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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모임-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6

  • 작성일 2018-07-01
  • 조회수 1,443

[기획 - 문장웹진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6 :

한국 문학장 내에서 작가로 탄생하기, 작가로 살아가기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


 

 

 

김주선 : 여섯 번째 《문장 웹진》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장강명 작가의 『당선, 합격, 계급』(민음사, 2018)이라는 다소 의미심장한 제목의 르포입니다. 부제가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인데, 도발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책의 전체적인 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이다희 : 저는 카더라로만 들었던 이야기들을 보고서 형태로 보게 되니까 좋았어요. 책의 문제의식이 도발적인데 책의 결말보다는 그 결말을 도출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는 것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김영삼 : 이 책의 첫 인상은 “문과 예의 영역에도 권력이 깃들어 있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과 예의 영역은 줄 세울 수 있는 영역, 그러니까 누가 잘하느냐 못 하느냐를 겨루는 영역이 아니라 다양성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 판단되었던 영역인 것 같은데 이제는 공부하듯이 노력해서 발전, 증진, 계발이 필요한 영역으로 변질된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또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생각해 봤는데요. 많은 청년들이 내 것을 뺏기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가령 누군가가 합격이 되거나 당선이 됐을 때 “쟤는 내가 없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쟤는 계급이 올라갔다(배 아프다)” 이런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현상은 궁핍한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게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송민우 : 저는 이 책 자체가 굉장히 꼼꼼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자료적 가치가 뛰어난 책이라고 할까요. 확실히 기자 생활을 오래 한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또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서 등단하는 것과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구조적으로는 똑같다는 것을 새삼 환기하게 만든 책이었어요.
    읽고 나서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요. 제도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없앨 수는 없고, 그럼 어떻게 해야 등단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을지가 궁금했어요. 책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으니까요.

 

김주선 : 다른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다뤄지지 않죠. 여기에 대해서는 또 다른 품을 들여야 할 것 같네요.

 

이서영 : 이렇게 세심한 정리들이 저에게는 매우 고마웠어요. 여러모로 힘을 실어 주었던 책인 것 같아요. 종종 어디로 뛰어가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삶의 방향성이 흐릿해질 때가 있는데,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선명한 현장을 보면서 흐트러진 것들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영삼 : 김주선 평론가는 어땠어요?

 

김주선 : 저도 다른 분들과 비슷한 생각이에요. 예비 작가들이 궁금해 하는 바에 관해 철저하게 파주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장강명 작가가 최대한의 객관성을 견지하며 글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객관적으로 잘 파헤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장강명 작가가 이 글을 썼을 때 어쩔 수 없는 본인의 지평이나 기준 속에서 글을 썼을 텐데, 이 작가만큼 취재를 했다거나 이 작가만큼 잘 알고 있는 업계의 사람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지평이나 기준에서는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했어요. 잘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일단 받아들여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그럼 이제 책의 순서에 맞춰서 문학상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여기에서 어떤 부분이 흥미로웠나요?

 

송민우 : 저는 세 가지 정도가 흥미로웠는데요.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의 한계를 짚는 부분부터 이야기해 볼게요.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심사하는 사람이 문단문학의 권위 있는 심사위원인데요. 궁금한 게, 판타지 문학 쪽에서는 실력 있는 심사위원이 없었다는 것인지, 있었는데 문단문학의 사람들이 그 영역까지 들어갔다는 것일까요. 팩트 확인을 하고 싶었어요. 두 번째는 장르문학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애독자들이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에 관해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장르문학 하시는 분들이 웹상에서 이야기할 때 문단문학 하는 사람이 장르문학을 취급해 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요. 그런 말들이 생각보다 근거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좋은 문학의 부재가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장편 문학상 받은 사람들의 행로를 알려주는 도표가 재밌었어요. 그 도표를 보니까 잘나가는 문학상과 그렇지 못한 문학상이 보이더라고요. 그렇지만 이 많은 장편 공모를 보니까 출판사나 신문사에서 좋은 작가를 발굴하려는 의지가 컸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어요.

 

김주선 : 그게 장강명 작가가 문예 운동이라고 말하는 거죠?

 

송민우 : 네.

 

김영삼 : 저는 이런 질문이 떠올랐어요.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점을 명확히 가르는 기준을 잡기란 어렵지만, 어쨌든 문단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삶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치밀한 고민과 철학적 사유가 바탕이 되는 작품이고, 장르문학은 해당 장르의 전문적이고 마니악한 요소들과 재미를 극대화한 작품이라는 인식 정도가 그 구별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구분이 정당한가, 또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아요. 제가 좋아하는 몇몇 작가들은 장르문학을 쓰는 작가로 분류되지만 인간에 대한 모색이 치밀하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거든요. 이를테면 정유정 작가나 배명훈 작가요. 특히 배명훈 작가는 문단문학에서 이야기하는 것 못지않게 뛰어난 소설을 썼는데요. 그렇다면 도대체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르는 정확한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김주선 : 그렇다면 장르문학적 소설이 문단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 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김영삼 : 복잡한데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문단문학의 출발점이라고 가정해 보죠. 그리고 장르문학은 대부분 문학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고요. 이 둘은 애초에 출발점이 다른 거죠. 핵심은 한국 사회의 특수성인데요. 일제강점기, 전쟁, 이데올로기 대립, 민중문학 담론이라는 무거운 것들이 우리 삶의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잖아요. 때문에 당시의 장르문학이라고 하는 게 무협지 정도로 쪼그라들었던 것 같은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이제 문과 예가 ‘술’이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마치 입사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준비하고 기예를 닦아서 도달하는 기술의 영역이 강해졌다는 거죠. 그렇다면 애초에 문단문학의 출발점에서 벗어나고 있는 거잖아요. 제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때 과거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치밀한 사유의 깊이보다는 형식적 놀이나 글쓰기의 기예가 더 느껴져요. 애초의 DNA가 사라진 거죠. 장르문학의 경우에는 거꾸로 사유가 깊어지기도 해요. 제 생각은 그래요.

 

김주선 : 형식적 놀이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김영삼 : 이렇게 하면 좀 새롭게 읽히겠지? 이런 차원이요. 김현의 말을 따르자면 형식과 내용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형식화된 내용이 있는 건데 기술적 측면으로만 접근해서 계산을 하고 형식을 만드는 거죠. 심사하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바라는 차원에서만, 그러니까 순전히 좋은 평가를 위해서만. 여기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형식적 도전은 없잖아요.

 

김주선 : 미문도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김영삼 : 문제라는 낱말을 쓰면 제 가치판단이 뭔가 이상하고요. 이걸 옳고 그름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장르가 갖는 특징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특징이 예전과 같이 뚜렷하게 분리되지는 않는 것 같다는 거죠.

 

이서영 : 저는 미문이라든가 형식에 대한 실험들이 계속 나오는 것에 관해선 우호적인데요. 어떤 판이 수용해 내는 실험의 가짓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결국 그 판의 생태가 건강하고도 왕성하게 살아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중에는 그 판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 땅과 장소 자체가 이미 굳건해져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 살아남은 것이 그때의 문학이고, 지금 살아남은 것이 지금의 문학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인지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를 수 있는 기준을 견고히 한다거나, DNA라고 하는 명명은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송민우 : 지금은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으로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때인 것 같아요. 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에 비해서 한국 문단이 더 보수적이지 않은가 싶어요. 예전에 최제훈 작가가 등장했을 때 작품의 장르적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소위 순문학성과 장르문학성을 동시에 가진 작가로서 고평했거든요.

 

김주선 : 방금 말씀하신 부분에 관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요? 최제훈 작가의 작품이 그렇게 평가받은 이유는 문단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문단문학을 장르문학보다 더 우위에 놓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니까 거꾸로 말해 소위 장르문학계에서 보면 여러 특징을 잘 갖춘 좋은 작가가 이쪽에서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잖아요. 최제훈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든지요.

 

송민우 : 맞아요. 그리고 제 기억에 문학동네에서 만든 젊은 작가상 초기에 소위 장르문학으로 분류된 작품이 후보작으로 선정된 적이 있는데요. 평가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장르문학도 문단문학으로 끌고 간다는 식의 느낌을 받았어요. 만약 문단문학과 장르문학 쪽 모두를 잘 알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봤다면 좀 웃기는 일이었을 것 같아요. 지금은 경계가 좀 더 흐릿해진 것 같지만 문학동네 얘기도 불과 7, 8년 전 얘기예요.

 

김주선 : 권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요?

 

김영삼 : 저는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싶어요. 이것은 권력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고수하려는 예술적인 벽이 있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고요. 일단 비판적으로 보자면, 과거에는 문단문학이 장악했던 장이 넓었어요. 그들이 주도적이었고, 그럴만한 시대적 필요성이 있었고, 사람들이 모두 인정했죠. 80년대까지 창비와 문지라고 하는 두 잡지에서 생산했던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필요했던 양 날개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 문단문학이라고 하는 장이 넓지 않아요. 주도적이지도 않고요. 소비되는 양상만 봐도 그들이 다수는 아니에요. 주류일 수는 있겠지만요. 그런 점에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문단문학에는 빈약함이 있어요. 때문에 이것을 편집위원이나 출판계의 권력의 차원에서 봐야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고요. 단토의 말을 빗대서 어떤 거대한 문학장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권력이 갖는 부정적인 함의를 떠나서 이 문학장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빈약한 문단이 주류로서 외친다면 그건 권력이 되겠죠.

 

이다희 : 문단 권력 얘기 하는데 따지고 보면 권력이 없는 곳이 없잖아요. 가족이나 연인 간에도 발생하는 게 권력이고요. 그런 게 다 좋지만 권력을 무조건 없애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서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에요.

 

김주선 : 말씀하신 차원만 가지고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그에 대해서는 더 깊게 들어가진 않겠습니다. 이제 문학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문학상이라는 게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검증된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모셔서 문단문학의 파이를 더 키우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다희 : 파이를 키운다는 게 뭔가 참 무력하게 느껴지네요. (웃음)

 

김주선 : 네. 어쨌든 문학상에 관해서. (웃음)

 

이다희 : 문학상은 자신만의 문학성을 따지게 되잖아요. 그에 맞는 작가를 뽑고요. 그런데 장강명 작가의 책을 읽으면 문학상의 문학성이 아니라 물적 토대로 보게 만들잖아요. 저는 그냥 단순히 잘 쓰면 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특이했던 건 대기업 이야기 하면서 예전에는 각 회사에 맞는 사람들이 뽑혔다면 이제는 이쪽에 뽑히는 사람이 저쪽에서 뽑힌다고 하는 부분이에요. 이게 문학상에서도 똑같잖아요. 문학상의 개성이 사라지고 문학상이 흔들려 가는 사태요. 또 대표님들의 이야기가 재밌었어요. (웃음)

 

이서영 : 저도 대표님들 인터뷰가 재밌었어요. 작가가 잘살게 해주고 싶었다는 말씀이 너무 명쾌했어요. (웃음) 결국엔 좋은 것들을 힘내서 좋게 해보자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좀 차분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들에 작용하고 있는 힘의 원리를 의식하게 되는데요. 그런 본인의 의식 속에 본인이 휘말려버리면 정작 하고 싶은 걸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열심히, 힘 있게 스스로를 믿고 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김주선 : 그런데 주류가 분명히 존재하고, 같은 사람이 여러 문학상의 심사를 보고 있다면 여기서 취향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그냥 열심히 쓰기만 하면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자는 말로 수렴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서영 : 이게 정말 막연한 말이지만요. 각종 취향과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지점도 있는 것 같아요. 정말로 좋은 것은 오히려 체제를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송민우 : 습작생 시절에는 자기 작품의 퀄리티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심사 과정의 불공정함의 문제로 보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권력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지만요.

 

이다희 : 불안하니까.

 

송민우 : 습작생 시절의 그러한 불안함과 그 불안함에서 비롯된 말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해요. 저도 습작생 시절에 심사과정의 불공정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었고요.

 

김주선 : 조앤 K. 롤링의 경우에는 열두 군데에서 거절당했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까요? 이 작품 역시 결국에는 될 작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나마 이렇게 되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요?

 

송민우 : 결과론적인 얘기인 것 같아요. 제 취지는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출판사의 편집진이나 심사위원을 해본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의심은 들어요. 과연 해리포터의 처음 판본과 열두 번째 보낸 판본이 같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고쳤을 것 같아요. 그리고 열두 번째 판본이 출간된 거죠.

 

이다희 : 여기서 거절된 이유로 해리포터의 긴 이야기가 트렌디하지 않음을 꼽잖아요. 그래서 거절당하다가 아동문학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편집자가 순전히 재밌어서 출간을 한 케이스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해리포터의 강점으로 꼽히는 지점이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거죠.

 

김영삼 : 문학상은 공채처럼 등수를 세우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호불호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시장에서는 이 작품이 읽히고 어떤 시장에서는 저 작품이 읽힐 거잖아요. 그러니까 문학상은 자신의 취지에 맞는 작품을 계속 뽑으면 될 것 같아요. 그런 점에 있어서 출판사가 보여주는 모습도 이해가 돼요. 출판사는 일종의 패트런이에요. 작가를 키우는 거죠. 잘 되든 안 되든. 반면 그들을 키우려면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어야죠. 상업적인 게 필요할 수밖에 없어요. 덧붙이자면, 저는 심사위원들에게도 좋은 시선을 보내고 싶어요. 그들이 수용의 다양성을 존중할 정도의 지성과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좋은 작품이 왜 좋은지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또 그들의 취향이라는 것도 사실 이 시대의 요구와 독법을 반영한 결과물일 것이라는 믿음 또한 있어요.

 

김주선 : 혹시라도 진짜 잘 쓰인 작품인데 시대와 안 맞아서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김영삼 : 그래서 새로운 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기존의 심사위원이 권력을 발휘하니까 없애자! 이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알고 보니 우리가 뽑지 않은 이가 1등이었어! 이런 게 아니라 이 친구도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는데 우리의 눈에 띄지 않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를 위한 시장을 형성해 주는 게 새로운 문예 운동이죠. 장강명 작가 식으로 말하자면요.

 

송민우 : 보통의 심사 공모전을 보면 한 명만 뽑잖아요. 1등을 뽑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1등을 뽑는다는 식의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같아요. 당선자가 없는 경우도 있고요. 당연히 많은 습작생들이 여기서 깊은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당선이 안 된 경우라도 최종심에 올라간 작품을 지면에 공개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독자 입장에서도 읽으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가령 독립영화제 같은 경우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다 상영을 하는데 그런 시스템을 가져오면 어떨까 싶어요. 지금 문단의 자본과 시스템이라면 못 할 것도 없는 듯해요. 혹시라도 그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전문가의 눈에 들 수도 있고.

 

이다희 : 말씀대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영삼 : 신인 드래프트네요. (웃음)

 

이서영 : 스카우트 좋아요. (웃음)

 

 

김주선 : 이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볼게요. 왜 책을 읽지 않는가. 왜 간판이 중요한가에 관해서요.

 

송민우 : 저는 일단 독자 수가 압도적으로 적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고 싶어요. 이제는 누구나 다 알겠지만 영화하고만 비교해도 큰 차이가 있잖아요.

 

김영삼 : 질문을 뒤집어서 왜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물음을 던지고 싶어요. 예전에도 많이 읽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리고 사실 지금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건 아니거든요. 많이 읽는데 단지 문단문학을 읽지 않을 뿐이죠.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왜 웹툰이나 영화는 많이 보는데 책을 읽지 않는 거지? 라는 의문을 던지는데 여기에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배타적인 우월감이 깔려 있어요. 우리는 이 의식을 버려야 해요. 저는 과감하게 어떤 상품(책)을 어떻게 생산하고 유통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영화가 커질 수 있었던 이유에는 대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봐요. 대작이 있으니까 사람이 몰리는 거죠. 출판사에서도 스타를 키워야 해요. 그래야 사람이 몰려요. 사람이 몰리면 자본이 몰리고 그 돈으로 자본의 논리에 취약한 작가들도 계속 키우는 거죠.

 

김주선 : 출판사에서 이미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영삼 :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더 재밌는 책, 더 대중적인 책을 팔아야 해요. 이런 건 우리와 맞지 않다고 말하지 말고 자본을 더 모아야 해요. 그래야 한국 문학이 커지고 더 많은 작가를 키울 수 있죠.

 

송민우 : 저는 서평에 관해서도 말하고 싶어요. 장강명 작가가 정직한 비평을 할 수 없는 문화의 문제를 지적했는데요. 저도 등단 전에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도 막상 그런 글을 쓰려고 했을 때 고려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글이 제 의도와는 다르게 나가더라고요. 저도 솔직하지 못한 거죠. 자연스럽게 영화계와 또 비교가 되는데요. 영화 비평가들은 자유롭게 쓰잖아요. 한국 문학계에서는 그런 글을 잘 못 본 것 같아요. 계간 《문학과사회》에서 진행했던 리뷰vs리뷰 코너도 이제 안 하는 것 같고요.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설득력의 문제도 있겠지만 속 시원한 글이 많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김영삼 : 구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해요. 비평에서 좋고 안 좋고의 기준이 모호하잖아요. 작품이 안 좋다면, 작가가 추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는 말은 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이상은 어려운 것 같아요. 의도적 주례사 비평은 빠져야겠지만.

 

이다희 : 네, 동의해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평론을 볼 때 솔직함보다는 설득력을 보게 되거든요. 서평은 서평 하는 사람의 인지도가 중요하잖아요. 어떤 책이 좋은지 모르는 독자의 입장에서 누가 좋다고 말하는가는 좋은 참조점이죠. 

 

김영삼 : 어쩔 수 없는 시장 논리인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책에 좋은 추천사를 쓸 수도 있고, 안 좋은 책에 좋은 추천사를 쓸 수도 있겠지만 몇몇 안 좋은 책 때문에 좋은 서평을 없애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이다희 : 결국 문학은 혼자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나 혼자 문학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나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면, 결국 타인을 찾을 수밖에 없거든요.

 

김영삼 :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 같네요. 1. 영향이 존재한다. 2. 문학은 혼자 할 수 없다. 3. 시장의 논리인 걸 어떡하느냐. 4. 서평도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김주선 : 서평 문화가 많아지면 책을 더 많이 읽을 것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영삼 : 그 인과 관계를 오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서평이 많으면 책을 알게 되는 경로가 더 많으니까 책을 더 많이 읽게 될 수는 있는 것 같은데, 서평이 없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반대가 맞는 것 같아요. 책을 읽는 사람이 점차 사라지니까 서평이 없어지는 거죠.

 

 

김주선 : 어떻게 해야 독자를 늘릴 수 있을까요.

 

김영삼 : 스타가 필요합니다. (웃음)

 

송민우 : 한국 문단이랑 한국 힙합계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유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든 한국 힙합 크루에는 팬덤이 있는데 한국 문단에는 동인에 대한 팬덤이 없잖아요. 결국 한국 문단이 핫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오는 것 같아요. 내용이나 철학적 사유를 말하기 전에 우선 여기서 놀고 싶다는 요소를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설리가 박상수 시인의 시집을 들고 있는 사진이 찍혔는데 그 뒤로 그 시집이 많이 팔린 걸로 알고 있거든요. 물론 시인 본인은 싫을 수 있지만. 어쨌든 많이 팔리면 결국에는 작가에게 좋을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고요.

 

김영삼 : 아이돌이 필요하겠다. (웃음)

 

이다희 : 출판사에서 아이돌 조공을 해야겠네요. (웃음) 근데 아이돌이 갖는 파급력을 기대해야 하니까 작가의 역량 자체가 돋보이는 다른 좋은 방법이 생기면 좋겠네요.

 

송민우 : 저는 문화산업 측면에서 문학 공모전도 언젠가는 프로듀스 101처럼 바뀔 것이라 생각해요.

 

김영삼 : 감성 반 언어 반. (웃음)

 

이서영 :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반에 직접 들어가고. (웃음)

 

이다희 : 어떤 사람은 진정성 폭발. (웃음) 갑자기 진지해져 보자면, 프로듀스 보면서 막 괴롭기도 했거든요. 한국 연예계에 진짜 좋은 인력이 많구나 싶으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상품 취급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뭔가 처음에는 신선하다가 중간 중간 되게 괴로웠어요.

 

김주선 : 지금 이야기가 마케팅이 얼마나 중요한가로 흘렀는데요.

 

김영삼 : 끝날 때가 됐다는 얘기죠.

 

(일동 웃음)

 

김주선 : 마케팅에 신경 쓰느라 오히려 좋은 문학이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당연한 우려를 하면서, 마케팅도 중요하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참여자 소개 / 김주선

전남 화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평론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강사

 

참여자 소개 / 김영삼

전남대학교 국문과 강사

 

참여자 소개 / 송민우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참여자 소개 / 이다희

대전 출생. 광주 거주.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참여자 소개 / 이서영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문장웹진 2018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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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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