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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우주에 이르기까지

  • 작성일 2008-08-29
  • 조회수 6,806

 

<작가와 작가>


몸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우주에 이르기까지



대담 박상륭(소설가)

진행?정리 한창훈(소설가)

 

intro

고향을 가서 고향을 잊어버리다

서라벌예대, 이문구

가족

오관유정

유리사투리

우리말이 갖고 있는 율조성

자벌레가 나비되기

마음론에서는 배척할 것이 없다

서양철학에는 블랙홀이 있다 

어느 날 소설에 많이 지쳤다.

작가들이여 독자를 상대로 데모를 하라

한번 이민은 영구한 이민이다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 그것은 고향


한창훈  선생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상륭  허허허. 지금 살고 있는 섬 이름이 뭡니까요?

한창훈  제가 사는 데는 거문도입니다.

박상륭  네?

한창훈  거. 문. 도입니다.

박상륭  거기서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했으니 저야말로 감사하죠.

 

 

한창훈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요, 길 떠나는 자에게는 이유가 세 가지 있는데, 하나는 길 자체의 유혹이고, 하나는 풍문이고, 하나는 충동이라고 하셨습니다.

박상륭  그래, 어느 경우입니까?

한창훈  저는 선생님이 오셨다는 풍문을 듣고 마음이 설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쪽(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저를 불러 올렸는데 그 이유는 이 기회에 선생님 뫼시고 공부 좀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올라왔습니다.

박상륭  허허허. 풍문을 쫒아서 충동적으로…….

한창훈  장수 고향에 최근 언제 가보셨나요?

박상륭  EBS에서 정지아 씨가 ‘작가와의 기행문’인가를 해가지고 안 갈 수가 없어서 세 시간 있다가 왔는데, 고향에 가서 고향을 잊어버렸습니다. 마음속에 그리던 고향은 초가집에 호박도 열려 있고 박도 매달려 있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근데 가보니깐 전부 다 바뀌고 옛날에 상섭이네가 살던 데는 상섭이도 없고 이래가지고 고향을 잊어버리고 왔습니다. 안 갔으면 아직도 그런 고향이었을 건데 가서 봤기 때문에 고향이 없어져 버렸어요.

한창훈  차라리 안 가신 게 더 좋을 뻔했네요.

박상륭  고향은 거기 없습니다. 그동안에 많이 바뀌어가지고. 밖에 있던 고향이 이제 안으로 옮겨 버린 거죠. 이 세상에는 없는지도 모르죠.

한창훈  하기는 제 사는 섬도 다 바뀌어서 옛날 모습이 하나도 없는데 내륙은 더 하겠죠……. 선생님 장수농고를 나오셨는데요.

박상륭  장수농고는, 어느 분이 학문열도 있었고 정치열도 있어가지고 그것으로 어떻게 표 좀 모아 볼까 싶어서 꾸몄는데 1회는 열다섯 명이 졸업했을 거예요. 2회가 우린데 세 명이 졸업했고 그 세 명 중에 제가 3등 했습니다.

한창훈  수석 졸업하셨다고 이문구 선생님께 들었는데요.

박상륭  3등이라서 수석에 속한 겁니다. 그렇잖아요? 

한창훈  이문구 선생님 글을 읽어 보면 장수농고 다니실 때 이화여대 국문과 학생과 사랑에 빠지셨다고 그러셨는데요?

박상륭  그런 적이 있었지요. 얼음판에 애들 팽이 치고 우리말로 스케또라 그러죠? 스케또도 타고……. 그 여성은 겨울철에 머슴이 업고 탔는데, 머슴이 넘어지면서 다리를 다쳤던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한 다리를 절룩거리던 여성이었습니다. 뭐 그런 적이 있었지만 한 5,60년 전 얘기죠. 장수농고 다닐 때 특별히 기억나는 이야기를 해보자면, 국어책에 조지훈 시인의 「승무」가 있습니다. 근데 거기 승무의 한 구절을 보면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라는 부분이 있어요. 근데 이 ‘도’자가 무슨 뜻입니까.

한창훈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박상륭  이 ‘도’자가 붙지 말아야 하는 건데 생각해 보니깐 ‘도’라는 토씨가 있잖아요. 얼마나 추궁을 했던지 선생이 울고 나갔던 일이 있습니다.

한창훈  하하하. (웃음)

박상륭  여선생인데 그 여선생이 방금 말한 여성의 언니 되는 이였습니다. 그래서 여선생한테도 사랑에 빠지고 그런 게 있습니다.

한창훈  선생님 그 관록이 오래되셨던데요. 초등학교 5학년 때도 그렇고…….

박상륭  2학년 때도 그렇고…… 많죠. 그걸로 따지면 머슴애들이야 자기 환상 속에서 늘 만들어 내잖아요. 관록은 그런 정도만 있는 게 아니죠? 한 선생도 관록이야 뭐 여간 돈독하지 않을 걸요?

한창훈  (웃음) 저야 뭐.

박상륭  그래서 그 여선생이 조지훈 선생님한테 편지를 쓰던지 해서 알아봐라. 내 《사상계》 다닐 때 조지훈 선생님이 간혹 오셨습니다. 여쭤 보지는 않았는데 시인 당자도 아마 대답은 못했을 겁니다. 다만 하나 대답할 수 있는 길은 수사학적인 압력에 의해서 ‘도’자가 들어가야만 그 구절이 멋이 있습니다. “세사에 시달리니 번뇌는 별빛이라” 이래도 멋이 없고…… 뜻은 더 가까울는지 모르지만. 그런 일이 고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것이죠. 관록 중에 하나입니다 그게.



아내, 친구, 그리고 세 딸들


한창훈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다니실 때 맨 앞자리에서 검정색 물을 입힌 군용 작업복을 입으시고 고개 빳빳이 들고 앉아 계셨다고 읽은 게 기억납니다. 

박상륭  이문구가 말을 많이 만들어 냈어요. 그래 가지고 재수 없는 놈, 이랬죠. 우린 또 이문구 보고 ‘재수 없는 놈’ 이랬습니다. 맨 뒤에 조그마니 앉아 가지고, 비웃는 듯 미소만 얼굴에 띠우고 앉아 가지고 유독 관찰만 하고 있으니까 저런 재수 없는 놈이 있는가, 싶었죠. 그러다 재수 없는 놈들이라고 욕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나 봅니다.

한창훈  참, 아련한 시절의 말씀이십니다. 사모님도 그때 만나신 거죠?

박상륭  그렇죠. 공부는 늘 뒷전이고 연애한다고 노상 학교를 여성 만나려고 갔어요. 공부하려고 가는 게 아니고.

한창훈  선생님 공부를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놀라워했었다고 그러던데요.

박상륭  아니, 그 이문구가 만들어 낸 소리죠. 우리 반은 학원에서 만들어 놓은 백일장에서 1등 당선한 사람, 그런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전라도 촌놈이 하나 왔는데 요즘 말로 하면 명함도 못 내미는 그런 상태죠. 이왕의 기성 시인도 있었고 그랬어요.

한창훈  과에서 제일 미인을 애인으로 채 가셨다고. 주변에서 질투를 많이 느꼈다고, 그런 애기를 들었습니다만.

박상륭  이문구가 우정으로, 내 친구 애인이면 가장 미인이다 이렇게 쳐 줘야 하니깐 그런 것이지 그런 거 아닙니다.

 

 

한창훈  예전에 김동리 문학상 타실 때 사모님을 뵈었는데요. 굉장히 미인이시던데요.

박상륭  쬐끄만 할망구죠. 무슨 미인입니까? 그래도 지금 오십 년간을 살아오고 있죠. 살다 보면 고단한 재도 많이 넘어야 되고 그래요. 넘기다 보니 오십 년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것 같고 그렇습니다. 지금 슬하에는 자녀가?

한창훈  딸이 하나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입니다.

박상륭  거기 중학교 있어요?

한창훈  딸은 육지에 있습니다.

박상륭  서울에?

한창훈  아뇨. 지방에 있습니다. 선생님은 따님이 둘 있으시죠?

박상륭  셋.

한창훈  아, 셋입니까? 따님 이야기 좀 해주시죠?

박상륭  큰애는, 거기 문자로 파이낸셜 월드라고 하는데, 금융 계통에서 제법 성공했는가 봐요. 결혼해서 불란서 계통 몬트리올 사위가 있고. 둘째는 지금 박사 과정인데 아마 거기는 꼭 5년을 해야 하나 봐요. 지금 4년째 하고 있고, 셋째는 스물여덟에 몬트리올 칼튼 유니버시티에 교수를 만들어 들어가서 교수하고 있습니다.

한창훈  결혼들은?

박상륭  큰애만 하고 둘은 생각을 안 하데요. 뭐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 어쩝니까? 부모들이 억지로 결혼하라고 해도 저그들 하기 싫으면 못하는 거고.

한창훈  손주가 있나요?

박상륭  하나. 큰딸아이한테서 손녀가 하나 있는데, 혼혈이죠. 혼혈들이 챠밍하고 머리가 좋고 그렇습니다. 섞이는 것이 좋은 게 있는가 봐요. 허허허.

한창훈  선생님이 손녀 안고 있는 모습을 지금 상상해 보고 있습니다.

박상륭  꼭 한 번 봤어요, 애를. 전 할애비 자격이 없는가 봐요 전혀.

한창훈  그때 결혼을 하시고 《사상계》에 들어가시기 전에 금호동에서 사셨잖습니까. 이문구 선생님 표현을 빌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축대 아래에서…….”

박상륭  괴로운 시절 얘기죠. 전 되도록 괴로운 시절 얘기는 자꾸 생각을 안 하려고 그럽니다. 자랑할 것도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시절에 문학인지 뭔지 한답시고 그저 마누라가 벌어 온 돈에 배 깔고 누워서 왼종일 지내고…… 재미날 것이 하나도 없어요.

한창훈  연구 및 공부를 그때 하셨다고?

박상륭  여러 가지지요…….



행복해지는 방식으로서의 신(神), 신들


한창훈  그때부터 시작으로 「아겔다마」를 발표하시고 이제 45년 만에, 선생님 표현대로 하면, 5부작 완결을 마치신 게 됩니다. 『잡설품』으로 5부작이 끝났다고 하셨는데, 그때 시작하실 때 여기까지 다 계획이 돼 있으셨던 건지요?

박상륭  기자들하고 간담회에서도 그 얘기가 나오더군요. 한 선생도 아시잖아요? 뭐 있었다면 무의식 속에 어떤 식의 계획이 짜여 있었던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어요. 우리들의 무의식이 거의 전지전능하다고 그러잖아요. 결과로 보면은 그 무의식이 예지력까지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갖고 있어요. 하지만 계획됐던 그런 것은 아닌 거죠. 그럴 수야 없는 거죠. 동업자들은 그거 잘 알잖아요.

 

 

한창훈  계획을 하든 안 하시든 선생님의 생각과 몸은 여기까지 오셨을 겁니다. 참으로 먼 길을 오셨는데…….

박상륭  어느 한 길을 달려오다 보니깐 여기까지 왔습니다. 서양인들은 추상적인 사고를 잘 못한다고 합니다요. 그 대신에 추상적인 것을 구상화하는 데 있어서 아주 능한 재주들이 있다고 그러죠. 그래서 모든 추상적인 것의 구상화를 통해서 오늘날 과학이, 실학이 나왔어요. 사람들의 식량 문제도 그렇게 해결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신이라는 추상성을 구상화하려하면, 구상 쪽에서 하나의 대안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이 니체의 ‘초인(超人)’이죠. 신이라는 추상적인 존재가 구상화를 통해서 드러난 게 초인인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초인은 구상화된 이미지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따져야 될 인물이 못되죠. 그래서 실제로 니체의 초인은 이 땅에서 치정(治定)하는 사람들 속에서 찾아야 되는데, 그래서 어느 포인트까지 성공적인 초인은 히틀러이기도 하고, 현재 포인트까지의 성공적인 초인은 김정일일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히틀러의 초인은 구상적으로 치세에서 찾게 되는데요. 거기에 반해 구상적인 것을 추상화하는 것이 동양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한 전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축국에 가면 나무도 추상화하기 때문에 신이 되고, 돌까지도 전부 신으로 변해 버리죠. 그래서 천축에는 신들이 버글버글하고 새삐렸습니다. 그래서 천축국 사람들이 부자로 잘사는 서구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하답니다. 천하 없이 가난해도. 그런데 구상적인 것을 추상화하려고 하면 그 대상에서 구상성이 희박해지거나 탈락을 하거나 그렇게 됩니다. 내러티브가 약해지는 거죠. 추상적인 것의 구상화, 구상적인 것의 추상화에는 법칙으로 따르게 돼 있는데 아무리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칠조어론』이나 『잡설품』이나 졸작들에서는 구상성, 얘기의 줄거리, 사건, 이런 것들이 많이 약화돼 있는 부분이 있죠. 그것들이 추상화를 치르는 과정에서 저절로 탈락한 겁니다. 그래서 난해하다 또는 난삽하다 또는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하는데 아무튼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했던 얘기들을 되풀이하려고 하니 남사스럽습니다. 백여  년 전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써졌는데 순수한 의미에서 보면 철학 서적이 아니죠.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두고 써진 서사시도 같은데 그러나 순수한 의미에서의 서사시도 아니죠. 그리고 인물이나 사건들이 허구적인데, 그러면 소설이어야 하는데 소설도 아닙니다. 그런데 독자들에게는 경전처럼 읽히고 있는 책입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그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책이죠. 철학이나 서사시적인 거나 소설이나 경전이나 그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책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이런 문제가 생기죠.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철학책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그럼 그럴 때 그건 ‘잡설’이라고 불러야 되죠. 그리고 백여 년이 지난 후에 호동에서 그런 식의 책을 하나 썼는데 그럼 이건 뭣이라고 불러야 되느냐, 이건 잡설이다, 결국은 그런 얘긴데. 니체식의 서구식 사고방식에 의하면, 추상적인 것을 구상화한다는 이 자체는 몰락의 축에서 써진 것이죠. 왜냐하면 추상적인 것을 구상화한다는 것은 몰락의 축에서 써진 것이고, 위쪽으로 신을 찾아야 된다, 또는 인간의 재림이 필요하다, 이런 경우는 상승의 축에서 써졌다는 것이죠. 두 잡설 중 하나는 상승의 축에서, 하나는 몰락의 축에서 같은 문제를 다뤘다고 해도 되겠죠. 또다시 되풀이되는 얘기지만, 자벌레가 오체투지 고행을 통해서 나비가 되는데 밖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손이 날개를 달아 준 것이 아니고 자체 내에서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기 내부에서 신을 발견해야 된다 이거죠. 그래서 신이 있는가 없는가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신의 진화 과정에서 어떤 궁극 그 너머의 불도 있고 뭐도 있고 하지만 어떤 한 궁극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한 번 주어진 삶을 허비하는 것은 노예근성적 종말인의 사고다’라는 어투로 매도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어떤 한 궁극을 향해서 진화의 도상에 있는 궁극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아닌 것이고 신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갖고 그것을 향해서 자벌레가 날개를 돋아 내듯 자기가 그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찬양할 만한 것이에요. 그러나 오늘날은 인간이 인간을 많이 상실하고 있어요. 그래서 추상적인 것을 구상화하기에 능한 서구 사람들에 의하면 신들이 씨가 말라 가죠. 추상적인 것들이 구상화되는 동안에 과학이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했는데 자본주의 역사가 짧으면 짧을수록 인간이 망쳐지고 인간성을 잃고 그리고 자본을 어떻게 유용할지를 몰라 우왕좌왕 우왕좌왕, 굉장히 볼썽사나운 현상이 나와요. 우리의 세계가 상당히 전락을 한 것 같아요. 희망이 안 보이는 거 같아요. 다만 나의 생각이길 바라지만, 현재의 인간으로서 세계를 운영하기를 바라기에는 인간들이 너무 충분치 않은 것 같아요. 그것이 복합화 된 축생도라고 하는 건데, 인간들이 오관유정(五官有情)에서 사관유정(四官有精)으로 자기 이익만을 위해 애써 달려가고 있어요. 뭐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부르짖는 것이 인간의 재림이 필요하다. 인간의 재림을 위해서는 우리들이 신을 일깨워 내는 건데 이분법적, 이원론적으로 밖에서 신을 찾아내면 어느 날 또 신을 죽이게 돼요. 그러니까 자체 내에서 찾아야 되죠. 자벌레가 나비가 되는 중에 어떤 엑시던트(accident)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밟아서 으깬다든지 새가 쪼았다든가 식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꼭 날개를 달도록 돼 있는 거죠. 인간도 오관을 구비해서 태어났으면, 어떤 엑시던트가 없으면 꼭 해탈을 하도록 돼 있는 게 내 생각인데요. 그러면 사람에게 일어나는 엑시던트는 어떻게 일어나느냐.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망과 카르마(업)가 장애가 돼 가지고, 한 인생 동안 해탈을 성취하게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윤회를 거듭하고, 윤회를 거듭하고 그런다는 것이죠. 그래도 하나의 희망이 없는 건 아닌데 (문화예술위원회 여직원 안모 씨를 바라보며) 안 여사님! 여성들이 이 세상을 이만큼 받쳐 왔던 탓에 아직 세상이 더 나빠지진 않았어요. 남성들이 세상을 운영해 왔다면 벌써 박살나고 말았어요. 여성들이 뒤에서 세상을 떠받쳐 온 겁니다. 앞으로의 희망은, 라스트 프론티어(Last Frontier)는, 아마도 여성들에게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어머니라는 것에 의해서 세상을 받쳐 오고 있는데 여성들이 넘어진 남성을 짓밟는 대신에 일으켜 줬으면 하는 거죠.



박상륭 읽기의 곤혹과 즐거움


한창훈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니까 방대하면서도 심오한 작업의 순서가 ‘몸의 우주’에서 ‘말씀의 우주’를 거쳐서 ‘마음의 우주’로 가시는 과정이 축약돼서 제 눈앞에 이렇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 책을 읽는 독자들이 훨씬 더 늘어나고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더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선생님께서 해 오신 생각과 사유의 과정은 결국 사람의 품격 문제와 연결되어지는 듯합니다. 품격을 높인다는 것은 자신의 인성 안에서의 문제점을 발견해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상륭  좋은 말씀이에요.

한창훈  사실 일반인들은 선생님 책 읽기를 굉장히 어려워하는 게 사실입니다. 수업할 때 수강생들에게 선생님 책을 읽어 오라고 왕왕 시킵니다. 다음 주에 읽어 왔냐고 물어보는데 “차라리 애를 하나 낳고 말겠습니다.”하는 대답도 있었습니다. (웃음)

박상륭  허허허.

한창훈  그러면 저는 이렇게 조언을 합니다. 이를테면 『죽음의 한 연구』는 처음부터 순서대로 안 읽어도 된다, 책을 펴 놓고 앉으면 당신 눈에 들어오는 문장, 살아서 꿈틀거리는 문장이 하나 있을 것이다. 그 문장만 먼저 읽고 그 문장만 궁리하고 그 문장만 가지고 생각을 하라, 그리고 다음에 그 문장을 찾으면 앞뒤 문장이 보일 것이다, 외연을 넓혀 가는 게 선생님 책을 읽는 방법이다, 이렇게 조언을 하는데 괜찮은 방법인가요?

박상륭  거 아주 훌륭한 방법인데요. (두 팔을 번쩍 들며) 제가 우쭐해집니다.

한창훈  아무튼 일반 사람들이 어려워들 해서 아시다시피 선생님의 마니아층들이 후배 작가들이 대부분이죠. 저도 그렇고요. 



모국어와 사투리에 대하여


한창훈  개인적으로 하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용하시겠지만 남도 사투리 방언을 쓰시지 않습니까. 실제로 제가 선생님 책을 읽다 보면 장수 사투리와는 다른 제 고향(전남 여수) 사투리들이 나옵니다.

박상륭  장수하고 얼마나 멉니까?

한창훈  상당히 많이 떨어져 있는데요.

박상륭  그게 장수에서 쓰는 건데…….

한창훈  그걸 예전에 이문구 선생께 여쭤 봤더니…….

박상륭  문구는 이렇게 얘기를 했죠. 전라도 사투리야 그것이? 유리 사투리지. (웃음)

한창훈  예, 유리 사투리라고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제가 ‘아……’ 한 적이 있습니다.

박상륭  우리 언어는 단어가 충분히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사투리라는 것을 국어 대사전 속에 많이 차곡차곡 쌓아야 됩니다. 사투리가 주는 뉘앙스를 표준말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요. 이것도 사람들 만나게 되면 때때로 하는 말이지만, 우리말이 우리 작가들에게 불행하면서도 은복이 되는 점이 있는데 우리말은 문법 체계가 제대로 돼 있는 게 아니죠. 통화를 하기 위해서 언어가 갖고 있는 질서는 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개발된 언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처럼 꽉 짜여 있지가 못하죠. 그래서 짜여진 언어를 쓰는 작가들은 이 자리에 이 말을 넣으면 중학생은 알아듣겠고 이 자리에 이 단어를 넣으면 대학생은 알아듣겠고 이래서 쉬운 말을 넣느냐 어려운 말을 넣느냐 뭐 그런 고민을 하겠죠. 그런데 우리는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글쓰기가 어려운데, 그 대신에 작가들에겐 자유가 있죠. 작가의 개성을 투입할 지평이 열려 있는 거예요. 또 하나는 우리말은 단어 수가 적어서 한문 단어를 없애려고 하면 더 심각해져요. 그래도 조어를 얼마든지 짜 넣을 수 있는 룸(room)이 있고, 사투리라도 ‘쭈그리고’ 앉아서, ‘쭈글시고’ 앉아서 그 두 개의 단어가 비슷한 단어인데 오는 그 느낌은 다 달라요. 옛날식 변소 칸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하는 것보다 ‘쭈글시고 앉아서’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느낌이 있어요. ‘쭈그리고’는 표준말이니깐 ‘쭈글시고’라는 표현은 쓰지 말자, 이렇게 문법학자, 국문학자들은 말하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말을 점점 줄이게 돼요. 단어가 적기 때문에 우리 작가들은 글쓰기가 불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탓에 우리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서 후생들에게 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말의 토씨는 정말 불편한 겁니다. 는, 가, 를, 고 뭐 이런 따위들 말이죠. 그게 반복이 되면 어떻고 안 되면 또 뭐가 어떻게 되고 하는데 아무튼 그게 글 쓰는데 무지무지하게 불편한 거예요. 하지만 잘 쓰면 죽은 문장이 살아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 토씨죠. 예를 들면 해는 진다, 해가 진다, 해를 지게 한다 뭐 이런 식인데, 얘기 도중에 “해가 지고 있다” 이러면 시간만을 가리키는 것인데, 얘기 도중에 “해는 지고 있다”라고 하면 시간하고 상관없이 뭔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잖아요. 이렇게 가장 약체들이 장점이 돼 있는 부분들이 몇 가지가 있어요. 토씨들을 잘 쓰면 죽은 문장들이 싱싱하게 살아나고 새로운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말이죠. 우리는 사투리라는 것이 있고 또 조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죠. 단체가 장체가 되는 거죠.

 

 

한창훈  선생님 말씀 듣고 있다 보니까 요즘 몇몇 평론가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모국어 기피증이나 모국어 혐오증이 떠오릅니다. 이를테면 그것을 근친혐오라고 지칭하는 평론가도 있습니다. 평론의 세계, 그러니까 작가와 독자를 이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모국어를 피해서 가고 심지어는 혐오 증세까지 있는 게 굉장히 마음이 답답하고 쓸쓸하고 그렇습니다.

박상륭  우리 언어가 문법적으로 확립이 안 돼 있어가지고 대부분 경우에 오문이나 비문으로 흐르고 이러다 보면 다른 언어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들은 모국어 혐오증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글 쓰는 작가들이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는 거겠죠.



문장으로서의 잡설체


한창훈  당대 작가들 중에서 아마 선생님께서 구사하는 문장이 가장 길겁니다. 만연체를 넘어서 선생님 표현대로 ‘잡설체’라고 할 만합니다. 저는 ‘륭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웃음) 문장이 길다는 것은 야멸치지 못하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대상에 대한 애정과 배려 때문에 탁, 잘라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박상륭  허허허. (웃음) 아까 우쭐했는데 지금도 제가 그렇습니다. 장문은 접근하기 좋은 면이 있고 또 여러 가지 장점이 있죠. 단문은 문장이 짧으니까 율조성을 짜 넣을 자리가 없죠. 우리 언어는, 특히 전라도 언어는 말 자체가 율조성을 갖고 있는데 그걸 단문화하면 율조를 넣어야 할 자리가 없잖아요, 그 짧은 문장 속에는. 그래서 우리는 독자들에게나 작가들에게나 긴 문장 수업을 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말이 갖고 있는 율조성을 살려 넣으면 우리말이 매우 훌륭한 말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한 선생 문장 좋잖아요.

한창훈  (웃음) 아이구, 선생님두…….

박상륭  근데 동업자하고 얘기할라믄 스스로 부끄러운 게 많아요. 왜냐하면 나이 많았다는 권리, 나이 많았다는 것도 권력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 권리, 그 권력 그걸로 말하고 있는 거지 사실로는 얘기할 자격이 없는 거죠.

한창훈  사실 선생님 문장을 어떻게 흉내를 내 보고 싶은데 도저히 안 됩니다. 

박상륭  (한창훈을 가리키며) 한 선생이야말로 아주 만담꾼, 농담꾼 아닙니까.

한창훈  아닙니다. 저는 이런 것은 거짓말 잘 못합니다. 선생님의 깊이 있고 방대한 철학적 사유도 놀랍지만요,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소설로 녹여 내신단 말입니다. 녹여 내시고 율조를 얹어가지고 사람 귀에 들어오게 한단 말입니다. 거기서 저는 늘 놀랍니다. 한 번 선생님 책을 읽으면…….

박상륭  (웃음) 야…… 이렇게 동업자가 얘기를 해주니깐 또 두 번째로 우쭐거려지려고 한다구.

한창훈  작가들은 사춘기 때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한 편 아니겠습니까. 저도 크면서 영화나 소설에서 어떤 장면을 보다가 가슴이 막 찡해가지고 며칠간 떨쳐지지 않고 이랬는데 소설가가 되고부터는 그런 게 없어졌단 말입니다. 어떤 책을 읽어도 같은 동료로서 봐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감정 전이가 잘 안 오는데, 그러다가 선생님 책 『죽음의 한 연구』의 비극적 사랑 장면에서 그게 손님처럼 한 번 찾아왔습니다.

박상륭  저런 저런.

한창훈  아, 이렇게 나한테 반응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구나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것을 이렇게 녹여 버리신 선생님께 더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굉장히 예민한 감수성까지 장착을 하고 계시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위트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비극적인 사랑을 그리면서도 이를테면, “고추 남기(나무)는 잠지만 한 서른 개 달려 있는데 서로 바라보다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만다”는, 이런 재미있는 표현들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싶었습니다.

박상륭  제가 나중에 맥주를 한 잔 살게요. (웃음) 분명히 맥주를 한 잔 사야겠는데요. 

한창훈  제가 술 얻어먹고 싶어서 이런 건 아닐 거라는 거 아실 겁니다. (웃음)

박상륭  한 선생하고 같이 있었다간 나중에 얼굴이 다 없어지겠어요. 대개 한 시간 지났죠?



초기 작품에서 잡설품까지 사유와 철학의 진화


한창훈  다시 책으로 좀 돌아와서요. 초기 작품들을 읽다 보면 이원론처럼, 몸 긍정과 몸 부정 두 가지 중에서 몸 긍정 쪽이었다고 할까요? 니체적인 입장에 맞춰서 초기 작품들을 쓰시다가 『죽음의 한 연구』를 거치고 『칠조어론』으로 오면 좀 바뀌는데요. 죽음의 한 연구에서 육조가 혜능의 게송을 가지고 존자승과 부딪히는데 촛불 중의 시각, 즉 칠조어론으로 가면 다시 혜능의 게송이 비판을 받는 변화가 생깁니다. 한마디로 몸, 축생도에서 마음의 우주로 가는 과정, 끊임없이 부딪히고 죽이고 다시 살아나는 그 과정일 텐데요. 그 변화들에 대해서 좀 듣고 싶습니다.

박상륭  이것도 말하자면 재탕의 하난데요. 『죽음의 한 연구』는 삶과 죽음에 관한 천착이라고 해야 되는가, 연구라고 해야 되는가, 연구 및 공부라고 해야 되는가. 그런 거라면, 칠조어론은 고행의 문제, 즉 촛불 중의 고행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극한의 고행을 치른 것입니다. 자벌레가 나비되기 위한, 오체투지로 하는 고행이, 『칠조어론』에서 말한 문제라면 팔조전인 『잡설품』은 해탈의 문제를 주제로 삼았다는 얘기가 되겠죠. 뭔가 한 작가가 어느 종단의 해탈의 문제를 자기 작품 속에다가 빌려 넣으려면 이왕에 돼 있는 그런 방법으로 빌려 넣어서는 읽을 만한 것이 안 되는 것 아니겠어요? 이제 그걸 자기 식으로 이해해서 보태는 건데, 이왕의 법설에 보태는 건데, 사실로 여기서 어느 종교나 법설이나 교회나 뒤틀려지지 않는 건 없어요. 전부 다 뒤틀려지는데 그걸 불교적으로는 ‘아드바이타(advaita)’라고 합니다. 산스크리트도 모르는 사람이 산스크리트를 쓰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문을 줄줄 다 읽어서 한문을 쓰는 건 아니잖아요? ‘드바이타(dvaita)’가 이분법이라면, 그 앞에 ‘아(a)’라는 부정 접두사를 보태서 이분법이 아니다, 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일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고 무원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뭐라고 부를 수도 있어요. 드바이타는 둘만 부정했을 뿐이에요. 0일 수도 있고 마이너스 0일 수도 있고 그래요. 이건 무량수의 복수하고도 같다는 뜻으로도 이해돼요. 불교적으로 아드바이타를 성취하기 위해 해탈을 한다, 그러는데 『잡설품』에서는 자아를 무량수로 확대하는 데서 해탈을 찾아요.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은 같다는 논법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드바이타와 무량수의 다수는 같은 것이다. 이제 불교에서는 무량수 쪽을 보지는 않죠. 이제까지는 보아 오지를 않았는데, 무량수의 다수 쪽에서 보면 한 자아가 분열을 할 때 무량수로 분열을 하는데 풀어도 되고 뭐도 되고 뭐도 되고…… 그러다 보면 한 우주가 돼 버리는 거겠죠. 그쪽에서 보면 인간이 아닌 유정(有情)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로 건너뛸 수가 있죠. 모든 것이 전생에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거죠. 한 인간이 육관, 칠관, 팔관, 구관까지 도달해서 자신을 무한수로 표현을 했을 때, 거기에 한 우주가 명료해진다면 우주 내에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이 아닌 게 없겠지요. 창세기가 없는 불교 쪽에서 보면 우주의 기원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얘기가 만들어질 수가 있죠. 건너뛰고 비약하고 건너뛰고 하다 보면……. 그것이 이번에 쓴 잡소리 속의 한 주제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는데 “몸과 마음은 현주소가 같다”는 말은 도처에서도 돼 있죠. 몸이 없이는 진화가 가능하지를 못하답니다. 몸을 전제로 하고 그 몸을 통한 고통, 고행을 통해서 진화가 가능하다는 거죠. 해탈도 마찬가지일거구요. 혜능 식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해가지고 도달해 버리는 것은 수사학적인 해탈이고 수사학적인 것이에요. 혜능 식의 그것을 어떤 이들은 ‘돈오(頓悟)’라고도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칠조가 하는 얘기인 거죠. (혜능의 게송은) 선비요고 신수의 게송은 노동요고. (웃음)

한창훈  신수의 게송은 정말 노동요가 되겠네요. (웃음) “몸이 영혼의 수련장으로써 결국 몸을 통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는 말은 저희들이 선생님 책에서 배웠던, 배워서 어디 가서 써먹고 그러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종교의 중요성이 새삼스러운데요, 예를 들어서, 헤겔이 말한 예술, 철학, 종교 중에서 결국 최고 상위 개념을 종교로 보시는 것인지…….

박상륭  박모가 주장하는 게 그거고 헤겔은 철학을 최상위에다 놓는 모양인데. 헤겔 철학의 7,8할이 ‘폴스(false)’라고 그럽니다요. 전문적인 철학자들이 발견해 낸 건데 쉽게 꼽히는 것은 그 철학자가 말하는 ‘엡솔루트 윌(abosolute will)’이라고 그럽니까, ‘스피릿(spirit)’이라고 그럽니까? ‘절대적 정신’이라고 그러죠? 그런 것이 역사 속에서 실증되지 않았다는 것이겠죠. 실증되지 않은 것은 서구 사람들에 의하면 폴스에 속하는 거겠죠. 거기서 하나 살 만한 것이 있는데 기독이 테제라고 하죠. 영어 나라에서는 ‘테지스(thesis)’라고 하는데, 기독을 ‘테지스’라고 그러면 안티테지스(antithesis)가 니체고 박모에 의하면 시동이 여기 말로 하면 진테제, 신테지스(synthesis)가 된다는, 그런 식의 추상적인, 형이상학적인 방면에서는 받아들이고 살 만한데요. 그 사람은 역사 철학가잖아요. 그런데 역사 속에서 하나도 실증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헤겔주의자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은데 헤겔 철학은 7,8할은 ‘폴스’라는 겁니다. ‘폴스’라는 말은 ‘거짓이다’라고 번역하기도 그렇고, ‘허위’라고 번역하기도 그렇고 트루(ture)냐 폴스(false)냐 이런 건데. 그런가 봐요.



안 믿는 것과 다 믿는 것


한창훈  잘 알겠습니다. 이건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여쭤 봅니다. 선생님 작품 세계를 보면 기독교의 교리 연구에서부터 시작해서 불교, 노장, 샤머니즘, 탄트라, 코란, 티베트 밀교, 아프리카 신화들, 우리나라의 종교 철학 모든 게 총망라돼 있는 셈인데 가지고 계신 자료도 어마어마하실 것 같아요.

박상륭  그게 저 몇 개 아는 걸 자꾸 써 먹는 거죠. 조금만 주의 깊게 어느 종단의 교의를 읽어 보면 다 나오는 거 아닙니까. 특히 몸, 말, 마음 해가지고, 마음론자에 의하거나, 진화론자에 의하면 어느 종교도 부정하거나 할 수가 없죠.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 또는 희랍의 신화라든가 전부 다 몸의 우주의 종교라고 한다면, ‘몸의 우주’에서 그것은 진리고 몸의 우주를 구원하는 방편들 아닙니까. 그러니 그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 없는 것이죠. ‘말씀의 우주’로 올라오면 기독교든 가톨릭이든 무슬림이든 힌두이즘의 어떤 부분이건 불교의 어떤 부분이건 그것들대로 중생들을 구제, 교화하고 있잖아요. ‘마음의 우주’로 올라오면 특히 선불교나 라마이즘 중에서도 고차적인 라마이즘이나 그런 것들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어느 종교도 배척할 수가 없고 비판할 수가 없고 그저 통째로, 통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여기 나오는 늙은네가 그러는 거예요. 자기는 마음론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지만 자기가 새로 만들어 낸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이미 너무도 좋은 진리나 너무도 좋은 그것들이 땅이 무너질 정도로 있는데 거기다 뭘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자리도 없고 자기한테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려고 하면 어떤 다른 종교를 비판하게 되고 하는데, 새로운 것이 가능할지 어쩔지 모르겠어요. 진화론자는 있는 그대로를 두고, 식당에 가면 메뉴가 많을수록 좋다고 하죠. 있는 그대로 두고 국밥이 좋은 사람은 국밥 먹고 곰탕 좋은 사람은 곰탕 먹고 이런 식으로 자기의 지적 수준과 성품에 맞는 종교를 가려서 믿다 보면 세계가 하나의 사원이 되지 않느냐. 그래서 마음론은 통종교적이라는 것에 입각해서 이 늙은네가 만들어 낸 건데,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목소리, 마음이라는 게 새로운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느닷없이 나온 게 아니에요. 이왕에 있어 온 거 아닙니까. 몸, 말, 마음 그것을 합친 것뿐인 거죠. 그래서 이 늙은네는 자기가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든가 메시아라든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 다만 우리들의 종교도 성장할 만큼 했으니깐 종교관에서 벽을 허물자, 식당에서 메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듯이 종교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것이 이제까지 종교가 역사에 해를 입혀 온 것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겠죠. 이제까지는 제 발로 서기 위해서 담을 높이 쌓고 서로 적대시하지 않으면 작은 종교는 큰 종교한테 먹히고 어디로 휩쓸려가고 그랬지만 이젠 설 만큼 다 섰잖아요. 어느 종교가 샤머니즘이라 하더라도 어디로 융합돼 버린다든가 할  만큼 그런 상황은 아니잖아요. 이제는 종교 간에 벽을 허물어야 해요. 탱주나무를 믿어야 할 아낙네에게 교회당에 와가지고 기도하고 뭐하는 식으로 해봐야 이익 없는 거예요. 절에 가서 참선해야 할 사람에게 교회 가서 기도하라 그럴 수는 없는 것이죠. 사고를 해야 할 사람에게 신앙을 요구하면 별로 진전이 없는 거죠.

 

 

한창훈  예전에 사람들이 저에게 종교를 물어보면 “종교가 없다”고 했는데요. 선생님 책을 읽은 이후로는 “다 믿습니다”로 대답이 바뀌었는데, 결국은 선생님 영향인 것 같습니다.

박상륭  “종교는 없다”라는 게 매우 흥미로운…….

한창훈  “믿는 종교가 없다”라고 하다가 요즘은 “다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한다는 뜻입니다.

박상륭  사실로 마음을 넓히면 아무것도 안 믿을 거 하나 없는 거죠. (테이블 아래를 가리키며) 이런 데에 활성(活性)이 있다, 이 애니미즘도 훌륭한 종교입니다. 뭐 이런 식으로 마음론 쪽에서는 아무것도 배척할 것이 없게 되죠. 지난 한 1,2년 동안 서양의 철학은 어떤가. 우리들 누구나 쇼펜하우어, 아리스토텔레스 한 권씩 읽잖아요. 그것들을 총합해 낼 만큼 실력이 되려면 일생을 철학해야 되잖아요. 누군가 해 놓은 걸 읽다가 느낀 게, 서양의 철학은 기독교까지 합쳐 가지고 플라톤으로부터 한 발짝도 더 내딛지 못했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은 신을 만나면 블랙홀이 거기 있어요. 그래서 더 뛰어넘지 못해요. 그 다음에 무신론에 떨어지면 거기 또 블랙홀이 있는데 거기서 더 내려가지 못해요. 그런데 그 두 개의 블랙홀은 결국은 하나의 블랙홀이라는 얘기가 되는 거죠. 서양의 철학이 블랙홀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상은, 우리 동양의 철학에 비하면 매우 열등해요. 그래서 많은 철학가들이 정치학이라든가 윤리학이라든가 이런 곁길을 많이 가는 것 같은데. 말씀해 보세요. 아까 생각했던 것이 잠깐 곁으로 나갔습니다. 생각이 나겠죠.

한창훈  결국 귀결이 철학으로 되는가 종교로 되는가 하는 것인데, 선생님은 큰 축으로 종교를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잡설품』으로써 니브리티(nivriti―선생의 소설에 나오는, 정지, 무위, 절대적 공(空) 등을 나타내는 말로 역, 유위, 색, 상대적 공의 개념인 프라브리티(pravriti)의 상대적 개념이다. 프라브리티는 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를 아우르는 개념이며 니브리티는 마음의 우주와 유관한 개념이다)까지 오신 셈인데요.

박상륭  말하자면, 소설 잡설이라고 하는 쪽에서는 그런 셈이죠.

한창훈  다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금도 손으로 쓰시나요 원고를?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까지 쓰고 그 뒤에 박상륭도 과연 우리들이 말하는 소설을 쓸 수 있느냐에 대한 한 대답으로, 또는 좀 더 건방지게 말한다면 시범으로, 「왈튼씨 부인이 죽은 한 죽음」「로이가 산 한 삶」이런 일련의 것을 썼어요. 그리고 난 소설 쓴다는 것에 별로 관심을 안 가져 봤습니다. 어느 날 소설에 많이 지쳤어요. 우리 동업자들이 들으면 욕할 얘기인데요. 이수일과 심순애가 만나서 강가를 걸었다, 포말이 발등을 덮었는데 둘이서 끌어안고 넘어졌다, 김중배가 와가지고 어떻게 했다, 이런 것들을 시대 좀 바꾸고 이름들 좀 바꾸고 장르를 좀 바꾸고, 그런 식의 얘기라면 땅 위에 너무도 족히 써진 책들이 많잖아요. 동업자하고 얘기를 할라니 매우 거북하고 그런데, 소설 쓴다는 생각을 안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창훈  그걸 조금 있다가 여쭤 보려고 했었는데 먼저 답을 들었네요.

박상륭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게…… 이건 매우 건방진 얘기지만, 자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 실어 나르는 승(乘, 불교의 교의를 달리 이르는 말. 중생을 태워서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라고 그러지요. 야나, 대승, 소승, 금강승하는 승. 수레로써 써먹기에 아주 좋은 거죠. 철학책은 마음을 갖고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읽어지는 것이고, 경전은 대단히 읽기 싫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약간의 문학적인 것이 가미가 되면 읽기 싫은 것이 재미가 있을 수도 있어서 어떤 법을 실어 나르는 야나로써, 문학을 써먹기에 좋은 야나가 되겠구나. 그러나 이상하게 얘기가 돌아갔습니다. (웃음)



작가들이여 독자를 상대로 데모를 하라 


한창훈  무슨 말씀이신지 짐작은 좀 됩니다. 마지막 질문을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모처럼 고국에 오셨는데 보시다시피 나라가 굉장히 어지럽고 시끄럽습니다. 이 많은 일반 대중들에게 구원의 문제 차원을 다 설득해 낼 수는 없을 테이고요…… 곧 캐나다로 돌아가시는데 당장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박상륭  한 이민인으로서,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지켜보고 있느냐? 방향 제시까지는 못하더라도 여기에서 보면 개구리 웅덩이의 얘기가 있고, ‘루타, 아루타’라는 얘기가 있는데 ‘루타’는 기표에 맞을 겁니다. ‘아루타’는 기의에 맞을 겁니다. 오늘날 수천만의 사람들이 길거리를 질주하는 것을 보면서 여기 루타는 있는데 아루타는 분명치 않다. 그러니까 여기에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은 있는데 이념은 모르겠다, 저 사람들이 어떤 이데올로기 하에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달려야 하는가, 물론 따지려면 여러 이유가 많아서 모였겠지만, 이념이 없이도 사람들은 저렇게 모여서 함성을 지르면서 다닐 수가 있구나, 싶어요. 이번만은 전혀 이념이 생각나지가 않아요. 저번에 왔었을 때는 여학생 둘에 대한 촛불집회를 했는데 그것이 꼭 반미주의라 한다 하면 그것이 꼭 좌파로 흘러야 할 필요는 없어요. 여학생 둘이 사고를 당한 것으로 치자면 그런 식의 사고는 어디에서든지 있을 수 있는 사고고, 그것이 해픈 투 비(happen to be)입니다. 미군이 몬 장갑차여서 그렇지 길거리 어디서라도 그런 식의 사고는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도 그때는 이념이 있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한 번은 미국에 대해서 독립 선언은 해야 돼요. 그리고 두 개의 대등한 상대로서 상대를 해야 하죠. 인세(人世)를 조절하고 있는 균형의 힘이 타나토스―죽고 싶은 증, 에로스―살고 싶은 증, 이 두 개의 힘이 양극에서 밸런스를 맞출 때 그때가 제일 희망할 만한 사회를 이루겠죠. 근데 그 어느 쪽으로 기울 때, 예를 들어 타나토스 쪽으로 기울었을 때 이념이 있거나 없거나 어떤 식으로든 폭발이 있게 마련이에요. 균형을 잃었으니깐. ‘타나토스’라는 것이 죽고 싶은 증이니까 지금 저 사람들이 죽고 싶어서 저렇게 달리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균형을 잡기 위해서 달리고 있는 건가…… 이번의 이 사건만은 어떤 면에서도 이해가 잘 안 돼요. ‘광우병’이라는 것이 이념일 수는 없는 것이고 백일밖에 안 됐는데 정부가 독재주의를 하고 있는 것도 저렇게 달릴 이유도 없는 것이고. 유전된 음기에 의하자면, 백일 동안 음기가 쌓여서 저렇게 터뜨려지지는 못합니다. 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통해 쌓여 오던 것이 어디에 도화선을 만나 터뜨려지는데 ‘광우병’이라는 도화선은 틀린 도화선인 것 같아요. 저렇게까지 전국이 일어나서 저렇게까지 해야 될 만큼 그 이념이 그 밑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아루타, 이념이 없는 루타는 있는데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우리 국민들이 어디로 몰리고, 예를 들어 박지성이한테 몰리고 하잖아요. 타국에 선수 간 사람들은 거 우리하고 관계없어요. 타국 팀의 선수입니다. 캐나다에는 ‘그레츠키’라고 하는 하키 역사상 가장 볼을 많이 넣는 영웅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어느 해 미국 팀으로 갔어요. 그때부터 그 팀하고 캐나다 팀하고 경기를 할 때만 그 사람 이름이 들먹여지고 경기가 없으면 조용해요. 그쪽 무슨 팀의 선수예요. 캐나다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그 사람들이 나와서 국위를 선양해 주고 이런 거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느 팀에 간 사람이라도 계속 짝사랑으로 매달리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청승 떨고 그래요. 우리의 지적 수준이 조금 높아져야 한다는 거밖에는 없는데요. 저로서는 뭔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이제 작가가 앞서서 해야 하는 일일 건데요. 민족애도 좀 가져야 되고 메시아 콤플렉스도 좀 가져야 되고, 이러쿵저러쿵 해서 작가들을 들어 올리려고 해야지 독자 쪽으로 작가가 내려가려고 해서는 들어 올려지지는 않죠. 우리 작가들의 책임이 많습니다.

한창훈  주최 측에서 온 질문입니다. 아까 말씀과 더불어서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 작가들에게 당부의 말씀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박상륭  동업자들에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저도 그것을 하고 있는 이상 건방진 얘기지만 우리들이 되도록 독자를 작가 쪽으로 끌어올려야지, 작가가 독자 쪽으로 내려가지는 말아야죠. 우리 작가들도 데모 한 번 해야 되요. 독자를 상대로.

한창훈  공부 좀 하십시오, 책 좀 읽고 궁리 좀 하십시오. 이렇게요?

박상륭  읽고 싶으면 올라와라 그런 것이죠. 독자 쪽으로 내려가면 당분간 돈도 좀 벌고 그런 것도 있을 겁니다. 물론 모든 작가들이 독자들을 상대로 데모를 할 필요 없어요. 허허허.

한창훈  큰 숙제를 하나 던져 주신 것 같습니다.

박상륭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물론 훌륭하고 수십 수 높은 독자들도 얼마든지 많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작가 쪽이 지적으로 좀 앞서 있다고 보죠.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말하면 독자들이 싫어할 거예요.

한창훈  생각은 작가들이 많이 하는 편이죠.

박상륭  그래요. 그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쪽으로 올라와서…….

한창훈  이제 캐나다 가시면 다시 오실 계획이 있습니까.

박상륭  한 번 이민은 영구한 이민이라고 합니다. 캐나다에 ‘위철리’라는 작가가 있는데 젊은 나이에 영국에 이민을 했던 모양이에요. 영어로 썼으니깐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작가인데, 그런데 영국에서도 늘 설 자리가 없고 캐나다에 돌아와도 설 자리가 없어요. 한 번 이민은 영구한 이민이다, 위철리가 그런 얘기를 했는데 그게 아주 가슴에 와 닿던데요. 오더라도 설 자리가 없고 가더라도 설 자리가 없고. 오늘 같은 날 한 선생하고 마주 앉아 있으니 여기가 든든하고 좋은데요. 여기를 일어나면 인제 설 자리가 없는 겁니다.

한창훈  저희 동료들끼리 만나서 술을 한 잔 마실 때 정말로 호서 쪽(서양을 지칭하는 선생의 표현)을 바라보면서 “선생님 잘 계시나요?” 이렇게 한마디씩 인사하고 마시고 그랬습니다.

박상륭  허허허. 얼굴을 가려야 되겠습니다……. 이제 칠십 됐으니 별 볼일 없어요. 근데 한 선생께서는 그건 알아주시면 좋은데, 서구의 작가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 괴테, 제임스 조이스 이 사람들은 몸과 말씀의 우주 내에서 한 발짝도 더 올라서지를 못했어요. 아까 철학 얘기하다 블랙홀을 넘지 못했다고 했듯이. 그래서 얼마나 작품들이 완성되고 좋은 것이었든 간에 여전히 몸과 말씀의 우주 내에서 써진 것입니다. 마음론자 입장에는 대개 두 단계까지 올라간 거죠 그 사람들은. 마음론자들은 한 단계를 마저 올라야만 드디어 완성이 됐다 그러죠. 그건 한 선생께서 염두에 두시고. 결국은 서구의 주류, 내가 이렇게 써갖고는 서구의 주류를 찬탈할 수가 없겠구나, 마음의 우주로 한 번 도약을 해야겠다, 그때에만 서구를 주류라고 하는 데서부터 비주류화 할 수 있을 겁니다. 괴테,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의 권력을 놓고 더 넘어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보다 더 훌륭한 유산이 있잖아요. 우리는 위대한 작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한창훈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뭔가 희망의 세상이 보이고 그렇습니다. 긴 시간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상륭  우리 한 선생 같은 사람하고 있으면 사흘 밤도 새울 수도 있고 그러니깐. (웃음)《문장 웹진/2008년 9월호》




박상륭  1940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서라벌 예대를 졸업했고, 경희대 정외과를 중퇴했다. 1963년 성경의 유다 모티프를 도전적으로 재해석한 「아겔다마」가 《사상계》신인상에 입상하면서 그의 독특한 소설 창작 세계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1969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그는 1973년 『죽음의 한 연구』를 발표한 이후 20여 년간 『칠조어론』 집필에 전념하면서 인간 존재의 문제를 죽음과 재생의 측면에서 탐사해왔다.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칠조어론』, 소설집 『열명길』『아겔다마』『평심』, 산문집 『산해기』등을 펴냈다.


한창훈  1963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던 새 본다』 등이 있다. 『홍합』으로 제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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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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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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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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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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