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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문학특강 참여 후기] 글쓰기는 누가 가르치는 걸까

  • 작성일 2013-09-01
  • 조회수 512

[민들레 문학특강 참여후기]

 

 

글쓰기는 누가 가르치는 걸까

 

황규관 (시인)

 

 

 

 

    정신이 아픈 여성들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말해서 정신이 ‘아픈’ 사람에게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다고는 했으니 이제 와서 별수 없겠군, 이런 생각으로 시설을 처음 방문했을 때 든 막막한 기분은 정말 나 자신에게도 낯설었다.
    처음 민들레문학 특강을 하겠다고 한 것은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눈빛들, 시간들, 그리고 이야기들을 만나 보자는 의도에서였는데 막상 마주앉아서 맞추어 본 표정들은 꺼져 가는 불빛을 품은 동굴 같았다. 작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자던 다짐이 순간 흔들렸지만 나는 준비한 글을 읽어 가며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 시는 어떻습니까? 이 표현 재밌지요? 사실 이 시는…… 하면서 약간의 가십을 섞어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처음에 짜놓은 계획은 그때그때 변화를 주어야 했다. 시설의 담당 팀장이 사전에 전해 주었듯 이들의 마음은 변화무쌍했기에 내가 그 변화를 따라가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들 글쓰기를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일반적인 글쓰기 방법으로는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할 것 같아서 읽어 준 글을 내가 돌아가면서 한 번 더 읽고 쓸 때 슬쩍 베끼라고(?) 권했지만 그게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아무런 흔들림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강의는 실패일 가능성이 높은데 결과적으로 나는 그것을 자주 경험했다.
    상대가 여성들이면서 정신이 아픈 사람들이다 보니 어떤 농을 던져야 하는지도 어떤 에피소드를 들려주어야 하는지도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이야기가 샛길로 빠져 사랑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는데, 대뜸 한 분이 왜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느냐고 따져 순간 입을 닫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어떤 긴장국면이 4~5주 동안 진행되었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실기로 들어가자 반응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옆방에 작은 앉은뱅이 상을 펴고 한 사람씩 불러 쓴 글에 대한 개인지도를 병행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기억이 언어화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왜 이 글을 쓰게 되었어요? 하고 물으면 조각난 기억이 흩어진 채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아픈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내 역할과 역량이 과연 이들의 기억의 언어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회의와 우울이 밀려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글쓰기에 기억의 힘이 밑받침되지 않는다면 대체 그 글은 무엇인 걸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지금 하신 것처럼 말을 글로 그대로 옮겨 보세요, 친구와 수다를 떨듯이 말입니다, 아니면 거울을 보고 자신에게 말하듯이요. 사실 이러한 주문 자체가 얼마나 황망하고 맥락 없는 중얼거림인지는 직접 말을 한 나 자신이 아니고는 느낄 수 없으리라. 그분들의 기억은 백지 위에 아무리 빽빽이 써와도 옮겨 보면 열 줄을 넘지 못했다.
    글쓰기가 기억과 밀접한 양식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기억이 소실된 글쓰기는 추상도 아니고 새로운 양식도 아니다. 그것마저 기억이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정신이 아픈 경우 그 몸짓마저 어딘가 휘적거린다는 느낌을 주거나 그 놀림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쩌면 기억이 뇌와만 상관있는 게 아니라 몸과도 상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모든 분이 같은 증상은 아니었다. 분명 눈에 빛이 들어왔는데 스스로 그것을 끄려 하거나 아니면 글쓰기를 통해서 기억을 언어화하려는 고된 작업을 피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글쓰기는 이성이라는 물건을 가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선생은 이성을 통해서 기억을 언어로 옮기길 채근하는 존재인 것. 그랬을 때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는 글쟁이들이라면 모르지 않겠지만 그 역방향의 효과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글, 즉 文은 좀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한사코 쓰지 않겠다는 분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은 12주만 허락된 내가 할 일은 아니었다. 덧붙여 열 줄 이상을 넘기지 못하는 언어로 민들레문학상을 바라는 것도 조금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일종의 졸업 작품을 쓰게 하기로 다시 계획을 바꿨다. 물론 쓴 글은 약간의 지도를 통과해야 할 것. 그러면 글을 계속 써야 하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드리겠습니다.
    마치 숙제하듯 쓴 글을 가지고 왔지만 거의 대부분이 옮겨 보면 반 페이지가 채 되지 않았다. 수다를 떨게 하고 그 수다를 글로 옮겨 보자 하면 고개를 가로젓기 일쑤였다. 수정을 해온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좀처럼 한 편의 글이라고는 봐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나에게 글 쓰는 데 도와주지는 않고 지적만 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왜 글을 자신이 먼저 쓰기 시작해야 하는지 설명해야 했고 그 지점에서, 솔직히, 이 일에 대해서 약간의 회의가 밀려왔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말을 하게 하고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받아 적는 것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을까? 다른 시설에서는 강사가 수업시간 내에 쓰기만 가르친다는데. 사실 이 시간대를 지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쓴 글이 꾸준히 내게 도착했다. 앉은뱅이 상 앞에서 다시 설명하고 대화하고 수정을 하게 했지만 민들레문학상은 개뿔! 나는 어쨌든 이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게 만들리라. 이게 내가 막바지에 다진 마음이었다. 마지막에 확인해 보니 22명 중 끝까지 쓰지 않은 사람은 3명이었다.
    뿌듯하지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결과였다. 다만 이번 특강을 끝내고 나서도 아직 풀지 못한 화두가 있다면, 정신이 아픈 사람에게 과연 글쓰기는 무엇인가 하는 아주 단순한 질문이다. 미술이나 음악, 그리고 만들기와는 다른 이 글쓰기를 우리는 과연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건 단순히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나온 체념 비슷한 게 아니다. 아픈 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정확히 말해 심하게 일그러진 영혼으로 글쓰기는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글쓰기를 배운 것은 정작 가르친다는 나 자신이었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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