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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배워 등단하고 삶을 배워 시를 쓴 문학주의자

  • 작성일 2007-05-09
  • 조회수 4,670

 

시를 배워 등단하고 삶을 배워 시를 쓴 문학주의자



대담 신경림(시인)

진행?정리 안상학(시인)

 

intro 

소회 

학창시절 

등단시절 

시대정신 

새로움 

낙향 

상경, 첫 시집 

시인이란 모름지기 모든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시낭송-갈대 

근황 

문학주의자 

젊은 시인들에게 

문학하는 사람으로서의 사회적 실천 

독자들에게 




안상학  안녕하십니까, 안상학입니다. 오늘은 시인 신경림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의 데뷔 시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저 자신도 1988년에 등단했는데 신경림 시인이 심사를 하셨습니다. 심사평을 지면으로 보면서 많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 말씀은 아직도 제가 시를 쓰는데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께서는 1955년~1956년에 걸쳐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하셨습니다. 추천을 하신 분이 이한직 시인이신데 시천기(詩薦記)에서 이런 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칭찬의 말씀도 있었지만 많은 부분 시를 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지적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선지 몰라도 신경림 시인은 등단 이후 10년 정도 휴지기를 갖게 됩니다. 사회적인 고민도 있었겠지만 그런 충고에 대한, 다시 말해 시대정신을 살려야 한다는 지적에 대한 고민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지금 시를 쓰고자 하는 분, 문학을 막 시작하시는 분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신경림 선생님의 등단 시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이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시죠?

 




식물학자의 꿈과 시인의 길


신경림  오랜만입니다. 건강해요.

안상학  선생님께서 1935년 을해년 돼지띠십니다. 4월 6일이 선생님 생신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딸이 하나 있는데 선생님과 간지가 같습니다. 을해년, 1995년생입니다.

신경림  나는 내 생일도 잊어버리고 지나갔는데.

안상학  제 딸도 4월생이고, 선생님과 생일도 비슷합니다. 선생님이 4월 6일이고, 제 딸은 4월 9일입니다. 팔자가 비슷해서 시 쓴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경림  몇 살이지?

안상학  이제 열세 살입니다. 선생님은 올해 일흔 셋이 되시죠. 오늘은 선생님 등단 시절을 중심으로 해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신경림  문단야사 같은 얘기를 하지 뭐.

안상학  지금 시대에서 시를 쓰는 젊은이들에게 선생님의 등단 시절을 들려주면서 무슨 고민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작은 안내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꾸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로 등단하신 지 50년 정도 됐죠? 그동안 줄기차게 시인으로서 살아오셨는데 간단하게 소회 정도 말씀해 주시죠.

신경림  특별한 소회라는 것은 없어. 돌이켜보면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우리가 등단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이만한 수준이 될 줄을 생각도 못했어. 외국 사람들도 우리나라를 도저히 민주주의도 못할 나라고 경제발전도 안 될 나라라고 생각했어. 정말로 이 세상에 있어도 아무 소용도 없는 나라가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진 외국 사람들이 많았지. 그런 세월을 우리가 살아왔어. 지금으로서는 사회가 많이 달라져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부유해졌고 민주화도 이룩됐지. 그런 과정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도 많이 했고, 말하자면 그런 고민 속에서 시를 써온 것이니까 그런 고민의 일단이 시로 형상화됐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안상학  그런 고민들에 앞서서 보다 어렸을 때, 초?중등학생 시절에는 시대적인 고민이나 시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는 무작정 시가 좋아서 쓸 수 있었던 시절이 있잖습니까. 어린 시절의 꿈이 있었다면 시인의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었나요.

신경림  그때 내가 나무도 좋아하고 풀도 좋아하고 해서 앞으로 커서 식물학자나 그런 것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꿈은 이제 사라졌지만. 우리는 요즘과 달라서 중?고등학교 들어오면서부터 사회적 고민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때는 고등학생이나 중학생들도 툭하면 무슨 사건에 걸려서 잡혀 들어가던 시절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시는 그런 사회적 고민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했었지. 그러다가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뒤늦게 우리의 삶, 이런 것이 시 속에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좋은 시, 감동을 주는 시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이죠.

안상학  선생님은 어려서 식물학자를 꿈꿨다고 하셨는데 식물학자가 실제적인 자연과 대화를 한다면 선생님은 시로서 자연과 대화를……

신경림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 시를 쓰고 있는 것도 어릴 때 꿈꿨던 식물학자와 다른 것이 아니구나 생각할 때가 있죠.

안상학  사람의 정서라는 것이 8세 정도 되면 완성된다고 하는데 우리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어려서 특별히 강이라든지 나무라든지 자연, 이런 것들에 상당히 마음을 열어 놓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정서를 형성했던 환경 같은 것, 이런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신경림  어릴 때 정서가 만들어지는 데 가장 관계가 있었던 것은 강이었던 것 같아요. 강에서 멀지 않은 데 살고, 늘 강과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지. 내가 농촌 출신이지만 다른 농촌과 달리 광산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광산이라는 것도 어릴 때 정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우리 나이의 시골 출신들은 대개 전깃불이라는 것을 커서 봤는데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쯤에 전깃불이 들어와서 전깃불 밑에 자랐으니까 다른 농촌과 달랐죠. 물론 농촌적인 삶은 다른 데와 마찬가지겠지만 조금 달랐다고 생각해요. 장터가 가까워서 장터 분위기도 성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지.

안상학  선생님의 정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은 남한강의 유장한 정서, 그 위를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런 것이 근간을 이루지 않나 싶습니다. 충주고 다닐 때 어쩌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보셨다고 했는데, 그때 선생님이 진술하시기를, 고비였다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신경림  그때 내가 원래 사범학교 다녔는데, 고등학교로 옮기니까 학교에 재미도 붙지 않고 해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죠. 3학년이 되니까 아무래도 공부를 좀 해야겠다 싶어서 여름방학 되기 전에 공부할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갔다가 참고서 대신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헌책을 샀어. 방학 동안에 『죄와 벌』한 권만 읽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한 권 읽으니까 여름방학이 다 가버렸어. 일본책이니까 두껍고 해서. 이왕 버린 것, 『카라마조프의 형제』도 읽어야겠다 해서 학교 나가는 대신 그것을 읽고 앉아서 제대로 공부 못했죠.

안상학  일어판이죠?

신경림  일어를 잘하지는 못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일어공부를 꽤 했죠.

안상학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를 다니셨죠.

신경림  초등학교 4학년까지지. 4학년 올라와서 해방이 되었어. 그때 실력 가지고는 책을 못 읽지. 기본은 됐지만.

안상학  선생님 인생에서 첫 번째 좌절을 맛본 것이 사범학교를 그만둔 것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신경림  그것은 좌절이 아니지.

안상학  풍금, 음악…….

신경림  그것은 학교에서 풍금을 못 치니까 담임선생님이 옮기라고 했어. 담임선생이 나를 굉장히 아끼는 선생님이라 반 강제로 고등학교로 옮기라고 해서 옮긴 다음에 그 선생이 고등학교로 옮겨왔어요. 지금까지도 선생님으로 가끔 만나는데 요즘은 친구처럼 돼서 술도 같이 마시는 사이가 됐지.

안상학  어쩌면 교사의 길을 갈 수도 있었겠네요.

신경림  그렇죠. 식물학자가 되는 것, 그 다음 꿈은 역시 교사였던 것 같아.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것은 영 하지 못하고.

안상학  어쩌면 그때 충주고등학교로 옮기기를 권했던 그 선생님께서 선생님의 문학적인 자질을 보셨던 것 같네요.

신경림  그렇지. 그 선생님이, 너는 대학을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수없이 강조해서 옮기게 만든 것이지. 아버지와 만나서 꼭 고등학교로 가서 대학을 보내야 된다고 했어.

안상학  그럼 지금까지도 교분을 두텁게 쌓아온 유종호 선생님과의 교분이 충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된 거겠네요?

신경림  고등학교 때는 서로 알기만 할 뿐이었고 서울로 대학 와서 가깝게 지냈지.



신경림, 슬픈 나무


안상학  우선 선생님의 등단 시절을 좀 되짚어볼게요.

신경림  우리가 등단할 무렵에는 신문 신춘문예가 막 시작될 때였어요. 일제시대에 있다가 해방되면서 없어졌는데 다시 생긴 것이죠. 문학잡지는 딱 두 가지가 있었어요. 《현대문학》과 《문학예술》인데. 《현대문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문학예술》은 몇 해 전에 새로 생겼죠. 둘의 차별 같은 것을 보면 《현대문학》이 전통적인 것, 고전 같은 것에 치중하고 또 시나 소설도 전통적인 쪽에 역점을 뒀다면 《문학예술》은 새로운 것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그래서 《문학예술》을 통해서 문단에 나온 사람들은 대개 젊은 학생들이 많았어. 내가 투고를 어느 쪽으로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친구가 《문학예술》이 좋겠다고 해서 《문학예술》 쪽에 투고를 해서 문단에 나온 것이지.

안상학  저는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왜 《문학예술》에 투고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특별한 까닭이 있었을까 하고요.

신경림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쪽이 젊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진 잡지였기 때문이지.

안상학  성향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는지.

신경림  성향도 그쪽이 새로운 경향의 시를 많이 선호했죠. 요즘으로 말하면 모더니스트도 많이 배출하고, 나이 많은 사람보다는 젊은 학생들,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을 많이 뽑았죠.

안상학  그때 《현대문학》은 추천이 두 번이었습니까?

신경림  둘 다 세 번이었어.

안상학  상당히 지루하셨겠어요.

신경림  나는 뭐 금방 돼 가지고……

안상학  선생님께서는 2개월 간격으로 추천을 받으셨더군요. 그때 잡지마다 추천하시는 분들의 명단이 발표되고 했었잖아요. 그런 것은 염두에 두셨던가요.

신경림  그런 것도 좀 염두에 두었을 거예요. 《문학예술》은 조지훈 선생이 계셨는데 문단에 나가기 전에 조지훈 선생의 강의를 동대에서 들었고 약간의 안면이 있는 정도였으니까. 서정주 선생하고도 조금 아는 사이였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안상학  이한직 선생은 그때도 알고 계셨나요.

신경림  추천받은 뒤에 인사를 했지.

안상학  그때 당시 당선 소감을 보니까 ‘신경림, 슬픈 나무’ 이렇게 나가면서 주소, 학교, 이름 밝히고 하는데 본명을 신응식으로 해놓으셨더라고요.

신경림  잡지사에서 밝히라고 해서 했는데, 안 밝혀야 하는데 밝혔지.

안상학  이 필명을 쓰시게 된 것은 누가……

신경림  자작이지. 자호. 특별한 동기는 없고.

안상학  굳이 경림이라고 쓰신 것은 울림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신경림  숲을 좋아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나하고 같은 사람이 집안에 하나 있었는데 나이도 거의 비슷하고 여러 가지로 내가 싫어하는 성격의 사람이라 그게 가장 큰 이유였지.

안상학  특별히 수풀 림 자를 선택한 것도 나무를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었나요?

신경림  그렇지. 그런 것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일 거야.

안상학  그때 당시 1955년 12월 호에 추천을 받고 이한직 선생님이 시천기(詩薦記)를 쓰셨잖아요. 심사평이랄까 이런 것이 있는데, 수삼년 동안 투고작을 봐온 사람 중의 한사람이 신경림이다, 이런 표현을 한 것이 있더라고요.

신경림  그건 그 양반의 착각일 거야. 나는 처음 투고해서 바로 추천을 받았으니까.

안상학  아! 그래요. 바로 이 잡지입니다. 이때 선생님이 처음 추천을 받은 것이 「낮달」이죠. 이한직 선생께서 그때 여러 가지 지적을 좀 하셨는데요.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가 아름답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뭔가 내면화 돼서 안에서 울려나오는 울림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을 하셨어요. 그때 시천기를 읽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신경림  글쎄요. 생각이 잘 안 나는데 특별히 추천기를 읽고서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젊었을 때의 고집이니까. 나름대로 고집이 있었어. 그 한참 뒤에 내가 이런 시를 계속 해서 쓴다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회의 같은 것이 생긴 것이지. 추천 받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어요.

안상학  처음 작품이 활자화되어 나왔을 때 책을 보셨을 것 아닙니까. 그때의 느낌이 어떠셨습니까?

신경림  글쎄. 뭐 좋아했지.

안상학  술도 한잔하시고요?

신경림  돈이 없으니까 술은 마시지 못했어.

안상학  대학시절이면 20살, 21살 무렵인데 문학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분들이 누가 있었을까요.

신경림  추천 받기까지는 아무도 문학친구가 없었어요.

안상학  혼자서 계속 습작을 하신 거군요.

신경림  학교에도 가보면 내가 영문과를 다녔는데 문학을,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 그러다 추천을 받고 나니까 이름을 알아보고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유종호 하고 다시 만난 것도 그 무렵 추천을 받고 나서 친해지기 시작했어. 서울 와서 문학하는 사람 중에서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이 황명걸이었던 것 같아요. 유종호가 임재경이라고 언론에 있던 사람을 소개시켰고 임재경이가 또 황명걸을 소개시켰고, 그래서 알게 됐는데 그게 아마 《문학예술》이 나올 무렵이었을 거야.

안상학  초회 추천 당시에 박성용, 박재호 이런 분들과 같이 추천을 받으셨는데 그때 심사평에서 시가 참 예쁘다, 잘 씌어져 있다, 말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뭔가 공허하다면서 이한직 시인이 시대정신을 언급하셨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시평을 보셨을 텐데 그때 당시 시대정신에 대한 고민이 있었겠죠.

신경림  우리는 그때 시대정신에 대한 고민이 없었어. 사실은 발표되고 난 뒤부터 나 스스로 하기 시작한 거죠. 우리가 시를 쓸 때 이야기를 하면, 서울이 아직 전쟁의 폐허에서 깨어나기 전이니까 폭격 맞은 자리와 포탄 흔적이 남아 있고, 거리에는 거지, 상이군인, 팔 하나 없는 사람이 바글바글했어. 애들, 장사꾼들, 창녀들도 바글바글할 때죠. 그런 것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추천받고 나서 학교도서관이나 동대문에 가면 고서점이 많았는데, 거기서 전석담의 『농업경제론』이라든가 백남훈의 『조선경제사』같은 책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시가 정말 시일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했죠. 사실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되니까 시를 못 쓰게 되는 거예요. 그 책을 읽는 가운데 서점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 술도 먹고 모임도 만들고 했는데 같이 책 읽고 모임 만들어 술도 마시던 사람들이 그 뒤에 조봉암 사건에 연루가 됐어. 그래도 그 사람들하고 같이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많이 했죠. 그러면서 시는 포기해버리고. 오히려 안 써지더라구. 그 때 시라는 것은 내 시뿐 아니라 모든 시가 서정시 아니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같은 모더니스트의 시 같은 아주 공허한 시들이었죠. 아마 그런 것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이한직 선생은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아.

 

 

 

절망으로 낙향하다


안상학  제가 1988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어요. 심사평에서 몇 가지 지적을 하셨는데, 상투적인 시들이 많다, 그중에서 조금 덜한 것을 뽑는다……

신경림 어느 신문이었지?

안상학  중앙일보였죠. 그러면서 그때 시대가 대선정국이었고 어수선할 때인데 그럴수록 시인들은 항내적으로 마음을 모아서 우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을 하셔서 그 지적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혹시 선생님도 이한직 선생이 시천기에서 지적한 것들이 마음속에 남아있나요? 

신경림  나는 별로. 그때만 해도 우리가 오만해서 남이 내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안상학  3회 추천을 완료하고 이한직 선생을 찾아가셨지 않습니까. 그때 이한직 선생과 술을 한잔 하신 것으로 이야기가 되던데.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이한직 선생께 대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뭐 이런 저런 작가들을 모를 줄 아느냐고 호기를 부렸다고 하는데 그때 이야기 좀 해주시죠.

신경림  생각이 잘 안 나. 그래 가지고 거꾸로 이한직 선생하고 친해졌지. 사실 내가 이한직 선생의 시에 대해서는 굉장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 나는 청록파 세 사람의 시보다도 이한직 선생의 시를 좋아했지. 당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종호도 이한직을 더 평가했어요. 다만 해방되고 너무 시를 안 썼어요. 자기가 친일파의 자식이라는 것 때문에 시를 못 쓴 것으로 아는데, 이한직 씨 하고 만나서 시 이야기를 많이 했죠. 아는 척도 많이 하고.

안상학  선생님도 그때 스물 한두 살인데 지지 않으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신경림  다른 모임에서도 책을 읽으면 하나를 읽어도 열 가지 읽은 것처럼 아는 척했어. 또 그때만 해도 기억력이 좋을 때니까. 외국시인들 시를 원문으로 외워서 이한직에게 이런 것을 들어봤느냐고 했어. 그래서 둘이 친해졌지. 그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는데, 일주일 사이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하는 모임이었어. 거기서 제일 왕 노릇을 하려면 남들이 안 읽은 책을 읽어야 해. 안 읽은 책을 가지고 압도해버리면 일주일 동안 대장이 되는 것이지. 그러느라고 새 책, 남들이 안 읽는 책 구해서 읽는 재미도 있었고. 그러면서 오히려 시하고는 멀어진 것 같아. 예컨대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때 『공산당 선언』같은 것을 영문판으로 구했어. 물론 다 외우는 것은 아니야. 앞에 몇 장, 몇 페이지를 외워서 술자리에서 딱 외우니까 깜짝 놀라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야, 이거 니가 최고다” 했던 것이 기억나요. 치기만만한 것이 오히려 거꾸로 책을 읽게 만든 그런 측면도 있었지.

안상학  선생님 추천 당시에 「갈대」라는 시를 가지고 이한직 시인이 새로움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거든요. 선생님 시가 다른 시들에 비해서 신선하다, 외형적으로는 시들이 비슷한 것 같은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울림 같은 것들이 자못 신선하기 비길 데 없다는 표현을 하셨어요. 그 신선함이라는 것은 요즘 자주 쓰는 말로 새로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새로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잖습니까. 시가 새로워야 된다고. 이 새로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경림  시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시인이라는 것이 뭐하는 사람인가, 시인이라는 것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 만지지 못하는 것을 먼저 보고 만지고 느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 중에 가장 큰 것인데, 그러니까 시인들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 만지지 못하는 것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야지. 바로 그것이 새로움이죠. 그러니까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새롭고, 다른 시인으로부터도 새로워야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어요. 자기가 하는 소리를 만날 하는 시인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기로부터 새롭지 못하니까 새로운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해요, 나 자신도 잘 못하고 있지만, 어제까지 쓴 시를 과감하게 다 버릴 줄 아는 시인이어야 가장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라고. 누구한테나 다 어려운 일이고 누구라도 그것을 완전히 실천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만 가지고 있어도 보다 새로운 시를 쓸 수 있겠죠.

안상학 선생님은 이한직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장했고, 그리고 몇 작품 정도를 발표하고는 시단을 떠나셨거든요. 서울을 떠나서 낙향하셨는데 낙향할 때의 그 마음이 어떠하셨는지요.

신경림  어쩔 수 없어서 낙향한 거야. 같이 책을 읽던 친구들이 사건에 연루돼 잡혀 들어가는 것도 무섭고, 돈도 서울서 버틸 만큼 없고. 그때만 해도 다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하는 회의에 빠졌어요. 뭘 하겠다고 해서 내려간 것은 아니고 절망적인 기분에 내려간 것이죠. 시골 가서는 농사도 지어보고, 친구가 일하는 광산을 찾아가서 빌붙어도 살고, 학원 같은 데서 아이들도 가르쳐보고, 여러 가지를 해봤는데, 그러면서 세상 공부를 다시 했죠. 정말로 우리나라는 험한 역사를 살아왔어요. 그때만 해도 시골 어느 곳에든지 역사가 할퀴고 간 자리가 안 남은 곳이 없었어요. 어느 동네 가보면 (같은 날) 아버지 제삿날이 댓 명씩 되는 일도 허다했고. 다 먹고 살기 힘들고. 지금도 농촌은 문제가 많다지만 옛날에 비하면 잘 사는 것이지. 그때만 해도 봄만 되면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 우리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을 다니면서 앞으로 내가 다시 시를 쓸 기회가 온다면 이런 삶의 현장을 재구성하는 시, 이러한 정서를 형상화한 시를 써야겠다고. 그러지 않으면 내가 무슨 시를 쓰는 보람이 있겠는가 하면서 내 나름대로 세상 공부를 했던 것이지. 거의 10년 가깝게.

안상학  역시 세상 공부란 시 공부와 맞물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당시 내려가셔서 여러 군상들의 삶의 모습을 많이 가슴속에 담아두셨을 텐데 그때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선생님이 등단 전후에 사회과학 책을 읽으면서 형성된 세계관이 작용을 한 것입니까?

신경림  그렇죠. 그런 것이 있으니까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 시골에 살고 있다고 해서 현장을 다 보는 것은 아니거든. 생각이 있으니까 보이는 것이지. 그리고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아주 절망적이라 앞으로 제대로 나라꼴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야. 그래서 나는 내 시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허무적인 것, 이런 것이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해요.

안상학 「폐광」에서 “나는 그들이 주먹을 떠는 까닭을 몰랐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이 시의 눈일 것 같은데요, 그들의 삶의 극한 상황과 고통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거기에 동화돼 가면서 나온 것이겠지요? 

신경림  그러면서도 절망적인 삶을 바꾸어보려는 의지들은 군데군데 있었거든. 그런 얘기겠지.

안상학 「농무」에서도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는 진술이 있는데 역시 이런 것들은 선생님이 직접 느끼고 있던 절망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내려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 사람들 또한 그런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래서 뭔가 출구를 찾으려고 좌충우돌하는 민중들의 모습들이 『농무』의 전편에 흐르는 게 아닐까 합니다. 『농무』에 실린 시들은 그때 낙향해서 쓰신 시들입니까, 나중에 서울 올라와서 다시 쓰신 것입니까?

신경림  그때 현장에서 쓴 시는 딱 두 편일 거야. 「그날」과 「눈길」이라는 시. 그 두 편은 당시에 썼어. 8~9년 동안 딱 두 편만 썼던 것이지. 그리고 서울로 와서 다시 시를 쓰게 되면서 마음속에 메모되었던 것을 다시 형상화한 것이지. 내가 습관적으로 시를 쓸 때, 옛날부터 그래요, 바로 못 쓰고 머릿속에 일단 메모를 하지. 머릿속에 일단 묻어두었다가 며칠 지나면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아주 없어지기도 해. 없어지면 내버리고. 다시 살아나면 그때 시로서 구성하지. 또 어떤 시는 며칠 뒤에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일 년쯤 있다가 구성되는 것도 있고, 삼사년 있다가 구성되는 것도 있고 그렇죠.

안상학  선생님께서는 초고를 쓰면 벽에 붙여두고 오며가며 첨삭을 하는 방법을 쓰신다고도 하는데요.

신경림  옛날에는 그런 것이 있었는데 대개 나는 머릿속에서 거의 완성된 뒤에 쓰지요.

안상학  머릿속이라는 것은 사실은 내면화 과정으로 봐도 됩니까?

신경림  내가 쓴 시는 대충 기억을 하지.

안상학  낙향 이후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혼을 하신 것 같은데 1963년 약혼을 했고 결혼은 언제 하셨죠?

신경림  1965년쯤 하지 않았을까.

안상학  약혼하고 한참 지나서 아닌가요?

신경림  약혼도 그게 아닐 거야.

안상학  약혼 사진이 1963년 9월이던가요?

신경림  그러니까 한 1년 있다가 한 모양이네.

안상학  그때 먹고 살기도 상당히 어려웠을 텐데 결혼을 한 배경을 좀 해주시죠.

신경림  글쎄요. 그때는 지금과 삶의 형태가 달라서 결혼 안 하면 못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서 결혼을 안 할 수가 없었어. 동생들도 있고 말이야. 동생들은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 서울대학 나온 잘난 동생들도 있고. 그런데 내가 먼저 결혼을 해야 애들도 결혼을 할 것 같았지. 앞에 똥차가 가야 될 것 같아서 결혼했던 것이지.

안상학  어려운 시절에 결혼을 하게 돼서 심정적으로는 안정되었나요?

신경림  그렇죠. 위로도 받고 정말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도 생기고.

안상학  결혼함과 동시에 얼마 안 있다가 서울로 오셨겠네요.

신경림  뭔가를 해야겠다고 해서 서울로 온 것이지. 처음에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데 인기 없으니까 제일 나쁜 시간대, 새벽 6시쯤 하는 시간대를 주는 거야. 홍은동 김관식이네 집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새벽에 4시에 나와야 해. 학생들도 조금이야. 내가 인기 없는 선생이니까. 서너 명 데리고도 하고. 그러다가 출판사로 옮긴 것이지. 한 1년 반, 2년쯤 학원 강사를 했던 것 같아.

안상학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이 시를 쓰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신경림  큰 의미를 둔 것 같지는 않고 쓴다니까 내버려 뒀겠지. 쓸려면 써봐. 그것 가지고 뭐하겠어. 돈 나오는 것도 아니고, 빛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한다니까 말리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해봐’ 그거지 뭐.

안상학  초고를 쓰시면 보여드리기도 하셨나요?

신경림  안 보여줬어. 몰래 보면 내가 못 보게 했지. 보면 딴소리 하니까.

 



불법 출판물(?)이었던 첫시집


안상학  첫 시집을 1973년 월간문학사에서 자비로 출판하셨어요?

신경림  월간문학사는 이름만 빌렸어요. 그때 이문구가 월간문학사에 있었어. 문협 기관지였지. 그때만 해도 청록파 몇 사람이나 서정주 시인이나 이런 몇 사람 원로시인들 외에는 출판한다는 개념이 없었어. 나도 뭐 출판사에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고 자비출판을 했어. 이름을 빌려야 하는데 알고 있는 출판사가 내가 근무하는 출판사밖에 없었어. 거기서 하기는 참 싫고 해서 이문구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면 월간문학사 이름으로 하자고 해서 그렇게 했어. 그런데 알고 봤더니 월간문학사가 출판등록이 없는 회사야. 나중에 백낙청 씨가 불법 출판물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지.

안상학  창비(시선) 1번으로 『농무』를 재간행하셨는데요, 1973년에 공교롭게도 사모님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때 연보에 보니까 선생님께서 부기(附記)를 하셨겠지만 부인에게 시집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때 병석에 계셨을 것이고, 시집을 돌아가시기 전에 바치고 싶은 생각이 있으셨던가요?

신경림  그런 생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안상학  (살아계셨다면) 시집을 보고 상당히 기뻐하셨을 텐데……. 이한직 선생하고는 문단에서 인연이 있을 텐데요, 그분 역시 선생님의 첫 시집을 못 보고 일본에서 돌아가셨죠? 그분에 대한 회고를 좀 하신다면……

신경림  박정희 군사쿠데타 때 반대성명을 하는데 이한직 선생이 일본에 공보관 비슷한 것으로 나가 있다가 읽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 뒤에 들어왔는데 이한직 씨만 입국이 거부당했지. 일본 살다가 1972년인가 들어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어서 새로 쓴 시를 보여줬더니 굉장히 좋아하고 자기가 일본말로 번역을 해봐야겠다고 했는데 돌아가셨지.

안상학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웠겠습니다.

신경림  그분은 아마 시대정신 같은 것이 시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내가 「겨울밤」이라는 시하고 창비에 났던 「눈길」뭐 이런 것을 보여줬던 것 같아요. 굉장히 좋아했죠. 시는 이래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일본에서 번역을 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못하고 돌아가셨어.

안상학  선생님께서 쓰신 산문에 ‘시인은 모름지기 모든 것(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기억나시죠? 대체로 폼 나는 시인들은 시인이 시만 쓰면 되지 잡문은 무슨! 하고 다른 글을 다 잡문으로 취급해 버리는데 말입니다.

신경림  꼭 써야 한다기보다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안상학  그런 마음의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글들을 쓰셨잖습니까. 평론도 쓰셨고.

신경림  먹고살기 위해 쓴 것이 많은데 그래도 그런 것을 쓸 수 있는 것이 시인이라고 생각해. 시인은 어느 정도 모든 것을 잘 쓸 수 있어야지. 산문은 전혀 못 쓰는 시인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별로 신뢰가 안 가는 것이 있지.

안상학  모든 것을 다 쓸 수 있다고 자부를 하시는 것 같은데 안 쓰신 분야도 있잖습니까?

신경림  소설. 안 썼지. 나도 옛날에 소설을 한번 써봤어. 읽어본 사람이 역시 당신은 시를 쓰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해서 포기했지.

안상학  아! 그러셨어요? 여전히 동화나 소설 쪽은 손을 안 대시죠?

신경림  동화는 써봤지. 한 두 편 정도.

안상학  소설에 손을 안 대는 것이 단지 그때 그 지적 때문인가요?

신경림  아니, 뭐 쓸 기회가 없으니까.

안상학  지금 시인들은 여타 장르에 많이 손을 대지 않습니까?

신경림  나쁠 것은 없지.

안상학  벽에 미당 시인의 친필시가 걸려 있네요.

신경림  미당이 자기 환갑 때 기념으로 나한테 써준 것인데 10년이 훨씬 지났으니까 참 젊을 때네.

안상학  필체가 괜찮네요. 미당 선생은 생전에 아침에 일어나면 세계의 산 이름을 암송하고 했다는데 선생님은 강연하실 때 시 낭(암)송을 많이 하시잖아요. 오늘 시 낭송 한번 해주시죠.

신경림  등단 때 얘기를 하니까 그 무렵에 썼던, 스물두 살 때 썼던 시를 한번 외워드리죠.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안상학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혼자 찾아가는 비밀 장소가 있습니까?

신경림  그런 장소는 없고 그래도 가끔 혼자 놀러 다니는 데는 있죠. 더러는 산도 혼자 가지만 시내도 한번 가서 청계천도 걸어보고, 명동 뒷골목도 더러 가보고 하죠. 혼자서. 물론 누굴 만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돌아다니지.

안상학  최근에 외국에 다녀오셨죠?

신경림  터키를 다녀왔지. 1월에.

안상학  최근 발표한 작품들이 그러면 터키 체험기네요.

신경림  터키라는 나라도 유적이 굉장한 나라야. 그뿐 아니고 많은 것을 거기 가서 보았어. 작년에는 히말라야를 갔다 왔고.

안상학  최근에 외국여행을 많이 하시는 것이 어떤 특정한 생각을 가지셔서 그런 건가요?

신경림  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갈 일이 이것저것 생기네. 초청을 받기도 하고 문학행사가 있어 가기도 하고. 또 가는 단체에서 꼭 좀 같이 가자고 부탁을 해서 가는 수도 있고. 몇 년 사이에 작년, 재작년에 여섯 번, 일곱 번 나갔다 왔어요.

안상학  선생님의 시세계가 『농무』로부터 시작해서 『새재』, 『남한강』을 거쳐 『쓰러진 자의 꿈』까지 1998년까지의 작품세계하고, 그 이후의 『어머니와 할머니 실루엣』과 『뿔』까지 또 작품이 다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발표하는 작품이 또 다른 것 같구요.

신경림  아무래도 사는 형태가 달라지니까 시도 달라지기 마련이지. 시라는 것은 그 시대의 목소리고 그 시대의 질문이고 대답이고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시의 전부는 아니니까. 시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것, 시를 통해서 발견하고 찾아가는 것, 삶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도 있고, 세상의 진실 같은 것을 찾아가는 것도 있으니까. 내 자신의 생각도 달라지고 세상 보는 눈도 달라졌으니까 시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변했다는 개념보다는, 아주 생각을 바꿨다는 것은 아니고, 조금씩 달라지게 되겠죠.

안상학  선생님께서도 본인 스스로 이르기를 문학주의자라고 하고, 옆에서도 몇몇 분들이 말씀하신 것을 보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학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


신경림  문학하는 사람이 문학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한때는 운동권의 젊은 사람들이 나를 비판했던 것을 기억해요. 문학주의 해가지고 어떻게 이 시대의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하고.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빼놓고 문학만을 주장하려고 한다면서. 당연한 것이지. 문학주의자니까. 문학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열심히 문학을 하겠어요? 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이기도 한데, 지나치게 문학 아닌 것을, 그러니까 사회과학 이런 것을 앞에 놓고 문학을 거기 갔다가 맞추려는 사람들, 그런 것이야말로 문학을 가장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지. 예컨대 북한의 문학 같은 것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문학이라고 생각해. 주체사상 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니까 문학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지. 문학이 무엇을 위해서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 문학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 문학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있다 보니 그 문학이 무엇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이죠. 처음부터 문학이 목적을 가지고 나온다면 그 문학은 좋은 문학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내가 『농무』 쓰던 시절도 마찬가지였어. 『농무』가 무엇에 봉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쓴 게 아니고 다만 좋은 시가 되고 감동을 주는 시가 되려면 현실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시가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지.

안상학  지금 우리 청소년들이 영어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데요, 심지어는 영어를 번역하면 ‘나는. 간다. 학교에’ 라고 번역을 한답니다. 영어선생들이 상당히 곤욕을 치른다고 하는데 이런 세대들이 자라서 문학을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신경림  글쎄. 나는 큰 문제없다고 생각해. 나이 먹으면 저절로 자기 말에 대한 애착도 생기고 해서 그것을 연마하지 영어를 일찍 배웠다고 해서 우리말을 소홀히 하지는 않아요. 물론 우리말을 가장 잘 구사하려면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을 잘 구사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지. 그렇다 하더라도 어려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데 방해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해. 마음을 열고 세계의 모든 문학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지 꽉 닫아놓고 있으면 안 돼. 이건 얘기가 다르지만, 우리가 다른 세계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할 판인데 우리 것을 너무 강하게 고집하면 어떻게 살겠어. 극단적으로 ‘우리끼리, 우리민족끼리’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북한 아니겠어요?

안상학  지금 젊은 시인들, 새롭게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있으십니까?

신경림  요즘 시인들의 시를 보니까 시문학 강좌나 시쓰기 강좌에서 배운 시들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 10명 나오면 일고여덟 명이 비슷비슷한 느낌을 주는 시를 써요. 시를  대학 문창과나 인문학 강좌에서 배운 시인이 어느 수준까지는 시를 쓰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시는 못쓰는 것이지.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야 하는데.

안상학  대체로 그런 작품들이 많이 투고되죠?

신경림  우선 어느 수준의 작품을 만든 것이 그런 것이니까 그 사람을 안 뽑을 수도 없고 그렇죠. 자기 목소리가 중요해요. 시라는 것은 자기만의 방법이 있어야지 남하고 같은 방법을 뒤쫓아 간다면 좋은 시인이 되기 어렵죠. 또 한 가지는 시를 억지로 만들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시를 쓰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지 어쩔 수 없이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시는 거의 느낌이 없어요. 시라는 것이, 옛날에는 씌어지는 시라는 생각이 많았지만, 지금은 쓰는 시가 물론 많은데 읽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만들었다는 느낌을 안 줘야 해요. 그런데 억지로 만들었다는 느낌을 주는 시가 너무 많아.

안상학  선생님 인생을 되돌아보면 문학적 실천, 사회적 실천을 병행하면서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문학하는 사람의 사회적인 자세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시죠.

신경림  문학하는 사람도 일단 사회적 책임이 있으니까 그 고비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겪어온 세월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절이 많았으니까. 특히 군사독재 같은 때는.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지금도 시인들이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해. 그러나 꼭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그것만 해야 할 일도 아니지. 일단은 문학의 책임도 있으니까.

안상학  지금 정세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FTA 라든지, 대선 정국이라든지.

신경림  FTA는 안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어차피 하긴 해야 하는데 다만 농촌에 대한 피해가 가장 적은 길을 찾아야겠고. 그렇지만 해야 해요. 어쩔 수 없어.

안상학  시집 내신 지가 꽤 됐죠. 『뿔』이 나온 지 한 5년 됐죠? 지금 준비하고 계시는 것은 없습니까?

신경림  금년에는 한번 내야겠지.

안상학  이번 시집에 묶일 시들은 어떤 내용들인가요?

신경림  일정한 내용의 시는 아니지만 지난번 시집하고 달라지지 않을까 해요.

안상학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인사를 하시죠.

신경림  요즘 시가 안 읽힌다고 난리들인데 나는 시인들이,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시를 안 읽는다고 징징 우는 소리만 하지 말고 정말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를 찾아가보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왜 시를 안 읽는가. 남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물론 온갖 매체가 생겨나서 시가 안 읽히는 측면도 있죠. 그런 측면만 있지 않고 독자를 떨어뜨리는 데는 시인 자신이 일정한 몫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무엇인가 찾아내서 시가 독자에게 다시 사랑받는 길을, 안 되더라도 다시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해요. 정말 좋은 시는 당장 안 읽히더라도 언젠가 여기저기서 남의 눈에 띄어 읽히는 것이니까 너무 시가 안 읽히니까 아무렇게나 쓰자는 생각 가지고 시를 쓰지 말자는 생각을 하죠.

안상학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이 독자 여러분에게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문장 웹진/ 2007년 5월》




신경림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55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고,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다. 시집으로 『농무』『새재』『남한강』『가난한 사랑 노래』『쓰러진 자의 꿈』『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뿔』 등이 있고 『시인을 찾아서』『민요기행』 등의 산문집이 있다.


안상학  196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 11月의 新川」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그대 무사한가』『안동소주』『오래된 엽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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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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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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