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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惡記) 23~27 - 연재 마지막회

  • 작성일 2013-09-01
  • 조회수 1,214

 


악기(惡記) 연재 마지막회 (23~27회)

 

조연호

 

 

 

 

    23

 

    어린 나는 『병자들의 무언』을 좋아했다. 그래서 종종 괴물 탈을 쓰고 거리에 나가 어른들의 비아냥으로부터 나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을 즐기곤 했다. 그럴 때 나는 병석의 순교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던 괴물의 피곤을 이해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은 단지 괴물 가면 뒤에 숨어 성자가 흐느껴 우는 소리를 흉내내었을 뿐이었다. 내 귀에 들려온 것은 핏방울, 신성의 얼굴 전체를 뒤덮은 축복의 인체였다.

 

 

    24

 

    정신의 해안에 차오는 밀물로써 인간의 응답이 심연이 아니라 적위(赤緯)인 것은 그가 피에 기회를 주는 것과 피에 엄존한 정신으로서의 현기증을 주는 것 간의 뿌리 깊은 편차에서 온다. 물이 대지 깊이 차오르면 사람의 수위(水位)는 율법적 결정을 통해 예술의 문제를 선량의 문제로 한정시키기로 결정한다. 하늘이 행위 하지 않는 자들의 무덤이라는 그런 이행이 미래를, 전체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는 부분을, 아침의 뭍에 도달하게 한다. 사물은 실현이 없는 곳에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 감정 전체가 동물 사지(四肢)에서 자란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짐승의 단계에서 인간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가축의 단계로 건너뛰는 특권을 이용해 태양을 적으로 돌린 기분을 아는가? 비유된 것은 비유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혹은 더 말해야 하는 것의 상징 형식인 한 여백은 여백으로만 치환될 수 있다. 아날로지는 쇠하는 동안 물질의 고통이 존재의 정서이기 위해 허공에 대해 신뢰하지 말아야 할 것을 특히 인간으로 지목하는 경우에 한해 정당하다. 본성이 그 자신의 원천을 위해 거의 쓸모가 없다면, 그것은 그 본성상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망각해야 할 조건이 자신의 기억보다 더욱 불충분하다는 데 있다. 임상의 한도 내에서 자아가 인체에 대한 반격이라면, 처벌의 한도 내에서 악마는 정신의 격려이기를 갈구한다.

 

    선의지라는 가치에서 벗어나 투영이 존재의 바꾸지 못할 위치에 가하는 자기 순화라는 규정을 통해 아름다움은 생애적 형태로 전환된다. 이런 분화의 방향은 모든 인간의 서술에 걸쳐 모멸과의 화해이므로, 기록에 대한 불만은 인간이 인간을 보편이게 하는 계기에 한해 구술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 자아와 대상이 매혹과 자조의 대상임은 경험 최초의 이해 가운데 하나였다. 자기반영적이기 때문에 늘상 경험은 서술하는 것이고, 기억에 기록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문자적이다. 그를 둘러싼 희박하고 가쁜 계절이 천체와 물리의 넓이를 인식의 길이로 전환한다. 이 문서의 대기(大氣)에는 자유 개념이 없으며, 제한되지 않은 것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기술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늘이 일면적이지도 다면적이지도 못한 것은 고통 받는 자가 바라는 보편이 죽음의 순수성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25

 

    인간의 포도주가 담긴 곳, 혹은 탯줄이 잘리는 곳, 자기가 파헤쳐져 꺼내진 자궁과의 불일치를 맛보는 곳, 가능한 과거 전체와 미래 전체 두 방향 모두 세계라 부르는 방식으로 언표될 수 있는 존재양식을 가지지 않는 곳, 괴물의 밤하늘에 뚜렷이 존재했던 악의가 별이 사그라지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운명적 불길함을 지니고 탁자의 양초 속으로 깊게 녹아내릴 때 느끼는 피로감인 곳, 그곳에서 실패는 방법으로써 양식적 도전을 받는다.

 

    이 경험을 역사라 일컫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 사물이 말하고자 하는 범위보다 비좁은 개념을 판단이라 일컫는 방식으로, 경험은 감관의 기능을 훌륭히 상실해 왔다. 경험은 기억을 수용하는 개체가 수행하는 특정 양식이 아니라, 재현에 대한 집착이 보여준 촘촘한 착란들 사이에 문학자라는 간격을 부여하는 허구 양식이다. 난해든 순해든 꾸준히 목적어를 사용하여 동사를 잃어 온 사람들은 시인이며 동시에 물상(物象)인 무엇이다. 어떤 감정이 자기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알게 될 때의 문학자와도 같이 기억은 세계의 가독성을 익힌 것이다.

 

 

    26

 

    인간의 계절은 포도주로 피부색을 거둬간다. 밤이면 들려오다가 멈추곤 하던 소리 속에서 위생병의 손끝이 봉합에 대한 감각으로 꿈틀댄다. 그러한 검열이 상징을 요구한다. 기억의 문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험에 의해 종결되지 않는다. 초가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의 개수를 망각하지 않는 이해에 의해 우리 자신은 너무도 여러 개인 탓이다. 전락 자체의 이미지이며 하나의 파토스인 괴물 자신은 그런 이유로 그 무엇으로든 전락할 수 없다.

 

    그런 자가 더 작은 동물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을 설립함으로써 비약하도록 허락한 우리가 과연? 인간이 정관적이며 정량적인 분석에 적응되기 쉬울 정도로 그 각도가 기울었다는 증명으로써, 신의 식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이변(異變)의 크기로 줄어들고만 인간이 과연? 자신들의 불구에 대한 이유를 얻어내기 위해 증거를 숭배했던 우리가 과연? 자연과 같은 종이면서도 대상과 달라지기 위해 사물을 멈춰 세웠던 우리가 과연? 서로에게서 진실을 듣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던 인간은 이러한 연쇄를 의문한다; 살아남아야 하는 작은 물벼룩 하나의 겨울, 야생으로 남아 원시와 견주는 손길, 그런 형상으로 작은 양(量)들이 더욱 적어진다는 것, 성(性) 조숙이 일어나는 계절, 이들 시간이 우리의 유생상태가 다 자라기 전에 죽음을 시작하는 위대한 번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간이 자신의 그림자로 죄를 씻을 때만 그 죄도 비로소 고대의 체액설로 이해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듯, 희생을 가진 자가 자기희생이 팔려가지 못해서 기쁘지 못했던 이 감정은, 질문의 모든 것에 답했기 때문인 타인에 의해 불쾌가 더욱 깊어진다. 훌륭한 병을 가진 자들 속에서 들끓고 있는 것이 증오를 상해하기 위해 무기를 쥐는 부스러기 칼밥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가 과연? 이단의 밀물에 뛰어들 준비가 된 망령은 신이 잠들기 전엔 고귀한 신부였고 인간이 잠깨고 난 후엔 고귀한 과부였다.

 

 

    27

 

    밤을 걷는 자의 고통 속에 별은 희석되어 간다. 초의 불꽃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한 잡초가 번지고 있는 정원사의 낙담을 상상해 보라. 현재로 이전을 죽이기 이전, 번역 외에 다른 무엇도 될 수 없는 오비디우스의 염탐자로서, 나는 무성한 백치의 기쁨을 느낀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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