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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마주침, 그리고 이야기 - 윤성희 장편소설 『구경꾼』

  • 작성일 2010-10-22
  • 조회수 962

 

[기획/특집] 시와 소설로 읽는 2010년의 명장면들


우연의 마주침, 그리고 이야기


- 윤성희 장편소설 『구경꾼들』(문학동네, 2010)


- 정홍수 -



윤성희의 소설적 상상은 인간사의 사소한 길목에서 이야기를 찾고 발명하는 데 능하다. 대개의 소설에서라면 그런 길목은 더 긴요하게들 여겨지는 이야기의 대로를 따라 전진하느라 눈길이 닿기 힘든 곳이기도 한데, 이야기의 전진에 무심한 만큼 윤성희의 소설은 이야기의 크기와 우열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윤성희의 소설적 상상이 인물의 도덕적 우열을 가르는 쪽으로 향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윤성희의 소설에 갈등하고 다투는 인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싸움의 내용은 전혀 거창한 것이 아닐뿐더러 거기서 도덕의 상투를 선점하려는 위세나 허세를 찾기는 힘들다. 그리고 여기에 세상의 질서 혹은 인간사에 대한 윤성희 소설만의 고유한 이해가 있을 것이다.

신작 장편 『구경꾼들』(문학동네, 2010)을 예로 든다면, 그 이해는 ‘쓸쓸함’이라는 단어의 언저리에 주소를 두고 있는 듯하다. 소설 화자인 소년의 아버지는 결혼 전 어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면서 어린 시절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읽다 쓸쓸하다,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본 순간 단번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화자의 작은삼촌은 고교 육상대회 같은 관객이 별로 없는 경기를 보러 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포환던지기나 장애물 달리기를 보면 쓸쓸하다는 말을 하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지 알 것 같다고 삼촌은 생각했다”. 두 예에서 알 수 있듯,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에게 ‘쓸쓸함’은 성장의 정도와 무관한 즉각적으로 이해 가능한 정서다. 그것은 그들의 나날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고독’으로 바꾸어 불러도 될 이 쓸쓸함의 이야기는 유구하며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윤성희 소설의 쓸쓸함은, 모순된 표현이긴 하지만, 창이 있는 모나드의 세계라 할 만하다. 세상에 던져진 이상 모나드의 고립은 불가항력의 사태이고 얼마큼의 고독, 즉 쓸쓸함 역시 불가피하다.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이런 상황을 일찌감치 수긍한다. 그러나 체념하지는 않는데, 부단히 그 쓸쓸함을 견딜 만한 쓸쓸함으로 바꾸면서 그렇게 한다. 아마도 창 없는 모나드에 창이라 부를 만한 어떤 공간이 마련된다면, 이 변환의 노동이 일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노동의 시작은 창으로 물끄러미 건너편 모나드의 쓸쓸함을 바라보거나 ‘구경하는’ 일이며, 그 구경의 쓸쓸함을 견디는 일일 것이다. 종종 이 쓸쓸함은 윤성희의 소설에서 심심함과 구별할 수 없게 되는데, 가령 화자의 어린 아버지가 저녁을 짓는 할머니 곁에서 부엌 문지방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그렇다. 문지방에서 작은 구멍을 발견한 어린 아버지는 낮잠을 자고 있는 증조할머니의 머리에서 실핀을 뽑아 구멍에 넣는다. 실핀 끝에 나뭇밥이 묻어 나온다. 곱고 부드러운 나뭇밥을 만지다 엄마, 하고 부르지만 식구들 세끼 식사를 챙기는 게 성가신 어머니한테서는 지청구가 돌아온다. 어린 아버지는 쪼그리고 앉아서 구멍에서 벌레가 나오길 기다린다. 기다리다 지친 아버지는 구멍을 혀로 핥는데, 쓰다. 그 때 밥물이 끓어넘치고, 마당으로 나와 뱉은 아버지의 침은 자신의 그림자 안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 어린 시절의 기억 뒤에 아버지는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에서 쓸쓸하다, 라는 단어를 처음 본 이야기를 하며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사실 윤성희 소설은 심심함과 쓸쓸함이 몸을 바꾸는 이 기원의 풍경에서 좀처럼 멀리 가지 않는다. 고독과 결핍을 사회적 현실이나 실존의 층위에서 정색하고 심각하게 다루는 일이 없다. 사람들은 그저 공평하게 쓸쓸할 뿐이다. 그런데 윤성희 소설이 보기에 그 쓸쓸함은 공평하게 발화되고 있지 않다. 어떤 이야기들은 크고 요란하게 세상을 흘러다니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정작 이야기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윤성희 소설은 그런 사각의 이야기들을 찾아나서고 그런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 때 모나드의 창은 바라보면서 듣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연히도 윤성희 소설에서 그 이야기 찾기의 여정은 자주 탈중심적이고 비위계적인 리좀적 형상을 그리며 이야기의 꼬리를 물고 접속 변형된다.

 예컨대 증조할머니까지 아홉 명의 대식구가 이층집을 구해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소설은 그 집을 처음 지은 사람부터 그 곳에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전하고 집수리를 맡은 목수의 버릇까지 소상하게 들려 준다. 더구나 수리한 집 어딘가에 자신의 이름 초성 ‘ㅎㅇ’을 새겨넣는 목수의 버릇은 이 대목에서 이야기의 소임을 마치지 않는다. 훗날 이층 마룻장에서 처음 그 초성을 발견한 화자의 고모는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고 DJ는 ‘ㅅㅇ’과 ‘ㅇㅇ’을 발견한 또 다른 청취자들의 사연이 잇따르자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목수에게는 세 아들이 있고, 자라서 목수가 된 그 아들들은 아버지처럼 자기 이름을 새겨넣는다. 목수의 우연한 버릇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고모의 삶에서 계속 나타나고 증식한다. 고등학생 때 짝사랑했던 영어 선생님과 그 이후 고모가 사귄 여섯 명의 남자는 모두 이름에 같은 초성 두 개가 들어가고 고모는 그들 모두와 이별을 겪는다. 이것은 한 가지 예일 뿐, 『구경꾼들』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의 접합과 증식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의 생성 과정에서 윤성희 소설이 상당한 정도로 우연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서사의 구축, 인과율을 바탕으로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수렴되는 서사의 진행을 윤성희 소설이 외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한데, 윤성희 소설은 일탈과 우연의 마주침을 당당히 서사의 전면에 내세우면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존재가 아찔한 우연이듯이 세상 역시 근원적으로는 목적 없는 우연의 과정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론 윤성희의 소설은 이런 질문을 쓸쓸함을 둘러싼 이야기 너머로 확대할 생각이 없으며, 우연에 대한 속 깊은 승인을 쓸쓸함을 견디는 장삼이사의 세속적 이야기 속으로 부지런히 숨길 뿐이다.

『구경꾼들』에서 화자의 큰삼촌은 병원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다 옥상에서 떨어져 내린 사람에게 깔려 죽음을 맞는다. 전신 화상을 입고 입원해 있던 여인이 옥상에서 자살하기까지 윤성희 소설 『구경꾼들』은 그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 수많은 갈림길들을 탐사하지만 우연적인 순간의 마주침은 너무나 정교해서 여인의 자살과 큰삼촌의 죽음은 필연처럼 세상에 도착한다. 큰삼촌의 죽음 뒤, 소설화자 ‘나’는 큰삼촌이 마지막으로 서서 하늘을 보았던 장소로 간다. 언젠가 큰삼촌과 함께 바닥에 귀를 댄 채 마당에 엎드렸던 것처럼 ‘나’는 병원 마당 바닥에 귀를 댄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 위에 떨어진 단추 하나를 줍고 그 순간 우연히 굴러온 병뚜껑도 함께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 큰삼촌의 책상서랍을 열 때마다 단추와 병뚜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쓸쓸한 우연의 세상을 살아가는 법인데, 큰삼촌의 죽음을 두고 외할머니가 할머니를 위로하며 건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는 거예요”라는 말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이 기억하기는 “큰삼촌이 얼마나 늦게 걸음을 걷기 시작했는지” 잊지 않는 일인 것처럼, 결국 이야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며,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구경꾼들』에서 죽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는다. 그렇게 해서 소설의 후반에 이르면 여덟 명의 가족 중 절반이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윤성희 소설 『구경꾼들』은 그 와중에도 부지런히 세상사의 우연한 마주침을 기록하고 그 이야기들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인다. 물론 떠난 가족을 둘러싼 작은 오해의 교정과 뒤늦은 깨달음, 자책의 순간들도 또 다른 이야기들의 다발을 이룬다. 기억하기는 종종 중단되지만 이야기는 계속되고 그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서 기억은 다른 세목들을 가지고 다시 찾아온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 심각한 질문도, 근사한 해답도 없는 이야기. 세상에 대한 비판도, 분노도, 원망도 없는 이야기. 그저 눈앞의 쓸쓸함과 동행하는 이야기. 그런데도 윤성희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냥 고개가 끄덕여지고 마음이 환해진다. 소설에 대한 규범적인 요구는 웬만큼 내려놓고 그저 이만큼이면 좋지 않나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비밀이 나도 궁금하다. 아마 나도 얼마큼은 쓸쓸한 모양이다.


《문장웹진 11월호》

정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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