 생각해 보니까 안 되겠어. 내가 병이 다 났어. 봄여름인데 집에 드러누워서 약 먹고, 마루에 드러누워 생각했지. “아! 『삼국유사』에 없으면 『삼국사기』에서 뽑자. 역사 같은 것이 없으면 이야기라도 뽑자.” 그래서 『삼국사기』를 빨간 줄 치면서 보고 이야기를 뽑아낸 것이야. 다른 자료도 좀 합치고. 그렇게 해서 해낸 것인데 생각은 오래 했지만 쓰는 데는 한 3개월 밖에 안 걸렸어. 굉장히 재미있고 즐겁게 썼지. 책도 많이 나갔어. 36판이 나갔어. 그것에 재미가 들려서 고려 이야기를 쓰고, 또 번역 같은 것도 하고 그랬지. 이순신 전기도 쓰고. 지금 안중근 전기를 써야 하는데 마음이 안 잡혀서 안 되네. 이런 일은 내가 좋아하는 작업, 즐겁게 하는 작업이야.
당시(唐詩)는 하고 싶은 생각이 굉장히 오래 전인 한 30녀 전부터 있었는데 공부가 모자라서 못했어. 옛날에 두보시 번역한 『두시언해』 같은 것 말고, 당시를 제일 먼저 우리나라에 번역한 것은 이원섭 선생이야. 『당시언해』라는 책을 현암사에서 낸 게 처음이었는데 굉장히 좋게 봤어. 그 이후에 여러 분이 당시 번역한 것을 봤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재미도 없어. 중국문학자 한문학자들의 번역은 시를 기다랗게 쓰고, 한 글자 한 글자에 매달려서 시를 어렵고 지루하게 만들어. 내가 이 다음에 당시를 번역하게 되면 중국시가 아니라 우리 시처럼, 우리 시를 읽듯이, 우리가 소월 시나 목월 시를 읽듯이 번역해야지, 이렇게 마음먹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 그러다가 한 4년 전에 몇 편을 번역해서 한 출판사에 갔다 줬지. “심심해서 했는데 봐라”고 했더니 좋다는 거야. 그러면서 열댓 편 가지고 안 되니까 150편은 번역해서 계약하자 그래서 그해 4월부터 12월까지 번역했어. 시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약력도 넣고 해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렸지.
신용목 약속된 시간이 다 돼 가는데요, 선생님. 살아오신 이야기, 그 세목들을 시와 대비해서 이야기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지 못한 것도 아쉽고, 문학사에서 명동시대와 인사동시대를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 뒷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민영 그거야 뭐 밤새도록 해도….
신용목 삶의 진실성이 어떻게 문학으로 나아가고 문학이 또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는지 말씀해 주신 선생님의 진의가 이 자리를 통해 젊은 친구들과 공유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방 안중근 전기도 말씀하셨는데, 시와 인생 등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민영 일흔도 넘어서 내일모레면 일흔넷인데 뭔 인생을 계획해. 시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지. 지난번 시집 낼 때 “내가 시집을 너무 많이 냈지” 이렇게 생각했어. 사실은 시집 일곱 권이고 시전집까지 여덟 권이니까 남보다는 적게 낸 것이지만. 그런데도 ‘야! 이만큼 냈으면 됐지’ 했는데 보니까 또 시집 한 권 정도가 모여 있어. 어차피 모여 있으니까 내년쯤에 낼 생각이야. 또 아이들을 위해 동시를 쓰고 싶은데 동시가 안 돼. 아이들을 위해서 동화도 쓰고 싶고, 동시도 쓰고 싶은데 그것이 어렵더라고. 내가 순진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 하여튼 나는 심심하면 못 견뎌. 심심하면 뭘 해야 해. 심심하면 술 마시고 하는 성질이 아니라 심심하면 책 보고 그 속에서 뭔가 끄집어내서 글을 만들어야 하는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어. 그동안 써 놓은 것도 다 그런 습관 때문이야. 좋은 습관인가? 공자님 말씀이, 소인은 심심하게 되면 요사스러운 짓을 한다고 했는데, 난 심심하게 되면 생산성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살아왔어. 그래서 뭘 하겠다, 이런 시를 내겠다 그런 생각은 안했는데 심심하면 또 엉뚱한 짓을 할지도 몰라. 엉뚱한 것을 만들어 낼지도 몰라.
신용목 보는 이에 따라서는 아직 49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등단 50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요즘 평균수명이 늘어나서 선생님께서는 노인보다는 젊은 축에 들지 않습니까.
민영 요번에 만해문학상 타신 김규동 선생님께서 여든다섯인가 그런데 『느릅나무에게』라는 시집을 내셨어. 나는 아직 멀었지. 아! 나는 깜짝 놀랐어. 노인이 이런 시집을 내셨구나 하고. 이제 자연 연령은 늘어났지만 자연 연령이 꼭 문학적인 연령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늘어난 연령이 자기가 하는 예술작업과 관계가 없어진다면 나머지 10년, 20년이 얼마나 불행할까 싶어.
젊은 사람들도 여분의 시간을 그대로 아무렇게나 보내지 말고 자기가 처음부터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매진해야 해. 어떤 것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계속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놀아야 해. 그 안에서 놀아야 하지. 놀지 않으면 안 생겨. 그러지 않고 너무나 조급증에 걸리거나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타까워. 우리 시대에도 있었어. 내가 문단에 나올 때만 해도 내 주변에 동업자들, 지망생들이 한 30~40명 있었어. 시는 한 20명 정도 되고. 그런데 지금 아무도 없어. 겨우 고은이 하나 있나? 미당 선생 제자 중에서 고은이 한 사람밖에 없어. 나온 잡지는 다르고 추천한 사람은 다르지만 신경림 하고 황명걸이 뭐 이렇게 남았지. 중도에 모두 빨리 포기해 버렸어. 작자 개인의 재능에도 한계가 있겠지만 문학을 하는 게 무슨 노력 없이 향락주의로 생각하니까 그래. 문학은 작업이야. 꾸준히 작업해야 해. 작업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낼 수 없어. 무슨 얘긴지 알겠지?
신용목 예,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면서 놀기도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열심히 하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노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까. 같이 놀아야 하니까요. 선생님 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 섞이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민영 저희들이 찾아오면 내가 이런 이야기 다해주지.
신용목 다음에도 좋은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민영 아니야, 그런 이야기는 안 해도 돼. 《문장 웹진/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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