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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토지문화관은 겹벚꽃이 한창이다

  • 작성일 2015-05-08
  • 조회수 962

 

[박경리 선생님을 추억하며]

 

 

토지문화관은 겹벚꽃이 한창이다

 

 

 

김이정

 

 

 

 

    나는 지금 토지문화관에 들어와 있다. 연세대 원주캠퍼스의 호숫가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나는 짐을 싸들고 토지문화관 창작실로 들어왔다. 원주에 들어서자 낯익은 산과 호수, 간판 들이 환영객들처럼 나를 맞이해 주었다. 촘촘한 그물로 늘 조이고 있는 듯하던 머릿속은 순식간에 느슨해졌고 불안정하던 호흡은 편안해졌다. 이것만으로도 나의 2015년 봄은 특별해졌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새해가 되면 토지문화관에 갈 수 있는 해와 갈 수 없는 해로 나누기 시작했다. 격년으로 지원이 가능한 시스템이 어느덧 내 삶의 패턴이 돼버린 것이다.
    토지문화관에 처음 온 것은 2001년이었다. 창작실이 처음 생긴 해였는데, 눈 밝은 친구가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이 생겼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함께 가자고 한 덕이었다. 석 달 동안 숙식을 제공한다는 것도 솔깃했지만 흠모해 마지않던 작가 박경리 선생을 지척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큰 유혹이었다.
    하지만 내가 박경리 선생을 처음 본 것은 커튼 뒤에 숨어서였다. 아침 일찍 텃밭에 나와 고추밭의 풀을 매고 있는 선생을 나는 창작실의 커튼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선생은 고양이 시내를 옆에 두고 밭둑에 퍼질러 앉아 아침 해가 정수리에 올 때까지 밭을 매셨다. 그러곤 새로 올라온 상추를 소쿠리 가득 따서 식당으로 가져오셨다. 점심 식탁에 오를 상추였다. 밤색 작업복 치마와 남색 남방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선생이 식당에 상추를 갖다 주고 다시 댁으로 들어가실 때까지 커튼 뒤에 숨어 내내 지켜보았다. 그 후로도 어쩌다 문화관 뜰에서 선생 특유의 가늘고 높은 음성이 들려오면 나는 바로 창가로 달려가 커튼으로 몸을 가리고 오래 지켜보곤 했다. 마치 스토커 같았다. 어쩌다 밭에 나온 선생과 마주치면 수줍게 고개 숙여 인사만 했지 변변히 감사의 말씀도 제대로 못 드렸다. 선생은 내게 너무 크고 높은 산이었다.
    오직 소설만 쓰라며 내주신 쾌적한 방에서 석 달을 먹고 자고 나가는 날, 나는 결국 토지문화관 근처에 방을 얻었다. 대학생들을 위한 작은 원룸아파트였다. 선생 덕에 처음 맛본 ‘자기만의 방’이 더 간절해진 데다 선생의 곁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그 후 만 4년 동안 그 방을 오가며 나는 토지문화관과 선생의 언저리를 배회했다. 어느덧 토지문화관과 작가 박경리는 나의 배경이 돼 있었다.
    원주의 방을 떠난 후 나는 다시 토지문화관 창작실을 다시 드나들기 시작했다. 어쩌다 소설이 잘 써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글이 써지지 않아도 나는 이곳에서 지내는 두세 달의 시간 덕에 다시 도시에서의 황막한 삶을 견뎌내고 자비롭지 못한 현실과 맞서 싸울 힘을 얻곤 했다. 토지문화관은 내 인생의 발전소가 돼버렸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날의 점심시간, 식탁 위에 연둣빛 두릅 순들이 얌전히 포개져 있다. 철 지난 김장김치와 무장아찌, 고등어조림들 사이에서 연둣빛이 찬란하다. 서둘러 두릅 순 하나를 입안에 넣고 씹는다. 겨우내 폐허처럼 말라있던 입안으로 연한 새순과 청량한 녹즙이 거침없이 침투한다. 연둣빛 봄이 온몸으로 번져 간다. 혈관 속에도 연둣빛 피가 흐르고 있을 것만 같다. 순간 자동연상처럼 언젠가의 두릅이 떠오른다. 살아생전에 박경리 선생이 손수 해주시던 두릅 반찬.
    선생이 해주신 반찬들은 확연히 표시가 났다. 토지문화관 식당에 줄지어 놓여 있는 반찬들과는 그릇부터 달랐다. 선생의 반찬들은 칠이 곱게 된 나무 그릇에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옻칠이 고운 목기들이 보이는 날은 밥 먹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 반찬들을 준비했을 선생의 일정을 상상하며 반찬을 오래오래 씹었기 때문이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선생은 냉동실에서 지난봄 데쳐 적당한 뭉치로 밀봉해 보관한 나물들을 꺼내 놓는다. 언 나물들이 녹는 동안 선생은 연근을 썰어 간장에 조린다. 마지막으로 호두나 땅콩, 잣 등을 넣어 살짝 버무려 연근조림이 끝날 즈음 밖에선 고양이 시내가 밥 달라고 보채기 시작한다. 선생은 시내의 밥을 챙겨 주기 위해 푸른 박명이 트는 밖으로 나간다. 시내가 아침인사라도 하듯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부터 나타나 시내의 밥을 나눠먹기 시작한 갈색 들고양이 한 마리도 기다렸다는 듯이 대여섯 발짝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온다. 선생은 고양이 밥을 넉넉히 챙겨 준다. 그걸 본 자작나무 가지 위의 새들이 더 요란하게 울기 시작한다. 겨울이라 먹을 것이 모자란 새들의 울음이 드세다. 들판은 이른 눈으로 덮여 있고 벌레 한 마리 찾을 수 없는 추위인 것이다. 선생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뒤진다. 얼마 전 시내 정육점에서 얻어온 쇠기름 뭉치를 꺼내 잘게 썰기 시작한다. 새들이 먹기 좋을 만한 크기로 썰어 봉지에 담아 다시 밖으로 나온다. 나무 둥치에 사다리를 기대 놓고 오르기 시작한다. 뾰족한 가지를 골라 하얀 쇠기름을 하나씩 끼운다. 더러 부러지는 가지들도 있지만 부드러운 쇠기름은 다행히 어렵지 않게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쇠기름 조각들을 매단 나무는 흰 꽃이 핀 듯하다. 사다리를 미처 내려오기도 전에 배고픈 새들이 하나둘 날아오기 시작한다. 새들의 식사를 방해하지 않으려 선생은 얼른 사다리를 거두고 안으로 들어간다. 조리대 위엔 새벽부터 해동을 시작한 언 두릅이 어지간히 녹아 있다. 선생은 얼어붙은 두릅 순들을 하나하나 떼어 놓는다. 끓는 물에 살짝 데치니 금방 딴 두릅 같진 않지만 어지간히 연둣빛이 살아난다. 문화관을 짓고 두릅나무를 집 주위로 넉넉히 심은 게 선생은 몹시 흐믓하다. 창작실을 들고나는 작가들을 고루 먹이려면 무엇이든 많은 양이 필요하다.
    목기에 곱게 담긴 선생의 반찬들은 모양뿐 아니라 맛도 각별했다. 선생의 반찬들은 달짝지근했다. 선생의 음식을 처음 먹었을 때였다. 존경하는 작가가 손수 만들어준 반찬을 먹는다는 감격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연근 하나를 먹은 후 다시 젓가락을 대지 못했다. 선생은 단맛을 좋아하시는 걸까. 어른들이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한다는데 선생도 그러신 걸까, 아니면 일찍이 틀니를 한 엄마의 음식이 몹시 짜졌듯이 선생도 맛을 정확히 음미하지 못하시는 게 아닐까, 나는 온갖 상상을 하며 당황했다.
    다른 작가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겨울에 나온 귀한 두릅 순에만 자주 젓가락이 갔다. 나 역시 두릅 순을 아껴 먹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근조림을 하기 위해 두꺼운 안경을 쓰고 새벽부터 아침까지 조리고 무치고 버무렸을 선생의 분주한 손길이 떠올랐다. 아니 겨울나무 가지에 쇠기름을 하나하나 꽂아 놓듯 후배 작가들을 먹이기 위해 아침 내내 연근을 조리셨을 선생의 손길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연근을 집었다. 고소한 땅콩과 잣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나는 연근을 정성껏 씹었다. 달짝지근한 맛이 땅콩과 어우러져 입안으로 진하게 번졌다. 신기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제야 나는 선생이 달짝지근하게 요리를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다음 밥시간이 될 때까지 틀어박혀 자발적 연금 상태가 되는 작가들에겐 무엇보다 단맛이 필요했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원고를 붙들고 앉아 무시로 자신의 재능을 탓하며 자학을 일삼는 작가들에게 그 달콤한 맛은 다시 한 번 쓰던 글을 붙잡고 씨름하라는 선생의 위로와 격려가 아닐까. 그러니까 선생은 일부러 반찬을 달게 만드신 게 아닐까. 나는 어느덧 선생의 달짝지근한 반찬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제 두 명의 동료 소설가가 창작실을 떠났다. 오늘도 또 두 명의 작가들과 헤어질 것이다. 이틀 전 저녁, 휴게실에 모여 한 시인이 사온 막걸리로 송별회를 이미 치렀으니 서운함이 덜할 법도 한데 헤어지는 일은 언제나 익숙지 않다. 하루 두 번씩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오리 떼처럼 줄지어 동네 길을 산책하거나 노란 공이 빗나갈 때마다 환호와 탄식을 주고받으며 복식 탁구를 함께 쳤으며, 서로의 민낯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고, 때론 혼자 울어 퉁퉁 부은 눈을 들키기도 한 그들과 긴 포옹을 나누며,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어느새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코끝이 시큰해진다. 선생이 방을 내주고 어미 새처럼 보살펴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만남들이다.
    선생이 손수 만든 장독대 위로 분홍 겹벚꽃 흐드러져 있다. 그분의 일곱 번째 기일이다. 숲에서 검은등뻐꾸기 슬피 운다.

 

 

 

작가소개 / 김이정(소설가)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 소설집 『그 남자의 방』, 『도둑게』와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이 있음.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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