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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자연의 경계들

  • 작성일 2007-09-12
  • 조회수 3,518

 

인공자연의 경계들




김미정




1. 지우거나 넘거나


근래, 많은 시와 소설들이 지우거나 넘었다. 국경, 성(性), 이름, 인간, 영토화된 감각, 소위 말하는 경험적 현실 등의 자명함을 지우거나 넘었다. 장르와 버전만 달리하여, 지우거나 넘는 일은 빈번해졌고, 낯섦이 주던 충격효과가 이제는 또 다른 익숙함으로 낙착한 것 같기도 하다. 서정의 변화나 근대의 목적서사들에 대한 기왕의 논의들(소위 미래파 논쟁에서부터, 국경을 둘러싼 각 문예지들의 특집들, 이를테면『문학동네』2006 겨울,『문학수첩』2007 여름에 이르기까지 근래 문단의 화두는 기실 ‘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도, 실은 이 ‘지우기’ 혹은 ‘넘기’를 둘러싸고 장르적으로 분화된 담론인 셈이었다. 어쨌든 새로운 세기에 어떤 문학들은, 공히 무언가를 지우거나 넘거나 가로지르는(trans-) 일에 골몰했다. 적어도 스케일과 그것을 가능케 한 상상력에 있어서만큼은 분명 유래 없는 확장을 이룬 셈이었다.

지우는 일의 한쪽 끝에는 진짜 ‘국경’이 있었다. 국경 안팎 여러 모습의 삶들을 환기시키거나(강영숙, 『리나』), 공동체와 일국가적 네이션 범주를 넘는다(전성태, 『국경을 넘는 일』의 어떤 소설들). 근대 네이션의 계열들, 언젠가부터 자명함을 의심받아 온 목적서사의 계열들은 더욱 느슨해진다. 성(性)을 지우는 일 역시 다양한 지형으로 드러난다. ‘소수자 되기’라는 미시정치의 선과, ‘자유롭게 유희하기’의 선이 가볍게 뒤엉키면서 고정된 주체에 대한 환멸(배수아, 황병승)이 부지런히 교호하며, 급기야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모호(편혜영)해진다. 이 과정에서 감각의 영토들 역시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전 같으면 엽기나 잔혹 등의 용어로 지목될 만한 세계가 문학의 지형을 당당히 그려가고(편혜영, 김민정), 피아(彼我)의 구획을 흐릿하게 하면서, 경험적 현실의 의미 역시 재고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이제, 소위 말하는 경험이란 다시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고, 경험을 근거 짓던 감각과 지각과 인식의 메커니즘 역시 다른 질문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감각을 창안하거나(이민하), 아예 망상적 세계를 고안하는 데(박민규, 박형서)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흔히 말하는 문학의 성패 여부는 차치하고 지우고 넘기, 혹은 그것을 가능케 한 상상력의 층위에서만 보자면, 이처럼 국경에서부터 신체의 감각에 이르기까지 범위는 상당하다.

즉, 근래 우리 문학은 국민국가의 경계 안팎의 이야기에서부터 아주 사소한 몸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있고, 이 폭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떤 특징을 떠올린다면, 공히 ‘지운다’, ‘넘는다’로 설명될 수 있는 지움 혹은 이행의 상상력들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분방함과 원심력만으로 팽창된 듯 보이는 이 세계에서, 지금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표식이기도 하다.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본다. 많은 시와 소설들이 ‘지우거나 넘었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해 그 문장의 목적어는 아직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국경, 성, 이름, 인간, 감각, 현실 등속의 자명함이 ‘공히’ 의미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운다는 것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시 기초적 질문이다. ‘자명한 것들을 지우고 넘는 현상의 컨텍스트는 무엇인가.’

우선, 귀납적으로 나열한 ‘국경(국가, 민족, 인종)’, ‘두 개의 성(性)’, ‘고정된 주체’, ‘다섯 개의 감각들과 신체’ 등등 중, 유기체적 메커니즘을 갖지 않은 것은 없다. 플라톤이 현상과 이데아의 관계를 유기적 전체로 상정한 이래로, 그리고 홉스가 인공두뇌로서의 이성, 초월적 외부로서의 국가(리바이어던)를 상정하면서 한번 더 강조한 이래로, 우리에게 유기적으로 조직되는 몸체로서의 국가나 신체의 관념은 일종의 자연(nature)으로 등록된 바(T. Hobbes, 「신체에 대하여」, www.philosophy.leeds.ac.uk/GMR/hmp/texts/modern/hobbes/decorpore/omissions.html) 있다. 신체와 기관의 관계, 감각의 분할들, 국가와 국민 등의 관계들은, 예속과 유기적 전체성에 비끄러 매어지고, 그 속에서 코스모스의 세계는 구상 가능해졌다. ‘감각과 신체’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통상적인 관념은 이처럼 자연 상태가 인공적 외피에 의해 가공되는 과정 속에서 구성되어 왔다. 가공된 것들은 이내 기원이 지워지면서, 초월적인(transcendent) 것들로 등극한다. 그리하여 국민과 국가, 기관과 신체, 소통으로서의 언어 등은, 유기체로서의 부분과 전체의 이미지, 예속과 할당의 관계들 속에서 인공 자연으로 고착화된다. 이제, 성은 두 개의 분할선만을 가져야 하고, ‘나’라는 주체는 마지막까지 견고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부분과 전체의 종속관계는 자연스러운 원리가 되었다. 이 자명함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그로부터 구성된 세계를 확신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이 조용한 합의들은 우리 경험과 진리의 입법자로 기능해 왔고, 견고한 자연이 되었다. 따라서 이 유기체적 인공자연은 이른바 ‘현실’을 지지하는 토대가 되었고, 이것을 지우거나 넘는 작업들은 종종 현실에서 부양한 상상력과 쉽게 연동되어 이해되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환기된 인공자연의 경계에서 우리는 다시 회의론자가 되어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참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의 경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의 외연을 재고하게 한다. 우리의 현실이란 어쩌면 인공 자연, 유기체주의의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 현실 자체가 기원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공물일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공공연하게 유포된다. 

이제 잠시 이 인공자연의 목록에 언어나 화폐를 추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여기, 언어와 화폐의 초월성을 지우는 어떤 상상력이 있다. ‘소통으로서의 언어라는 것 역시 합의된 허구일 뿐이며, 물신이 되어 버린 화폐 역시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화하는 마술적인 것은 아닌가’라는 식으로, 익숙함을 회의하는 목소리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커뮤니티의 존속을 가능케 해 온 언어와 화폐, 그 바깥에 대한 상상력이 있다.



2. 언어, 화폐의 경계들


2.1 인간의 언어 vs 짐승의 소리


통상적인 이해대로라면, 언어는 분명 소통을 위한 도구이다.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소통은 언제나 특정 장 내에서 부과된 룰을 따를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전제는 대개 괄호쳐져 있다. 소통의 룰은 언어 사용자를 관리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지만 종종 눈에 띄지 않는 장막 너머에 감추어져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언어는, 벤야민의 공들인 작업이 설명했듯, 어떤 타락과 불행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명명하는 언어(Namensprache)만이 있었던 시대. 아담은 신의 언어를 대리했고, 신과 인간과 자연의 합일된 상태가 있었다. 소통이란 언어의 최종 목적이라기보다, 직관과 합일의 부산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내 아담의 언어는 바벨의 언어로 흩어진다. 합일된 세계가 깨어지면서 이름과 사물은 서로를 자의적으로 지시할 뿐, 온전히 서로를 증거해 주지 못하게 되었다. 언어는 한낱 전달의 수단이 되었으며, 내가 직접 지각하지 못한 것을 전달받고 전달하는 화행의 맥락 속에서만 작동하게 될 뿐(G. 들뢰즈, 『천개의 고원』)이었다. 이제 진짜 자연은 은폐되고, 쌓다 만 언어의 탑 꼭대기에서는 신의 언어에 도달치 못하여 눌린 이들의 절망과 탄식이 간간이 흘러나온다. 절망과 탄식의 어떤 주인들은 역사 속에서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디안으로 불리기도 했다. 언어는 분명 소통의 도구이지만, 전제해야 할 것이 많은 소통의 도구였던 것이고, 온전히 세계를 인식하는 데에는 생래적으로 부족한 도구였던 것을 이들의 존재가 증거한다. 근래 어떤 소설들 속에서 언어에 대한 이 합의가 위태로워지는 장면들이 다시 등장한다. 거기에는 세계인식의 도구, 소통의 도구인 언어가 아니라, 기원과 역사를 갖고 있는 언어가 있다. 인공자연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진짜 자연 상태의 언어를 향한 파토스로 가득 차 있다. 홉스가 생각했듯 이 자연 상태는 야만적이기까지 하다. 짐승의 소리들을 연상케 하는 거친 호흡도 있다.

김태용의 「벙어리」(『세계의 문학』 2007 여름)에는 ‘인간’의 언어 vs ‘짐승’의 말 식의 대립이 있다. 그는 언어의 문제를, 아버지로 표상된 상징질서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짓는다. 김태용의 소설은 소통의 언어에 스크래치를 낸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들의 계보를 연상시킨다. 언어가 한낱 임의적 합의와 가상의 공통감각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등단작인 「오른쪽 세 번째 집」(『세계의문학』, 2005 봄)에서부터 「벙어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세계, 언어의 세계로의 진입 거부를 명백히 한다. 종종 ‘아버지-어머니-나’의 오이디푸스 구조와 그 속에서의 가족로망스를 드러내거나, 아버지의 질서와 언어의 질서를 등치시키곤 한다.

이를테면 「벙어리」에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실어증 혹은 벙어리의 상태가 공존하고 있다. 주인공이 말을 하지 않게 된 이유들은 아버지와 관련된 것이고, “나는 혼자 말을 배웠다”는 선언 속에는 예의 그 살부 의식이 개재해 있다. 주인공은 말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 발화하는 행위 자체가 아버지의 질서 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며, 인간의 랑그란 그 자체로 폭력적이라는 사실에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다. 이 주인공의 고집은, 종종 요령부득의 난수표처럼 보이는 김태용의 어떤 소설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소통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소통을 가능케 하는 언어 체계에 펀치를 가하면서 계속 도망치기. 「벙어리」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소통이란, 오이디푸스적 가족 삼각형 내에서 자기 위치를 승인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소통의 도식에 저항한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비근한 사례가 있다. 우리는 과거 정영문의 소설에서 파라독사(para doxa)의 언어 세계를 엿본 일이 있다. 그는 삶과 죽음 등 대립 관계의 변별자질을 무화시키면서, 이 상투적 대립은 역시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보여준 바 있다. 종종 그의 소설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 도덕과 비도덕은 자리바꿈했다. 이처럼 상식을 지우고 인간의 세계를 조롱하며 교란시키는 작업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언어 체계 내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김태용은 좀더 근본적인(radical) 제스처를 취한다. 「벙어리」의 주인공은 처음에 아버지의 언어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벙어리나 실어증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아버지에 대한 양가성, 언어에 대한 양가성이 팽팽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아버지와 가족 때문에 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다른 식으로 말하고 싶다는 것. 여기까지는 정영문 작업의 바통터치인 셈이다. 벙어리와 실어증 사이 진퇴양난의 팽팽함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랑그 내에 있다. 즉, 양자 모두 인간의 랑그 내에서 일종의 병증으로 진단되는 것이므로, 주인공의 저항은 내내 인공자연으로서의 언어를 둘러싸고 길항하는 중이다. 그러나 결국 이 갈등 관계는 그가 짐승의 발화를 도모하면서 파열된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인간의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팽팽함은 결국 ‘짐승처럼’ 하는 말에 의해, 아예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

물론 이 ‘짐승처럼’ 하는 말들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는 쉽게 알 수 없다. 주인공이 실제로 ‘짐승의 소리’를 낸 것인지 아니면 ‘짐승처럼’ 인간의 말을 한 것인지도, 소설 속에서 애매하기는 하다. 언어의 바깥에서 사는 일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짐승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마지막 문장이 일종의 은유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도 이 소설 이후를 궁금하게 하는 이유이다. ‘짐승의 말’이 아니라, ‘짐승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은 한 작가의 소설 세계를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짐승처럼 하는 말’ 역시 인간의 언어(문자)를 통해 기술되고 우리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랑그 안쪽에서 실어증(의미 거부)이나 벙어리(발화 거부)의 방법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저항할 방도를 찾아내려고 한 상상력의 특이성이다. 이것은 그의 선배들이 꾀하던 이탈로부터 한번 더 이탈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 실어증도 벙어리도 여전히 인공자연 내에 거주하는 이들의 것이지만, “짐승처럼 말을 하”는 이 주인공으로부터 우리는 진짜 자연의 언어를 한번쯤 상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2.2 물신(物神) vs 화폐 없는 세계


한편, 화폐 역시 인공 자연의 하나다. 화폐는 상품(사물)을 매개하고 배치하고 평가하는 일종의 관계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불변의 실체로 착각하곤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폐 없는 교환, 화폐 없는 관계를 상상하기 어렵다. 화폐는 정치경제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문제이자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속에서 화폐는 일종의 초월적 기표로 작동한다. 따라서 화폐가 사라진 세계에 대해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우현의 「길 위에서-함금사니 일화1」(『세계의문학』2007 여름)은 이 흔치 않은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이 소설에는 이 화폐경제와 물신숭배 메커니즘의 한 단면이 있다. 제목이 시사해 주는 바와 같이, 이 소설에는 금을 얻기 위한 길 위에서의 고군분투, 끝나지 않을 어떤 고단한 인간사의 여정이 암시되어 있다. 즉, 화폐를 척도로 갖는 사물들, 그 사물들 뒤에 무언가가 실재한다고 믿는 믿음. 맑스가 ‘물신(fetish)’이라고 일컬은 믿음의 체계가 이 소설 속에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물신(物神)으로서 우리 삶에 작동하는 화폐와 그것을 지우는 상상력을 동시에 보게 된다.

택시기사인 주인공은 화폐가 없이 모든 것이 공짜인 동네에 가게 된다. 화폐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무엇이든 필요에 따라 공짜로 얻을 수 있다. 물론 그 세계에도 규칙은 있다. 무엇이든 공짜이지만 누구나 반드시 한 가지씩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이 세계에서 교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화폐라고 하는 고정된 척도가 사라졌을 뿐이다. 그저 각자의 일을 해서 벌충, 교환할 뿐이다. 이쯤이면 우리는 일견, 화폐가 사라진 세계가 충분히 유토피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살아 있는 노동의 가능성과, 사용 가치가 부활하는 세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은 오히려 화폐 있는 세계의 고단함을 그리워한다. 그는 ‘돈을 주고받는 바깥세상’을 생각하며 사납금과 아파트 계약금을 걱정하는 동시에, 손에 쥐어지는 돈의 맛을 그리워한다. “하루 입금을 못 채우고 제 돈을 꼴아박는 일이 있더라도” 돈을 모으고, 아파트를 사고, 결혼을 하는 등등의 시스템 속에 안전하게 정주하고 싶은 그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주인공에게 아파트 분양권은 일시적인 횡재나 축복일 뿐이다. 분양권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다시 돈 걱정을 하게 만드는 당의정이다. 잔금을 치르고 분양권을 유지하고 최종적으로 아파트를 등기하기까지, 그는 계속 돈을 벌고 채워야 한다. 화폐로 유지되는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주인공은 분양권에 자신의 미래를 저당 잡힌 채, 그러면서도 욕망의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비관의 쳇바퀴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작가가 화폐를 매개로 한 욕망과, 그 욕망의 순환을 변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화폐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에서 공포를 느낀 주인공은 계속 화폐, 물신(物神)을 그리워하며 본래 자기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계속 안에서 맴돌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패턴에 갇혀 버리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폐쇄회로는, 물신에 지배된 욕망, 결핍의 포로가 된 욕망을 비유한다. 출구 없는 순환은 계속되고, 인공자연으로서의 화폐는 여전히 결핍에서 기인하는 욕망을 유포한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하여금 화폐 없는 세상을 오히려 공포로 받아들이게 한다.

여기에서, 화폐가 사라진 세계가 불안과 공포의 정조와 관련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벽제’라는 목적지, 이파리의 푸른색이 황갈색으로 변해 가는 길가의 풍경,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동네를 이상하게 여기는 주인공. <환상특급>이나 <어메이징 스토리> 등의 시리즈물이 보여 준 그 기묘한 분위기 같은 것들이 이 화폐가 사라진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이 소설의 기본 정조가 불안과 공포라면, 이 정조는 일차적으로 비현실적이고 낯선 배경 탓이지만, 결국 화폐라는 초월적 기표가 사라진 세계로부터 연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우리가 통상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것, 그 엄격한 분할선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기까지 하는 셈이다. 현실과 현실 아닌 것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으스스함, 불안, 공포를 느끼지만, 그것은 달리 말해 ‘이것은 현실이다’라고 지시해 주는 고정점이 헐거워지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즉,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에 이미 마법이나 최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맑스가 물신숭배를 두고 ‘사물들 간의 환상적 관계 형식을 마치 실재하는 사물인 양 나타나게 하는 마법’(K. 맑스, 『자본론』)이라고 했거니와, 이미 우리가 현실이라고 규정하는 사고와 기준 자체는 이와 같은 원리를 갖는지도 모른다.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인 양 믿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면 화폐가 물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현실 속의 분할선과 견고한 듯 보이는 세계 역시도 우리의 믿음 체계의 반영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실재를 현실로 치환해 버리거나,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엄격하게 나누는 우리의 통상적인 감각이 실은 어떤 마법과 최면의 결과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화폐 공동체의 안과 밖, 인공자연의 안과 밖 모두, 이우현의 「길 위에서-함금사니 일화1」 속에 있다.



3. 다시 기억하게 될 자연들


이처럼 근래 우리 문학의 상상력은 주로, 자명하게 여겨져 온 것들에 대한 회의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진짜와 가짜의 구획들,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 등이 상상적으로 한번쯤 재배치되고 재조직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기존의 이와 유사한 상상력의 계보와는 다른 인식론적, 존재론적 기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매트릭스 안팎의 진실을 질문하는 저항군들, 이전의 기억을 삭제당한 채 큐브(cube) 속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을, 언젠가부터 그저 스크린 안쪽의 존재로만 여길 수 없게 된 사정과도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스크린이나 모니터에서나 구경하던 뉴욕 마천루의 폭발과 붕괴가 실제로 CNN에서 천연덕스럽게 생중계되는 경험 앞에서 우리 머리 속의 진짜와 가짜의 목록들은 어지럽게 뒤섞인 바 있지 않았던가. 화면에서 생중계, 반복중계하는 9.11의 리얼리티는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와 무슨 차이를 갖는 것이었을까.(한유주의 어떤 소설들은 경험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이와 같은 맥락의 문제 설정에서 출발한다. 기억도 경험도 없는 ‘나’의 레토릭(?그리고 음악?), 가짜 보철물 치아와 가짜 욕망과 가짜 슬픔과 가짜 FBI 요원에 비애를 느끼는 ‘나’(?죽음에 이르는 병?), 전쟁의 기억에는 시달리지만 정작 “전쟁의 기억이 없었”고 “총을 쏘기는커녕 실물의 총을 쥐어 본 일조차 없”던 이들의 세계(?유령을 힐난하다?)도 참고해 보자.)

즉,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설령 무언가가 참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근래 문학의 상상력은 지금 우리 세계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전회의 맥락과 연동된 듯하다. 그리하여 매트릭스 안팎을 둘러싼 이 회의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자연 상태가 본래부터 그러했던가에 대해 의심을 품는 일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초월적인 것, 유기체적 전체 등의 관념이, 어떤 역사성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즉, 아나키한 자연에 인공의(artificial) 외피를 입혀 안정된 유기체적 상태를 만들고자 한 홉스식의 기획들이, 그 기원은 지워지고 오히려 현재의 자연으로 정착된 사정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나. 우리가 자명하게 여겨 온 것들은 모두 이처럼 기원과 역사를 갖는 것들이 아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지우고 넘는 상상력의 대부분을 포함하여, 현실에서 부양한 듯 보이는 문학들의 발생론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나아가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항간의 우려에 대해서도 약간의 변론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즉, 문학에서 원심력이 우세할 때, 한편에서는 자주 현실이라는 심급, 일종의 구심력을 요구하지만, 이것은 현실과 상상력, 현실과 비현실을 대타적으로 혹은 제로섬의 관계로 놓는 관습적 사유의 반증일 뿐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인(actual) 것만이 실재(real)한다는 우리의 기존 사유 속에서,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virtual)들의 자리는 협소했다. 우리 삶에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자명하지 않은 것들, 감추어진 것들은 어쩌면 잊혀진 진짜 자연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총체적 회의와 관련된 새로운 상상력들은, 견고한 현실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에서 출발하면서, 동시에 이 잊혀진 것들을 환기시킨다. 문학과 현실을 이야기할 때, 개연성이나 핍진성이 심급이 아니라면, 현실 바깥을 환기시키는 이들의 불온함은 오히려 ‘현실’을 둘러싼 우리의 고정관념을 재고해 볼 단서를 주는 것이리라. 극단적으로 말해, 현실 부양처럼 보이는 상상력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경험(그리고 경험과 관련된다고 믿는 현실)을 근거 짓는 초월적인 것들, 자명한 원리들이 느슨해질 때 생기는 착시현상일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현실을 지지하고 있는 조건들을 충실히 고려할 때 가능한 상상력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가 통용될 때의 억압적 조건을 환기시키는 김태용의 소설에서, 화폐를 매개로 하여 현실vs비현실 구분법의 허방을 겨냥하는 이우현의 소설에서 우리는 그 일면을 확인한다. 종종 비현실적 잔혹극을 보여 주던 편혜영의 소설들이 신문 사회면에 실린 팩트(fact)의 다른 버전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새삼 떠올릴 만하다.

이제, 우리는 근래 문학의 지우고 넘는 상상력 속에서 우리가 자명하게 여겨 온 ‘현실’의 외연이 확장될 가능성을 보게 된다. 알고 보면 이처럼 경험과 현실을 근거 짓는 조건이 불안정해지는 지점에서 바로, 낯선 기괴함(Unheimlichkeit), 허무맹랑함, 가상, 환상, 공상 등의 여러 이름이 수식하는 상상력 역시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근래 인공자연이 지운 ‘진짜 자연’의 웅성거림을, 혹은 현실이라는 이름 속에 갇힌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다시’ 기억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현실의(actual) 영역에 가리워진, 실재하지만 현실화하지 않은 실재(virtual)로서의 영역과, 그것이 우리 삶에 작동하는 가능성들을 더 많이 엿보기 위해서라도, 가까스로 자각해낸 인공자연의 경계는 계속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문장 웹진/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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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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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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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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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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