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문학카페 유랑극장 후기]유랑극장에서 바라본 문학, 죄, 야만의 얼굴들

  • 작성일 2014-06-01
  • 조회수 965

 

[문학카페 유랑극장 참관후기]

 

 


유랑극장에서 바라본 문학, 죄, 야만의 얼굴들

 

 

김재훈(시인)

 

 

 

 

    막스 피카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문학의 기본적 속성은 과잉이다. 문학이 방법론적으로 내포하는 과잉 그 자체 혹은, 결핍의 과잉을 통하여 비로소 문학이라는 껍데기가 완성된다. 문학은 언제나 너무 멀거나 지나치게 가깝다. 그래서 문학은 낯설다. 익숙해질까 싶으면 한 발 빠르게 낯설어진다. 한 번 드러났다가는 이내 다시 숨어버린다. 이어도와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안개 속에 숨거나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뒤, 다시는 나타나는 법이 없다. 문학은, 아무런 기척을 하지 않는다. 거기 있는가? 답이 없다. 조부모처럼 그립다. 옛애인처럼 야속하다. 쥐처럼 비겁하다.

 

    그러다가 이따금 어두운 밤이면 질기고 단단하던 침묵이 끔찍한 신음을 내며 찢어지고, 꾹꾹 울음을 누르며 낮아진 가냘픈 어깨들이 모여든다. 흐느끼고 들썩이기 시작한다. 줄기차게 솟구치고 하강한다. 날카로운 파도에 난도질당하며 수면 위로 드러나는 얼굴이 있다. 이내 그 얼굴을 감추겠지만 지금 드러난 저 얼굴, 문학인가? 혹은 죄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야만인가?

 

    형이상학적 죄로서 무병(巫病)과 지속가능한 화해: <목마른 신들>과 <쇠와 살>이라는 제목으로 제주에서 진행한 문학카페 유랑극장 8번째 공연. 사회자는 세월호가 모두의 마음을 가둬버린 이 시기에 유랑극장이라는 공연이 알맞은 걸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연을 진행하는 것이 이 시기에 해야만 할 일인 것 같았다고. 자칫 합리화하는 말이기 쉬우나, 이번 유랑극장은 본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문학카페 유랑극장 공연은 일종의 ‘反증폭기’로서 문학의 과잉들을 적절하게 제어한다. 진지함으로 포장된 문학의 과잉은 유머로 상쇄하고, 결핍은 다른 여러 가지 예술과 장치들을 빌려와 채워 넣는다. 제주 공연 역시 문학 안에 내재된 과잉의 입자들을 우리 사회에 용해시키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연구한 유랑극장 팀의 고민이 엿보였다. 낭독극과 공들여 만든 영상물, 관객과 호흡하는 특유의 방법, 무겁지 않은 작가와의 대화 등. 현기영의 ‘4·3문학’이라는 야수를 조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말을 건네도록 한 탁월한 조련사들. 이들은 여러 공연 장치들을 통하여 현기영 문학의 심연에 깔린 주제를 끄집어 올렸다.

 

    관객들은 아우슈비츠, 제주 4·3,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현재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통시적 고통의 정체를 직시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악몽들 속에서 울부짖던 수많은 주검들. 그 창백한 얼굴들이 겹치고 겹쳐져서 마침내 단 하나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 얼굴의 이름은, ‘살아남은 자’. 바로 나다. 그리고 물론, 당신이다. 법학자 이재승 교수는 2부에 진행된 강연을 통하여 현기영의 소설 「목마른 신들」과 「쇠와 살」이 가지고 있는 얼굴을 그려냈다. 그 초상화에 그려진 얼굴은 ‘형이상학적 죄’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초상은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 모두의 얼굴이다. 경악스런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이다.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형이상학적 죄’는 전후 독일인들은 어떤 죄를 갖고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 야스퍼스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야스퍼스는 죄의 종류를 법적인 죄, 도덕적인 죄, 정치적인 죄,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로 나누었다. 나치에 가담하지 않은 독일인들, 세월호와 무관한 시민들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잘못인데도 불구하고 죄의식을 느낀다. 그 정체가 바로 형이상학적 죄다. 그 죄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얼굴을 갖는다.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죄가 자행되고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면, 내 안에서 하나의 소리가 들리고, 이를 통해 나는 안다.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나의 죄다.’(야스퍼스)

 

    지금, 여기,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우리의 죄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라는 브레히트가 꿈속에서 죽은 친구에게 들은 말은 야만의 논리이다. 살아남은 죄로 우리는 우리의 얼굴 속에서 가해자의 얼굴, 야만의 얼굴을 보게 된다. 거울에 비친 우리들의 평범한 얼굴 속에 악이, 야만이 나타난다. 형이상학적 죄는 야만의 시절을 거치거나 관찰한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 잘 드러난다. 현기영의 작품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프레모 레비의 작품 등에서 형이상학적 죄를 발견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를 겪은 프레모 레비와 시인 파울 첼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고 『생존자』라는 책을 쓴 테렌스 데 프레의 자살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심리학과 윤리학의 경계에 서 있는 이 형이상학적 죄를 구체화 하여서 사회의 틀 안에서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경계. 접속의 공간. 심리와 윤리가 만나는 그 경계는 「목마른 신들」에 그려진 것처럼 무병巫病의 영역이다. 똑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모으는 움직임은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거대한 굿판이며, 나 자신의 심리를 치유하는 화해의 의식인 동시에, 형이상학적 죄가 구체적인 상想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순간이다. 구체성이 오래 지속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제자들을 잃고 형이상학적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제자들을 따라간 단원고 교감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또 다른 끔찍한 고통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는 자들의 건강을 바란다.

 

    우리는 안다. 현기영의 소설에 나타난 제주 4·3의 야만은 또 다른 세련된 모습으로 변주되어 이 땅 위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두렵도록 잘 알고 있다. 야만이 인간을 침식하는 지점들을 또다시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인간의 끝, 국민의 끝, 국가의 끝 같은 지점들이 수면 아래로 잠겨버린 뒤에, 얼마의 시간이 흘러 이것들이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면 우리는 마치 처음 보는 얼굴인 듯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점들에 악착같이 자리 잡은 문학도 같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서 죄와 함께, 야만과 함께 뒤엉켜 시커멓게 썩게 될 것이다. 그립고, 야속하고, 비겁하게. 기척도 없이. 허수경 시인의 첫 시집 제목이 떠오른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이 순간에도, 좋은 문학은 슬픔을 낭비하지 않고 조용히 썩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유랑극장은 잘 썩은 문학 거름들을 골라내어 이 땅 위에 뿌리는 일을 계속해 주기를. 그렇게 안녕하기를.

 

 

 

 

   《문장웹진 6월호》

 

추천 콘텐츠

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