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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릇빠릇 콘서트 리뷰] 참 예쁜 첫 단추

  • 작성일 2013-07-02
  • 조회수 1,921

 

 

참 예쁜 첫 단추

― 제1회 파릇빠릇 문학 콘서트를 돌아보는 구구절절 시시콜콜 후기

 

 


박서련

 

 

 

 

   지각이다
   오랜만에 찾은 마로니에 공원 입구에서 저도 모르게 뇌까렸습니다. 재미있는 기획 행사가 새로 시작된다는 얘기를 뒤늦게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건만, 혜화역 2번 출구 앞은 온통 공사판이지 뭐예요. 행사장소 약도를 대충 보고 마로니에 공원 안쪽 어디쯤이겠거니 했건만 공원 전체가 간이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길을 찾을 엄두도 안 나더군요. 하는 수 없이 탑돌이 하듯 벽을 더듬으며 공사장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도대체 이 난리통 어디에, ‘예술가의 집’이 있단 말인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스스로에게 농담을 걸듯 오늘 행사의 타이틀을 떠올렸습니다.
   젊음, 출구가 막혔거나 갑작스럽거나.

 

   빙글빙글 돌고 돌아 드디어 ‘예술가의 집’을 발견했지만 어쩐지 들어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더위에 짜증은 날 대로 났고, 이미 지각이고, 뭣보다 문학 콘서트라는 게 어차피 그렇고 그런 거란 사실을 너무 잘 알아서 말이죠. 관객은 열서너 명이 될까 말까 할 테고, 그나마 그중 서너 명을 기다리느라 이삼십 분 늦게 시작해서는, 졸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작가님 말씀에 끄덕끄덕 맞장구를 치고, 이미 할 말을 다 한 작가님께 문학이란 무엇인가요 따위 뻔한 질문을 하고, 사진 찍고 사인 받아 페이스북에 인증샷을 올리는…… 뭐 그런 게 바로 문학 콘서트의 실체 아니겠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껏 많은 문학 콘서트를 보아 왔고 몇 번은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는걸요. 초절정 인기 작가를 초청한 게 아니고서야, 사람들이 문학 콘서트 같은 걸 좋아할 리 없다고요. 더구나 이번 초대작가들은 등단 5년 미만의 신인들이라던걸요. 제가 아직 등단을 못 해서 시새워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 사람들은 이런 문학 콘서트 따위에 관심이 없단 말이에요!

 

   마음속으로 투덜투덜 불평을 해가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세상에,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죠. 제 귀가 고장 났거나 사람들이 미쳤거나. 게다가 층계참에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면 관객이 꽤 많다는 건데……?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 의심하며 행사장 문을 힘껏 열어젖혔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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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로 사람이 많잖아!
문예창작과나 국문과 학생 몇이 옹기종기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행사장은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들로 붐비었습니다. 와중에 매너 없이 큰 소리로 문을 열며 들어온 저는 쏟아지는 눈총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저를, 행사 관계자분이 잡아끌었습니다.
   왜 이제 오니
   그렇습니다. 이제 와서 밝히기에도 민망한 감이 없지 않지만…… 사실 저는 사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투입된 측근이었답니다. 그리고 이미 보신 바와 같이 이백 자 원고지 약 여섯 장에 해당하는 글줄을 쓰잘 데 없는 지각 이야기에 투자해 버렸고요. 그러니까 저는, 스스로가 프락치인 바람에, 자꾸 주위를 둘러보며 분명히 다들 어디선가 나처럼 차출된 측근들일 거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잖아요. 문학콘서트에, 이런 신인 작가들을 보러 올 사람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잖아요! 다들 문학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게 아닌 다음에야.

 

   다행히 제 예상과 소망대로 행사는 조금 늦게 시작된 상태였습니다. 제가 들어갔을 때는 첫 번째 초대작가인 문부일 소설가의 소설 「뜨는 날」의 낭독 공연이 한창이었습니다. 낭독 공연을 놓치지 않다니 운이 좋았지 뭐예요. 설마, 남이 책 읽는 소리 듣는 게 뭐가 재미있었겠냐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냥 책을 읽는 게 아니라고요. 전문 연출가가 연출하고 배우들이 생동감 있게 연기하는 엄연한 ‘공연’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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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이야기도 한창 위기가 고조되는 시점이었기에,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빨려들듯이 공연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작품 속 표현처럼 ‘집도 없고 돈도 없는’ 젊음이, 출구 없이 현실을 표류하는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었습니다. 낭독이 끝날 즈음에는 왜 이 작품을 미리 읽어 보지 않고 왔을까, 하다못해 지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하고 자책하게 되더라고요.

 

   낭독 공연이 끝나자 젊고 아름다운 여성 한 명이 등장했습니다. “작가 문부일을 말하다”의 시간이었죠. 연사는 초대작가의 문우인 설혜원 소설가였습니다. 와, 미인이다 하고 감탄할 틈도 없이 설혜원 소설가는 문부일 소설가의 면면들을 폭로하기에 나섰습니다. 낭독 공연을 들으며 내심 ‘문부일이라는 작가, 날카롭지만 어딘지 모성애를 자극하는 면이 있는 차가운 도시남자일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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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요,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죠.
   진지해졌다 유쾌해졌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던 설혜원 소설가의 문부일 작가론이 어느새 끝나고, 팸플릿에 새겨진 캐리커처랑 무섭도록 똑같이 생긴 젊은 남자 작가가 무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날카롭게 세워 목을 덮은 폴로셔츠 깃까지 그림이랑 똑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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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문부일 소설가가 제 생각보다 더 젊어서 놀랐어요. 작품 낭독을 들으면서 이 사람, 젊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젊다 못해 푸르지 뭐예요. 또래에다 인상이 친근해서 꼭 이웃집 오빠 같은데 소설가라니 왠지 더 대단한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웬걸, 사회자 최민석 소설가와의 대화는 어찌나 능수능란하고 웅숭깊던지 저 사람 정말은 몇 살일까 자꾸 궁금해지더라고요. 최민석 소설가와 문부일 소설가 두 분 모두 재치 있게 말씀을 잘하셔서, 보고 있자니 수요일 밤에 하는 토크쇼 방청객이 된 느낌이었어요. 사실 토크쇼보다 여러 모로 나았죠. 재미만 있어도 충분한데 교양까지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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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차례는 「보늬」의 정세랑 소설가였습니다. 정세랑 소설가 본인의 짤막한 소개말과 최민석 소설가의 작품소개를 듣고 나니 어쩐지 문학 콘서트가 아니라 독립영화의 제작 발표회나 조금 수상한 인터넷 벤처 기업의 IR 브리핑 같은 것을 보러 온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발표를 다 듣고 나면 왠지 투자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해야 될 것 같은 기분 있잖아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끝나고 나니 어쩐지…… 할 수만 있다면 꼭 「보늬」에 투자하고 싶어졌습니다. 뭘 얼마나, 왜 투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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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독 공연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완벽한 모놀로그였습니다. 여배우 한 분이 죽은 보늬 언니가 되었다가, 화자인 보윤이가 되었다가 하며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셨어요. 조금 뒤 “작가와의 만남” 순서에서 정세랑 소설가조차 내가 쓴 소설이 이렇게 슬펐던가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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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늬」 자체가 정세랑 소설가 본인의 광고회사 시절 경험을 실은 작품이어서인지 “작가 정세랑을 말하다”는 회사 동료였던 성혜현 씨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나오자마자 우선 “언니는 눈이 동그랗고 피부가 희다”며 정세랑 작가의 미모를 언급하시는 모습에 무릇 여자들의 우정이란 이런 것이지 하고 웃음 짓게 되더군요.

   막연히 정세랑 소설가는 소설 속 화자랑 비슷할 것 같다고 지레짐작했는데, “작가와의 만남”에서 최민석 소설가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니 의외로 매우 귀엽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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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짝 손님으로 함께해 준 의정부 부용고 3학년 학생들을 무대 위로 모셨을 때는 마침내 정세랑 소설가의 귀여움이 극에 달하여, 말하는 것만 듣고는 누가 여고생이고 누가 소설가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부용고 학생들이 똑똑하고 당차게 말을 잘해서이기도 했지만 말이에요

 

 

   시작을 늦게 해도 끝은 일찍 맺어야 한다는 사회자 최민석 소설가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행사는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끝났습니다. 게다가 행사만 끝났다고 다가 아니잖아요, 사인과 사진 찍기를 청하는 독자들이 몰려들어 오늘의 작가인 문부일 소설가와 정세랑 소설가는 한동안 즐거운 곤혹을 치렀답니다. 행사를 기획한 분들은 무대 아래에서 휴우, 무사히 마쳤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요. 어쩐지 저까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오길 잘했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심이에요. 이렇게 재미있는 문학 콘서트는 처음이었는걸요. 하나 둘 ‘예술가의 집’을 나서는 다른 관객들이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의리로 참석했던 저조차 결국 재미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에요.

 

   아 참, 끝내기 전 중요한 공지사항 전달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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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릇, 빠릇 문학 콘서트는 이번 달로 제1회라는 것! 즉 다음 콘서트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어떤 일이든 시작이 반이고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들 하던데, 첫 단추가 이렇게 예쁘니 앞으로는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지 상상하기도 벅차네요.

 

   2회의 손님들로는 젊은 시인들을 부른대요. 「벽」의 안희연 시인, 「벽의 자세」의 황종권 시인이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꼭 두 작가가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제목 아닌가요? 벌써부터 다음 콘서트의 타이틀이 궁금해지네요.
   다음 콘서트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다음번엔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이번 콘서트가 재미있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또 관객이 엄청 몰릴 텐데, 자리가 없으면 곤란하잖아요.
   문학 콘서트는 재미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에이~ 여태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니파크 찍고 씀

 

 

제1회 파릇빠릇 콘서트 1부 영상 보기   제2회 파릇빠릇 콘서트 2부 영상 보기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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