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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모임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 작성일 2017-08-01
  • 조회수 1,941

[기획]

 

 

독자모임

-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참여 : 정홍수(사회, 문학평론가), 장수라, 이영순, 김보배, 김지윤

 

 

 

 

정홍수 : 지금부터 사이버문학광장 문장웹진 독자모임 좌담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문학평론가 정홍수라고 합니다. 먼저 참여하시는 분들 각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지윤 :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문학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김지윤입니다.

 

김보배 : 문학을 좋아하는 김보배라고 합니다.

 

이영순 : 저는 공공기관에서 20년 재직하다가 문학이 좋아 지금은 연수휴직을 하고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이영순입니다.

 

장수라 : 저는 시를 쓰면서 십여 년 아이들과 함께 문학예술 수업을 했습니다. 현재는 명지대학교 박사과정 4학기 공부 중인 장수라입니다.

 

정홍수 : 문학을 좋아하는 일반 독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는 게 이번에 독자모임을 새로 마련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문장웹진을 비롯해서 여러 문예지에 발표되는 작품,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 가운데에서(일단은 소설로 국한하는 게 어떨까 하고요) 그때그때 인상적인 작품들을 골라 우리 나름의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오늘은 첫 모임인 만큼, 이곳 문장웹진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문장웹진은 알고 계셨나요?

 

장수라 : 웹진 사이트로는 ‘문학 in’과 ‘후아이엠’ 같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문장웹진은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알고 보니 굉장히 알찬 문학 웹진이더군요. 많이 놀랐어요.

 

이영순 : 저는 같이 공부하는 선후배한테 듣긴 했었는데, 최근에 와서야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작품까지 챙겨 읽지는 못했고요. 2000년대 후반에 생긴 ‘문화웹진나비’는 가까운 후배가 단편소설로 나비문학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종종 읽었는데, 그 후 문학상이 폐지되고 웹진의 성격이 바뀌어서 아쉬움이 컸었습니다.

 

정홍수 : 이영순 선생님은 직장생활을 오래 하셨다고 하셨잖아요. 문학에 대한 갈증이 크셨던 것 같은데 이런 웹진 사이트가 많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도서관을 찾아 그때그때 나오는 문예지를 챙겨 읽기는 쉽지 않겠죠.

 

이영순 : 네. 문장웹진이 처음에 생겼을 때부터 찾아보니까 콘텐츠 차원에서는 지금과 다르게 몇 가지 안 되는 콘텐츠로 시작했다가 차차 시, 소설 작품을 비롯해서 다양한 내용을 갖추게 되었더라고요. 스마트폰으로 접속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매번 책을 바로 사서 구해 읽기 어려운 상황에서요.

 

정홍수 : 저도 이번에 좌담을 준비하며 출퇴근길에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접속했는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스마트폰 작은 화면으로 작품을 읽는 게 쉽지는 않더군요.

 

이영순 : 작가들 입장에서도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부족하다고 하잖아요. 그런 측면에서도 매달 나오는 이런 웹진으로 작가들의 발표 기회가 늘어난다고 볼 수 있으니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김지윤 : 제 경우는 문장웹진을 조금 알고는 있었고 들어가서 작품을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기존의 다른 계간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작품을 찾아 읽기 시작했어요. ‘글틴’도 이전에 좀 알고 있었고 관심은 갔었지만 직접 들어가 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앞에서 말씀하셨다시피 아무래도 요즘에는 스마트폰을 자주 사용하니까 가끔 아르바이트 하면서도 들어가서 소설을 확인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김보배 :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문장웹진을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관심 있게 보게 된 것은 문학 공부를 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접근성이 좋긴 하지만 사실 잘 찾아보지 않게 되는 게 현실인 것 같아요. 이북(E-Book)을 봐도 그렇지만 사실 보려고 하는 의지가 없으면 클릭하는 것조차 귀찮아지죠. 저의 경우 책을 통해 작품을 접하는 것과 잡지를 통해 볼 때 글을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요. 잡지를 통해 볼 때는 좀 더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매거진은 접근성이 쉬운 게 좋은 거라고 생각을 해요. 조금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게 매거진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웹진이라는 매체가 참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정홍수 : 웹의 세상에는 정보가 너무 많죠. 흥미 위주의 볼거리도 많고요. 특정한 웹진을 골라 들어갈 때는 그만한 계기나 동기가 있어야 하는 거겠죠. 어쨌든 여기 네 분은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잖아요. 평소에 한국 문학을 접하는 경로가 어떻게 되나요. 계간지가 나오면 도서관에 가서 찾아 보나요?

 

김지윤 : 계간지 같은 경우는 나올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읽는 편이에요.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이 어떤 것인지, 요즘 작가들은 어떤 주제나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작품을 쓰셨는지 궁금하거든요.

 

정홍수 : 정기구독 하는 문예지가 있습니까?

 

김지윤 : 정기구독은 따로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김보배 : 해본 적은 있어요. 지금은 안 하고요.

 

장수라 : 『시와 문화』를 정기구독 하고 있습니다.

 

이영순 : 저는 지금은 공부만 하고 있는데, 직장 다니면서 혼자 공부할 때는 한 달에 한 번 같이 모임하는 사람들한테 듣고 얘기를 나눠가면서 알아가다 보니까 조금 늦었거든요. 어떤 작품이 좋은지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그땐 많이 늦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바로바로 학교 수업시간이나 동기들한테 듣다보니까 작품이 어떤 게 나오는지 또 어떤 작품이 좋은지 이런 게 빠른데 그냥 일반 독자로 치면, 작품들이 나오는 것을 아는 것은 출판사에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나올 때 대대적으로 광고를 한다거나 아니면 뒤늦게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여서 많이 팔렸다거나 주로 그렇게 알게 될 것 같은데요.

 

정홍수 : 한 계절에 발표되는 작품이 꽤 많습니다. 문예지마다 단편이 서너 편은 실리니까 수십 편의 작품이 나오는 거죠. 계간지 말고 웹진, 월간지도 넣어야 하니까 더 많을 것 같군요. 아마 전문적으로 문학에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도 다 챙겨 읽지는 못할 겁니다. 다양한 문학상 제도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검토할 기회가 있고, 리뷰 형식의 지면도 없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일반 독자를 생각해보면 어떤 가이드 같은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전 신문 월평이 하던 역할 같은 것 말이죠. 평론가 좌담 같은 형식도 기억나네요. 최근에는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이나 문학과지성사의 문지문학상 같은 게 그 운영 방식이나 수상작품집을 통해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매체 환경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방식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웹진을 통한 리뷰, 문학 독서의 가이드 제시 같은 걸 생각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언론은 화제를 모은 작품이나 베스트셀러 같은 데 치중하는 측면이 있으니까요.

 

장수라 : 저 같은 경우는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일반 독자로서 제게 끌리는 책만 봤거든요. 요즘 문학의 흐름이나 이슈가 되는 게 무엇인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내 감정의 흐름에 맡겨서 책을 선택해서 읽었는데, 편협한 독서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 들어와서는 수업 시간에 좋은 작품을 추천받거나 강의 주제와 관련된 책을 소개받으면서 가이드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서서히 어떤 라인이 형성되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다음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는 건 페이스북이나 SNS를 통해서입니다. 여러 문학 작품의 평이나 영화 소개등 문화 전반의 정보들이 링크되어 올라오잖아요. 그중에서 선별해서 접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심하는 부분이라면 ‘베스트셀러가 다 베스트셀러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진정한 베스트셀러란 시간의 흐름을 두고 많은 독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나름의 이런저런 평가를 견뎌내면서 검증되어 알려진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문장웹진이나 계간지에 작품을 선보이는 문제에서 이미 알려진 작가에게 역시 기회가 많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신인 작가의 경우 쉽게 사라지고 묻혀버리는 게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정홍수 : 그러고 보면 계간지 『문학동네』에는 ‘리뷰 좌담’이라는 형식으로 한 계절에 발표된 단편들을 돌아보는 지면이 있죠. 『창작과비평』은 단행본 위주로 리뷰를 하면서 비평 좌담을 마련하고 있고요. 형식이나 비중은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 문예지들이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어떤 가이드가 되는 작업들을 하려고 하고 있죠. 그런데 이게 문예지 같은 문학 제도에 친숙한 이들, 혹은 문학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는 쉽게 접근이 되지만 그 바깥으로 조금만 나오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죠. 문장웹진 같은 공간이 갖고 있는 장점이 많은데, 특히 이런 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특정 출판사와 연계되지 않은 공적 지면이라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고요.

 

김보배 : 일단 평소에도 문학을 가까이 두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평좌담과 같은 것을 원하는데요. 제 주변 친구들만 봤을 때, 우선 그들은 대개 일반 독자들이고요. 그 친구들의 경우에는 그런 가이드라인은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확실히 저희들은 SNS가 체화된 세대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작품을 소개받는 일이 다반사거든요. 저는 만약 문장웹진이 일반 독자에게까지 읽혀야 된다면 SNS를 적극 활용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스타그램이나 SNS를 통해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던 적이 있어요. 지금도 사진이 간간히 올라오고요. 저희는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가 나온 지 꽤 오래됐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반 독자들은 조금 늦게 그 책의 존재를 눈치 채기 시작했단 말이죠. 관심의 차이겠죠. 누가 못나고 잘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봤을 때 일반 독자는 관심이 덜하기 때문에 조금 느린 것 같아요. 걸러내는 거름종이 같은 역할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면 되는 일 아닐까요. 문학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SNS에 책을 소개함으로써 신뢰를 확보하는 거예요.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SNS에 글을 소개했을 때 일반 독자들이 그걸 보고 관심을 두는 구조이기 때문인 거죠. ‘얘는 문학을 엄청 좋아하는 앤데 이런 걸 읽네?’라는 식의. 그렇지만 결국 일부 독자가 참고할 가이드라인이 있을 때 더 효과적일 수 있으니 비평좌담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인 건 확실해요.

 

정홍수 : 금방 『쇼코의 미소』 는 소설집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트위터 같은 데서 아 이번에 최은영 소설가의 책이 좋더라 하고 누가 적극적으로 올리면 리트윗이 되는 방식으로 퍼져나가는 걸 텐데요. 그런데 일반 독자의 경우 소설집에 실린 단편 한 편, 혹은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는 예는 드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김보배 : 네. 적어요. 그들은 책도 예뻐야 사는 거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물론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한마디로 물건의 가치, 소장가치용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꽤 있었어요. 심하게는 책이 예뻐서 사는데, 내용까지 좋으면 좋은 거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니까 굳이 단편 하나를 보기 위해 웹에 들어가는 그런 수고를 할 친구들은 많지 않았어요. 어떤 친구는 내가 그 글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하더라고요. 제 지인 중 한 분은 일러스트 활용을 대안으로 말해주셨어요. 그렇지만 그건 또 글에만 집중하고 싶은 일부 독자들은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니 양쪽을 꼭 다 충족시킬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김지윤 : 저 같은 경우는 단행본으로 작품을 읽는 게 익숙하기 때문에 확실히 웹상에서 보는 것은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제가 계간지를 구독하지 않는 것은 계간지를 받았을 때 저한테는 약간 일회성에 그친다는 느낌이 좀 있거든요. 다시 그 호를 찾아보지 않는단 말이에요. 

 

정홍수 : 한번 읽고 나면 말입니까?

 

김지윤 : 책으로 받았을 때는 한번 읽고 나면 웬만해서는 찾아 읽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문장웹진 같은 경우에는 만약에 제가 필요할 때 그래도 언제든지 쉽게 다시 들어가서 볼 수 있고 그런 점에 있어서는 편리하고 좋긴 한 것 같습니다.

 

장수라 :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카메라조차도 수동카메라에서 디지털로 다 바뀌었잖아요. 그런데 요즘 후지필름에서인가 다시 옛날처럼 아날로그식 필름이 다시 출시되고 있대요. 제가 볼 때는 그래요. 디지털화 된 환경으로 사람들이 접하기 쉽게 웹으로 문학을 접한다 해도 그것은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문화 환경과 다른 차원의 공간이 생겼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긴 글이 담긴 종이책의 가치는 디지털이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인 듯싶어요. 우리가 페이스북이나 SNS를 해보더라도 너무 긴 글은 읽지 않고 건너뛰게 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죠.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거기에 익숙한 문화가 생겨버린 거예요. 아무리 디지털 시대가 와도 그것과는 별개로 종이책이 감당하는 영역은 있는 거죠. 웹진의 경우도 종이책과의 연관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홍수 : 예. 그래서 최근 종이 잡지와 디지털 환경을 결합시키려는 노력도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비에서 새로 나온 『문학3』이라는 잡지에서는 웹상의 플랫폼을 별도로 만들어서 수시로 잡지와 연관되는 모임이나 이벤트를 하더군요. 잡지에 실리는 소설 작품 리뷰를 바로 그 호에서 독자들과 함께 하는 방식도 새로운 접근 방법인 것 같고요. 단편소설도 기존의 80매 안팎 기준을 깨고 40∼50매 정도의 분량으로 청탁해서 새로운 서사 호흡과 리듬을 찾아보려는 것 같습니다. 『악스트』 『문학과사회』 등에서도 이런 짧은 단편을 시도하고 있죠.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모색인 것 같습니다.

 

이영순 : 사실 웹상에서 읽어보면 시는 여운을 느끼면서 읽게 되는 부분이 있고, 이번에 문장웹진에 발표된 단편소설들도 대화가 섞여 있고 하니까 한 70∼80매 정도는 어려움 없이 읽히더라고요. 그런데 게재 작품 중 「감상소설」은 분량이 두 배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읽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문학나무』인가에서 스마트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30∼40매 정도의 소설을 공모한다고 하던데, 그런 분량으로 좀 완결성 있는 단편을 청탁해서 수록하면 어떤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웹이나 스마트폰으로 읽기에 가독성도 읽고 독자에게 흡인력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시도들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보배 : 짧은 글이 한동안 유행을 했었잖아요. 시나 시와 비슷한 글들이 갑자기 확 뜨기도 했고. 그게 읽기에 편한 거죠.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긴 글에 비해서 시간을 덜 사용해도 되기 때문에, SNS에도 한동안 유행을 했었고. 단편소설도 점차 짧게 줄어드는 추세인 것 같은데. 우리의 경우 단편소설 하면 80매에서 100매 사이에 맞춰 쓰라고 정해져 있잖아요. 혹시 외국도 그런 건가요?

 

정홍수 : 그렇지 않죠. 오히려 이런 관행은 한국 근대 문학의 역사, 제도 안에서 특수하게 만들어진 거죠. 특히 문예지 중심으로 문학장이 운영되어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문예지가 단편소설의 중요한 발표 지면이 되면서 형성된 분량인데, 거기에 맞춰 서사의 리듬을 만들면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단편 미학이라는 게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김보배 : 저에게 문장웹진이 의미 있는 점은 이 분량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저는 ‘80매에서 100매 사이의 분량’이라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단편소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그게 아니더라도 한국 문학만의 특별한 관행이 되었다면 문장웹진이 계속 이어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편소설이 짧아지는 추세도 좋아요. 그렇지만 다른 지면에서 이미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요. 문장웹진은 한국 문학만의 단편소설 관행을 지키는 역할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뭐 사실 분량보다도 중요한 건 내용이죠. 아참, 다른 지면에서 단편소설이 지금보다 짧게 줄어드는 추세는 SNS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일반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이영순 : 같이 공부하는 후배 중에 최근에 단편소설 30∼40매를 집중적으로 습작하는 친구가 있는데, 완성도 있는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는 그것도 굉장히 어려운 거더라고요.

 

정홍수 : 그러게요. 분량이 작으면 더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영순 : 네. 짧다고 쉬운 게 아니라 그 짧음 안에 완성된 작품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짜야 하는지 고심하면서 쓰더라고요. 문장웹진에 분량이 짧은 그런 소설을 수록하는 것도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홍수 : 현재의 단편 분량은 한국 문학사 안에서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노하우도 쌓여 있는 거겠죠. 등단 제도와도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겠고요. 어쨌든 변화가 시작된 느낌입니다. 그밖에 문장웹진의 다른 코너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나요? 

 

이영순 : 저는 커버스토리가 재미있더라고요.

 

정홍수 : 공간, 장소를 테마로 이야기하는 거지요? 저도 ‘광장’을 테마로 한번 썼던 기억이 나네요. 화가의 그림이 글과 함께 붙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영순 : 저는 어디에나 있는 커버스토리겠지 하고 크게 기대를 안 하고 읽었는데 읽다보니까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정홍수 : 작품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이번 첫회는 여러 사정상 본격적인 작품 좌담은 하기 힘들 것 같고요. 오늘은 문장웹진 지면과의 상견례 같은 자리인 만큼, 거기서 읽은 작품들에 대한 간단한 독후감 정도를 나누는 것으로 하죠. 다음 모임부터는 대상 작 품을 폭넓게 찾아서 조금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김지윤 : 「감상소설」이 인상 깊었는데요, 제게는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고 난해한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양선형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이 작가의 작품을 다 읽어본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었어요.

 

정홍수 : 힘들게 읽은 만큼 얻은 것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김지윤 : 일단 이렇게 호흡을 길게 쓰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되게 인상적이고, 작가님의 역량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정적인 서술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더러 있었고 그래서 읽기 버거운 느낌도 들었지만 그건 제 역량 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즐겨 읽는 느낌의 소설은 아니었지만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궁지혜 작가님은 아무래도 같은 20대인 만큼 관심이 많이 갔는데요. 2016년도 신춘문예 등단작인 「신다」를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거든요. 확실히 말하고 싶어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신 분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떤 사건의 가해자의 동생이자 피해자의 애인이라는 설정도 흥미로웠고 거기에서 충돌하는 양가적인 감정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을 건드려서 생각하게 만드는 점들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왓 더 퍽!」 역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아요. 빠르고 쉽게 읽혀서 가독성이 좋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품 내에 구축된 새로운 세계, ‘싸움의 날’과 같은 설정도 재미있었고요. 중간 중간에 들어 있는 유머 같은 것들도 재미있었습니다. 「관객의 자격」은 작품 초반부터 끝까지 긴장감과 어떤 불편함 같은 것을 주었는데요. 읽는 내내 주인공에게 몰입해서 함께 느꼈던 것 같아요. 주인공은 연극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또 우리는 그런 모습을 읽어나가는 독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연결해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김보배 : 「감상소설」은 전체적으로 독자에게 불친절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른 소설들이 읽기 편했던 것은 저희가 일반적으로 봐왔던 소설 형식이라 학습되어 있는 방식으로 읽으면 되는 소설들이었기 때문이겠죠. 「감상소설」 같은 경우에는 소설을 공부하는 전공자들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굳이 보지 않는 그런 유의 소설이었어요. 읽는데 고통스러웠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어딘가를 울리는 문장들도 많았고. 필력도 엄청나고. 분명 문학 생태계를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홍수 : 다른 작품들은 어땠나요?

 

김보배 : 읽기 편했어요. 「관객의 자격」은 관객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편의점 알바생의 이야기잖아요. 연극을 향한 그 아이의 감정이 완벽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관객에게 필요한 자격이란 화자인 알바생이 보여주는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왓 더 퍽!」의 경우에는 SF영화가 생각났어요. 예를 들면, 허공에 떠다니는 물고기를 보면서 영화 <공각기동대>의 입체광고 홀로그램이 생각났어요.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요. 「주인」을 보면서는 소름이 끼쳤어요. 왜 자신의 분노가 자신보다 약한 대상을 통해 해소되어야 하는지, 마음이 아팠어요. 「누군가의 칸」은 다른 작품들보다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찌그러진 애인의 머리통을 쓰다듬는 장면에서는 애정이 보였어요.

 

정홍수 : 「누군가의 칸」에는 요즘 젊은 세대 작가의 특징 같은 게 많이 들어 있죠. 일견 거친 것처럼 보이지만 분노라고 해야 할까요, 외면하기 힘든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차원의 문제제기도 강렬하고요. 「관객의 자격」 은 이른바 만만찮은 소설의 아이러니를 구축하면서도 난해하거나 불편한 느낌을 주지 않죠. 메타소설적 측면도 있고요. 구성이 단단하고 잘 짜여진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수라 : <관객의 자격> 같은 경우에는 인생은 하나의 무대라는 말이 딱 떠오르는 그런 소설이었어요. 장애아를 둔 엄마의 아픔을 비슷한 상황의 연극 내용과 관객이자 배우인 건주를 통해 나타내는 것들, 연극이 끝나자 배우들이 박수를 치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그녀를 향해 박수를 치는 장면에서 낯선 기시감이 들었어요. 관객의 자격과 배우의 자격이 일치하는 시점을 맛보게 되더군요. <감상소설>은 시작은 매력적이었는데 갈수록 읽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왓 더 퍽>은 게임의 상상력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여성에 대한 몇몇 표현은 조금 불편했습니다. 소설에서 ‘기타’가 상징하는 게 뭘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이영순 : 소설들이 거의 모티프나 소재가 죽음이나 살인, 이런 거가 다수더라고요. 각각 얘기하려는 것은 다르지만요. 그래서 저는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많이 무겁다는 생각을 했어요. 「감상소설」은 너무 정신분열증적인 것 같으면서도 요새 벌어지는 우리 현실하고 맞닿아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어떤 권력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돌아볼 수 었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모습을 바꾸는 권력과 거기에 편승하려는 모습들이 정신분열증적인 그런 부분에서 드러나면서 인상적이었어요. 「주인」은 잘 읽혔습니다. 십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집을 나와서 동거를 하는데 여자아이가 애를 임신하고 이를 소설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새로움을 보여줄까 기대했는데, 결말에서 어떤 미광이 아니라 서치라이트적인 결말로 간 것이 아닌가 싶어서 다른 말로 하면 쉬운 결말로 간 것이 아닌가, 해서 아쉬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왓 더 퍽」은 속도감 있게 잘 읽혔지만, 우리가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 평온을 찾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마지막 오십오 분의 막막함이 절실하게 와 닿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어요.

 

정홍수 : 첫 좌담 모임, 다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다음달에는 좀더 본격적인 작품 좌담 형식으로 뵙기로 하겠습니다.

 

   《문장웹진 201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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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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