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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압생트주와 서울의 포도주

  • 작성일 2010-11-03
  • 조회수 1,113


[예술을 위하여_6 / 마지막 회]


파리의 압생트주와 서울의 포도주


김경미



10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식사에 곁들여 포도주를 마셨다. 음악 전문가께서 가져온 칠레산의 최고급 와인이었다. 맛은 좋았지만 가능한 최소한으로 마셨다. 포도주만 마시면 항상 두통이 일어서다. 내게 포도주를 마시는 일은 포도주만 빼면 다 좋다. 작가는 참 좋은 직업이다, 글만 안 쓸 수 있다면, 식인 거다. 사소한 주변 부속품으로 중요한 핵심을 누리려는 허황에의 경고나 풍자 같기도 한 ‘불화’다.
 
음악과 음식에 대한 얘기들이 오가는 동안 나는 줄곧 고흐의 포도주와 압생트주를 떠올렸다. 피에르 푸케와 마리튼 드 보르드는 『술의 역사』에 썼다. “반 고흐는 가끔씩 그의 붓을 포도주에 적심으로써 근심거리를 환한 태양같이 만들 수 있었다.”
 
생전에 고흐가 자주 마셨던 술은 압생트주였다. 압생트주는 압생트라는 식물을 으깨어서 만든 초록색의 독주란다. 값싼 독주여서 서민층이 즐겨 찾았고 그래서 19세기 파리의 저녁 공기에는 언제나 압생트 냄새가 떠돌았다고도 한다. 오래전에 파리 여행을 한 적이 있지만 압생트는 마시지 못했다. 압생트를 안내해 줄 만한 파리 유학생이었던 후배 시인은 마침 내가 간 다음날 서울로 잠시 귀국해야 했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침대 옆자리를 내 준 친구는 만삭의 독신 임산부였다(아래글 ‘남쪽나라 십자성은’에 등장하는 친구다). 평소에도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체질에다 곧 산통이라도 시작될 듯한 친구에게 압생트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당시 서울 사람에게는 압생트보다 포도주 마실 기회가 더 귀했다.
 
가난한 고흐에게도 포도주 마실 기회는 압생트 마실 기회보다 훨씬 적었다. 포도주가 더 비쌌으니까. 그런 포도주에다 가끔씩 붓을 적셨다는 건 예술의 도구에게 더 나은 걸 먹이고 양보했다는, 예술을 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깃든 예술에게 최상의 것을 주려 했다는 뜻이리라. 혹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붓에게 취기를 유도해서라도 생각 속의 그림을 그려내려 했다는 뜻이던가. 아니면 그가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뜻의 문학적인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구절과 상관없이 고흐의 그림에의 애정과 몰두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바닥난 돈과 균형을 잃어 가는 정신 속에서도 프로방스의 태양빛처럼 강렬하고 환한 노란색을 재현해 내려고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의 불행한 인생과 열정과 광기에 대해서는 거의 다 안다.
 
그러니 고흐에 대한 글은 읽기에도 쓰기에도 사실 식상감부터 든다. 그런데도 그 날 포도주를 조심스럽게 마시면서 돌아가 고흐 얘기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고흐가 생전에 주고받았던 편지를 묶은 서한집을 하도 여러 권 하도 여러 번 읽어서 더는 새로운 내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어느 글에선가 고흐가 여동생인 빌헬미나에게 보낸 편지 속의 한 구절을 보게 됐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고 있어”라는 구절이었다. 그 많은 고흐에의 독서에서 이상하게 본 기억이 없거나 잊혀진 구절이었는데 ‘더럽고’에서 전율이 일었다. 현실 속에서 시가 참으로 더러운 장르라고, 예술이 참 더러운 일이라고 실망하던 때였던 걸까. 그의 편지나 전기에서 봤던 미술에의 모든 열정과 치열함이 다 ‘더럽고’라는 입구는 작지만 입 아래 진폭은 큰 호리병 속으로 휘잡혀 들어가는 듯했다. 아니다. ‘더럽고’라는 그 작은 호리병에서 그의 태풍 같은 불행과 절망이, 그의 처절한 일생과 예술이 온 세상을 삼킬 듯 저 밀밭처럼, 까마귀떼처럼 솟구쳐 나오는 듯했다. 고흐의 작품의 비결이 바로 그 한 단어 ‘더럽고’에 있는 듯했다. 아니다. 그 한 단어보다 그 단어가 거느린 조금 뒤쪽의 한 구절 “……하지만 나는 행복하단다”에 있었다. ‘행복’이란 단어에서 행복을 느낀 건 태어나 거의 처음이었다.
 
가끔 그가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 속에 들어가 앉아 본다. 내가 좋아하는 진노랑으로 가득 찬 카페의 벽과 환한 가로등,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웨이터와 밤의 포름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야외 테라스의 한 자리에 가서 앉는 것이다. 밤하늘엔 별들이 작은 꽃뭉치처럼 떠 있다. 그 카페 드 라르카스드 건물에 하루 1프랑씩 주고 1888년 5월에서 9월까지 하숙해 살던 고흐가 그 별들을 보다 잘 그리기 위해 모자의 차양에 양초를 끼워넣고 그림을 그린다. 사람들은 그가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쑤군댄다. 하지만 고흐는 별들을 그리면서 빌헬미나에게, 테오에게 또 편지를 쓴다. “나는 검은색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밤을 그렸단다. 아름다운 푸른색과 보라색, 초록색만 사용해 그렸지. 밤에 별을 찍어 넣을 때는 정말 즐거웠단다.”
 
다시 프랑스를 여행한다면 그건 순전히 압생트와 고흐의 카페 테라스와 해바라기와 밀밭을 위해서다. 그 때까지 시를 버리지 않고 있다면 나는 그 카페 테라스에 실제로 앉아 아마 생각할 거다. “나는 검은색은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밤을 그려내는 더럽고 힘든 일을 아직도 하고 있단다.”
 
이탈리아 음식점을 나오니 온갖 가면을 쓰거나 갖가지 망토를 두른 청춘남녀들로 거리가 인산인해다. 할로윈데이를 즐기는 인파들인 거다. 놀라웠지만 아무런 비판도 감탄도 하지 않으면서 그 사이를 지나쳐 일행들을 따라 <술파는 꽃집> - 꽃파는 술집이었나 - 이란 떠들썩한 젊은이들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김종삼의 시 한 구절을 생각하면서였다. “나는 이 세상에 계속해 온 참상을 보려고 온 사람이 아니다.”(유고시 <무제> 중에서)
김종삼도 고흐도 참상만 보고 가지도, 겪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종삼은 “한평 남짓한 자그만 카셋트 점포에서/ 핏셔 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의 보리수가/ 찬란하게 흘러나”(시 <그럭저럭> 중에서)오는 자그마한 점포가 있어서, 고흐는 밤하늘에 별을 그릴 수 있어서 “……하지만 나는 행복하단다” 했을 거다. 나도 그들이 있어서 행복했고 행복하다. 


《문장웹진 11월호》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크뢸러 뮬러 뮤지엄. 네덜란드>


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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