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레이먼드 카버의 최첨단 기술

  • 작성일 2008-01-02
  • 조회수 2,895

 

레이먼드 카버의 최첨단 기술

 

 

 

김중혁

 

 

 

나도 장학금을 받아 본 적이 있다. 대학 시절이었다. 나는 4년 내내 평균학점 4.3(4.5 만점 기준)을 유지하며 학교를 거의 공짜로 다니다시피 하는 학생들이 너무나 부러워 근로 장학금을 신청했다. 근로 장학금이란, 말 그대로 근로와 장학금을 맞바꾸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걸 왜 장학금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어째서 ‘학내 아르바이트’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장학금이란 모름지기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의 성적은 밑바닥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근로’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나처럼 우왕좌왕하는 학생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라. 아무튼 근로 장학금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내가 선택한 종목은 도서관에서 일하기였다. 누군가 책을 반납하면 그 책을 원위치로 돌려보내고 새로 들어온 책 뒤에는 대출증 ― 아, 그리워라, 대출증의 시대여 ― 을 꽂고 가끔 도서관 바닥을 걸레로 쓱싹쓱싹 밀어 반짝반짝 광을 내는 일 따위를 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루에 2시간 정도 일을 했던 것 같고, 수입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았던 것 같다. 도서관에서의 근로가 끝나면 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의자에 앉아 책을 봤다. 아무 책이나 꺼내 들고 조금 읽다가 싫증이 나면 다른 책으로 옮겨 갔다. 소설도 많이 읽었고 시도 열심히 읽었다. 매일 책을 읽다 보니 좀 더 계획적으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던 차에 눈에 띈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1권부터 하루에 한 권씩 읽어내겠다는 멍청한 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곧 시에 질렸다. 그렇게 도서관의 책장을 배회하다 발견한 것이 ‘세계문학 전집’이었다. 출판사도 기억나지 않고, 번역자가 누군지도 잊어먹었다. 다른 작품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세계문학 전집’의 유일한 작품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뿐이다. 그 작품을 읽고 나는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고 지금은 생각하는데 그때도 그랬는지는 솔직히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주인공 남자와 맹인이 함께 대성당을 그리는 장면을 읽으면서 내 마음의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소설이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마지막 대사처럼 “이거 진짜 대단하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국내에서 레이먼드 카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가슴 뿌듯했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 레이먼드 카버를 다시 읽었을 때는 존경의 마음이 질투로 바뀌었다. 특히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을 읽었을 때는 한동안 마음이 울적했다. 그건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아니,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라기보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세계였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 귓가에 빵집의 기계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코끝으로 진한 빵 냄새가 밀려든다. 무엇인가 따뜻한 기운이 내 몸을 덮는다. 나는 눈을 압도하는 소설이 아니라 귀와 코와 피부를 압도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과학이 끝없이 발전하여 ― 그러길 바라진 않지만 ― 귀와 코와 피부를 압도하는 소설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공장이 배경일 땐 기계 소리가 들리고, 빵집이 배경일 땐 빵 냄새가 맡아지고, 겨울이 배경일 땐 피부가 닭살로 변하게 되는 시대가 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면의 공간에다 잉크를 발라 만드는 이 놀라운 “입체 가공술”을 능가하긴 힘들 것이다. 소설 속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은 실상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긴 하지만) 레이먼드 카버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쓰기 전에 이야기의 앞부분만을 담은 「목욕」이라는 단편을 쓴 적이 있다. 같은 이야기지만 두 소설의 세계는 완연히 다르다. 한쪽이 콘크리트의 세계라면, 다른 한쪽은 부푼 빵의 세계다. 한쪽이 벽돌을 쌓아 만든 공간이라면, 한쪽은 이스트로 부풀린 숙성의 공간이다. 두 작품을 발표한 시간의 틈에서 레이먼드 카버는 많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나도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일을 겪으면 레이먼드 카버가 사용한 것과 같은 입체 가공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나는 레이먼드 카버의 최첨단 기술을 질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내가 쓰고 싶었던 작품이자 여전히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이다.《문장 웹진/2008년 1월호》

추천 콘텐츠

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