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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카페 유랑극장 리뷰]제주의 바람과 원주의 응시

  • 작성일 2014-06-16
  • 조회수 1,068

 

[문학카페 유랑극장 리뷰]

 

 


제주의 바람과 원주의 응시

― - 상반기 문학카페 유랑극장의 막을 내리며

 

이은선(소설가)

 

 

 

 

유랑극장-8회-1

 

    가장 먼저 저희를 맞아 준 것은 제주의 바람이었습니다. 마음이 그 바람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지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며 마지막 행사를 하기 위해 제주에 간 길이었습니다. 원주에서 처음 쏘아올린 공을 서울과 양평이 받았습니다. 다시 대전과 목포, 진해와 경주까지 ‘핑, 퐁, 핑, 퐁’ 하며 발랄하게 쳐올릴 수 있을 줄만 알았지요. 목포 행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월호가 가라앉았고, 어둡고 무거운 마음으로 유랑극장의 문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비단 우리만의 마음이 아니기에 묵묵해져야 했지만 다소 감정적이 되었던 시간도, 안타까움에 무대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찾을 수 있기를, 이제 그만 바다에서 나와 주기를 하고 말입니다. 매일같이 뉴스를 검색하고, SNS의 발 빠른 소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진해와 경주를 지나 제주까지 왔던 것입니다. 세찬 바람이 유랑극장 스태프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간신히 붙들고 갔던 마음의 어떤 결들이 바람을 따라 일어났고, 그 바람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현기영 선생님을 뵈었지요. 바다를 등지고 형형한 눈빛으로 바람을 맞고 있던 현기영 선생님의 눈빛이 아직도 선연하게 떠오릅니다.

 

    유랑극장 마지막 무대의 주제는 “형이상학적 죄로써 무병과 지속 가능한 화해”였습니다. 형이상학적 죄와 국가란 무엇이며, 그들이 자행한 야만적인 행태들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자리였지요. 현기영 선생님과 이재승 선생님은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무대에 올라와 담담하고도 나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야만적인 국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국가, 그리고 그 국가를 가진 수장의 책임과 그 모든 행태들을 고스란히 겪어야 하는 국민들의 뼈아픈 시간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다시 남은 어떤 물음.

유랑극장-8회-2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
어쩐지, 끝끝내 알 수 없는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재승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이상학적 죄’ 역시 지금 이 순간도 자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 것은 행사가 시작되고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제주에서도 세월호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던 까닭이었습니다. 유랑극장 행사가 시작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담담하게 텅 빈 객석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고,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그리로 보내었음을, 조심스럽게 적어 봅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몇몇 관객들과 유랑극장의 무대는 계속되었지요. 현기영 선생님의 단편소설 「쇠와 살」, 「목마른 신들」을 토대로 형이상학적 죄란 무엇이며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안쓰러운 얼굴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현기영 선생님의 소설을 극화하여 방은미 연출님께서 낭독 공연을 맡아 주셨습니다. 심방이라 부르는 제주의 무당이 나와 4·3 사건 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진혼굿을 한바탕 치러 주던 시간이었지요. 억울한 영혼들이 곳곳에서 흘린 눈물이 보이는 것만 같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유랑극장-8회-3

 

    한때 제주의 로미오였다는 현기영 선생님의 유머러스한 농담에도 마음껏 웃지 못한 것은 그 자리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진혼의 장소’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기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유랑극장’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기리는 방식 또한 그러했다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한두 줄의 문장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부는 바람일 수도, 비는 바람일 수도 있는 어떤 마음들이 그렇게 우리가 있는 자리에 다녀갔습니다. 바람이 부는 자리마다 사람의 눈길이 가 닿았고, 그 눈길의 끝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세월호가 아직 바다에 있는데, 찾지 못한 이들의 육신이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는데, 우리는 변함없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있습니다. 당연한 삶의 시간들이 이렇게 죄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살릴 수 있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언제까지고 이 마음이 지속될 텐데, 그리하여 앞으로 ‘바다’와 ‘배’를 의미하는 문장들이 달라질 텐데, 가슴이 아프고 또 아픕니다. 잊지 않고 이 시간을, 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겠습니다.

유랑극장-8회-4

 

    제주문인협회와 4·3문학관의 협조로 열린 제주의 행사였습니다. 유랑극장이 열린다는 소식이 신문기사로 먼저 보도되기는 하였지만 행사에 오지 못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고 지지해 준 관객 여러분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제주문학관과 제주문인협회, 제주도의 리뷰를 담당해 준 김재훈 시인에게도, 마지막 행사에서 피날레를 장식해 준 윤영배 가수에게도 고마운 마음 남겨 놓습니다. 방은미 연출님을 비롯하여 낭독 공연의 무대를 장식해 준 배우 분들에게는 꼭 다시 뵙자는 굳건한 약속을 하고 싶습니다. 그 무대가 비록 소설의 한 구절을 가져와 만든 무대였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말랑하게 풀어졌다는 사실 또한 밝혀 둡니다.

 

    원주, 서울, 양평, 대전, 목포, 진해, 경주, 제주를 찍고 다시 원주로 돌아갔습니다. 1월 이후에 원주 토지문화관 측에서 다시 한 번 행사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저희 양연식 연출님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달해 왔고, 심사숙고 끝에 목포에서 열린 공연을 다시 한 번 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오월이었고, 임철우 소설가와 서영채 평론가가 흔쾌히 수락을 해주었기에 이루어진 무대였습니다.

 

    노래 공연도 아닌데 다시 한 번 행사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설레기도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어떻게 한 이야기를 또 하지?’라는 우려를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문학카페 유랑극장은 모든 행사를 ‘처음’ 혹은 ‘새롭게’ 써나가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자답을 내렸지요. 이 역시도 우리 문학카페 유랑극장의 신선한 역사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원주로 날아갔습니다. 제주에서 쏘아올린 공이 원주로 돌아가던 그 순간을 저희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유랑극장-8회-5

 

    원주 대성고등학교에서 큰 버스 두 대가 왔고, 원주 곳곳에 있는 문인들을 비롯하여 분당과 경기도 광주에서 모이신 분들,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생들을 비롯하여 졸업생들까지 토지문화관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철우 소설가는 목포에서보다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백년여관』 낭독극장을 경청했고, 서영채 평론가는 전혀 다른 강연을 준비해 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다시’라고 했지만 ‘새로움’임과 동시에 또 다른 방식으로서의 의미가 만들어진 순간이었지요. 전라도 사투리의 구사를 위하여 여배우를 교체하는 강수까지 둔 전인철 연출님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던 낭독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소설의 문장이 ‘토박이’의 어투를 입으니 우리 모두가 다 함께 그 극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진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좋은 소설이 있었고, 그것을 각색해 준 이의 노고가 있고 또 그 모든 것들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리허설을 해온 연극배우들의 치밀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주체로서 사는 법’을 역설하던 서영채 평론가에게 ‘우리가 이 시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여쭈었습니다. 모두 다 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대에 왜 굳이 ‘기억’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답해 주었습니다. “불편한 일이지요. 그러나 주체로서 살아가려면, 기억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살 수 없는 시대가 아닙니까.” 슬퍼할 때는 다 같이 슬퍼하고, 섣부른 판단이나 비난의 입을 닫고 지금 이 순간은 그 무엇을 위해서라도 같이 슬퍼하고 기억해 주자는 그의 조심스러운 말을 들으며 임철우 작가가 소설 『백년여관』과 『황천기담』의 한 구절을 낭독해 주었습니다. 『백년여관』의 한 구절을 읽으며 그가 울었고, 관객들 모두 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백년여관』 속의 모든 주인공들을 접신하는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유랑극장-8회-6

 

    대성고등학교 친구들이 사전독자감상단으로 참여를 해준 행사가 성황리에 끝난 다음, 출판사의 협조를 통해 마련한 사인회도 이어졌습니다. 문학카페 유랑극장의 “8 + 1”의 행사가 그렇게 마무리된 것입니다.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주신 토지문화관 관계자 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늘어선 이들 끝에서 조용히 기다리다가 책을 사 들고 돌아간 이가 [아침이슬]의 ‘김민기’ 선생이었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1회 행사 때도 유랑극단을 보신 적 있다며 전해 오던 그 쑥스러운 인사!

 

    돌고 돌아 돌아온 그 자리에서 우리가 ‘의미 있는 웃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관객’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함께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진행자의 말도 안 되는 ‘미모 드립’을 받아 주셔서, 그리고 ‘문학’이라는 멋진 장르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소에서 만났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저희를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다 관객 분들 덕분입니다. 협조해 주신 전국 문학관 관계자 여러분들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의미 있는 이 행사가 더 널리널리 퍼져 나갔으면 좋겠어요, 전국 방방곡곡, 더 나아가 해외로도 말입니다.(아, 너무 멀리 나갔나요?)

 

 

덧붙임.

 

    양연식 연출님, 제가 늘 ‘몸 바쳐 연출’한다고 놀리는데, 그건 정말 사실이잖아요. 새로운 문학행사의 장르를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어찌하면 모두에게 더 재미있는 문학행사’가 될 수 있을까 밤낮으로 고민을 해온 결실이 이 무대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세계 최고의 한국 문학행사 연출가예요.
    말없이, 모든 문제를 안팎으로 해결해 주신 정대훈 차장님에게도 고마운 마음의 한 자락 남겨 놓습니다. 정 차장님의 아우름이 없었더라면 저희가 전국을 돌아다니기 힘들었을 거예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당신을 명실공히 한국 문단의 ‘큰 몸’으로 임명합니다.(땅땅땅)
    문학카페 유랑극장은 우 연식, 좌 대훈(반말, 죄송)을 필두로 앞으로도 전국을 유랑하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 지역에는 안 오느냐고 ‘항의’해 주셨던 모든 분들의 얼굴을 직접 무대에서 뵙는 그날까지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고 곧, 다시 뵈어요!

유랑극장-8회-7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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