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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 작성일 2012-11-16
  • 조회수 715

 

   [민들레 문학특강 참가 후기]

 

 

달밤

 

오수연(소설가)

 

 

 

 

 

   그분들에게는 이야기가 많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큰 개울가에 있던 낮은 집, 한 달에 두 번 조금 때면 마루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밥그릇이며 웬 깡통들까지 동동 떠다니는데, 그땐 왜 그렇게 그게 재미있었는지. 친구랑 첨벙대다 친구 집에서 저녁 밥 얻어먹고 쓰러져 잠들어, 다음날 아침 돌아오면 어머니가 등짝을 철썩 갈겼다. 아프지도 않았다. 뒷마당에 땅강아지, 풍뎅이, 집게벌레 풍성해서 여름방학 곤충채집 숙제하러 딴 데 갈 필요도 없었는데.......한 어르신의 어린 시절 집이다. 당시 부모님들께 살기 편한 집은 아니었겠지만, 아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육순이 넘은 이제 생각해도 그러하다.

   여름 방학에는 외할머니 댁에 갔던 어린 소녀. 보름달이 뜨면 할머니는 외손녀를 장독대로 데려 가서 치성을 드려 주셨다. 부디 이 아이의 삶이 순조롭기를, 사랑받고 행복하기를.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이 단번에 무너져 내렸을 때, 중년의 외손녀는 자문했다. 이래도 이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있었다. 오래전 할머니의 간절한 기원, 그 장독대, 그 보름달. 환한 달밤은 여의주처럼 가슴 속에 담겨 있었다.

   한 총각이 혼자 좋아했던 아가씨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총각의 이름을 크게 불러 돌려세우던 명랑한 아가씨도 있었다. 또 둘이 나란히 건널목을 건너다 술 취한 사람의 오토바이에 치여, 바로 옆에서 즉사해 버린 연인이 있었다. 추운 겨울 같이 술 먹고 잠들었다 깨보니 등을 맞대고 얼어 죽어 있던 친구도 있었다. 이야기, 이야기들.

   평생의 한, 혹은 소중한 추억. 어느 쪽이나 그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은 털실처럼 사람들을 얽어 그 사람들이 살았던 옛 시절, 그리고 그 시절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한 분의 꿈에는 친정어머니가 남겨주신 대지에, 기르던 가축 다 팔아 지었던 미니 이층집이 아직도 보인다. 동네 이웃들은 물론 택시 기사들한테까지 ‘꽃집’이라 불렸던 꽃 만발한 그 집이 남편이 보증을 잘못 서서 날아간 후, 그 분은 셋방에서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듯한’ 치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온 가족이 다시 이를 앙다물고 32평까지 늘렸던 아파트 또한 아들이 사기를 당해 날아갔다. 개인적 불행이요, 두 건의 금융 사건이었으나 사회의 일면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우리에게는 집 한 칸 장만하기가 힘들고, 기껏 장만한 집이 날아가기는 쉬운가? 왜 이렇게 우리의 삶은 이 앙다물고 살아도 늘 위태로운가? 하루아침에 삶이 치욕스러워지는 일이 과연 남 얘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벌거벗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 그럼 전부 다 문인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꼭 책을 팔아서 돈을 벌지는 않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다는 뜻이지요.”

   “그게 문인이죠.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좋죠!”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왜요?”

   “한번 토론해볼까요? 선생님하고 저하고! 선생님이 설득당하실걸요?”

   “그럴까요?”

   나는 웃음을 깨물었다. 첫날에는 바짝 긴장해서 말도 잘 안 나왔다. 이전 강의 경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상을 둘러싸고 둥그렇게 앉아 있는 어르신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분이 빙그레 웃으시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은 마치 수줍은 포대화상처럼 평소에도 미소 짓는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집이 안양이시라면, 오류역까지 바로 오는 버스가 있는데!”

   “시흥사거리까지만 와도 여기 오는 버스가 지천이구만!”

   그런 편리한 버스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마을버스, 전철, 버스를 갈아타고 강의 장소까지 오갔던 나의 실책을 어르신들은 몹시 안타까워 하셨다. 안타까움은 마음 약한 복지사한테까지 번져, 나는 다른 데서 강의 때문에 왔다가 돌아가는 분들의 봉고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추석 직후, 만월이었다.

   그날도 나는 “선생님, 추석 잘 쇠셨습니까?”라는 인사에 딴에는 사려 깊게 답한다고 “뭐 그냥 분주하기만 했지요”라고 해놓고는 아차 싶었는데, 아차 한 것까지 탄로 났을 터였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말이 아니라 느낌이다.

   “안양 역 지을 때 제가 ‘노가다’했었죠.”

   “이런 질문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요즘 작가들은 수입이 얼맙니까?”

   “아참, 자넨 그런 걸.... 선생님한테 실례지!”

   “에, 그거밖에 안 돼요?”

   시흥 사거리에서 내가 내리자, 혹시라도 버스 정류장을 못 찾을까봐 한 분이 함께 내렸다. 인파를 헤치고 그분은 나보다 조금 앞서듯이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그 분이 몇 번이나 일러주었던 그 번호 버스가 마침 들이닥치고 있었다. 나는 뛰었고, 그 분은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날에는 신중한 토의 끝에 ‘안양까지 갔다 와도 차가 얼마 안 도는 셈이다’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광명역 부근 한적한 도로로 한밤의 드라이브.

   ‘대한민국 국민이 전부 문인이 되면 절대 안 된다’고 나를 설득시키기로 했던 분은 다음날 운전면허 시험의 중압감 때문에 감기에 걸려서 결석, 작별 인사도 못 했다. 그 분은 고아로 크면서 “이천 원짜리 집은 왜 없나, 오천 원짜리 집은 왜 없나” 하는 고찰도 해보았다던가.

   달님이시여, 약간 이지러지긴 했지만, 내일 운전면허 시험을 굽어 살피소서! 우리의 삶을 지켜봐주소서! 글을 통해 기억 속의 자신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짓이 가능한지 아닌지, 오히려 상실과 참혹의 기억을 들쑤시는 건 아닌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외로운 도시, ‘선생님’은커녕 모두 다 외로운 인생들, 우리는 지금 어떤 기억을 짜내고 있습니까? 사람이 아닌 어떤 사물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집 앞에서 내려, 나는 유턴하여 돌아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문장웹진 11월호》

 

 

 

 

 

 

   * 민들레 문학특강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노숙인 시설의 노숙인을 대상으로 9월 15일부터 약 한 달 간 ‘제1회 민들레 예술문학상’의 부대행사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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