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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바르트 : 스타카토, 레가토 그리고 사랑

  • 작성일 2011-03-02
  • 조회수 2,439

 

[음악의 떨림과 언어의 울림]

 

R. 바르트 : 스타카토, 레가토 그리고 사랑

 

김진영

 

 

 

 

 

오래만에 옛 제자들을 만난다. 몇 학기 지나쳐 간 비정규직 선생을 아주 모르는 사람이 안 되도록 때마다 기억해 주는 제자들은 고맙고도 고맙다. 이번에는 자주 만나던 홍대 앞이 아니라 종로 오가 외진 골목의 어느 허름한 술집이다. 찌개를 끓이고 매운 도토리묵과 여러 가지 전을 앞에 놓고 술을 마신다. 그런데 A는, 물론 평소에도 조금 그렇지만, 오늘은 너무 말이 많다. 하기야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수다꾼이 된다고 했던가(R. 바르트)? A는 은근한 핀잔을 받으면서도 사랑에 빠진 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지,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낭만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런데 사랑에 취해서 빛나는 A의 얼굴이 내게는 자꾸만 B의 얼굴과 겹쳐진다. 어느 날 찾아와서 함께 술을 마셨던 B는 그만 내 앞에서 사내답지 못하게 울고 말았었다. 헤어질 때 그는 오랫동안 못 뵐 것 같다고, 영화 촬영 팀을 따라서 지리산 근처로 간다고, 돌아오면 술을 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벌써 석 달이 훌쩍 지났건만 B는 소식이 없다. 그 사이 A는 다른 사랑을 찾아서 수다꾼이 되었는데, A를 잃어버리고 산으로 간 B는 아직도 그 산을 내려올 수 없는 걸까.

 

물론 청춘의 시절 내게도 그런 도취와 아픔의 시간이 있었다. 햇빛이 너무 좋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음악이 좋아서 잘 드나들던 카페가 있던 골목에서였다. 나는 햇빛을 등지고 들어서던 길이었고, 그 아이는 햇빛을 바라보며 골목을 나오는 중이었다. 이마 위에 손으로 챙을 만들어 얼굴을 가린 그늘 안에서 나는 그 아이의 시선과 부딪혔고 그 눈 속으로 추락했다. 만남은 겨울을 건너서 다음 해 겨울이 깊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걸……. 지나가듯 말하며 흘린 그 아이의 말없음표를 사랑의 고백으로 듣고 황홀한 불면이 어떤 것인지를 맛보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마도 나의 유아적인 사랑의 초조함, 사랑을 못견뎌하는 타고난 나의 습벽을 그 아이는 더는 참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눈을 맞으며 가등 밑에서 기다리고, 긴 편지를 쓰고, 어설픈 그리움의 노래를 만들어 보내는 일이 이어졌지만 그럴수록 소용이 없다는 사실만 확실해졌다. 어쩌면 그 즈음에는 나 자신도 그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상실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이었다. 갑자기 암흑 같은 잠에서 깨어나서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주먹으로 벽을 때리며 그 무엇인가를 향해서 외쳤다: 왜 사랑이 끊어져야 하는 거야! 왜 계속되면 안 되는 거야!

 

R. 바르트(Roland Barthes)는 젊은 날 성악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의 교사는 프랑스의 살롱 가곡을 프랑스적 에스프리로 승화시켰다는 바리톤 Ch. 팡제라(Charles Panzera)였다. 그러나 바르트가 팡제라에게서 배운 건 프랑스 살롱 부르주아의 품위 있는 우수라기보다 그 자신이 ‘신체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무엇, 그러니까 ‘관능적인 그 어떤 것’을 목소리 안에 담아내는 레가토(Regato)의 사용법이었다.

 

“……스물두 살 때 나는 팡제라에게서 노래 부르는 걸 배웠다. 병과 전쟁으로 곧 중단되고 말았던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는 팡제라의 목소리에 완전히 매혹당했다. (……) 그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중에는 모음들을 목소리로 다루는 방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끊어지는 자음들에게 부드러움을 수여하는 레가토의 사용법이었다. (……) 팡제라는 나에게 발음법이 아니라 발화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당시에 유행하던 발음법(Artikulation)을 팡제라는 지극히 혐오했다. ‘자음들을 아주 또렷하게 만들기’를 원칙으로 삼는 발음법은 목소리의 관능적인 그 무엇을 인위적으로 꼬여내려는 표현의 흉내일 뿐이며 결국 노래를 싸구려 드라마 배우처럼 히스테리의 몸짓으로 만들고 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화법(Aussprache)은 노래 속에서 소멸하는 그 어떤 것, 육체적인 그 무엇을 가슴이 아프도록 매혹적인 방식으로 빛나게 하는 성악법, 그러니까 목소리 안에서 음악적인 것, 관능적인 그 어떤 것이 끊어지지 않고 생성되도록 이어나가는 사랑의 성악법이었다. 그 사랑의 성악법이 팡제라에게는 레가토였고, 내가 그에게서 배운 건 다름 아닌 이 레가토의 사용법과 의미였다.”(R. 바르트, 『음악, 목소리, 언어』, 글쓴이 번역)

 

하지만 사랑의 레가토를 바르트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Ch. 팡제라만은 아니었다. 끊어지는 것들, 끊어져야만 하는 것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이어 가는 그 사랑의 레가토를 더 깊이 바르트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M. 프루스트, 아니 잠 못 자는 어린 마르셀에게 조르주 상드의 연애소설을 읽어 주는 프루스트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책을 읽어 가면서 자연스러운 부드러움과 달콤함을 문장들 안에 불어넣었다. 그러면 그 문장들은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를 위해서 써진 것처럼 어머니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미묘한 뉘앙스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 목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책을 읽어 주는 어머니의 목소리 안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울림이 있었는데 그 울림은 어머니가 혼자서 만들어내는 그런 울림이 아니라 처음부터 문장들 속에 잠재해 있던 바로 그 울림이어서, 마치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어머니가 그 울림을 문장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만 같았다. 동사형이 사용될 때 생기는 거친 단절을 끊어짐 없이 이어 주면서 모든 과거형 문장들을 부드럽고도 조용한 슬픔(die leise Trauer der Zaertlichkeit)으로 감싸이게 하는 것도, 또 혹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읽는 방식으로 음절들의 길이를 일부러 무시하면서 그 음절들에게 리듬을 부여하는 것도 어머니의 목소리 안에 들어 있는 그 울림이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 울림과 리듬에 감싸여서 흘러가는 문장들은 끝이 나야 하는데도 끝나는 일 없이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문장으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그 이어짐 속에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새로움도 특별함도 없는 평범한 문장들이 끊임없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생생한 문장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M. 프루스트, 『스완네 쪽으로』, 글쓴이 번역)

 

바르트는 평생 프루스트의 성실한 애독자였다. 바르트 스스로 말하듯 그와 프루스트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였고, 바르트의 글들 속에서는 프루스트의 냄새와 흔적들이 산재한다. 간텍스트성의 이론을 동원한다면, 바르트의 많은 글들은 프루스트 위에 또 한 번 써진 팔림프세스트 텍스트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에게 향하는 바르트의 지극한 경도가 텍스트들 사이에 발견되는 정신적 근친성 때문만은 아니다. 조금 무리해서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자면, 프루스트에 대한 바르트의 지극한 애정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보다 내밀한 친화력의 소산으로 읽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두 사람의 성적 정체성이다. 프루스트와 바르트는 다 같이 동성애자였다.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이 어머니와 맺고 있었던 내밀한 리비도적 관계다. 프루스트와 바르트가 지독한 마마보이들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어머니 편집증을 겹쳐 보면 만나는 부분들만큼이나 엇나가는 부분들이 또렷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쩌면 프루스트가 남긴 가장 짧을 수도 있는 문장으로 시작 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19세기 서구 문학이 거두어들인 방대한 기억의 대하소설을 알레고리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이 짧은 서두의 문장은 그래서 그 평범함 속에 비의를 감추고 있다. ‘오래 전부터’라는 시간 지시어도 마찬가지다. 연구들은 다양한 답들을 제시하지만, 프루스트의 어머니 편집증을 고려할 때, 이 ‘오래 전’은 무엇보다 두 가지 사건과 관련된다. 하나는 프로이트가 외디푸스 삼각형으로 설명하는 첫 번째 어머니 상실의 체험, 소위 ‘원초적 분리(primaere Trennung)’의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1905년 마담 잔 프루스트의 죽음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살롱들을 기웃거리며 고급 룸펜의 삶을 살아가던 프루스트는 어머니의 죽음 직후 침실의 네 벽을 코르크로 도배하고 ‘침대(잠자리)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침대 속에서 ‘무의지적 기억(memoire involontaire)’의 몽상 속으로 잠수한다. 무의지적 기억은, 그에 대한 철학적이고 문학이론적인 기억 담론들이 많이 있지만, 이 경우 어머니 상실에 대한 프루스트의 문학적 애도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애도작업은 매우 성공적이다. 무의지적 기억은, 할머니의 죽음이나 알베르틴과의 치명적인 연애의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모두가 상실의 아픔이 재회의 환희로 승화되는 엑스타지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이 기억의 사육제 혹은 성공적인 애도작업은 그런데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다시 프로이트를 기대어 말하자면, 그건 무엇보다 아버지의 존재가 강요하는 외디푸스 삼각형이라는 이름의 통과제의가 프루스트에게 일찍이 있었던 덕분이다. 외디푸스 삼각형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어머니에의 욕망을 배태시켜 마마보이를 키우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통과제의의 수련을 거쳐서 그 욕망을 승화시키는 심미적 주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프루스트는 분명 마마보이였지만 동시에 심미적 주체성을 지닌 어엿한 어른이었다. 그는 상실의 스타카토를 무의지적 기억의 레가토로 이을 수가 있었다. 그러면 바르트는 어떠했을까?

 

바르트는 유복자는 아니지만 유복자와 다르지 않았다. 채 한 살도 되지 않았을 때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가 독일군과의 해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이후 바르트는 스물다섯에 과부가 된 어머니와 평생을 함께 살았다. 이복동생 미셸은 나중에 결혼해서 분가를 했지만 동성애자였던 바르트는 한 번도 어머니와 별거한 적이 없었다. 바르트에게 외디푸스 통과제의는 면제되었고 어머니와의 탯줄도 물론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건 두 사람 사이의 탯줄을 지속적으로 이어주고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아버지의 부재뿐이었다면 바르트와 어머니 사이의 탯줄 또한 그토록 온전할 수는 없었는지 모른다. 그 부재가 오히려 상처가 되어 모자 사이의 애정도 덩달아 상처를 입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는 바르트에게 상처가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 문제를 바르트는 언젠가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나는 아버지라는 소음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아버지는 내게 늘 긍정적인 존재였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가 언제나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통해서 전해 들은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매개하는 아버지는 바르트에게 오히려 은혜였다. 바르트와 어머니 사이의 탯줄을 온전히 보존시켜 준 것도 이 매개된 아버지의 은혜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탯줄의 운명은 스타카토이고 그래서 결국 끊어질 수밖에 없다. 1976년 바르트는 그토록 욕망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의 기호학 교수가 되어 취임 강연을 했다. 그 때 강의실 맨 앞자리에 초대되어 앉아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 앙리에트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즈음 이미 생의 마지막 단계로 건너가 있었다. 1977년 10월 25일 앙리에트 벵제는 사망했다. 바르트는 혼자 남았다. 그는 갑자기 탯줄이 끊어진 63살의 늙은 아이였다. 바르트는 이 탯줄을 다시 이을 수 있었을까?

 

아도르노의 말을 따르자면, 우리가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많은 예술가들(이론가들)에게서는 ‘말년의 양식(Spaetstil)’이라는 게 존재한다. 생의 말기에 이르러 기존의 형식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이 말년의 양식 안에서는 이전의 작품들과 단호히 분절되는 특별한 무엇이 발견된다. 예컨대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의 경우, 평생 영웅적으로 지켜졌던 베토벤의 고전주의적 의지는, ‘마치 단단히 움켜쥐었던 주먹이 가만히 손을 펴는 것처럼(Th. 아도르노, 『베토벤의 말년의 양식』)’, 그 엄격함을 버리고 가볍고도 부드러운 열린 형식의 자유로운 선율로 방향을 바꾼다. 그런데 베토벤만 아니라 바르트에게서도 그런 말년의 특별한 징후들이 발견된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 강연부터 마지막 세미나 강의록인 『소설을 위한 준비들』까지, 그러니까 어머니의 죽음 전후에 바르트가 남긴 모든 텍스트들 안에서는 특별한 단어 하나가 늘 그 중심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비타 노바(Vita Nova)’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스물다섯 살 단테가 평생을 흠모해 왔던 베아트리체를 잃고 나서 그 애도 작업으로 썼던 『신생(新生)』의 라틴어 제목이기도 한 이 단어는 그런데 바르트에게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그 단어가 단테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끊어진 어머니와의 탯줄을 다시 이으려는 사랑의 프로테스트, 즉 레가토였을 것이다.

 

바르트의 레가토 작업은, 적어도 나의 관점으로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우선 ‘사진’이 있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2년 뒤에 써진 『카메라 루시다』는 누구나 알듯이 사진 이미지의 인덱스적 특성을 통해서 잃어버린 어머니와 다시 만나는 환유적 엑스타지, 즉 영상의 도움으로 성공하는 애도작업에 대한 에세이다. 하지만 이 사진 에세이가 어머니에 대한 레가토 작업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풍크툼(Punktum)이라는 바르트적 개념의 이중적 의미를 통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진 이미지만이 줄 수 있는 비의적 체험을 지시하기 위해 바르트가 라틴어에서 빌려 온 풍크툼은 그 어원이 말하듯 구멍 뚫림, 그 뚫림으로 상처남, 즉 돌연한 끊어짐을 뜻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풍크툼을 ‘그 때 거기서 그랬음(that has been so)’이라는 사진의 인덱스적 기록성과 접속시켜 그 끊어짐의 경험을 죽은 어머니가 재림하는 환희의 경험으로 바꾼다. 풍크툼은 말하자면 끊어짐의 스타카토를 이어짐의 레가토로 바꾸는 팡제라적 발화법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으로 ‘강의’가 있다. 어머니를 잃은 뒤에도 바르트는 열정적으로 강연과 집필을 하고 특히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매 학기 새로운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1978년에는 〈중성(Das Neutrum)〉, 1979년에는 〈소설을 위한 준비들(Die Vorbereitungen des Romans)〉이 세 학기에 걸쳐 개최된다. 그리고 결국 열리지는 못했지만, 바르트는 다음 강의로 스탕달에 관한 세미나를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스탕달 세미나가 구체적으로 어떤 테마를 다루게 될 예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이미 바르트는 자신의 마지막 글이 되는 스탕달에 대한 에세이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에세이의 제목은 〈스탕달 :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는 왜 항상 실패하는가〉였다. 마지막으로 ‘젊은이와의 사랑’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던 시기에도, 또 어머니를 잃고 실의에 잠겨 있던 중에도, 바르트는 젊은이들을 만나기 위해 저녁 외출을 하곤 했다. 그런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도덕적으로 자책하는 기록들도 남아 있지만 그러한 성적 습벽은 중단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바르트는 그런 저녁의 외출을 스스로 멈출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젊은이들과의 사랑은 성적 쾌락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끊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의 레가토를 바르트에게 육체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르트는 사진 속에서 어머니를 재회한다.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고 세미나를 이끈다. 파리에서 모로코에서 젊은이들과 만나는 일도 여전히 계속된다. 어머니 상실은 아직 승화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극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애도작업도, 사랑의 레가토도 차츰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1979년 9월 17일 『파리의 저녁 만남』은 이렇게 끝난다:

 

“1979년 9월 17일.

 

일요일인 어제, 올리비에 G가 점심을 먹으러 왔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부터 그의 꺼리는 태도, 혹은 거리감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의 몸은 아주 멀리 있었다. 절망감 같은 것이 나를 휘감았다. 울고 싶었다. (……) 그가 부탁해서 잠시 그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정말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그의 양순하고 여린 얼굴은 긴 머리카락 때문에 더 부드러워 보인다. 피아노를 연주한 다음, 일할 것이 있다는 말로 그를 돌려보냈다. 이젠 끝났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가 끝나버린 것이다. 젊은이와의 사랑이 끝난 것이다.”(R. 바르트, 『작은 사건들』, 김주경 옮김)

 

젊은이들과의 사랑이 끝난 것처럼 끊어진 어머니와의 탯줄도 점점 더 깊은 상처가 된다. 1977년부터 사망 반년 전인 79년 가을까지 바르트는 어머니만을 위한 일기를 썼다. 세이유 출판사에서 『애도 일기』라는 제목으로 최근 발간된 이 일기 안에는 상실의 심연 속으로 나날이 익사당하는 바르트의 참혹한 얼굴이 들어 있다. 치유할 수 없는 멜랑콜리로 가득한 그 얼굴은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연애를 하는 바르트의 얼굴이 사실은 모두가 마스크였음을 아프게 깨닫게 만든다. 그 안에는 이런 구절들이 들어 있다: “나는 슬픔 그 자체다”, “나는 오늘도 혼자 운다”,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

 

1980년 2월 25일 바르트는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미테랑이 주최한 오찬 모임을 마치고 나오다가 작은 트럭에 치인다. 사고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바르트는 한 달 뒤 사망한다.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질식사’로 기록된다. 하지만 바르트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사람들은 후일담을 전한다: 바르트는 완전히 절망해 있었다고, 도무지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나중에 담담의사도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환자가 심리적으로 치료를 거부하면 아무리 작은 사고도 결국은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

 

그러면 바르트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걸까. 끊어진 탯줄을 사랑의 레가토로 잇지 못하고 애도 속으로 익사하고 만 걸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르트는 너무도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거라고, 그래서 사진에서도 텍스트에서도 또 젊은이들과의 연애에서도 만족할 수가 없었던 거라고, 그래서 직접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거라고, 그래서 에우리디케를 잊지 못한 오르페우스처럼 하데스까지 어머니를 찾아간 거라고……. 『사랑의 단상』에서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랑은 긍정이다. 그 어떤 부정적인 세력도 이 긍정의 힘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라지고 싶어 한다. 사라지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R. 바르트, 『사랑의 단상』)

 

그러고 보면 B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건 사랑을 정리하지 못해서가 아닌지 모른다. 그가 아직 산을 내려오지 않는 건 아직 사랑을 잇지 못해서인지 모른다. 이제 그가 돌아오면 새로운 사랑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지 모른다. 또 돌아보면 까마득한 청춘의 시절에 나는 지극한 아픔으로 사랑의 운명, 레가토의 진실을 이미 알았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사랑의 프로테스트를 통렬하게 외치던 그날 새벽, 나는 그 후 자주 기억해야 했던 문장 하나를 일기 안에 꼭꼭 적어넣었기 때문이다: “생은 자꾸만 끊어지는데, 사랑은 자꾸만 잇는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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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31
일상의 닻을 내리다 - 아바나에서 살아가기_1

꿈꾸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 쿠바와 남미의 나날들 #2 일상의 닻을 내리다 ─ 아바나에서 살아가기 김성중(소설가)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지니, 내 행동은 다른 영역에 끼어든 동물과 유사해진다. 우선 안전한 주거지를 확보하고, 근거리에 화장실을 눈여겨봐 둔 후(문짝이 없는 화장실도 더러 있기에), 식사를 해결할 식당과 노점을 물색한다. 그 다음엔 반경 2킬로미터 내의 골목을 살살 다니며 지형지물을 눈에 익히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니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생활에 틀이 생긴다. 오전에는 아바나 대학 도서관에 가서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하릴없이 쏘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영화관에 간다. 주말에는 한국 사람을 만나거나 올드 아바나에 가서 중국 음식을 먹고 온다. 이곳에 오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상품과 미디어를 호흡하며 살았는지 알겠다. 쿠바에 와서 쿠바에 대해 알아 간다기보다 그동안의 내 생활에 대해 거꾸로 깨닫게 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를테면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산다’라는 문장은 굉장히 자본주의적이다. 여긴 마트가 없다. 없진 않지만 차를 타고 나가야 드물게 나온다. 그리고 물건이 없다. 있긴 한데 가짓수가 적을뿐더러 사고 싶은 상품은 거의 없다. 일례로 나는 이곳 가정집에서 ‘책상’을 본 적이 없다. 가구도 귀하고 케첩도 귀하고 모든 물자가 다 귀하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이지만 배급으로 생존은 가능하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지 않는 탓도 있으리라. 돈 쓸 일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핸드폰(하나 만들었다)에 걸려오는 전화도 거의 없으니 달리 ‘욕망’할 무언가가 없다. 이국에서의 망망대해 같은 하루하루는 금세 일상이 된다. 1. 먹는 일 ‘꼬히마르’는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는 멋진 바닷가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방문자들이 소설의 무대를 둘러보기 위해 온다. 그러나 내게는 이 해변이 ‘세계에서 삼겹살 구워먹기에 가장 좋은 곳’쯤으로 입력되고 말았다. 첫 주 주말에 나는 한국 교민의 초대를 받았다. 코트라 부관장 내외와 쿠바에서 7년간 지내 온 경화 언니네 부부다. 마을 건너편 해변에 차를 대고 숯을 피워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마셨다. 소주와 삼겹살은 한국에 있을 때 내가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꼬히마르에 온 나는, 헤밍웨이고 뭐고 바다를 등지고 앉아 고기와 김치와 파채(채소는 경화 언니가 직접 농사지은 것이다. 언니는 심지어 동치미까지 담갔다)를 정신없이 먹었다. 쿠바에 온 첫 일주일은 굶주림의 시간이었다. 숙소에서 주는 아침은 먹자마자 배가 꺼지는 거친 빵에 과일 약간이 전부. 심지어 달걀도 없다. 달걀은 한 달에 성인 한 명당 열 개씩 배급받는데, 그나마 태풍 샌디의 영향으로 피해지역으로 모두 보내졌다고 한다. 쿠바 사람들의 한 달 월급은 40만 원 수준인데 이 돈으로 모자라는 달걀도

  • 웹관리자
  • 2012-12-26
바벨의 침묵

사유의 드로잉_제5회 바벨의 침묵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 교수) “신이 듣기를 원하는 유일한 인간의 언어, 라틴어를 상실한 비극적인 양들의 무리인 우리는 메에 하고 우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1) 논쟁과 관련해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내게는 몇 있다. 그중에 특히 내가 사회적으로 발언할 권리가 더 많아지고, 내 주장에 힘이 더 실리면 실릴수록 더 씁쓸하게 되살아나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요컨대 논쟁 당시에는 꽤 유창한 언변과 분명한 논리를 펴 논쟁 상대로부터 동의 내지는 항복을 받아냈으나, 결국 그 사람과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나중에 예상치 못하게 비판의 부메랑을 맞은 기억이다. 대체로 그런 기억 속에서 상대방은 내 의견에 반박하거나 항변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리를 마무리했을 뿐이다. 그래서 당시 나는 안일하게도 내 주장이 설득력 있게 그 사람에게 전달됐거니 생각했고, 나아가 어리석게도 서로 잠깐 불편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더 좋은 쪽으로 우리가 함께 가게 됐다고 기뻐했던 것 같다. 그것이 착각이자 오만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은 논쟁의 순간 정작 침묵함으로써 나를 공박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가장 실리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생 굽이굽이에서 깨달았다. 이를테면 침묵은 논쟁의 기술 중 매우 은밀한 힘을 가진 공격 무기였던 것이다.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2012년 12월 말 현재, 대한민국의 대중 미디어는 물론 개인 사용자를 기반으로 한 SNS에서 말들이 넘쳐난다. 그 말들의 양은 선거를 치르기 전 상태를 압도하지만, 내용은 그보다는 훨씬 단조롭다. 예컨대 당선자가 된 후보의 소감에서 시작해 당선 후 국민에게 보내는 첫 ‘메시지’, 유력 인사들의 축하 인사말과 당선자의 답사 등이 속속들이 전달되고 있다. 또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선거 성공담이 거듭거듭 매체를 통해 회자되고, 대한민국의 새 통치권자가 될 당선자에 대한 각계의 바람과 조언이 줄을 잇고 있다. 동시에 대통령 당선자를 둘러싼 그런 정치적인 말들과 비등한 양을 차지하는 말은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담론이다. 최종 투표율 75.8%로 1987년 직선제 시행 이후 계속 하락 추세를 보였던 투표율이 처음 반등했다는 사실에서부터, 투표율이 70%가 넘으면 야당에 유리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관성적 예측을 깨고 어떻게 여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범주상 비슷한 말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담론 중 특히 의미심장하고 주목할 자료가 있다. ‘방송 3사 출구조사’를 기초로 전체 유권자 중 투표에 참여한 75.8%를 지역·세대·직업·학력·소득 등

  • 웹관리자
  • 20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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