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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묵시록으로 읽는 2008년 소설들

  • 작성일 2008-12-01
  • 조회수 3,031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 묵시록으로 읽는 2008년 소설들




김미정





1. 묵시록의 시대

오랫동안 묵시록이 유행이었다. 역사의 종언, 예술의 종말과 같은 말들에 이어, (근대)문학의 종언, 인간 이후(동물, 스놉) 등과 같은 말들이 한동안 우리를 불편케 했던 일을 생각해보자. 물론 이 불편함은 단순하게 ‘우리가 자명하게 여겨온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들이 정말로 끝났다, 끝날 것이다, 혹은 끝내도 된다’는 식의 목적론적 예언서 버전으로 받아들여진, 그러니까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혹은 ‘세속적인’ 종말, 종언으로 이해된 탓이 컸지만, 여하간 그간의 묵시록들은 진원지도, 시차도 다르며, 맥락 역시 다르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유독 20세기 중반 이후 두드러진, 그리고 지속적으로 변주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해둘 만하다.

즉, 어느 종말(종언, 죽음) 선언에 있어서나 공통적인 것은,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종말이 아니라, 어떤 전제가 붙은 대상에 대한 종말 선언이라는 것이다. 1960년대 미국을 풍미한 ‘소설의 죽음’(레슬리 피들러)은 ‘엘리트 문화로서의 모더니즘’ 소설의 종언에 대한 것이었고, 1990년대 초반의 ‘역사의 종언’(프란시스 후쿠야마)은 ‘이데올로기의 대립, 헤겔적 역사 발전 법칙’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것이었으며, 역시 1990년대의 ‘예술의 종말’ 선언(아서 단토)은 ‘내러티브를 가진’ 예술의 종말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잠시 우리를 동요케 했던 ‘문학의 종언’ 이야기 역시 ‘근대적 의미’의 문학과 관련된 것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지금 그 복잡하고 심각한 사정들을 재론할 생각은 없다. 단지, 이 모든 종언 이야기, 종언 선언(혹은 예언)들의 컨텍스트에 대해, 이를테면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를 넘어서까지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분위기와 묵시록 상상력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 버전의 등장에 대해 생각해볼 참이다.

이것은 진짜 인간의 멸망, 현세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이다.1) 인간세계의 파국을 자주 발설할 때(윤이형), 아니면 아예 세계를 파괴시키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그 폐허를 향유할 때(듀나), 우리는 이것이 명백한 묵시록임을, 일종의 심판의 기록임을 알게 된다. 물론 대중적인 장르 속에서의 제약 없는 상상력이 선취한 묵시록의 상상력에 대해서라면 우리도 알고 있는 바가 많다. 그러나 일찍이 문학이라는 이름 앞에서, 인간들의 이야기도 인간-신의 이야기도 아니라, 인간-기계-동물 식의 이야기에 대해 고민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혹은 지상-천상이나 현실-환상이나 도시-자연 식의 공간 단위가 아니라, 지구-우주의 단위로 세계를 사유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여기에는 이제껏 암묵적으로 비껴간 인간의 생물학적 의미, 그리고 이 세계와 현실을 우주적 단위로 환산하는 셈법이 있다. 그리하여, 과연 묵시록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만한 이 서사들은, 단지 소설 기법의 변화나 상상력의 진화나 새로운 작가의 출현 등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표현을 빌자면 ‘우리와 가장 가까웠던 단단하고 친숙한 토양이 잔뜩 말라 부스러져버리는’(M. 푸코) 상황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규약들, 이를테면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거느리는 각론격의 무수한 ‘인간’과 ‘현실’과 ‘문학’의 덕목들. 그 세계에 대한 이해와 그 토대가 변환 중임을 먼저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소설들의 묵시록은 가히 거대서사 몰락의 결정판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다. 인간과 이 세계를 둘러싼 마지노선마저 자폭되는 경계에 그들의 소설이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묵시록의 시작 아닌가. 20세기 중반 이후 듣고 보아온 묵시록들에 생생한 육체를 덧입힌 묵시록 말이다.

우리는 대개 종말론, 묵시록의 핵심이 ‘종말’과 ‘구원’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적 복음의 수사, 패턴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묵시록의 목록을 떠올릴 때에도 그러한데, 세계는 대개 파국 직전에 정지 유보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휴머니티의 확인으로 드라마틱하게 마무리된다. (2008년 화제의 책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에 대한 감동 역시 거칠게 말하자면 결국 이 전형성과 관련된다) 그것은 흔히 ‘새로운 천년, 천년 왕국’이라는 종교적 수사를 환기시키듯 현세(세속)의 몰락과 초월적 구원이라는 목적론적 역사 법칙 속에서 구사되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어떤 21세기적 묵시록은 일단 구원에의 믿음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인다. 초월적 구원이 예정되어 있는 파멸일 경우 그것은 바꿔 말해 곧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장면들은 종종 초월적인 것을 상기시킬지언정, 실제로 초월적인 구원과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초월적인 것의 부정, 혹은 구원이나 유토피아에 대한 절망이 이 묵시록들의 배경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 세계는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라는 절망 자체가 이 유례없이 구체적인 묵시록들의 배경일지도 모른다. 편혜영의 소설들이 건조한 얼굴로 한동안 파국의 징조에 골몰한 바 있다면, 지금 어떤 이들은 맨얼굴로 그 상상력의 본론을 쓰고 있는 중이다. 맨얼굴의 첫 번째 모습은 분노다. 그들은 목하 분노 중이다. 우리의 소설사에서 한동안 희귀했던 분노의 파토스는 지금 이 세계의 파국의 전조이자, 파국을 상상하는 이유와 공모되어 있다.


2. 이들은 왜 분노하는가 - 묵시록 서사의 발생론

2007년에 마지막 읽은 소설과 2008년이 되어 처음 읽은 소설을 떠올려보니 공교롭게도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두 편 모두에서,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내던 격렬함, 분노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박민규, 김애란의 소설로 설명되어 온 2000년대식 정서, 예컨대 원한(resentimental) 없는 세계의 유머, 부채감 없는 상상력과 비교해볼 때), 더구나 그 파토스의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한동안 ‘쿨(cool)하다’라는 조어가 새로운 시대의 권장 덕목처럼, 혹은 한 시대의 정서적 특징인 양 풍미한 일도 있었고, 마침 우리의 소설에서도 감성의 자기관리술이라고 할 만한 특징들이 주목된 바(예컨대, 김애란, 윤성희 소설에 대해 종종 우리는 이렇게 읽어왔다)도 있다. 이를테면 보들레르가 ‘멜랑꼴리한 개인 영웅’이라고 했던 근대적 주체라든지, 개인의 트라우마나 원한(르상티망)에 의해 자기를 정립하는 식의 근대적 자기정립의 방법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소설들은 더 이상 우울하지도 권태롭지도 않았으며, 천박하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대신 거기에는 자기를 잘 조절할 줄 알고 관리할 줄 아는 긍정과 낙관의 주체들이 있었다. 추억과 센티멘털은 어딘지 건강치 못한 정서와 쉽게 연관이 되기도 했고, 게다가 분노라는 것은 교양 없는 것으로 여겨지거나, 나아가 약자의 원한으로 전화되기 쉬운 부정적인 파토스와 관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목격한 인상적인 장면들은 그 잠시 잊혀진 분노의 격렬함과 직접성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 그걸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 재미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창피하게 이게 뭐냐고?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어버리라는 거야?”(윤이형, 「큰 늑대 파랑」, 『창작과비평』2007 겨울)이라거나, “지구가 멸망해야 한다. 그 방법밖에 없다면. 같이 죽는다면 나도 죽을 생각이 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능하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능했으면 좋겠는데”(김사과, 『미나』창비사 2008)라는 식으로 승화의 절차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분노의 일종이다. 그리고 이들의 분노는 일개인적인 감정의 반응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그들이 겪는 세계를 향한 반응이자 발화이다. 그들은 자기 세계의 조건 앞에서 이미 뼛속 깊이 절망하고 있고 자신들의 무기력을 절감하며 속수무책으로 추락하고 있다. 그들의 상황들은 이미 일개인의 의지와 낙관으로 넘어설 수 있는 상황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들은 단순히 스스로가 겪는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그 조건들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들이 변화될 수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을 느끼면서, 그리고 그 조건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에 대해 추적해가면서 분노한다. 김사과 소설을 조금 더 보자.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청춘들의 반항과 치기와 분노는 존재했고, 그들의 선배 목록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미나』는 단지 미성숙한 육체와 영혼을 가진 청춘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살’하거나(박지예), ‘친구를 죽이거나’(수정), ‘죽임을 당하거나’(미나), ‘죽음을 방조’(민호)하는 선택지 이외의 것을 갖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 세계가 그 이외의 선택을 허용치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철저히 인과적이고 구조적인 것이어서, 그들 청춘의 세계를 병리적이라고만 해둘 수 없는 심각함을 안고 있다.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기성세대의 타락과 교육 시스템의 파행(가령, 소설 속 박지예의 자살이 한국의 공교육 붕괴 및 서바이벌 시스템과 관련된 것이라면, 미나의 죽음은 1980년대 거리의 대학생이었던 부모세대가 복권이나 부동산으로 부를 걸머쥐는 현실의 이율배반과 관련된다) 등은 차라리 사소하다. 문제는 더 근원적인 것인데, 그들의 비관과 냉소가 어떤 금기도 무시한 채(그들에게는 그 무엇도 성역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무차별적으로 난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세계를 정초해온 것에 대한 우리의 한줌의 기대마저 독설의 대상이 되는 장면.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자유란 지난 시대의 낭만적 신화에 불과하다. 수정은 그런 종류의 자유를 믿지 않는다. 그녀가 믿는 자유란 남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독자적인 노선을 믿지 않는다. 희망이란 집단 속으로 - 좀더 핵심적인 집단 속으로 - 매몰되어 융합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것들 - 대안이란 패배자들의 위안에 불과하다,고 수정은 믿는다.”(김사과, 『미나』)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한 시대를 써나갔던 단어들, ‘자유, 희망, 대안’과 같은 그 말들이 재정의되는 장면이다. 그들이 비관하고 재정의하는 말들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당위와 신념에 의해 추동되어온 지난 세기 전체의 언어에 대한 회의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분명 역사의 종말론의 일종이다. 가령, 20세기가 시작하기 직전, ‘진보란 유토피아의 실현이다’라고 오스카 와일드가 호기롭게 낙관했을 때, 그것은 그 시대인들의 기대와 낙관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말이었음에 틀림없다. 파시즘과 냉전의 압제 속에서도 블로흐가 “당신이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이고 온전한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라. 당신이 가진 이성의 능력을 과감하게 이용하라. 세상이 나의 편이라고 생각하라”(『희망의 원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분명 20세기 내내 인류가 믿어온 희망을 고무시키는 표현이었다. 또한 『미나』에서 지목하듯, 한국적 맥락에서의 ‘자유, 희망’과 같은 말들 역시 우리의 특정 역사 속 특정 세대에 의해 간신히 쟁취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 오염되어버렸다고 해도, 이 말들은 현재까지의 세계를 차악으로나마 유지하게끔 지탱해온 것임이 분명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말들이 결코 특정 세대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이 소설은 통째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셈이다. 이들은 한 시절의 집단적 기획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나날이 지독해지고 고약해지는 세계 속에서 그들은 의무감도 자존심도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 자체의 문제이자, 이 소설이 제기하는 중대한 문제들이기도 하다.

이 막다른 곳, 속수무책의 상황 속에서의 분노는, 윤이형의 소설에서처럼 아예 세계를 몰락시켜버리거나, 인간 아닌 다른 종(기계, 동물, 변종 인간)을 주인공 삼아 세계를 재구성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큰 늑대 파랑」(『창작과비평』, 2007 겨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세계의 멸망이 우리 스스로에게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간다는 것은, 괴물 혹은 몰락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것은 그들 세대의 후일담이며, 『미나』의 문제와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좀비가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라고 자문한다. 그리고 이어 그들은 스스로들의 10년이 애초의 기대와 어긋났다는 것에 대해 회의하고 절망한다. ‘거리의 정치’와 ‘골방의 취향’이 맞바꿔지던 1990년대 중반 즈음을 환기시키는 그 리얼리티는, 곧 그들의 현재가 파국으로 치닫는 기원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이미 타락한 이 세계의 일원이 되어버린다. 그 가파른 추락과 절망과 분노는 소설 속에서 이 세계의 파국을 상상해도 될 충분한 이유로 작동한다. 어쩌면 이들 몰락과 파국의 서사는 우리가 묵과하거나 억압해온 것들의 귀환일지도 모른다. 즉, 자유, 진보, 인간, 희망 등의 계열어들이 빚어내는 어떤 내러티브가, 이 세계와 우리를 내내 추동해왔다는 것에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신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희망의 서사가 언제나 아이러니(‘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수사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이들은 심각하게 문제제기 중이다. 이 근원적 절망과 비관 하에서 금기나 억압은 문제되지 않는다. 반복되는 절망과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을 세계, 그 상황 속에서의 무기력은, 이전 시대의 내러티브가 눌러온 우리 안의 불온함을 부추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마지노선마저 후퇴하는 자리에 지금 이들의 서사가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희망도 절망도 일단은 유보해두자. 묵시록, 종말론 서사의 발생론이 잿빛이라고 해서, 이 서사 자체를 잿빛으로 바라볼 일은 아닌 것이다.


3. 리셋(reset)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잠깐 우회로를 택해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듀나가 소설을 쓴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척 하려는 이가 많다. 식별할 아이덴티티가 분명치 않아서일까, 혹은 온전히 ‘우리’(예컨대 제도권 문단)라는 범위의 아이덴티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여겨서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여하간 듀나는 늘 소설을 써오기도 했지만, 소위 말하는 장르문학적인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기에, 우리는 그의 소설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문학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쌍관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본격문학을 정의할 때 겪는 난처함은, 장르문학이라는 대타항을 떠올릴 때 오히려 간명하게 정리가 되어버린다는 것. 즉, 인간도, 현재의 시간도 아닌 것을 다루는 이야기에 대한 예외적 장소가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그 예외의 장소는 우리의 미학적 공준들을 안착시키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던 것은 아닌가.

SF나 판타지 같은 장르문학의 시공간과 주인공에만 한정해서 생각을 해본다면, 이내 우리는 근대미학(문학)의 원리라고 믿어오고 통용해온 리얼리즘(사실주의)의 원리가 얼마나 견고하고, 그만큼 억압적일 수도 있는지 알게 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SF의 시공간은 언제나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말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리얼리티란 어찌 보면 협소한 것이어서 아주 범박하게 말해 시공간적 ‘현재, 이곳(지금 여기)’라고 하는 곳을 지향해야 하고 그곳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상황’과 ‘전형적으로 나타날 법한 구조’ 속에서 리얼리티를 이야기하듯 언제나 그것은 ‘지금 여기’라고 하는 시공간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반면 SF나 판타지 등의 장르는 아예 이 세계의 시공간과는 다른 룰을 갖고 있는 세계를 상정(인정)하고 있는 탓(토도로프 식으로 말해 ‘망설임’을 불러일으키는)에 이것은 다른 장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같은 미학적 룰을 공유할 수 없다는 이유가 문학의 구분을 강화했을 것이다. 한동안 젊은 작가들의 공중부양의 상상력에 우려를 표하면서 그것이 땅과 흙에서 기인하기를 요망하는 목소리들 역시 이런 사정을 감추고 있었을 터였다.

아무튼, 듀나의 소설들은 분명 장르문학적 정체성을 갖고 있고, 그의 소설들은 읽히기는 할지언정 제대로 비평된 바는 없다. 비평할 필요가 없는 소설이기도 하면서(이것은 폄훼의 의미가 아니다), 제도권 비평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소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시록과 종말론의 서사를 생각할 때 이제 필연적으로 이 장벽들, 혹은 미학적 차이를 이유로 문학을 갈라온 관습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묵시록과 종말론의 서사가, 공교롭게도 우리의 세계를 지탱해오고 (근대적 의미의) 문학을 지탱해온 토대에 대한 회의와 맞물려 있다고 할 때, 자연스레 그것은 근대미학(문학)을 주도한 원리로서의 리얼리티, 리얼리즘 역시 느슨해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편혜영이 그의 소설들에서 캐릭터 없는 주인공들을 등장시킬 때, 박민규의 소설들이 우주와 교신을 시작했을 때, 이미 환상(fantasy)이나 상상력이라는 용어만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늘 함께 존재해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황정은이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문학동네, 2008)에서처럼, 고양이를 닮은 동물이라고만 추측되는 존재를 등장시키고(「곡도와 살고 있다」), 아버지와 모자를 바꿔치기하고(「모자」), 같이 살던 이를 오뚝이로 변신시켰을 때(「오뚝이와 지빠귀」), 그리고 윤이형의 소설들이 애초부터 그 경계에 대한 금기를 어기면서 기계, 변종인간, 동물들에게 주인공의 위상을 부여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묵시록의 형식적 조건은 갖춰져 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 듀나가 『용의 이』(북스피어, 2008)라는 소설집에서 내내 세계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새 세계의 창조자로 등극하는 장면들은 사뭇 인상적이다. 그의 이전 소설들을 기억한다면, 그가 얼마나 일관되게 명백한 안티 휴머니즘의 노선을 걷고 있었는지 이내 떠올릴 수 있다. 거기에는 인간이 하나의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식의, 휴머니즘의 기본 전제에 반(反)할 만한 메시지들이 있었다. 일례로 인간복제를 소재로 한 「무궁동(無窮動)」(『태평양 횡단 특급』, 문학과지성사, 2002)에서는 본래 인간과 복제되는 인간 사이의 어떤 구분도 무의미하게 그려진 바 있다. 생명의 기원과 결과는 서로 뒤얽혀 있다. 원본과 복제 사이의 구분이 사라진 시대,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는 낯설 것도 없지만, 그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일종의 성역을 직접 건드리게 될 때 우리는 불편해진다. 비슷한 소재(인간 복제)를 다룬 바 있던 작가들이 여전히 본질주의를 근거로 한 정체성과 휴머니티로 귀결되었던 것(임영태, 『여기부터 천국입니다』, 문이당 2005/ 박형서, 「날개」, 『자정의 픽션』, 문학과지성사 2006)과는 명백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이다. 듀나의 소설은 처음부터 유물론적인, 과학결정론적인 시각에서 출발한다. 본질적인 정체성, 진정한 인간, 휴머니티 등은 이미 폐기되어 있었다. (사실 이 점이야말로 장르문학에 대해 우리가 갖는 불편함의 무의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듀나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확실히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며, ‘생물학적 종’의 하나일 뿐이었다.

『용의 이』는 아예 세계 몰락 자체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 소설들이 2008년의 시작과 함께 등장했다는 것도 우연으로 볼 일은 아니다.(속류 문학사회학을 연상시키는 사족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덧붙이자면, 2008년 내내 우리가 겪고 있는 리얼리티는, 승화를 모르는 소설의 분노들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바가 있다) 듀나는, 윤이형과 김사과가 보여준 이 세계에 대한 환멸과 절망과 분노에서 한 걸음 나아가, 아예 이 세계를 멸망시켜버린다. 그리고 스스로가 창조자, 신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거울 너머로 넘어가다」에서도 주인공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악덕을 환기시키면서, 박탈당한 자신의 고향을 새롭게 건설하려고 한다. 표제작 「용의 이」에서 주인공은 모험이 일단락되었을 때, 자신의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령과 함께, 혼자서’ 행성에 남는 선택을 한다. 인간이라든지 고향이 아니라, 유령이나 폐허의 잔해 위에서 그는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이처럼 몰락과 파멸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은 결코 초월적 구원의 유토피아 상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휴머니즘에 기반한 몰락-재생의 순환 서사도 아니다. 다른 행성을 개척하거나, 유령과 함께 혼자 살게 될 뿐이라도, 지금 이곳과는 영영 결별하고 아예 스스로가 신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버리겠다는 것. 이것은 곧 누구도 날것으로 보여준 바 없는 리셋(reset)의 상상력이다.

다시 윤이형의 소설들로 넘어오자면, 그는 듀나의 과감한 선택과 달리 양가적인 심정과 분열을 숨기지 않는다. 그의 소설들에서도 재앙, 핵전쟁, 멸망, 종말 이후, 다른 세계 등은 예의 그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더 의미심장하게 볼 것은 그의 소설들이, 듀나가 미련 없이 건너뛰어 버린 그 강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아야 할 당위성을 가르치는 세계’에 대한 냉소와, ‘멸종된 아리엘 사슴을 찾는 몽상가’에 대한 연민을 동시에(「마지막 아이들의 도시」, 『작가세계』2007 가을) 갖고 있다. 그는 ‘내가 가진 밑천이라고는 인간에 대한 경멸뿐이다’라는 고백과, ‘경멸만으로 가득한 글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자책을 동시에(「아이반」, 『내일을 위한 작가』, 2007 여름) 갖고 있다. 그의 소설들은 이처럼 ‘냉소와 연민’, ‘경멸과 자책’ 사이의 양가성을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황금 네르파」(『판타스틱』2008.6)에서처럼 인간은 악의 기원이자 지구 멸망의 원인 제공자이고, 「두드리는 고양이」(『문학사상』2008.7)에서처럼 인간은 무자비하고 오만한 만물의 영장일 따름이지만, 그는 그 인간과 그들의 세계를 향해 쉽게 삭제(delete) 키를 누르지는 못하고 있다. 「스카이워커」(『문학동네』2008 여름)에서는 이 양가성이 극대화되면서 어느 한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는 듯싶다. 그렇지만, 그것이 듀나의 소설들처럼 과감한 리셋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하다. 그의 소설들이 정확히 김사과 소설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듀나 소설의 시니컬한 망각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현재 묵시록 서사들의 지도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도는 우리가 가야할 곳까지 표시(지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단히 견제해야 할 것은, 도래할 시간들을 다시 목적론적으로 정초하고자 하는 의식 혹은 무의식이다.


4.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명백한 묵시록 이전부터, 이 세계에 대한 절망과 기대할 것 없음에 대해서는 누누이 발설된 바가 있다. 아우슈비츠와 현재가 겹쳐지거나, 9.11과 전쟁과 문명과 야만이 빈번하게 교차될 때, 그리고 나아가 “나는 구원 혹은 치유와 같은 말들을 믿지 않는다. 얼마나 많이 속아왔던가. 이제는 아니다. 무엇도 아니다.” (한유주, 「그리고 음악」, 『달로』, 2006)라고 할 때 당시 그것은 얼마나 생경하게 여겨졌던가. 그것이 구체적인 소설의 육체를 입고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는 그저 관념소설의 틀 안에서만 그것을 읽었던 적은 없었던가. 그러나 프레임을 달리 해보면 어떨까. 한유주의 소설에서 ‘전방위적 사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죽음으로 가득 찬 세계’(「베를린·북극·꿈」), ‘야만적인 시대’(「그리고 음악」), ‘지금 이곳이 지옥’(「지옥은 어디일까」)과 같은 이미지들이 반복될 때, 그것은 단지 주인공 혹은 화자의 과도한 예민함이나 독아론에 다름 아닌 것이었을까. 아니면 20세기 중후반부터 지금에까지 내내 진행되고 있는 어떤 집단적 절망과 회의, 그리고 누적된 분노의 표출이었던 것일까. 다음 두 대목을 나란히 두고 읽어보자.

“실체 없는 거대계획에 포섭된 것일까요.(……) 나는 그제야 그 계획이 강경하고 명확한 하나의 이름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름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졌던 많은 이름들을 버려야 했던 것입니다.”(한유주, 「세이렌 99」, 『달로』, 문학과지성사 2006) / “그렇게 개별적으로 고립된 채 집단에 짓눌려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라 가장 고립되고 개별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며 미소 속에 눈을 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눈동자를 짓누르는 시스템의 미소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삶도 죽음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삶과 죽음이 도처에서 반복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을 서서히 질식시켜가고 있다.”(김사과, 『미나』, 창비, 2008)

‘실체 없는 거대계획’과 ‘시스템’. 그리고 ‘거대계획 하에서 우리가 가졌던 많은 이름들을 버려야 했던 것’과 ‘미소조차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미소라는 사실’. 지금 여기서 보게 되는 이 유사한 언어와 의미들은 지금 우리의 소설들이 몰락과 파국과 다른 세계의 거침없는 상상 등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어떤 심정적인 필연성을 지시하고 있다. 결국 윤이형의 소설에서 등장한 ‘좀비들’, ‘좀비화하는 세계’(「큰 늑대 파랑」)는, 이와 같은 ‘거대계획 속 개인들’(한유주, 「베를린·북극·꿈」)과 ‘시스템 속 개인들’(김사과, 『미나』)의 피하고 싶어했을 귀착점인 셈이다. 다시 인용의 마지막이다. “낡은 텔레비전을 틀면 우리는 없다. 어느 해안가에서 고래들이 자살한다. 초음파로 오염된 바다, 전 지구적 쓰레기들, 고래들은 귀를 막고 죽는다. 우리는 그 장면을 본다. 세계의 무게에서 우리와 죽은 고래들을 뺀 꼭 그만큼만이, 텔레비전 속에 존재한다.”(「베를린·북극·꿈」)

그러니까 묵시록은 이미 우리가 모르는 지구 저 너머에서, 텔레비전 속에서, 그리고 이미 우리의 소설 속에서 진행 중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지금 실감의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묵시록은 어쩌면 도리어 조금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20세기 중반 즈음부터 간헐적으로 세계를 풍미해온 묵시록으로 돌아가본다. 분명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 즈음까지 우리를 고무시키고 문명을 추동한 원리는 진보나 희망(어떤 의미에서건), 낙관, 속도, 운동, 생산력, 효율성 등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는 이 말들에 대해 절반씩의 심정을 갖고 있다. 과학의 진보는 인류의 진보와 일치하지 않음이 밝혀졌고, 오히려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되어갔다. 지난 시대의 프로젝트를 지지해온 진보나 자유나 인간과 같은 말들은, 이제 이전만큼 우리를 감화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혁명이나 희망과 같은 유토피아에의 기획 역시 점점 요원한 것이 되어갔는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세계가 나아지리라는 혹은 나아지게 하겠다는 의지의 낙관은 점점 지쳐간다. 전쟁과 기근의 소식은 끊이지 않고,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경험된다. 때로 우리는 그것을 관조의 대상으로 여기며 일말의 부채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자위하는 스스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파멸의 공포는 구체적이며, 빈번하게 유포되어 우리를 미혹케 한다.

20세기 중반부터 우리를 불편케 하고 심지어 지금 소설 버전으로 보게 되는 묵시록은, 어쩌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환기시켜주는 증거물인지도 모른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가?’라고 썼다. 앞의 두 구절에 대해 우리는 오랫동안 골몰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할 것은, 마지막 구절이다. 즉,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가 아니라, ‘우리는 어디로 향해 가는가’라는 구절 말이다.

왜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왜 휴머니즘마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고,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하는 것만으로는 세속적 묵시록의 폐쇄회로에서 우리를 영영 벗어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니체의 말을 떠올려본다. ‘그대들이 어디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을 앞으로 그대들의 명예로 삼아라!’(『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또 다른 목적(telos)과 기획에 대한 새로운 강박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삶은 목적과 기획 속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도래할' 혹은 언제나 '가능한' 무엇에 대한 '조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묵시록이 잿빛인 것도, 가혹해지는 것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것은 희망과 낙관과 인간과 고향을 형해화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기 위한 조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이 묵시록들은 이제 막 그 조건을 환기시키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1)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김사과와 듀나의 소설에 대해서는《컬처뉴스》 2008년 리뷰 코너에서 필자가 자세히 다룬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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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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