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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봄날은 연두에 물들어

  • 작성일 2015-05-04
  • 조회수 337

 

[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봄날은 연두에 물들어

 

 

 

오정희

 

 

 

 

    이른 봄 처음 돋아나는 어린 쑥을 뜯으며 나는 4월, 선생님을 뵈러 갈 때 쑥을 듬뿍 넣은 떡을 해가리라 마음먹었다. 매해 봄 쑥을 뜯으면서 나는 선생님을 생각하곤 했다. 오래전 내가 해 가지고 간 쑥떡을 맛나게 드시던 일이 기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탓이었다.
    원주 토지문화관에 가기로 작정한 날 날은 문학 강좌가 열리는 4월 26일이었는데 4월 22일, 선생님께서 위독하시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고 아산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면회사절, 절대안정’의 푯말이 걸린 병실에서 선생님께서는 산소호흡기를 끼고 계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선생님, 이제 그만 눈뜨고 일어나세요.’ 하고 말하는 것, 선생님의 따뜻한 손을 잡아 보는 것뿐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지만 다 듣고 느끼신다고 믿었다. 눈을 꼭 감고 누워 계신 선생님은 평소와는 달리 키도 자그마하고 발도 작으셨다. 곱게 빗은 머리를 분홍빛 리본 고무줄로 묶고 예쁜 덧버선을 신으신 선생님은 목욕 후에 깊이 잠든 아기처럼 평안하고 맑은 모습이었다. 노동하고 글 쓰는 일을 똑같은 신실함으로, 정직함으로 해오신 작은 손과 발을 만지면서 나는 참 길고 고단한 생애였다는 생각을 했다. 백수를 누리는 일이 드물지 않은 지금 세상에 이제야 팔순을 넘기신 선생님에 대해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그것은 선생님께서 온몸으로 감당했던 역사의 격동기 모진 세월, 평범하게 살 수 없었던 한 여인의 운명성, 엄청난 작업량, 선생님 표현대로라면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과도 같은 생애의 무게와 부피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선생님께서는 어느 글에 이렇게 쓰셨다.
    “어떤 이는 나더러 불행하다 하고 어떤 이는 나더러 행복하다고 한다. 전자는 여성으로서의 그것이고 후자는 명리를 말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선생님에게 행불행의 잣대를 들이대며 논하지 않는다. 세속적 잣대와 통념을 뛰어넘어 한 생애의 완성을 본다. 선생님께서는 인생은 만들거나 꾸미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울음, 생명에 대한 자비와 선성(善性)의 추구 없는 아름다움이란 종이꽃과도 같은 것이라는 신념을 당신의 삶으로써 실천해 보이셨다.

 

    십대 소녀 시절부터 나는 선생님의 독자였다. 장차 작가로서 살아갈 것 같은 막연한 예감(바람이었을 것이다)을 가졌던 시절부터 ‘박경리’라는 이름은 내게 대한민국 여성 작가의 대명사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던가, 어머니가 구독하시던 《여원》의 연재소설 『성녀와 마녀』, 일간지에 연재되던 『내 마음의 호수』, 『노을진 들녘』 들을 게걸스럽게 읽었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는, ‘다음호에 계속하여’ 이어지는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친구들에게 중계방송하곤 했다. 십대 초반의 어린 소녀에게 『성녀와 마녀』는, 어둡고 뜨거운 열정이 갖는 마성과 정념의 불가해함을 신비롭게 각인시키는 독특하고 강렬한 독서 체험이 되었다. 활자로 된 것은 무엇이든 읽어대던 시절이라고는 하나 박경리 소설에 대한 탐식성은 꽤나 집요했다.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등으로 이어지면서 주인공들의 비극적 운명성과 강한 자의식에 가슴이 서늘해지는가 하면 왜곡되고 불합리한 것들에 대한 작가의 분노와 비판에 불편한 자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생활이 보이고 육성이 들리는 수상집 『기다리는 불안』, 『Q씨에게』 등을 읽으면서 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박경리’라는 존재가 한결 가깝게 다가왔다. 문학을 하겠다는 뜻을 굳히면서 나는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염결한 태도를 존경하였다. ‘여류’라는 단어가 풍기는 제한적이고 장식적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진짜 작가’라고 확신하면서, 내 앞에 놓인 길을 가리키고 열어 주는 한 존재로 선생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문학하는 삶, 문학하는 여성으로서 환상만 가득했던 시절, 내게 선생님은 그렇게 본받고 따라야 할 분이었다.

 

    사는 일, 쓰는 일이 아득하고 두렵기만 했던 문청 시절,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선생님을 흠모하였다. 욕망과 열정만 앞설 뿐 정작 쓰는 일은 막막하기만 하던 날에 나는 더러 꿈속에서 선생님을 찾아가곤 하였다. 어느 잡지에서 오려낸, 집중된 표정으로 등을 곧추세우고 앉아 계신 옆모습 사진을 책상 서랍 안쪽에 붙여 놓고 시시때때로 바라보면서 나 역시 등을 곧추세우는 것으로 흔들리는 젊음을 지탱하였다.

 

    선생님의 『토지』 집필은 문단의 커다란 사건이었다. 연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소문은 무성했다. 두문불출은 물론 전화도 없애버리고 스스로 글감옥에 유폐시켜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집필만 하셔셔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선생님께서는 그 몇 년 전에 앞으로 쓸 글에 대한 속내를 비치신 적이 있었다.
    “내게는 이제부터 써야 할 글이 있다. 지금까지 써온 글들은 모두 그것을 위한 습작이다. 그것을 쓰기 위해 나는 아마도 2, 3년을 더 기다려야 할까 보다.”
    ‘그것’이 『토지』라는 한국 문학의 큰 산맥이고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셨을까? 『토지』를 쓰시는 내내 ‘욥의 고통’과 ‘사마천의 견딤’을 당신의 것으로 끌어안으며 버티셨다는 선생님께서는?
    오래 흠모하고 사숙하던 선생님을 정작 찾아뵌 것은 한참 뒤 『토지』 2부를 집필하시던 때였다. 1974년 추석날 새내기 작가였던 나는 현대문학사에 근무하면서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친구 김정숙을 앞세우고 정릉 댁으로 찾아갔다. 외부와 접촉을 끊고 거의 은둔생활을 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긴장이 되었고 조심스러웠다. 벨을 누르고도 한참만에야 인기척이 들리고 ‘숙입니더’ 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비로소 문이 열렸다. 자주색 바탕에 흰 꽃무늬가 자잘한 홈웨어를 입고 계셨는데 높은 이마, 맑고 강한 눈빛에서 위엄 있는 용모라는 느낌을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쟁반에 콩나물 무침과 김치, 멸치조림 정도의 간단한 찬을 놓고 늦은 점심을 드시는 중이었는데, 그 모양새가 정말 마지못해 드시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작 밥상이 되어야 할 작은 소반에는 원고지와 뚜껑 열린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작가에게는 ‘밥’보다 중요한 일, 자기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할 일이 ‘글쓰기’라는 상징성으로 내게 비쳐졌다. 들고 간 송편을 펼쳐 내놓자 선생님께서는 이때껏 추석에 송편을 빚어 보지 못하고 살았다고 탄식하듯 말씀하셨다.
    선생님으로서야 독자에게 내준 한나절의 시간에 불과하지만 그날의 분위기와 대화는 내게 작가로서 살아간다는 것, 문학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교육의 장이 된 셈이었다.

 

    그 이후 3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선생님의 내게 대한 호칭이 ‘오정희 씨’에서 ‘정희야’로, ‘너’로 바뀌었다. 나는 그것을 선생님께서 내게 보여주시는 따뜻함이나 친밀감의 표시로 느꼈고, 나이를 먹었어도 선생님 앞에서는 그냥 문학소녀 시절로 돌아가도 되는 넉넉한 품을 내어주시는 것이라 여기며 감사했다. 선생님께서는 종종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나무라시고, 장편소설을 쓰라고 다그치시다가도 “그냥 행복하게 살아라.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이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가끔 네 생각을 한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문득 그 말씀을 하시고는 잠깐 가만히 나를 바라보셨다.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했지만 여쭙지 못했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개점휴업 상태의 작가로 40대 중반을 하릴없이 보내면서 매사 부끄럽고 지옥불을 지니고 사는 듯한 마음과 허덕대는 모습을 들켜버렸는가 싶었다. 훗날에 짐짓 장난기를 빙자해 여쭈어 볼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 ‘훗날’은 영원히 가버렸다.
    언젠가 춘천에 다녀가실 때 터미널까지 배웅해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원주행 시외버스에 타시고는 승강장에 그대로 서 있는 나를 향해 그만 가라는 손짓을 두어 번 해 보이시더니 좌석 등받이에 기대고 눈을 감으셨다. 버스가 떠날 때까지 오 분 정도의 시간에 선생님이 신경 쓰실까 봐 나는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몸을 비켰다. 버스가 홈을 빠져나가려고 차체를 돌리는 찰나 내 쪽을 바라보시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뒷날, 부담을 줄까 봐 서로 모른 척하던 그날의 일을 말씀하시며 선생님께서 한바탕 웃으셨다.
    “너는 내가 신경 쓸까 봐 숨어버렸고 난 눈을 감았잖니? 너는 참 촌사람이고 나도 그렇다.”

 

    문인들이 쓴, 꽃상여의 뒤를 따르는 만장 글귀에는 유독 고독이라는 단어가 많았다. 선생님께서는 고독의 힘, 슬픔의 힘, 분노의 힘이 어떻게 우주적 사랑과 생명으로 뻗어 가는가, 궁극을 향하여 가는가를 보여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문학을 우리에게 내린 축복이라 누리고 기리지만 또한 평생을 명리에 타협하지 않고 굳건히, 도도히 지켜 오신 고독에의 존경심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지상의 모든 인연을 뒤로 두고 떠나시던 날, 마지막 걸음으로 둘러보시던 토지문화관과 주인 잃은 사저는 고즈넉하고 적막한 가운데 봄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하나하나 옮겨 쌓으셨던 돌들, 햇빛과 바람도 무심히 연두에 물들었다. 어쩌면 남은 사람들의 서러움까지도……. 그렇게 아끼며 정성껏 가꾸셨던 밭에는 고춧대가 비죽이 올라오고 살집 실한 고양이 두어 마리, 비긋이 열린 문틈으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병원에 누워 계실 동안에도 누군가 고양이의 먹이를 알뜰히 챙긴 듯 밥그릇 물그릇이 채워져 있었다. 선생님의 자취를 되살리려는 듯 찬찬한 눈길로 집 주위를 둘러보던 누군가가 찢어진 지 오래되어 너풀대는 안방 창문의 창호지를 보며 기어이 통곡을 터뜨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가슴 속에 가장 오래 남는 자취, 어쩌면 영영 사라지지 않을 기억이란 그토록 사소한 것들인지도 모른다. 찢긴 문종이처럼 일상적이고 흐릿한 흔적들, 어느 순간의 눈빛, 미소, 음성……. 그리고 떠난 사람들이 바라보던 세상의 정경들.
    사람이 천 년 만 년 사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순간순간 생성되고 지워지고 소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보면 지나간 날들은 어떤 슬픔과 어려움이 있었어도 다 좋은 날이었다. 우리 함께 살아 있어서 마주 보고 숨결을 느낄 수 있었으니.

 

 

 

작가소개 / 오정희(소설가)

1947년 서울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불교문학상, 동서문학상, 독일 리베라투르 문학상 수상. 창작집으로 『불의 강』, 『유년의 뜰』, 『불꽃놀이』, 『새』 등이 있음.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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