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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세이:비문학영역(3회)]내 여동생이 이렇게 라이트노벨 제목을 길게 지었을 리 없어-2

  • 작성일 2013-12-01
  • 조회수 1,052

【 비문학영역_3 】

 


내 여동생이 라이트노벨 제목을 이렇게 길게 지었을 리 없어―2

 

황인찬(시인)

 

 

 

 

    콘텍스트 게임

 

    라이트노벨에서의 1인칭 시점 쏠림 현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네타’라는 개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한국어로는 적절한 대응어가 없는 개념이긴 하지만, 웹에서 쓰일 때는 대략적으로 어떤 맥락 안에서 사용되는 개그의 기본 요소, 패러디 등에서 사용되는 원천 소스 혹은 작품의 스토리상 중요한 결절점 같은 것을 뜻한다. 모종의 공동체 안에서 두루 알 법한 콘텍스트적 요소를 ‘네타’라 부르는 셈이다(한국에서는 ‘네타바레(스포일러)’의 준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잦으나 여기서는 무시한다). 일본의 오타쿠 서사는 세월의 축적을 통해 상당한 양의 개성적 요소를 쌓아올렸으며, 언젠가부터 그 개성적 요소들, 즉 ‘네타’를 창작물 속에 적극적으로 집어넣기 시작하였다. 물론 ‘패러디’라는 개념이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며, 대개의 경우 ‘패러디’에 쓰이는 어떤 요소들을 ‘네타’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패러디’는 시간이 쌓아올린 문화적 맥락과 그 안에서의 위상 등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네타’와 분별된다(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웹 용어로서 대응되곤 하는 ‘떡밥’이나 ‘필수요소’ 등도 정확한 번역은 되지 못한다).
    가장 두루 쓰이는 ‘네타’로는 『기동전사 건담』이나 『유리가면』, 『죠죠의 기묘한 모험』 등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의 특정 대사와 장면들이 있으며(만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그림체 또한 ‘네타’의 요소로 쓰인다), 거기에 한정되지 않고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은 근래의 작품들이라면 동시대의 작품들에서 적지 않게 ‘네타’로 활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알고, 그것을 보면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주로 ‘네타’로 기능한다는 것.
    이렇게 정식화되지도 않은 개념을 굳이 꺼낸 것은 오타쿠 문화의 특징인 참조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늘날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의 인간(여기서는 오타쿠)은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 기호화된 데이터들을 재조합하고 재배열하기를 기꺼이 즐긴다고 설명했는데, 여기서의 데이터를 ‘데이터베이스’ 내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라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모든 데이터가 ‘소비’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데이터들은 일종의 경향성을 통해 기호(嗜好)이자 기호(記號)로서 모종의 카테고리를 형성한다. ‘모에’ 요소라는 형태로, 혹은 ‘네타’라는 형태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일종의 ‘결절점’이 된 지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데이터베이스’에서 ‘소비’되는 것은 그 결절점을 아우르는, 혹은 결절점이 아우르는 컨텍스트 자체라는 것.
    결국 ‘데이터베이스 소비’란 이러한 컨텍스트들을 참조하면서 그것을 복제하고, 변형하는 식의 일종의 ‘컨텍스트 게임’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오타쿠 문화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패러디 경향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 아닐까 한다. 2000년대 들어 오타쿠 문화권의 작품 중 예의 ‘네타’들을 알지 못하면 작품의 재미를 제대로 느끼기 어려운 작품들이 유독 늘어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하야테처럼! 』이나 『제멋대로 카이조 』와 같은 작품은 일본의 서브컬처는 물론 사회문제까지도 ‘네타’로 삼아, 그 문화 전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작품이 주는 재미를 대부분 놓칠 수밖에 없다. 『러키☆스타 』를 비롯한 많은 2000년대 작품의 경우에는 아예 주인공 중 하나로 오타쿠 캐릭터가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는 ‘네타’를 활용한 패러디를 손쉽게 수시로 등장시킬 수 있다는 데도 그 효용을 찾을 수 있을 테지만, 이러한 경향의 심화 현상은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주체인 오타쿠들에 대한 적극적인 반영이자 양식이 고도화될 때 나타나는 자기반영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오타쿠 문화는 ‘데이터’로 수렴될 수 없는 상위적 요소들을 의식하는 경향이 분명 강해졌다. 이를테면 근래 특히 라이트노벨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적극적인 자기 참조적 현상은 어떤가?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 『널 오타쿠로 만들어줄 테니까 날 리얼충으로 만들어줘! 』와 같은 작품들의 히트를 두고, 단지 ‘오타쿠’ 내지는 ‘중2병’이라는 ‘모에’ 속성이 새로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는 것이다.
    이제는 유행이 살짝 지난 감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러한 현상은 ‘일상물’의 득세와 더불어 나타났다. ‘일상물’에서 오타쿠 캐릭터의 등장은 서사 전략의 측면에서 서사 없는 서사를 성립시키기 위한 ‘비일상적인 것’으로서 기능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오타쿠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일상적인 것으로, 즉 일종의 리얼리티로 자리 잡았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캐릭터로서의 오타쿠와 오타쿠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주목받은 『현시연 』은 오타쿠에 대한 리얼리즘적인 시선이 대거 반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리얼리즘에 대한 잠재적 욕망의 반영이라고 설명하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그러나 앞서 언급한 작품들이 모두 사회 속에서 오타쿠가 어떤 식으로 비춰지고 있는지 다분히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거기에는 리얼리즘적 요소가 조금이나마 드러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회 자체에 대한 의식마저 ‘데이터’에 수렴시키기에는 어쩐지 무리가 느껴진다.
    이에 대한 더욱 흥미로운 논의들이 가능할 테지만, 일단은 일본 서브컬처 내부의 작품들이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설명되는 식의, ‘캐릭터’로 표상되는 기호(嗜好/記號) 차원에서 작품을 구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욱 넓은 범위로서의 컨텍스트를 고려하는 경향이 커져 가고 있다고 설명하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정리하도록 하자.

 

 

    ‘나’ 라는 인터페이스

 

    콘텍스트를 고려하는 경향이라는 매끄럽지 못한 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지난 글에서 잠깐 설명한 라이트노벨에서의 1인칭 시점 쏠림 현상 또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모에’의 적극적인 기능을 위해 선택되는 이 1인칭 ‘남성’ 화자는(특히 ‘일상물’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의 기능을 수행한다. 전통적 문학의 1인칭 화자가 인물의 내면 고백을 위해 선택되며, 내면의 심리적 동인으로 움직이는 입체적 인물이라면, 라이트노벨의 1인칭 남성 화자는 최소한의 설정으로 구동되는 평면적 존재에 가깝다. 이 화자는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사건에 자꾸 휘말리고, 사건을 해결하는 순간에조차 수동적이며, 중대한 결심을 할 때마저 욕망이 소거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라이트노벨의 1인칭 남성 화자들은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다. 오히려 주변 인물들이 훨씬 복잡해 보일 정도다. 이것이야말로 라이트노벨이 갖는 가장 ‘게임’적인 특성이라는 생각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이미 충분히 논의했듯이 라이트노벨이란 서사에 목적을 두지 않으며,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조합된 ‘캐릭터’들을 내세우는 데 집중하는 캐릭터 소설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 캐릭터들에 몰입하는 데 화자의 개성은 장해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1인칭 남성 화자들은 인물로서의 특성이 최대한 제거된다. 그들은 작품을 위해 최초에 전제된 설정을 따라서만 움직이며, 그 설정을 따라 맞닥뜨리는 사건들에 반응할 뿐이다. 그들은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텅 빈 자리다. 그 텅 빈 자리에 독자가 자리한다.
    이 지점이 바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구현되기 어려운(만화나 애니메이션은 1인칭 시점이 어렵기에 몇 가지 트릭이 필요하다), 오히려 게임에 가까운 라이트노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1인칭 남성 화자는 작중 인물로서의 시점과 그것을 통해 작품 속의 세계를 관찰하는 독자의 시점이라는 ‘이중의 시점’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캐릭터의 묘사에 있어 나타나는 ‘묘한 느낌을 풍기는 전파계의 여자 아이’라는 식의 서술은 ‘데이터베이스’의 존재를 공유하는 독자를 의식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서사 차원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도 화자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츳코미(딴죽 걸기)’는 외부의 시선을 상정하지 않고는 나타나기 어렵다. 또한 지난 글에서 설명했듯 이 1인칭 남성 화자가 유독 둔감하다거나 성적인 면에 백치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중의 시점’을 구현하기 위한 개성의 소거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중의 시점’은 게임 등에서 볼 수 있는 ‘인터페이스’적인 것과 깊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특히 미소녀 게임을 닮아 있는데, 미소녀 게임의 문법을 라이트노벨이 가져온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미소녀 게임의 플레이어가 여러 분기점에서 다소 상반되기도 하는 선택지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켜 가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개성이 그려지지 않는 편이 더욱 자연스러운 것이다(많은 미소녀 게임에서 주인공은 일러스트에 등장할 때조차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거나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다). 이 미소녀 게임에서의 ‘나’라는 인터페이스를 라이트노벨에서는 1인칭 남성 화자가 수행한다.
    즉 라이트노벨의 독자는 고전적 의미의 문학 독자라기보다는 ‘관객’ 내지는 ‘유저’에 가까운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텍스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에 가까운 장면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소비하고, 중간 중간 삽입되는 일러스트가 그러한 연상을 돕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라이트노벨에는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묘사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데, 이미 독자들은 그러한 세계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있는지, 그 맥락(콘텍스트)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리셋과 반복이 가능한 ‘메타 이야기 환경’을 들어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등장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 끊임없는 외부에 대한 의식이, 그러니까 리얼리즘에 대한 잠재적인 욕망 자체가 오히려 저 새로운 리얼리즘의 성립을 저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사용자를 위해 존재하는 ‘인터페이스’적인 것이야말로 지극히 ‘게임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리얼리즘’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텅 빈 공간으로서의 ‘인터페이스’가 그 외부에 존재하는 ‘리얼’을 ‘리얼’에 대한 데이터로 양식화시켜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나로서는 그것에 대해 충분한 답변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저 ‘게임적 리얼리즘’이 과연 ‘리얼’과 합치될 수 있는 것인가, ‘리얼리즘’의 전제라 할 수 있는 ‘리얼’에 대한 욕망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의구심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어쨌든 주어진 지면을 이미 한참 넘은 관계로 일단은 이 정도로만 정리하고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환경 아래 등장한 작품들을 살펴보며 조금 더 자세한 논의를 해볼까 한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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