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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것 2

  • 작성일 2018-06-01
  • 조회수 893

[기획취재]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것 (2)
― 화각장 이재만

 

 

안보윤

 

 

 

    ― 죽음을 세 번쯤 경험한 사람.
    이라고 이재만은 답했다. 윤은 순간적으로 내뱉은 질문을 후회했다. 도대체 선생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것은 무례한 질문이었다. 겸연쩍게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는 윤에게 이재만이 자신의 양손을 내보였다. 몇 개 남지 않은 손가락 끝이 생강빵처럼 부푼 손이었다.
    ― 내가 어릴 때 호기심이 얼마나 많았는지, 화롯불에 양손을 쑥 집어넣어 버렸더란 말이야. 그길로 손가락이 불에 죄 녹아버렸어. 화상만도 난리인데 마침 홍역을 앓는 바람에 다들 이 애는 죽겠구나 했다더라고.
    ― 아.
    윤은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재만의 손은 첫 만남 때,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 발을 들이던 순간부터 눈에 띄었다. 불에 녹았다는 말이 정말이지 어울리는 손이었다. 윤은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수시로 이재만의 손을 훔쳐보았다. 저 손으로 그토록 정교한 작품들을 어떻게. 윤은 뉴욕 경매시장에서 책정된 화각장 값이 얼마였냐, 는 질문처럼 손에 대한 질문 역시 여러 번 삼켰다. 윤은 무례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이재만은 태연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어릴 때부터 죽음에 아주 근접한 삶을 살았지. 내가 서울 토박이야. 어머니가 한강에 나가 빨래를 하면 나는 옆에서 뛰놀고 수영하고 썰매 타고 그랬어. 하루는 내가 물에 빠져 쭉 떠내려가는데 어머니가 빨래하느라 그걸 못 본 거야. 한참만에야 헐레벌떡 뛰어와 나를 건져냈지. 그뿐인가. 중1 때는 강에서 썰매를 타다 얼음구멍에 빠진 적도 있어. 머리 위가 다 얼음판이니 밖으로 나올 수가 있나. 빙판 아래로 둥둥 떠내려가다가 다음에 뚫린 구멍으로 가까스로 나왔지.
    ― 그건 되게 심각한 사고잖아요?
    ― 그렇지. 사고지. 사람은 말이야, 갑자기 사고를 당하게 되면 살기 위해 애를 쓴다고. 얼음판 위로 기를 쓰고 올라오거나 병균과 싸워 이기느라 고열을 내거나 뭐라도 한단 말이지. 살겠다고 작정을 하면 어떻게든 살 수밖에 없어, 사람은. 그런데.
    ― 그런데?
    ― 죽겠다는 의지가 작동하면, 죽어버리겠다고 작정을 해버리면 말이지. 그거 참 답이 없거든. 나도 있었네. 딱 한 번. 내 의지가 반영된 죽음에 가까운 순간이.

 

    삼십만 원. 이재만은 손에 쥔 돈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삼십만 원. 집 여섯 채를 몽땅 팔아버린 이재만의 형은 고작 삼십만 원을 이재만에게 쥐어 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엇이? 이재만은 배낭을 메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생각했다.
    ― 재만이 니가 그 손으로 무얼 하고 살겄냐.
    이재만의 어머니는 그에게 뭐라도 해야 먹고산다고 말하면서도, 돌아앉으면 그 몸으로 무엇을 하겠느냐고 한탄했다. 당시 화각 기능장이던 음일천 선생 문하로 이재만을 밀어 넣은 것도 그의 어머니였다. 고된 일에 몸과 마음을 다쳐 집으로 도망치면 어머니는 이재만의 무릎을 잡고 밤새 설득해 공방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문하생이라기보단 잡역부에 가까운 일을 하고, 바람처럼 언덕을 떠돌며 그림 그리는 삶을 포기하고, 젊은 날을 호되게 소진한 뒤 남은 것이 고작.
    이재만은 삼십만 원을 천천히 세고 또 세었다. 스승이 죽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십만 원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은 이재만에게 남은 건 황량한 바람소리뿐이었다.

 

    어쩌자고 저리 모질까. 소년 이재만은 때로 생각했다.
    언제든 마음이 끌리면 들판이며 언덕을 휘돌며 거대한 캔버스 가득 유화를 그리던 이재만이었다. 만화가가, 화가가, 디자이너가 되고 싶던 이재만이었다. 크고 웅장한 것, 뚜렷하고 실용적인 것, 무엇이든 힘차게 선을 내긋는 것이 좋았다. 자신은 분명 그런 삶을 살 거라고 믿었다. 고교 시절 이재만의 그림을 본 음일천 화각장이 자신의 제자로 들어오라 권했을 때에도 이재만은 단호했다.
    ― 화각이라니. 그렇게 작은 그림은, 그렇게 답답하고 좁은 데 그리는 그림은 싫어요. 보름이고 한 달이고 쪼그려 앉아 꼼짝없이 이것만 갈고 또 갈고. 어휴, 싫어요. 저는 좀 더 굉장한, 상상력을 마구 발휘할 수 있는 걸 할래요.
    ― 뭐라도 다른 걸 해야지.
    이재만을 붙잡아 설득한 사람은 이재만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이재만의 등을, 어깨를, 마지막으로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네 길을 만들어 가려면 일반 사람들하고 뭐라도 다른 걸 해야 헌다. 우리는 예인 집안이다. 너도 알지? 조부님이 단청장을, 느이 아버지가 대목장(大木匠)을 하셨고, 나도 자수를 놓는다. 우리만큼 전통을 지키며 살아온 집이 없어. 그뿐이냐. 너는 손도 이러니 남들이 못 하는 것, 우리 것을 지키되 남들과 다른 특별한 무얼 해야 헌다. 어릴 적부터 너는 그림 솜씨가 남달랐다. 도안도 곧잘 만들어내고 상상력도 특출 나고 끈기도 있으니, 화각이 적격이지 않겄냐.
    그러나 이재만이 겪어 본 문하생 생활은 달랐다.
    음일천의 공방에서 이재만이 하는 일은 잡일의 연속이었다. 공방을 쓸고 닦고 선생이 먹을 밥을 짓고 농사일 품팔이를 해 쌀과 공예 재료를 샀다. 소뿔 공예를 하려면 끝도 없이 돈이 필요했다. 두 사람이 먹고 자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스승은 이재만을 나란히 앉혀 두고 화각보다 먼저 금속 공예를 가르쳤다.
    ― 이걸로 우선은 돈을 벌자. 돈을 벌어야 소뿔도 사고 도료도 사고 목재도 사지.
    ― 화각은요? 화각은 언제 배우나요?
    ― 암말 말고 시키는 것부터 해라.
    스승의 말에 따라 이재만은 종일 금속을 오리고 쪼고 땜질해 사리함이나 사리탑을 만들어 팔았다. 때론 모서리를 갈고 검댕을 칠해 골동품이라 속여 팔기도 했다. 나전, 옻칠, 소목 짜기, 이재만의 일은 끝도 없이 불어났다. 화각 공예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배운 셈이었다. 그렇게 십 년. 길고 지난한 시간이 쉼 없이 흘렀다.

 

    지난하다, 라고 윤은 받아 적었다. 윤은 이 단어를 이전에도 받아쓴 일이 있었다. 화각을 설명할 때였다. 소뿔을 갈고 또 갈고 다시금 갈았던 것처럼 소년 이재만은 정을 쪼고 금속을 땜질하고 옻칠을 하며 지난한 일과를 이어 가고 있었다.
    ― 도망치고 싶진 않으셨어요?
    윤은 이제 무례하거나 어느 때고 누구에게든 상처가 될 수 있는 질문을 거침없이 꺼내 놓았다. 이재만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윤이 마주한 이재만은 달변에 행동이 정확하고 추진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재만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바람처럼 들판을 거닐며 살고 싶었다고.
    ― 자유롭게 살고 싶으셨다면서요.
    ― 그렇지.
    ― 이 일만 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방송국에 들어가 분장 일도 하고, 박스 디자인 같은 상업 디자인도 하고, 만화도 그리고 간판 그리는 일도 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왜 하필 화각을. 이렇게 어두운 곳에 우두커니 앉아 생을 온통 소진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을 왜.
    ―가끔.
    이재만의 눈이 아득해졌다.
    ― 무엇을 위한 단련이었을까 생각할 때가 있지.
    윤은 이재만을 따라 굳은 벽 어디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 우두커니 앉아. 윤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들이 있는 곳은 평범한 작업장이었다.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의 인터뷰 이후 윤은 다시 날짜를 잡아 이재만의 작업실로 찾아왔다. 가장 거칠고 지난한, 날것의 순간을 한번쯤 목격해 보고 싶어서였다. 낮은 건물 지하에 꾸려진 작업장은 용도를 알 수 없는 도구와 소목들로 가득했다. 도구들 사이에 앉아 있는 이재만의 얼굴이 한결 편안했다.

 

 

    ― 스승 밑에 있는 동안 내 어느 부분이 단련되었을까. 가난과 고통, 정신적 수난과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망. 기술이든 정신이든 무언가가 단련되었겠지. 지금 떠올려 보면 그때 스승에게서 내가 배운 건 복원 기술 아닌가 싶어. 쪼개지고 망가진 것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쌓아올리는 작업.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기법의 순서만은 확실히 배워 나왔거든. 그래도 그건 이 나이 되어서야 생각하는 거고, 당시엔 견딜 수 없을 때가 많았어. 공방을 뛰쳐나가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기어코 나를 돌려보냈지. 야아, 아주 지독하더라고. 야속하게 날 왜 자꾸 돌려보내나. 돌아가서는 또 날품팔이를 하고 병든 스승 가래침이나 받으며 살아야 하는데.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나.
    ―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도망가면 되잖아요.
    ― 참 이상도 하지. 그림 그릴 때는 무턱대고 잘도 떠났는데, 그 공방은 떠나질 못하겠더라고. 스승이 죽고 나서야 떠났지. 내 어릴 때부터 온갖 수발 다 들며 스승 수족 노릇을 했는데 죽을병에 걸리니 스승이 자식만 찾더라고. 어쩌겠어. 수소문해 자식을 찾아다 스승 앞에 데려다줬지. 근데 이상해. 허무한 것도 허탈한 것도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단전 근처가 꽉 막혔다가 뻥 뚫렸다가 하는 것처럼. 내가 굉장히 큰 걸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지를 못하겠더라고. 집으로 돌아가 그때부터는 정말 화각에만 매달렸어. 하고 싶었던 거, 만들고 싶었던 걸 실컷 만들었지. 아주 신바람이 나던 시절이었어.
    ― 그럼 드디어 지난한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날들이?
    ― 그런데.
    이재만이 한숨을 쉬었다.
    ― 그때 마침 어머니가 돌아가셨지.

 

    이재만의 어머니는 이치에 밝고 준비성이 좋았다. 화롯불에 녹은 이재만의 손을 어머니는 늘 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다음을 준비하며 살라는 조언뿐이었다. 때문에 이재만은 당연하다는 듯 붓을 잡고, 연필을 깎아 도안을 내고, 캔버스를 잡아 묶었다. 손 때문에 불편한 일은 있어도 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 네 스승이 너는 딴 일을 하더라도 화각만은 꼭 지키라고 유언했다지. 그 말대로 해라. 네 호가 원석(元石) 아니냐. 으뜸가는 돌이 되려면 한 자리에 변치 않고 있어야 헌다. 화각 그걸 하려면 언제고 돈벌이가 안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럼 셋돈이라도 받고 살아야 하고픈 것, 해야 하는 것을 줄곧 할 수 있지 않겄냐.
    이재만은 어머니가 자신의 몫으로 집 여섯 채를 지어 두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지금껏 야속하게 내치기만 했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이재만의 손을 꽉 잡아 준 셈이었다. 병든 스승을 보내고 돌아오니 어머니 얼굴에도 병색이 짙었다. 이재만은 그러겠노라고, 할 수 있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재만은 비로소 안정된 장소에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셋돈을 받아 재료를 사고 본격적으로 작품 연구에 들어갔다. 이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 인정을 받아 보자. 세상에 화각이라는 게 있다는 것부터 알려 보자. 커다란 화각함을 만들어 동아공예대전에 출품해 보자는 작정을 한 것도 이때였다.
    지금껏 배운 것과 배우지 않았으나 꿈꿔 왔던 것, 할 수 있는 것과 시도해 보고 싶었던 것을 이재만은 마음껏 해냈다. 화각함을 만드는 과정은 수월했다. 도안이 손끝에서 술술 풀려 나오고 소뿔을 가는 동작에 힘이 실렸다. 각질 가루가 풀풀 날려 사방이 희뿌예도 종일 밥 먹는 것을 잊어 장이 뒤틀려도 문제될 게 없었다. 이재만은 완성되어 가는 화각함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오롯한 나의 것, 이재만의 작품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꼭 일주일만 더 작업하면 작품이 완성될 찰나였다.
    ― 이젠 정말 그만둘까 싶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재만은 작품을 포기했다.
    혼란하고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 지인이 이재만 대신 공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고, 그것이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입선했다는 연락이 왔을 때 허무함은 배가 되었다. 자신이 이룬 것을 자랑할 스승도, 자신보다 더 기뻐해 줄 어머니도 이제 이재만 곁에 없었다. 그것이 1974년의 일이었다.
    ― 뭘 그만둬?
    ― 화각. 이거 그만둘란다. 다 치워버리고, 이제 그만 살고 싶다.
    수상을 축하하러 찾아왔던 이재만의 친구가 얼굴을 굳혔다. 평소 이재만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저 그런 푸념으로 죽음을 말하는 이가 아니었다. 친구는 물품을 다 걷어버려 휑한 작업실을, 보따리로 싸 놓은 이재만의 짐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 입선작은 어디 있어?
    ― 줘버렸지.
    ― 누구한테?
    ― 대신 출품해 준 사람이 갖고 싶다더라고. 가지라고 했지. 다 가지라고. 어머니가 남겨 준 집 여섯 채도 형제들이 다 팔아먹었더라고. 그것도 다 가지라고 했지. 다, 싹 다 가져가 버리라고.
    이재만은 돈 삼십만 원을 내주며 미안하다고 말하던 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안한 얼굴이었던가. 뻔뻔한 얼굴이었던가. 미안하다니 무엇이? 삼십만 원으로 이제 무엇을? 그 돈으로는 작업실을 얻을 수도, 재료를 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먹고살 방법이 없었다.
    이재만은 조용히 돈을 나누었다. 어머니 유품 격으로 반지를 해 녹지 않은 손가락에 끼우고, 보증금 십만 원에 월 삼만 원짜리 자취방을 얻고, 남은 돈으로 수면제를 사 서랍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 이재만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 의지가 반영된 죽음.
    ― 그래. 화롯불이나 홍역이나 강에 빠지는 것 말고.
    ― 정말 그러실 작정이었어요?
    ― 그랬지. 죽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나 싶었으니까.
    윤은 처음 인터뷰를 준비할 때 만들어 두었던 질문지를 들여다봤다. 밝고 화기애애하고 희망차고 자부심 넘치는 질문들이 거기 있었다. 윤이 기대한 대답 역시 그 언저리일 것이었다. 한 분야에 정통한 장인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견고히 완성해 낸 장인이 하는 말이란 무조건 비범할 것이라고 윤은 생각했었다.
    ― 다행히 죽지 않으셨네요.
    윤의 말에 이재만이 크게 웃었다.
    ― 친구 놈들이 말이야, 내가 죽을 작정인 걸 알고는 돌아가며 날 감시했더라고.
    ― 아, 친구도 많으셨구나.
    ― 아주 어릴 적부터 어울리던 놈들이지. 같이 사고도 치고 운동도 하고 어려울 땐 떼로 달려가 서로 돕고. 자취방을 구해 놓고 언제 죽을까 고민하는데, 친구 놈들이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줄줄이 찾아와. 자꾸 내 방에서 자겠다고 우겨. 평일이든 주말이든 일단 내 방에 기어들고 보는 거야. 구석에 앉아 작업하는 척 소뿔을 갉작거리고 있으면 또 줄줄이 다른 놈을 끌어오더라고. 물난리 때 미장원이 망했다고 주저앉은 여인네가 하나 있었어. 어느 날부터는 그 사람도 내 방에 와서 작업하는 걸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가더라고. 이게 무슨 해괴한 모임인가 싶었지.
    ― 좋은 친구 분들이네요.
    ― 어느 날은 방이 잠깐 빈 틈에 얼른 배낭을 메고 나섰어. 약을 죄다 꾸려 나갔지. 어디 가서 죽을까, 적당한 곳을 찾는데 말이야. 거 참, 사람 일이 참 희한하지. 죽으러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이 어찌 그리 친절할까. 웃고 인사하고 뭔가를 나눠주는데 그게 참 따뜻해. 허, 이거 살 만한 세상인가 싶더라고. 종일 헤매다 도로 들어갔지.
    ― 그렇죠. 보질 않아서 그렇지 세상 어딘가엔 늘 따뜻한 구석이 있어요.
    ― 좀 더 살아 봐야 하나 고민하다 자취방에 도착했어. 근데 안이 우당탕 쿵쾅 난리인 거야.
    당시의 광경이 떠올랐는지 이재만이 큰 소리로 웃다 말을 이었다.
    ― 친구 놈들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더라고. 재만이 잘 보고 있으랬더니 누가 혼자 뒀냐. 순번이 누구냐. 너 이놈 새끼, 너 때문에 재만이 놈 죽으러 갔다, 너도 죽어라, 이놈아. 나를 놓쳤다고 싸움박질을 대차게 하고 있는 거야. 방문을 열었더니 나를 돌아보는데, 어이구, 한 놈은 코가 터지고 한 놈은 이빨이 깨지고 난리도 아니야. 살겠다고 했지. 내가 열심히 살아 보겠다고.
    ― 잘하셨네요. 그런데 그게, 각오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당장 돈도 없고.
    ― 물난리에 미장원이 망한 여자. 그 여자가 있었지.
    ― 선생님 작업할 때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갔다던?
    ― 그 여자가 와서 내 앞에 오백만 원을 턱 내놓아. 그러고는 이러더라고. 재만 씨. 미장원 망하고 내게 남은 건 이게 다예요. 그런데요, 이걸로 우리 한번 살아 볼까요.
    ― 아니, 무슨 때 아닌 로맨스가 튀어나와요?
    ― 사람 사는 게 참 웃기지. 그 여자랑 오백에 삼십만 원짜리 방을 얻고, 친구들이 가구며 살림살이를 축하선물로 내주고, 옥 같은 아들을 낳고. 그랬더니.
    ― 그랬더니?
    ― 주문이 들어오는 거야. 화각 작품 주문이. 그것도 물밀 듯이.

 

*

 

 

    ― 이제 무얼 하고 싶으세요?
    2018년으로 돌아온 윤이 물었다. 쓸쓸한 기분이었다. 소년 이재만의 등을 쓸어 주는 이재만의 어머니.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이재만을 끌어안고 우는 친구의 부러진 치아. 품팔이를 해 사온 소뿔을 어둑한 곳에서 내내 갈고 있었을 웅크린 몸 같은 것들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작업실 안에 놓인 작품들은 미완성인데도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이 어여쁜 것 안에 스며든 지난날이 윤은 내심 아팠다.
    ― 작품.
    ― 네?
    ― 작품을 만들고 싶어.
    ― 지금껏 내내 하셨잖아요?
    ―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정말 나밖에 만들 수 없는 대표작을 만들고 싶어. 크고 웅장하고, 정교하고 섬세하고, 완벽한 작품을.
    ― 이젠 정말 하실 수 있겠네요. 선생님은 무려 무형문화재 화각기능장이시고, 날품팔이로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 시절도 아니고, 아드님이 이수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옛날하곤 많은 것이 달라졌잖아요. 선생님을 구속하는 것도,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없고요.
    ― 무형문화재라. 그 이름의 의미를 아나?
    ― 그럼요. 한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굉장한 직책이잖아요.
    ― 처음에는 나도 드디어 인정받았다고, 내가 바로 문화재인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이름 뒤에는 너무 많은 증빙서류, 너무 많은 행정 과정, 너무 많은 요구사항들이 있지. 우리 활동 영역을 넓혀 가는 형태의 지원이 아니라 제도적 조건 하에 끼워 넣기 급급하거든. 혼자 죽어라고 한 분야만 파서 경지에 이른 건데, 그런 사람들한테 수없이 많은 서류를 요구해. 작품 창작에 방해가 될 정도로 말이야.
    윤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인터뷰하는 중간 중간 이재만은 수차례 전화를 받았다. 작업일지니 예산집행서류니 제자양성비니 하는 생소한 단어들이 오갔다. 하지만 말이야. 이재만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 이런 얘기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아. 방송촬영? 수시로 하지. 그런데 거기엔 사람의 영역이 제외되어 있어. 일시적이거나, 한 방향으로만 몰리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소비 형태가 현대 사회와의 격차를 더 벌리고 있는 거지. 장인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에 대해서는, 아마 자네도 쓰지 않을 거야.
    그랬다. 윤은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전통기물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현대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행정지시를 거듭하는 모순에 대해서. 고령의 장인들이 현대행정요소를 혼자서 수행하려 고군분투하는 데서 느끼는 고독감과 모멸감에 대해서. 전통을 지켜 나가는 사람들에게 무형문화재라는 이름을 준 뒤 왜 현대에 맞추어 살아가지 못하느냐고 호통 치는 현 세대에 대해서. 윤은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것은 너무 고독하고 쓸쓸하니까. 소년 이재만이 느꼈던 과거의 고난만큼이나 시리고 아픈 기록이니까.
    ― 이만큼 나이가 드니까 말이야. 작품을 만드는 것 외에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이상하지. 작품에 대한 열망은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더 크고 간절해.
    ― 응원할게요, 선생님.
    진심이었다. 윤은 진심이 얼마나 무거운 단어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화각에 대한 이재만의 진심이나 이재만을 대했던 지인들의 진심, 함께 삶을 이겨내 보자던 미장원 여자의 진심과 뉴욕에서 전화를 걸어온 소장자의 진심. 어릴 때부터 지켜보던 아버지의 뒤를 묵묵히 이어 나가는 아들의 진심.
    모든 것이 진심이었다. 적어도 그는 진심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 언제가 됐든, 저는 화각을 배우고 싶어요.
    이 모든 사연을 품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각은 너무나 어여쁘니까요.
    윤은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렌즈 덮개를 집었다. 첫 만남 때부터 윤은 자신의 보급형 DSLR을 부끄러워하던 참이었다. 그것은 화각의 무엇도 잡아내지 못했다. 화각장 이재만의 어떤 깊이도 포착해 내지 못했다. 그런 거라고, 윤은 생각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것이 늘 이 세상에 깃들어 있노라고. 죽음을 각오한 다음에야 이재만이 목격했던 세상의 따뜻한 구석처럼 어느 곳에든 빛나고 소중하고 어여쁜 무언가가 살아 있다고. 그것을 포착해 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서툴게 카메라와 녹음기를 챙기는 윤을 이재만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아주 오랫동안 반복해 온,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기다림이었다. ■

 

 

 


  . 인터뷰 일시 : 1차-2018년 2월 25일
                         2차-2018년 3월 27일
  . 인터뷰 장소 : 1차-인천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2차-이재만 화각장 공방
  . 이 글은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전면 재구성되었습니다.
  . 이재만 화각장은 하대를 하지 않으십니다.
  . 윤은 뉴욕 경매시장에서 책정된 화각장 가격을 알고 있습니다(웃음).



 

 

 

 

 

 

 

 

 

 

 

 

 

 

작가소개 / 안보윤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소년 7의 고백』, 중편소설 『알마의 숲』,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이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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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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