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一 人 詩 爲 (일인시위) ‘젠트리피케이션’

  • 작성일 2017-04-01
  • 조회수 1,161

[기획]

 


포에트리 슬램이란?

시를 쓴 후 이를 슬램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
2차 대전 이후 시인과 래퍼들이 이를 세상을 향한 발화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一 人 詩 爲 (일인시위) ‘젠트리피케이션’ - Poetic Justice

 

 

 

빈방이씀

-침수(沈水)된방에서

 

김경주

 

 

빈방들은어디있나변검술을하듯이

 

오늘은 스무개의방을보고돌아왔으니내일은벽지를뜯어먹고있는기린을보겠지
배고픈나의기린은벽속에숨어살고있다싱싱한곰팡이처럼

 

침수(沈水)에떠가는빈방의순례들, 빈방은술래처럼달아나고,
배고픈나의기린은벽지속에서스르르목을내밀고방에들어찬물을마신다

 

창문으로도랑물이넘어와조금씩벽지에생긴선(線), 이대로잠들면점점수위가높아지는입천장,
아아똥물이입으로넘어올때까지우리는숨을참는다

 

나의방은어디에있나흰위(胃)액처럼 기린과나는방에떠있다
앞발이잠겨방문앞에서있는나의기린
모가지가슬퍼서달력의이끼를뜯어먹는기린,

 

모가지가길어서남의방을매일훔쳐보고돌아온다
발톱을숨긴마침표처럼, 기린은손톱을모아놓는다

 


 

Room Vacancy

For a flooded room

 

Kyung ju Kim

 

 

Where is a vacant room? Like a Chinese mask dance

 

I come home after looking at twenty rooms and the next day I see a giraffe in my house eating the wallpaper.
Like fresh mold, my hungry giraffe lives and breathe inside the wallpaper.

 

Pilgrimages of empty room seekers float around on a flood.
They switch in and out of a room like tag, you’re it, and
my hungry giraffe that lives in the wallpaper slowly sticks out its neck.
It comes inside the room and it takes a cold drink.

 

Water from the gutter enters through the window onto the wallpaper. It draws a line.
Like this the water level rises little by little to the the roof of the giraffes mouth and ahhh ahhh our breath will be heavy, heavy until the yellow water of soaked shits is excreted out our mouths. Where is my room? Me and my giraffe float around like white stomach acid.
My giraffe standing at the door of a room kicking it with its foot, my giraffe whose neck became so sad it licked the moss that grew on calendars.

 

With its long neck my giraffe left and went around looking to steal from the rooms of strangers.
My giraffe gathering fingernails, an ending like a toenail buried in skin.

 


 

 

 

 

 

 

 

올리브영 짬뽕

(고급화 바람)

 

제이크

 

 

성형수술 한 여자들은 제일 먼저 치킨이 먹고 싶은 이유가 뭘까?
아니면 태어난 후에 닭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코 성형 수술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성형외과 의사들 사람에게 닭 몸을 사용하는 이유인가?
아니면 인간들이 수술 후 버려진 신체 부분을 닭에게 먹히게 인가?
인간 코들과 젖꼭지를 먹는 닭들 생각과
닭의 항문 만든 얼굴 걸어가는 사람 생각 사이에,
난 돌아서서 간다.
하림 치킨 본사와 엘레강스 성형외과 사이
마룬 파이브 노래.
귀를 막아. 비명을 쳐. 도망가.
지난 주 여 선배가 올리브영 짬뽕 얼굴 크림을 사용해봤다.
크림이 너무 오랜 시간으로 얼굴에 녹아있었다. 얼굴이 쫌 노래졌다.
크루톤 같은 것이 됐다.
그래서 그 소녀가 얼굴을 상추로 싸고 나는 샐러드라고 불렀다
나는 그 소녀에게 이 노래를 썼다
CGV에서DMZ물병 살 수 있고
DMZ에서GNC 단백질 가루 살 수 있고
GNC에서 비피 리가 헤르페스 바이러스를 줄 수 있지만
추석날에 캐러멜 라떼만 구하고 싶었다!
헬조선! 헬조선! 헬조선! 헬조선!
어렸을 때 잠이 오도록 김치를 세어봤던 착한 김밥천국 아주머니들
밤새 우는 소리 들었다 아침마다
옥상에 젖은 베개 커버를 널어 말리는 김밥천국 아주머니들을 보았다.
다시 마룬 파이브 노래를 들어 귀를 막아
돌아서서 가버리고 싶은데 캐러멜 프라푸치노색 안경 통해 세계를 본다.
우리는 모두 별로 만들어진게 사실인지 몰라요
눈꺼풀이 달콤하고 쫀득쫀득 오독오독하게 변했으니까
거리의 길이 인공 감미료로 달달하게 만들어졌어 마룬 파이브처럼
난 탐앤탐스 지나가고 투썸플레이스도 지나가고
모든 것이2배가 됐어! 다시 애덤 레바인 목소리 들어
너는 집이 어디 있어? 나여 어디즘에 온거야?
거리에서 어떤 편에 서 있을거야?

 


 

Olive Young 짬뽕

(on gentrification)

 

Jake

 

 

Is it because the first thing girls who get plastic surgery want to do is eat chicken?
Or is it because the first thing chickens want to do when they are born is get nose jobs?
Do surgeons use the parts of chickens in people?
Or do chickens eat the parts of people they throw out after surgery?
Thinking of chickens eating discarded human nipples and noses,
And people walking around with chicken asshole faces, I turn around.
In between the Elegance Plastic Surgery clinic
And the Harim Chicken headquarters
Is a song by Maroon 5. I cover my ears. I run down the street. I scream.
Last week a girl in my class tried the new Olive Young 짬뽕face cream.
She left the cream on too long and it melted her face.
Now she looks like a crouton.
She puts lettuce on her face and calls herself “salad”.
I wrote her this song.
At the CGV you can get
bottled water from the DMZ
and at the DMZ you can get protein
shakes by GNC and at the GNC you can
get herpes from a guy named Beefy Lee,
but on Chuseok all I really wanted was a caramel Latte!
Hell Chosun! Hell Chosun! Hell Chosun! Hell Chosun!
When I was younger you could hear how the friendly ajummas
In Kimbab Heaven would cry all night
Counting Kimchi in order to fall asleep.
Every morning I used to watch them hang their wet
Pillowcases on the lines on the roof to dry.
Again I hear a song by Maroon 5. I cover my ears.
But when I turn I see the world through caramel Frappuccino colored lenses.
We are all just stars, but
My eyelids are sticky sweet.
The street is artificially flavored like Maroon 5.
I pass a Tom n Tom’s. Then a Twosome place.
I begin to run. Everything is doubled! I hear the voice
of Adam Levine. Where is my house again? Where
am I? On what side of the street?

 


 

 

 

 

 

Review

 

김봉현

 

 

김경주는<빈 방 이씀>에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초현실적으로 다룬다. 어찌 보면 판타지 소설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비디오게임 마니아라면<라스트 오브 어스>의 그 유명한 ‘기린 씬’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부유하며 체념하는 듯한 이 시를, 그러나MC메타는 정반대로 바꾸어 놓는다. ‘트랩’이라니! 힙합의 서브장르 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언뜻 보기에 시와는1도 상관없을 것 같은 음악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MC메타의 퍼포먼스에서는 김경주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아련함은 좀처럼 느끼기 어렵다. 또MC메타는 김경주가 시의 사이마다 심어놓은 침묵 역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조금 과장하면 둘은 모든 것이 정반대다. 대표적으로 김경주가 ‘기린은 손톱을 모아놓는다’며 조용히 시를 끝낼 때, MC메타는 마지막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심지어는 포효하기까지 한다. 시인이 자꾸만 비워내고 침묵하려고 한다면, 래퍼는 자꾸만 채우고 발산하려고 한다. 어쩌면 이 두 작품은 이 차이를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빈 방 이씀>의 퍼포먼스에 어울릴 만한 비트를 오히려MC메타는<올리브영 짬뽕>에 사용한다. 역시 뻔한 건 싫다는 건가. 하지만 가장 특별한 사람은 나다. 아무튼MC메타의 퍼포먼스는 이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누가 이 시를MC메타처럼 퍼포먼스할 수 있을까. 한 글자도 훼손하지 않고, 마치 랩을 위해 스스로 쓴 가사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한 군데도 어색하지 않게 말이다. 그러기 위해MC메타는 시를 쓴 제이크 레빈 본인은 정작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마치 랩의 라임처럼 소화해낸다. 한 음절씩(때로는 두 음절씩), 같거나 비슷한 모음이 반복되는 부분을MC메타는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찾아낸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이 부분이다. “어렸을 때 잠이 오도록 김치를 세어봤던 착한 김밥천국 아주머니들/ 밤새 우는 소리 들었다 아침마다 옥상에 젖은 베개 커버를 널어 말리는” 만약 누군가가 이 시를 낭독한다면 절대로 이렇게 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MC메타는 자신만의 방식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재창조를 완성한다. Respect.

 

 

 

 

 

 

 

 

 

 

 

김경주
참여 / 김경주

시인, 극작가, Poetry slam 운동가.

 

제이크
참여 / 제이크 레빈

아이스크림 황제

 

MC메타
참여 / MC메타

힙합 음악가. 현재 <금기어> 발표 가리온 3집 준비

 

김봉현
참여 / 김봉현

힙합 저널리스트. 대중음악, 그중에서도 힙합에 관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네이버뮤직, 에스콰이어, 씨네21 등에 글을 쓰고 있고 레진코믹스에서는 힙합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서울힙합영화제>를 주최하고 있으며 김경주 시인, MC 메타와 함께 시와 랩을 잇는 프로젝트 팀<포에틱 저스티스>로 활동 중이다.

 

Lei
참여 / Lei

그래픽 디자이너

 

   《문장웹진 2017년 04월호》

 

추천 콘텐츠

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