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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 했던 〈봄날의 꿈〉, 그 길에서 만나다

  • 작성일 2007-06-29
  • 조회수 2,376

 

시와 함께 했던 〈봄날의 꿈〉, 그 길에서 만나다

- 세종대왕릉 문학나눔큰잔치를 돌아보며



백은정




5월 18~19일, 여주 세종대왕릉에서 열린 문학나눔큰잔치에는, 주제공연〈봄날의 꿈〉이외에도 〈문장의 소리〉공개 방송, 〈시노래 모임 나팔꽃〉공연 등이 펼쳐졌고, 필자는 지난해 한강에서 열린 문학나눔큰잔치에 이어 주제공연에 참여하며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공연 첫날,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마무리 작업을 하던 모두의 움직임이 더욱 바빠졌다. 능침 위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장면의 리허설을 마친 뒤, 관계자들과 출연진들이 세종대왕에게 예를 올리는 것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소나무를 병풍 삼아 설치된 간이 무대에서 진행되는 〈문장의 소리〉공개 방송에 마음이 갔지만 발걸음은 무대로 향했다. 전날의 리허설로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조명을 거두니 무대가 낯설었다. 무대 스케치를 보며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었지만, 넓은 무대에 들어서니, 흙을 쌓아 낸 길이 얼핏 이 길이 저 길 같고 혼동이 되는 것이다. 배우들은 각자 무대 위를 걸어보기에 여념이 없었고, 무대 설치를 맡으셨던 김광우 님과 무대팀은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었다. 가만히 무대를 마주하고 앉아 공간이 들려주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았다.  

 

 

공기는 습하고 차가왔지만 다행히 빗방울은 멈췄다.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무대 쪽 객석으로 이동했고 수화 통역도 무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임동창 님의 피아노 연주가 배우들을 부르고, 먼 길을 떠나온 여행자의 모습으로 트렁크를 들고 끌며 배우들이 하나 둘 무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랬다. 한 달 전, 배우들은 짐을 꾸려 연습이 진행될 죽산으로 향했고 도시를 벗어난 봄날에는, 여기저기 생명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있었다.



4월에서 5월로, 뒷마당에 있는 연못을 거뭇한 점들로 가득 채웠던 갓 부화한 올챙이들이 몸집을 불려 하나 둘 개구리가 되어 떠나가고, 풀빛을 닮은 개구리들 다칠세라, 마당에 내려설 때마다 눈으로 훑으며 까치발을 하고 다니는 동안 꽃들은 색을 달리하며 피고 지고 용설리의 고양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몸을 풀었고, 짙은 구름이 몰려올 때면 개구리 울음소리는 고막을 자극하며 높아갔다. 짧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오르던 배꽃, 참 소박한 냉이꽃들…… 매일 감탄할 것들이 눈에 들어와 탄성을 지르며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봄날의 꿈’을 꾸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모두 품은 봄에 대해 생각하며, 시와 함께 하는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시로 엮은 인생의 길 :  〈봄날의 꿈〉


다른 배우들에 한 발 앞서 무대에 들어선 ‘사내’는 먼 기억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언덕에, ‘사내’의 어린 모습이었을 ‘소년’이 그 부름에 답하며 모습을 드러내고, 배우 모두는 기억 속 봄날과 마주한다.

 


〈봄날의 꿈〉은 작년의 문학나눔큰잔치 주제공연 〈강에게〉에 이어 조병준 님이 대본작가로 참여하여, 봄여름가을겨울을 노래하는 시들과 대사를 엮어 어떤 인생의 길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김아라 님의 연출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목소리들이 내는 화음으로 출렁이는 무대로 살려내었다. 그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때로 주인공 ‘사내’와 동일인으로, 때로는 한 걸음 떨어져 나와 인생의 매 국면을 성찰하는 존재로 사내의 여행에 함께 했다.


우리는 줄거리나 역할을 통해 공연을 그려보는 데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없는 공연을 말로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구체적인 줄거리,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기록되는 역할, 직접적인 대화의 상대가 제시되지 않은 채로 매순간, 그것들을 창조하고 무대에서 살려내는 과제가 배우들에게 주어졌고 그것은 까다로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무대에서, 배우들은 ‘사내’처럼 기억의 소리를 따라 와 우연히 한 곳에 모였고, 각자에게 그곳은 서로 다른 기억의 공간이었다. 배우들은 공연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런 한편으로 매순간 다른 배우, 공간, 음악에 열려 있어야 했다.

 




무대 위에서 배우와 무용수의 움직임과 소리를 서로 소통하게 했던 것은 시와 음악이었다. 같은 시라도 모두에게 같은 감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한 배우가 자신의 시를, 음악과 대화하며 소리로 풀어내는 동안, 다른 배우들은 그 시가 현재 자신이 내는 말인 것처럼 들으며, 혹은 그 말을 하던 자신을 회상하며 그것을 움직임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배우들이 펼쳐 보이는, 시점이 서로 다른 소리와 움직임이 어울려 시의 울림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관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엮여진 시들 각각에 자신의 관객이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공연의 흐름과 함께 하면서도 관객들은 지금, 여기, 자신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시에 오래 머물렀다. 시로 엮여진 공연은 어떠한 구체적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 대신 관객 각자의 기억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였다. 배우의 소리와 몸짓으로 풀어낸 시는 관객들로 하여금, 배우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각자의 구체적 경험에서 끌어올려지는 어떤 여행으로 이끌며, 그것을 현재의 감각과 떨림으로 살아나게 했던 것일 터였다. 시는, 무대 위에 함께 있었지만 실상 상상 속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었을 배우들과 거기에 초대되었던 관객들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이제, ‘사내’의 여행은 꽃 속의 봄, 폭풍우의 여름을 지나 언젠가 떠나왔던 가을 강을 건너 겨울 들녘에 다다르고, 살아온 세월만큼 먼 길을 걸어 들어온 노신사가 그 기억을 다시 거슬러 오르는 동안 배우들은 하나 둘 능침으로 향한다.

 


시를 보고, 수화를 듣고


마지막 시 안도현 님의 「냉이꽃」은, 능침 위로 한글 자모와 시의 영상이 음악처럼 흐르는 가운데 배우들에 의해 수화로 표현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를 수화로 말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면서 그것이 단순히 부호화된 손짓의 나열이 아니라, 표정, 몸짓의 크기와 리듬과 함께할 때 온전한 ‘말’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어를 단지 소리 내어 보는 것과 말로 전달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물론, 수화는 그 자체로 고유한 문법을 가진 ‘언어’였고, 그 문법에 익숙지 않은 이들로서는 표현하는 일이 녹록치 않았지만,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아름다운 언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청각장애인들은 우리의 수화를 어떻게 들어주었을까? “읽지 말고, 말을 하셔야지요~” 그러지나 않았을까?

 


한편, 〈봄날의 꿈〉공연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수화통역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통역을 맡으신 분께서는, 수화의 어휘가 적은 수에 한정되어 있어서, 수화로 존재하지 않는 단어의 경우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면서 통역하는 수밖에 없다며 시가 잘 전달될지 우려하셨다. 언어가 물론, 단어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공연이 한편으로는 청각장애인으로 하여금 시를 ‘보게’ 함으로써, 그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추측어린 기대도 해본다. 이해할 수 없는 부호처럼 보이던 수화가 말로 들리기 시작하던 순간, 그것의 매력에 폭 빠져버려서, 내가 그 인연을 이어갈 것처럼 말이다.


공간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지나 다시 봄을 노래하며, 능침 위에 수놓아진 한글, 대사와 시, 음악과 수화가 서로를 감싸며 한바탕 어우러지고, 정적이 찾아들었다. 배우들은 모두 세종대왕릉을 향해 몸을 돌리고 그렇게 잠시 머물렀다.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며, 이만한 장소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연극공연을 계획할 때, 기술적인 부분 이외에 공연장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드물게 일어난다. 공연이 이루어졌던 장소인 한강과 세종대왕릉은 시로 엮인 대본과 함께, 참여했던 모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공연을 완성해 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시와 사랑을 노래하는데, 한강만 한 장소가 있었을까? 지난해 공연을 끝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 떠오른다. 게다가, 서울 시민의 일상적인 휴식의 공간인 한강은, 그 일상성으로 인해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나온 이들을 우연히 행사에 참여하도록 이끌기도 했었다. 공연장을 벗어난 공간에서, 그 공간 자체의 생명력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우연히 그곳에 들른 관객들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우연은 때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안겨주지 않던가? 그래서 다시 우연을 만나러 가도록 이끌지 않던가?

일상의 공간이라 할 수 없는 세종대왕릉을 찾아오는 것은, 한강에 나가는 것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짧은 여행 삼아 그곳에 들어섰던 이들이, 참여한 모두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26편의 시를 통해 인생의 길이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어떤 여행을 함께 했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잔치가 끝나고 난 뒤, 잔치를 준비한 사람과 초대된 사람의 소회는 다를 것이다. 준비한 사람으로서는 안도감과 함께 아쉬웠던 것들이 마음에 걸리게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서울, 죽산, 여주를 오가며, 연습에서 공연에 이르기까지 만났던 사람들, 그 과정에서 떠올랐던 생각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그곳을 채우던 공기, 그런 것들이 깊은 울림을 가지고 동행했고 아직도 여운으로 남아 있다. 더러는 오래 길동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장 웹진/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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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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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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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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