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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 작성일 2011-08-08
  • 조회수 1,364

 

[최창근의 쉽고 재밌는 희곡 이야기_두번째]

 

어딘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 북유럽과 캐나다의 현대희곡 : 욘 포세와 미셸 마르크 부샤르를 중심으로

 

 


『이름/기타맨』(욘 포세 지음, 정민영 옮김, 지만지 고전선집 0386, 2009)

『고아 뮤즈들』(미셸 마르크 부샤르 지음, 임혜경 옮김, 지만지 고전선집 0325, 2009)

 

 

최창근(극작가)

 

 

 

 

 

푸른 포도, 무르익은 포도송이, 건포도.

이 모든 단계는 변화다.

무(無)로의 변화가 아니라 이제까지 없었던 것으로의 변화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에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에드바르트 뭉크

 

죽은 자들 또한 인간이듯

태어나지 않은 애들 또한 인간이니까

인간이 되려면

모든 인간을 생각해야 돼

모든 죽은 자들을

태어나지 않은 모든 자들을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을

─  욘 포세, 『이름』 중에서

 

1. 깎아지른 절벽을 낀 피오르드 해안, 빽빽한 삼나무 숲, 드넓은 호수, 그리고 북극권에서 만 볼 수 있는 오로라 현상. 바이킹, 화가 뭉크, 세계적인 탐험가 아문젠과 난센이 얼른 떠오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그곳에서 서양 현대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헨릭 입센이 탄생했다. 자연주의 희곡의 교과서 같은 스트린드베리의 「미스 줄리」나 「꿈의 연극」, 「유령소나타」 같은 작품들 그리고 입센의 「페르귄트」, 「바다에서 온 여인」, 「헤다 가블러」, 「들오리」로 대표되는 비사실주의 계열의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신비주의 성향이 짙은 희곡들이 북유럽의 하늘과 땅, 사람들을 배경으로 쓰여졌던 사실은 어찌 보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2. 이러한 희곡의 흐름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인 극작가가 스웨덴 출신의 라쉬 로렌과 노르웨이 출신의 욘 포세일 것이다. 「시간 끝의 세 사람」이나 「악마들」, 「인간쓰레기 3:1」 같은 희곡으로 알려져 있는 라쉬 로렌은 부랑자나 마약중독자, 알코올중독자, 정신병자들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다.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감춰진 모습과 어두운 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독특한 열정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 반면 욘 포세의 경우는 입센처럼 ‘가족’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작가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지만 연극에 가장 애정이 많은 포세는 가족 간의 관계에서 포착할 수 있는 미묘한 문제 가령 사랑과 죽음, 마음의 번민과 갈등, 죄의식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1세기의 베케트, 새로운 입센이라 불리는 그의 희곡집 『가을날의 꿈』(도서출판 모아)과 『이름/기타맨』(지식을 만드는 지식)에 실려 있는 「어느 여름날」과 「가을날의 꿈」, 「겨울」 그리고 「이름」과 「기타맨」들을 읽어보라.

 

3. 첫 희곡 「누군가 올 거야」 이후 그가 쓴 희곡들은 희곡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산문시에 가깝다. 스타카토처럼 끊어지는 모노톤의 압축된 문장들, 침묵의 순간들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반복되는 단어들, 행간의 여백을 최대한 확장시키는 긴장과 이완의 리듬감은 그 자체가 연출자와 배우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삶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고 성격도 특별하지 않다. 무대를 달구는 뜨거운 갈등도 없고 인과관계에 의한 플롯도 보이지 않는 그의 희곡들은 그러나 ‘진실’이라는 이상하고도 강렬한 매력을 품고 있다. 인간의 연약함, 사람들 간의 심리적 거리, 미지에 대한 공포,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실현되지 못하는 인간의 삶들이 욘 포세가 자주 다루는 글감이다. 시적이며 회화적이고 동시에 한 편의 구성음악처럼 느리면서도 섬세하게 전개되는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소수의 인물들은 어둠 속에 잠긴 바다를 배경으로 모호하게 자신의 ‘자아’에 접근해간다. ‘인간이 살아가는 일을 과연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함께.

 

4. 노르웨이 어딘가 멀리 홀로 떨어진 주택의 거실. 저녁 무렵. 만삭의 한 소녀가 부모가 사는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 안 있어 뱃속 아기의 아빠인 것처럼 보이는 소년이 나타난다. 이들은 돈도 없고 더 이상 갈 데도 없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이 집이 싫다. 잠시 후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 소녀의 여동생이 들어온다. 소녀는 뱃속 아기의 이름을 짓고 싶어 하지만 소년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소녀의 어릴 적 남자친구가 이 집을 찾는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옛 남자친구는 떠난다. 소년도 이 집을 떠난다. 소녀는 혼자 남아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본다. 희곡 「이름」은 가출했던 딸이 임신을 해서 돌아오고 뒤를 이어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인 딸의 남자친구가 찾아온 어느 가정의 짧은 저녁 한때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게 다다.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것 외에 특별한 사건은 아무것도 없다. 인물들 사이에 드러나는 소통의 부재가 이 그로테스크한 희곡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기타맨」은 중년의 거리악사가 들려주는 남성 모놀로그다. 단순하고 절제된 대사를 기반으로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최소화하여 텅 빈 무대를 보여주는 미니멀리즘 희곡의 극치, 그게 새로운 방법론을 향해 나아가는 욘 포세의 미학이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침묵이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은 연극이 시각적 글쓰기일 때 가능하다. 이때 비로소 말하지 않더라도 소리가 들리게 된다. 말하지 않으면서 들리는 소리, 배우나 작가 혹은 연출가의 목소리가 아닌 어딘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인 것.

 

5. 사실 입센의 영향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람은 연극연출가로 시작했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일 것이다. 신과 종교, 믿음과 의혹, 죄와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이 희귀한 영화감독은 스웨덴의 표현주의 희곡문학의 전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에 대한 남자들의 강박증과 욕망으로 표출되는 여자들의 히스테리는 병리학의 차원에서 신경증으로 옮아가고 궁극적으로 에로티시즘과 섹스로 귀결된다. “연극은 아내이고 영화는 정부다.”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 베리만은 영화를 예술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는 도구로 여겼다고 한다. 그 말을 접하면서 잠시 되돌아봤다. 나는 혹시 “연극은 예술이 아니라 도구이고 문학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사악함보다 더 사람들을 무섭게 만드는 것은 없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열정』 중에 나오는 말이다.

 

 

진실은 항상 구체적이다.

─  프리드리히 헤겔

 

진실로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도 같다.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방법은 모름지기 그 스스로가 바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큰 언니는 뭘 물으면, 나만 야단 쳐. 그리고 오빤 너무 상상력이 넘쳐나 누가 뭐라고 하면 어떻게 나올지를 알 수가 없어. 언니는 누구나 아이를 가질 수 있고, 그 아이를 평생 사랑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아이도 자기 엄마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누가 우리에게 한 짓을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다시 할 거라고 생각해? 아이는 가져야 하는 걸까? 우리 아이들에게 복수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게 나을까?

미셸 마르크 부샤르, 『고아 뮤즈들』 중에서

 

6. 1965년 4월 부활절 전날. 아웃사이더들의 집합체로 구성된 사회 중 하나인 캐나다 퀘벡 주에 있는 생 장 호수 근처. 황량한 늪이 있고 모래바람이 심하게 부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인적 드문 시골집에 부모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남매들인 카트린 탕게(장녀, 35세, 초등학교 교사)와 마르틴 탕게(차녀, 33세, 캐나다 군대 대위), 뤼크 탕게(삼남, 30세, 가칭 작가) 그리고 이자벨 탕게(막내, 27세, 공원 출입구 차단기 관리인)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모인다. 아버지는 일찍 전쟁에 나가 전사했고, 엄마는 당시 열여섯이던 큰 딸 카트린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스페인 애인 페데리코를 찾아 집을 떠났기 때문에 이들은 부모 없이 자란 남매들이다. 어느 날 엄마가 20년 만에 도착한다는 전화연락을 받은 이자벨이 언니, 오빠를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부활절 날.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이들 가족의 과거와 감춰져 있던 비밀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그동안 다른 남매들은 정신지체아인 막내 여동생 이자벨을 보호하기 위해 엄마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왔었던 것. 엄마가 젊은 스페인 남자를 찾아 떠난 후에 이들 남매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 이야기가 극중극 형식으로 펼쳐진다.

 

7. 캐나다 퀘벡 지역 출신의 극작가인 미셸 마크 부샤르의 『고아 뮤즈들』은 퀘벡 북쪽의 작은 마을에 고립되어 사는 어느 가정에서 일어난 어떤 거짓말의 피해에 대한 아주 단순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단순한 텍스트 속에는 온갖 감정의 파문들이 섬세한 물결처럼 요동치고 있다. ‘멜로 포에틱 코미디’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눈물로 얼룩진 분노와 증오, 그리고 행복한 웃음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작가가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그의 일대기에 영향을 받아 쓴 희곡으로도 유명하다. 자식이 있는 집을 떠나 멀리 스페인에 가서 살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어머니를 상상하며 글을 쓰고 있는 뤼크는 명백하게 랭보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방랑생활을 한 랭보처럼 뤼크도 고향에 사는 게 힘들어 타지에 나가 사는 보헤미안이다. 뤼크의 여동생 이자벨은 더욱 더 선명하게 랭보의 여동생 이자벨 랭보를 떠올리게 한다. 오빠가 쓴 작품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이자벨 탕게는 랭보가 죽은 후 그의 원고를 간직하고 있던 랭보의 여동생 이자벨과 닮아 있다. 그런가 하면 둘째인 마르틴이 지니고 있는 성격의 큰 줄기도 랭보의 도피 혹은 모험의 취향을 반영한 듯하고 카트린의 성격 역시 엄격했던 랭보 어머니에게 빚진 듯 보인다.

 

8. 이 희곡의 제목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리스 신화의 뮤즈는 세 명의 여신으로 되어 있다. 이 세 명의 뮤즈들은 음악과 문학을 담당하고 있어서 시인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여신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등장인물 중에서 유일한 남자인 뤼크는 집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상상만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영감을 준 세 명의 누이들을 뮤즈라 부른다.

 

9. 캐나다의 현대 극작가 중에는 미셸 마크 부샤르 말고도 「천국」, 「변두리 모텔: 전부를 걸다」, 「사랑과 분노」 등을 쓴 조지 F. 워커가 있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는 작가로 노동자 계층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희망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무력한 삶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하층계급의 불안한 실존과 내면풍경을 희극적이면서 암울하게 그려내는 독특한 블랙 코미디로 캐나다 국민들의 높은 호응과 지지를 받았다. 공연대본을 희곡텍스트로 출판한 그의 작품집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일반 독자를 거의 상상할 수 없다는 희곡문학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바뀌게 되고 그렇게 해서 그는 캐나다 희곡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그 외에도 정치색 짙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주디스 톰슨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셸 트랑블레 같은 작가들이 캐나다 현대희곡을 대표하고 있다.

 

10. 팁 한 가지. 최근에 동시대 외국 극작가들의 희곡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출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중의 한 곳이 ‘지식을 만드는 지식(이하 지만지)’이다. 여기서는 고전선집 총서로 셰익스피어나 라신과 코르네유, 몰리에르, 체호프와 불가코프, 실러와 레싱, 브레히트와 뷔히너, 슈니츨러와 메테를링크 같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들 외에도 프랑크 베데킨트의 『눈 뜨는 봄』(독일),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유고), 후안 마요르카의 『다윈의 거북이』(스페인), 야스미나 레자의 『스페인 연극』(프랑스), 라오서의 『찻집』(중국) 같은 현대 희곡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그래서 제안하는데 “죽음이 한 번 몸속에 들어오면 다시는 나가지 않을” 듯싶은 길고 지루한 이 우기(雨期)의 계절,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희곡들을 들고 나만의 피서여행을 떠나 보는 건 어떨까.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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