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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우리 시대 젊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

  • 작성일 2013-06-01
  • 조회수 4,253

 

[좌담]

우리 시대 젊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

 

 

 

일시 _ 2013. 4

장소 _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회의실

진행 _ 김근(시인)

좌담 _ 박준, 백상웅, 조혜은, 황인찬(이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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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진행, 이하 근)
kk    - 안녕하세요. 오늘 진행을 맡은 김근입니다. 문장 웹진에서 마련한 특집 좌담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좌담은 지금 막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을 소개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좌담이라기보다는 방담의 자리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모인 젊은 시인들을 통해 이 시대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독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겠지요. 저는 선배로서가 아니라 동료로서, 여러분의 시집을 재미있게 읽은 한 독자로서 여러분을 잘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부담 없이 얘기해 주기 바랍니다. 오늘 모인 여러분은 공통적으로 80년대생이고, 지난겨울에 시집을 낸 분들인데요, 벌써 꽤 시간이 지났네요. 첫 시집을 내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첫 시집을 낸 소감이 궁금합니다.

 

      백상웅(이하 백)
bsw    - 저는 시집을 내고 한동안 머뭇거렸습니다. 시집을 펼쳐 보기가 겁이 났고. 드디어 시집이 나왔구나,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차라리 기쁨은 시집을 내자고 전화 왔을 때가 더 컸어요. 뭔가 부족한 느낌인 것 같아서 아쉽기만 했습니다. 다음에 시집 낼 때는 지금 이 시집에서 내 눈으로 보이는 단점을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시 쓰기는 노동이라고 말해 왔는데, 조금 더 근력을 키워 보려고 합니다. 시집을 내기 전과 내고 난 후 달라진 것은 없어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준(이하 준)
bj    - 처음 인쇄된 시집을 받자마자 부모님이 사시는 집으로 가서 책을 드렸어요. 아버지는 방에 앉아 우시면서 책장을 넘겨보셨고 어머니는 책은 거들떠도 안 보고 개들에게 밥을 주시더라고요. 시집을 내고 나서 좋은 것들 중 하나는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에요. 시로 무엇을 바꾸고 싶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거예요. 다만 요즘은 제 시집을 잘 만들어 준 편집자들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워하며 지내고 있어요. 시는 제가 쓴 것이지만 책은 그분들이 만들어 준 것이니까요. 사실 저는 시집을 내기 전에 조급함에 빠져 있었어요. 하루라도 빨리 완성된 책을 보고 싶었고 독자들이 내릴 평가도 궁금했거든요. 제 시집을 편집해 준 김민정 시인은 한창 조급증에 빠져 있는 저에게 “우리는 잊힐 것이다.”라는 말을 해주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면서, 잠시나마 시에 허황된 기대를 담고 있던 잘못된 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시집을 내면서 좋은 공부를 한 기분입니다.

 

      조혜은(이하 조)
jhy    - 2009년 늦가을에 민음사에서 첫 시집을 내자는 전화를 받았는데, 그날이 아직도 기억나요. 첫 시집이 나오기까지 3년 정도 원고를 수정하며 출간을 기다렸어요. 그 시간들이 정말 행복했던 것 같아요. 막상 시집이 나오고는 그냥 “나왔구나.” 하는 정도였지 큰 감흥은 없었어요.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제 시집을 발견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죠. 앞으로 좀 더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욕심이 그전보다 많이 생겼고, 또래 친구들의 시집을 보면서 더 열심히 써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황인찬(이하 황)
hic    - 생활적인 측면에선 달라진 게 거의 없어요. 언제나와 같이 마감을 하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다만 이제야 겨우 시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은 있어요. 확실히 시집을 내기 전과 후는 달라요. 시에 대한 생각이든 자세든. 물론 그 생각이 지금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었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시집을 냄으로써 저에게 대결해야 할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든 극복해 내야 하고 갱신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저 자신의 책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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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들

 

      근    - 저는 네 분의 시집을 다 읽고 나니까 네 분의 시집에서 분명한 어떤 스펙트럼들이 보이더군요. 각각 비슷한 점, 혹은 다른 점 들이 생겨나더라고요. 각자의 시집에 대해 서로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하네요. 각각의 시집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서로 덕담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먼저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부터 이야기해 보죠. 백상웅 시인, 박준 시인하고 친하시죠?

 

      백    - 별로 친한 건 아니고…….

 

      근    - 창비 블로그에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참여하셨던데요?

 

      백    - 저는 준이 시집 읽으면서 정말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뭐랄까, 쉽게 대상에 빠져드는 사람 같아요. 그래서 쉽게 상처를 입고 쉽게 아파하는 사람. 때로는 부럽기도 해요. 저는 시에서 대상과 거리를 상당히 두려고 하고 있어요. 준이는 그 반대인 것 같아요.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기고. 저는 누군가 울고 있으면 “아, 우네” 정도의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다면 (준이는) 같이 힘들어하니까…….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준이 시집에는 많이 보여요. 그래서 부럽지요.

 

      근    - 네. 자신의 언어와는 상관없이 시에 대한 성향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부러운 시인들이 있거든요? 오늘 모신 시인들, 부럽긴 한데, 따라 쓰고 싶어도 안 되는 성향들이 있는 것 같아요. 공교롭게도 여러분 각자 각각 다른 성향을 갖고 있어서 전 좀 좋아요. 황인찬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    - 방금 따라 쓰고 싶어도 안 되는 성향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읽다 보면 어떤 시들은 ‘이건 이렇게 쓰인 것이구나’ 싶은 시가 있고 ‘이건 정말 어떻게 써야 되지?’ 이런 시들이 있잖아요. 준이 형 같은 경우엔 정말 후자라고 생각을 해요. 어떤 시들을 읽고 있으면 그런 순간이 있어요. ‘이걸 대체 어떻게 쓰지?’ 하는 순간들이요. 준이 형 시들이 유난히 그래요. 정말 어떻게 썼지?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슬퍼? 사람이 이렇게 슬퍼서 어떻게 살지? 이런 생각까지 포함해서요. 그래서 그런 놀라움이 있었어요. 이런 걸 어떻게 짊어지고 있을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준이 형이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했던 것 같은데, 본인 시를 옛날 시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겸손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준이 형 시를 읽으면, 준이 형이 스스로 비슷하다고 여기는 그런 선배 시인들과 말의 질감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태도도 마찬가지고요. 전혀 다르거든요. 닮았다면 닮았을 수도 있지만, 그 닮은 점이 선배들로부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더 나아간 상태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저는 부럽습니다.

 

      조    - 박준 시인의 시는, 문예지 월평에서 자주 봤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집 나오기 전에도 박준 시인의 시를 많이 읽었어요. 그때마다 느꼈던 건 ‘문장력이 정말 탄탄하다’는 거였어요. 시를 꼭꼭 밟아 만든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에 힘이 살아 있다고 느꼈어요. 막상 출간된 시집을 읽었을 때도 가장 부러운 건 문장력이었어요. 아까 김근 선배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도 따라 쓸 수 있을 것 같은 시가 있고, 따라 쓸 수 없을 것 같은 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박준 시인의 시를 보면 ‘아, 난 이렇게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읽으면서 많이 좋았던 시집입니다.

 

      근    - 저는 제가 현실에서 알고 있던 박준과 시 속에서의 박준은 상당히 다르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굉장히 씩씩한 겉모습 안에 저렇게 슬픔 혹은 죽음 같은 것들이 드리워져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까이 지냈던 후배 시인으로서 좀 가슴이 아팠달까요. 허수경 시인이 쓴 해설 제목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는 이 시집을 설명하는 데 무척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시집에는 ‘미인’이 계속 등장하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는데, 저는 그 ‘미인’이, 이를테면, 살아서 죽음을 살고 있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자를 구원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화자와 함께 죽음이 드리워진 삶을 견뎌내는 자라는 느낌을 받으며 시를 읽었어요. 박준 시인의 시가 어떤 측면에서는 선배들과 닿아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좀 다르구나, 하고 느꼈던 게 미인의 존재에 대해서였거든요. 혹시 그 점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나요?

 

      준    - 제 시적 발상이나 기억과 연루된 미인은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에요. 꼭 여성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드시 죽음과 관련된 인물도 아니에요.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그리고 사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미인은 제 나르시시즘의 결과이기도 해요. 미인이 곁에 있을 때는 그것을 받아 적으면 되었고 미인이 곁에 없을 때는 제게 부재하는 미인들을 만들어내서 썼어요. 쓰면서도 스스로 이런 ‘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근    - 네, 저도 그런 느낌은 들었어요. 실제로 구체적인 인물 같은 미인도 있고, 그렇지 않은 미인도 있고. 하종오 선생이 90년대부터 ‘님’ 시리즈를 계속 쓰셨는데,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님’과도 약간 닮아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미인’이라는 하나의 보편적 대상을 끌어들이면서 시를 끌고 가는 점은 한편으로는 닮았고 한편으로는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를 읽었어요. 이번에는 백상웅 시인의 『거인을 보았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황    - 상웅이 형 시를 읽고 있으면 사실 요새는 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시가 손에 쥐어진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드는 시가 잘 없어요. 읽은 후에 ‘아, 이 시 좋다’ 하는 시는 있어도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시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근데 상웅이 형 시집을 읽고 있으면 시가 손에 쥐어지는 느낌이 확실히 들고. 내 손 위에 뭔가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 면에서 참 다르고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한편으로는 저 시집 안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건 계급의식이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선배들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선배들과는 약간 다른 지점이 뭐냐면 선배들의 시에는 목소리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언제나 일직선이고 방사형이고 한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층위에서 끝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상웅이 형 시 같은 경우에는 방향이라고 할 만한 게 어쨌든 직선은 아니거든요. 제가 사실 좋다고 하는 많은 경우에는 시들이 부메랑처럼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요, 언제나. 그리고 그런 시들이 더 좋은 시들이라고 느껴졌고, 설령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어딘가로 ‘가라’고 던지라는 것보다 어느 순간 목소리가 실종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들이 백상웅 시의 특별한 지점이라고 할 만한 것 같아요.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백    - 아, 쑥스럽다.

 

      근    - 재미있네요. 전 이런 거 보는 게 무척 즐거워요. (웃음)

 

      백    - 근 선배의 시도 읽습니다, 저는.

 

      근    - 저는 됐습니다. 저는 시집을 낸 지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웃음) 조혜은 시인 어떻게 보셨어요?

 

      조    - 우선 백상웅 시인은 사적인 자리에서 거의 만난 적이 없어서,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어요. 「산다이」라는 시를 문예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어요. 판소리같이 유창하게 말을 술술 풀어 가는데, ‘아 참 말을 잘 부리는 시인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등단 연도가 비슷하고, 함께 활동하던 시인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집이 언제 나올지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아요.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백상웅 시인의 시에서 다른 시인들의 시와 다른 점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말을 끌고 나가는 능력? 그게 가장 부러웠어요.

 

      근    - 저는 백상웅 시집을 오래전부터 기다렸어요. 사실은 얼굴을 잘 안 보여줘서 몇 번 못 만나 봤어요. 그런데도 굉장히 친한 것만 같았어요. 시를 계속 관심 있게 보고 그래서겠지요. 시집을 받고 두근거리며 읽었어요. 시집을 읽으면서 저는 현재가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 소멸하는 것을 기록하는 자로서의 시인이 이 시를 써내려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서정시라고 하면 대체로 (물론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많이 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파라다이스가 있거나 유토피아가 있거나 한데, 백상웅 시에서는 그런 게 없어서 좋았어요. 시에서 말하는 파라다이스라는 게 가상이고, 그 가상 때문에 현실을 보여주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오래 했거든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게 만든 시집이 아니었나 싶어요. 안도현 선생이 스승이시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것의 완전한 결합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고 극찬을 해놓으셨는데, 충분히 이런 말을 들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    - 우선 백상웅 시인은 사적인 자리에서 거의 만난 적이 없어서,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어요. 「산다이」라는 시를 문예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어요. 판소리같이 유창하게 말을 술술 풀어 가는데, ‘아 참 말을 잘 부리는 시인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등단 연도가 비슷하고, 함께 활동하던 시인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집이 언제 나올지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아요.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백상웅 시인의 시에서 다른 시인들의 시와 다른 점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말을 끌고 나가는 능력? 그게 가장 부러웠어요.

 

      근    - 저는 백상웅 시집을 오래전부터 기다렸어요. 사실은 얼굴을 잘 안 보여줘서 몇 번 못 만나 봤어요. 그런데도 굉장히 친한 것만 같았어요. 시를 계속 관심 있게 보고 그래서겠지요. 시집을 받고 두근거리며 읽었어요. 시집을 읽으면서 저는 현재가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 소멸하는 것을 기록하는 자로서의 시인이 이 시를 써내려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서정시라고 하면 대체로 (물론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많이 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파라다이스가 있거나 유토피아가 있거나 한데, 백상웅 시에서는 그런 게 없어서 좋았어요. 시에서 말하는 파라다이스라는 게 가상이고, 그 가상 때문에 현실을 보여주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오래 했거든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게 만든 시집이 아니었나 싶어요. 안도현 선생이 스승이시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것의 완전한 결합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고 극찬을 해놓으셨는데, 충분히 이런 말을 들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준    - 저는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게 꼭 백상웅 시인에게 보내는 사랑 고백 같아 민망하네요. 그동안 시집 나오기 전부터 동지(同志) 같았어요. 미안한 감정을 끊임없이 느끼게 하는 그런 동지요. 혼자서만 매를 맞고 있고 혼자 어두운 곳으로 끌려가 있는 동지. 등단 전 대학문학상들을 수상하던 시절 백상웅 시인은 기교가 뛰어났거든요. 그런데 등단 후 시인의 시를 보면 이미 시를 잘 쓰는 시인이라 그런지 구태여 인위적으로 시를 더 좋게 만들려는 불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때로는 그런 백상웅 시인이 답답하기도 했어요. 예컨대 할 수만 있으면서 왜 안 하지? 비틀 수 있으면서 왜 여기에서 끝냈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같은 이유로 많은 신뢰감이 생겼어요. 그러한 시적 조작들을 하지 않는 시인의 태도가 결국 진실 되게 좋은 한 권의 시집을 만든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저만 해도 잘 읽히기 위해서 혹은 즐겁게 읽히기 위해서 필요 없는 것들을 시에 많이 갖다 놓았는데 백상웅 시인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면서도 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    - 대학 시절에 유명하셨군요?

 

      백    - 네. (웃음)

 

      근    - 어떻게 유명하셨어요?

 

      백    - 대학문학상을 몇 개 받았죠.

 

      근    - 여러분의 습작기도 궁금하네요. 그 얘기는 잠시 뒤에 하기로 하고. 그럼 이번에는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 얘기를 해볼까요?

 

      조    - 인찬 씨는 제 주변에 있는 시 쓰는 남자들이 참 많이 질투하는 사람이에요. 뭐 인찬 씨 시에서 여성적 감성이랑 다른 남성적 감성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저도 인찬 씨 시를 좋아해요. 제가 읽으면서 느꼈던 건, 너무 잘 읽힌다는 거였어요. 보통은 시집을 읽는 동안 문장이나 단어가 많이 걸리기 마련인데, 술술 잘 읽히는 게 큰 매력이었고,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같은 경우에는 이미지가 아주 잘 그려지면서, 다 읽은 다음에는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것들이 특별했던 것 같아요. 말을 아주 가볍게 툭툭 던지는데 그게 정말 무게감이 없어서 가벼운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 인찬 씨 시는 그런 면에서 특별했어요.

 

      백    - 처음에 황인찬 시인의 시를 읽었을 때는 “이게 뭐야?”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저에게 없는 능력이었어요. 문장을 쉽게 쉽게, 단문으로 끊어 가면서도 한 편을 다 읽었을 때 찾아오는 여운이 상당히 깊었거든요. 제가 깊게 마음을 열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은데, 마음을 열고 시를 읽기 시작해 보니 이건 제가 못 하는 거란 걸 알았죠. 저는 시를 쉽게 쓰고 쉽게 읽히게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건 제 능력이 많이 부족한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하고 있어요. 더 쉽게 써야 하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황인찬 시인은 그게 되는 것 같아서 정말 부러워요. 그걸 감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말 같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공부가 부족하다는 말도 말이 안 될 것 같고, 재능과 감각과 노력이 함께 어우러진 것 같아요. 어떤 부분에서는 황인찬 시인에게서 배우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준    - 황인찬 시인이 제 시 이야기를 하면서 한 이야기인데요. 저도 마찬가지로 유독 황인찬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놀랄 때가 많았어요. 시 한 편을 다 읽은 후에 다시 첫 행으로 가서 읽다 보면 방금 읽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상상도 못한 문장들이 이어지더라고요. 낯선 문장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시가 끝나는 것을 보고 ‘나랑 시를 쓰는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았어요.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어요. 아까 백상웅 시인도 이야기를 했지만 ‘감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볍’고,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비슷한 말은 ‘사유’일 텐데요, 생물학적으로 어리지만 않으면 그 사유라는 말이 황인찬 시인에게 계속 따라다녀도 될 것 같아요. 황인찬 시인은 시를 쓸 때, 힘 있는 언어에 기대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떤 시어가 한 편의 시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것이냐 하는 것. 저만 해도 한 편의 시 안에서 얼마나 힘 있는 언어들이 균형 있게 놓이는가를 생각하거든요. 황인찬 시인의 시가 정직한 것은 언어가 갖고 있는 아우라에 기대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사유에 방해될 만한 언어나 시에서 감당이 잘 안 되는 언어를 부리는 법이 없어요. 이런 능력은 학습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본인만이 알고 있는 감각 같아요. 그래서 저와 황인찬 시인은 비슷한 나이지만 참 많이 부럽고요, 보고 있다 보면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백지(白紙)라는 길에 나설 때 제가 기초화장에 색조화장까지 끝내고 나온다면 황인찬 시인은 갓 세수한 맨얼굴로 그냥 나온다고 할까요? 게다가 그 맨얼굴이 이렇게나 매력적이니까 억울하지요. (웃음)

 

      근    - 저는 황인찬 시인의 시를 오래전부터 봐왔어요. 사실은 습작기 때부터 지켜본 사이죠. 그동안에 저는 황 시인에게 불평불만을 참 많이 이야기했어요. 전 언어의 코스튬이 많은 인간이어서 이 코스튬이 없는 언어에 대해서 살짝 불만도 있고, 거부감도 있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시집을 읽고 나니까 그게 질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연한 말을 아주 당연하게 하고 있는데 울림이 있다는 것, 이건 정말 남다른 능력인 것 같아요. 그것들을 적절히 배치해 아주 단순한 문장들을 통해서 절대 단순하지 않은 감정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좀 전에 이야기를 했지만 백상웅 시인의 경우도 대상과의 거리를 많이 둔다고 했는데, 황인찬 시인의 경우에는 거리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서정시가 자아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욕망 아래 쓰인다면, 전혀 동일화하려 하지 않고 그냥 분리된 채인 세계와 자아를 시선들이 하나씩 하나씩 건드리고 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시집을 읽었습니다. 제가 괜히 불평불만을 했다는 반성도 하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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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    - 괜찮아요. 잘 안 들었습니다.

 

      근    - 맞아요, 잘 안 들었어요. 잘 들었으면 이런 좋은 시집이 안 나왔겠지요. 제일 오래 읽기도 했는데, 저는 조혜은 시인의 『구두코』를 가장 마지막에 읽었어요. 읽는 데 오래 걸려서 ‘시가 많은가?’ 싶어서 편수를 세어 보기도 했는데, 특별히 많진 않더군요. 오래 읽었던 것은 두꺼워서도 그랬겠지만, 개인적으로 좀 오래 머물다 가고 싶은 페이지들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준    - 조혜은 시인은 시 안에서 공간과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곰곰이 그 공간과 시간을 생각해 보니 그것들은 사실 어느 곳이어도 또 어느 시간이어도 상관없는 무공간적이고 무시간적인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화자가 도드라져 보이더라고요. 화자를 내세우는 힘이 좋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는데 화자 한 명 잘 내세우면 시가 한 편 절로 완성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조혜은 시인의 시에서 화자는 시의 서사를 만드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 서사의 힘이 시를 오래 읽게 하되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아요.

 

      황    - 저는 시집 한 권을 읽으려면 워낙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라 아직 조혜은 시인의 시집을 충분히 읽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여전히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는 중입니다. 화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에게 조혜은 시인의 시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 화자의 발화가 여러 개의 층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부분이었어요. 이걸 두고 기존의 다성성이란 말을 가져오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 아직 제대로 설명할 만큼 말을 준비한 상태는 아니지만, 하나의 목소리지만 그 안에 여러 욕망이 숨겨져 있는 듯한…….

 

      백    - 저는 우리라는 게 너무 좋아요. 요 근래 발표되는 시를 보면 화자의 구분이 모호하거든요. 애매하고. 화자가 개인적인 감성의 대타로만 쓰이는 것 같아요. 등단 이후에 잠깐 합평 같은 걸 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라는 걸 시에서 촌스럽게 누가 써? 하는 말을 많이 했었어요. 우리가 뭐 어때서? 우리라는 건 옛날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있는 건데 이게 시적인 기술로 치부되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시집 참 좋았습니다.

 

      황    - 층위가 갈린다는 이야기……. 연대감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해보니까 가락이 더 잘 잡히는 것 같아요.

 

      백    - 보편적이라는 게, 이쪽에 속해 있는 우리가 읽어도 그렇고, 저쪽에 있는 우리가 읽어도 그렇고,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관찰과 이해가 아닐까 해요.

 

      근    - ‘우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에 ‘우리’라고 쓸 때랑, 지금의 ‘우리’라고 쓰는 것은 다른 지점이 있어요. 조혜은 시인의 ‘우리’는 나와 너가 같은 방향에 있지 않은데 우리라고 하고 있는 나와 너인 거죠. 그런 특이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조혜은 시인의 시가 이끌고 가는 목소리의 활달함이 좋았어요. 제가 워낙 활달한 목소리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활달함이 보고 있자면 불가능한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느낌이 들거든요. 또 시 한 편 한 편이 지도 같기도 해요. 지도가 어떤 특정한 장소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 지도를 통해서 여러 가지 공간과 시간, 혹은 감정들이 솟아오르게 하는 지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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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으로 산다는 것

 

      근    - 저는 여러분의 직업이 궁금했어요. 일테면 첫 시집을 내는 시기가, 저도 그랬지만, 혹독하게 생활을 견뎌야 하는 시기, 그것도 많이 견뎌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인데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조혜은 시인은 지금 어떤 일을 하세요?

 

      조    - 저는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공부하면서 일하고 있어요. 학부 전공은 특수교육학이었는데, 전공을 살린 것은 아니고요.

 

      근    - 공교롭게도 여기 모인 시인들이 다 문창과로 환원이 되네요? 특수교육학이라는 학부 전공이 조혜은 시인의 시들의 피부를 만들어 준 건 아닌가요?

 

      조    - 그게 없었으면 시를 못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저도 원래는 문창과를 가고 싶었는데 집안 사정도 있고, 친언니가 사범대에 진학하기도 해서 언니를 따라 교육 계통인 특수교육학과를 가게 되었어요. 시는 대학에 진학한 이후 뒤늦게 쓰게 되었죠. 막상 특수교육학을 전공하면서 든 생각은 ‘교사가 되어야겠다’가 아니라 ‘글을 써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이상한 말이긴 한데, 장애아동들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줄이고 그 아이들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그 방법의 하나로 글을 선택한 거죠. 소설도 있고 시도 있지만 시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방법이 조금 더 저에게 맞았어요. 물론 처음에는 장애에 대한 이야기들이 좋았는데 막상 첫 시집을 내고 나니까 이게 콤플렉스가 된 것 같아요. 너무 이것에만 기대서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이야기가 빠지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요즘엔 그런 회의가 많이 들어요.

 

      근    - 쓸 수 있겠죠. (웃음) 백상웅 시인, 지금 출판사 다니시죠? 어떠세요?

 

      백    - 시집 준비할 때, 야근하고 집에 와서 책을 딱 보면 일을 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출판사에서 일하거든요. 목차를 짜고 시 배열을 하고 쪽수까지 고민하며 시를 고쳤어요. 담당 편집자한테 문자로 도와달라고 SOS를 쳤지요. 그래도 답은 없었지만. 저는 백수생활을 되게 오래 했거든요. 서른두 살까지 백수였으니까. 그래서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있지요.
    학부를 십이 년 다녔어요. 여수에서 열아홉 살 때까지 살았던 기억, 전주에서 서른두 살까지 살았던 기억, 서울에서 살았던 기억 들이 다 섞여 있어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서 쓴 시들은 이 모든 기억이 섞여 있어요. 일은 재밌긴 한데, 일을 하다 보니까 시를 쓸 재료를 구하기도 힘이 들고…… 퇴고할 시간도 부족하고. 기어코 하긴 했는데…… 그냥 저는 투잡족이라 생각하고 살아요.

 

      근    - 다 서울에서 사셨던 분들인데, 백상웅 시인은 올라오셨잖아요. 저도 ‘올라온 사람’인데 처음에 올라오면 굉장히 서러움이 있어요. 여기 녹록지 않다, 내가 여기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절망감도 있었을 것 같은데.

 

      백    - 2011년 겨울에 연희문학창작촌에 들어갔거든요. 12월 31일까지가 마감날이었어요. 연말에 회사에서 단체 휴가를 주거든요. 그때 방을 얻자고 생각했는데…… 나가래요. 청소 때문에! (웃음) 아직도 기억나요. 12월 24일에 명지대 쪽으로 걸어갔어요. 고시텔을 돌아다니면서…… 다 엉망인 거예요. 은평구 쪽까지 고개를 넘어 걸어갔는데. 바람이 엄청 불었어요.

 

      근    - 엄청 많이도 걸어가셨네요.

 

      백    - 서울에 올라올 때 빈털터리로 왔으니까요. 보증금을 벌고. 저는 제가 생각보다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걸 일하면서 느끼기 시작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8시에 출근하면 시도 읽고 회사 일도 하고. 서울에 올라오니 너무 서글펐어요. 사람들이 되게 미웠어요. 사람들이 밉고, 사람 살 곳이 아닌 것 같고.

 

      근    - 어렸을 때부터 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럼? (웃음)

 

      백    - 여기 살다 보니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    - 좀 더 살다 보면 적응이 될 거예요.

 

      백    - 글 쓰는 사람들이 다 엇비슷하더라고요. 살아가는 방식도 그렇고.

 

      근    - 박준 시인은 얼마 전에 그만뒀죠?

 

      준    - 출판사는 그만두었고요. 출판사 다닐 때는 백상웅 시인처럼 남의 글 읽기 바빠서 글을 쓸 시간이 부족했는데 요즘은 완전히 반대예요. 대필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거든요. 소설가도 아닌데 하루에 수십 매씩 글을 써야 해요. 간혹 동의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자서전을 쓸 때도 있는데 그냥 쓰는 게 아니고 아름답게 포장해서 미문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것이 괴로워요. 그러다 보니 제 글이 너무 쓰고 싶어지더라고요. 쓰고 싶은 글만 쓰고 읽고 싶은 책만 보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근    - 저도 대필을 몇 개 한 기억이 있는데, 대필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준    - 20대 내내 아르바이트든 직장이든 일을 꾸준히 했는데 통장 잔고는 항상 비어 있었어요. 어떤 일을 해도 목돈을 만들어 본 경우가 없는데 대필을 하면 잠깐이나마 목돈을 만질 수 있잖아요. 단 200만~300만 원이라도. 제가 기질적으로 가난한 탓에 그 목돈 만지는 기분에서 못 헤어 나오는 것 같아요. 이야기하고 나니 슬프네요. (웃음)

 

      근    - 그렇죠. 그렇지만 근데 정말 못 할 짓이더라고요. 황인찬 시인은 어떠세요?

 

      황    - 학부 졸업을 하고 대학원 두 학기를 다녔어요. 시집을 묶느라 작년 가을 학기에 휴학을 했었는데 실은 이제 3월에 복학을 할 생각을 했는데, 돈이 없는 거예요.

 

      근    - 아니, 상금 받은 걸로 등록하시겠다더니.

 

      황    - 그건 학부 학자금 대출을 갚고 나니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지난 두 학기는 학교에서 일을 하며 장학금 받고 다녔어요. 하여간 돈이 없는 거예요. 시인이 갈 수 있고 선택을 할 수 있는 루트도 몇 개 없잖아요. 그중 하나가 그나마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인 대학원에 가는 것이었는데, 대학원에 다니는 것도 다 돈이잖아요. 그래서 일자리도 찾고 뭐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었어요. 그래서 복학할 때가 다 되어서 ‘아, 복학을 못 하는 상황이구나’ 알게 되었죠. 복학도 하고 졸업도 해야 군대도 다녀올 텐데.

 

      근    - 군대를 아직 안 갔지요, 참?

 

      황    - 석사 도중에 군대를 갈 수는 없잖아요. 다 끝내고 가야 할 텐데……. 그래서 지금은 일자리를 찾아보고 있고요. 그래서 제가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드리는데, 이런저런 잡일, 저는 다 합니다. 대필이 못 할 짓이어도 저는 할 수 있고요.

 

      근    - 이 지면을 보고 계신 관계자 여러분, 연락 주세요. (웃음)

 

      황    - 요새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먹고 사는 게 참 힘들어요.

 

      근    - 다 비슷하군요. 저도 여러분과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 선배 아니어서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인으로 산다는 게 그런 문학과 생활 사이에서 오는 괴로움 때문에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죠. 백상웅 시인도 얘기했지만, 자기 시집 보고 있는데 일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남의 글을 봐야 하는 괴로움도 있고. 남의 글을 봐서 괴로운 것은, 시인이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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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작의 나날

 

      근    -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백상웅 시인 습작기에 날렸다고 했는데, 습작기에 어땠어요? 이제 막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이야말로, 제가 보기에, 습작생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이 어떤 습작기를 보냈는지 독자들이 많이 궁금해 할 것 같아요. 어떠셨어요?

 

      준    -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스무 살 때부터 시를 응모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많이 떨어졌어요. 함께 시를 쓰는 친구가 거의 없었어요. “여기에 한번 투고해 봐” 혹은 “이 시집을 한번 읽어 봐”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굳이 시집이 아니어도 조언을 해주는 친구가 딱히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혼자 잘난 맛에 계속 쓰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다른 습작생들과 너무 많은 격차가 생기더라고요. 그 상태에서 많이 좌절을 했어요. 다행히 등단을 했고 요즘에서야 그때 내가 일반적인 습작기를 보내지 않은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근    - 친구가 많았던 황인찬 시인은 어떠셨나요?

 

      황    - 친구 별로 없었는데……. (웃음) 저는 문창과에 소설을 쓰러 들어갔었어요. 제가 06학번인데 시집을 그때 처음 읽었어요. 문지 시선집, 이런 게 나오는 줄도 몰랐고, 학교에서 수업을 해야 되니까 읽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처음 읽었어요. 그런데 그땐 시에 대해 별 생각도 없었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시를 쓰게 된 것도 우연한 기회에 그렇게 된 거였어요. 사실은 저는 소설을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를 쓰게 됐던 거예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시를 쓰는 게 재미있고 읽는 게 재미있어진 거죠. 아마 제가 문창과에 오지 않았다면 시를 쓰지 않았겠죠? 아마 소설을 쓰는, 아니면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학생일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비교적 늦게 시작을 한 거예요. 07년에 처음으로 쓴 건데, 욕심을 내면서 시작을 하니까 제가 너무 늦었단 걸 알았어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그 당시에 가장 주목받던 것이 바로 미래파 선배들이었잖아요. 주변에 습작하는 친구들도 항상 들고 다니며 읽었어요. 저도 그래서 그런 시들 많이 읽었죠. 황병승, 김경주, 김행숙……. 읽는 게 좋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고 많이 따라하기도 하고, 모방을 하면서 늘기도 하고. 어느 날에는 당시 선생님이셨던 김근 시인이 『실천문학』을 가져오셔서 “야, 이거 정말 잘 쓰지 않았냐” 하고 보여주셨는데, 거기에 준이 형의 「모래내 그림자극」이 실려 있더라고요. 시를 이렇게 써라, 이렇게 써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근    - 제가 그렇게 강요했나요?

 

      황    - 엄청 강조하셨어요. (웃음) 어쨌든 습작을 계속하면서 다른 친구들 하듯이 당시에 유행하던 선배들의 시를 열심히 읽고 따라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이렇게 하면 진짜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선배 시인들이 너무 잘하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이렇게 대단한데, 이 사람들을 따라해 봐야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 글 쓰는 친구들도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선배들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에 학교 공부를 하면서 김종삼이나 김춘수 등의 시인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게 확실한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읽을수록 정말 대단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여기 있었구나, 생각했어요. 내가 겨냥을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미 죽어버린 이 아름다운 시인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근    - 부끄럽네요. 박준 시인한테 부끄러운 게 아니라 황인찬 시인한테요. 근데 저는 한 학기 수업을 했던 터라서, 제가 권리 주장을 할 만한 그런 게 전혀 아니었어요. 조혜은 시인은요?

 

      조    - 저도 학교 다니면서 휴학을 많이 했었는데, 아마 휴학 없이 쭉 다녔다면 특수교육과를 졸업해서 교사가 되었을 것 같아요. 한 학기 다니고 등록금 버는 식으로 계속 휴학하며 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다시 복학을 했는데, 김행숙 선생님이 저희 학교에 오셨어요. 국문과를 부전공하며 창작 수업을 듣다가 김행숙 교수님의 권유로 시를 쓰게 됐는데, 정말 우연히 시를 쓰게 된 거죠. 저희 과에서는 기관으로 나가는 임상실습, 일반 학교의 도움반으로 나가는 통합교육실습, 그리고 특수학교로 나가는 실습 이렇게 실습이 세 번이나 있었어요. 습작기 동안에는 거의 실습을 나갔던 것 같아요. 교수님께 직접 보여드리고 말씀을 듣기보다는 학교에 실습용 교재교구 만들러 왔다가 그동안 썼던 시 뭉치를 교수님 방 아래 밀어 놓고 가고, 나중에 한 번에 이야기를 듣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땐 아무것도 모를 때니까 정말 즐겁게 철부지처럼 시를 썼던 것 같아요. 3학년 때 쓰기 시작해서 졸업할 때까지 2년 썼는데, 졸업하면서 운 좋게 등단이 빨리 됐어요. 등단하고는 발달장애아동 치료센터에서 자폐아동 치료교사로 일했었는데, 학부모님과 오해가 생겼고 그때 주고받은 상처들로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인생의 진로가 다시 바뀌어 문예창작학과에 들어오게 되었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근    - 1년이든 2년이든 습작기가 길든 짧든 결국 할 사람은 한다니까요. 습작기가 긴 사람만 억울한 느낌이이에요. 백상웅 시인은 좀 길었죠?

 

      백    - 저는 학부를 원광대학교에서 마쳤는데 과 생활을 별로 안 하고 동아리 생활을 많이 했어요, 문학회에서. 벽에는 세로선이 그어져 있고 1기부터 최근 선배까지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맨 위에 안도현, 이정하, 강태형……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나도 졸업하고 빨리 이름이 저기에 적히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그때 당시 저는 기형도도 모르고. (웃음) 치기에 어려서는 거만해지기만 했어요. 난 시를 쓸 거야. 시인으로 살다가 죽을 거야. 이런 생각만 품고 살다가 군대 가기 전에 김경주 선배와 윤석정 선배가 복학을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합평을 하는데, 부족한 제 머리로 어리석은 말을 많이 했지요.

 

      근    - 선배들한테요?

 

      백    - 네, 말도 잘 안 들었어요. 전역하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가 학교를 그만뒀어요. 시가 제 길이 아닌 것 같았어요. 너무 힘들어서 돈이나 벌다가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우석대 안도현 교수님이 오라고 하셔서 수능을 다시 치렀죠. 가서는 그 전에 썼던 시들을 보여드렸는데, 보여드리고서 울었어요. 보시자마자 갖다 버리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재미있게 썼어요. 시가 이런 거구나 하면서. 배운 다음 다시 쓰기 시작해서.
    저는 습작기가 길었다기보다는 짧았다고 생각해요. 대신 시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이 7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시만 고민하기보다는 소설도 고민하고 여러 가지를 같이 고민했다면 같이 등단했을 텐데. (웃음)

 

      준    - 습작 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다들 힘이 빠지잖아요. 하지만 습작기가 짧든 길든 습작이 계속되어야 등단도 할 수 있지요. 그렇게 힘이 들 때 습작의 치열함을 되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승을 만나는 것 같아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그 시기에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요.

 

      근    - 부러운 일이에요. 문학적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스승이 습작기에 있었다는 건 무척 행복한 습작기를 보냈다는 얘기죠. 저는 별로 그렇지 않았어요. 선생님이야 계셨지만 아주 가까이서 고민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던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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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파 이후’라는 세대론

 

      근    - 황인찬 시인이 잠깐 미래파 이야기를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세대론을 싫어하는 편입니다만, 아무래도 ‘미래파 이후’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특히 황인찬 시인의 경우엔 미래파 이후 특집에서 많이 다뤄졌죠? 그 ‘미래파 이후’라는 세대론에 대한 부담은 없었는지 궁금해요. 세대론 때문에 선배들이 여러분 세대가 시집을 낼 때마다 예의주시하는 시선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고요. 저랑 여러분이 십 년 정도 차이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비평가들이 보는 눈과 선배 시인으로서 후배 시인의 시집을 기다리는 건 좀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그 시선이 여러분의 작품에 집중되는 것 같아요. 그런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준    - 미래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분명 긍적적인 일이었어요. 기존 논의를 보면서는 방금 황인찬이 얘기했던 것처럼 새로운 시를 이렇게 잘 쓰는 시인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담론이 이렇게 시인들을 빨리 소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고요. 문제는 ‘미래파 이후’를 이야기할 때만큼은 기존 미래파를 논의했던 시각보다 더 확장되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미래파 이후’ 논의라는 것은 기존 미래파 담론에 지나치게 갇혀 있어요. 반 미래파, 비 미래파, 포스트 미래파를 고루 생각해 봐야 하는데 다들 미래파의 후계자를 찾는 일에만 급급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황    - 소비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고 있는 걸 실감하고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 제 또래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책이 나오기도 전에 급속도로 소비가 시작되었으니까요. 어디선가 “황인찬이나 누구 시인들은 시집이 나오기도 전에 시집이 나온 것처럼 취급받고 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무서웠어요. 기쁘지가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시집이 나온 것도 아니었고 저 스스로가 저의 시를 정립시킨 상황도 아니었는데, 나조차도 모르는 나의 시가 이렇게 빨리 정리되고 있구나, 내가 이러다가 진짜 망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빠르게 소비되어 빠르게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어떻게 하면 이 속도에 저항할 수 있지? 이런 생각도 하는 한편, 동시에 이런 흐름과 무관한 저만의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미래파라는 명명 자체가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었잖아요.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었는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기도 했고요. 미래파 이후라는 것도 그래서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된 것 아닐까요. 미래파의 후계를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고 봐요. 지금 여기에 어떤 새로운 시인들이 있고, 그들이 쓰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데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삶의 양상을 비교해 볼 때,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잖아요.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어떠한 시대인지, 그리하여 2010년의 시가 어떤 사회적 맥락 아래 튀어나온 것인지 더 면밀히 봐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이토록 빠른 소비에 저항하는 방식이 되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근    - 전 미래파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미래파와 동세대 사람으로서 얘기하자면, ‘미래파 이후’라는 특집이든 담론이든 그런 것들이 미래파라는 우리 문학의 딜레마를 빨리 극복해 버리려고 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우리 세대에 미래파라고 불렸던 사람들의 문학은 딜레마인 채로 남아 있고, 딜레마에 대한 대안을 찾다 보니 ‘미래파 이후’라는 대안이 나오지 않았나. 그래서 미래파도 미래파지만, 여러분도 굉장히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요.

 

      백    - 저는 미래파라고 일컬어진 선배들의 시를 읽으며 공부를 했고 미래파 선배들을 보면 피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정하게 미래‘파’라는 파 안에 개별적인 걸 생각해 보자면 각각 시인들의 시들이 전부 달랐고 개성도 있었는데 함몰되어 버린 경우도 있었고. 같은 이름으로 엮여버려서 이름을 더 날렸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들 각자의 개성이나 작품성 같은 게 묻혀버린 게 아닌가 했어요. 저는 한국 문학, 한국 시에 대한 평론가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요. 뭐랄까, 자꾸 엮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쓰게끔 만든다고 생각해요.
    미래파를 떠나면 각자의 개성이 있어 좋아하는 선배들이에요. 나는 우리나라 평론가들의 책임이 엄청 크다고 봐요. 이게 과연 올바른 평론인가 싶어서 실망스러운 경우도 많아요. 문학을 평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언어를 내세우고 있어요. 재미가 없어요. 제가 문창과를 다니긴 했지만 심도 깊게 공부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점도 있어요. 하지만 시 문학이 빨리 소비되는 것도 그렇고, 독자를 잃어 가는 것도 그렇고, 저는 이게 시인의 잘못도 있지만 평론가의 잘못도 크다고 봐요. 왜냐면 그 뒤에 등단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쓰려고 했고, 자기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 이건 좀 지워 주세요. (웃음)

 

      근    - 아니, 난 넣어야 될 것 같아.

 

      백    - 평론가들을 싫어한다는 건 아니고요. (웃음) 좋아하긴 하는데…….

 

      조    - 2008년에 등단했는데 그때 갓 등단한 시인들 몇 명과 좌담을 한 적이 있어요. 똑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그땐 열심히 대답한 기억이 나는데 요새 미래파 얘길 들으면 옛날 얘기 같아요. 느낌이 별로 없는 감도 있고요. 그게 한때 주요한 담론일 때가 있었는데 지금 저희에게는 그때만큼의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주류와 비주류로 나눌 순 없겠지만 그런 문제 같기도 하고요. 등단과 동시에 많은 청탁을 받고 정말 많이 소비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저 같은 경우엔 굉장히 조용히 등단을 하고 혼자 시를 쓰면서 발표할 지면을 한참 기다리다가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첫 발표를 한 기억이 있어요. 저의 경우엔 소비되고 주목받는 친구들에 비해서 비교적 담담하게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제 시를 썼던 것 같아요. 누가 미래파로 묶이는지 별로 상관이 없었던 건, 그냥 제가 보기에 모두 개별적으로 자신의 시를 쓰고 있고, 테두리가 다른 시인들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오늘 만난 시인들도 그렇고 선배 시인들도 그렇고.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시인들이 있긴 하지만 각자 개성이 다르고 내가 그들에게 배우고 싶고 좋아하는 부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게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뭐 근데 이전에는 그런 담론이라도 있었던 반면에 지금은 주요한 이슈가 없는 느낌이에요. 뭔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근    - 저는 저희 세대가 미래파든 아니든 간에, 80년대 문학에 대한 부채의식과 함께 90년대 시의 흐름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흐름들을 극복하려다 보니 이전에 보지 못했던 언어들을 많이 쏟아냈던 거죠. 여러분 바로 전 세대가 소위 미래파라고 불린 세대들이잖아요. 황인찬 시인은 이 사람들을 극복해 봐야겠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백    - 시어 같은 걸 생각할 때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단어도 그렇고, 남들이 안 쓰는 단어들, 노동이나, 이런 쪽에서 극복하고 낯설게 하려고 노력했고, 선배 시인들의 감각이 너무 과잉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하고, 자격지심같이, 난 저렇게 못 쓸 것 같은, 근데 내가 그렇게 쓰면 그 밑의 아류 같은 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근    - 이 주제가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거여서 말하긴 했지만, 사실 불편해요. 얼마 전에 이원 시인이 어떤 심사평에선가 그런 말을 했더라고요. “새로움 앞에서 선배도 후배도 다 동료다”라고. 선배가 있어서 후배가 있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시 앞에서 다 같이 동료인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여러분도 개의치 않고 각자의 길을 열심히 가면 되겠지요. 다만 시가 소비되는 일에 대한 비판은 시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새삼 생각해 보게 되네요. 그게 독자들이 시를 오래 붙들고 읽을 수 있는 걸 막는 게 아닌가 반성도 촉구해 볼 일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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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    - 마지막으로 각자 이후 계획에 대해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첫 시집 이후의 창작의 고민도 좋고요.

 

      황    - 시집 낸 후의 근황과 이어지는 얘기일 텐데요, 제가 요새 생각하는 건 이거예요. 박근혜 시대의 시 쓰기란 과연 뭐지? 이명박 정부 시절과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지난 대선 이후로 시 쓰기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꾸고 있는 중이에요. 그 생각이 충분히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말을 할 수 없지만, 앞으로 쓰는 시는 아마 이 생각을 계속 정리해 나가며 쓰게 될 것 같아요. 지금 여기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요. 이렇게 박근혜만 딱 꼬집어 말하다 보니 제가 말하는 바가 좀 왜곡되어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시 쓰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오늘날 시라는 게 무슨 소용과 필요가 있지?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이런 생각들에 대한 정리요.

 

      백    - 시집을 냈는데 청탁이 안 들어왔어요. 남들은 막 들어온다던데. 저는 시가 안 좋기 때문에 시를 많이 안 읽고, 사람들이 안 불러 주는 거라는 걸 철칙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어요. 다음 시집에는 더 좋게, 시집 내고 큰소리치고 싶어요. 시에서 완성도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다음 시집의 완성도를 더 높여서 더 거만하게 큰소리치고, “봐라 너네들” 이렇게 하고 싶고. 시 쓰는 건 노동이라 생각해요. 투잡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투잡을 하면서 제 시에서 나오듯이 한 손 부러지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열심히 살아야죠.

 

      준    - 앞으로 어떤 시를 쓸 것인가 생각해 보면 한없이 막막해져요. 그럴 때면 이미 제가 겪을 과정들을 잘 보내 온 선배들을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 선배들은 하나같이 좋은 시를 쓰면서도 옳고 좋은 삶을 살아온 분들이에요. 제가 그들에게 배운 것은 좋은 삶을 살다 보면 좋은 시를 쓸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조금 추상적인 명제이긴 하지만 그렇게 믿고 있고 또 믿고 싶습니다.

 

      조    - 개인적으로 생활의 변화가 많아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요즘은 시가 잘 안 써지고 있어서 어떻게 쓸지 또 무엇을 쓸지 이런 고민이 많아요. 그밖에 큰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근    -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후배들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 노파심 같은 것들에 대해 새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의 시에 대해서도 새롭게 고민하게 되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도, 이 좌담을 읽는 선배들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배 시인이 그런 얘길 합니다. 젊은 것들이 힘이 세지, 라고 말이죠. 저는 그 말이 제가 후배로서 선배한테 받은 가장 큰 격려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저보다 젊고, 저보다 새롭고, 저보다 힘이 더 세고, 우리 다 같이 시 안에서 선배 후배를 떠나서 좋은 동료라는 생각을 가지고 끝까지 좋은 시를 같이 써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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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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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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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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