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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프루스트 : 목소리, 숨소리 그리고 음악

  • 작성일 2011-02-01
  • 조회수 1,510

2-1 

[음악의 순간과 언어의 떨림]

 

 

M. 프루스트 : 목소리, 숨소리 그리고 음악

 

김진영(철학자)

 

 

 

 

 

오랜만에 차를 가지고 외출한다. 너무 추워서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쩐 일인지 몸이 으슬으슬하다. 내부순환도로는 끝없는 정체다. 지루해서 카오디오 버튼을 누른다. 언제부터 그 안에 들어 있었는지 모를 미샤 마이스키. 그리고 〈재클린의 눈물(Les larmes de Jacqueline)〉. 첼로의 선율도, 차들의 행렬도, 한기가 도는 몸도 마음도 느리고 낮은 Em를 따라간다. 잠깐 재클린 뒤 프레(J. M. Du Pre)를 생각한다. 천재의 삶을 살다가 몸이 굳어 가는 병으로 쓸쓸히 죽어야 했던 가엾은 첼리스트. 나중에는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는데 그 많은 눈물들은 그러면 다 어디로 갔을까. 돌아와서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일찍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목까지 이불을 끌어 덮어도 몸은 무겁고 춥다. 그래서일까. 새벽녘에 꿈을 꾸었다. 옛 집이었다.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내 방이었다. 대학원 시절일까, 아직 청년인 나는 책을 보는 중이었다. 그 때 조용히 문이 열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가 열린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는 울상이었다. 구겨지고 뭔가가 묻은 휜 천을 손에 들고 있었다. 왜 그래, 할머니? 나는 물었다. 할머니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어쩌냐, 그게 다시 나오는구나…….

 

J. M. Du Pre

J. M. Du Pre

 

깨어나 어둠 속에서 뒤척인다. 어둠이 과거가 된다. 다시 옛 집이 보인다. 대추나무가 있는 앞마당,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 꽃무늬 소파가 놓여 있는 거실이 보인다.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이에 사라진 사람들, 아직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언젠가 또 사라질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보인다. 등을 돌리고 거실 마루 위에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며 혼자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 너무 작고 말라서 오래된 인형 같은 할머니. 할머니가 문득 돌아본다. 그리고 웃지도 않으면서 인사한다. 얘야, 그동안 잘 있었니……. 

 

할머니를 추억하면 소리들이 들린다. 아침마다 선잠 속으로 들려오던 거실 마루를 쓸고 닦는 소리, 집을 잘 비우던 어머니 대신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던 소리, 여름날 마당의 화초들에게 물을 줄 때면 딸각 딸각 시멘트 바닥을 두드리던 지팡이 소리, 가끔씩 혼자 담배를 피울 때 푸른 연기에 섞이곤 하던 낮은 기침 소리……. 하지만 그 소리들 속에 할머니의 목소리는 없다. 그래도 애써 귀를 열고 달팽이관의 기억을 뒤지면 할머니의 목소리 대신 눈앞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 그건 할머니의 또렷한 말소리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그 말들의 끝을 지우는 목소리의 말없음 표다. 혹 엄한 할아버지나 특히 공손치 않은 며느리였던 어머니의 질타를 들을 때면 할머니는 몇 마디 맥 빠진 항의를 했어도 그 항의는 늘 마지막에 힘을 잃고 그 끝이 지워지곤 했다. 그리고 미처 말이 되지 못한 그 말들의 끝은 덧없이 입술만 움직이는 혼잣말 속으로, 지워지는 목소리의 말없음표 속으로 숨어 버리곤 했다. 그 들리지 않는 말없음표의 중얼거림 속에는 그런데 무슨 말들이 들어 있었을까?

 

할머니는 다섯 남매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육체는 한 번도 아이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다섯 아이를 자궁 밖으로 내어놓고 세상을 떠난 한 여인의 뒤를 이어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호적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미 자손이 충분했던 할아버지의 호적 안에서 할머니의 자궁은 자연스럽게 닫혀 버렸지만 그 자궁과 더불어 성대도 닫혀 버렸다. 엄격한 유교 전통의 장손 집에서 제 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에게 무슨 권력이 있었을까. 더구나 큰 아들은 벌써 결혼을 했고, 이미 가내의 권력을 승계했던, 게다가 남달리 극성스럽고 야박했던 큰며느리 앞에서 할머니는 무슨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그 흔한 전처 자식들과 계모 간의 반목은 없었다. 고부간의 갈등 같은 것도 없었다. 시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 큰며느리 앞에서,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자식들 앞에서, 할머니는 일찍이 목소리를 포기했다. 나중에, 아마도 어느 해 제삿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 말도 없이 얌전한 분이셨지.

 

그런데 목소리를 빼앗겼기 때문이었을까. 할머니는 평생 위통에 시달렸다. 그래도 할아버지 생전에는 때마다 남편이 약을 받아다 주었지만, 과부가 된 뒤에 할머니의 위장약은 뜨거운 설탕물이거나 그냥 참으며 견디는 인내가 거의 모두였다. 아마도 그 또한 대학원 시절이었을 것이다. 대추가 익기 시작했으니까 초가을이었고 오후였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긴 오수에서 막 깨어난 참이었다. 허기를 느끼고 할머니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안방 문을 여니까 할머니가 휜 요 위에 새우처럼 등을 말고 누워 있었다. 속이 쓰려 일어날 수가 없구나, 할머니는 무릎을 배에 붙이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다니던 병원으로 달려가서 한움큼 약을 지어왔다. 우리 장손이 할머니 생각을 얼마나 하는지 모른다우……. 이후 할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나의 선행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 가당찮은 효행을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건 그런 할머니의 자랑스러운 목소리 때문이 아니다. 그건 할머니의 숨소리 때문이다. 더운물과 약 한 봉지를 입에 털어넣은 할머니는 곧 잠이 들었다. 잠깐 책을 보다가 가만히 방문을 열어보았을 때 할머니는 가을날 오후의 잔광 속에서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숨소리가 들렸다. 깊고 고르고 부드러운 그 숨소리는 병들어 잠든 노인이 아니라 세상으로 도착한 지 얼마 안 되는 유아의 숨소리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아무런 애환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 젖무덤 사이에서 잠든 아이처럼 다만 편안과 안심으로 자기 안에 꼭 담겨 있는, 그 전에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할머니의 숨소리 혹은 목소리... 하지만 할머니의 그 목소리를 나는 그날 이후 다시 들어보지 못했다. 곧 먼 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어느 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아침 전화를 받았고, 돌아왔을 때 할머니의 기일은 벌써 몇 번이나 지나간 뒤였으니까. 그 가을날 오후 잠깐 귀를 기울여 훔쳐 들었던 할머니의 숨소리를 두 번 다시 기억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할머니는 수많은 작은 기억들과 함께 내 망각의 하데스 속에 침묵으로 묻혀 버렸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할머니는 그 깊은 망각과 침묵의 지층을 지나서 다시 내 꿈속으로 돌아온 걸까. 그것도 새로 하혈을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가는 여정은 잃어버린 목소리들을 찾아가는 여정인지 모른다. 특히 M. 프루스트의 경우는 그렇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안에서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책을 읽어 주는 어머니의 목소리, 가엾은 사랑을 고백하는 스완의 목소리, 거짓말하는 알베르틴의 목소리, 늙은 베르고트의 치매 걸린 목소리, 동성애자 샤를뤼스와 주피엥의 교태 어린 목소리,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을 야유하는 부엌데기 프랑수와즈의 목소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 많은 목소리들이 함께 부르는 언어의 합창이다. 그리고 그 합창 속에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런데 하나의 성부가 아니라 모든 성부로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다. 소나기가 내리면 열여섯 소녀처럼 정원으로 달려 나가는 할머니(‘아, 너무 좋아라!’), 매춘부 오데트에게 홀딱 빠진 스완을 비웃는 할머니(‘도대체 그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람!’), 하극상이 버릇이 된 프랑수와즈를 겁주는 할머니(‘그러면 다른 집으로 보내버리겠어!’), 어린 손자의 생일에 새빨간 표지의 연애 소설을 선물하는 할머니 (‘조르주 상드 정도가 뭐가 해롭담!’) - 하지만 어린 마르셀이 알고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엄한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어머니마저 냉정하게 응석을 받아 주지 않을 때, 그래서 천애 고아처럼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고독할 때, 선병질의 마마보이 마르셀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건 언제나 할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다(‘귀여운 나의 생쥐야,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니? 곧 달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렴...’). 바르트의 어머니가 또한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생 한 번도, 그건 안 된다, 라고 말해 본 적이 없는’ 목소리(R.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그러니까 죄와 회개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묻지도 않는, 오로지 위안과 구원만을 알고 있는 절대적 사랑의 목소리다.

 

마르셀은 사랑만을 알고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영원히 자기를 지켜 줄 구원 천사의 음성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천사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건 피조물의 목소리이고 그래서 고통의 비명이 되어야 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어느 날 샹젤리제 거리를 산책하던 할머니는 뇌졸중을 일으키고 마침내 임종의 침상에 눕는다. 임종의 침상은 프루스트에게 생명이 마감되는 장소가 아니다. 그 곳은 목소리가 무서운 고통의 비명으로 변하는 장소다.

 

M. Proust(Dead Mask)


M. Proust(Dead Mask)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몸을 활처럼 구부린 채 헐떡이고 있는 할머니, 아니 할머니의 머리털을 뒤집어쓰고 이불 속에 누운 한 마리의 짐승이 온몸을 흔들면서 뒹굴고 있었다. (……) 고통을 못 이기는 할머니는 몸부림을 치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그 몸부림과 비명은 이제 우리를 기억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몸짓이고 목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임종의 침상은 다만 목소리가 고통의 비명으로 변하는 장소만이 아니다. 그 곳은 동시에 목소리가 고통의 비명 밑에서 숨소리의 노래로 변하는 장소다.

 

“의사는 할머니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고 호흡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산소 기구를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 산소 공급과 모르핀이 만들어내는 이중 효과에 힘입어 할머니의 호흡은 이제 고통스럽게 그르렁거리면서 가슴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매끄러운 흐름에 실려서 빠르고 가볍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숨소리 밑에는 마치 바람이 갈대 피리 속에서 몰래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 어떤 노래가 들어 있었는데, 그 노래 속에는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과 더불어 오히려 해방된 듯, 이제는 아무것도 더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만이 알고 있는 고통과 행복이 섞여서 만들어내는 소리들이 섞여 있었다.”

 

숨소리의 노래는 그리고 끝나지 않는 음악이 된다.

 

“……산소가 쉭쉭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멈추었다. 하지만 몸속에서 겨우 빠져나오는 호흡 소리는 가볍게, 그러나 중간에서 막히면서, 다 끝나지도 않은 채 새롭게 시작하면서, 계속 이어져 나갔다. 의사는 다시 할머니의 맥박을 짚어 보았는데, 그 때 할머니의 호흡 소리는, 마치 다 말라 버린 개울 안으로 새로운 물길이 흘러 들어오는 것처럼, 새로운 노래가 되어서 중단되었던 악절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러자 한동안 끊어졌던 악절은 다른 선율로 바뀌어 살아나 점점 높아지면서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알겠는가? 죽어가는 할머니 스스로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이 마지막 호흡의 선율들은, 오래 압축되었다가 새어나오는 공기처럼, 그동안의 고통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채 갇혀 있다가, 이제 임종에 이르러 선율처럼 가볍게 흘러나오는 무한히 부드럽고 행복한 할머니의 마음들이 부르는 노래일지도 모른다는 걸. 할머니의 숨소리는 그동안 우리들에게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당신의 말들이 마음껏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고, 그 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창하고 자명한 의미로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음악도 끝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눈물을 닦고 할머니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산소 장치의 식식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의사가 침대에서 물러났다. 할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이상 M. 프루스트, 『게르망트 쪽으로 1』, 글쓴이 번역)

 

그러면 마침내 침묵만이 남는 걸까. 목소리와 숨소리도 멈추고 음악도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걸까. 하지만 마르셀은 일 년 뒤 다시 찾은 발벡에서 사라졌던 음악을 다시 만난다.

 

“……발벡을 다시 찾았던 첫날 저녁, 나는 갑자기 심장 장애를 일으켰다. 격렬한 아픔을 멈추게 하려고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허리를 구부리고 구두를 벗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 목구두의 단추에 손을 대는 순간, 나의 가슴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너무도 귀중한 어떤 현존감으로 충만해졌고, 그러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나는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고 말았다. 심장에 충격을 받은 나를 도와주려고 달려온 어떤 얼굴, 지금 내가 돌연한 기억의 고통 속에서 다시 만난 얼굴은, 어린 시절 발벡에 도착하던 첫날, 지금과 똑같이 내가 어려움에 빠지고 외로웠을 때, 걱정스러운 그러나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몸을 기울이고 나를 달래어 주었던 그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르셀은 비로소 깨닫는다. 어떤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아니 끝날 수 없다는 걸. 남은 사람의 기억이 놓아 주지 않으면, 죽은 사람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그 사람의 목소리와 숨소리도 침묵으로 지워지는 대신 사랑의 음악으로 영원히 흐른다는 걸. 그리고 마르셀은 또 깨닫는다. 그 음악은 오직 하나, 사랑의 고통이라는 회로를 통해서만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걸. 그러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어머니처럼.

 

“……구두를 벗다가 새롭게 알게 된 고통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말없이 먼 곳만 바라보던, 눈물도 없이 건조하고 메마른 어머니의 시선은, 프랑수와즈가 매정하다고 투덜대던 것과는 달리,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든 기쁨들이 어머니로부터 남김없이 떠나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머니는 마치 온몸이 굳어져서 그 무엇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는 조상(彫像)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조상 안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몸속에서 할머니가 어머니를 꼭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조금만 움직이거나 조금만 큰 소리를 내어도, 어머니를 꼭 붙들고 있는 할머니가 그만 떨어져나가고 말까 봐, 그렇게 할머니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까 봐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이상 M. 프루스트, 『소돔과 고모라 2』, 글쓴이 번역)

 

그러고 보면 요즈음 이유를 모르게 마음이 무겁고 몸이 아팠다. 그게 너무 일들에 치여서 그런 줄만 알았다. 싫지만 병원에도 가 보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건 우울 때문도 병 때문도 아니었다는 걸. 나는 까맣게 몰랐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할머니는 내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프루스트가 말하듯, ‘우리 몸속에 있지만 우리는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미지의 장소’에서 나와 함께 줄곧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내 안의 미지의 장소에 살면서 할머니는 그동안 내내 나를 바라보고 또 부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도 내가 듣지 못하고 돌아보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꿈속으로 나를 찾아온 건 아닐까. 하혈을 하면서, 그러니까 멈추지 않는 음악이 되어 흐르면서…….

 

《문장웹진 2월호》

 

 

M. Pro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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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26
바벨의 침묵

사유의 드로잉_제5회 바벨의 침묵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 교수) “신이 듣기를 원하는 유일한 인간의 언어, 라틴어를 상실한 비극적인 양들의 무리인 우리는 메에 하고 우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1) 논쟁과 관련해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내게는 몇 있다. 그중에 특히 내가 사회적으로 발언할 권리가 더 많아지고, 내 주장에 힘이 더 실리면 실릴수록 더 씁쓸하게 되살아나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요컨대 논쟁 당시에는 꽤 유창한 언변과 분명한 논리를 펴 논쟁 상대로부터 동의 내지는 항복을 받아냈으나, 결국 그 사람과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나중에 예상치 못하게 비판의 부메랑을 맞은 기억이다. 대체로 그런 기억 속에서 상대방은 내 의견에 반박하거나 항변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리를 마무리했을 뿐이다. 그래서 당시 나는 안일하게도 내 주장이 설득력 있게 그 사람에게 전달됐거니 생각했고, 나아가 어리석게도 서로 잠깐 불편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더 좋은 쪽으로 우리가 함께 가게 됐다고 기뻐했던 것 같다. 그것이 착각이자 오만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은 논쟁의 순간 정작 침묵함으로써 나를 공박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가장 실리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생 굽이굽이에서 깨달았다. 이를테면 침묵은 논쟁의 기술 중 매우 은밀한 힘을 가진 공격 무기였던 것이다.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2012년 12월 말 현재, 대한민국의 대중 미디어는 물론 개인 사용자를 기반으로 한 SNS에서 말들이 넘쳐난다. 그 말들의 양은 선거를 치르기 전 상태를 압도하지만, 내용은 그보다는 훨씬 단조롭다. 예컨대 당선자가 된 후보의 소감에서 시작해 당선 후 국민에게 보내는 첫 ‘메시지’, 유력 인사들의 축하 인사말과 당선자의 답사 등이 속속들이 전달되고 있다. 또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선거 성공담이 거듭거듭 매체를 통해 회자되고, 대한민국의 새 통치권자가 될 당선자에 대한 각계의 바람과 조언이 줄을 잇고 있다. 동시에 대통령 당선자를 둘러싼 그런 정치적인 말들과 비등한 양을 차지하는 말은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담론이다. 최종 투표율 75.8%로 1987년 직선제 시행 이후 계속 하락 추세를 보였던 투표율이 처음 반등했다는 사실에서부터, 투표율이 70%가 넘으면 야당에 유리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관성적 예측을 깨고 어떻게 여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범주상 비슷한 말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담론 중 특히 의미심장하고 주목할 자료가 있다. ‘방송 3사 출구조사’를 기초로 전체 유권자 중 투표에 참여한 75.8%를 지역·세대·직업·학력·소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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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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