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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세이] 콘텐츠의 사회학②

  • 작성일 2013-11-01
  • 조회수 1,438

 


콘텐츠의 사회학 ②

 

장이지(시인)

 

 

 

 

    T: 문학사와 데이터베이스

 

    이나바 신이치로(稻葉振一郞)는 전근대와 근대, 포스트모던에 있어서 이야기의 양상을 각각 데이터베이스=이야기, 데이터베이스 없는 이야기(현실), 데이터베이스≠이야기로 정리한 바 있다(『모던의 쿨다운』, NTT출판, 2006). 물론 이것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염두에 둔 도식이다.
    ‘데이터베이스≠이야기’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큰 비(非)이야기로서의 데이터베이스’라고도 할 수 있다. 데이터베이스가 이야기의 형태가 아닌 다른 요소들의 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여기서 가장 주목한 것은 ‘캐릭터’지만, 이 데이터베이스에는 ‘캐릭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 아닌 것이 데이터베이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데이터베이스를 ‘비(非)이야기들의 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근대까지는 이야기(=소설)가 현실을 재현한다고 여겨졌고, 그 이야기는 시간축을 따라 선형적인 양상을 띤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에 있어서 이야기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한 것으로서의 선형적인 양태를 띤 채 출현하지만은 않는다. 설사 선형적인 형식을 통해 출현하더라도 그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적인 소비자들에 의해 비선형적으로 소비되기 십상이다. 드라마를 줄거리 중심이 아니라 캐릭터 중심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을 떠올리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데이터베이스’라는 용어 자체인지도 모른다. 이나바 신이치로는 전근대 이야기의 양상을 ‘데이터베이스=이야기’라고 정리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근대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기억을 담지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의 이야기꾼은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 속에서 공동체의 기억을 자기의 것으로 전유하며 후대에 이것을 전달하는 신성한 임무에 복무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어떤 대학에서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고 해도, 전근대에 있어서 이야기의 양상을 ‘데이터베이스=이야기’라고 정리할 수는 없다. 전근대인들에게 그 이야기들은 ‘데이터’와 같은 수준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문학사’는 데이터베이스인가 하는 점이다. 근대의 이야기(=소설)는 주지하다시피 작가라는 특별한 개인의 특별한 경험, 특별한 사건을 다룬다. 문학사는 그 특별한 이야기들의 집적이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면, 1920년대의 문학사와 1990년대의 문학사는 그 부피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특별한 작품들을 다량 집적한 1990년대의 문학사는 데이터베이스일까. 물론 데이터베이스처럼 문학사를 정리․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작가가 문학사를 곁눈질하면서 자기 작품을 쓴다고 할 때, 그것은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는 식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근대 작가는 현실과 대결하기 위해 문학사를 참조한다. 문학사를 어떤 데이터베이스, 혹은 데이터의 차원에서 참조한다면, 비로소 그때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의 문학사는, 그때만 분명히 데이터베이스다. 요컨대 데이터베이스라는 문제 설정은 수용자의 ‘태도’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첫 회만 보고 줄거리의 흐름을 예측하고, 여러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유형을 분류하면서 드라마를 시청하고, 영화의 관습에 ‘익숙해져서’ 특정한 장면 뒤에 일어날 사건을 알아맞힌다면 이미 그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의 콘텐츠를 데이터베이스에 의거하여 소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세계관을 창작자 측에 적용해 보면, 가령 백일장에 간 학생이 불행한 가족사를 늘어놓으며 심사위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그 학생은 한국 문학사 안의 불행한 가족사를 ‘현실’이 아니라 ‘데이터’로 손쉽게 치환하여 활용한 것이 된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시가 양적으로 팽창했음에도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한 것 역시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이 그 경험의 얕음을 캐릭터나 외래어, 혹은 세계관의 데이터베이스로 커버해 왔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볼 시점에 우리는 이르렀다.

 

 

    C: 세계의 위기, 세카이계(セカイ系) 소설

 

    지난 세기말의 종말문학 부흥에 대해 존 조지프 애덤스(J. Joseph Adams)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시도한 바 있다.

 

    적어도 내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종말문학이 모험에 대한 우리의 기호, 즉 새로운 발견이 가져다주는 전율 및 뉴프런티어에의 갈망을 실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과거의 빚을 청산하여 새 출발을 가능케 해주며, 또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조금 더 빨리 알았을 경우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보여주기도 한다.(『종말문학걸작선1』, 황금가지, 2011)

 

    이 선집의 편집자는 종말문학을 상당히 효용론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세계 종말에 임하여 인간은 자신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를 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영화 「피크닉」(岩井俊二, 1996)을 보고 종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내가 죽으면 세계도 끝”이라고 하는 독일 관념철학에나 어울릴 법한 대사를 남기고 권총 자살을 한다. “적어도 내게” 종말서사는 『종말문학걸작선』 편집자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
    ‘세카이계’라고 하는 일본 서브컬처의 한 분파 역시 세계의 위기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종말문학과 친족관계에 있다. ‘세카이계 상상력’이란 “한마디로 주인공과 연애 상대의 작은 감정적인 인간관계(‘너와 나’)를 사회와 국가 같은 중간항의 묘사를 넣지 않고, ‘세계의 위기’나 ‘세계의 종말’이라는 거대한 존재론적 문제에 직결시키는 상상력”을 의미한다(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현실문화연구, 2012).
    「영원한 팔월, 어린 신의 세계」(『문장 웹진』, 2013년 10월호)에서 황인찬이 ‘세카이계’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은 “갑자기 비대해진 자아를 추스르지” 못한 소년소녀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를 서사화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을 보고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독자 측에서 볼 때, “왜 십대들의 연애에 ‘세계의 위기’니 ‘종말’이니 하는 이야기가 끼어드는 거지?” 하는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가령 세카이계 소설이 출현하기 전에도 십대들은 비대해진 자아 때문에 나름대로 괴로웠다. 그래서 ‘교육 제도’를 문제 삼는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했는데, 세카이계 이후의 서사는 손쉽게 더 거창한 문제를 연애와 결부시키고 있는 셈이다.
    세카이계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편집증 환자 슈레버」(1911)를 먼저 읽는 것도 한 방법이다. 독일에서 고검장을 지낸 슈레버 씨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으며, 때가 되면 자신이 신에 의해 여성으로 화하여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리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이 ‘세계의 종말’이라는 망상을 리비도의 회수로 설명한 바 있다. 쉽게 말해 ‘세계의 종말’이나 ‘위기’는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 자가 겪는 정신적 곤경, 정신적 폐허 상태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한참 연애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세계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실연한 사람에게 세계는 그저 잿빛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스즈미야 하루히’가 우울해지면 세계에 위기가 찾아온 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谷川流, 『涼宮ハルヒの憂鬱』, 2003). 세계의 종말이 있고 나서 우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울함이 세계의 종말을 선도하는 구조다. 바로 이 점이 세카이계 소설을 규정하는 핵심인 것은 아닐까.
    세카이계 상상력은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 같은 작품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단편에서 주인공 소년소녀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세계의 마지막 잔존자가 되어 허공으로 떠오르면서 부서지는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소녀가 먼저 죽고 소년은 홀로 남겨진다. 나는 이 단편이 결국은 홀로 남겨진다는 것의 의미를 탐문하는 작품이라고 읽었다. 작가는 그 물음을 위해 세계의 종말이라고 하는 거대한 세트를 마련한 것이다.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자음과모음》, 2010년 여름호)도 이 계열이다.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우울이 ‘대홍수’와 같은 재난의 상상력을 추동하고 있다. 이 ‘위기상황’을 주인공은 아버지의 유령과 조우하면서 넘어간다. 이러한 착한 결말이 조금 맥빠지기는 하지만, 그것도 분명히 치유의 한 방식일 것이다.
    세카이계의 출현이 ‘거대 서사의 몰락’ 이후의 공허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아직 우리는 이 공허 속에 있다. 인터넷에 접속한 채 웹 스페이스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자주 느끼는 고립감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문득 가상현실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왔을 때, 주위엔 아무도 없고 나만 섬처럼 떠 있음을 깨닫는다. 다카하시 신(高橋しん) 원작의 애니메이션 「최종병기 그녀」(加瀬充子 監督, 2002)에서 평범한 여고생인 ‘치세’가 병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때 내는 ‘슈-웅’ 하는 소리는 한없이 외롭게 들린다. 오늘도 ‘치세’는 홀로 정체 미상의 적기들과 외롭게 싸우고 있구나! 뭔가 전망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날마다 싸우면서 살고 있다. 세계의 종말에 대해 생각하면 왠지 쓸쓸해지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삶의 부하(負荷)가 정말 이 정도인가 되묻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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