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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극특집] 부부의 식탁

  • 작성일 2015-07-16
  • 조회수 2,646

 

[시극 특집]

 

 

부부의 식탁

 

 

 

유희경

 

 

< 기획 의도 >

   시극은 침묵의 질을 표현하는 극운동이다. 시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쓰는 것이다. 시극이란 시의 속성이 살아 움직이는 극이다. 침묵은 시극에 숨어 사는 이끼들이다. 시집 속엔 시인이 넣지도 않은 귀뚜라미가 들어가 울고 있기도 하고, 시극 속엔 연출과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보아 뱀이나 코끼리가 무대에 나와 어슬렁거리거나 어른거리기도 한다. 시와 극은 쌍생아처럼 한 몸이다. 시극은 시와 극이 함께 숨 쉬는 공존지다. 시극을 살리는 일은 시운동과 극운동의 더부살이 운동이다. 시극을 통해 침묵이 살아 있는 질을 만드는 작업들은 오히려 시와 연극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시극은 모국어의 살과 피를 찾아가는 리듬을 포기하지 않는 작업이다. 시극은 멸종하면 안 된다. 자극과 말초적인 감각만 앞서는 시대에서 시극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현상은 안타까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시극을 위한 지면이 전무한 것은 문학의 지평 안에서도 적극적인 모색이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번 기획 특집에선 시인이 쓴 시극 몇 편을 소개하기로 한다. 김경주, 유희경, 석지연 세 시인들의 시극 작품은 시극을 문학 독자가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시와 희곡의 느슨해진 혈연을 잇고, 동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레제드라마 「읽는 희곡」의 자장에도 독창적인 울림을 줄 수 있는 작업의 의미를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

 

시극_부부의식탁

 

    등장인물

 

    박혜연 30대 초반
    안규철 30대 중반, 혜연의 남편
    김미숙 50대 초반, 혜연과 규철의 아랫집에 사는 여자
    이영섭 30대 중반, 규철의 친구

 

 

    무대 제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보통의 작은 아파트의 내부. 오른쪽으로 아파트 복도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 통로와 연결되어 안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안방은 조명에 따라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도록 한다) 무대 전면으로 보이는 것은 작은 거실과 그보다 작은 부엌이다. 거실에는 검정 소파와 텔레비전. 부엌에는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고동색 식탁. 식탁 위에 하얀 소국이 들어 있는 투명한 꽃병이 놓여 있다. 식탁 의자는 두 개여도 좋고 세 개여도 좋다. 무대의 왼편 맨 끝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다. 베란다 밖으로 밖이 보이고 보일 듯 말 듯한 새장이 있다. 바닥은 퍼즐 조각들이 맞춰져 있고, 몇 군데는 비어 있어도 좋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보통의 작은 아파트의 내부. 오른쪽으로 아파트 복도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 통로와 연결되어 안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안방은 조명에 따라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도록 한다) 무대 전면으로 보이는 것은 작은 거실과 그보다 작은 부엌이다. 거실에는 검정 소파와 텔레비전. 부엌에는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고동색 식탁. 식탁 위에 하얀 소국이 들어 있는 투명한 꽃병이 놓여 있다. 식탁 의자는 두 개여도 좋고 세 개여도 좋다. 무대의 왼편 맨 끝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다. 베란다 밖으로 밖이 보이고 보일 듯 말 듯한 새장이 있다. 바닥은 퍼즐 조각들이 맞춰져 있고, 몇 군데는 비어 있어도 좋다.

 

 

규 철 (하품하며) 배고프다. 몇 시야?
규철 미숙을 보지 못한 채 화장실로 들어가 소변을 본다. 미숙 헛기침을 하고 일어날 채비를 한다. 규철 나와서 미숙을 발견하고 멋쩍어한다.
규 철 (당황한 채) 아, 오셨어요? 계신 줄 몰랐네요.
미 숙 (일어나며) 아니에요. 일요일인데 죄송해요. (혜연에게) 나 갈게.
혜 연 더 있다가 가세요.
미 숙 아냐, 가서 점심해야지. 다들 집에 있어서.
규철 어색한 자세로 서 있고 혜연은 미숙을 따라 나선다.
미 숙 그럼 내일 봐.
혜 연 예, 감사해요.
미 숙 무슨. 내가 고맙지. (규철의 눈치를 보며) 그럼 나 갈게.
혜 연 네, 안녕히 가세요.
문이 닫힌다. 혜연 들어온다.
규 철 (빈정대듯, 미숙을 흉내 내며) 무슨. 내가 고맙지.
혜 연 그러지 마. 좋은 분이야.
규 철 뭐,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했나?
규철 어깨를 으쓱하고는 거실로 가서 TV를 켠다. 채널 넘어간다. 혜연 싱크대에 기대 규철을 본다.
혜 연 나 세례 받으려구.
규 철 (채널을 넘기며) 세례?
혜 연 응.
규 철 성당?
혜 연 아줌마가 대모를 서주신다네. (짧은 사이) 종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프로야구 중계에서 채널이 멈춘다. 사이.
규 철 왜?
혜 연 뭐가?
규 철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냐구.
혜 연 전부터 다니고 싶었어.
규 철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혜 연 그런 것도 상의를 해야 돼?
규 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사이. 규철 텔레비전 볼륨을 높인다.
규 철 하다가 그만두지 말고 다니려면 제대로 해봐.
혜 연 뭐라구?
규 철 열심히 다녀 보라구. 근데 너무 빠지진 말아라.
혜 연 텔레비전 소리 좀 낮춰.
규철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낮춘다.
혜 연 무슨 소리야.
규 철 거 종교에 미쳐서 돈 내고, 몸 버리고 그러던데.
혜 연 성당은 그런 거 없어.
규 철 다르긴 또 뭐 다르겠어. 다 똑같지.
혜 연 오빠가 어떻게 알아. 다녀 본 적도 없으면서.
규 철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너도 다녀 본 적 없잖아.
혜 연 있어. 잠깐이지만. 어렸을 때.
규 철 그건 어렸을 때니까.
사이.
혜 연 볼륨 좀 낮추면 안 돼?
규 철 뭐가 크다 그래? 스포츠 중계는 소리가 있어야 실감 난다구.
혜 연 멋대로 좀 굴지 마.
규 철 아 거참.
규철 볼륨을 줄인다. 아주 작게 들리는 야구 중계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적이 흐른다.
규 철 성당이 어딨지?
혜 연 알았어. 안 다닐 테니까 그만 해.
규 철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왜 그렇게 삐딱해?
혜 연 지금 삐딱한 게 나야 오빠야?
규 철 (한숨을 내쉰다) 일요일 아침부터……. 알았어. 그만 하자.
긴 사이.
혜 연 길 건너 빵집 뒤에 있어.
규 철 (텔레비전에 집중하며) 뭐가?
혜 연 성당 말이야.
규 철 거기에? 이야, 신기하네. 왜 몰랐지?
혜 연 나도 몰랐어.
규 철 어? 어? 넘어간다. 잡아. 잡아!
혜 연 고집부리지 말고 볼륨 올려.
규 철 (볼륨을 적당히 올리며) 에이씨. 저 새끼 저거 어깨 고장 난 줄 알았어. 연봉이나 비싸게 부르고 할 때 알아봤는데. 그냥 라이온스로 보내지.
혜 연 시장에서 집에 오는 길이었는데, 그 빵집 앞에서 만났거든. 그 빵집 이름이 뭐더라?
규 철 (건성으로 대답하며) 응.
혜 연 너무 표정이 좋더라구. 아줌마 말이야. 그런 표정 처음 봤어.
규철 대답하지 않는다.
혜 연 부럽던데. 그래서 어디 다녀오시냐구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성당 다녀온다고 그러셔서……. 갑자기 옛날 신부님이 생각나는 거야. 그분 성함이 어떻게 되셨더라. 토마스던가? 그랬는데.
규 철 삼진! 나이스! 그래도 아직 죽진 않았구만. 그래서?
혜 연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성당 다니고 싶어졌지.
규 철 미남이었나 보지?
혜 연 나도 그렇게 편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사이) 응?
규 철 응? 응.
혜 연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규 철 응. 듣고 있어. 아무튼 알았어.
혜연 텔레비전을 끈다.
규 철 뭐 하는 거야?
혜 연 내가 뭐라고 했어?
규 철 까불지 말고 빨리 틀어.
혜연 텔레비전을 튼다.
규 철 뭐야? 끝났나? 다행이네. 그래서 그 아줌마가 그 뭐더라? 전도. 그래 전도하기로 한 거야?
혜 연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규 철 듣고 있었다니까. 난 그 아줌마 싫던데. 왜 맨날 시끄럽다고 올라와서 지랄하고 그랬잖아. 왜 기억 안 나?
혜 연 언제 맨날이야. 한 번이지. 그것도 희수가 너무 울어서.
긴 사이.
규 철 그 아줌마 네는 식구가 어떻게 된데?
혜 연 (생각에 잠겨) 그때 왜 그렇게 울었더라?
규 철 못해도 오십은 됐겠던데.
혜 연 침대에서 떨어졌었나? 잘 자고 있었는데. 아무리 달래도 울었어. 오빤 모른 척 텔레비전만 보구.
규 철 그만 해.
혜 연 뭘?
규 철 왜 없는 애 얘길 해? 좋을 거 없어. 생각나도 참아. 그럴수록 너만 힘든 거야
혜연 대답하지 않는다.
혜 연 미안해.
긴 침묵. 작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혜 연 (애써 웃으며) 저기 배 안 고파?
규 철 그냥 그래.
혜 연 뭐 해줄까? 계란찜 좋겠다. (냉장고를 열다가) 아, 계란이 없네. 내가 가서 금방 사올게.
규 철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되는 대로 먹자.
혜 연 금방 사올게.
혜연 안방으로 가서 지갑과 카디건을 챙겨서 서둘러 나간다. 규철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천천히 암전. 곧 무대 위에 텔레비전 빛만 남는다.
규 철 에이 씨발. 헛스윙하고 지랄이야. 거기서. 병신.
암전.
조명이 들어오면 식탁 위 아침식사의 흔적이 있다. 양복을 입은 규철이 나오고 그 뒤를 혜연이 따른다. 규철의 차림은 아직 다 갖춰지지 않았다. 혜연의 손에는 넥타이가 들려 있다.
규 철 오늘 정말 무슨 날 아니지? 이상하네. 미역국이 나오질 않나, 일찍 들어오라고 하질 않나. 당신 생일은 아니고……. (정색하며) 내 생일이야?
혜연 대답은 하지 않고 자신의 목에 넥타이를 걸어 헐겁게 맞춘다. 규철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규 철 당신 참 넥타이가 잘 어울려. 우리 바꿀래? 당신이 넥타이 매고 나는 살림하고. 모르긴 해도 아마 지금보다 나을걸? 참, 대출 이자 나왔더라. 요즘 세월 가는 건 고지서로 확인한다니까. 어제 출근하다가 회사에 가지고 갔는데 안 가지고 왔네.
규철 혜연 목에서 넥타이를 벗겨 걸고 맞춘다.
규 철 아, 너무 조인다. 어허, 왜 이러시나. 아무리 돈이 궁한 집이어도 그렇지 말이야. 나 몰래 보험 몇 개 더 들어 둔 거 아냐?
규철 제 말이 우스워 웃다가 반응이 없자 웃음을 거둔다.
규 철 무슨 생각 해?
혜 연 응? 아냐. 아무 생각도 안 해.
규 철 돈 걱정 하는 거라면 염려 마. 설마 내가 마누라 하나 건사 못 할까.
혜 연 걱정 안 해.
규 철 일찍 들어올게.
아이의 울음소리 처음보다 조금 더 자랐다.
혜 연 저기 무슨 소리 안 들려?
규 철 뭐?
규철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규 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혜 연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정말 안 들려?
규 철 무슨 소린데?
혜 연 몰라. 그냥 물 흐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규 철 어디서 물이 새나? (웃으며) 별일 아닐 거야. 다녀올게. 병원 가봐.
사이.
혜 연 정말 안 들려?
규 철 언제부터 그러는데.
혜 연 가끔 그래.
규 철 샤워하다 귀에 물 들어간 적 없어? 아마 중이염 같은 걸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럼 다녀올게.
규철 나간다. 혜연 돌처럼 서 있다. 작은 방 문을 열어 한참을 보다가 문을 닫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조명이 바뀌면 저녁이다. 빗소리에 섞여 혜연의 기침소리 들린다. 문 앞에서 기척이 나고 규철이 들어온다.
규 철 다녀왔습니다. 웬 비가.
규철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간간이 혜연의 기침소리 들린다. 사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몇 모금을 빠는데 다시 혜연의 기침소리. 규철 싱크대에다가 담배를 끈다. 침묵이 흐른다. 현관벨 소리. 규철 의외라는 듯 나간다. 누군지 묻는 소리. 문 여는 소리. 규철 들어오고 손에 통을 든 미숙이 따라 들어온다.
미 숙 죽이에요.
규 철 아, 감사합니다.
미 숙 별거 아닌걸요.
사이.
미 숙 언제 시간 되시면.
규 철 저는 종교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미 숙 아뇨. 그게 아니라 식사라도 하면 어떨까 해서요.
규 철 아, 식사요. (사이) 좋죠.
사이.
규 철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미 숙 아뇨. 우리 집 양반도 얼마 전에 감기를 앓았어요. 기침이 아주 심했는데.
규 철 기침은 별로 없습니다.
미 숙 그렇죠. 우리 집 양반은 담배를 피우거든요. 혹시 담배 피우시나요?
규 철 아뇨.
미 숙 끊으시는 게 좋겠어요.
사이.
미 숙 아이 생일이었다면서요.
규철 침묵을 지킨다.
미 숙 힘든 일이죠. 쉽게 잊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사이.
미 숙 제가 괜한 참견을 했나 봐요.
규 철 아닙니다.
전화벨이 울린다. 규철 전화를 받는다. 그냥 끊긴다.
미 숙 저, 가봐야겠네요.
규 철 아, 죽 정말 감사합니다.
미 숙 무슨 말씀을요. 필요하시면 더 말씀하세요.
규 철 예.
미 숙 그럼 쉬세요.
규 철 예, 들어가세요.
미숙 나간다. 규철 멍하니 서 있다가 식탁에 앉아 달력을 확인한다. 사이, 시간이 조금 흐른다. 조명이 바뀐다. 혜연이 나온다.
규 철 왜 나와? 더 자지.
혜 연 아냐. 너무 잤나 봐. 어지럽네.
규 철 참 오래간다. 몸이 약해져서 그래. 밥도 잘 챙겨먹고 그래야지.
혜 연 (희미하게 웃는다) 잔소리꾼.
규 철 나는 좋아서 하는 줄 알아?
사이.
규 철 아참. 말 안 했지? 며칠 전에 영섭이 만났어.
혜 연 영섭 선배?
규 철 그래, 영섭이. 옛날이랑 똑같더라.
혜 연 웬일이래?
규 철 사진 찍으러 왔다고 하더라구.
혜 연 무슨 사진? 결혼사진?
규 철 아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자세한 건 모르고, 잠깐 인사했어.
혜연 기침을 심하게 한다.
규 철 내일 만나기로 했어. 같이 저녁 먹으려구.
혜연 대답하지 않는다. 규철 멀리 창밖을 본다.
규 철 비가 올 것 같아.
혜 연 춥겠다.
규 철 아직은 안 그래.
혜 연 아니, 희수.
침묵.
규 철 기억나? 우리 왜 사진 찍을 때 영섭이가 너 웃긴다고 쓸데없는 얘기 했다가 너 울었잖아. 걔도 그렇지만, 그런 날 우는 너도 참.
혜연은 오한이 드는지 팔로 몸을 감싼다.
규 철 가서 더 자. 무리하다 또 심해지겠다.
혜 연 그래야겠다. 먼저 잘게.
혜연 방으로 든다. 규철 앉아 있다. 암전.
조명 들어오면 두 사람 식탁에 앉아서 식사 중이다. 아침 조명, 규철은 사각 팬티에 위에 와이셔츠와 넥타이.
혜 연 (규철을 보지도 않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규 철 그러지 말구.
혜연 일어나 그릇을 거칠게 싱크대 안으로 집어넣는다.
규 철 길어야 한두 달이야. 친구 어려운데 그럼 안 도와줘?
혜 연 지금 있는 데도 있다며? 한두 달이야. 그런 곳에 있다고 어려울 것도 없어.
규철 말없이 숟가락을 놓는다.
혜 연 그리고 방이 어딨어? 거실에 재울 거야?
규 철 작은 방 비울 거야.
혜 연 뭐?
규 철 월세도 받을 거구. 잘 됐어. 이자 때문에 힘들었는데, 잠깐이라도 도움 될 거야. 좋게 생각하자. 도와주자. 도움도 받고.
혜 연 미쳤어? 저…… 저 방을 내주자고? 희수 방을?


규 철 언제까지 그럴 건데? 치울 방이었어. 이제 우리가 살아야지. 너도 힘들잖아.
사이. 혜연 눈에 눈물이 흐른다.
규 철 너랑 내가 이런다고 희수가 돌아오는 것도 아냐. 그리고 아주 없애자는 것도 아니잖아. 조금만 정리하면 돼. 너가 힘들면 내가…….
혜 연 (작은 목소리로) 오빠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규 철 뭐?
사이.
혜 연 희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규 철 그만 해.
혜 연 왜? 오빠는 늘 그랬어. 내 생각은커녕 아이의 안부도 궁금한 적이 없지.
규철 거칠게 일어난다. 의자가 넘어진다. 방으로 들어간다. 혜연 규철을 보지 않는다. 규철 옷을 차려 입고 다시 나온다. 서 있는 혜연을 본다. 잠시 움직이지 않는다.
규 철 너는…….
규철 나간다. 문 닫는 소리가 요란하다. 혜연 서 있다가 무슨 소리라도 들은 듯 귀를 막는다.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사이. 혜연 겨우 일어나서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조명이 바뀐다. 현관 벨이 울린다. 작은 방에서 한 소쿠리 짐을 가지고 혜연이 나온다.
혜 연 누구세요?
미 숙 아랫집.
혜연 문을 열어 준다.
혜 연 안녕하셨어요?
미 숙 (웃으면서) 얼굴 보기 힘드네? (건너다보며) 뭐 해? 짐 정리해?
혜 연 아니에요.
미 숙 (빼앗듯 소쿠리를 들다가) 아이 물건이네. 아이 방 정리하는 거였어?
혜 연 (돌려받으며) 그럴 일이 있어서요. 앉아 계세요. 차 드셔야죠?
미 숙 차는 무슨. 바깥양반 올 시간이야. 됐어. 일해.
혜 연 잠깐 앉아 계세요. 금방 끝나요.
미 숙 아이 아빠랑은 얘기한 거야?
혜연 대답이 없다.
미 숙 남자들. 이럴 땐 예민한 척한다고. 행동 하나 하나 무슨 죄진 사람들처럼. (대답이 없자) 에이 그래, 잘했다. 자꾸 둬야 마음만 무겁지. 빨리 덜어내.
혜 연 요즘 성당은 어때요?
미 숙 자기 없어서 허전하지. 주임신부님도 찾으시더라. 신경 쓰시는데 정신없어도 얼굴 보이고 그래.
혜 연 그럴게요.
미 숙 아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
혜 연 (망설이다가) 희수요.
미 숙 물건 보니까 갓난둥이네. 몇 살이었어? (사이) 으이고, 내가 또 주책이다.
혜 연 아니에요. 올해 다섯 살이에요.
미 숙 미안해.
혜 연 아니에요.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 규철 들어온다. 규철 미숙을 발견하고 멈칫한다. 혜연 규철을 보지 않고 할 일을 한다. 규철 그대로 서 있다.
규 철 오셨어요?
미 숙 네, 일찍 퇴근하셨네요.
사이.
미 숙 혜연 씨, 나 갈게.
혜 연 정말 그냥 가시게요?
미 숙 가야지. (규철에게)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규 철 네, 들어가세요.
미숙 나간다. 사이.
규 철 뭐 하는 거야? (혜연이 대답하지 않자) 언제까지 말 안 할 건데. 죽을 때까지 말 안 할래?
혜연 대답하지 않고 한 소쿠리의 짐을 옮긴다. 혜연 짐 밖으로 작은 플라스틱 공이 떨어진다. 규철 그 공을 집어 들어 본다.
규 철 뭐 하는 거냐니까.
혜 연 몰라서 물어?
사이
규 철 억지로 할 필요 없어.
혜연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한 소쿠리를 들고 나온다.
규 철 줘. 내가 할게.
혜연 뿌리치듯 규철의 손을 거절한다.
규 철 이번 주말에 영섭이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혜 연 부탁이 있는데.
규 철 응, 뭔데.
혜 연 지금 말 시키지 마.
혜연 베란다로 간다. 규철 그녀를 보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간다. 완전한 침묵. 천천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암전.
천천히 조명이 들어온다. 밝은 느낌이다. 현관 벨소리가 들린다.
규 철 (안방에서 목소리만) 혜연아.
현관 벨소리 반복된다.
규 철 (나오면서) 혜연아. 얘는 또 어디 갔어? 누구세요?
영 섭 안규철 씨 집 아닌가요?
규철 문을 연다. 짐을 든 영섭이 서 있다.
규 철 어서 와. 찾는데 고생 안 했어?
영 섭 아파튼데 뭘.
규 철 (영섭의 가방을 받아들며) 들어와. 여보, 영섭이 왔어.
영섭 들어와 집을 두리번거린다. 혜연 베란다에서 나온다. 분무기를 들고 있다.
영 섭 와, 혜연아. 오랜만이다.
혜 연 오랜만이에요.
영 섭 더 예뻐졌네.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규 철 (작은 방 문을 연다) 여기가 네가 쓸 방이야.
규철을 따라 영섭이 들어간다. 혜연 지켜보고 서 있다가 허공에 분무질을 몇 번 한다. 잠시 뒤 규철과 영섭이 나온다.
혜 연 나 장 좀 보고 올게…… 요.
혜연 나간다. 영섭 말없이 혜연의 뒷모습을 본다. 두 사람 식탁에 앉는다.
규 철 좋아 보이네. (사이) 사진 좀 찍었어?
영섭 웃으며 고개만 젓는다.
규 철 자식 웃기는. 그러지 말고 사진 좀 보여줘 봐. (생각난 듯) 아, 그래, 내친 김에 우리 사진도 좀 찍어 줘. 변변한 가족사진 하나 없네.
영 섭 가족사진이야 더 나이 먹고 찍어도 돼. 아이 없을 때야 결혼사진하고 다를 거 있냐?
사이.
규 철 눈은 괜찮은 거야?
영 섭 그럭저럭. 생각 안 해. 그냥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 신경 쓰지 마.
사이. 규철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작고 하얀 공을 발견하고 꺼낸다. 만지작거린다.
규 철 있었어. (짧은 사이) 아이 말이야. 우리 애 있었어. (사이) 근데 먼저 보냈어. 벌써 일 년이 넘었네.
영 섭 몰랐다. 미안해.
규 철 (웃는다) 네가 왜 미안하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러고 나서 좀 달라졌나 봐. 혜연이 말이야.
영 섭 그렇겠지. 엄만데. 아빠고.
규 철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야. 혜연이 앞에서 애 얘기는 조심해 줬으면 좋겠다.
영 섭 그래, 알았어.
사이.
영 섭 (일어나며) 그럼 방에 가서 짐 좀 정리할게.
규 철 (따라 일어나며) 그래, 뭐 도와줄 거 없니?
영 섭 아냐, 됐어. 신경 쓰지 마. 뭐 짐이랄 것도 없는데.
영섭 방으로 들어간다. 규철 멍하니 보다가 자리에 앉는다. 하얀 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지켜본다. 희미하게 아이가 우는 소리. 규철은 못 듣고 공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봉투를 들고 혜연 들어온다. 잠시 정지. 울음소리 잦아든다.
규 철 (공을 감추며) 늦었네.
혜 연 이것저것 좀 사느라.
규 철 뭐 좀 볼 게 있다고 나갔어. 방금. 금방 들어오겠지.
혜연 천천히 사가지고 온 것들을 정리한다.
규 철 저기 영섭이가 정리 좀 되면 사진 찍어 준대.
혜 연 난 싫어.
사이.
규 철 기왕 하기로 한 거 웃으면서 하자.
긴 사이.
규 철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규철 나간다. 혜연 비닐봉투를 접어 서랍에 넣는다. 아주 가늘게 아이의 울음소리. 혜연 귀를 막는다. 천천히 암전.
혜연 빨래를 개고 있다. 영섭이 나온다. 가벼운 외출복 차림에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다. 현관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가려고 한다.
혜 연 선배.
영 섭 (놀라며) 응?
혜 연 (빨랫감을 내밀며) 이거 받아 가세요. 수건이랑 양말이에요.
영 섭 아. 아니 내 건 안 하셔도 되는데.
혜 연 그럼 잘 챙기시든지요.
사이. 영섭 방에다 두고 나온다. 다시 나가려다가 머뭇거린다.
영 섭 저기 혜연아.
혜 연 네?
영 섭 방 내주어서 고맙다.
혜 연 저한테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사이.
영 섭 날씨 참 좋다.
혜연 대답하지 않는다.
영 섭 가끔 바다에도 나가고 그러니?
혜 연 아뇨.
영 섭 아깝네.
혜 연 (하던 일을 멈춘다) 뭐가요?
영 섭 그렇잖아. 저렇게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
혜 연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한다) 예전에는요.
영 섭 그런데 지금은 왜 안 나가?
침묵.
영 섭 그렇기도 하겠다. 바로 옆에 살면 잘 안 가게 되잖아.
영 섭 생각해 보니까. 바다에 가본 지 십 년도 넘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보고 싶더라고. 파도소리며 수평선이며.
사이.
영 섭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사막이 아닌가 싶어.


혜 연 그럼 사막에 가면 되겠네요.
영 섭 글쎄 생각 좀 해봐야지. (사이) 왜 사막이냐고는 안 물어봐?
혜 연 왜 사막인데요.
영 섭 (웃는다) 너 많이 변했다.
혜 연 옛날엔 어땠는데요.
영 섭 궁금한 거 참 많았었잖아. 말끝에 물음표투성이였는데.
혜 연 그랬어요?
사이. 혜연 갠 빨래 중 몇 개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영 섭 내가 가본 건 바다가 전부여서 그랬던 건 아닐까 싶어. 그게 끝의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바다를 보니까 알겠더라고 내가 보고 싶은 건 다른 거였나 봐.
혜연 안방에서 나온다. 남은 빨래를 정리한다.
영 섭 멀리 끝도 없는 지평선을 보고 싶어. 그런 건 사막에나 있다던데. 왜 둘러봐도 온통 지평선인 그런 곳 말이야.
혜 연 이거 선배 양말이죠?
영섭 양말을 받아들어 유심히 본다.
혜 연 아니에요?
영 섭 맞아.
사이.
영 섭 사막에 사는 사람은 매의 눈을 닮는대.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다나 봐.
혜 연 그럼 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영 섭 언젠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사이.
혜 연 왜 지금은 아닌데요?
영 섭 가면 돌아오지 않을 거거든. (잠시 생각한다) 몰라. 아무튼 그래. 지금은 아니야.
혜연 영섭을 오래 본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빨래를 정리해 안방으로 들어간다.
영 섭 그럼. 난 가볼게. 오늘은 어시장 쪽에 가보려고 하는데 뭐 필요한 거 없니?
혜연 대답하지 않는다. 영섭 잠시 서 있다가 나간다. 천천히 암전.
조명 들어오면 규철 간편한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있다. 발을 닦는 중이다. 혜연 거실에 앉아 있다. 뭔가 생각을 하고 있다.
규 철 아주 죽겠어. 말대가리, 사람을 잡는다니까.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실적 내라고 잡는다 잡아.
사이.
규 철 무슨 일 있어?
혜연 대답이 없다. 규철 혜연을 보다가 식탁을 노크하듯 두드린다.
규 철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혜 연 응?
규 철 어디 다녀온 거야? 들락날락거리면 치매라던데. 벌써 아내 치매수발 들어야 하는 거야?
혜 연 미안. 뭐라고 했어?
규 철 무슨 일 있냐구.
혜 연 아냐, 아무 일도 없어.
규 철 그럼 왜 그래? (사이, 발톱을 유심히 본다) 깎아야겠네.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건지.
혜 연 참 유난하다. 남아나지 않겠다.
사이. 규철 손톱깎이를 찾는다.
규 철 손톱깎이 어딨지?
혜 연 거기 두 번째 서랍.
규 철 어디. (뒤적인다) 아, 여깄네.
규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발톱을 깎는다.
규 철 오늘은 박 대리가 당근 됐어. 말대가리한테 잘근잘근 씹혔지.
혜 연 오빠. 저기. 좀 허전하지 않아?
규 철 어디? 벽?
혜 연 응.
규 철 글쎄, 잘 모르겠는데.
혜 연 뭐라도 걸까 봐. 못 좀 박아 줘.
규 철 뭘 박고 그래. 그냥 둬. 매일 혹사당하는 사람한테 일 시킬 궁리나 하고.
혜 연 관둬. 내가 할게.
규 철 시간 나면 해줄게.
혜 연 박아 준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규 철 멀쩡한 벽 왜 뚫어. 집주인도 싫어할 거야.
침묵.
규 철 영섭이는 사진 좀 찍었대?
혜 연 몰라.
사이.
규 철 너 영섭이랑 사이좋았었는데. 질투 날 정도로.
혜연 대답하지 않는다.
규 철 아무튼 잘해 줘. 걔도 마음 편하지는 않을 거야.
혜 연 왜.
규 철 (잠시 주저한다) 그냥. 그렇겠지.
규철 발톱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규 철 안 자?
혜 연 자야지.
규철 안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창밖을 본다.
규 철 혹시 내일 비 온다고 했어?
혜 연 아니, 그런 말 못 들었는데.
규 철 비 올 것 같네. 몸도 찌뿌둥한 게.
규철 안방으로 들어간다. 빗소리. 혜연 멍하니 창밖을 본다. 천천히 조명이 바뀐다. 희수 방 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영섭이 나온다. 혜연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영 섭 바다도 보이고. 이런 데가 또 있을까?
혜연 영섭을 본다.
영 섭 서울엔 그 강 조금 보인다고 집값이 달라지는데 여긴 바다잖아. 얼마나 좋아. (웃음) 어젠 안개가 심하더니 오늘은 괜찮네. 오늘은 항구에 갈 거야. 뭐 사다줄 거 없어?
혜 연 안 가보셨어요?
영 섭 가보기야 했지만, 매번 달라지는걸.
혜 연 다를 게 뭐 있어요. 몇 십 년 전부터 그 자리 그대론데.
사이.
영 섭 혹시 로베르 드와르라는 사진작가 알아?
혜연 대답이 없다.
영 섭 매일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인데 말이야. 몇 년 동안 그 짓거리를 하는데도 똑같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어. 희한하지?
사이.
혜 연 선배는 사진 왜 찍어요? 전공도 아니었잖아요.
영 섭 돈도 안 되는 거 왜 찍느냐는 거지?
혜 연 그러게요. (사이) 죄송해요.
영 섭 아냐. (사이) 그런 질문 많이 받거든. 그래서 가끔 생각해. 난 왜 사진을 찍고 있나.
혜연 말이 없다.
영 섭 사진을 찍다 보면 말이야. 있는 건 줄 알았던 것이 없어지고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타나고 그래.
혜 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 섭 결혼사진 한번 봐봐. 거기 규철이든 너든 신기하지 않아? 지금 너희랑 다르잖아. 그런데 분명히 너희란 말이지.

.

혜연 어깨를 으쓱한다.
혜 연 그래서요?
영섭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혜연을 본다.
혜 연 저나 오빠가 변하고 선배가 변해서 뭐요. 다 바뀌면 뭐가 달라지죠?
영 섭 글쎄. (생각한다) 다 제자리라면 말이지, 우리 말이야. 살기 힘들지 않을까. 아냐,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럴 것 같다는 거지, 뭐. 못 들은 셈 쳐.
혜연 창밖을 본다.
혜 연 선배가 있는 방, 희수 방이에요. 알아요?
영 섭 희수? 아. (사이) 알고 있어.
혜 연 지 엄마 손에 죽었어요. 그것도 알아요?
영섭 대답하지 않는다.
혜 연 모든 게 뒤집혀버렸는데 왜 나는 살기 힘들죠?
혜연 아이 울음을 듣는다. 현기증을 느끼다가 의자에 다시 앉는다.
영 섭 왜 그래? 어디 아파? 규철이한테 전화할까?
혜 연 (건조한 목소리로) 아뇨, 됐어요. 그냥, 그냥 놔두세요.
영섭 어색하게 서 있다. 사이. 아이의 울음소리 잦아든다. 혜연 지친 기색이다.
혜 연 그냥, 머리가 좀 아픈 거예요.
사이. 혜연 방으로 들어간다. 영섭 멍하니 서 있다. 조명이 바뀐다. 규철이 들어온다.
규 철 빗소리 좋다.
영 섭 왔어?
규 철 응. 뭐 해?
사이.
영 섭 너네 집, 아니 너 살던 방 생각난다.
규 철 그건 왜 갑자기.
영 섭 술 잔뜩 취한 날이었는데.
규 철 야, 그런 날이 하루 이틀이었어?
영 섭 아무튼 언제였는지 아무튼 불 꺼놓은 방에서 너랑 이렇게 빗소리 들은 적 있어.
규 철 (생각한다) 그런 적이 있었나?
사이. 규철 창밖을 본다.
영 섭 난 어렸을 때부터 귀가 참 좋았어. 겁도 많아서 잠 못 잔 적도 많았어. 아무튼 그날 빗소리는 지금도 생생해. 아직도 그런 소린 들어 본 적 없으니까.
규 철 이게 또 시 쓰네. 얌마. 빗소리가 다른 게 어딨어.
영 섭 (웃는다) 너네 집 반지하였잖냐. 빗소리 아래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구. 이젠 다시는 그런 집에 살 일 없겠지?
규 철 그렇겠지. 무슨 큰일 없다면. 하기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영 섭 그래.
규 철 우리 언제 이렇게 나이 먹었냐. 너는 언제 철들래.
사이.
규 철 하기사 어른들 말씀 맞지. 철은 혼자 드는 게 아니라 같이 드는 거라더라. 너도 결혼도 하고 그래야지. (사이) 애도 낳고.
영 섭 철 혼자 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결혼 혼자 하는 거더라. 누가 알려줬음 좋겠다. 혼자 결혼하는 법. 이런 소리 좀 안 듣게.
두 사람 조용히 웃는다. 사이.
영 섭 규철아, 저기 말이야. 너네 아이 있잖아.
규 철 희수?
영 섭 그래, 희수. 혹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사이.
규 철 왜. 혜연이가 뭐라고 하던?
영 섭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규 철 괜찮아. 나도 알아. 요즘 혜연이가 조금 이상한 거.
영 섭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영섭 말을 더 하려다 그만둔다. 침묵.
규 철 야근을 하고 있는데 혜연이한테 전화가 왔어. 지금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알 수 없게 불길한 기분이었지. 말없이 우는 거야.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오토바이 사고였어. 혜연이가 데리고 시장에 갔었는데.
사이.
규 철 잠시 손을 놓은 사이 사고가 난 거야. 어른한테야 별거 아닐 수 있을 텐데 아이한테는 큰 사고였겠지. 오래 병원에 있었어. 의식이 없어서.
침묵.
영 섭 혜연이가 그러더라고. 제 어미 손에 죽은 거라고.
규 철 다들 그런 생각 들지. 나도 그런 생각 들어. 그날 내가 일찍 퇴근했더라면. 뭐 그런 거. 그건 혜연이 탓이 아냐.
사이.
영 섭 네가 잘 해줘야지.
규 철 (쓰게 웃는다) 내 속은 멀쩡하겠어?
사이.
영 섭 미안하다, 이런 거 물어봐서.
규 철 저러는 거 처음이라 너무 무섭다.
영 섭 씩씩한 애잖아. 괜찮을 거야.
사이.
규 철 나가서 술 한잔할까.
영 섭 의사가 마시지 말라더라.
규 철 그럼 마시지 말아야지
영 섭 먼저 들어갈게.
영섭 들어간다. 규철 혼자 앉아 있다가 거실을 서성인다. 주머니 속에서 작은 공을 꺼낸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주머니 속에 넣는다. 무언가 생각을 하는 모습이다. 손톱을 물다가 손톱깎이를 찾는다. 서랍을 뒤진다. 혜연이 방에서 나온다. 잠에서 깬 모습이다.
혜 연 뭐 찾아?
규 철 손톱깎이 어딨지?
혜 연 두 번째 서랍.
사이.
혜 연 늦었네.
규철 대답하지 않고 두 번째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들어 발톱을 깎는다.
혜 연 발톱 깎은 지 얼마 안 됐잖아?
규 철 그냥 두면 파고들어. 미리 미리 잘라 두는 게 좋아.
사이.
규 철 너 요즘도 이상한 소리 들려?
사이.
혜 연 아니.
규 철 들리면 들린다고 그래. 그래야 어디가 아픈지 알 거 아냐. 병원에 가야지. 자꾸 그러면.
혜 연 신경 쓰지 마. 오빠한테 고쳐 달라고 안 할 테니까.
아이 울음소리 들린다. 혜연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싱크대로 가서 약을 꺼내고 물을 따라 넘긴다. 규철 그 모습을 보다가 발톱을 깎는다. 침묵. 규철 소리 나게 손톱깎이를 집어넣는다.
규 철 할 말 있어.
규철 식탁에 앉는다.
혜 연 왜 그래, 무섭게.
규 철 아이 갖자.
혜 연 뭐?
규 철 아이 갖자고. 늦지 않았어.
혜 연 갑자기 왜 그래. 이러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자.
규 철 오래 생각했어. 충분해.
혜 연 오빠, 나 괜찮아.
규 철 너 생각만 하니? 내가 싫어. 내가 원해.
사이.
혜 연 희수 간 지 아직 이 년도 안 됐어.
규 철 내년에는 삼 년이고 다음해엔 사 년이야. 그러다 때 놓쳐.
사이.
혜 연 왜 이래 정말.
규 철 그랬잖아. 충분히 생각했다고. 이게 우리 둘 다를 위한 일이야. 생각해 봐.
규철 안방으로 들어간다. 혜연에게 다시 아이의 울음소리가 찾아든다. 혜연 급하게 약을 찾아 입안에 털어 넣는다. 부엌에 앉아 있다. 긴 사이. 암전.
조명이 들어오면 영섭과 혜연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혜연이 약상자에서 약을 꺼내 영섭의 손가락에 발라 준다.
혜 연 무슨 남자가 망치질도 잘 못해요?
영 섭 잘 안 보여서 그래.
혜 연 다 됐어요.
영섭과 혜연 한쪽 벽을 본다.
혜 연 더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영 섭 못은 삼분의 이만 들어가면 일 톤을 버틴대.
사이. 혜연 액자를 건다. 희수와 영섭이 있다. 영섭 사진을 보고 조금 당황한다.
영 섭 요즘 둘이 말 안 하더라. 싸웠니?
혜연 대답하지 않는다.
영 섭 옛날에도 어지간하게 싸웠잖니. 기억나? 왜 과실에서…….
혜 연 안 싸웠어요.
긴 사이.
영 섭 아, 맞아. 보여줄 게 있는데.
영섭 방으로 들어가 사진을 한 장 가지고 나온다.
영 섭 아까 사진 정리하다가 찾은 거야.
혜연 사진을 본다. 사진 안에는 세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나란히 서서 웃고 있다.
영 섭 기억나? 사진 찍은 기억은 나는데, 어딘지 모르겠다.
혜 연 계곡이잖아요. 비가 너무 와서 놀지도 못하고. 뭐가 좋다고 이렇게 웃고 있담.
영 섭 계곡? 비? (사이) 아. 나 군대 가기 전 여름이구나. 알겠다.
혜 연 혜숙 언니는 요즘 뭐 하고 사나 몰라.
사이. 매미소리 아주 가볍게 웃음소리. 사라진다. 혜연 영섭에게 사진을 돌려준다.
혜 연 연락되는 사람 없어요?
영 섭 응. 다들 사느라 바쁘지 뭐.
혜 연 사는 게 바쁜 일인가. 바쁘게 사는 게 문제지.
영 섭 (웃는다) 그렇네. 왜들 그렇게 바쁘게 사는지.
혜 연 다들 선배 같았음 얼마나 좋았겠어.
영 섭 어? 무슨 소리야. 나 서울에서 잘나가는 웨딩촬영 사진가였어.
혜 연 네, 어련하시겠어요.
혜연 대답하지 않고 부엌으로 간다. 조명 천천히 바뀐다. 저녁이다.
혜 연 나 궁금한 것 있어요. 선배 여기 왜 내려왔어요?
짧은 사이.
혜 연 무슨 카드 빚 같은 거 쫓겨서 온 거죠?
영 섭 사람을 뭘로 보고. 신용등급 A+ 인생이라고.
혜 연 학점을 그렇게 받았으면 얼마나 좋아.
짧은 사이.
혜 연 선배도 공부 어지간히 안 했어.
영 섭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마. 여성 팬들 실망한다.
혜 연 정말 그렇네. 애인 없어요?
영 섭 없어.
혜 연 왜요?
영 섭 내가 결혼하면 아가씨들 얼마나 실망하겠니.
혜 연 웃기지도 않아요.
영 섭 어쭈, 박혜연 많이 컸다.
혜 연 학교 다닐 때도 연애 한번 못 해봤죠?
영 섭 무슨 소리야. 너가 모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혜 연 정말?
영 섭 그럼, 그 사진에도 있는데.
혜 연 누구? 혜숙 언니? 어머, 웬일이야. 미쳤어.
영 섭 비밀이다.
혜 연 오빠도 몰라요?
영 섭 그럼, 나밖에 몰라.
혜 연 네?
영 섭 혜숙이도 모르는 일이거든.
사이.
혜 연 선배.
영 섭 왜?
혜 연 그런 건 짝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이.
영 섭 박혜연 많이 컸다.
혜 연 옛날에는 먼저 결혼한 사람이 어른이었대요. (사이) 손은 괜찮아요?
영 섭 응.
혜 연 다행이네.
조명이 변한다. 규철 들어온다. 두 사람 모른다. 규철 잠시 서 있다.
규 철 뭐가 그렇게 좋아? 재미있는 일 있어?
영 섭 어, 왔어? 빨리 왔네?
규 철 누가 들으면 매일 늦는 줄 알겠다. 무슨 얘기들 하고 있었어?
영 섭 이거 봐봐.
영섭 규철에게 사진을 건네준다.
규 철 야, 이게 언제 적 사진이야.
영 섭 어딘지 알겠어?
규 철 그럼, 이거 학교 뒷산이잖아.
혜 연 무슨 학교 뒷산이야. 계곡 놀러갔을 때잖아.
규 철 (웃으며) 무슨 소리야. 학교 체육대회 끝나고 나서 찍은 거잖아. 봐봐, 이거 체육대회 때 나눠준 티셔츠 아니야.
영 섭 어디 봐. (사진을 본다) 어, 정말 그렇네?
혜 연 밥은 먹었어?
규 철 대충 먹었어.
혜 연 집에 와서 먹지. 왜 나가서 돈을 써.
규 철 박 대리가 샀어. 좋은 일 있다고.
혜 연 그 사람은 무슨 돈이 있다고.
사이.
영 섭 그럼 우리 화투나 칠까? 심심한데.
짧은 암전. 조명이 들어오면 화투판 앞에서 영섭이 푸시업을 하고 있다.
영 섭 서른둘.
영섭 헐떡인다.
영 섭 이 부부 사기단.
규 철 무슨 서운한 소릴.
혜 연 선배가 화투 못 치는 거죠.
영 섭 아무튼 돈내기 아닌 게 다행이다.
규 철 아. 그러니까 돈내기 하자니까. 이틀치 반찬값은 거뜬했겠다.
혜 연 선배가 이렇게 못 칠 줄 알았나?
혜연 화투를 섞는다.
규 철 지금이라도 돈내기로 바꿀까? 어때, 해볼래?
영 섭 관둬라.
전화벨이 울린다. 혜연 섞다 말고 전화를 받는다.
혜 연 여보세요?
규 철 하기야. 백수 코 묻은 돈 뺏어서 뭐 하냐.
혜 연 아, 안녕하세요?
영 섭 누가 백수야? 프리랜서 사진가라고.
혜 연 어머,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규 철 이봐 친구, 프리랜서가 한국말로 뭔 줄 알아?
영 섭 뭔데.
혜 연 네, 지금 내려갈게요. (전화를 끊는다)
혜연 전화를 끊고 현관 쪽으로 간다.
규 철 백수야, 백수. 어디 가?
혜 연 아랫집 아줌마가 김치 좀 담갔대. 금방 올게.
혜연 나간다.
규 철 에이, 판 깨졌다. 오늘 영섭이 몸 좀 만들어줄 수 있었는데.
규철 희수 사진을 본다.
영 섭 몸은 내가 만들게 아니라 네가 만들어야지.
규철 대답하지 않는다. 사이. 암전.
조명 들어오면 혜연 김치통을 가지고 들어온다. 영섭은 없고 규철만 앉아 있다.
혜 연 선밴 어디 가는 거야? 볼일이 있다던데…….
규철 대답하지 않는다.
혜 연 연고도 없는 사람이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 시간에 나간담.
혜연 김치통을 두고 거실로 온다.
규 철 오늘 안 들어올 거야.
혜 연 영섭 선배? 어디 갔는데?
규 철 내가 하루 비워 달랬어.
사이.
혜 연 왜?
규철 혜연을 안고 입을 맞추려 한다.
혜 연 왜 이래?
혜연 저항하려다 그만둔다. 입을 맞춘다. 규철 혜연의 몸을 더듬는다. 잠시 뒤 혜연 규철을 밀어낸다.
혜 연 오늘은 안 되겠어.
규 철 왜?
혜 연 조금만 더 시간을 줘.
규 철 언제까지.
긴 침묵.
혜 연 미안해.
규 철 아냐, 내가 너무 서둘렀나 봐. (애써 웃는다) 영섭이한테 오라고 전화해야겠다.
규철 전화한다. 전화가 영섭이 방에서 울린다.
규 철 자식 급하게 나갔나 봐. 미안하네.
혜 연 오늘은 둘이 있자. 오랜만이 둘이 있으니까 좋네.
길고 따뜻한 침묵.
혜 연 오늘 참 시원하다.
규철 방으로 들어간다. 혜연 고개를 외로 틀고 뭔가 생각에 빠진다. 뭔가를 소중히 들여다보는 자세다. 그 사이 조명 천천히 바뀐다. 초인종 소리. 처음에는 작게 점점 현실적으로 바뀐다. 세 번 울린다. 미숙 들어온다. 혜연 모르고 있다.
미 숙 자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혜 연 어머, 언제 오셨어요?
미숙 혜연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는다.
미 숙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다.
혜연 웃는다.
미 숙 요즘도 많이 바빠?
혜 연 아뇨. (사이) 그냥 머릿속이 복잡해서요.
미 숙 쉽게 사는 사람이 어딨어. (사이) 하기사. 그럴 수 있을 때가 좋은 거야. 나이 먹으면 그렇게 고민하고 싶어도 고민 못 해. 자꾸 까먹어서. 십 분에 한 번씩 내가 무슨 고민 하고 있었더라? 하고 밥 태워먹고, 빨래에 비 맞히고.
혜연 웃는다.
미 숙 내가 혜연 씨만 할 때는 남편이 너무 너무 속을 썩여서 참다 참다가 못 참겠으면, 언니네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잤지. 종일 자고 다시 집으로 와서 저녁 하고 기다리는 거야.
사이.
미 숙 생각해 보면 그게 부부가 사는 방법이지 뭐. 우리 집 양반은 다 좋았겠어? 그 사람도 참고 살았겠지. 그게 다 주님의 뜻이야. 서로 견딜 수 있는 사람들끼리 짝지어 주는 거지.
긴 침묵이 흐른다.
혜 연 전 참 나쁜 사람인가 봐요.
미 숙 좋은 사람이 어딨어.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구.
혜 연 참 나쁜 사람…….
미숙 혜연의 손을 꼭 잡아 준다.
미 숙 사람 참 약하긴. 그래, 울어. 울어야 속이 시원해지지. 울고 싶으면 언제라도 울어. 혜연 씨 좋은 사람이야. 사람 다들 그렇지 뭐.
혜연 소리를 내며 운다. 미숙 안아 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천천히 들린다.
미 숙 교회 가자. 나와서 우리 같이 울자. 다 용서해 주신다. 다 주님 뜻이야. 가서 아기한테도 남편한테도 미안한 거 다 용서 받자.
조명 천천히 어두워진다. 희수 방에서 영섭이 나온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다. 암전.
조명이 들어오면 식탁에 규철이 앉아 있다. 막 퇴근한 차림이지만, 흐트러져 있다. 조금 취해 있다. 영섭이 들어온다.
영 섭 여기서 뭐 해?
규 철 보면 모르냐. 앉아 있잖아.
영 섭 술 마셨구나?
규 철 응, 약간. 앉아.
영섭 앉는다. 사이.
규 철 너 기억나냐? 왜 우리 결혼해서 자식 낳으면 서로 짝지어 주기로 했잖냐.
영 섭 그랬지.
규 철 그랬지가 아냐. 지금 큰일 난 거라고. 넌 결혼도 안 했지. 우린 자식도 없지.
영섭 웃는다.
규 철 웃어? 자식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네.
영 섭 알았어.
사이.
규 철 혜연이랑 지내기는 어떠냐?
영 섭 잘 해줘. 어려운 것 없이. 내가 미안하지.
규 철 그래?
사이.
규 철 사실 너가 오면 좀 나아질까 했거든. 나야 직장 나가고 그러면 신경도 못 써주고. 그래서 말이야. 위태로워. 바늘 끝처럼. 한때는 혜연이랑 헤어질까 생각도 해봤다.
영 섭 쓸데없는 소리.
규 철 아냐, 넌 몰라. 집에 오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 같아. 그냥 오면 막막해. 서로 멀거니 보고만 있는 거야. 멀리서.
영섭 말이 없다.
규 철 내가 취해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냐. 넌 정말 모른다. 아냐, 넌 옛날부터 늙은이 같았으니까 알지도 모르겠다.
영 섭 내 주제에 무슨.
규 철 넌 다 알잖아. 봐라, 영섭아. 내가 어쩌면 좋겠냐.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도저히…….
영 섭 너 취했다.
규 철 나도 알아. 내가 취한 거. 오죽 답답하면 너한테 이런 소릴 하겠냐. 너 우리 집 와서 웃음소리 한번 들어 본 적 있냐. 없지? 없지? 그게 내 잘못이냐? 아냐.
영섭 말이 없다.
규 철 사람이 행복하단 게 별거냐? 그냥 들어와서 서로 얼굴 보고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는 거 아냐? 내가 틀린 소리 하냐.
영 섭 그게 다 마음먹기 나름이더라. (사이) 나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원망했지. 엄마, 아버지, 할머니, 심지어는 하느님까지. 그런데 말이야, 여기 오고부터는 마음이 편해.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편하다.
규철 말이 없다.
영 섭 가끔 생각해 보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나도 사람이구나 싶어. 모래알처럼 파도에 쓸려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것뿐이지. 안 그러냐?
규 철 내가 아는 건 넌 너무 늙은이 같은 녀석이라는 거야.
영 섭 (웃는다) 그런가?
침묵.
영 섭 일어나. 가서 자자.
규 철 아. 아직 혜연이가 안 와서.
영 섭 안 들어왔어?
규 철 응.
영 섭 그래?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사진 좀 정리해야 해서.
규 철 그래, 먼저 들어가.
영섭이 들어가고 규철 혼자 앉아 있다. 규철 뭔가 생각한다.
규 철 나도 사람이다.
혜연 들어온다. 환한 표정이다. 성경책을 안고 있다.
규 철 아. 안녕하시오.
혜 연 왜 이러고 있어? 술 마셨어?
규 철 그렇지. 우리 마누라 똑똑하네.
혜연 웃는다. 사이.
규 철 오랜만이다. 너 그렇게 웃는 거. 그렇게 좋으면 나도 한번 가볼까?
혜 연 오빠가?
규 철 왜? 나 같은 사람은 가면 안 되나?
혜 연 그게 아니라…… 그래, 가자. 같이 가면 좋지.
혜연 안방으로 들어간다. 규철 혜연이 내려놓은 성경책을 뒤적거린다.
규 철 질투 나네.
혜 연 (안방에서) 뭐라고?
규 철 왜 나는 안 되냐?
규철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간다.
규 철 왜 나는 안 되는 거냐구.
혜 연 그게 무슨 소리야.
규철 혜연에게 입을 맞춘다.
혜 연 (소리 죽여) 왜 이래? 많이 취했어!
규 철 쉿. 가만히 있어.
규철 강제로 혜연을 침대로 데리고 가 범한다. 혜연 저항한다. 암전.
조명이 들어오면 아무도 없다. 사이. 영섭이 나온다.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영섭 창밖을 본다. 안방에서 혜연이 나온다. 영섭을 지켜본다.
혜 연 비가 많이 오네요.
영 섭 (뒤를 돌아보며) 어? 응. 그렇네.
사이.
혜 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아요. 그런데 나가시려구요?
영 섭 뭐, 별일 없으니까.
혜 연 궁금해요. 선배 사진.
영 섭 (웃는다) 별것 없어. 네가 매일 보는 건데.
혜 연 다르다면서요. 그랬잖아요. 똑같은 것 하나 없다고.
영 섭 기억하고 있네.
혜 연 보여주세요.
영 섭 그럴 거 못 돼. (웃는다) 옛날 생각 하고 있었어. 기억나니? 우리 학교 다닐 때. 이런 날엔 꼭 막걸리라도 한잔해야 한다고 다들 취했잖아. 너 마중 나간 적도 있었다.
혜 연 기억나요. 오빠 엉망으로 취해서 걷지도 못하고. 선배한테 전화했었잖아요. 선배가 우산을 하나만 가지고 오는 바람에 모두 다 홀딱 젖어서.
영 섭 그건 정말 집에 우산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 거라니까. 아무튼 그때 참 재미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하다못해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은 것도.
혜 연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사이.
영 섭 그런가?
혜 연 다들 있을 때는 몰라요. 없을 때 없어졌구나 알지. 아니, 그것도 아니네. 없어져도 뭐가 없어졌는지 모르니까.
사이.
혜 연 비 그치면 곧 겨울이겠죠?
영 섭 그렇겠지. 여기 겨울엔 춥니?
혜 연 바닷가니까요. 눈도 많이 내리구요. 눈이 내리면요 눈이 바다로 몰려가요.
영 섭 보고 싶네.
사이.
혜 연 여기, 있을 만해요?
영 섭 너무 좋아. 단골 담뱃가게도 생겼어. 외상도 얻을 수 있을 만큼.
혜 연 선배야 어디서든 적응 잘하죠. 선배 군대 갔을 때 아무 걱정 하지 않은 거 알아요? 걔는 군대에서도 제 집처럼 편할 거라고 오빠들이 그랬을 정도니까요.
사이.
영 섭 올 겨울까지만 있어도 될까?
혜연 영섭을 본다.
영 섭 너 불편하면 거처를 옮길까 해서.
혜 연 아뇨, 괜찮아요.
영 섭 고맙다.
혜 연 겨울엔 추워요.
사이.
혜 연 선배가 우는 걸 본 적 있어요. 여름이었나? 선배 군대 가기 전에 술자리였는데, 화장실 가다가 봤어요. 선배 없어졌는데 아무도 모르고. 사람들 웃고 떠드는데, 선배는 울고. 이상했어요. 왜 울었어요?
영 섭 몰라. 기억도 안 나는데. 그냥 무서워서 그랬겠지.
혜 연 뭐가요?
영 섭 뭐긴 뭐야. 군대 가는 거지. 여자들이 알 리 없지.
혜 연 왜 몰라요. 그깟 군대. 여자들은 애도 낳는 걸.
영 섭 (웃는다) 그런 논리, 재미없더라.
혜연 창밖을 본다.
혜 연 희수 낳을 때도 너무 무서워서 울었는데. 희수가 태어났을 때 또 울었어요. 너무 고마워서. 무사해 줘서. 사실, 생각해 보면 희수 말고 저요. 그렇게 아팠는데 살아 있더라구요. 처음이었어요. 살아 있는 게 너무 너무 고마웠어요. 아, 나는 죽지도 못하겠구나 생각했어요.
사이.
영 섭 내가 사진 보여줄까?
혜 연 무슨 사진이요.
영 섭 뭐야. 아까 보고 싶다면서.
혜 연 아, 선배가 찍은 사진 있어요?
영 섭 별 볼일은 없지만.
영섭 방에서 사진을 가지고 나와 혜연에게 건네준다. 혜연 사진을 본다.
혜 연 (사진을 넘기며) 아파트 앞이네. 어시장, 어시장, 등대 앞. (몇 장 넘기다 멈춘다.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눈을 떼지 않은 채 묻는다) 언제 찍었어요?
영 섭 뭐가? (사진을 건너다보고) 아, 네 사진도 있었구나. 저번에 빨래 갤 때 찍었어. 미안하다. 나중에 주려고 했어. 사진이 참 마음에 들어서.
사이.
혜 연 저 가져도 돼요?
영 섭 그것 말고 몇 장 더 있어.
혜연 사진을 천천히 넘긴다.
혜 연 다 다른 사람 같아.
영 섭 이건 내 생각인데, 사람도 살면서 매 순간 달라지는 것 같아.
혜 연 그래서요? 저는 어떻게 달라졌어요?
영 섭 그야 나는 모르지. 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
아이의 울음소리.
혜 연 전 달라진 게 없어요. 그냥 조금 지쳤을 뿐이에요. 아니, 달라지고 싶지 않은데 계속 달라지고 있어. 선배, 나를 두고 주변이 빙빙 도는 것 같은데. 회전목마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면 희수를 잊고 있어. 난 나쁜 엄마야. 나쁜 아내고.
영섭 대답하지 않는다.
혜 연 선배, 지금 이 소리 들려요?
영 섭 무슨 소리?
혜 연 아이 울음 같기도 하고 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소리요.
영섭 귀를 기울인다.
혜 연 안 들리죠? (쓸쓸하게 웃는다) 저한테만 들리나 봐요.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선배 저 미쳤다고 생각하죠?
영 섭 아냐.
혜 연 거짓말. 규철 오빠도 말은 안 하지만 미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영 섭 혜연아.
혜 연 아랫집 아줌마가 그랬어요. 오빠도 힘들 거라고. 그런데 왜 소린 저한테만 들리죠?
아이 울음소리.
혜 연 알았으니까 그만 해. 정말 지겨워 죽겠어. 그만 해. 부탁이야. 제발!
혜연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는다. 조명 천천히 어두워진다. 영섭 혜연을 지켜보다가 방으로 들어가서 작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나온다. 플레이를 시킨다. 작게 왈츠곡이 나온다.
영 섭 혜연아, 혜연아.
혜 연 (지친 목소리로) 선배 나 좀 가만히 둬요.
영 섭 그래, 혜연아. 알았어. 알았는데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
영섭 혜연의 손을 잡고 떼어 준다. 혜연 음악소리를 듣는다.
영 섭 들어 봐. 울음소리가 아니야.
혜연 헐겁게 웃는다.
혜 연 선배 엉터리네.
영 섭 옛날 생각 안 나니?
두 사람 가만히 음악을 듣는다.
혜 연 선배, 나 임신했어.
영 섭 정말? 야, 축하한다.
혜 연 그런데 잘 모르겠어.
영 섭 무슨 소리야, 그게. 당연히 축하받을 일이지.
혜 연 좋아해도 될까?
영 섭 그럼, 좋아해도 돼. 박혜연 엄마 자격 충분해.
혜연 웃는다.
영 섭 야, 오랜만이다. 내가 아는 박혜연이네.
사이. 음악에 맞춰 발장단을 맞추던 혜연 손을 내민다.
영 섭 춤? 에이, 관둬.
혜 연 그러지 말고.
혜연 영섭의 손을 잡고 강제로 이끈다. 두 사람 춤을 춘다. 빗소리와 왈츠곡 소리가 높아 간다. 어느새 규철이 들어와 두 사람을 보고 있다. 춤은 점점 능숙하고 빠르게 진행된다. 점점 암전.
조명이 들어오면 영섭과 규철이 앉아 있다.
영 섭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규철 일어나서 이리저리 서성인다. 사이.
영 섭 이제 혜연이한테 잘해야겠다.
규 철 뭐?
영 섭 축하해.
규 철 무슨 소리야?
영 섭 임신 말이야.
사이.
영 섭 몰랐어?
규 철 혜연이 임신했대?
영 섭 몰랐단 말이야?
침묵.
영 섭 혜연이한테 신경 좀 써. 넌 너무 혜연일 혼자 둬. 너 걔 힘든 건 알아?
사이.
규 철 글쎄. 내가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영 섭 네가 신경 안 쓰면 누구 있어?
규 철 왜. 하느님도. 있고, 너도 있고.
영 섭 뭐?
규 철 어차피 내가 해줄 건 아무것도 없어. 걔한테 내가 무슨 의미겠어.
영 섭 야.
규 철 아까 보기 좋던데.
사이.
규 철 둘이 바람이라도 난 거야? 축하해.
영 섭 너 지금 막말 하고 있는 거 알아?
침묵.
영 섭 네가 오해한 거야. 그런 거 아냐. 아까는.
규철 물을 따라 마신다. 영섭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본다.
규 철 계속 얘기해 봐.
영 섭 관두자. 들어갈게.
규 철 왜. 계속 지껄여 보지.
사이.
규 철 역겨워. 도대체 이게 뭐야. 나는 허수아비야? 왜 그런 얘길 너한테 듣고, 그런 광경을 봐야 하지.
영 섭 규철아, 너 지금 억지야. 대체 왜 그래?
규철이 영섭을 노려본다.
규 철 너 지금 억지라고 말했어? 뭐가 억진지 말해 줄까? 나와 혜연이 사이 들어와서 말도 안 되는 간섭을 하는 너를 억지라고 말하는 거야.
영 섭 내가 간섭을 하고 있다면 미안하다. 그래도 네가 꼭 알아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서로를 보고 살아야 하는 거야. 걔가 안 된다면, 네가 눈을 맞춰 줘야 하는 거야.
규 철 닥쳐. 네 잘난 척 듣자는 거 아니니까.
사이.
영 섭 혜연이가 왜 귀를 막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규 철 생각 안 해봤을 거 같아? 백 번 천 번 뇌까려 봤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아니, 용서가 안 돼.
영 섭 모르는구나. 귀를 막아야 살 수 있을 때가 있는 거야.
규 철 네 눈깔이나 관리 잘해. 남한테 신경 쓰지 말고.
사이.
영 섭 너 저번에 자꾸 사막 같아진다고 했지. 사막이 왜 생기는지 아니?
규철 대답하지 않는다.
영 섭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런 게 아냐.
사이.
영 섭 욕심 때문이야.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욕심. 한번 사막이 생긴 다음엔 그다음엔 바람만 불어도 사막의 끝과 끝은 서로 멀어진대.
규철 대답하지 않는다. 영섭 그런 규철의 고집스런 침묵을 지켜본다.
영 섭 모르겠다. 왜 그렇게 네가 멀어 보이는지. 너무 멀리 가진 말아라.
영섭 방으로 들어간다.
규 철 병신새끼. 끝까지…….
규철 방으로 들어간다. 조명 천천히 바뀐다. 아침이다. 혜연이 나온다. 길게 기지개를 편다.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영섭의 방문을 노크한다. 안에서 대답이 없다.
혜 연 선배, 아침이야. 너무 늦잠 자면 피곤해요.
대답이 없다.
혜 연 선배. (사이) 벌써 나갔나.
영섭 방문을 열고 나온다. 카메라를 들고 있다.
혜 연 지금 일어났어요?
영 섭 아니, 아까 일어났어. 세상모르고 자더라.
혜 연 정말 그래. 오랜만에 푹 잤어요.
영섭 가볍게 웃는다.
혜 연 사진 찍으러 나가요?
영 섭 아니, 여기. 이 집.
사이.
영 섭 이 집 어쩐지 정이 들어버렸어. 그런데 사진이 한 장도 없네. 가기 전에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
혜연 대답하지 않는다.
영 섭 너도 포함해서.
혜 연 싫어요.
영 섭 (웃는다) 참 못됐네.
혜 연 저요, 선배요?
영 섭 둘 다.
영섭 사진기를 든다.
영 섭 예쁘게 찍어 줄게.
영섭 혜연의 사진을 찍는다. 혜연 가만히 서 있다. 몇 번의 셔터 소리
영 섭 사막을 가보고 싶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곳이 맞을까?
혜 연 거기도 사람이 살죠?
영 섭 그렇겠지, 아마.
영섭 다시 혜연 사진을 몇 장 더 찍는다.
혜 연 예쁘게 찍었어요?
영 섭 (웃으며) 사람들 꼭 그렇게 물어보더라. 내가 잘 찍어 봐야 박혜연이지. 어디 가겠어?
혜 연 원판불변의 법칙이라 이거죠? 그럼 잘 나왔겠네.
영섭 웃는다.
영 섭 가끔은 내가 너무 작은 것 같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불만이야. 어렸을 땐 말이야, 내가 되게 큰 사람이 될 줄 알았어.
혜 연 대신 좋은 사람이 됐잖아요.
사이.
영 섭 그런가? 내가 좋은 사람인가?
혜 연 그럼요. 선배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선배 오늘 이상하다.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고.
사이.
영 섭 늙은이 같아서 그렇지 뭐. 옛날부터 그랬다며.
혜 연 (웃으며) 알긴 아네.
혜연 시계를 본다.
혜 연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 나가 봐야 해요. 아랫집 아줌마랑 교회 가기로 했거든요.
영 섭 교회 다니게?
혜 연 아뇨, 안 간다고 말하려구요. 그 아줌마 엄청 귀찮게 하거든요.
영 섭 그래, 다녀와.
혜연 집 밖으로 나간다. 영섭 한참 문 쪽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간다. 사이. 조명이 바뀐다. 영섭 나온다.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의 짐과 차림이다. 거실에 나와 머뭇거리다 멀리 창을 본다. 규철이 들어온다. 규철 영섭의 짐을 보고 당황한다.
사이.
영 섭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가고 싶은 데가 있어.
규철 대답하지 않는다.
영 섭 사막. 깜깜해지기 전에 봐야 할 것 아니냐.
침묵. 영섭 자신의 짐을 챙겨서 현관 쪽으로 간다.
규 철 혜연이한테는 말했어?
영 섭 아니. 걔가 알면 가만히 있겠냐.
사이.
영 섭 잘 있어. 아참. (사이) 한 대만 맞자.
영섭 규철을 때리려 한다. 규철 눈을 감는다. 영섭 규철의 뺨을 슬쩍 쓰다듬는다.
영 섭 혜연이한테 잘해.
규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영섭 나간다. 규철 그대로 있다. 혜연이 들어온다.
혜 연 뭐 하고 있어?
암전.
조명이 들어오면 식탁에 앉아서 혜연이 퍼즐을 한다. 부엌에 서 있던 규철이 옆에 와서 앉는다. 가만히 지켜본다. 퍼즐은 클림트 그림이고 반쯤 완성되어 있다. 혜연은 열중하고 있지만, 얼굴에 표정이 없다.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퍼즐 한 조각을 든다. 한참을 망설인다.
규 철 여기 있네.
혜 연 응, 그렇네.
규 철 이건 뭐지?
혜 연 초록색이니까, 이 근처야.
규 철 이건가?
혜 연 아니네. 이거 다음 아니야?
규 철 아, 맞네. (맞춰 보고는) 맞나?
혜 연 응, 그런 것 같아. 아유, 좀 놔둬. 내가 할 거야.
규철은 멋쩍은 듯 TV를 켠다. 채널을 돌리다가 야구 중계에서 멈춘다. 중계를 본다.
규 철 벌써 오회나 됐네.
혜 연 (약간 피곤한 목소리로) 소리 좀 낮춰.
규철 소리를 낮춘다. 시간이 조금 지난다.
혜 연 이상하다. 없네.
규 철 뭐가?
혜 연 하나가 없는 것 같아.
규 철 잘 찾아봐.
혜 연 다 봤는데, 없어.
규 철 그 부분만 빼고 맞춰 봐. 남는 게 있겠지.
혜 연 이상하네.
규 철 (혜연 옆으로 온다) 이거 아냐?
혜 연 아냐.
규 철 맞는 것 같은데 어디. (대본다) 아니네. 그럼 이건?
혜 연 어디 갔지?
혜연 주변을 둘러본다.
규 철 이거 아냐? (꼭 눌러 맞춘다) 맞네.
혜 연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라고 했잖아. 나 좀 놔둬.
사이.
혜 연 아닌 거 맞추면 망가진단 말이야.
규 철 그래, 알았어.
규철 제자리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본다. 혜연 구석구석 찾다가 식탁 위 큰 봉투를 본다.
혜 연 이게 뭐야?
규 철 아, 그거. 네 앞으로 왔던데. 보낸 사람 이름이 없더라.
봉투를 꺼내 본다. 작은 아이 울음소리. 혜연 울음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사진을 본다.
혜 연 영섭 선배야.
규철 식탁으로 온다. 혜연의 사진이 있다.
혜 연 잘 있나 보네.
규 철 다른 건 없어?
혜 연 없어.
규 철 사진 잘 나왔네.
사이.
혜 연 사막은 어떤 곳일까.
규 철 글쎄.
침묵.
혜 연 배고프지 않아?
규 철 아, 그렇네.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혜 연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규 철 음. 계란찜?
혜 연 알았어.
혜연 안방에 들어가 차림을 갖추고 나가려 한다.
규 철 어디 가?
혜 연 계란 없어. 슈퍼 좀 다녀올게.
규 철 같이 갈까?
혜 연 아냐, 금방 올게.
혜연 나가다 만다.
혜 연 오빠, 사막에도 사람이 살겠지.
규 철 글쎄, 안 가봐서 모르겠다.
규철 아이처럼 손을 흔든다. 혜연 나간다. 아이 울음소리가 여운처럼 남는다. 규철 사진을 꺼내 본다. 규철 사진을 내려다보다가 찢는다. 천천히 암전.
시간이 조금 흐르고, 암전 중 규철의 낮은 한숨소리. 자느라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전화벨이 꺼진다. 사이. 다시 전화벨. 규철 놀라 깨서 서둘러 전화 받는 소리가 들린다.
규 철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사이.
규 철 혜연이니? 아,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혜연이요? 잠시 어디 좀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네? 아. 신경 쓰지 마세요. 네. 그리고 저 아주머니, 이제 전화 좀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뇨, 아무 일 없는데요. 네. 그럼 끊겠습니다.
조명이 들어오면 규철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컵라면을 먹고 있다. 텔레비전 규칙적으로 화면이 바뀐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고 있지 않다. 라면 다 먹고 소파에 눕는다. 긴 사이. 천천히 혜연이 들어온다. 마치 방금 외출에서 돌아온 것처럼, 그런 차림으로 서 있다. 식탁에 앉는다. 가만히 규철을 바라본다. 규철 부스럭대다 깬다.
혜 연 왜 이러고 자니?
규 철 어, 왔어?
혜 연 또 라면 먹었어? 으이그. 내가 집을 못 비워요. 희수는?
규 철 희수?
규철 멍하니 혜연을 본다.
혜 연 그 잠깐을 애를 못 보고 그러고 있어?
희수 방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조금 더 사실적이다.
혜 연 어머, 깼나 봐.
혜연 희수 방으로 들어간다. 규철 멍하니 그 모습을 본다. 조명 천천히 바뀐다. 아이 울음소리가 계속 들린다. 규철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운다. 천천히 암전.

 

 

작가소개 / 유희경(시인)

-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를 졸업하고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오늘 아침 단어』가 있으며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작란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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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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