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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서울, 젊은 작가들 참가기

  • 작성일 2008-05-30
  • 조회수 8,412

 

2008 서울, 젊은 작가들 참가기




신용목




1. 작가들, 그리고 축제


모든 만남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떤 만남은 전쟁의 재앙을 낳기도 하였고, 어떤 만남은 한 세계의 종말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역사상 한 문화 공동체의 결정으로서 문명과 문명의 만남은 대체로 (오로지 힘의 논리에 의해) 기우는 쪽 문명의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아시아가, 아프리카가, 먼 아메리카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가해자로서 유럽을 설정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문화적 관점으로 볼 때) 그들 역시 자신들이 만든 비극에 대한 아픈 자성을 내적으로 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집단화 된 욕망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처럼 은총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는 새로운 만남을, 그럼에도 갈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문화적 영토에서는 분명하다. 물질 없이 풍요로울 수 있으며 피 흘리지 않고 다칠 수 있는 것. 충돌과 충돌이 개간하는 넓은 지평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존재 확인이 그러하듯 문화는 하나 이상의 개체가 만들어 내는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관계가 발생하는 곳은 크든 작든 사회가 만들어지고 그 표현 양식인 문화가 존재한다. 관계의 방식을 규정하고, 강제로 조율하는 법률이 문화보다 비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언제나 불완전한 세계를 규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만남은 그 문화적 형식에 의해 형성된 내적 자아의 만남이다. 그 만남을 통해 만들어지는 어떤 것도 어쩔 수 없이 한 사회적 속성을 지니겠지만, 그것은 규정된 방식이나 강제적 조율의 범주 밖에서만 가능하다. ‘작가’라는 정체성과 상반된 ‘축제’라는 형식이 공존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게 세계 20개국에서 온 20명의 작가와 한국 작가 20명이 서울에서 만나 일주일 동안 함께 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주최로 이루진 <2008 서울, 젊은 작가들>은 <작가들의 수다>와 <낭독회>, <한국문화체험> 등으로 짜여졌다. 전체적인 행사 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하면 좋겠지만 홍대를 중심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행사에 모두 참가할 수 없었으며 일주일 만에 모든 작가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불가능했다. 내가 보고 만나고 느낀 행사와 작가들, 작품들에 대해서만 여기에 옮길 수밖에 없어 내심 안타깝다. (전체적인 행사 스케치는 주최 측인 한국문학번역원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볼 수 있다.) “We have no choice!" 리셉션 인사말에서 ”여러분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한 윤지관 번역원장의 말이 행사 내내 유행하였다. 멀고 낯선 나라에 와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외국 작가들의 불만을 사전에 불식시키고, 행사를 내실 있게 꾸리기 위해 한국 작가들도 숙소에 함께 투숙하게 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한국문학과 작가들을 해외 작가들과 교류하게 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해외작가들에게 한국과 한국문학에 대한 긍정적 자세를 견지하고자 했던 행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 공식 행사의 안과 밖


시작 풍경

내내 화창하던 날씨가 비를 뿌렸다. 18일 저녁 6시 리셉션 행사장인 서교호텔로 모여드는 작가들은 한결같이 날씨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아마 올 들어 가장 많은 양의 비인 것 같았다. 날씨 탓에 몇몇 작가들은 늦게 도착하였다. 손님을 맞는 한국 작가들은 괜스레 외국 작가들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저 비의 철창들이 작가들의 공간을 가두고 있다는, 그래서 이 공간 속에서 전혀 다른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 같은 기분 같은 것.) 주최 측의 인사와 함께 대륙별 참가자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그리스의 스테파노스 단돌로스, 싱가폴의 앨빈 팽,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할레조체 체흘라나, 브라질의 미셀 라웁이 초대에 대한 감사와 행사에 대한 기대의 말들을 남길 때 나는 테이블에 함께 앉은 일본의 후지노리 나카무라와 스페인의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그리고 한국 소설가 전성태와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 내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었다. 영어에 대한 공포를 가진 나는 이들이 모두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깊이) 감사했다. 테이블 좌석은 이후 낭독회를 함께 할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카무라는 <흙속의 아이>가 알베르트는 <차가운 피부>가 각각 한국어로 발간되었다. 행사 내내 자연스럽게 이들과 붙어 다니며 문학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알베르트와는 그날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전날 밤 늦도록 잠을 설쳤다는 나카무라는 일찍 숙소로 들었다.)

 

 

그에게선 문화인류학자이면서 『차가운 피부』를 34개국에서 출판한 유명 작가에게 있을 법한 아집이나 자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겸손하고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호기심이 많았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로서의 그를 지탱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성태 권여선 등 소설가와 함께 한국 음식이 궁금하다는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곱창 집이었다. 매울 법도 한 음식들을 그는 불만 없이 열심히 먹어치웠다. 영어를 못하는 작가.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스페인어가 아닌 카탈로니아어로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인구 700만 정도가 사는 카탈로니아 지방은 점령 세력인 스페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스페인을 꺾었을 때 자신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벽에다 ‘고마운 한국!’, ‘한국이 월드컵 우승하길!’이라는 낙서를 하고 다녔다고 했다. (이런 말들은 행사 내내 계속되었는데, 꼭 스페인 대사관에서 나온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말한다며 농을 띄웠다.) 오수연, 김경욱, 김중혁, 김종광 등 여러 사람들이 중간에 교체되는 동안에도 알베르트는 자리를 뜨지 않고 새벽 3시까지 줄창 우리와 곱창과 술국을 먹었다. (이후에도 틈만 나면 나는 그와 축구와 언어,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물론 훌륭한 전문 통역사를 사이에 끼고.)


수다 떨기

행사는 크게 두 개로 나뉘어졌다. 주로 낮엔 7~8명의 작가를 패널로 하고 전체 작가가 참가하여 작품 세계와 문화적 관심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의 수다>가, 밤엔 4명씩 짝지어진 작가들이 일반 독자들과 함께 작품을 낭독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사가 2곳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작가들의 수다>가 흥미로웠다. 물론 서로에 대해 사전에 알 기회가 적었으므로 처음부터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오갔던 것은 아니다. 쿠바의 떼레사 까르데나스가 ‘자신들은 활발하고 말을 많이 하려는 데 비해 한국 작가들은 너무 입을 닫고 있다’고 하자, “한국 작가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까 하고 고민하며 머릿속의 사전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니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오히려 한국 작가가 마침 영감이 떠올랐나 보다, 라고 동업자적 관대함을 가져 주세요.” 김경욱 작가의 재치 있는 답변이 있었다.

 

 

한국의 이장욱과 김경주, 싱가폴의 앨빈 팽은 여행과 글쓰기에 대한 주제를 두고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여행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고 하였고 미국에서 각종 시낭송 대회를 석권한 음유시인 어니스 모쥬가니는 여행 장소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영감들을 포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중국의 소설가 예미는 티벳에 대한 중국 작가들의 느낌을 묻는 질문에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질문을 했던 전성태 소설가 역시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에둘러 자신은 중국 대지진이 더 가슴 아프며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동안 작가들은 문학을 벗어난 특수한 정치상황에 대해 논의하는 것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탈리아의 피에트로 그로시는 작가로서 모든 대상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터키의 투나 키레밋치는 강대국의 사람들의 다른 나라 정치 상황에 대한 관심이 일종의 간섭 같다며 맞섰다. 물론 결론은 없었고 적당한 의견 교환 차원에서 정리되었다. 이외에도 글쓰기의 습관과 문학 번역의 문제 등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나는 이원 시인과 함께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 마티아스 괴리츠와 몽골의 시인이자 소설가 울찌턱스 루산도르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설가 할레조체 체흘리나와 같은 팀이 되어 수다를 떨었다. 솔직히 난감했다. 이원 시인과 나는 말 잘하는 성기완 시인이 있으니 수다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성기완 시인은 자리에 없었다. “성기완 시인이 말을 잘하기 때문에 이 자리를 걱정하지 않았는데, 너무 말을 잘하는 관계로 라디오 방송국에 불려가 버렸습니다.” 나의 말이었다. (성기완 시인은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울찌턱스는 질문마다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며 신비주의 전략을 썼고 마티아스 괴리츠는 2미터의 신장에 100킬로그램의 몸무게에도 불구하고 무척 수줍음이 많았다. 주로 문학과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오수연 작가가 ‘한국 현실을 쓸 때 한국 작가들은 자신들도 피를 흘린다고 말한다. 독일은 어떻느냐’는 질문에 ‘독일도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노르웨이에서 온 앤드레 룬드 에릭센도 ‘그렇다’고 말했다. 다른 수다에서 많은 작가들이 국적이나 국경에 상관없이 “작가에게 조국은 ‘언어(모국어)’이다.”라고 말했던 것과 함께 가장 인상 깊은 대답이었다. 

 

 

그날부터 두어 번 나는 마티아스 괴리츠와 영국의 소설가 스티븐 홀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실로 밤마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매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많은 한국 작가들이 번갈아 가며 함께 하였다. 주로 철학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진보적 성향을 지닌 이들은 소설과 정치적 현실이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중요하게 닿아 있다고 말하였다. 천진한 웃음을 가진 스티븐 홀은 영국의 정치 현실을 풍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부자 위주의 정책에 대해 특유의 웃음으로 불만을 표하기도 하였다.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많았다. (이들 둘과는 이후 영주에서 날이 샐 때까지 술을 마셨다. 물론 통역을 했던 자원봉사자 친구도 덕분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 6시가 가까워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심지어 작가들의 습성까지 비슷했다. 싱가폴의 앨빈 팽과 브라질의 리셀 라웁은 작가들끼리 있을 땐 (괜한 경쟁심 때문에) 작품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끼리끼리 어울려 술 마시는 걸 좋아하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작가가 현실 세계를 다른 세계로 옮겨 놓는 특수 직업군이란 걸 인정한다면 만국의 작가들이 가진 작업 방식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낭독회 풍경

대체로 한국작가 2명과 외국작가 2명으로 짝지어진 낭독회는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는 상상마당과 클럽 타에서 저녁 7시에, 토요일은 상상마당과 다원문화매개공간에서 각각 1시와 4시에 진행되었다.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준비한 퍼포먼스가 볼거리를 더했다. 김중혁 작가는 자신의 소설 내용과 어울리는 동영상을 준비했다. 사흘 동안이나 준비한 그의 동영상은 버스를 타고 가는 등장인물들이 바라보는 바깥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김경주 시인도 자신의 산문집의 배경이 되었던 여행 장소를 동영상으로 만들어 잔잔한 여운을 주었다. 때마침 한국에서 『악동 테리에』라는 소설이 번역 발간된 노르웨이의 엔드레 룬드 에릭센은 등장인물들의 음색과 캐릭터를 일일이 살린 낭독으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 별다른 장치를 하지 않았음에도 김선우 시인의 낭독은 잔잔하면서도 낮은 울림으로 시의 맛을 더했다. 음유시인인 어니스 모쥬가니는 특유의 몸짓으로 시를 노래하듯 읊조렸다. “속옷을 입은 채로 나는 시를 쓴다/머리가 둘 달린 시/다리가 셋 달린 시/꼭지가 열 개 달려 있고 보조바퀴는 없는 시/내 등엔 에어브러시로 그린 금빛 불꽃이 있고 내 발은 맨발이다/내 발은 곰 발이다/으르르르 발”로 시작한 그의 시는, 처음에 ‘만담가’ 정도로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 달리 모더니티의 한 극점을 지나고 있는 듯 보였다. (한국시의 모더니티를 이끈다고 할 수 있는) 이장욱 시인과 함께 낭독회를 가졌던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이장욱 시를 펼쳐 들고 인상 깊었다는 인사를 건넸고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점점 친구가 되어 갔다.)

낭독회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음악과 문학을 함께 엮은 작가들의 향연이었다. 팔레스타인의 바시마 타크로리, 한유주, 성기완, 러시아의 올가 발렌취츠가 그들이다. “우리가 라이브 홀에 있는 만큼, 저도 노래를 해야만 하겠죠.” 바시마 타크로리가 특유의 맑은 음색으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를 불렀고 이내 낭독을 이었다. 평소 눌변이라며 말을 아끼던 한유주 소설가도 위트를 더했다. 그녀가 얘기한다. “놀려 드릴게요.” 그리고 조그만 멜로디언으로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어딘가 익숙한 멜로디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엔, 지루하게 해 드릴게요.” 그리고 그녀는 「흑백 사진사」를 낭독했다. 성기완 시인의 무대는 모두가 기대했던 그대로였다. 3호선 버터플라이라는 그룹의 일원인 그의 무대는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물론 시에 곡을 붙였다. 또 한 번 독자들을 놀라게 한 사람은 러시아의 올가 발렌취츠였다. 건반 앞에 앉는 그녀가 쏟아 낸 음들은 취미 삼아 피아노를 친 소설가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노래 실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녀는 (직업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지만) 러시아에서 쭉 음악을 해 왔다고. 이들에게는 한국 작가들이 미리 준비한 장미 한 송이씩이 전달되었다. 꽃만큼 그들의 만남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었다.

독자들 역시 궁금증을 풀기에 충분한 자리였다. 1시간씩 낭독을 하고 1시간씩 독자들과 대화를 했다. 어휘력을 늘리는 방법에 대해 강영숙 작가는 ‘먼저 그림으로 생각’한다는 대답을 들려줬고, 여성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김선우 시인은 ‘어머니 자연을 그리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할레조체 체흘라나는 시를 읊다가 노래로 바꿔 부르곤 하는 이유에 대해 ‘그것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문학 환경과 문학 제도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문학상이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엔드레 룬드 에릭센은 ‘상은 긍정적인 자극을 주며 많을수록 좋다’는 의견을 내놓은 반면 브라질의 미셀 라웁은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문학적 상상력을 잠식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불가리에서 온 알렉 포포프가 미셀 라웁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둘 다 ‘상금이 있다면 받겠다’고 말해 낭독회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소설가 심윤경, 김윤영 네덜란드의 안냐 시킹, 중국의 예미가 함께 했던 낭독회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문학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안냐 시킹은 네덜란드의 인구가 2000만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전업으로만 글쓰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심윤경과 김윤영은 가정생활과 육아를 함께 하는 글쓰기의 요령을 특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잔잔하게 들려주었다.



3. 다시 작가들, 그리고 축제


목요일과 금요일 양일간 영주 부석사, 안동 병산서원을 돌며 한국문화체험 시간을 가졌다. 스님들과 한국 문화와 한국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어떻게 다른가?’란 질문에 ‘모두 세계의 진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같다’라고 한 스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타북 타종식을 지켜보며 어둠이 산을 기어 올라가는 풍경과 세계가 몸을 뒤척이는 순간을 우리는 함께 목격하였다. 병산서원에서 지친 몸을 누이고 먼 강을 바라볼 때도 내 몸이 우주의 한 순간을 지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영국의 스티븐 홀은 ‘압도적인 경험’이라며 이것을 표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날 밤, 우리는 주점에 있는 술을 거덜 내고서야 흩어졌다. ‘작가들이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실 줄 몰랐다’는 게 주점 주인의 변명이었다. (술을 바닥 낸 것은 이후 환송 행사가 열렸던 클럽 타에서 또 한 번 재현되었다.) 이탈리아의 피에트로와 프랑스의 플라즈넷은 즉석에서 춤을 추기도 하였고, 일본의 나카무라는 한국 작가들 틈에서 연신 특유의 귀여운 웃음소리를 내느라 바빴다. 기와집들이 즐비한 선비 촌이 일순 낯선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마지막 환송행사는 뜻 깊은 순서로 이어졌다. 아쉬운 분위기 속에서 특정 나라의 음악이 나오면 그 나라 작가가 올라가 인사를 하고 자신이 아는 좋은 시구 하나씩을 읊는 것이었다. “우리의 신은 다르지만, 우리의 기도는 같습니다”라고 한 터키의 투나 키레밋치의 인사말이 왠지 가슴을 치고 갔다. 모든 다른 나라에서 다른 정치적 상황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점점 음악이 흥겨워지고 이내 하나둘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몇몇 외국 작가들은 날을 꼬박 새고 공항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행사가 마무리되어 갔다. 물론 모든 면에서 다 완벽했던 것만은 아니다. 참가한 한국 작가들이 주최 측에 직접 요청한 간담회 자리는 앞으로 더 나은 행사를 꾸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대체로 사전에 작품을 통해 서로를 알았더라면 더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갔을 것이라는 것, 대부분이 자원봉사자였던 통역원들 (물론 많이들 고생하고 충분한 역할을 해주었지만) 몇몇이 작가들끼리의 소통을 오히려 원활치 못하게 하였다는 것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는 이런 행사가 어떤 효과를 불러올지 쉽게 장담할 수 없다. 문명의 초기 단계부터 문학예술 활동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있어서 가장 수준 높은 결과물을 창조하였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생각하며 현실화하는 능력,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치 있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능력이 문학의 주요한 특징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로서 문학은 창의성을 근간으로 하여 인간성의 위대함을 추구했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심지어 창조하는 방법을 배우고 과거와 대화하며 미래 세대와 소통한다. 그리고 문학은 사회 구성원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산업 사회에서는 문화와 경제가 서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생존해 왔다. 이때 문학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량화 되지 않는 곳에 내재된 에너지로서 문학이 이 사회와 지구 공동체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만은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20개국에서 온 20명의 외국 작가들과 한국 작가들이 이러한 축제를 통해 문학을 믿고 공유하며 미래를 약속하는 이유이다.   



4. 작가들, 친구가 되다


조금 이야기를 거슬러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과 친구가 된 사연을 전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를테면 새로 사귄 친구 자랑쯤 되겠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이 행사의 취지와도 닿아 있을 거라 여기며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경험을 안고 돌아갔을 것이다.) 첫날 영주 선비 촌에 여장을 푼 우리는 당장에 축구를 할 만한 운동장을 찾아 나섰다. 첫날부터 이탈리아의 피에트로 그로시를 중심으로 축구를 하자는 의견이 계속되었던 것. (특히 100킬로그램의 거구 마티아스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나에게 축구를 제안했을 때 나는 거의 위협적인 느낌을 받았다. 안 하면 때릴 것 같은? 농담이다. 그는 충분히 순진했다.) 할 수 없이 주최 측을 졸라 근처 중학교를 섭외했다. 마침 자유시간이 2시간 주어진 것. 비공식적으로 열린 축구경기는 세계시인팀 대 세계소설가팀의 시합이었다. 더운 날씨였다. 10분 후부터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은 지쳐 버렸으나 먼 타국까지 건너온 여독도 아랑곳없이 저들은 연신 공을 몰았다. 결국 소설가 팀의 스테파노스 단돌로스(그리스)와 피에트로 그로시(이탈리아)가 한 골씩을 넣었고, 시인 팀에서는 내가 한 골을 넣어 2대 1로 소설가 팀이 우승했다. 모두들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라고 입을 모았다. 비공식 행사가 하이라이트라니!

어쨌든 축구 시합은 나에게 같은 팀이었던 마티아스 괴리츠와의 친분을 더 돈독하게 해 주었고 (그와 나는 인사로 하이파이브를 하게 되었다.)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과는 마지막까지 묘한 신경전을 벌이게 만들었다. 시합 시작하자마자 소설가 팀 수비수였던 알베르트와 시인 팀 공격수였던 내가 부딪쳤는데, 멀쩡히 서 있는 알베르트와 달리 나는 5미터를 데굴데굴 굴렀다. 내가 날린 슛은 골대의 옆 그물을 쳤으며 내 옷은 구멍이 났고 팔과 다리는 긁혀 피가 배였다. (그래도 반칙이 아니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환송회장에서 그가 너를 다치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길래, 니 몸을 느낄 수 있는 기회여서 좋았다라고 답했다.) 카탈로니아 지방의 축구팀인 바르셀로나를 좋아한다는 그는 낭독회 중에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은 독자에게 맥주를 사겠다는 제안을 할 정도로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제가 지금 다리가 불편해서 잘 앉을 수가 없네요. 그것은 시인 팀과 소설가 팀이 가진 축구 경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가 팀이 2대 1로 이겼습니다.” 나와 같은 낭독회 팀이었던 알베르트의 첫인사였다. “저도 지금 다리가 불편해서 잘 앉을 수가 없네요. 축구 경기 때 시인 팀이 2대 1로 진 이유는, 배 나온 소설가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보니 자꾸 영감이 떠올라서 공을 제대로 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첫인사였다. 알베르트는 마지막 환송 행사에서 무대에 올라서도 나를 바라보며 “자기에게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 2대 1이 그것이다”라며 손가락을 치켜들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알베르트와 내가 교감을 나누게 된 것은 <작가들의 수다> 시간이었다.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이 작가들에게 물었다. “정말 문학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답변들이 이어졌다. 영국의 스티븐 홀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감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으며, 김경욱 소설가는 “오히려 문학은 세상을 너무 많이 바꾸었다. 이제 그만 바꾸어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대답이 정리될 무렵까지 알베르트는 그 궁금증에 대해 논의를 하고 싶어했다. “문학이 세상을 바꾸는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제 옆집에 환경운동가가 삽니다. 제가 시집을 건넸을 때 그가 나를 꾸짖었습니다. ‘이 시집 때문에 말레이시아에 있는 숲이 하나 사라졌다. 그곳에 살던 너구리와 원숭이와 도마뱀도 사라졌다.’ 당황한 나는 한동안 말을 잊었습니다. 그는 시를 쓸려면 (모쥬가니처럼) 달달 외워서 떠들고 다니라고 했지만 그럴 재주는 없고 그래도 시인이니 책은 내야겠고, 한참 후에야 저는 답변이 생각났습니다. 거기서 사라진 숲을 사람들 마음속으로 옮겨 놓는 것이 문학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너구리와 원숭이와 도마뱀을 살게 하는 것이지요. 숲을 통째로 옮기려면 어쩌면 더 많은 힘과 땀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하려고 갔을 때 그분은 이미 이사 가고 없더군요.” 조금 장난스럽게 건넨 나의 대답이 재밌었는지 알베르트는 환송 행사장에서까지 ‘나를 찍었다’고 말했고, 나 역시 ‘성적인 부분을 제외하곤 당신을 찍었다’고 했다. 친구 하나를 얻은 기분이었다.《문장 웹진/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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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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