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갈매책방(1화)_그림책으로 철학하기

  • 작성일 2020-01-01
  • 조회수 1,257

[책방곡곡]

 

 

 

구리 갈매책방 북적북적

그림책으로 철학하기(제1화)

- 『더 높은 곳의 고양이』, 이주혜, 국민서관, 2019.

 

 

진행 : 한상선(늘 책과 함께 있고 싶은 책방지기)
참여 : 김선화, 김연희, 김은미, 마혜경

 

 

 

 

    일평생 세 번 그림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어릴 적 부모님께서 읽어 주실 때, 부모가 되어 자녀에게 읽어 줄 책을 고를 때, 그리고 나이가 들어 스스로 그림책을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인 멤버들로 구성된 우리 모임은 '그림책으로 철학하기'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내걸고 그림책을 읽고 생각을 나눕니다. 짧은 그림과 글 속에는 결코 얕지 않은 삶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동일한 현상을 다양한 시선과 생각으로 해석하는 타인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넘어 타인에 대한 이해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삶의 태도에 유연함을 불어넣어 주니 그림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값지게 다가옵니다.

 

 

사회자 : 이번 주에는 『더 높은 곳의 고양이』라는 책을 읽고 나누고 싶은 얘기를 하려 합니다. 제가 읽는 것보다 집중력 향상을 위해 마혜경 님께서 읽어 주시죠.

 

마혜경 : 『더 높은 곳의 고양이』 일독

 

 

사회자 : 책의 마지막 부분에 행복해 하는 고양이가 나오는데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왜 궁금한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여러 그림책을 나누면서 많이 언급됐던 질문 중 하나가 '행복이란 무엇일까?'입니다. 여러 번 나눠 본 이야기였기에 더 이상 질문화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김선화 : 높은 곳의 의미가 뭔지 참 어렵네요. 저는 다양한 부분에 관심이 많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강합니다. 그러한 배움이 누적되어 더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폭넓은 시야와 사고의 확장으로 연결되고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통로가 되는 것 같아요. 하나씩 배워 나가며 경험을 쌓아 가면서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 높이 올라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연희 : 제가 생각하는 높이 올라간다는 것은 남들을 뛰어넘는다는 게 아니라 어제의 나와 비교해서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은 나의 기준이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인 거죠.

 

마혜경 : 글쎄요.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더 높은 곳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성장보다는 흔히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이나 지위, 권력으로 보입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는 고양이의 모습이 권력다툼을 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앞의 두 선생님의 해석과 다소 다르네요.

 

김은미 : 사회구조상 타인과의 비교나 경쟁에서 자유롭기는 힘든 것 같아요.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면서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자 : '높은 곳'에 대한 개념이 두 가지로 양분되는데요. 그건 각자가 겪은 경험이나 생각, 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기에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여기 다양한 생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높이 올라가야 하지?'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행복해질까? 지위나 부를 더 많이 획득하는 것이 과연 높아지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부, 권력을 축적하는 것이 높이 올라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높이 올라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올라가야 하는지를 잊고 그저 높이 오르기만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염려가 되네요. 고양이도 높이 오르기 위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서 무언인가를 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오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마혜경 : '왜'라는 질문이 빠져 있을 때가 많아요. 타인보다 앞서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잖아요. 분명히 높이 오르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텐데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없었어요.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단순히 앞만 보면서 달렸던 결과 허무함을 경험했던 것 같아요.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 바라보면서 말이지요.

 

김연희 : 김은미 선생님 말씀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높은 곳에 오르기를 갈망하는 것 같아요. 각자가 생각하는 높은 곳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자신이 차지한 높은 곳, 혹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에 더 높은 곳을 바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선화 :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면서 '왜' 올라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기에 아래에 있던 예전의 내 모습에서 놓친 부분이 있을 테고 그중에서 그리워하는 것도 있겠지요. 여기서도 고양이가 더 높이 오르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우주로 갔을 때 그리웠던 것이 있었을 것 같아요. 여러분은 더 높이 올라갔을 때 그리워지는 이전의 모습이 있나요?

 

김연희 : 높이 올라가려는 생각에만 묻혀서 지내다 보니 높이 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의 내 모습을 잊고 살았더라고요.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친 것 같아 아쉬운 순간이 있었어요. 지금은 매 순간 나를 돌아보고 인식하고자 애쓰고 있어요.

 

사회자 : 그리워한다는 것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의 다른 말 아닐까요? 하나씩 이뤄 나가고 쌓아 간다면 그리움은 옅어질 거라 생각해요.

 

마혜경 : 올라가야만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면 고양이도 순간순간 행복했겠지요. 그러나 단순히 높은 곳에 있는 고양이를 보면서 현재 자신의 위치가 불안했기에 더 높이 오르고자 했지요. 거기에서 박탈감을 적잖이 느꼈을 텐데요. 여러분은 어떤 분야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나요?

 

김선화 : 타인과의 비교에서 박탈감을 느끼게 되죠. 분명 내가 맡은 부문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앞선 사람을 보게 될 때 힘이 빠지게 되지요.

 

김은미 : 비슷한 예로 나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보다 더 풍족한 경우를 보면 박탈감을 느끼게 되지요. 결국 박탈감이란 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감정이네요. 고작 해물짬뽕 한 그릇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남편과 얼굴 맞대고 먹는 해물짬뽕 한 그릇은 제게는 커다란 행복으로 다가오거든요. 박탈감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아요.

 

김은미 : 끝없는 인간의 욕망 가운데 우린 과연 어디까지 가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김연희 : 저는 지금 제 자신에 대해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타인이 기준이 아니라 제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하기에 흔들리지 않고, 그것은 만족,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제가 깨달은 삶의 지혜를 제 아이에게도 가르치고 있어요.

 

김은미 : 본인은 흔들리지 않고 살아간다지만 어린아이에게는 힘든 일 아닐까요?

 

김연희 : 학습적인 면에서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순간 아이는 불행해지죠. 굳이 다른 사람과 경쟁하면서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에게 반복적으로 얘기해 줘요. 특정 과목에서 다소 부족할지라도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요.

 

김연희 :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은 없을까요? 같아 앉아서 하늘을 볼 수는 없을까요? 왜 굳이 남보다 높이 올라가려고만 할까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요.

 

사회자 : 고양이 얘기가 점점 심오해지네요. 이전에 나누었던 말이 떠오릅니다. 만족이란 발까지만 물이 차면 되는 건데 가슴까지 차오르길 혹은 그 이상 차오르기를 바라니 힘들어지겠지요. 행복도 마찬가지겠지요. 다른 이들과 비교가 아닌 나를 바라본 행복이라면 그걸 느낄 때 만족하고 행복을 찾게 되지 않을까요?
높이 올라간다는 것에 대한 다른 분들의 생각이 이렇구나, 라고 듣고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높이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 왜 높이 올라가고 싶은지를 잊지 않고 높이 올라가 처음 원했던 뭔가를 한다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더 높은 곳의 고양이』는 우주에서 지구에 돌아와 웃으며 행복함을 말하지만 우린 지구를 떠난 후엔 돌아올 수 없으니까요.

 

 

 

 

 

 

 

 

 

 

 

 

 

 

 

한상선

사회자 / 한상선

늘 책과 함께 있고 싶은 책방지기

 

김은미

참여자 / 김은미

책과 친해지고 싶은 주부

 

김연희

참여자 / 김연희

읽고 쓰고 나누면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가치 창출자

 

김선화

참여자 / 김선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그림책 선생님

 

마혜경

참여자 / 마혜경

책과 함께 소통하고 싶은 사람

 

 

   《문장웹진 2020년 1월호》

 

추천 콘텐츠

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