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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인문학 ― 자연계 능력자들과 '아르케'

  • 작성일 2018-09-05
  • 조회수 1,559

[기획-원피스인문학]

 

 

"악을 용납하지 마라" "사랑해 줘서 고마워"

― 자연계 능력자들과 '아르케'

 

 

권혁웅

 

 

 

    1
    악마의 열매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루피' 편에서 말한 바 있다. 이 중에서 최강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단연 자연계 열매다. 해군본부 대장들, 사황1)인 흰수염과 검은수염, 신이라 자처한 에넬 등 이 열매를 먹은 자들은 원피스 세계에서 극강의 능력을 발휘한다. 무력이 곧 권력인 원피스 세계에서 자연계 열매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이 되는 질료(質料)를 제 맘대로 하는 능력, 곧 자연 그 자체의 근원적인 힘을 운용하는 능력이므로 최강의 능력이다.
    자연의 근원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여기 머그잔이 있다고 하자. 이 잔을 이루는 재료(질료)는 흙이며, 이것은 손잡이가 달린 컵이라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사물은 늘 이 두 가지(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다. 이 둘이 분화되기 전의 상태, 곧 형상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원질(原質)을 아르케(archē)라고 부른다. 아르케는 만물을 이루는 근원적인 바탕이다. 세계의 창세 신화들도 세상이 무에서 생겨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세상을 이루는 근원인 아르케가 선재(先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질료에도 독자성을 부여하는 신화의 논리에 따라 아르케는 대개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중국 신화의 반고(盤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티아마트(Tiamat), 「장자」에 나오는 혼돈(混沌), 스칸디나비아신화의 이미르(Ymir) 등2)은 태초의 거인인데, 신화는 이들이 죽고 난 후에 그 시체에서 현재의 세상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따라서 아르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자 물질이고 영혼이자 육체다. 창조는 일종의 분리작용이다. 미분화된 태초의 하나를 구별하여 큰 빛(해)과 작은 빛(달)과 더 작은 빛(별들)을, 하늘과 땅을, 몸과 몸에 깃드는 것을, 사물과 식물과 동물을, 유한자와 무한자를 구별하는 능력이 창조이기 때문이다. 아르케는 이 창조(=분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재료인 셈이다. 아르케를 통해서 몇몇 자연계 악마의 열매 능력자들을 살펴보자.

  1)  신세계를 나누어 지배하는 강대한 네 해적을 말한다. 사황(四皇)은 흰수염 에드워드 뉴게이트, 카이도, 빅맘, 빨간머리 샹크스의 넷이며, 흰수염이 죽은 후에는 검은수염 마샬 D 티치가 흰수염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황 가운데 흰수염과 검은수염만이 자연계 열매 능력자다. 하지만 좀 더 폭을 넓혀 생각할 수도 있다. 카이도는 백수(百獸)의 왕이자 최강의 생물이라 불린다. 소울소울 열매 능력자인 빅맘은 어렸을 때부터 손짓 한 번으로 곰을 때려죽일 정도의 힘을 가졌다. 카이도는 생명체가 가진 근원적인 공격성을 체현하는 인물로 약육강식의 정점에 있으며, 빅맘은 생명 그 자체를 지배하는 인물로 수명과 영혼을 관장한다. 빅맘의 식탐은 유명한데, 그것은 식욕으로 상징되는 모든 생명 유지의 욕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카이도와 빅맘 역시 자연계 열매가 상징하는 자연의 근원적인 힘, 그 중에서도 생명의 힘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빨간머리 샹크스의 능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열매의 능력 없이 자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데,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사황 중에서 제일 약체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2)  권혁웅,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문학동네, 2010) 12장에서 이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한 바 있다. 이 중에서도 티아마트는 바다를 상징하는 여신인데, 『창세기』에 나오는 창세 이전부터 있었던 '깊은 물'(트홈)의 어원이다. 이 깊은 물도 창조 이전의 원질, 곧 아르케다.

 

    2
    고대에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이들은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고 노력했다. 이런 철학을 자연철학이라 부른다. 자연철학의 저 질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품고 있다. ①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요소 내지 질료에 대한 질문이다. ② 세계를 운영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아르케에는 '원리, 근원'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이 질문은 세계 운영의 원리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③ 변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는 무수한 변화를 품고 있다. 이 변화 속에서 (변화를 야기하는) 변치 않는 것, 곧 불변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최초의 원인에 대한 질문이다.3) ④ 본질이란 무엇인가? 무수한 변화들은 우리에게 현상(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현상들의 저변에 있는 불변하는 것을 본질이라고 한다면, 이 질문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⑤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수한 현상들 가운데 참과 거짓을 판단해야만 한다. 아르케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은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가를 묻는 일이 된다. 결국 만물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올바로 대처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연과학, 역학, 인식론, 인간학, 윤리학 등이 망라된 질문이며, 아르케가 그렇듯 인간의 지적 체계가 분화되기 이전의 총체적인 앎에 대한 질문인 셈이다.
    최초의 자연 철학자인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주장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아르케의 네 가지 후보, 이른바 사원소(四元素: 물, 불, 흙, 공기)4) 중에서 물이 그것들의 근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3)  이것이 훗날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인 작용인(作用因, causa efficiens)으로 발전한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변화를 야기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앞의 머그잔을 예로 든다면, 그 잔을 빚어낸 도공의 손길이 작용인이다. 나머지 셋은 (앞에서 든) 형상인(形象因, causa formalis)과 질료인(質料因, causa matealis), 그리고 목적인(目的因, causa finalis)이다. 머그잔은 음료를 마시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목적인이다. 모든 사물에 목적인과 작용인이 있다는 생각은 후에 신의 존재를 역설하는 수많은 증명의 근거가 된다.
  4)  사원소에 대응하는 동양의 원소는 다섯 가지―오행(五行) 곧 불, 물, 나무, 쇠, 흙―이다.

 

    최초로 철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오직 질료의 형태를 가진 것들만이 모든 것의 원리들이라고 생각했다. 있는 것들 모두의 구성요소이고 그것들이 생겨날 때는 그 첫 출처가 되고 소멸할 때는 마지막 귀환처가 되는 것, ― 실체는 그 밑에 남아 있지만 그 양태들은 변화한다 ― 바로 그런 것을 일컬어 그들은 있는 것들의 요소이자 원리라고 말한다. (중략) 그런 철학의 시조(始祖) 탈레스는 물이 그런 원리라고 천명했다(이런 이유에서 그는 땅도 물 위에 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는 모든 것의 양분 속에는 습기가 있고 열기조차도 그것으로부터 생겨나고 또 그것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을 보고서 그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생성이 유래하는 출처, 이것이 모든 것의 원리다). 이런 이유 이외에 모든 것의 씨앗은 본성상 습기를 포함하고 물은 습기 있는 것들이 가진 본성의 원리라는 사실도 그가 그런 관념을 취하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5)

  5)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조대호 옮김, 도서출판 길, 2017, 42-43쪽. 탈레스의 저작은 전해지지 않으며, 다른 이의 글을 통해서만 단편들이 전해져 온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조각 글들이 집성되어 있다.

 

    이 글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아르케를 '질료'로서만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땅이 물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은 당시의 지중해 세계에서는 일반적인 관념이었다. 다도해 지역의 풍광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이다. 바다 위로 점점이 솟아오른 섬은 물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물은 얼면 고체가 되고 가열하면 기체가 된다. 탈레스는 이런 가변성 때문에 물을 다른 원소들의 근원으로 여겼을 것이다. 얼음은 흙처럼 단단하고 공기(바람)처럼 형체가 없으며 불처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대에는 얼음이 더 단단해지면 흙이 된다고 여겼다). 탈레스의 추론 덕분에, 사람들은 변화하는 것 가운데 변치 않는 것(불변적인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생물의 영역으로 시선을 좁히면 탈레스의 말은 지금도 진리로 간주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바다에서 탄생했으며, 지금도 탄생과 생존을 위해서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한정한다면 탈레스의 말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양수(羊水)는 모든 인간의 근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여기에 의문을 품었다. 네 가지 원소 가운데 물이 근원이라면 불이나 공기, 흙은 왜 아르케가 될 수 없는가? 물이 다른 것으로 변형될 수 있다면, 이것은 결국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모든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낙시만드로스는 이것을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불렀다. 아페이론은 '무규정자(無規定者)' 혹은 '무한정자(無限定者)'라고 번역된다.

 

    아페이론은 규정되지 않은, 내적 제한을 갖지 않는, 분화되지 않은 것(indefinitum)으로 간주된다. 무한자는 여러 가지 것들이 혼합되어 있거나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동질적인 것, 형태를 갖지 않는 것, 질이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페이론은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세계의 모든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런 가능성들 가운데 어떤 것도 아직 분화되거나 전개되거나 질료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6)

  6)  콘스탄틴 밤바카스, 『철학의 탄생』, 이재영 옮김, 알마, 2008, 97쪽.

 

    아르케가 미분화된 원질이라면, 세계의 구성요소를 물, 불, 흙, 공기의 넷으로 나눈 것이나 그 가운데 하나(물)를 근원적인 것이라고 본 것은 아르케의 원칙에 위배된다. 어느 쪽이든 이미 분화(分化)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케는 그 넷을 출현시킨 것, 그 넷의 분화 내지 규정을 가능하게 한 것, 그 자체로는 정의(定義)되거나 규정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아페이론은 모든 '규정되지 않음'의 이름, 이름 없음의 이름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의 성질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었는데, 이 모두가 '이름 없음' 곧 부정(否定)의 방식으로 명명된 이름이다. "안-아르콘(an-archon, 기원-없음), 아타나톤(a-thanaton, 죽지-않음), 안-올레트론(an-olethron, 소멸하지-않음), 아-게네톤(a-genethon, 탄생하지 않음),탄아-프타르톤(a-phtharon, 썩지-않음)."7) 사물들은 아페이론에서 생겨나서 변화를 겪다가 소멸하면 다시 아페이론으로 돌아간다. 아낙시만드로스의 통찰은 현대 물리학에서도 계승된다.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물질을 기본입자(elementary particle, 소립자)라고 하는데, 기본입자가 고대 철학의 용어로는 (질료로서의) 아르케가 된다. 물이 다른 세 가지 원소들의 아르케가 아니듯, 현대 물리학에서의 기본입자들 ― 그것이 전자이건, 뮤온이건, 쿼크이건 ― 은 어떤 것도 다른 기본입자들보다 근원적인 것이 아니다.
    세 번째 세대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은 공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기가 차가워지면 물로 응축되고 더 차가워지면 얼음과 흙이 되며, 뜨거워지면 불이 된다고 보았다. 아르케가 되기에 탈레스의 물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물이 다른 세 가지 원소를 매개하는 지위를 갖고 있다면 공기는 다른 세 가지 원소와 아페이론을 매개하는 지위를 갖고 있다.

  7)  같은 책, 98쪽.

 

    기상학의 한 요소 정도에 불과한 지금의 공기와 달리 아낙시메네스의 'aēr'[공기-인용자]는 동북아 사유에서의 기(氣)에 거의 근접하는 개념이라 보면 될 듯하다. 아낙시메네스가 우리의 영혼을 숨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렇게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숨이란 결국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결국 "숨이 멈추는" 것이다.8)

  8)  이정우, 『세계 철학사 1』(개정판), 도서출판 길, 2018, 76쪽.

 

    영혼을 뜻하는 프네우마(pneuma)는 '입김을 불어넣다'라는 뜻의 프네오(pneo)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미풍'이나 '바람'을 뜻한다. 아낙시메네스는 건조한 것과 따뜻한 것은 공기가 묽어져서 생긴 것이고, 축축한 것과 차가운 것은 공기가 짙어져서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영혼이란 공기(들숨과 날숨)의 이동이며, 그런 숨이 인체에 머물면 살아 있는 몸이 될 것이다. 이것이 동양의 기와 비슷한 개념이라는 설명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동양에서 말하는 혼(魂)은 땅에서 온 기[陰氣]이며, 백(魄)은 하늘에서 온 기[陽氣]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땅으로, 백은 하늘로 흩어져 버린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이 외재적인 사유라면(그의 아페이론은 불멸하는 것, 영원한 것이므로 '신적인 것'이다),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는 내재적인 사유라 할 수 있다(그의 공기는 '역학적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이 사물을 설명하는 방법도 내재적이다. 분자는 원자들의 결합과 배열에 따라 다른 성질을 나타내고, 원자는 그 속의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의 숫자에 따라 달라지며, 양성자와 중성자는 그 속의 쿼크의 결합에 따라 달라진다. 구별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도 ― 그것이 분자이든 원자이든 원자핵이든 ― 그 내부의 메커니즘에 따라서 생겨난 것이지, 외적인 원인(이를테면 신)을 갖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아낙시메네스의 사유를 그 원조로 하는 것이다.
    다음 세대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만물은 유전한다)",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만물의 기원은 불이다"라는 주장으로 알려져 있다. 탈레스나 아낙시메네스의 경우에서도 그렇지만, 헤라클레이토스의 '불'도 자연의 질료로서의 불이 아니다. 이 불은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을 상징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흐른다"고 할 때의 그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물'과 '공기'의 흐름이나 유동성이 이번에는 '불'의 변화로 표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로 전해지는 단편들은 역설적인 표현들로 가득 차 있는데,9) 이것들은 세계가 대립물들, 예컨대 철학과 시, 주관과 객관, 보편과 특수, 감각과 관념…… 들의 투쟁과 통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불'은 이런 대립물의 지속적인 투쟁과 통일을 상징하는 아르케라고 할 수 있다. 동일자의 내부에서 대립물을 찾는 것, 혹은 대립자들이 동일자라는 그의 사상은 후에 칸트와 헤겔의 사상으로 계승된다. 모든 것은 정지해 있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와 투쟁의 과정 속에 있는데, 역설적으로 말해서 바로 이 변화와 투쟁만이 불변하는 것이라는 통찰이 변증법의 기본 전제이다.

  9)  예컨대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대립하는 것은 모이고 불화하는 것들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 "차가운 것들은 뜨거워지고 뜨거운 것은 차가워진다." "가장 아름다운 우주(Kosmos)는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더미보다 추하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우리는 같은 강에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있으면서 있지 않다." "움직이면서도 쉰다." "화살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것의 임무는 죽음이다."

 

    3
    원피스로 돌아오자. 이 아르케들은 원피스 세계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물 자체를 이용한 능력자는 원피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의 열매가 바닷물에 닿으면 무력해지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이런 열매는 있었다고 해도 이 세상에 나타난 어느 시점에선가 소멸해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행성 표면의 대부분이 바다인 원피스 지구에서 '물물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행성 전체를 지배하는 터무니없는 능력일 터이니, 이 점에서도 이 능력은 존재하기 어렵다. 다만 물의 변형태, 곧 아르케로서의 물이 아니라 구별된 질료로서의 물이 가진 속성을 이용한 악마의 열매는 있다.
    가장 유명한 이는 삼대장 가운데 하나인 쿠잔('푸른 꿩'이란 뜻의 아오키지란 별명을 갖고 있다)이다. 이외에도 눈눈열매 능력자이자 하피[여자와 새의 잡종]인 모네가 있으나 능력은 쿠잔에게 미치지 못한다. 쿠잔은 해군 삼대장 가운데 하나로 얼음얼음 열매를 먹은 결빙인간이다. 평소에는 바다 표면을 얼려서 얼음길 위를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전투 시에는 접촉한 적을 순식간에 얼려버린다. 밀짚모자 해적단의 주요 전투원들(루피, 조로, 상디, 로빈)을 순식간에 얼음 덩어리로 만들었고, 정상 결전에서는 흰수염 해적단의 대대장 다이아몬드 죠즈를 얼려서 외팔이로 만들기도 했다. 주변의 바다 전체를 얼리거나(흰수염이 일으킨 거대한 쓰나미를 멈춰 세웠다) 섬 전체의 기후를 바꾸기도 한다(한쪽은 결빙지옥, 다른 쪽은 화염지옥인 펑크 해저드의 극단적인 기후는 쿠잔과 사카즈키의 대결의 결과다).
    불의 속성을 가진 악마의 열매 능력자로는 또 다른 삼대장인 사카즈키('붉은 개'란 뜻의 아카이누란 별명을 갖고 있다)가 최강자다. 용암을 다루는 마그마그 열매 능력자인 그는 정상결전에서 해군 가운데 독보적인 활약을 했다. 거대한 용암 덩어리를 유성우처럼 쏟아내는 유성 화산(流星火山)이라는 기술로 흰수염 해적단의 배들을 침몰시키고, 자신의 몸을 마그마로 변화시키는 명구(冥狗)라는 기술로 흰수염의 얼굴 절반을 날렸으며, 용암주먹으로 같은 불 능력자인 에이스를 죽였다. 한편 불주먹[火拳] 에이스는 불꽃을 만드는 이글이글 열매 능력자다. 총알 대신 불꽃을 쏘거나 거대한 불주먹으로 대함대를 일격에 부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으나, 어둠어둠 열매 능력자인 마샬 D 티치에게 패하여 해군에게 넘겨졌으며, 정상 결전 과정에서 아카즈키의 용암 주먹에 몸을 관통당해서 죽는다. 그 외에도 물체를 뜨겁게 달구는 열열 열매(빅맘 해적단의 샬롯 오븐이 이 능력자다), 능력자로 하여금 전신을 연기로 바꾸게 해주는 뭉게뭉게 열매(이 열매는 공기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해군 대령에서 중장으로 진급한 스모커가 이 능력자다) 등이 소개된 바 있다.
    원피스 세계에서는 같은 계열의 악마의 열매라고 해도 그 능력 사이에는 상성관계, 상하관계가 있다. 에이스가 티치에게 패한 것은 티치의 능력이 타인의 모든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며(상성관계), 사카즈키에게 패한 것은 이글이글 열매의 능력이 마그마그 열매의 능력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상하관계). 일대일 대결에서 사카즈키는 맞부닥친 에이스의 주먹을 태워버린다.

 

    "자연계라고 해서 방심하고 있지 않나? 넌 단지 '불', 난 불마저 살라버리는 '마그마'다. 나와 네 놈의 능력은 완전히 상하관계에 있지."(사카즈키가 에이스에게, 58권 573화)

 

    본래의 특성으로 보자면 이 능력의 상하관계는 이해하기 힘들다. 용암은 지구가 생성될 때 중력에 의해 암석들이 뭉치면서 내는 충돌 에너지를 기원으로 한다. 용암은 이때의 충돌로 인해 암석들이 녹은 것으로, 지구 핵의 온도는 현재 기준으로 6000도, 표면에 올라온 용암의 온도는 1000~1100도 정도이다. 게다가 계속 식고 있다. 그런데 에이스가 검은수염과의 대결에서 썼던 기술 이름이 '염제(炎帝)'인데, 염제는 태양의 별칭이기도 하다. 태양은 핵융합 반응으로 열을 내며, 태양 중심의 온도는 1억 5천만 도, 표면 온도는 6000도 정도로 추산된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수준이다.
    물론 에이스의 저 기술이 태양열의 근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그저 불꽃의 모습에서 비롯된 비유적인 명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염제'는 불꽃을 피워서 태양과 같은 구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보고 싶다. 사카즈키의 능력은 '충돌' 에너지를 내는 것인 반면, 에이스의 기술은 '융합' 에너지를 내는 것이다. 사카즈키의 모토는 '철저한 정의'이며, 그는 해적=악 vs 세계정부와 해군=선이라는 분명한 이분법에 따라서 행동한다. 정의를 집행하는 데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흰수염의 부하 거대소용돌이거미 스쿼드를 꼬드겨 흰수염을 찌르게 만든 자도 사카즈키이고, 전쟁의 승패가 분명해진 이후에도 해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자도 사카즈키이다.

 

    "그만! 여기서 그만 싸움을 멈추자구요! 생명이 아까워!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겐…… 귀환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데…… 목적은 이미 이루었음에도 전의가 없는 해적을 뒤쫓으며 멈출 수 있는 전쟁에 욕심을 내고, 지금 치료하면 살 수 있는 병사를 내버려둔 채 지금보다 더 희생자를 늘리다니!"(해군 병사 코비)
    "누구냐, 네 놈은. 몇 초를 허비했군. 올바르지 못한 병사는 해군에 필요 없다."(사카즈키가 코비에게, 59권 580화)

 

    야차와 같은 그 모습은 '정의라는 이름을 가진 악'에 가깝다. 그의 모토는 '철저한 정의'지만, 그것이 정의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세계에서 타자를 분리하고 거기에 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말살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는 철저함, 그것이 사카즈키의 정의다(원피스 세계의 '악'에 관해서는 다음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반면 에이스는 해적왕 골 D 로저의 아들이자, 자애로운 가족 공동체를 꿈꾸었던 흰수염 해적단의 양아들이며, 미래의 해적왕 루피와 혁명군 총참모장인 사보의 의형제다. 그는 '지배하지 않는 자유'를 추구하는 해적왕, 불의한 체제의 타파를 목표로 하는 혁명군, 차별 없는 공동체인 흰수염 일가의 일원이다. 에이스가 꿈꾸는 세상은 사카즈키의 이상과는 정반대였다. 사카즈키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이 '충돌'(무력에 의한 제압)이었다면 에이스의 이상을 요약하는 말은 '융합'(더불어 사는 공동체)이었다. 그가 흰수염 해적단을 떠나 홀로 세계를 떠돈 것은 같은 동료를 살해하고 열매를 탈취한 검은수염을 잡아가기 위한 것이었으며, 정상 결전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마다한 것은 사카즈키가 흰수염의 이상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사카즈키는 에이스를 죽인 후에도 외친다. "해적이라는 악을 용납하지 마라!"(579화) 반면 에이스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전한다.

 

    "루피,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네가 나중에 모두에게 전해 줘. 아버지 그리고 루피, 모두들! 오늘까지 이렇게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를, 악귀의 피를 이어받은 나를…… 사랑 해줘서 고마워."(에이스가 루피에게, 59권 574화)

 

    이렇게 에이스는 원피스 무대에서 퇴장하지만, 그의 능력은 형제인 사보에게 이어진다. 사카즈키가 분쟁과 충돌로 최강 전력인 쿠잔을 잃은 것과는 대조되는 행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융합하는 불이 충돌하는 불에 패배했으나 이 패배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가 전한 자유, 우애, 평등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쿠잔과 사카즈키는 정상 결전 후에 은퇴한 해군 원수 센고쿠의 후계 자리를 놓고 펑크 해저드 섬에서 격돌한다. 사카즈키는 그 자리를 욕심냈으나 사실 쿠잔은 그 자리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사카즈키의 정의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기에 나섰던 것이다. 이 대결에서 패배한 쿠잔은 해군을 떠나서 방랑의 길에 나선다. 사실 '얼음'과 '불'은 질료끼리의 구별은 아니다. 얼음은 수소와 산소 원자의 결합체인 물 분자의 일종이지만 이 경우 초점은 질료가 아니라 '낮은 온도'에 있기 때문이다. 불은 질료가 아니라 물질이 높은 에너지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표식에 불과하다. 자연철학에서 아르케의 후보들이었던 물이나 불은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질료가 아니었던 셈이다.
    얼음과 불의 대결은 판타지나 히어로물의 단골 소재다. 원피스 세계에서는 얼음이 불에 패배했는데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낮은 온도에는 제한이 있으나 높은 온도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온도는 절대온도(K) 0도(영하 273.15도)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열은 물질의 운동 에너지다. 절대온도 영도는 원자들의 운동이 멈춘 상태이기 때문에 더 내려갈 수 없다. 반면 운동 에너지는 거의 무한으로 올라갈 수 있다(우주가 다다른 최고 온도는 빅뱅 상태의 온도였을 것이다). 그러니 쿠잔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쿠잔은 물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의 모토는 '한껏 해이해진 정의'다. 이것은 그의 느긋한 성격으로도 표현된다. 그는 선 채로 잠이 들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다가 기억이 안 나면 "아무렴 어때"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의 '느슨함'은 사카즈키의 '철저함'과 반대되는 것이다. 사카즈키는 철저한 정의를 추구하다가 그 자신이 악이 되어버렸다. 쿠잔은 (로빈의 고향을 버스터콜로 말살한 사건인) 오하라 사건 이후로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한 이분법적인 구별을 반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해적이 된 로빈의 뒤를 봐준 것도, 나중에 해군에서 끝내 전역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쿠잔을 물의 유동성과 유연함을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물'은 탈레스의 물, 아낙시메네스의 공기,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이 가진 생성과 변화와 유동성을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

 

 

 

 

 

 

 

 

 

 

 

 

 

 

작가소개 / 권혁웅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마징가 계보학』,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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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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