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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 작성일 2012-07-27
  • 조회수 1,305

 

[2012년 장르소설 특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강지영

 

 

 




 

   얼굴이 붉고 흰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신선이 말했다.

   “돌아가려면 나를 이기는 수밖에 없네.”

   숲은 융단처럼 포근해 보이는 안개가 짙게 깔려 있어 어디든 눅눅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두터운 이끼로 덮였고 풀잎과 자갈, 날아가는 새의 깃털까지도 흠뻑 젖어 있었다.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시죠.”

   나는 투지를 불태우기 위해 조그맣게 기합을 넣었다. 흰 수염의 신선이 테이블 아래에서 장기판을 꺼냈다.

   “잠깐만요, 전 장기 둘 줄 몰라요. 다른 거 없어요? 지뢰찾기라든가 오목 같은 거.”

   신선이 매끈하게 길이 잘 든 조약돌 몇 개를 장기판 위에 올려놓았다.

   “걱정 마. 알까기 할 거니까.”

 

   나는 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명백한 나의 패배였다. 김 대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게 자신의 실적표를 내밀었다. 한 달 동안 그가 팔아치운 자동차는 무려 열아홉 대였다. 대당 판매 수당이 적게는 이십만 원부터 많게는 백만 원까지니까 그의 이번 달 급여는 천만 원은 좋이 넘어설 터였다. 그에 반해 나의 실적은 고작 세 대다. 그중 한 대는 빌라를 담보 잡혀 대출 받은 돈으로 아버지께 사드린 경차였다.

   패배자는 떠나야 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사표를 소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소장은 초록색 녹말 이쑤시개로 어금니를 쑤시다 내가 내민 사표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꾸려갈 짐이라곤 이 나간 머그컵 한 개뿐이었다. 머그컵을 들고 돌아서려는데 김 대리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일회용 라이터였다.

   “저 담배 끊었습니다. 일전에 선배한테 빌린 건데 이제 쓸모가 없게 됐네요.”

   김 대리가 빙긋 웃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라이터에는 ‘폭풍전야비디오방’이라는 상호가 찍혀 있었다.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그런 비디오방에 드나든 일도, 김 대리에게 라이터를 빌려준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라이터를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동료들 사이를 걸어 나갔다. 그들 중 누구 하나 패배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애써 버티던 불꽃 하나가 쓰레기통 안에서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자동차 세일즈맨이다. 아니, 정확히는 자동차 세일즈맨이었다. 우리들의 실적은 월별로 상황판 그래프에 남았다. 직영사원에게는 매달 고정급여가 발생하지만 나 같은 딜러는 파는 대수만큼 수당을 가져갔다. 때문에 월급통장의 잔액은 늘 여섯 자리를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나 같은 무능력자는 아니었다. 외제차 딜러였던 김 대리의 판매그래프는 입사 첫 달부터 고공행진을 했다. 첫 달에 무려 열다섯 대를 팔아치운 그는 단란주점을 빌려 회식을 마련했다. 자리를 잡자마자 김 대리는 맥주를 삼분의 이쯤 따른 잔과 잔 사이에 양주를 채운 스트레이트 잔을 줄 세웠다. 그러곤 ‘아임 킹 오브 더 월드!’를 외치며 스트레이트 잔을 넘어뜨려 폭탄주를 만들었다. 황금빛 기포가 올라오는 맥주잔을 휴지로 덮어 휘돌린 김 대리가 젖은 휴지를 천장에 내던졌다. 그리고 그 휴지가 구석에서 말없이 우롱차를 홀짝이던 내 머리 위로 철퍽 떨어졌다. 휴지가 정수리에서 이마로 흘러내리는 동안 동료들은 드문드문 앉아 작은 접시에 마른 오징어와 과일을 나누어 담는 호스티스를 주무르며 낄낄거릴 뿐 입사 구 년 차의 무능하기 짝이 없는 최장수의 굴욕 따위엔 아무 관심도 주지 않았다. 젖은 휴지가 내 몫의 작은 접시 위로 곤두박질치며 제각각 뻐드러진 오징어 다리를 적셨다. 오징어 다리에선 아무도 찾지 않는 늙은 창녀의 음부 같은 냄새가 풍겼다.

   김 대리 주변에는 늘 사람이 끓었다. 그는 수당이 적은 영업용 차량이나 경차 매출 건수가 생기면 동료들에게 밀어 주는 선심을 썼다. 괄괄한 성격이면서도 상사나 선배에게는 한 결 같이 깍듯한 모습이 그의 인기비결이었다. 그의 탁상 다이어리에는 고객뿐 아니라 동료들의 생일이며 각종 기념일이 새카맣게 메모되어 있었고, 실제로 내 생일 전 날에는 영화 예매권 두 장을 내밀기도 했다.

   나는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나이 많고 실적도 나쁜, 게다가 소심하고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따라지였다. 김 대리와 점심을 함께 먹으면 어느 샌가 몰래 뛰어나가 계산을 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점심을 얻어먹지 않으려 아내를 닦달해 도시락을 싸게 했다. 요즘은 애들도 급식을 하는 마당에 어쩌자고 밥값도 못 해 마누라를 들볶느냔 아내의 지청구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를 배웅했다.

   나는 빈 사무실에 남아 김치볶음과 콩자반뿐인 도시락을 먹으며 김 대리를 떠올렸다. 그는 한창 물이 오른 경주마처럼 반들반들 윤기 흐르는 찰진 몸으로 어디든 달려 나가지 못해 안달을 했다. 내 몇 달치 월급과 맞먹는 거금을 매달 판촉비로 쓰고 삼백여 장의 명함을 돌리며 삼천여 명의 기존 고객을 관리하는 그를 소장은 세일즈히어로라 부르며 추켜세웠다. 나는 바짝 말라 퀭한 얼굴을 책상 유리에 비춰 보았다. 거기엔 낯선 남자가 측은한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에는 밥풀을 붙이고 숱 없는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기백 없는 마흔세 살의 사내였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달 회식자리에서부터였다. 나는 왁자한 연탄갈비 집에서 소주를 자작했다. 김 대리가 소장 몰래 소집한 회식인 터라 모두들 야박하고 능글맞은 소장 험담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독 김 대리만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동료들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도통 남을 헐뜯을 줄 몰랐다. 그런 이유로 고객들은 김 대리를 더욱 신뢰했고 동료들은 부담 없이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었다. 나는 빈속에 안주도 없이 마신 술로 한껏 취해 있었다. 김 대리가 내 곁으로 자리를 옮겨 접시 위에 고기 몇 점을 올려놓았다. 나는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속에 밀어 넣고 얼굴을 찌푸렸다. 고기는 오도독뼈투성이였다. 오래 전 썩어 반쪽만 남은 어금니가 단단한 뼈를 이기지 못하고 조각나 버린 것이다.

   “김 대리, 너 일부러 그랬지?”

   한창 목소리를 높이던 동료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느닷없는 고함에 놀랐다기 보다 언제 저 인간이 여기 있었지, 하는 눈빛이었다.

   “왜요? 선배, 왜 그래요?”

   김 대리가 친절한 미소를 띠고 내 옆자리에 다가앉았다.

   “나한테 일부러 뼈 붙은 고기 준 거 아냐?”

   “에이, 선배 그럴 리가 있어요? 고기야 다 똑같지, 그걸 어떻게 구분해서 드려요.”

   나는 조각난 이를 손바닥에 뱉어냈다. 상추와 고깃점이 섞여 있어 작은 이 조각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래도 아니라고 할 거야?”

   김 대리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박 선배 취하셨나 보네. 제가 택시 잡아 드릴까요?”

   나는 최 장희지 박 장희가 아니다. 김 대리는 아직까지 내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늙었으니 선배라 칭했을 뿐, 그에게 나는 낡아 빠진 사무용 비품이나 다름없었다.

   “선배, 취했으면 그냥 집에 가세요.”

   허여멀겋게 살찐 후배 하나가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밀어 넣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박 장희냐? 내가 왜 박 선배야?”

   나는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순 얼어붙고 자리를 함께한 동료들이 서로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간다, 그래 가. 가지 말래도 간다.”

   비틀거리며 신발장을 향해 걸어가는 나를 김 대리가 부축했다.

   “다들 취해서 그래요. 제가 택시 잡아 드릴게요. 그리고 이건 택시비.”

   김 대리가 지갑에서 이만 원을 꺼내 내 호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의 손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며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김 대리가 그 종이를 주웠다.

   “대출 이자 체납고지서네요?”

   종이의 정체를 확인한 김 대리가 다시 지갑에서 삼만 원을 더 꺼내 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이런 적선까지 받아야 하는 내 처지가 서러웠고, 주머니에 든 오만 원의 쓸모부터 떠올리는 약해 빠진 내 정신 상태가 혐오스러웠다. 나는 화를 누르며 구두를 신었다. 김 대리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곤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자, 이 시대의 불우한 가장들을 위해 다 같이 건배합시다.”

   나는 구두를 신은 채로 마루에 뛰어올라 김 대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해보자는 거야? 붙어 보자는 수작이야? 그래 좋아, 내가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똑똑히 보여주지. 다음 달 네가 실적으로 나를 이기면 그땐 내가 영업소를 떠나 주마.”

   동료 하나가 김 대리의 멱살을 부여잡은 내 손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큰일이네. 일부러 져드릴 수도 없고. 정 뜻이 그러시다면 수락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지면 선배의 일 년치 대출 이자를 선납해 드리겠습니다.”

   김 대리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맸다. 나는 화를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다 택시 대신 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안방에서 TV 소리가 들렸지만 아내는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빨래 바구니에 양말을 던져 넣고 소파 위에 몸을 뉘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김 대리의 기름진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떨어져 나간 어금니 자리가 욱신거리고 속은 메스꺼웠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 나 자신도 원망스러웠지만 그걸 받아들인 김 대리의 오만함이 피곤에 지친 나를 각성시켰다. 사무실에서의 낮과 다를 바 없는 길고 지루한 밤이 나를 옥죄었다.

   이튿날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내가 식탁 위에 싸놓은 도시락을 들고 출근을 했다. 어젯밤 일이 소장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김 대리를 만나 일을 무마시켜야 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해 시계를 보았다. 십오 분 지각이었다. 조회를 하던 소장이 마뜩치 않은 눈길로 나를 흘겼다.

   “우리 영업소는 김 대리 독무대야. 전국 꼴찌에서 전국 일등이 됐으니 개천에서 용 난 꼴이지. 여러분도 용이 될 수 있어요. 안 된다는 생각이 여러분을 진흙탕 속 지렁이로 만드는 겁니다. 발상을 전환하면 성공이 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지난 밤, 과음을 했는데도 말끔한 얼굴의 김 대리가 소장의 말에 박수를 쳤다.

   “그리고 어제 최장희 씨가 우리 김 대리한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난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이번 대결로 우리 영업소 분위기가 제발 좀 쇄신되었으면 좋겠어요. 낙오자는 탈락되는 게 자본주의 아닙니까? 전국 꼴찌가 전국 일등이 되는 기적까지 바라는 건 아니지만 자기 밥그릇만큼은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이미 소장은 어젯밤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소장에게 그 소식을 전하며 한껏 나를 조소했을 김 대리의 혀를 뽑아 문서파쇄기에 넣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이겨 내 밥그릇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나는 김 대리를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지난 일 년간 내가 판 자동차는 모두 열두 대였다. 그 열두 대의 자동차를 팔기 위해 나는 새우등이 되도록 굽실거렸고 지문이 닿도록 명함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나는 김 대리처럼 부자 친구를 두지도, 명문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인간 최 장희, 아직 살아 있노라 외치고 싶었다.

 

   “자네 차례야.”

   신선이 긴 수염을 점잖게 쓰다듬었다. 나는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검은색 조약돌을 튕겨냈다. 그러나 힘 조절에 실패한 탓에 애꿎은 내 조약돌만 장기판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장기판 위에 살아남은 조약돌들은 두툼한 이끼 위로 추락한 동료를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차례가 언제 다가올지 긴장하며 적과 대치할 뿐이었다.

   “김 대리보다 영악하지 못하군.”

   김 대리라는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신선이 김 대리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김 대리를 아십니까?”

   “알지, 이 초코바도 김 대리가 주고 간걸.”

   신선은 복장과 어울리지 않게 통아몬드가 든 초코바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김 대리도 저처럼 알까기를 했나요?”

   “했지.”

   “누가 이겼습니까?”

   “그 녀석이 이겼으니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신선은 벌써 내 조약돌 세 개를 가져갔다. 그런 그에게 김 대리는 어떻게 이길 수 있었던 걸까?

   “세상은 정직하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김 대리는 내게 말 세 개를 뺏겼을 때 주머니에 든 초코바 세 개를 내게 내놓았지. 그러곤 세수를 물러달라고 사정했어. 자넨 내게 줄 것이 없나?”

   나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졌지만 실보무라지와 거치적대는 작은 물건 정도밖에 잡히는 게 없었다. 문득 손목에 찬 시계가 생각나 재빨리 그걸 풀어 신선에게 내밀었다.

   “이거라도 좋으시다면 받아주세요. 초코바보단 비싼 겁니다.”

   “내게 자네의 시간을 주겠다는 건가?”

   신선은 시계를 가져가 자신의 팔목에 걸었다.

   “세 수를 물러주는 것보다 자네에게 시간을 조금 되돌려줄까 하는데, 내 제안이 어때?”

   시간을 되돌려준다, 라. 현실적이지 못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숲 속 한가운데서 신선과 알까기를 하는 것도 그리 현실적이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게임부터 마치고 줌세. 내 차례지?”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신선이 자신의 하얀 조약돌을 가볍게 튕겼다. 여지없이 나의 검은 조약돌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제 남은 건 여섯 개뿐이다.

 

   김 대리를 꺾기 위해 나는 점심도 거르고 근처 사무실과 상가를 돌았다. 명함과 전단, 목캔디가 한 묶음인 비닐봉투가 유일한 내 판촉물이었다. 그걸 받아 든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입체도형이 부유하는 화면보호기를 쳐다보거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무신경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내가 돌아서기 무섭게 판촉물을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던져버렸다. 마치 함부로 들였다간 동티가 나고야 마는 부정 탄 물건처럼.

   아직 해가 중천이었지만 간밤의 숙취와 수면부족으로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한 건의 상담도 이끌어 내지 못한 상태로 김 대리와 마주치긴 싫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흰 우유와 카스텔라를 사먹고 주차장을 돌며 낡은 자동차 와이퍼에 비닐봉투 끼워 넣기를 쉬지 않았다. 그렇게 열흘 동안 열심히 뛰었지만 판매 그래프는 한 계단도 오르지 않았다. 내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이에 김 대리는 열한 대의 실적을 올렸다. 신기록이었다.

   동료들이 업무일지를 쓰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명함첩을 뒤지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기존 고객의 전화번호였지만 상당수가 번호를 바꿨는지 허무한 결번 메시지가 이어졌다. 나를 제외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김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켰다. 그는 재킷을 걸치고 서류가방을 들었다. 그러곤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며 조명을 끄고 사무실을 나섰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쏟아지는 푸르스름한 불빛만 어두운 사무실을 밝혔다. 그의 눈엔 내가 보이지 않는 걸까? 조그맣게 저, 여기 있어요, 여기 사람 있어요, 소리쳐 보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외침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는 대학 동창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책상에 엎드렸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밤새 내 핸드폰은 잠잠했다.

   마지막 주 월요일, 칠 년 전 자동차를 구매했던 사람에게서 신차를 사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음료세트를 사들고 그의 사무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칠 년 사이 부쩍 살이 오른 고객 앞에서 나는 여러 장의 카탈로그를 꺼내 놓고 견적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기본 옵션으로 중형차 한 대를 계약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내 실적 그래프에 새싹만 한 줄을 하나 그어 놓고 관리팀에 계약 서류를 내밀었다. 싹싹하고 애교 많은 여직원이 함빡 웃음을 지었다.

   “축하합니다.”

   그녀 앞에서 겨우 한 대뿐인 실적이었지만 이것이 앞으로 터질 무수한 계약의 시발일 거라며 나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나!”

   여직원이 손을 가져다 입을 가리며 놀란 눈을 치떴다.

   “왜요?”

   그녀의 손이 내 가슴을 가리켰다.

   “지금 최장희 씨 뒤에 있는 벽시계를 언뜻 본 거 같거든요. 분명히 등으로 가려졌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왜 이러지?”

   여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약서를 복사했다.

   “앞으로 뻥뻥 터지시길 바랍니다.”

   퇴근하는 길에 집 근처 제과점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도넛을 샀다. 부업으로 장갑 실밥을 뜯던 아내가 부스스한 눈으로 나를 맞았다.

   “돈으로 갖다 줄 것이지.”

   재킷을 벗어 아내에게 건넸다.

   “오늘 한 건 계약했어.”

   심드렁하던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콧등을 짓누르는 돋보기를 보자 가슴이 아려 왔다. 결혼 후 줄곧 아내는 부업을 했다. 한 달 내내 손끝이 닳도록 실밥을 뜯어내도 이십만 원 남짓한 수입이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성적미달인 딸의 학원비를 댈 수 없었다. 아내는 일찍 찾아온 노안 탓에 돋보기까지 쓰고 하루 열다섯 시간 쪽가위를 놀렸다.

   나는 선풍기를 틀어 놓고 와이셔츠와 러닝셔츠를 벗었다.

   “이상하네.”

   아내가 핏발 선 눈을 비비며 혼잣말을 했다.

   “뭐가?”

   “당신이 가로막고 있는데 선풍기 바람이 나한테 불어와. 참 희한하네.”

   아내가 도넛을 손으로 뜯어 입에 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내 등 뒤에 앉은 그녀의 머리칼이 선풍기바람에 흩날렸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깊고 평온한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고객은 단순변심을 이유로 계약을 깨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앞에서 무릎까지 꿇어 가며 제발 마음을 돌려 보라고 애원했다. 꿈인데도 바닥의 선뜩한 기운이 무릎으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고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대한 몸을 일으켜 사무실을 나섰다. 열린 문틈으로 김 대리의 얼굴이 잠시 스쳤다. 이어 부드럽고 고른 엔진 소리가 들리고, 나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꿈은 반대라고 했던가. 며칠 후 고객의 소개로 한 건의 계약이 더 성사되었다. 겉으론 담담한 체했지만 속으로는 기쁨의 환호성이 터졌다. 김 대리는 열여섯 대의 실적을 올렸지만 표정은 한결 같았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추월할 수 없는 차이였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고 생각했다. 평생 남에게 양보해 왔던 소소한 삶의 기적들을 이번에는 기필코 잡아채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신선과의 알까기에서도 나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신선은 초코바를 씹으며 내 검은 조약돌을 툭툭 잘도 쳐냈고, 나의 손가락은 매번 힘 조절과 방향설정에 실패했다. 어느덧 마지막 한 알의 조약돌만 살아남았다.

   “김 대리는 실패자였어.”

   신선이 신중한 눈길로 조약돌을 노려보았다.

   “그는 승리자예요. 실적이 전국 최고라고요.”

   그가 각을 재며 남은 초코바를 몽땅 한입에 털어 넣었다.

   “여기 왔을 땐 실패자였어. 거의 사라질 듯 애처로운 존재였지. 자네처럼.”

   신선이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주인 없는 낡은 양복 한 벌이 들어 앉아 있었다.

   “전 이제 세상에 없는 건가요?”

   나는 슬펐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것이, 다섯 토막의 짧은 그래프로라도 남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신선은 대답 없이 내가 준 손목시계를 어루만졌다. 손목시계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봄, 어머니가 사 보내신 것이었다. 내 고향은 목포였고 대학을 다니는 내내 변두리 옥탑방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그때 나는 가난뱅이 부모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등록금으로 대학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빈둥거렸다. 세이코, 당시 꽤 고가였던 이 시계는 몇 번이나 전당포와 술집에 맡겨졌지만 부메랑처럼 언제나 내 손목에 되돌아오던 소중한 재산목록 1호였다. 나는 신선에게서 그것을 다시 뺏고 싶었지만 이제 시계를 찰 만한 손목이 없었다. 조약돌을 쳐낼 손가락도 없었다.

   “김 대리는 내게 초코바를 주고 세 수를 물려 이겼다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되찾아 이 숲을 빠져나갔지. 하지만 자네는 나를 이기지 못할 것 같군. 그렇다고 너무 낙심하진 마. 난 거저먹는 노인네가 아니거든. 시계 값으로 잠시 시간을 되돌려 외출 정도는 시켜 줄 수 있어.”

   신선이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내가 보이는 걸까? 나는 순간 신선과 눈이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솨솨솨솨.

 

   “엄마, 내 지우개 못 봤어요?”

   나는 책상과 서랍을 뒤지며 지우개를 찾고 있었다. 여긴 어린 시절의 내 방이다. 정확히는 두 살 어린 남동생과 함께 쓰는 방이었고 메주와 붉은 고추가 계절을 바꿔 가며 동숙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 잃어버리면 안 사준댔다.”

   엄마는 마루를 걸레질치며 내게 하얗게 눈을 흘겼다. 주사위만큼 닳아버린 나의 지우개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지우개 찾기를 그만두고 일기장을 펼쳤다. 맨 마지막 장의 날짜가 1983년 5월 11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12일. 시간이 없었다. 신선이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되돌려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시간을 지우개 찾는 데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디 가냐?”

   나는 문지방 앞에 놓인 삶은 감자 그릇을 들고 밑창이 악어 입처럼 벌어진 운동화를 신었다.

   “놀러.”

   “다 저녁에 어딜?”

   나는 대답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에움길을 달렸다. 용식이네 집은 마을의 초입에 있었다. 우리 집보다 더 가난한, 며칠 걸러 한 번씩 감자밥이나 먹는 도장부스럼쟁이 남 용식.

   “용식아!”

   내일은 운동회가 있는 날이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용식이는 내일 죽는다. 그것도 나 때문에.

   그때 나는 반장이었고, 그 누구보다 승부욕에 불타는 어린이었다. 반면 용식이는 지금의 나처럼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 그 애가 우리 반이라는 사실은 가끔 출석을 부를 때나 깨닫는 일이었다. 하지만 운동회 날짜가 다가오자 나는 잘 먹지도 못한 주제에 덩치가 어른처럼 크고 힘이 센 용식이를 억지로 기마전에 출전시켰다.

   다른 종목은 우승 시 일점을 가산했지만 그날의 하이라이트인 기마전은 무려 오점이 가산되었다. 때문에 각 반의 반장들이 눈이 벌게져 덩치가 크고 손아귀 힘이 센 아이를 기마로 내세웠다. 아이들이 그토록 운동회 우승을 노리는 이유는 돌아오는 일요일에 목포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전국어린이발레경연대회 관람권 때문이었다. 우승한 반 전체를 초대한 이번 경연대회에 아이들이 열광하는 건 대회가 끝난 후 이어질 만찬 때문이었다. 모두들 흐드러진 과자와 케이크에 미리부터 군침을 흘렸지만 나는 달랐다. 내가 원하는 건 그날의 주인공 유나, 그 애의 고혹적인 자태를 숨지 않고 훔쳐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유나는 시의원의 딸로 사시사철 무릎 해진 바지만 입고 다니며 사내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흙바닥을 구르는 또래의 소녀들과 사뭇 달랐다. 늘 무릎 아래를 살짝 덮는 레이스 원피스에 색깔을 맞춘 반스타킹을 신었고, 반짝이는 헤어밴드로 멋을 냈다. 그 앤 언제나 걸을 때 뒷짐을 지고 발꿈치를 세웠으며 풍금은 음악선생님보다 잘 쳐 나뿐 아니라 전교 남학생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유나는 일주일에 두 번 러시아 유학을 다녀왔다는 발레 선생을 집으로 불러 발레를 배운다고 여자아이들이 수군거리는 걸 엿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애들은 유나가 경망스럽게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고 서양 춤을 춘다며 한껏 날을 세워 헐뜯었지만 나는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몸짓을 구경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내다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걸 어그러뜨린 건 내 욕심 탓이었다. 운동회 날 용식이는 내 바람대로 기마가 되어 선전을 했다. 거뭇하게 썩어 들어가는 앞니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옆 반 창범이의 멱살을 휘어잡고 그 애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모자를 벗겨내려 애썼다. 나 역시 용식이의 엉덩이를 어깨로 짊어지고 달려드는 손길을 밀쳐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반은 이미 승패가 갈렸지만 창범이와 용식이의 대결은 좀체 끝이 나질 않았다. 머리 위에 땡볕이 쏟아지고 용식이의 굵은 땀방울이 내 이마로 툭툭, 떨어졌다. 한참을 뒤엉키던 용식이가 나를 향해 자그맣게 외쳤다.

   “반장,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 어지러워.”

   조금만 더 지악스럽게 덤벼들면 우승이 코앞인데 용식이가 엄살을 부렸다. 나는 안 된다는 뜻으로 용식이의 엉덩이를 세게 한 번 꼬집었다. 용식이가 짧게 신음을 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동시에 용식이를 받친 내 몸도 휘청거렸다.

   “와아, 오 창범 만세!”

   창범이는 대형이 흐트러지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창범이의 손에 용식이의 하얀 모자가 나풀거렸다. 저보다 주먹 하나는 작은 아이에게 모자를 빼앗긴 용식이가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나는 정수리가 따끔거리게 화가 나 용식이 다리 사이에서 어깨를 빼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용식이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분을 삭이기 위해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돌아보니 유나가 서 있었다. 하얀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유나에게서 옅은 복숭아향이 났다.

   “너 때문에 용식이가 다쳤는데 어쩜 나 몰라라 도망을 치니? 정말 너한테 실망했어. 선생님이 너 양호실로 오래.”

   그때까지만 해도 용식이가 다쳤다는 사실보다 유나가 내게 실망했다는 야멸찬 목소리가 더 충격이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양호실로 찾아갔다.

   “최 장희! 어쩌자고 말이 도망을 가? 너 때문에 용식이 기절한 거 알아, 몰라?”

   낮은 침대 위에 용식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그 애의 새파란 입술이 제 엄마를 찾았다. 나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나자빠져 일을 그르친 용식이가 얄미워 깨어나기만 하면 뒤통수를 한 대 갈겨 주리라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용식이는 해 기울 녘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구급차를 불러 도립병원으로 옮겼지만 가난한 그의 부모 요청으로 용식이는 만 하루 만에 산소 호흡기를 떼어냈다. 그날 이후, 나는 줄곧 남을 밟고 일어서는 데는 젬병인 샌님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신선이 시간을 돌려주었으니 바로잡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장희구나?”

   용식이가 무릎이 다 해진 트레이닝 바람으로 나를 맞았다.

   “미안하다.”

   나는 삶은 감자가 담긴 사발을 용식이네 마루에 내려놓았다.

   “뭐가?”

   용식이가 도장부스럼 자리를 긁으며 감자 한 알을 집어 정신없이 입에 욱여넣었다.

   “내일 너 기마전 안 나가도 돼.”

   두 번째 감자를 집어든 용식이가 먹기를 멈추고 툭 불거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나 내일까지만 학교 가고 모레부터는 공장 나가. 사실 기마전 나가는 거 엄청 좋아. 애들은 내 이름도 모르잖아. 꼭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는데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주니까 되게 신나더라.”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내가 반장이잖아.”

   용식이 다시 감자 씹기를 멈췄다. 그 애의 콧구멍 속에 포슬포슬한 감자 몇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어쩐지 용식이가 아주 조금 투명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 바뀌어 그 애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곧 나처럼 투명인간이 되어버릴지 몰랐다. 나는 화가 났다. 그리고 가난한데 덩치만 큰, 바보 같은 용식이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용식이는 아프다는 엄살도 하지 않고 감자 사발을 끌어안은 채 나한테 매를 맞았다. 나는 지게 작대기를 들어 용식이의 정강이를 몇 번이고 내리쳤다. 그제야 용식이가 ‘아이고’, 기어 들어가는 비명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용식이 엄마가 부엌에서 뛰어 나와 내 뺨을 후려치고 도끼눈을 떴다.

   “너, 이 새끼 당장 느이 부모부터 데려와라. 깡패 새끼 낳은 부모 면상 좀 보자.”

   고통에 겨워 몸을 바로 펴지 못하는 용식이를 바라보며, 적어도 내일 그 애가 어이없이 죽어 나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면 됐다. 충분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상그러운 풀냄새와 바람소리가 느껴졌다. 다시 숲이었다.

 

   나는 한 달 동안 두 건의 실적을 올리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아버지 명의의 경차 한 대를 구입했다. 열여섯 대를 더 계약해야 김 대리를 이길 수 있었지만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힘겨운 싸움은 무의미했다. 나는 졌다. 그리고 내 몸은 한층 더 투명해졌다. 머그컵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을 때, 나는 홑겹 나일론 정도의 투명도로 겨우 존재할 뿐이었다.

   거리의 사람들도 내게 눈을 맞추지 않았다. 터덜터덜 걸어 영업소 앞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전화기 위에 머그컵을 내려놓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웬만하면 손에서 장갑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이니 특별히 기다리는 전화가 없을 때는 코드를 뽑아 놓기도 했다. 나는 전화 부스를 빠져나와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교통카드를 대지 않았음에도 기사는 나를 힐난하지 않았다.

   넥타이를 헐겁게 풀고 맨 뒷자리에 앉았다. 저물어 가는 햇살이 나를 투과하며 아주 옅은 회색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깐 졸았던 것 같다. 규칙적으로 몸을 흔들던 엔진이 멎었다. 종점이었다. 종점에서 내린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덧 눈앞에 바위처럼 검고 커다란 숲이 펼쳐졌다. 나는 그림자처럼 시커먼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로등도 없는 숲길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다. 더듬더듬 발을 떼며 목에 걸린 넥타이를 만져 보았다. 튼튼한 나무를 발견하면 거기에 이걸로 내 한 몸을 매달아 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나무를 찾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그때 어슴푸레 주변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새벽이 오는 것과 흡사했다. 걸음을 뗄수록 숲은 환해졌고, 십여 분가량 걸어 들어가자 한낮이 되었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싱그러운 계절의 숲, 그 한가운데 흰 두루마기를 입은 꼿꼿한 노인이 그림처럼 서서 내게 손짓을 했다.

   “어서 오게나.”

   그는 자신을 신선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제가 보이세요?”

   신선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나는 신선을 따라 숲을 산책했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어지러웠지만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가슴이 트였다. 신선이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주웠다. 흰 조약돌처럼 보였다.

   “간수를 잘했어야지.”

   나는 손을 내밀어 그걸 받아 쥐었다. 주사위만 하게 닳은 지우개 조각이었다. 그런 물건을 잃어버린 기억이 없는데, 의아해하며 지우개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신선은 다시 걸었다. 그리고 작은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린 소년 하나가 물 위에 조각배를 띄우고 있었다.

   “알아보겠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이 익긴 하지만 누구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누군지 잘…….”

   “저 애 이름은 남 용식이라고 해. 착한 아이지.”

   삼십 년 전 죽은 친구의 이름이었다. 죽은 그 애가 숲에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동명이인일 거라 추측하며 소년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고 보니 숲에는 별별 것이 다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는 팔이 떨어져 나간 마론 인형이 걸려 있기도 했고, 낮은 언덕을 비쩍 마른 강아지나 고양이들이 뛰어다니기도 했다. 낡은 신발과 구식 양복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기도 했고, 의기소침해 보이는 어린아이들은 수풀 뒤에서 우리를 보자 움찔거리며 몸을 숨겼다. 그것들이 왜 이제야 보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신선과 함께하는 산책이 흥미진진했다.

   “자네, 나랑 게임 한 판 안 하겠어?”

   나무둥치로 만든 테이블이 나타나자 신선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낡은 기억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신선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손목시계를 내밀었다. 이제 손목도 없는 주제에 그건 받아서 무얼 하나 싶었지만 노인의 인정을 마다할 수 없어 손바닥을 펼쳤다. 영영 사라졌을 줄 알았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고개를 들어 신선을 바라보자 그의 눈동자 속에 놀란 표정의 내가 비쳤다.

   “돌아가고 싶나?”

   신선이 내게 물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네.”

   “그럼 어떻게든 나를 이겨 봐.”

   검은 조약돌은 단 한 개뿐이었다. 그걸로 노인의 조약돌 열 개를 물리친다는 것은 김 대리와의 판매대결만큼이나 정해진 승패였다.

   “용식이는 다리가 부러졌지만 곧 회복되었어. 덕분에 공장 취직은 취소됐지만 말야. 너희 아버지가 돼지를 팔아 용식이 치료비와 위로금을 댔지. 그걸로 용식인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어.”

   나는 신선이 얘기하고 있는 동안 나의 검은 조약돌로 신선의 흰 조약돌 하나를 낙하시켰다.

   “잘 됐군요. 생각해 보니 아까 호숫가에서 만난 아이가 그 녀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용식이가 살아 있다니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급한 건 알까기였다. 게임에 집중을 하느라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그 녀석이 용식이 맞아. 하지만 이제 그 앤 여기 없어. 자네가 잠시 과거로 돌아갔다 온 사이에 그 애도 제자리를 찾아갔지.”

   나는 일타에 신선의 조약돌 세 개를 물리쳤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나의 선전을 지켜보았다. 신선이 새 초코바 한 개를 꺼내 베어 먹기 시작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신선의 조약돌을 한 개씩 떨어뜨려 갔다. 어느새 신선과 나의 스코어는 1 대 1로 동률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페이스라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몸을 일으켜 각을 잡고 신중하게 조약돌을 튕겨냈다. 제발, 제발!

   “대단해, 정말 대단하군. 김 대리는 뇌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자넨 실력으로 나를 이겼으니 칭찬받아 마땅하네.”

   신선이 초코바를 씹으며 박수를 쳤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자네 아까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것 좀 꺼내 봐.”

   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지우개 조각을 장기판 위에 올려놓았다. 지우개 위에는 까만 점이 찍혀 있어 진짜 주사위처럼 보였다.

   “이제 그걸 던져 보게.”

   나는 신선의 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주사위 모양의 지우개를 던졌다. 지우개가 장기판 위에 떨어져 몇 번 통통 튕기더니 멈춰 섰다.

   “어디 뭐가 나왔나 볼까?”

   신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여 지우개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점이 아닌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여보.’

   여보, 여보라고?

 

   “여보, 한번 깨우면 좀 일어나. 응?”

   아내가 야무지게 내 팔뚝을 꼬집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집이었다.

   “빨리 출근 안 해?”

   내가 눈을 뜬 걸 확인한 아내가 맨 등허리를 철썩 내리쳤다. 소리만 요란할 뿐 아프지는 않았다. 집도 집이지만 아내 역시 어딘가 달라 보였다. 돋보기를 쓰지도 않았고 부스스한 머리 위에 실밥이 얹혀 있지도 않았다. 아내가 내게 실크잠옷 윗도리를 던져주곤 방을 나갔다. 잠옷은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몸에 꼭 맞았다. 고개를 들어 방을 돌아보니 벽에 걸린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건 우리의 결혼사진이었다. 스물다섯 살의 아내가 부케를 들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대체 왜 낯선 집에 우리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내에게 묻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서자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피아노 소리를 따라 대리석 바닥재와 고급 가구로 꾸며진 널찍한 거실로 나갔다. 아내가 거실 한편에서 그랜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신 차리라고 연주해 주는 거야. 어제 레슨 받은 건데 아직 불안하지?”

   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딸의 급식비도 밀리게 생겼다며 울상을 짓던 아내가 피아노 레슨이라니.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가 피아노 치기를 멈추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

   “네, 지금 깼어요. 이제 아침 먹고 나가야죠. 네.”

   아내는 전화를 끊고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남용식 씨야.”

   “남 용식? 도장부스럼쟁이 남 용식?”

   “그래, 우리 결혼할 때 사회 봐 준 남용식 씨. 당신이랑 공동 오너이자 서로 좋아 죽고 못 사는 최 장희의 소꿉친구.”

   나는 잠옷 주머니에 손을 걸치고 아내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넋을 놓았다.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꺼내 보니 주사위 모양의 지우개였다. 지우개에는 아주 작고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어린 시절 내 필체였다.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동화책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였다. 아내가 앞치마를 걸치고 콧노래를 부르며 콩나물국을 떠 식탁에 올려놓았다. 나는 어정쩡하게 식탁 의자에 앉아 수저로 국을 떠먹었다. 콩나물국은 맛있었다. 육수를 흉내 내기 위해 온갖 화학첨가물이 배합 된 조미료가 아닌 질 좋은 멸치를 푹 우려낸 그런 맛, 오래된 행복의 맛이었다.

 

 

 

 

   창작 노트

 

   젊은 날의 아빠는 말썽꾸러기였다. 틈만 나면 학교 담장을 넘었고 사소한 일에도 눈을 부라렸으며 십오 인치 나팔바지에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시내를 누볐다. 아빠의 주요 출몰지역은 으슥한 담벼락 밑이나 극장 후문, 버스터미널 등이었다. 매일 저녁, 별명이 헌병대장인 우리 할머니의 손에 귓바퀴를 비틀리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빠의 월담과 주먹질과 바람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아빠의 젊음이 흐드러지던 그때 부모님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해가 지나기 전 나를 낳았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박박 깎고 군입대를 했지만 아빠의 짧고 굵고 찬란한 젊음은 마치 신화처럼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 내게로 전해졌다.

   간혹 앨범을 열어 부모님의 젊음을 훔쳐본다. 구레나룻을 멋지게 그린 아빠와 소녀티를 벗지 못한 엄마, 그리고 둘을 에워싼 다른 청춘들도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기타를 등에 짊어진 아빠와 그 곁에 바짝 붙어선 처녀 셋의 모습이다. 제법 미녀라 할 수 있는 그녀들은 저마다 한껏 멋을 내고 경쟁하듯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아빠의 시선은 카메라가 아닌, 흰 블라우스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단발머리에게 향해 있다. 한창 엄마와 연애를 하던 시절의 사진일 텐데, 그녀를 바라보는 아빠의 표정은 녹아내릴 듯 달착지근하다.

   이 소설은 아빠의 표정에서 시작되었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아빠의 선택은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나도, 나의 세계도, 이 소설도 여기 없을지 모른다.

   지금 내게 닿아 있는 모든 것과 우리의 운명이 교차하는 이 순간을 깊이 감사하며, 짧은 인사를 마친다.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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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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