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올해의 시
- 작성일 201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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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문장 웹진에서는 2018년 연말 기획으로 한 해를 정리하면서 어떤 작품들이 뛰어난 성취를 거두었는지 함께 되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시와 소설 부문 각 10명의 평론가들에게 올해 발표되었던 시·소설 중 가장 좋았던 작품 3편씩을 선택해 달라는 요청을 드렸습니다. 2018년 1월부터 현재까지, 온/오프라인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시와 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시는 분량에 관계없이 개별 작품을, 소설의 경우 300매 이하의 중·단·엽편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저희는 이 선택의 결과를 활짝 펼쳐 놓고자 합니다. 작품의 순위를 매겨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흥미로운 리스트로 자유롭게 공유되어 더 많은 독자에게 가 닿는 것만이 저희의 바람입니다. 모쪼록 이 선택의 결과를 즐겁게 지켜 봐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 올해의 시]
고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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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누드비치」
《문학동네》, 96호(2018 가을)[/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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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령, 「번역자」,
《현대시》(2018, 11월호)[/caption]
한 사람의 시인이 마주하는 컴퓨터의 빈 여백, 즉 백지는 사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는 점에서 '백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시'에 대한 기성의 질서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백지'는 아니다. 모든 예술가는 이 기성의 질서를 지우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하게 된다. 우리가 인간, 아니 생명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인식, 감각, 감정 등에도 기성의 질서는 존재한다. 모름지기 좋은 예술이란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질서에서 벗어나 경험 자체를 드러내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의 신체가 다른 가능성을 향해 개방되도록 만드는 자극을 포함한 작품이 아닐까.
김지녀의 「나무와 나 나무 나」는 '나무'와 '나'라는 두 기호를 독특한 주문처럼 반복함으로써 '나무'와 '나'를 주체-대상이라는 익숙한 관계에서 끄집어내어 둘의 경계가 흐릿한 지점으로 데려간다. 시인은 '나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행위가 "나무를 말하려고 한 건" 아니라고 고백한다. 시인의 "손끝에서 얇은 가지 하나가 쑥" 하고 돋아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무와 나"라는 기존의 질서는 "나무 나"라는 새로운 질서로 재탄생한다. 이민하의 「누드비치」는 '비치'보다는 '누드'라는 단어에 주목해서 읽어야 할 듯하다. 누드, 즉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국경을 벗고, 난민의 옷을 벗고, 모국어를 벗고, 피부색을 벗고, 그리하여 "모든 걸 벗고 나면 새사람이 될까"라는 물음을 통해 시인은 '누드'라는 단어의 새로운 용법을 제안하고 있다. 장혜령의 「번역자」는 시인의 이러한 시 쓰기를 '번역' 행위라고 규정하고 화자에 따르면 시인은 창조가 아닌 번역하는 존재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번역'의 출발점이 '나'가 아니라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 '번역'이란 세계와 사물의 침묵을 목소리로 옮기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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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말이 되지 않는 말만이 할 수 있는 것
김나영
좋은 시를 읽고 나서 그 좋음에 관해서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곤혹스럽다. 좋은 시는 그것이 왜 소설이 아니라 시여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그 이유는 대개 어떤 논리나 경험으로 해명되기 어려운 데에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이 세상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든 말해 보기 위해 쓰이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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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누구의 토끼 뿔」,
《창작과비평》, 180호(2018, 여름)[/caption]
이장욱의 「누구의 토끼 뿔」(《창작과비평》, 2018 여름)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알 수 없는 모양의 뿔을 가진, 알 수 없는 존재를 상상하게 한다. 토끼 뿔은 토끼의 뿔이거나 토끼처럼 생긴 뿔이거나 이도저도 아닌 그냥 평범한 뿔일 수도 있다. '누구'는 그처럼 명명할 수 없는 특징('토끼 뿔')을 제 속성으로 삼기 때문에 '누구'라는 익명으로 불린다기보다 오히려 '누구'를 대하는 이가 '누구의 토끼 뿔'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도 '누구'를 '누구'라 부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누구는 특정 대상을 향하는 애정 어린 물음이라기보다 모든 존재를 뭉뚱그려 이름 하는 질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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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배틀 그라운드」,
《문학동네》, 95호(2018, 여름)[/caption]
문보영의 「배틀 그라운드」(《문학동네》, 2018 여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내는 온갖 종류의 불통과 불협화음에 주목해 온 시인의 관심을 게임 서사에 빗대어 쓴다. 여기서 게임의 장면은 꿈결처럼. 꿈은 다시 실제 삶의 축소판처럼 읽힌다. 시인은 게임과 꿈과 현실을 구분하고 그 각각의 세계가 어떤 룰을 갖고 있어서 서로 같고 다른가를 설명하려는 기왕의 논리를 벗어나 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세 세계가 뒤섞인 난장판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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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탈피 중인 뱀의 노래」,
《현대시》(2018, 9월호) [/caption]
박연준의 「탈피 중인 뱀의 노래」(《현대시》, 2018, 9월호)와 함께 실린 다른 시에서 화자는 모국어를, 자기에게 익숙한, 의식 없이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말을 잊어버리기로 한다. 그 잊음과 이 시의 벗음은 닮은 데가 있고 그것은 시가 생겨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무 아래에서 나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나는 모든 것이 된다. 한국어 한 글자 단어들이 뱀의 몸처럼 혹은 뱀이 벗어 놓은 허물의 형상으로 주루룩 이어지며 버려지듯 쓰일 때 말의 의미에 집중했던 긴장된 의식은 스르륵 풀어지고 의미상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만 그 때문에 나무 아래에서 우주의 법칙을 깨우친 누군가처럼 우리는 한껏 고양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세 편의 시는 시가 왜 시여야만 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칠판지우개가 칠판에 가득 적힌 글자를 지우는 동시에 무언가를 써나가듯, 시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미 적힌 말들을 거듭 의심하고 지움으로써 그 지워짐을 옹호하고 바라보는 자들에게 읽히는 투명한 문자로 쓰인다. 그것은 나와 너와 우리의 세상이 때로는 얼마나 두루뭉술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쓰이는 말인지를 고발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말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묻는 자의 물음마저 거듭 확인하는 말이야말로 시의 언어가 된다. 그렇게 좋은 시는 저마다가 저마다로 살기를 기원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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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박상수
이원하, 「달을 찌는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니」(《창작과비평》, 2018 가을)
박세랑, 「프랑켄슈타인의 인기는 날마다 치솟고 너희는 약 맛을 좀 아니?」(《문학동네》, 2018 가을)
최백규, 「불시착」(《문장 웹진》, 2018, 11월호)

신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세 편을 골랐다. 먼저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원하의 시. 그가 보여주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산뜻한 슬픔이 좋다. 때 묻지 않은 감수성으로 바다, 혼자, 미래, 슬픔에 대해 말하면서도 요모조모 너그럽다. "앞으로 나는 누굴 만날 수 있을까요?//찐 굴 같은 대답을 들었지만/역시 그럴싸하게 잘 모르겠어요"와 같은 구절에는 나이를 훨씬 더 먹은 여유와 능청도 들어 있어 신기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느린 존재로서의 자신과 동류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어떻게 이렇게 한적하고 고고하면서도 참신할까, 라는 마음으로 감탄하며 그의 시가 발표될 때마다 반갑게 읽어 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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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랑, 「프랑켄슈타인의 인기는 날마다 치솟고
너희는 약 맛을 좀 아니?」,
《문학동네》(2018 가을)[/caption]
한편 올해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세랑의 시는 빡빡하고 뾰족하고 치열하고 자학적이고 위태롭다.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는 여성 화자가 '회복해서 또 살아야 하는 일의 무서움'에 대해 말하는데 여성시의 전통에 맞닿은 이 색깔이 더욱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에 절대 지지 않을 생명력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깨어나면 사람처럼 우스운 것들은 절대로 안 믿어야지! (…)난 아직 깨어날 줄 모르고 시체 냄새 나는 향수나 칙칙 뿌리고 놀러가야지 아무하고나 사랑할 땐 흥청망청 뒤로 해야지"라는 자멸의 언어는 묘한 자기 긍정의 열망과 맞닿아 있어서 기운이 센 완력으로 세상에 자기 존재를 고통의 증거로 제시하면서도 당당하다. 이 거침없는 행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져서 앞으로도 이 시인의 작품을 계속 따라 읽어 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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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 「불시착」,
《문장 웹진》(2018, 11월호) [/caption]
마지막으로 201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최백규의 작품을 골랐다. 그의 작품에는 성장기 소년의 성장통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 그것을 좌절시키는 현실에 대한 불행한 감각이 마치 대만 청춘 영화의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클라이맥스를 박제해 놓은 것 같은 이미지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정말로 아름답게 비극적이다, 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최백규의 어떤 작품들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싶다. "여름을 밟는 걸음이/곱다//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라든지 "다시 사랑하자 했을 때 다음 생에도 이미 폐허라는 걸 알았다//꽃을 먹고 죽으면 나비로 태어난다는 미신을 믿었다"와 같은 낭만적이고도 비극적인 문장을 읽노라면 약에 취해 한없이 몽롱한 기분에 휩싸여 여름 바닷가의, 그러나 폐허의 백사장에 누워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영원히 여름이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은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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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송종원
장수진, 「구오의 일기」, 《문학동네》, 201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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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진, 「구오의 일기」,
《문학동네》, 96호(2018 가을)[/caption]
현실이 수용소라는 비유는 낡은 것이지만, 그 낡은 관념을 시대에 맞게 재조정함으로써 사유의 계기로 삼는 것 또한 문학의 역능일 것이다. 현실이 억압적 수용소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거죽의 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수진의 시에는 "육신. 거죽"의 이미지가 늘 생생하게 자리하는 것을 물론이거니와 그를 넘어서며 질주하는 운동성을 보여준다. 시인의 표현대로 이 몸은 늘 어떤 '헝그리' 상태이다. 당연하게도 이 헝그리는 욕구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의 표현이다. 사막과도 같은 육체에 잠재한 욕망의 씨앗을 발아시켜 무수한 생명의 수풀과 바람을 불러오는 자유의 실험! 장수진은 이 실험에 늘 과감하게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인이며, 나는 이 시인의 실험에 늘 응원을 보내고 싶다.
이장욱, 「누구의 토끼 풀」, 《창작과비평》, 201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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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누구의 토끼 풀」,
《창작과비평》, 181호(2018 가을)[/caption]
이장욱의 시를 읽고 나면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은 물론 오싹해진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의 악몽을 끄집어내 차가운 불로 태워 준 기분이랄까. 그의 시는 우리의 인식이란 것이 우리를 얼마나 자주 배반하는지를, 그 배반의 경험 속에 사람이 얼마나 고독해지는가를 냉정하게 그려낸다. 그런데 그 배반과 고독의 경험이 아플지라도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그 생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그 생각을 해체한다는 생각까지 해체하라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또한 그의 시이기도 하다. 나는 이장욱의 시의 언어가 펼쳐내는 저 차가운 의식의 형태와 뜨거운 감각의 형상에 자주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왠지 졌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문보영, 「지리상의 발견과 바닐라라떼에 관한 의견 차이 2화_미안해 널 미안해」, 《쓺》, 2018 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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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지리상의 발견과
바닐라라떼에 관한 의견 차이 2화」,
《쓺》, 7호(2018 하권) [/caption]
말들에 활기라는 것이 있다면 최근의 한국 시 중에서 가장 많은 활기를 내장한 언어는 문보영이 아닐까 싶다. 이 활기는 말을 자유롭게 부린다. 말들의 무게와 그에 따른 평가에 휘둘리지 않은 채로 속된 말을 속되지 않게 구사하고 경건한 말을 경건에 사로잡히지 않게 활용한다. 그러다 보니 시의 언어가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물체가 아니라 요철이 심한 물질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데, 이 요철이 이상하게 독자의 내면을 긁고 지나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선정작은 24시간 카페로 들어가 나올 때까지의 경험과 단상들을 펼쳐 놓는 세 편의 연작 중 하나인데, 조금은 시시껄렁한 경험의 풍경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만한 이 시는 의외로 이상한 공포감을 형성한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우리의 일상 속에 유령과도 같은 그것이 숨어 있다고 문보영의 시는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시는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 안에 우리의 훼손된 삶의 일부가 자리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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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시의 한 발
안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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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배틀 그라운드」,
《문학동네》, 95호(2018 여름)[/caption]
문보영 시인은 시에 대해, 또 시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대해 지치지 않고 질문한다. 엄숙주의를 버리고 한없이 경쾌한 태도로 시에 다가간다. 시인의 첫 시집은 이와 같은 '시 놀이'의 유희적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놀이 이미지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배틀 그라운드」(《문학동네》, 2018 여름)를 읽었을 때 또 '문보영적인 것'에서 한 발 미끄러져 나가고 있는 시인을 발견했다. 그 유연함이란! 시가 게임이라는 또 다른 놀이의 세계를 만날 때, 그것은 비단 시에 대한 질문이나 '시 놀이'로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불안과 고독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너는 뒤돌아본다. 무서워하지 마, 네가 말한다. 너와 나는 같은 편이지만 너는 나의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중략) ...가지 마, 가지 마, 거기 사람 있어, 라고 너는 말한다." 문보영은 여전히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렇게 또 한 발, 생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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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바캉스」,
《창작과비평》, 181호(2018 가을)[/caption]
임솔아 시인의 시는 정직하다. 과장하지 않는다. 「바캉스」(《창작과비평》, 2018 가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고 있다." 이것이 첫 문장이다. 정직에서 나온 역설이다. 자신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 거기에서 출발하다 보니 이러한 역설의 문장이 쓰이는 것이다. 임솔아의 시는 성큼성큼 발을 내딛지 않는다.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멀찌감치 머무른다. 그러다가 한 발씩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그러한 특징을 두고 "정적으로 태어나버린 목소리"라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 속 '나'는, "온 힘을 다해 가만히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5연에서 '나'는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한다. 바닷가에서 젖은 채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타월을 덮어 준다. 극적으로 연출되거나 과장된 행동이 아니다. 그저 담백한 몸짓이다. "가만히 가만히" 있던 화자가 이렇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지금이 바캉스의 시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들 쉽게 윤리를 이야기할 때 시인은 이 간단한 행위마저도 천천히, 쉽지 않게 이어나간다. 그 주저와 거리와 유보의 태도가 오히려 지극히 윤리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 어려움의 세계에, 쉽게 설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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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비천의 형식」,
《문학과사회》, 123호(2018 가을) [/caption]
다음은 백은선 시인의 「비천의 형식」(《문학과사회》, 2018 가을)이다.
우주에 울려 퍼지는 교향곡을 생각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게 다 소용이라는 마음과
모래 알갱이들
모래 알갱이들
'비천의 형식'이란 무엇일까. 슬픔에 관해 쓰는 과정, 그 형식화의 과정은 밑바닥을 치는 순간과 다시 건져 올려지는 순간을 포함한다. 쓰는 일마저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밑바닥의 슬픔, 그 비천이 어느 순간 기꺼이 쓰이는 일, 그것이 비천의 형식이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려지기. 시간의 알갱이들이 슬픔이 되어 흘러내리거나 손 안에서 빠져나가다가 다시 건져진다. 어둠만이 손에 검정으로 묻어나고 몸을 물들이는 가운데 흩어진 빛의 알갱이들 역시, 영화관의 어둠으로 들어가 빛무리를 바라본다는 눈부신 사랑의 형식에 의해 건져 올려 지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슬픔의 밑바닥까지 잠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비관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면서 한 발씩 나아가는 이 시인. 그 건져 올림의 순간이 바로 비천이 형식을 입는 순간, 슬픔이 시의 손길에 기대는 순간이다.
결국은, 자기가 나아온 자리에서 한 발 더 밀고 나아가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그런 기준에서, 이 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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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안지영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안미옥, 「도」,
웹진 《비유》 2018년 7월호[/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안희연, 「비롯」,
《현대문학》2018년 9월호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백은선, 「비천의 형식」,
《문학과사회》123호 (2018년 가을) [/caption]
올해 발표된 시 가운데 안미옥의 「도」(웹진 《비유》 2018년도 7월호), 안희연의 「비롯」(《현대문학》 2018년도 9월호) 그리고 백은선의 「비천의 형식」(《문학과사회》 2018년도 가을호)을 뽑았다. 우선 안미옥은 내면성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진짜 마음' 즉 진정성의 문제를 탐구해 왔다. 「도」에는 이러한 천착이 자칫 자폐적 나르시시즘으로 귀착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한편으로 세계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으려는 주체의 결단이 드러나 있다.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대신 타자들과의 소통 및 연대를 통해 이 세계에 더 깊게 뿌리내리고자 하는 태도에는 단호한 환대라 명명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이는 모나드의 성채 안에 갇혀 무능하고 무기력한 주체의 모습이 나타나는 최근 한국 시단의 경향을 돌아보았을 때 특히 주목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안희연은 특유의 감각적 언어로 생의 비밀에 대한 오래된 물음에 답을 제출하고 있다. 안희연 시에서 발견되는 슬픔의 정동은 「비롯」에서 특유의 빛을 발하는데, 여기서 슬픔이란 오롯이 자신에게 배당되어 있는 고독의 결과물이자 동시에 '우리'를 하나의 존재로 묶어 주는 끈과 같은 것으로 그려진다. 시 전반에 배어 있는 유유한 슬픔은 탄생과 죽음의 장면을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한다. 이 시는 생사의 진폭을 유려하게 통과하며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백은선 시에는 정돈되지 않은 감정이 폭발 직전의 강렬한 에너지를 뿜으며 열 페이지가 넘는 긴 호흡으로 이어진다. 백은선의 시를 읽으면 2010년대를 지배하는 '마음의 레짐'(김홍중)이 그려진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시대의 불안, 분노, 슬픔, 자책, 부정 등이 용광로처럼 끓어 넘친다. 그런데 「비천의 형식」에서 백은선의 시적 주체는 스스로의 삶을 비천하다고 자학하면서도 끝끝내 절박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더구나 격렬한 파토스에 전염되어 한 차례 격렬한 정동의 물결을 지나보낸 다음에는 묘한 위안을 얻게 된다. 백은선은 이러한 제의적 행위를 통해 '비천의 형식'으로 추락해 버린 시의 존재이유를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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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시의 입, 거듭 손과 발
양경언(문학평론가)
■ 이장욱, 「무기여 잘 있거라」, 《문학동네》, 96호(2018년 가을호)
■ 김현, 「사랑의 이목구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문학동네》, 95호(2018년 여름호)
■ 안미옥, 「홈」, 《문학3》, 1호(2018년)
거짓을 믿지 않기로 한 시대가 되었다고, 2018년에 대해 쓴다. 이 문장은 일견 묘한데, 왜냐하면 거짓이 진짜라고 믿었던 시기를 우리가 이미 거쳐 왔다는 말로 읽히기 때문이다. 혹은 거짓만이 전부라고 착각하기를 종용받았던 때가 있었다는 얘기로 들리거나. 촛불 이후의 현실을 살면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만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감별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를 거짓과 진실에 대한 이해를 더욱 치열히, 촘촘히 진행하는 과정으로 여긴다면, '거짓을 믿지 않기로 한 시대'라는 표현이 단순하게 '순수한 진실의 세계로 입성한 오늘'로 의미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자리라고 여겨지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가 세상의 무게중심을 바꾸는 작업, 이미 지나쳐버린 일들을 거듭 살피면서 감춰져있던 (이전에는 몰랐던) 운동 에너지를 감지하는 작업, 해서 세상과는 다른 기준으로 미래의 기억을 겨루는 작업은 시가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올해와 같은 시기와 맞물렸을 때, 올 한해 씌어진 시들은 어쩐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입으로 노력한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요컨대, 극단적으로 정직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이 거기에서 감지된다는 것이다. 시의 입은 정직하려 할수록 구체적으로 몸짓한다. 그것을 끝까지 하려는가, 끝까지 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긴장을 기꺼이 품는가, 어떤 방향을 향해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한 언어가 땅에 제대로 발 디디려는가의 정도가 올해를 기억하기 위한 최종의 시 세편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이장욱, 「무기여 잘 있거라」,
《문학동네》, 96호(2018년 가을호)[/caption]
이장욱의 시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발생의 반대편에 서서 그 발생을 다시 비춰보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반대라고 일컬은 그 편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염두에 둘 법한 위치가 아니다. 어디를 습관적으로 가리키려 들 때마다 '거기 말고'라는 폭탄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다음을 찾아가는 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일. 그런 일을 올해의 이장욱이 했다. "기적적인 세계"라는 표현이 은폐한 실질적인 풍경을 올해의 우리는 이장욱과 더불어 사색할 수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143242" align="aligncenter" width="300"]
김현, 사랑의 이목구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문학동네》, 95호(2018년 여름호)[/caption]
김현의 시는 우리가 찾아가려는 '그 다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대면할 수 있는지를 심문한다. 이와 같은 심문은 낭만을 깨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세상 한가운데에 독자인 우리를 한 순간에 세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친숙한 줄 알았더니 낯설고, 낯선 줄 알았더니 이미 친숙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폭로에 거침없이 노출된다. 올해에도 역시나, 김현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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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홈」,
《문학3》, 1호(2018년)[/caption]
안미옥의 시는 '이것 또는 저것'을 분별하기 위한 분할선을 '이것 그리고 저것', 혹은 '이것/저것'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분산하는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때, 그이가 서 있는 자리가 밑으로 꺼지지 않게 단단히 받치는 일을 보이지 않는 빛이 할 수도 있다고 강렬하게 발화하는 일은 그러한 관심 속에서 가능하다. 마치 어디서든 자랄 수 있는 알뿌리처럼, 올해의 안미옥은 이분법을 허물고 출발이 가능한 곳을 찾아 짚어냈다.
거짓을 믿지 않기로 한 시대가 되었다고, 올해에 대해 앞서 썼다. 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 올해의 시들은 우리가 손과 발을 지금 어디에 두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고 거듭 말하는 것 같다. 섀도우복싱은 필요 없다고 여기면서, 불순한 구체성을 기꺼이 감당한 채로 바닥을 딛고 가려는 시들의 돌진은 참 멋이 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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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이성혁
내가 제시한 세 편의 시는 '올해의 좋은 시'라기보다는 "평론가 이성혁이 올해 읽은 시 중 깊은 인상을 받은 시 세 편"이다. 뭔 동어반복이냐는 반문을 듣겠지만 굳이 이런 말을 덧붙이는 이유는, 우선 올해 발표된 시를 많이 읽지 못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소위 '메이저 잡지'에서 시를 뽑게 된 것도 나의 한정된 독서에 따른 것이다. 시인과 독자들께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읽은 시보다는 안 읽은 시가 훨씬 많다는 것, 그 시편들 중에서도 '좋은 시'가 분명히 많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순전히 주관적인 이유를 달아 '좋은 시'를 선정했다는 점도 말해 두고 싶다. 신작시들을 읽으면서 정말 좋은 시라고 찬탄을 불러일으킨 시편들이 많았기에, 그중에서 좋은 시 세 편을 선정하는 일은 곤혹스러웠다. 고심 끝에, 나의 마음을 오래 움직인 시편들 중에서 지금 우리 시대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시를 '좋은 시'로 제시하자고 마음먹었다. 이른바 '비평가로서의 책무'를 생각한 것인데, 그렇지만 감상자로서의 주관도 잃지 않으면서 선정에 임하고자 했다.
그리고 '새로움'에 집착하지 않고 시를 고르고자 했다. '새로운 시'는 다른 분들이 조명해 주리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 새로움에 대한 추구 자체가 이젠 낡아버린 태도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특히 그 새로움이 표현의 새로움 ― 이젠 지겨워진 그 '낯설게 하기' ― 이라면 말이다. 새로움이 온전한 가치가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온몸으로 추구되어 어떤 사건을 가져오거나,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역설적으로 고전적인 것 ― 오래된 것 ― 을 확보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이러한 성공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표현 자체가 시의 가치가 될 수는 없으며, 게다가 시의 가치를 새로움에'만' 두는 것은 시의 잠재성을 좁게 한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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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웅, 「위험에 익숙해져갔다」,
《창작과비평》, 182호(2018 겨울)[/caption]
내가 고른 이문재나 조성웅의 시를 '낡은 시'로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직설적이며 쉽게 읽히면 좀 '떨어지는 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한 생각은 시에 대한 '덜 여문' 생각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깊은 '이미지-사유'를 보여주고 있는바, 현재 한국 시에는 이러한 사유의 수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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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평화보다 먼저-기도하듯이 노래하듯이」,
《문학동네》, 96호(2018 가을)[/caption]
이문재의 시는 '비현대적인' 잠언적인 문체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 ― 생태학적 세계관에 따른 ― 로 이끈다. 평화보다 먼저 평화가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시인의 전언은 현재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조성웅의 시는 직설과 진술, 이미지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주류 미디어에 조명되지 않는 노동의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H빔 위에 위태롭게 모로 누운 노동자의 이미지로부터 깊은 의미와 전망을 이끌어내는 시의 마지막 부분은 뜨거운 인상과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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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배, 「물버스 정류장」,
《창작과비평》, 180호(2018 여름)[/caption]
신영배의 몽환적인 위의 시는 여성성 ― '물송이'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 의 문제를 아름답게 제시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는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바, 어떠한 여성주의를 추구해야 하는지 다양하고 섬세한 모색이 절실하다. 위의 시가 바로 그러한 모색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를 여성주의에 환원해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이 시에서 전개되는 이미지로부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암시받을 수 있었으며, 여성성이 지니고 있는 힘 ― 물의 힘 ― 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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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시-삶
장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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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무덤」,
<빵과 장미> 하권, 《현장잡지》 2018년 5월 17일[/caption]
올해의 시를 골라달라는 요청에 머뭇거림 없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김현의 「무덤」이었다. 이 시는 궁중족발 사태의 후원을 위해 개최된 낭독회에서 시인이 직접 시를 읽으며 현장에서 발표되었다. 시가 낭독되는 내내 "현아누나"를 부르는 구절이 반복되는데, "여러분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세상은/ 보증금 3000만원을 1억원으로 300만원 월세를 1200만원으로 올리는 세상입니다"로 간명히 서술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거듭 부르는 일만이 우리를 어떻게 겨우 살아남게 하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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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나는 잠든 네 눈 속에 어떤 장면이 있는지 몰라」,
재미공작소 특별전시, 〈시공간집〉[/caption]
내게 2018년은 혼자 읽기가 아니라 함께 읽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시들에 대해 거듭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고, 백은선의 「나는 잠든 네 눈 속에 어떤 장면이 있는지 몰라」 역시 함께 읽기 속에서 더욱 빛나는 시편이었다. 재미공작소에서 주최한 〈시공간집〉 전시에서 발표된 이 신작시는, 오로지 필사와 녹음으로만 독자들이 시를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 속에서 진행되었다. 책이라는 종이 매체가 아니더라도 시적인 것이 발생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 것은 이 전시의 기획력 덕분이지만, 한 기획 아래에서 같이 발표된 여러 시들은 그 시에 따라 독자-관람객에게 상이한 시적경험을 제공한다. 백은선의 시를 소리 내어 녹음하면서 읽어 내려가는 동안, 터질 듯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시적 긴장은 혼자서 눈으로 읽어오던 것보다 한결 더 입체적으로 경험되었다. 백은선의 시적 파토스는 둔감해지기 쉬운 분노와 고통의 감각을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도 속속들이 깨어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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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형, 「예습」,
『현대문학』 2018년 6월호, p.282[/caption]
마지막으로 고른 것은 이희형의 「예습」이다. 등단작이기도 한 신인의 시를 올해의 시 중 하나로 고른 것은, 시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함부로 구분되지 않도록 애쓰는 이 시의 안간힘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적 태도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장례식 장에서 마침내 졸음이 몰려오는 순간은 어떤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몰려오는 이 졸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덤덤하게 흘러가고 마는 잔인한 일상의 어떤 단면이지만, 동시에 그 순간은 가장 깊은 외상의 영향을 겨우 버티는 이의 절박함이기도 하다. 잠든 이의 어깨를 흔들어 쉽게 깨우는 대신, 깨워도 될까를 거듭 고민하는 시를 읽으며 시와 생활을 함부로 분리하지 않는 시를 읽게 되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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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시]
전소영
* 선정기준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 눈을 뜨고 있는데도 보기 힘든, 혀가 있는데도 좀처럼 말하기 어려운 이가 있다면 그의 심정이란 어떠할까. 실은 이것이야말로 2010년대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처한 현실일 것이다. 파국의 인접어가 된 지 오래인 사회적 문제들, 생사를 장악한 도처의 위험들, 그럼에도 어딘가에 속해 보호받을 수 없게 된 존재들. 생활의 타성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애써 자의식을 가누어 보아도 무엇에고 쉽게 입술을 뗄 수 없게 된 나날.
그리하여 이즈음 시인들의 발화 맨 앞자리에는 '시인으로서의 정위(定位)'와 관련된 진술들이 자리 잡고 있다. '무엇에 대해 말할 것인지'에 앞서 '어떤 자리에서 말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 이 물음을 가장 아프게 담보한 시들에 기대어 시가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더듬어 본다.
* 선정작 1 : 강성은, 「우리들의 마술적 리얼리즘」, 《포지션》, 2018 가을
* 선정 이유 : 누구도 안전하다고 단언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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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우리들의 마술적 리얼리즘」,
《포지션》(2018 가을)[/caption]
마술을 보러 온 '나'는 객석에 있다. 여느 때와 같이 마술을 관람하려는데 마술사가 '나'의 예상을 끔찍한 방식으로 뛰어넘는다. 그의 보자기에서 흰 새 대신 두꺼비가 튀어나오고 그는 두꺼비를 씹어 삼켰다가 뱉는다. 가혹한 퍼포먼스가 사뭇 의심스럽다. 하지만 '나'도 관객들도, '그러려니' 하며 박수를 친다. 박수 친 관객들에게 마술사가 장미꽃을 나눠준다. 꽃을 거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이라이트인 상자 마술이 이어진다. 여인이 상자 안에 눕고 마술사가 상자를 칼로 찌른다. 더러는 흐느끼고 울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하는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마술사가 사라지고 고요한 상자에서 피가 새어 나와 흥건해져도.
관건은 '그러려니'이다. 박수는 마술의 관성.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이 관성의 주박에서 풀려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이 시가 말해 준다. 잔혹한 마술이 분명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데도 정작 마술사가 사라질 때까지 객석의 경계를 넘어선 이는 없다. 무지해서일까. 비겁해서일까. 누구도 무대로 난입해 사라지는 마술사를 붙잡고 멱살을 잡거나 상자 속 여인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객석은 안전한가. 마지막 행이 짐짓 답을 건네준다. 객석에 남겨진 사람들은 마술사가 나눠준 장미 덩굴에, 말하자면 날카로운 가시에 끝내 포박당해 버린다. 이유는 분명하다. 고양이를, 두꺼비를, 상자 속 여인을 간과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 시가, 안전해 보이는 생활과 관성의 이 잔인함에 대해 멀리서 바라보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며 일침을 가하려 쓰인 것은 아닌 것 같다. 화자는 자신마저 '우리'라는 무리 중 한 명으로 스스로를 소속시키고 있지 않던가. 이렇게 적혔다. "나는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주변 사람들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내내 보고 있었다." 볼 뿐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박수를 치지 않았지만 박수를 치는 무리 속에 있었다." 그는 장미 가시 덩굴의 중앙에서 가장 아프게 찔리는 중인 것이다.
* 선정작 2 : 안태운, 「창문을 열어 놓을 때 곳에 따라 비」, 《현대문학》, 2018, 6월호
* 선정 이유 : 판단은 영원히 유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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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운, 「창문을 열어 놓을 때 곳에 따라 비」,
《현대문학》, 762호(2018, 6월호)[/caption]
무엇이 진실인지, 진심인지 쉬이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세계 안에서 눈 뜨고 있는 일은 무용할까, 그래도 일말의 유용함을 남길까. 그에 관해서라면 이 시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여기에는 거의 마지막까지 사실을 확정짓는 그 어떤 어미도 등장하지 않는다. 녹음이 흐르는지 여름이 흐르는지 알 수 없다. 화자가 제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의 상태를 확신해 말 하지 않으니까. 대신 '~려나' 같은 추측 또는 혼잣말의 종결어미가 판단을 유보하거나 지연시키는 '나'의 의도를 돋을새김 한다. 물음의 종결어미로도 역접의 연결어미로도 읽히는 '~나'는 시적 현실의 불확실성과 유동성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유일하게 확정적인 것이 있다면, '방'같이 존재가 정주할 만한 곳들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그로써 그곳의 주인이었거나 그랬어야 할 존재들이 갈 곳을 잃었다는 것. 상황이 이와 같다면 나름의 '창'―관점을 개폐해 가며 삶을 바라보려는 누군가가 있다 해도 그의 눈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자는 내내 '너'의 일이 그렇다고 썼으나 자신이라고 다르겠는가. 애초에 스스로 본 것을 믿지도 확정하지도 못하는 그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 훼손된 세계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로 창문 속에서 머"무르며 흐르는 바깥에 계속 눈길을 둔다. 이 '그럼에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희망의 기색일까, 절망의 기미일까.
* 선정작 3 : 정우신, 「지구」, 《시인수첩》, 2018 봄
* 선정 이유 : 우리는 아픔을 느끼지 않네, 이국의 하늘에서 우리의 혀를 잃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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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지구」,
《시인수첩》, 56호(2018 봄)[/caption]
이렇게 압축 가능하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지 않네,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혀를 잃었기에(횔덜린). 왜 그런가. 화자는 명백히 지구인처럼 보이지만 지구를 "다른 행성"처럼 "관측"하는 중이다. "절단된 무릎"과 "뿌리 뽑힌 향나무"로 미루어보건대 지구는 이제 폐허인가 보다. "삶은 지속되지 않는데 이야기가 계속될 필요가 있"는지 되물어지는, 미메시스 자체가 거부되는 공간이랄까. 정황이 이러하다면 '나'는 자기 나라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을 터.
다만 '나'는 "관측"하기로 결정한다. '관측'이라는 단어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꽤 먼 거리를 담보한다. '나'는 기울어 가는 제 세상을 가감 없이 '바라보기' 위해 일정 거리를 두고 세계로부터 물러선 것이다. 그런데 그 처지를 원망하는지 기꺼워하는지 모르겠다. 도망치려는 것인지 견뎌내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 느낀다 해도 말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 그가 이방인이어서일 것이다. 이국에서 말할 혀를 잃어버린 존재.
그리하여 '나'는 그저 "졸다가", "돌고래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기로 한다. 엄숙함도 비장함도 없는 건조한 바라봄. 그래서 그렇게 압축했다. 이제 시인은 아픔을 말할 수 없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든 현실 안에서 혀를 봉인 당했기에.
이렇듯 자기/시인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하는 이 시들은 우리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는다. '아무려면 어떠한가.'라는 말 속에 흘려보내지는 일상을 가만히, 아주 가만히 흔들어 볼 뿐이다. 어떤 위안은 그저 합리화가 아니었는지, 사위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안온해질 수 있는 생활이란 과연 있는지,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이것이 지금 우리가 시에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선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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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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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정혜경 연주홍빛 표지 배경에 민들레 씨앗이 날아다니고 있다. 표지 왼쪽에는 한자 세로쓰기로 素心錄(소심록) 柳達永(류달영) 著(저)라고 저자가 직접 쓴 글씨가 굳건하게 새겨져 있다. 성천(星泉) 류달영의 수상록 『素心錄(소심록)』(경문사, 1961)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우선 성천의 수상록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고, 소박하면서도 여운 있는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장정을 맡은 월전 장우성은 농민이 ‘생각하는 민들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성천의 뜻을 이렇게 담았다. 1961년 초판본 민들레 씨앗 하나가 이제사 마음터에 내려앉았다. 저자 성천 류달영(1911~2004)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농촌 계몽의 최용신 소전』을 저술해서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양정고보 스승이었던 김교신은 최용신을 만나 보았던 성천에게 이 책을 쓰도록 권유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직 중이던 성천은 제자들에게 최용신 전기를 읽히고 싶었다. 일본 경찰 검열을 의식하며 어려움 속에 완성한 최용신 전기는 초판 1천 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품절되었을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계몽 운동의 불씨를 심어 준 책이었다. 그 시절부터 성천의 글은 독자를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어 6·25전쟁과 4·19혁명 후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발표했던 성천의 글이 했던 역할을 『소심록』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소심록』은 ‘평소의 마음을 기록한 책’이란 뜻으로 근래에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모아 내었다는 겸손한 제목이다. 성천은 이 글모음이 자신에게만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위하여 훗날까지 격려하는 힘을 가질 것으로 믿었다. 그 ‘격려하는 힘’은 충분히 전해져 강렬한 울림으로 왔다. 가로 12.5cm 세로 19cm의 이 아담한 책 405쪽에 51편의 글이 빼곡히 담겨 있다. 『소심록』의 글들은 1959년 3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이 년 동안 《사상계》, 《새벽》, 《사조》, 《신태양》, 《식량과 농업》, 《여원》 그 밖의 여러 잡지와 《조선일보》, 《대학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1961년 5월에 출간되었으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지 일주기가 되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장 ‘사월혁명’의 다섯 편은 혁명 때 쓰러진 꽃다운 젊음들과 같은 행진 속에서, 거친 호흡을 함께 하면서 쓴 글들이었다. 성천은 4·19혁명은 학생들의 피로 성공했으니, 그 정의로운 피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깊은 존경으로 명복을 빌었다. 성천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특별했던 점은 나라의 현실에 대해 고뇌하면서 비전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현실에서의 타개책까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성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사토
- 관리자
-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거대한 사랑의 기록 - 김명순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박소란 사진1. 『생명의 과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표지 지난 2025년은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생명의 과실』은 김명순(金明淳, 1896~1951 추정)이 쓴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창작집이다. 국내 서지 기록에 등록된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 문학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의 과실』도 김명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100주년은 터무니없이 고요했다. 별다른 의식이나 언급 없이 우리 문학장은 지난 한 해를 지나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전 김명순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핍박을 떠올리게 된다. 혹여 김명순이라는 선구적 예술가를 아직까지도 과거 그늘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은 아닐까, 못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대략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김명순은 쉽게 소거될 수 없는 이름이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문예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한국 문단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 30년대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유연애’를 주창한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부정한 혈액’ ‘문란한 여자’ 등 모욕적인 꼬리표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힘겨움이 잇달았고, 결국 1951년경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명순은 생전 시, 소설, 수필, 희곡(각본) 등을 한데 묶은 두 권의 창작집을 냈다.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회동서관, 1929 추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창작집을 준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되었으며, 때문에 창작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하다.) 이 중 『생명의 과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1 『생명의 과실』에는 등단작 「의심의 소녀」를 포함해 소설 2편, 시 24편, 수필(목차에는 ‘감상(感想)’이라 표기되어 있다) 4편이 수록되었다. 소설 「돌아다볼 때」나 시 「유언」, 「저주」, 「탄실의 초몽」, 「유리관 속에
- 관리자
-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염상섭의 『해바라기』와 나혜석의 결혼 전후 박진영 노처녀 결혼 풍경 신부 나이 스물넷이면 노처녀인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신랑이라고 첫혼인일 리 없었다. 암만해도 결혼식을 버젓하게 치러야 했다. 둘 다 유명 인사다 보니 결혼 소식이야 진작에 왁자그르르 퍼졌고, 신문에 신랑 신부 사진까지 실렸건만 그래도 아쉬웠다. 내친김에 결혼 기사 아래 청첩장을 내기로 했다. “저희는 목사 김필수 씨의 지도를 받자와 4월 10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옵나이다. 이날에 귀댁 왕림의 광영 주심을 엎드려 빕니다. 경신년(1920) 4월 3일, 김우영 · 나혜석.” 신문에 청첩장을 광고한다고 발칙한 일은 아니다. 대체 뉘 집 아들딸인지 이름이 없는 게 문제다.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청첩장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부모 이름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무릇 결혼이란 당사자들의 일이기에 앞서 엄연히 집안 대사인 까닭이다. 요즘에야 신랑 신부가 나란히 팔짱 끼고 걸어 들어가는 일도 흔하다지만 여태 청첩장 문화는 그대로 아닌가? 이만한 기세라면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야 박수 칠 법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못마땅하다 못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둘 다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었다. 그나마 넷째, 다섯째 자식이라서 불행 중 다행이지만 대체 무슨 남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시아버지는 기어코 폐백을 물리치고 술잔이나 기울이러 나갔다. 하기야 목사 주례에 답사랍시고 감히 신부가 한마디 아니라 일장 연설을 떠든 예식이었으니 결혼식이고 피로연이고 애당초 안 들어선 게 차라리 나은 지경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랑 신부는 이튿날 식전 댓바람부터 양가에 차례로 들이닥쳐서는 신혼여행 떠난답시고 들썩여 놓고는 훌쩍 기차를 탔다. 신부는 두 주일쯤 예정이라고만 무지르고는 어디로 가는지 신랑에게도 도통 알려 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잡아끌다시피 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무래도 웬만한 신혼여행이 될 리 만무했다. 신랑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 신부는 진명여학교 최우등 졸업생이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화가 나혜석이다. 사진1. 나혜석 결혼사진 (1920) 출처: 수원시립미술관 남도 신혼여행 사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잠시 여관에 들렀다가 호남선으로 갈아탄 신혼부부는 한밤중에 목포에 도착했다. 열 시간 넘게 걸린 곤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인력거 잡아타고 곧장 여관에 들어서서는 하녀 이름부터 대는 신부가 영 수상쩍다. 초행길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부는 3년 전 그 여관 2층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추억했고, 영문 모르는 신랑은 얼추 짐작이 나섰지만 섣불리 입을 열 계제가 아니었다. 아직 신혼 둘째 날 밤이었으니. 부산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하녀와의 사연인즉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신부는 3년 전 도쿄에서 다니던 학교를 빼먹고 홀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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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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