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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군의 바이크 전성시대

  • 작성일 2007-05-31
  • 조회수 2,503

 

김경주



K군의 바이크 전성시대




 

제 1기 1987년 suzuki 125


바이크를 처음 배운 건 초등학교 5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형사기동대 소속이었다. 집에는 늘 아버지의 흰색 경찰 오토바이가 ‘배치’되어 있었다. 자다가도 상부의 부름을 받으면 아버지는 쏜살같이 옷을 챙겨 입은 후 시동을 걸고 사라졌다. 티브이에서 보던 A특공대의 대원처럼 아버지는 무언가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였고 해결사 역할을 하러 갔던 것이다. 나는 항상 ‘어머니가 시키신 대로’ 아버지가 시동을 걸고 있을 때 옆에서 공룡알처럼 생긴 커다란 헬멧을 품에 안고 있다가 아버지께 드리곤 했다. 아버지는 ‘윙크!’ 한번 해주지 않고 휭~ 사라졌다. 언젠가 아버지는 너무 급하게 나가신 바람에 옷만 입은 채 슬리퍼를 신고 출발했다가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때 난 아버지가 가끔 멍청이처럼 보였다. 그런 날은 대부분 어머니의 생일이었거나 휴일이었고 ‘우레뫼’를 보러 가기 위해 우리 세 남매가 새벽부터 밤을 설쳤던 날이었다. 나는 늘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밥을 지으시다가 부엌에서 발견한, 쥐를 잡는 날을 기대했다. 쥐들은 점점 살이 통통 올랐고 나 혼자선 쥐를 몰아서 잡을 수 없었다. 출구를 막을 사람이 집안엔 없었던 것이다. 그 출구로 가끔 어머니가 가출을 하셨고 나 역시 몇 년 후 줄창나게 집을 나가게 될 줄은 그땐 몰랐지만.


“이제 너도 5학년이니까 남자다. 목마 같은 건 그만 타고 오토바이 정도는 탈 줄 알아야지. 이리 와라, 가르쳐 줄 테니.”

그러니까 내가 5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사이카에(그렇게 불렀다) 나를 번쩍 들어서 태웠다. 그리고 아버지는 계기판과 브레이크 등 이것저것 내게 설명해 주시더니 키를 쏙 뽑아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내가 올라 탄 오토바이를 마치 목마처럼 덜컹덜컹 앞뒤로 흔들어 주시는 것이었다. 목마처럼, 나는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 ‘정말 나쁜 새끼!’ 라고 외쳤다.



제 2기 1995년 시티백 citi 100 audghaka


대학에 덜컥 떨어지자 나는 몇 년간 하숙비까지 대 주신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하숙방의 짐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오자 생각했던 대로 집안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그때 내가 생각한 것은 아르바이트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새벽의 캄캄한 골목들을 신문을 잔뜩 싣고 달리고 있었다. 신문배달을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새벽, 나는 차들이 없는 도로를 갈지자로 꺾어가며 ‘fuck 같은 세상아!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 이렇게 외쳐대곤 했다. 신문을 담장 너머로 훌쩍 훌쩍 내던지며 나는 아침 해가 밝아서야 집으로 돌아와서 오후까지 늘어지게 자버리곤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일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놈을 깨워서 혼낼 생각은 없었던지 부모님은 방문을 열어본 후 몇 번인가 혀를 쯧쯧 차곤 다시 문을 닫아주곤 했다. 그게 내가 불쌍해서였는지 안타까워서였는지를 궁금해 해본 적은 없다. 다만 내가 한 푼도 받지 않고 ‘머지않아 나는 사고를 당했다.’ 몇 개월간 배달했던 그 신문이 내가 데뷔한 〈대한매일〉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 나는 신춘문예를 응모할 때 언제나 그 시절의 우울함을 그 신문의 1면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다.


 

제 3기 2007년 콜레다 colleda 윙카


나는 RPM을 더 당긴다. 계기판 바늘이 오른쪽 끝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줄어들기를 반복한다. 나침반처럼 계기판도 정확한 순간이 별로 없다. 속도와 방향이 같아질 수 있는(있다고 생각하는) 젊음이 밤마다 자신의 바이크를 몰고 폭주로 도로를 달리지만 가장 빠른 스피드를 낸다고 해서 남보다 먼저 도달할 수 있는 인생이 어딘가에 있을 리 없다. 오히려 인생보다 먼저 도착해서 우리는 허무해지는 순간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 방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어야 했다.

가진 돈이 얼마 없어 나는 그렇게 갖고 싶은 600CC급을 타고 있진 못하다. 그렇지만 딱 열배 아래 60CC도 탈 만하다. 이놈은 83년식 일본산이고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주인공이 이태리 골목을 산책하는 데 자주 등장했던 놈이다. 게다가 이놈은 바이크족 사이에선 명품으로 통하는 흰둥이다. 나는 눈알이 터지도록 사이트와 상가를 돌아다니며 이놈을 구했다. 어둠속에서 나와 엔진은 동일한 ‘빨간 리듬’으로 덜덜거리기 시작한다. 버스가 길을 바짝 조여 오면 나는 아직도 겁이 난다. 그렇지만 서울을 이런 식으로라도 버티고 있는 내가 제법 마음에 든다. 나는 두 번째 사기를 당하고 홧김에 돈을 다 털어서 이놈을 장만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사고의 순간을 생각한다. 머리통이 아스팔트에 갈릴 때 피를 철철 흘리며 나는 누워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나는 어느 시에서 그런 날 정말로 내 속의 매연을 다 흘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인생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당신을 등에 태우지 않고 나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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