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2015년도 창작광장 최우수상 수상작 / 소설] 어둠 속에서 화재경보음이 울리면

  • 작성일 2016-04-04
  • 조회수 1,801

[2015년도 창작광장 최우수상 수상작 / 소설]

 

 

어둠 속에서 화재경보음이 울리면

 

 


박민혁 (필명 : ccg)

 

 

그에게 오늘은 매우 낯선 날이었다. 하루의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늦잠을 잤다. 어젯밤에 늦게 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알람은 어젯밤에 맞춰 놓은 것처럼 6시, 6시 15분, 6시 30분, 6시 45분, 7시, 7시 30분까지 울렸지만, 잠에서 깨어난 것은 9시였다. 9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하는 오픈 조였다. 아무리 빨리 준비를 한다 해도 10시까지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장에게 전화를 해서 양해를 구하자 사장은 기가 차다는 반응뿐이었다.

 

작은 카페였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은 지난 달부터였다. 그가 카페에서 주로 아르바이트를 해오던 경력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사장은 그를 면접 자리에서 바로 뽑았다. 그로서는 방학 때 할 아르바이트를 곧장 구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시급은 최저 시급보다 조금 더 많이 받았다. 카페도 아담해서 좋았다. 레시피들도 예전에 이미 만들어 본 것들뿐이었다. 다만 손님이 좀 많았다. 특히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에 많았다. 근처에 빌딩이 많이 있어서 그런지 직장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카페 양옆으로 프랜차이즈 카페가 두 개나 이미 들어서 있었고, 골목 안에도 하나가 더 들어온 상태여서 손님은 분산되고 있었다. 사장이야 어떻든 그런 상황은 그에겐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분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카페는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그들은 무심하게 돈을 주고 커피를 마시거나 앉아서 점심시간을 때우고 떠나갔다. 사장은 무신경했다. 알바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자주 마실을 다녔다. 2층 빙수가게 사장이랑 친구라고 했던가.

 

추운 날씨였다. 일찍 일어나지 못해서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셔츠와 니트 위에 패딩을 입긴 했지만 너무 오래 입은 패딩이라서 덕 다운은 이름처럼 많이 다운되어 있는 상태였다. 오리들이 패딩을 탈출해 다시금 하늘을 날기 위해 재결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집에서 나오며 불러 놨던 콜택시를 탔다. 택시비가 꽤 나오는 거리였다. 꽤나 아픈 지출이었다. 그에게 하나 다행이었던 것은 차 안의 히터는 빵빵하게 나왔다는 점이다.

 

10시 3분쯤 도착했다. 아파트 단지를 뛰어 내려왔고, 불러 놓은 콜택시를 타고 최대한 달려온 것이 그랬다. 처음 면접 보러 갔을 때처럼 어색하게도 사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사장은 그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만 봐주는 거야. 죄송합니다, 사장님.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묵묵히 머그를 닦고 있었다. 사장은 곧 떠났다.

 

“늦어서 미안해. 나 때문에 혼자…….”

 

“아냐, 너도 알잖아, 아침에 별로 할 거 없어.”

 

그녀는 보통 아침에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감탄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그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그는 25살이었고, 그녀는 26살이었다. 카페가 처음 문을 열 때부터 일했다고 했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있다고 했다. 확실히 그녀가 만드는 커피와 그가 만드는 커피는 맛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큰 차이도 없었다. 정해진 레시피대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녀는 그보다 핸드드립을 잘했다. 카페 이름에 핸드드립이 들어가 있는 만큼, 그녀는 핸드드립 커피를 잘 만들었다. 하지만 손님들은 핸드드립보다는 달콤한 걸 원했다. 그래서 그녀와 그의 커피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휘핑크림과 시럽은 모든 맛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큰 키에 단발머리였다. 예쁘다고 하면 예쁘고, 그냥 그렇다고 하면 그냥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그가 처음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그에게 웃으면서 전반적인 일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레시피대로 잘 만들어내는 그를 보며 칭찬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옥 같은 점심시간이 닥치면서 그가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자 꽤나 차가운 소리도 많이 뱉었었다. 그러나 첫날 손님이 많이 줄어든 3시쯤부터, 기가 죽어 앉아 있는 그에게 그녀가 말을 걸어 주었다. 몇 살이에요? 이름도 안 물어봤네, 참. 그러면서 둘은 친해졌다.

 

아침엔 주로 준비를 했다. 오픈할 때 청소를 하고 원두를 준비한다. 그건 이미 그녀와 사장이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는 가만히 있기 머쓱해서 괜히 행주를 들고 다니며 이미 깨끗한 테이블을 한 번씩 더 닦았다. 점심시간이 오기 전까지 손님은 5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대체로 그녀가 커피를 만들었고, 그는 빵을 구웠다. 빵이라고 해봤자 이미 조리된 것들을 데우는 정도였지만. 보통 이 시간대에 그녀와 그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조용했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 좋겠지만, 그녀가 대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도 그녀와 대화를 하기 위해 굳이 노력하진 않았다.

 

혜진의 카톡이 와 있었다. 오빠, 일어났어? 일어난 거야? 왜 답장이 없어. 이미 읽어버렸으니 답장을 하긴 해야 했다. 미안해, 오빠가 늦게 일어나서 급하게 아르바이트하러 오느라고. 혜진이는 어디야? 써놓고도 전송을 보내기가 힘들었다. 그는 혜진과 부쩍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힘들었다. 그에게 먼저 다가와 준 것은 혜진이었다.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그럴수록 혜진은 그에게 있어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가 되어 갔다. 혜진의 미소 역시 사람을 감탄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1학기가 끝나 갈 무렵 혜진에게 고백했다. 혜진은 미소 지으며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혜진의 미소는 볼 때마다 그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혜진은 그를 좋아했다. 그도 혜진을 좋아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혜진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사랑한다 말하지 않으면 혜진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혜진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게 그와 혜진이 가진 문제였다. 다른 건 문제될 게 없었다. 여전히 혜진을 만나면 설렜고, 혜진의 미소는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혜진의 갈망하는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는 항상 주저하게 되었다. 그는 사랑이란 자연스러운 거라고 믿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세 번째로 맺은 관계였다. 그도 혜진과 같았던 적이 있었다. 너무나 좋아해서, 그래서 사랑한다고 믿었었다. 물론 그에겐 사랑이었지만 상대에겐 아니었다. 그럴 때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였고, 혼자 받는 상처로 끝이 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혜진의 눈빛은 그에게 무언의 압박이었다. 혜진은 결핍이 많은 존재였다. 혜진은 무엇인가가 자신을 채워 주기를 바랐다. 그녀가 타고난 선천적인 결핍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갈구했다. 혜진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 줄 무엇으로 그를 재촉했다. 그의 시선을 갈구했고, 그의 스킨십을 갈구했고, 그의 사랑을 갈구했으며, 그의 단어를 갈구했고, 그를 갈구했다. 그는 혜진을 밑 빠진 독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채워질 수 없는 독. 그는 절대로 혜진을 채워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혜진은 그를 갈구했다. 그것이 그가 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있어 장애가 되고 있는 문제였다.

 

그는 사실 가벼운 관계를 원했다. 혜진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가벼운 관계에서 진전되어 가기를 원했다. 진전이라는 것은 천천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닌 거라고 생각했다. 혜진이 먼저 다가왔기 때문에, 그리고 혜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관계를 맺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여자 친구가 생겨서 좋았을 뿐이다. 그뿐이었던 관계가 어느 순간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는 삐걱거리는 것이 싫었다. 삐걱거린다는 단어에서부터 연상되는 소음이 싫었다. 삐걱이라는 의성어가 싫었다.

 

그때 삐걱거리는 소음이 그의 귀를 때렸다. 삐걱거리는 소음은 두 글자의 단어가 되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손님이 의자에서 일어나 떠나는 소리였다.

 

보통 11시쯤이 되면 점심을 먹었다. 사장이 와서 카운터를 봐줄 때는 각자 나가서 점심을 사먹었고 ― 보통은 그와 그녀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 사장이 제품 중에 알아서 먹으라고 할 때는 대충 때울 때가 있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11시가 되어도 사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행히 그에게 미소 지었다. 뭐 마실래? 나는 더치커피. 어, 나돈데. 누나는 뭐 먹을 거야? 나는 베이컨 샌드위치. BLT? 응 그거. 그럼 나는 패스트라미햄치즈샌드위치 먹어야겠네.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별거 없었다. BLT 샌드위치는 그냥 빵 위에 베이컨, 양상추, 토마토만 차곡차곡 쌓고 다시 빵을 덮으면 되는 샌드위치였다. 패스트라미햄치즈샌드위치는 패스트라미 햄과 치즈, 양상추만 넣으면 되는 음식이었다. 소스야 사장이 공수해 놓은 것을 썼다. 어딜 가도 먹을 수 있는 맛이었다. 누가 만들어도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런 음식들의 이름이 너무 거창해서, 그와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소리 내어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본 그녀의 미소였다. 그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음을 느꼈다.

 

이런 샌드위치 종류들은 그가 직접 만들었다. 오래 걸리는 건 아니었지만, 점심시간같이 손님이 몰릴 때는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긴 했다. 개인 카페라서 어쩔 수 없는 점이었다. 신선한 베이커리가 없다면 손님들이 굳이 개인 카페를 찾을 이유는 없었다.

 

그와 그녀는 카운터 뒤에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셨다. 손님은 한 테이블, 한 명 있었다. 이 손님은 이미 커피를 다 마신 지 오래였으나, 오랫동안 앉아 노트북을 부여잡고 있었다. 자주 오는 손님이었다.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뭘 쓰고 있는지 알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진 않았다. 그리고 사실 카페에 홀로 와서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관심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건 카페의 불문율이었다. 손님이 원할 때만 대답하는 것, 그것이 카페 점원의 사명이었다. 카페는 철저하게 공개된 공간이면서도 철저하게 폐쇄된 공간이어야 했다. 그와 그녀가 나누는 이야기가 손님에게는 그저 미미한 카페의 소음으로 들려야 되는 것처럼, 카페는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와 그녀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은 타자를 쳐내려가고 있었다. 그와 그녀와 손님만이 함께 있는 카페에서 들리는 소음은, 잔잔하게 깔아 놓은 음악, 커피 머신의 웅웅거리는 소리, 그와 그녀의 대화, 바쁘게 울리는 타자소리뿐이었다. 각각의 소음은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소음이 되었다. 조화되지는 않았지만 수용될 수 있는 소리로 재탄생한 것이다. 손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노트북 코드를 뽑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간은 점심시간의 초입이었다.

 

점심시간 초의 손님들은 대체로 가볍게 점심을 먹고 싶어 하는 직장인들이었다. 그들은 샌드위치 종류나 케이크, 샐러드 등과 음료를 시켰다. 젊은 여자 둘이 함께 오기도 했고, 남자와 여자 둘이 오기도 했으며, 셋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다섯 명은 함께 오지 않았다. 다섯 명이라는 숫자는 적어도 그 시각에는, 카페보단 음식점에 더 어울리는 숫자였으니까. 그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12시 40분쯤이 되는 순간부터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은 기름지거나 짜거나 아쉬운 식사를 보충해 줄 수 있는 음료를 원했다. 그들은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음료가 빨리 나오기를 원했다. 점심시간은 카페의 소음이 가장 극에 달하는 시간이었다. 잔잔한 음악소리는 사람들의 소음에 묻혔다. 커피 머신과 여러 기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소음은 사람들의 소음과 불협화음을 내며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음을 견뎌냈다. 아니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아까 그 손님은 이런 소음을 피해 황급히 자리를 떠난 거겠지.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레시피를 틀렸다.

 

사소한 실수였지만, 사소하게 끝나진 않았다. 손님의 컴플레인을 견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도와주기엔 밀린 주문이 많았다. 그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다시 제대로 된 레시피로 음료를 만들어야 했다. 하필이면 요번 겨울에 새로 런칭한 음료였다. 고구마 라떼라니. 점심을 먹고 와서도 굳이 이런 걸 먹고 싶을까. 물론 입 밖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손님. 주문하신 고구마 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실수해서 늦게 준비해 드린 점, 정말 죄송합니다. 다행히 흔히들 말하는 진상 손님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손님을 보내고 나니 커피 머신에 붙어 있는 밀린 주문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약간의 원망 섞인 시선도 함께.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오전보단 잔류하는 손님들이 많긴 했지만 점심보다는 나았다. 그들은 대체로 한 번 주문을 한 뒤 죽 앉아 있는 부류들이었다. 크다고는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카페였기 때문에 손님들이 많은 듯도 보였지만, 사실 이들의 주문은 이미 끝난 상태였으니 그와 그녀에겐 새로운 손님이 오기 전까지는 휴식이 보장되는 시간이었다. 그와 그녀는 정확히는 9시 30분부터 근무를 시작해 6시 30분까지 총 9시간을 근무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와 그녀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6시 30분을 기다렸다. 마감조가 오기를. 하지만 아직 마감조가 오려면 4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나른한 시간이었다. 나른한 시간이었지만 그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핸드폰을 켜보니 혜진의 메시지가 와 있었기 때문이다. 혜진은 자신이 학원에서 겪은 불쾌한 일들을 나열했다. 수업시간 중에 강사가 자신을 지적했던 일, 스터디 그룹을 함께하는 남자가 집적댄 일 등이었다. 혜진은 그에게 공감을 요구하고 있었다. 메시지를 읽었기 때문에 그는 반응을 보여야 했다. 그는 혜진이 그에게 공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감을 표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감을 표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에게는 그가 해결해야 할 정서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만 누군가에게 공감을 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제들 ― 그가 이제 내년이면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라든지 ― 취직에 대한 압박감이라든지 ― 학비 마련에 대한 불안감이라든지 ― 하는 것들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혜진에 대한 불확실성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혜진의 말에 공감을 표할 수 없었다. 만약 혜진이, ‘오빠, 이 옷 어때?’라는 것을 물어 왔다면 쉽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하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이었고, 이런 경우엔 그로선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구의 편도 되기 싫었다. 타인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예민하게 구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해도 그는 도저히 감수하지 못할 일이었다. 예민하다고 한다면, 그는 예민했다. 예민한 감정은 혜진의 공감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이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그의 귀를 때리는 것 같았다. 삐걱이라는 두 글자는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로, 나사가 살짝 빠진 의자가 흔들릴 때마다 내는 소리로 형상화되어 두 눈에 들어왔고, 두 귀로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그 소음을 참아내고 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 무미건조함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많은 이모티콘을 사용한, 무미건조한 메시지였다. 그는 혜진이 그런 무미건조함을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또한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혜진을 원했지만, 혜진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런 마음은 그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화가 났다. 혜진에게도 화가 났고, 그 자신에게도 화가 났고, 아까 자신에게 컴플레인을 건 손님에게도 화가 났으며, 옆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도 화가 났다. 사장의 냉정한 눈빛에도 화가 났고, 집에 들어가면 마주쳐야 할 가족들의 눈빛들도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아무도 그를 화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화가 났다. 그의 마음속은 화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은 너무나도 잔인하게 타올라서 울렁거리게 만들었고, 예민하게 만들었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목구멍까지 연기가 차오른 듯한 느낌, 그러나 재채기조차 나오지 않는 답답한 느낌 속에서 그는 표류하고 있었다. 마음속 저 구석에서 시작된 불이, 서서히 타오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던 그때

 

가게 밖에서 화재경보음이 울렸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카페는 8층짜리 빌딩 건물 1층에 있었다. 상가로 만들어진 이 빌딩은 1층부터 여러 가게가 입점해 있었다. 편의점, 음식점, 그가 일하는 카페, 약국. 2층에는 빙수가게가 있었고, 그 위층으로는 병원과 작은 무역회사 사무실들이 있었다. 이런 건물에서 화재경보음은 잦았다. 그가 이곳에서 일하게 된 뒤로 화재경보음은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들었지만, 단 한 번도 불이 난 적은 없었다. 손님들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역시 학창 시절부터 오랫동안 겪어 온 일이었다. 누군가 잘못 눌렀거나, 오작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화재경보음은 규칙적으로 시끄러웠다. 굉장히 불쾌한 소음이었다. 다행히도 카페 음악과 손님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에 묻혀서 카페 안에서는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손님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다른 공간에서 울리는 소리가 흘러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귀를 막고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르바이트생의 의무로 ― 사장이 첫 출근 때 주지시켰던 것처럼 ― 가게의 안전을, 손님의 안전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안전을 확인해 봐야 했다. 마침 화장실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겸사겸사 가게를 나왔다. 복도로 나오는 순간 화재경보음은 더 이상 작은 소음에 불과하지 않았다.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화재경보음은 그의 심장박동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그는 화재경보음이 듣기 싫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일을 보고 손을 닦을 때가 되어서야 화재경보음이 끝났다. 오래된 빌딩이라서 오작동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차가운 물로 손을 닦으며 마음을 정리하려 했다. 여전히 답답하긴 했지만, 초기 진압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불편할 것은 없었다. 답답할 것도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가 끝나기를 바라면 된다. 6시 30분을 기다리고, 퇴근하고, 혜진을 만나고,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잠에 들면 된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된다. 아니, 이렇게 미루다 보면 어쩌면 생각하기도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6시 30분이 될 때까지 그와 그녀가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손님은 몰리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찾아왔다. 음료는 대체로 그녀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치웠고, 설거지를 했고, 가끔 음료를 만들었다. 그와 그녀는 일을 하다가,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각자 핸드폰을 하다가, 일을 하다가, 그렇게 퇴근했다. 6시 20분 쯤 돌아온 사장은 그와 그녀에게 잔소리를 했다. 마감조가 출근했고, 오픈조는 퇴근했다. 그와 그녀는 가게 앞에서 헤어졌다.

 

그는 혜진을 만나러 가야 했다. 전철을 타고 30분 정도 가면 혜진의 학원이 있었다. 7시에 스터디가 끝난다고 했으니, 가서 저녁을 먹으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철역 앞에서 한 번 망설였다. 혜진을 만나러 가야 할까. 혜진을 보고 웃을 수 있을까. 혜진의 미소가 그를 감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 혜진은 그를 보고 웃을까?

 

그러나 그는 교통카드를 찍었다. 플랫폼에 내려갔고, 전철이 오자 몸을 실었다. 퇴근길의 전철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앉고 싶었고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휴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보다 힘든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너무나 식상해서 이제는 무미건조하게까지 느껴질 표현이겠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로서는 그들이 왜 힘든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힘들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신촌에 내린 것은 7시 3분이었다. 그녀가 스터디가 끝났는지 전화를 걸어왔다. 어, 응 나 방금 내렸어. 그러면 역 근처에, 응 거기로 가자. 그래, 거기 앞에서 봐. 혜진은 녹색의 터틀넥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가 지난달에 선물로 사준 코트였다. 혜진은 녹색 코트를 목 끝까지 잠그고 있었다. 그래서 혜진이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인상을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입 모양을 볼 수 있다면 그녀가 웃고 있는지 인상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혜진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장갑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혜진의 손을 잡았다. 혜진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의 손은 추웠다. 혜진의 온기도 그의 손을 녹이지 못했다. 혜진을 데리고 요즘 유행하는 원­플레이트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2인이 먹을 수 있는 원­플레이트 음식들이 주류인 레스토랑이었다. 그리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에겐 언제나 부족한 듯이 느껴졌다. 그 어떤 것도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었다. 그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나 맛있게 먹었지만, 어쩐지 거짓된 것을 먹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스테이크는 스테이크라고 부를 수 없었고, 필라프는 볶음밥에 불과했다.

 

혜진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고, 그는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혜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혜진의 이야기는 아까 보냈던 메시지의 연장선상이었다. 혜진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사실 기분이 좋을 수도 없을 것이다. 기분이 좋은 일들만 있던 날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내 얘기 듣고 있어? 그는 대답했다. 응, 듣고 있어. 그리고 그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다는 증거로 그녀가 한 이야기를 순서만 달리한 채 들려줬다.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샐러드는 시큼했다. 드레싱이 과한 것 같았다.

 

혜진이 얘기를 끝내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오늘 늦은 것, 손님에게 컴플레인을 받은 것을 얘기했다. 혜진은 그보다 더 분노했다. 아니 늦을 수도 있지. 그 손님은 왜 컴플레인을 걸어? 그와 그녀는 서로 할 얘기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하루 있었던 일, 여러 가지 가십들만 이야기했다. 오빠, 그 선배가 있잖아……. 걔, 원래 그런 애야……. 아무것도 남지 않는 대화라는 건 둘 다 알고 있었지만, 하고 싶은 말들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것만 같은 이야기들뿐이었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존재 이유가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 난잡하여 들여다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마음 저 구석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추상적으로 지칭되는 장작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 불안이 반대편 구석에 쌓여 있었다. 그곳에는 그가 올해부터 처하게 된 경제적인 독립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작년 말에 아버지가 갑작스레 하던 일을 그만둔 이후로 찾아온 집 안의 차가워진 분위기가 쌓여 있었다. 등록금 483만 5천 원도 거기에 있었다. 핸드폰 요금 6만 5천 원도 그곳에 있었고, 지금 먹고 있는 목살 스테이크와 샐러드 세트, 그리고 콜라 값 2만 3천 원도 그곳에 있었다. 오늘 쌓인 여러 불만도 규칙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마음 가장 끝 언저리에는, 혜진과의 관계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불안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는 서서히 올라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피어오른다면, 그의 마음속 화재경보음이 울릴 것이다. 물론 감지기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는 고장 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감지하지 못한 불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는 법이니까.

 

그는 원­플레이트를 사이에 두고 혜진과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를 원치 않았지만, 혜진이 먼저 꺼내 주기를 바라기도 했고, 또 혜진이 먼저 꺼내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미루는 사이, 목살 스테이크는 사라졌다. 샐러드도 사라졌다. 음료도 사라졌다. 그와 혜진은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도 먼저 손을 내민 것은 혜진이었다. 여전히 혜진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의 손을 녹이진 못했다. 그는 혜진을 데려다주었다. 혜진의 집은 신촌에서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 가면 있었다. 혜진의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그는 혜진의 손을 놓았다. 혜진은 불안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혜진의 코트는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혜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혜진은 그에게 물었다. 오빠, 사랑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 많이 사랑해.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혜진을 한 번 가볍게 안았고, 혜진의 이마에 입을 맞췄을 뿐이다. 혜진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혜진의 눈빛을 피했다. 그는 혜진의 눈빛을 피하기 위해 다시 혜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용히, 나도, 라고 말했다. 혜진이 들어간 뒤, 그는 혜진이 떠나간 빈자리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몸을 돌렸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장소가, 시간이 될지도 몰랐다.

 

그는 아침에 일기예보를 듣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늦게 일어난 것을 후회했고, 카페에서 실수했던 것을 후회했다. 혜진에게 대답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했고, 그 어떤 얘기도 꺼내지 못한 자신을 후회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차가운 바람은 잔인하게도 그를 관통하고 지나갔고, 혜진은 이미 들어갔다. 차들은 번호판만 바꾼 채로 변함없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고, 어두워진 밤길을 가로등이 밝혀 주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변하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아니었다.

 

혜진의 손을 잡았던 오른손은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왼손은 왼쪽 주머니에 들어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추웠다. 집에 들어가면 9시쯤 되려나. 출근시간이 지나간 지하철은 한산했지만 사람들은 더 피곤해 보였다. 대학가를 지나면서 지하철에는 술 냄새가 가미되었다. 새로 탄 사람들은 젊었고 행복해 보였지만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들을 보며 자신의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홍대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도 피곤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즐거웠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피로가 드러나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피로는 오로지 나만 볼 수 있어야 했다. 나만이 나의 피로를 볼 수 있어야 했다. 적어도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젊었을 적, 친구가 등을 두드려 준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제는 타인에게 등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고통은 나만이 알아야 했다. 하지만 또 누군가 알아주길 원했다. 그렇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그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이젠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지하철역에서 나와 걸었다. 추위가 그를 감쌌다. 그는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목이 아팠지만 목을 펴는 순간 들이닥치는 추위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역에서 15분은 걸어가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 낡은 동네였다. 낡은 상가 건물들, 낡은 주택들, 낡은 아파트 단지, 낡은 놀이터, 낡은 슈퍼, 낡은 사람들…… 모든 것이 낡은 동네였다. 그러나 이런 동네도 서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프리미엄이 붙어서, 들어오고 싶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동네가 되었다. 물론 누구도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동네와 함께 낡아버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천정부지로 솟아버린 집값 때문에 팔고 싶어도 팔리지 않는 집 속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느새 25살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내년에도 이곳에서 26살을 맞이할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추위가 그를 맴돌았다. 찬바람은 그가 입은 외투 안으로 들어와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걸으며 주위를 눈에 담았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그러나 또한 낯선 풍경들이었다. 가게들은 문을 닫았거나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로등불은 노르스름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길에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그 틈을 차들이 비집고 다녔다. 헤드라이트는 위협적으로 행인을 비추었다. 행인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차는 거칠게 길을 빠져나갔다. 거칠게 빠져나가는 차를 돌아보면서, 그는 동네가 더 이상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렸음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푸념 ― 차라리 재개발을 하던지 ― 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로등도, 벽도 모두 낡은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 벽화가 그려졌다. 처음엔 동네의 불량 학생들이 그린 낙서였다. 그런데 구청과 동사무소는 이 낙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봤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금을 투자했다. 낡은 동네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불량 학생들이 아니라 미대생들이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주제는 다양했다. 동화, 유명한 사진, 만화…….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 동네를 대표하지 못했다. 벽화의 정체성은 벽화를 그리러 온 홍대 미대생 동아리를 지칭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벽화는 그 동네를 대표하기도 했다. 그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희미한 가로등불이 비추는 벽화들은 낙서에 불과했다. 본질도 예술정신도 없는 벽화들은 벽과 유리되어, 동네와 유리된 채로 홀로 떠 있었다. 벽화들은 갈 곳이 없었다. 벽화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동네였다. 그려진 지 얼마 안 된 벽화는, 그러나 낡아 있었다. 낡은 벽화였다. 그것이 그 벽화의 정체성이자 이 동네의 정체성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로등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다. 이 동네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선 아파트는 무너졌고, 두 번째로 들어선 아파트도 무너졌으며, 세 번째로 들어선 아파트는 지금까지도 멀쩡히 버티고 있었는데, 이 아파트가 바로 그가 사는 아파트였다. 외관은 참 초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가격은 납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값은 무엇으로 매겨지는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을 팔고 싶어 했다. 직장에서 잘렸다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표현하는 아버지는 몇 달 동안 집에만 있었다. 어머니가 작은 음식점을 하고는 있었지만, 장사가 잘 되진 않았다. 동생은 이제 곧 군에서 제대할 것이다. 그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야 했다. 다음 학기에 듣는 학점, 남은 학점은 6학점에 불과했지만 돈은 똑같이 내야 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부추기던 때가 있었다. 대학교에 와서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되었고, 군대를 다녀와서 알게 된 사실은 그렇게 잘나가고 멋져 보이던 선배들이 아직도 졸업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피로한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필사적으로 피로한 얼굴을 숨기려 노력했다. 주말이면 전시회를, 맛집을 찾아다녔다. 동기들끼리 모여 즐겁게 술을 마시는 사진도 경쟁적으로 SNS에 올렸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어떤 필터를 먹인 사진이라 해도 선배의 얼굴에서 피로를 감추진 못했다. 선배의 얼굴에는 피로와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전시회에서 고흐가 그린 밀밭을 바라보며 선배는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유화의 양감이 선배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덕지덕지 발라진 그 노란 유화가, 빛이 바래져 가는 유화가 그에겐 어떻게 다가올까. 종언, 어두운 밤 밀밭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의 모습들에서 선배는 과연 어떤 것을 느꼈을까.

 

취직한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주말을 활기차게 보내려 했다. 마치 무엇인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어 했다. 첫 월급으로 산 것, 사먹은 것, 처음으로 휴가를 떠난 것, 좋은 직장상사, 어머니 아버지 여행 보내드린 것, 새로운 취미라며 올린 테니스 라켓 사진, 이윽고 몇 주 뒤에 올라온 퍼즐 사진……. 그 모든 사진들과 게시물들에 본질은 없었다. 만약에 그들이 본질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그들의 타임라인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본질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오늘 늦게 일어난 것이 마치 모든 것의 원흉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 오늘 특별한 일은 없었다. 특별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일도 없었다. 늦잠을 잤을 뿐이고, 지각을 했었을 뿐이며, 사소한 컴플레인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장의 냉정한 말과 표정, 그녀가 지어 주지 않았던 미소가 아른거렸다. 짜증을 낸 손님의 얼굴도 생각났다. 혜진의 메시지가 떠올랐고, 혜진의 따스한 손이 떠올랐고, 그가 말을 하면 간간이 지었던 표정들 ― 한쪽 눈을 찡그렸던 것, 입을 삐죽였던 것, 볼을 부풀렸던 것, 미소 지었던 것, 크게 웃었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냈던 그 눈빛까지 ― 이 떠올랐다. 그는 혜진의 손을 잡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혜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미 내뱉은 말은, 놓아버린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고 있어서 더 아팠다. 머리의 두통은 마음으로 전이되었다. 그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고통스러워 입을 벌리면 찬바람이 들어가 역류했다. 그는 자신의 왼손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혜진의 메시지일 터였다. 아마 오빠, 잘 들어갔어? 정도의 메시지가 와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혜진이 각오를 하고 얘기를 꺼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혜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 사랑해? 혜진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녀는 온 세상의 불행을 짊어진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온 세상의 불행은 그녀의 시선을 통해 그를 관통했다. 그는 불행을 저버렸다. 그는 그녀의 불행을 외면해 버렸다. 그는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역시 온 세상의 불행을 모두 짊어지게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화재경보음이 들려왔다. 규칙적이면서도 불쾌한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그의 귀를 울렸다. 그는 귀를 의심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기억을 떠올리다가 뇌가 오작동하여 그만 소리까지 떠올리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어 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리는 실제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청각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저 낡은 상가 건물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1층에는 문을 여는지 안 여는지도 알지 못하는 열쇠집이 있는 건물이었다. 2층에 무엇이 들어서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런 건물이었다. 사용되는 건물인지도 의심스러운 그런 건물이었다.

 

건물로 들어서는 문은 을씨년스럽게 열려 있었다. 건물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문으로 다가갔다. 화재경보음은 그 어둠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소음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 빨간 불이 깜박거렸다. 핸드폰은 다시 한 번 주머니 속에서 울렸다. 그는 망설였다. 문턱을 넘어서면서, 그는 다시 한 번 망설였다. 화재경보음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또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빨간 불빛이 이끄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연기에 숨이 막혔다. 그는 입을 막고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으로 들어서서 화재경보음을 끌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어둠 속에 완전히 몸을 숨겼다.

 

화재경보음이 울기를 멈추면,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카페로 돌아갈 것이다. 혜진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말이다.

<끝>

■ 수상소감

  2012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글틴을 졸업했다. 글틴만 졸업했어야 했는데 글까지 함께 임시졸업(?)을 해버렸다. 2014년에 하반기 들어서서부터 정신을 차리고 공모전을 위한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글에서 손을 놓고 있었던 지라, 내가 쓰는 글이 과연 제대로 된 글인지, 누군가가 읽어줄 가치가 있는 글인지에 대한 의심 속에서 글을 썼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어둠 속에서 화재경보음이 울리면>이었다.
3년 만에 돌아온 문장에 <어둠 속에서 화재경보음이 울리면>을 올렸던 이유는 내 자신에게 품고 있는 의심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였다. 앞으로 과연 글을 더 써도 되는가? 과연 내 글은 누군가가 읽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그런 내게 돌아온 답은, 계속해서 써보라는 용기였다.
  원고지 80매의 연이은 절망 속에서도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돌아올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장이라는 공간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바이러스>라는 작품이 당선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젠 창작광장이 없어진다고 한다. 지금껏 문학을 좋아하는 청소년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힘이 되어주었던 문장이기 때문에 분명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줄 거라고 믿지만, 다만 조금 아쉬울 뿐이다. 내게는 집 같은 곳이기 때문에….
  약 1년이란 시간 동안 좋은 조언과 말씀 해주신 대관령 선생님, 글틴 3년 동안 이끌어주셨던 초록불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갈 곳 없던 지망생에게 소중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던 문장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앞으로 더 열심히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정진하겠다.


 

박민혁 (필명 : ccg)

- 인천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인천에서 보낸 인천 토박이. 현재는 휴학 중인 대학생. 글틴에서 시작한 사이버문학광장 경력이 어느새 5년. 201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이러스>가 당선되어 숨통이 아주 조금 트인 삶 속에서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문장웹진 2016년 4월호》

추천 콘텐츠

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