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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결산특집 연속 좌담ㆍⅡ ― 시집 부문

  • 작성일 2020-01-02
  • 조회수 3,570

[기획좌담]

 


이번 좌담은 지난 10년간(2010-2019) 출간된 다양하고 개성이 뚜렷한 한국 문학 작품을 재조명함으로써 해당기간의 우리 문학을 총결산해 보려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2019. 11. 6부터 12. 9까지(34일간), 지난 10년간 《문장 웹진》에 필진으로 참여한 평론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64명의 평론가가 보내온 설문의 취합 결과를 토대로 시집(12. 20), 소설집(12. 17), 장편소설(12. 18) 각 영역별로 3차에 걸쳐 좌담을 진행했다.
좌담 내용은 이번 소설집과 시집(1.1)을 시작으로 장편소설(1.8) 순으로 각각 게재할 예정이며, 이번 설문과 좌담을 통해 호출된 개별 작품의 상세 목록은 2020. 2월호(2.1 발행)에 발표하고자 한다.
끝으로, 설문에 참여한 64명의 평론가와 좌담에 참여한 모든 분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 설문 참여자 명단 (가나다순)
    ㆍ 강지희, 고봉준, 김건형, 김남혁, 김 녕, 김문주, 김미정, 김수이, 김영삼, 김영임, 김요섭, 김정현, 김주선, 김태선, 김형중, 김효숙, 노대원, 노태훈, 민경환, 박다솜, 박동억, 박수연, 박신영, 박윤영, 박인성, 백지은, 복도훈, 서희원, 소유정, 손정수, 송민우, 신샛별, 신수진, 신형철, 안지영, 양순모, 양윤의, 양재훈, 염승숙, 오연경, 오은교, 오창은, 오혜진, 유성호, 이병국, 이성혁, 이소연, 이은지, 이지은, 이철주, 인아영, 장예원, 장은영, 전소영, 정영훈, 정은경, 정홍수, 조대한, 조재룡, 조형래, 최선영, 한 설, 한영인, 허 희
  ⁃ 좌담 참여자 명단 (분야별, 가나다순)
    ㆍ 노태훈, 박선우, 이원석, 장희원, 조시현
    ㆍ 강지혜, 김태선, 양안다, 이병국, 정다연
    ㆍ 김수온, 염승숙, 은모든, 이현석, 임국영



 

 

2010년대 결산특집 연속 좌담ㆍⅡ

― 시집 부문

 

 

일시 : 2019년 12월 20일(금) 14시
장소 : 대학로 공공그라운드 001스튜디오
참여자 : 김태선(사회), 강지혜, 양안다, 이병국, 정다연

 

 

 

 

 

김태선 : 안녕하세요. 문학평론을 하는 김태선입니다. 오늘 네 분의 시인들과 함께 2010년대 한국 문학 시집 분야를 총결산하는 좌담을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좌담을 위해 사전에 평론가분들께 2010년대에 괄목할 만한 시집을 몇 권 추천해 달라는 설문조사를 진행했었습니다. 평론가 한 명당 세 권 정도 추천을 해주셔서 총 184건의 추천이 있었고요. 그 결과 추천된 시집이 총 92권, 그리고 추천된 시인의 수는 69명이었어요. 69명이나 된다는 건 굉장히 놀라운 숫자인 것 같아요. 하나하나 이름을 기억해서 열거하기에도 많은 숫자잖아요. 아마 이 부분이 앞서 진행되었던 소설집이나 장편소설의 경우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시집 열한 권을 주요 시집으로 뽑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료 외에도 시집 출간 경로의 다양화에 대해서도 한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고, 최근 시인들의 글쓰기 외의 활동들, 예를 들어 SNS나 유튜브 등의 활동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사를 해봤는데, 2010년대에 새로운 시인선을 출간한 출판사가 꽤 많더라고요. 인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요. 오늘 이런 이야기들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시작하기에 앞서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지혜 : 안녕하세요. 저는 2013년에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강지혜라고 합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양안다 : 안녕하세요. 양안다라고 합니다. 2014년에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했고, '뿔'이라는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병국 : 안녕하세요. 저는 이병국이라고 합니다.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에서 평론이 당선돼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다연 :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정다연입니다. 현재 《문장 웹진》에서 청년간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김태선 : 여러분께서 2010년대 추천 시집 자료를 받아 보셨을 텐데요. 처음에 받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평론가들이 추천한 시집들의 경향은 어땠는지, 자신도 그와 비슷했는지, 아니면 예상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양안다 시인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

 

양안다 : 저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었어요. 추천을 많이 받은 시집들이 다 납득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고요. 그리고 예상할 수 있었던 시집들이기도 했어요. 2010년대 한국 시집을 총결산한다고 했을 때 아, 이러이런 시인들의 시집이 있겠다고 예상했던 시집들이 대거 있어서 공감하면서 자료를 봤어요. 전반적인 유형이나 경향성을 말하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건 있는 것 같아요. 평론가분들이 각각 시집을 세 권씩 추천하신 걸 보면서 이 평론가님은 이런 시집들을 좋아하는구나, 이런 작품을 좋아하는구나, 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김태선 : 제가 말씀드린 경향성이 조금 어렵게 들렸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의도로 말씀을 드린 거였냐면, 2010년대에는 대체적으로 어떤 유형과 취향의 시집들이 많이 선택되었던 같다고 하는 소감을 여쭙는 것이었어요. 혹은 추천된 시집들이 공통된 게 하나도 없었다든지, 개성이 뚜렷한 시인들이 다양하게 나와서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없었다든지 생각되시면 그렇게 말씀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셨는지 소감이 궁금했어요.

 

양안다 : 독자와 작가들 모두에게 감흥을 많이 주었던, 호응도 컸었던 시집들이 많이 추천되지 않았나,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그렇습니다.

 

김태선 : 네, 다음으로는 강지혜 시인님 말씀을 들어 볼까요?

 

강지혜 : 저는 추천목록을 받아보고 서가에 가서 목록에 있는 책들이 얼마나 꽂혀 있는지 확인을 했습니다. 목록에 있는 시집이 제 책장에도 삼분의 이 정도는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니까 저도 역시 양안다 시인께서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게 독자들이나 동료 시인들과 많이 이야기했었던 책들이 목록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2010년대에는 경향이나 유형 같은 것을 규정하기가 힘들 정도로 시들이 너무 다양한데, 스타일이 뚜렷한 시인들의 시를 더 좋아한다는 정도가 경향이라면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김태선 : 네, 그렇군요. 다음으로 정다연 시인께서 말씀해 주세요.

 

정다연 : 저도 이 목록 안에서 다시 주요한 시집으로 꼽혔던 열한 권의 시집들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근데 저도 한 가지 놀랐던 게, 아까 양안다 시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독자의 반응과 평단의 반응이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여기에 언급된 시집들이 하나의 경향으로 묶이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서정적이면서, 하나의 시 안에 독자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잘 마련해 놓은 작품들이 주요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 대해 어떤 것 같았냐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는 좋고 나쁘고의 판단을 떠나서 조금 더 다양한 지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봤던 거 같아요. 독자와 평론가들의 평가가 일치되는 게 분명 좋은 점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똑같이 일치된다는 지점에서요. 저도 시를 쓰는 입장이다 보니까 이런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생각해 봐야 할까 하는 개인적인 고민을 해봤던 것 같습니다.

 

김태선 : 네, 감사합니다. 이병국 시인은 어떻게 보셨나요?

 

이병국 : 저는 그 목록표를 받아서 제일 먼저 찾았던 건 혹시…… 내 시집이 있을까…… (일동 웃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고요. 목록을 쭉 읽으면서 받은 인상은 다양한 시인들과 다양한 시집들이 추천이 되었구나 하는 거였어요. 저도 이 설문조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받아 본 통계표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부분이 더 주목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만큼 평론가들에게 2010년대 시인과 시집들이 다양하게 감각되는 것이겠죠. 그런데 또 선정된 시집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양하긴 하지만 그 시집들이 출간된 출판사의 경우는 제한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몇몇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 건지, 아니면 그 출판사들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시인들을 잘 뽑아서 시집을 내는 건지, 제가 그 안에 해당되지 않아서 시기와 질투 때문에 뾰족하게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부분도 약간 고민하게 되었고요.

 

김태선 : 이병국 시인께서 방금 말씀해 주신 부분은 중요한 지적인 것 같아요. 나중에 더 살펴보긴 할 텐데요. 시집들이 다양하게 추천되었지만 출판사로 분류를 해보면 크게 세 곳, 네 곳 정도로 압축이 되죠. 많은 분들께 이미 잘 알려진 그러한 출판사들이죠. 저는 평론가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시집 추천을 요청 받았을 때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해했던 기억이 나요. 왜냐하면 2010년대에는 여러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마다 너무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시단에 나온 시인들이 굉장히 많았으니까요. 이 시집을 넣자니 저 시집을 넣지 못한 게 아쉽고 해서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막 날이 돼서야 뒤늦게 골라서 보내 드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물론 이번에 다양하고 좋은 시인들이 많이 추천됐지만, 그럼에도 이 추천목록에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게 의외인 시인들이 굉장히 많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를 2010년대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시인들이 많이 출현했던 것 같아요. 2000년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죠. 2000년대에 흔히 '미래파'라고 불리는 일련의 큰 유형이 있었던 것과 다르게요. 때문에 저는 어렵게 선정을 해서 보내 드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가장 많이 추천된 열한 권의 시집과 시인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단 한 표만 추천된 시집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니 목록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평론가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이 개별적으로 다양하게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양안다 시인과 정다연 시인께서 말씀하신 그 부분도 흥미로운 대목인 것 같아요.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반응이 일치한다는 지점 말이에요. 예전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흔히 이야기하는 문단이, 더 좁히면 평론가들이 바라보는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평론가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 어렵다, 대중들과 괴리되어 있다고 하는 이야기들도 있었고요. 대중의 취향과도 차이가 너무 크니까 문학의 장이 오히려 대중의 어떤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아닌가, 혹은 괴리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반성들도 있었는데요. 그러한 간극을 극복하고자 했던 나름의 노력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볼 때는 아마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으로 저마다의 취향을 긍정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면서 이런 현상들이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싶어요. 혹시 이번 조사에서 평론가들이 어떤 시집을 추천하는 이유 중에 관심이 갔던 게 있을까요?

 

이병국 :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를 추천한 한 평론가가 한 말이 있잖아요. '황인찬의 등장으로 포스트 미래파 담론을 단숨에 뛰어넘었다.'라고 간단하게 설명을 했어요. 그게 인상이 깊었던 게, 2010년대 시들의 어떤 경향성이나 특징을 생각해 봤을 때 2012년도에 나온 두 권의 시집이 상당히 많은 주목을 받았거든요.

 

김태선 : 2012년에 나온 두 권의 시집이라면 어떤 시집이죠?

 

이병국 : 방금 얘기한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와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입니다. 이 두 권의 시집이 나오면서 그 이전까지 2000년대에 주가 되었던 미래파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시의 흐름을 다 끊어낸 듯한 느낌이었어요. 2008년 이후로 어떤 흐름이 된 시와 정치 논쟁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끊어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이 두 권의 시집이 저에게는 이전까지의 시대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끔 만드는 길잡이처럼 보였거든요. 그러면서 이전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시를 읽어도 되겠구나, 혹은 써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김태선 : 네, 그렇군요. 양안다 시인도 얘기해 주실 말씀이 있나요?

 

양안다 : 저는 추천목록을 쭉 둘러보다가 김중일 시인의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가 눈에 띄어서 이 시집에 관해서 얘기해 보고 싶어요. '세월호 이후 많은 시인이 애도의 문제를 논했고 시로써 그것을 보여주었지만 이 불가능한 애도의 시간을 가장 순도 높게 보여준 시집으로 김중일의 이 시집을 뽑고 싶다.'라는 추천 평이 있었는데, 저는 이 말이 그냥 제가 『가슴에서 사슴까지』를 읽었을 때 느꼈던 추상적인 생각을 누군가 언어로 옮겨 적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래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사실 그런 이유로 『가슴에서 사슴까지』가 추천을 많이 받았을 거라고 예상했었어요. 결과에서는 예상보다 적은 수의 추천을 받았지만요.

 

김태선 : 그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추천된 숫자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무관하다는 것이요. 사실 이런 조사에서 추천이 많았다고 해서 그 시집이 다른 시집보다 뛰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특히 제한된 인원과 제한된 권한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추천하는 사람의 수를 늘리기도 그렇고, 추천 횟수를 늘리기도 그렇고요. 사실 이건 어려운 문제죠.

 

이병국 : 의견을 한번 모아 보자는 거였을 테니까요.

 

김태선 : 아, 그리고 양안다 시인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잠깐 방향을 바꿔서 그걸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2010년대에 관한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관한 이야기요. 특히 세월호. 2010년대 하면 특히 세월호 전후로 시단의 풍경이 크게 바뀌는 것 같아요. 201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경제상황이라든가 혹은 청년 실업 문제들로 '헬조선'이라고 불릴 정도로 암울한 정서가 팽배했었죠. 그에 관해서 시인들이 그려낸 세계도 디스토피아라고 해야 할까요. 파국적인 이미지, 혹은 닫혀 있는 미래, 절망, 이러한 모습들이 많이 그려졌었고, 201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평단의 이야기도 대체적으로 그러한 것들에서 많이 얘기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 세월호로 나타났었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경향이 바뀌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단순히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무너진 세계를 일으켜야겠다는 식으로요. 시인이자 평론가인 박상수가 그렇게 명명했었죠.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이라고요. 《창작과비평》에 발표되었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라는 제목이었죠. 물론 그 글에서 박상수 시인이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에 너무 밀착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조금 비판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흐름에 대한 긍정적인 목소리들도 많이 나왔었죠. 특히 타자와 연대에 관한 이야기가요. 이때의 연대는 나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픔을 통해서 맺어지는 연대의 감정을 일컫는 말이겠죠. 그런 것들이 시편으로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다들 2010년대를 어떻게 살아오셨나요? 이 물음은 어떻게 보았냐는 말보다는 어떻게 살아왔냐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그러한 과정 안에서 습작을 하거나 시인이 되었고, 또 계속 시를 썼을 테고요. 강지혜 시인 말씀을 먼저 들어 볼까요?

 

강지혜 : 이 추천목록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2010년대에 일어났던 사회적 사건들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먼저, 김혜순 시인의 『피어라 돼지』가 쓰인 시점이, 아마 돼지 구제역 파동이었나요.

 

김태선 : 네, 구제역 파동이 2010년대 초에 있었죠.

 

강지혜 : 그 당시 사람들이 많은 충격을 받았었죠. 그것과 관련해서 시를 썼던 분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살처분의 순간들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오는 것까지가, 그 감각을 인간한테까지 옮겨오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세월호 사건은 '우리' 모두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태에서 목격한 처참한 사건이죠. '동물'의 일이었을 때는 어떻게든 외면이 가능했던 감정, 분노 같은 것들이 세월호를 겪으면서는 도저히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국민 모두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한 죄책감, 처참함, 분노의 감정이 터져 나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건 이후에 일정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도저히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다는 것처럼 터져 나온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사실 그 사건을 이야기하다 보면 감정이 북받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그래서 앞으로도 좀 더 이야기가 되도 되는, 그래야만 하는 문제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그 당시에는 세월호에 대해서 쓰지 못했던 작가 중 한 명인데요. 시간이 흐르고 아이를 낳은 후에 체험하게 되는 세월호가 또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결국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쓰는 동안에 평생에 걸쳐 이야기해야 하는 게 있지 않을까,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김태선 :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정다연 시인께도 한 말씀 들어 볼까요. 2010년대를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요.

 

 

정다연 : 제가 2012년도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그렇게 대학 생활을 하다가 세월호도 겪었고, 겪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조심스럽지만요. 그 사건을 목격했고요. 이외에도 페미니즘 담론도 굉장히 활성화되었던 시기를 통과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지나고 있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제가 믿고 있던 것들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국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최소한의 믿음 같은 게요. 여성 문제에 관해서도 굉장히 분노했고 무력감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 시기를 지나면서 아까 강지혜 시인님 말씀처럼 시를 못 쓰는 기간도 있었던 거 같아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꾸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얘길 하게 되는데, 그런 시기를 관통해 오면서 아까 윤리에 관한 얘기가 나왔듯이 저도 시 안에서 어떻게 하면 다른 존재들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발화할 수 있을까, 그걸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를 굉장히 많이 고민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다른 글 쓰는 분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하고요.

 

김태선 : 오늘은 이렇게 주제를 자주 옮겨 다니면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여러분이 하시는 말씀 중에 징검다리로 삼을 만한 것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요. 다른 존재들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러한 맥락에서 가장 많이 추천된 시집으로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가 있을 테고요. 그게 『구관조 씻기기』가 추천된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추천 사유를 살펴보면 그러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구관조 씻기기』의 추천 사유에 사물을 훼손하지 않고 바라보는 태도, '관조'라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등장했죠.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에 관해서 비평했던 많은 글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고요.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시가 과연 일반 독자들에게 얼마나 소통이 잘 될까,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대체로 시의 언어가 낯선 편이었잖아요. 그런데도 독자들에게 굉장히 많은 사랑을 받았단 말이에요. 이런 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좀 어려운 문제지만요.

 

이병국 : 낭독회나 작가와의 대화 같은 행사를 진행할 때 독자들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게 시 너무 어려워서 읽기 힘들다는 거였어요. 제가 2010년대 초반에 등단하고 나서 친구들과 얘기할 때도 친구들이 축하를 해주면서도 덧붙이는 말이 있었어요. 왜 시를 쓰냐고, 사람들이 접하기도 어렵고 읽지도 않는 시를 뭐 하러 쓰냐는 거였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야, 기왕 시 쓸 거면 박준 시인처럼 써'였죠. (웃음) 굳이 어디에서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쉽게 읽히고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그런 시를 써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어요. 시를 자주 접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읽어 봤던 시들은 너무 어렵기도 하고 또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어느 시대는 안 그렇겠냐마는 그 얘기를 지금 돌이켜보면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박준 시인과 신철규 시인과 같이 평이하고 쉬운 시어들로, 독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의 시가 쓰인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시가 변해 가고 있는 거라고 느껴지거든요. 시를 어렵게 생각하는 독자들의 요구도 있었을 거고, 미디어의 영향도 있겠죠. 미디어에서 이전까지 주로 다뤘던 문학이 소설이었다면, 2010년대로 넘어오고 나서는 시도 많이 다루잖아요. 체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시의 전성시대라고 할 정도로 미디어에서 다루어진 시집들도 꽤 되고요. 드라마에서 유명한 배우들이 소설책뿐만 아니라 시집을 읽는 장면이 나올 정도니까요. 홍보 차원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반 독자들이 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장이 형성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접한 시집을 구매해 직접 읽었을 때 난해하지도 않고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면 좋은 일 아닐까 싶기도 해요. 뭐 여전히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시집이 팔리고 읽히게 되는 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정다연 : 저는 하나 덧붙여서 말하고 싶은 게, 되게 인상적이었던 게 있었어요. 오브제를 파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박준 시인의 시집을 오브제로 파는 거예요.

 

이병국 : 시집에 아무런 가공도 없이요?

 

정다연 : 네, 그냥 인테리어 물품처럼요. 그냥 화병, 오르골 등 오브제 사이에 딱 한 권 박준 시인의 시집이 끼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 시집이 읽는 목적도 있지만, 이걸 하나의 어떤 물품처럼, 그냥 일상 오브제로 이렇게 두는 경우도 생기고 있구나, 이런 게 되게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김태선 : 다소 곁가지로 빠지는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제가 가져온 게 있어요. 문학동네에서 한정판으로 나온 미니북 시집이요. (일동 웃음) 언제인가 마트에서 푸딩을 사면 상자 안에 이런 작은 시집이 들어 있었어요. 박준 시인의 시집도 있었고,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는 김민정 시인의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도 있어요. 시집이 이렇게 일종의 굿즈처럼 소비되는 현상도 아마 2010년대에 들어서서 처음 보게 되는 현상인 것 같아요. 특히 최근에도, 인기작가가 되어서 그렇겠지만 황인찬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가 나올 때 창비에서 특별하게 지금껏 하지 않던 새로운 북 커버를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했었죠. 무척 예쁜 디자인인데, 아마도 일반 독자분들, 그리고 저처럼 책에 대해 물욕이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탐낼 만한 기획이었던 것 같아요.

 

이병국 : 소설책들은 동네 책방 버전으로 표지를 다르게 만들어서 나오기도 하잖아요. 시집은 그런 적이 없다가 이번에 나온 황인찬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다른 버전의 표지를 만들었더군요. 상술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시집이 구매하도록 만들고 읽고 싶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이전까지 시집이 지닌 권위에의 호소와는 좀 다른 방식을 차용하여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는 변화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강지혜 : 시집을 수집하는, 그러니까 읽는 것뿐만 아니라 모으기도 하는 독자들이 나타난 것 같아요. 특히 그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인선이 문학동네 시인선이라고 해요. 시집 색깔이 책장에 꽂았을 때 쭉 그라데이션을 만들 수 있는 예쁜 시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인선을 전혀 모르는 독자들도 문학동네 시인선은 알고 있더라고요. 비평가님들의 추천 평 중에 인상적이었던 게, 평론가분들이 박준 시인의 시집의 대중적인 인기에 대한 이야기를 잘 포장해 주려고 엄청 노력하신 지점이 있더라고요. 근데 인기라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독이 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기를 얻어서 많은 사람들이 시집을 읽는 것은 좋은 거니까요. 그 시집이 시를 읽게 되는 첫 번째 문이 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냥 정말로 굿즈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첫 번째 문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역할을 하는 시집들이 자꾸 등장하는 건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 맥락에서 저는 황인찬 시인이 등장했을 때도 어떤 시에 대한 팬덤을 형성하는 작가가 등장했다는 게 좋았어요. 근데 사실 『구관조 씻기기』를 읽어 보면, 시가 되게 정적이고 인간의 감각을 공간이나 시간으로 확장하는 방식의 시가 많은데요. 시를 처음 접한 독자분들이라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는 게, 그냥 한번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집은 뭔가 계속 갖고 다니면서 읽고 싶고 다시 의미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문학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가 그런 시집의 역할을 했던 것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양한 독자층의 관심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김태선 : 네, 양안다 시인께서는 혹시 하실 말씀이 있나요?

 

양안다 : 다른 분들 말씀을 계속 이렇게 듣고 또 듣고 있다 보니까, 처음에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이런 생각이 돼버렸어요. (일동 웃음) 그럼 황인찬 시인에 대해서 말하면 될까요?

 

김태선 : 황인찬 시인에 대해서 말씀해 주셔도 좋고, 이번에 SNS 이야기도 나왔으니까 그것과 관련해서 말씀해 주셔도 좋고요. 황인찬 시인의 추천사 중에 재밌는 게, SNS를 언급한 것이 눈에 띄어서 재미있었어요.

 

양안다 : 저는 아까 그 푸딩을 사면 준다는 작은 시집, 그리고 소품 인테리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각한 건데, 제가 2000년대에 시를 읽고 쓰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의 분위기는 잘 모르겠지만 시집은 그래도 시집이어야 한다, 시집은 시집다워야 한다는 경직된 태도와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겠죠. 예를 들면, 유연한 방식으로 시집을 홍보하거나 마케팅 하는 게 모든 시인에게 돌아갈 순 없는 기회니까, 주목을 받아야 하는 시인이 주목을 못 받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독자의 '파이'가 커지길 원하기 때문에, 경직된 생각보다는 조금 더 유연한 방법을 찾아 나서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태선 : 이런 활동들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을 것 같고 해야 하는 이야기도 많은데, 이런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 놓고요. 이제, 이렇게 설문을 통해 추천된 시집들 중에서 특별히 주목해 볼 만한 시집들, 혹은 시인들에 관해서 아마 나름대로 이야기를 준비하셨을 것 같아요. 이병국 시인께서 먼저 추천된 시집들 중에서 어떤 시집에 주목하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병국 : 저는 어쩔 수 없이 제가 추천한 시집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추천할 때 2010년대를 통으로 놓고 전반기, 중반기, 후반기, 이런 식으로 나눠서 했어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반기에는 박준 시인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시집이라고 생각했고요. 중반기에는, 세월호 사건이 문학장에 어떤 흐름을 형성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한 안희연 시인의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였고, 후반기에는 이소호 시인의 시집 『캣콜링』이었어요. 이 세 권이 각각의 시기에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봤거든요. 이 시집들이 10년을 통틀어서 제가 경험한 세계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들을 시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과거에도 무수한 문제들과 마주했었지만 세월호 사건 이전까지의 문제들은 저하고 약간 동떨어진 느낌이 없잖아 있었어요. 내가 당장 살아야 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 틀 안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자세를 지닌 상태에서 접한 박준 시인의 시집을 주목하게 되었죠.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 시집이 세계의 문제에서 약간 거리를 둔 채 개인을 중심으로 '나'와 '나' 주변의 문제들에 천착하여 그것의 내면을 드러내 표현하는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 그런 와중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은 그렇게 구축해 온 나 자신이 붕괴되는 경험을 하게 했죠.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나와 다른 문제,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내가 지금 실시간으로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고 나 또한 그 부분에 어느 정도 책임을 지닌 존재이며 사건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전까지의 나라고 생각했던 것이 붕괴돼 버린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이전의 나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어요. 너무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런 고민들이 안희연 시인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에서 찾아볼 수 있었어요.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어도 그런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죄책감의 형태로 형상화되는 한편에서 다른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 가능성이란 '나'를 회복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연대의 차원의 것이라고 안희연 시인의 시집은 제시하고 있죠. 그래서 저는 이 시집이 주목해야 하는 시집이라고 생각했어요. 201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우리'라고 하는 테두리가 공동의 목소리를 내어 촛불 혁명과 같이 뭔가를 변화시켰다는 실재를 경험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2018년, 2019년에 쓰인 소설이나 시는 앞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우리'라는 세계가 사실 '우리'가 아니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뭐지, 라고 생각할 때 이소호 시인의 『캣콜링』이 짠, 하고 나타나 정리를 해준 느낌이었어요. 우리라는 것이 사실 불안정한 것이었고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성찰이라고 할까요. 소설에서는 그게 좀 더 일찍 활발하게 진행됐죠.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서사들이 소설에 나타났는데, 그게 시에서 드러나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았어요. 그런데 소설에서 이뤄내고 있는 그런 것들을 이소호 시인의 『캣콜링』이 시로써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저는 2010년대를 세 개의 덩어리로 나눴을 때, 이 세 권의 시집이 각각의 시기를 응축하거나 이끌어 가는 시집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시집들을 추천하게 됐어요.

 

김태선 : 네, 정다연 시인께서는 주목할 만한 시집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한두 권만 말씀해 주셔도 좋고, 여러 권을 개괄적으로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정다연 : 저는 2010년대 초반에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시를 쓰는 학생이었는데요. 그때 당시를 돌이켜보면 황인찬 시인의 시집은 정말 특별하긴 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시집이 나오고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뭔가 주변에 시를 쓰는 친구들의 시도 달라지는 것 같았거든요. 예를 들어 타자의 자리를 열어 주고 어떤 익명성을 존중해 주면서 사물이나 시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 평등하다고 느끼게 하는 시들로 경향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황인찬 시인의 시가 온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를 쓰는 어떤 인식, 이렇게 시를 써도 좋다는 인식으로 바꾼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지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지점으로 읽혔고 또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것 같아서 저는 『구관조 씻기기』를 꼽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좋아하는 시집이기도 해서요.

 

김태선 : 네, 양안다 시인께서는 어떤 시집이 있었나요?

 

양안다 : 저는 여기 주요 시집 열한 권으로 추천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니까 추천을 많이 받지 못한 시집들, 제가 봤을 때 이 시집은 왜 많은 추천을 받지 못했을까, 하고 의아하기도 하면서 조금 놀라기도 했던 이름들을 생각해 봤는데요.

 

김태선 : 추천된 시집 중에서는 혹시 생각해 보신 건 없나요?

 

양안다 : 아, 여기서요? 그럼 여기 있는 시집 중에서 말해 보겠습니다.

 

김태선 : 네, 그 말씀은 좀 뒤에 가서 들어 보고 싶어서요. 추천되지 않았던 시집 중에서 주목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말이죠.

 

양안다 : 저도 황인찬 시인 시집을 먼저 말하고 싶은데,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가 나오고 나서, 시를 쓰는 분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시집의 완성도나 취향의 유무를 떠나서 쓰는 사람에게 큰 감흥을 주었고, 그렇기에 작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들구요. 그다음 박준 시인의 시집도 역시 그런 것 같고요.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와 『구관조 씻기기』가 둘 다 2012년도에 나왔는데, 박준 시인은 다른 의미로 새로웠던 것 같아요. 체험하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요. 시를 읽는 동안 내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어도 온전하게 이해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러기 때문에 또 많은 공감을 일으켰던 것 같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시집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준 시인의 시집이 서정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시집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선 : 말씀하신 것들 중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요. 정다연 시인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평론가들의 글이나 입을 통해서 절대로 들을 수 없었던 작법에 영향을 받는다는 문제 말이에요. 작법에 영향을 받는 건 단순히 새롭거나 좋아서만 되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이 어법이 그동안 없었던 다른 영역을 열어 놨기 때문에 아마도 그러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특히 양안다 시인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2000년대에 주류를 이뤘던, 이른바 미래파로 묶였던 시인들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소란스러운 느낌이 있었죠. 화려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서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읽는 독자는 어, 이게 누구 목소리지, 하면서 방황하기도 하고, 미로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에서 즐거워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황인찬 시인의 시는 굉장히 정갈하고 정제된 어법으로 말을 하고, 그러면서 기이하게도 어떤 감각을 추상화된 언어로 끌어올리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부분도 재미있는 것 같아요. 박준 시인과 서정에 관해 이야기하셨을 때, 단순히 어떤 쉬운 언어로 되어 있어 대중과 소통하기가 쉽다 정도에서 머무는 게 아니고 체험하게 한다는 측면이 더 많은 공감을 이끌지 않았나 싶어요.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강지혜 시인께서 주목한 시집은 어떤 것이었나요?

 

 

강지혜 : 추천된 시집 열한 권 중에서는 『캣콜링』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재밌게 읽었고 또 좋아하는 시집들인데요. 『캣콜링』 같은 경우는 한 평론가님이 그렇게 표현하셨더라고요. 2010년대가 아닌 2020년대를 여는 시집이라고요.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이 시집이 페미니즘 담론을 여는 데 기여를 많이 한 시집임에는 분명하고, 그런 기여뿐만 아니라 시집의 시편 속속들이 아름다움도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주목해야 하는 시집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이소호 시인한테 얘기를 들어 보니까, 『캣콜링』을 발표하고 나서 상당히 많은 악플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악플을 다는 대상이 여성 독자인 경우가 꽤 많다고 해요. 어떤 관점에서 여성들이 이 시집에 대해 안티를 하는 것인지, 그런 것도 좀 다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분명히 페미니즘을 안티 하는 세력도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2020년도가 시작되면서 더욱더 많은 논의를 끌어갈 수 있는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니 시인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저는 시인이 지닌 고유한 분위기를 계속 가져가는 게 긍정적인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황인찬 시인도 그렇고, 박준 시인도 그렇고, 이제니 시인도 그렇고요. 다른 예술 장르에서는 그런 정체성을 확실하게 하잖아요. 배우면 어떤 스타일의 배우, 음악가면 어떤 음악을 하는 음악가, 이런 식으로요.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 확실하게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시인들이 여럿 대두되었고, 그중에 이제니 시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음악과 수학과 문학을 가지고 이렇게 작업을 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이건 나밖에 못 하고 나만이 잘할 수 있는 거야'라고 끝까지 밀고 가는 부분이 되게 흥미로웠어요. 하나의 시집 자체로 완성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음 시집을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런 점에서 이 두 시집이 끊임없이 다음 시집을 원하게 하는 흥미로운 시집이라 생각합니다.

 

김태선 : 네, 지금 추천된 시집 열한 권 중에서 이제니 시인의 시집으로는 세 번째로 많은 추천을 받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가 있죠. 시인 이름으로만 통계를 내 보자면 두 번째로 추천이 많았고요. 그만큼 많은 팬들이 있고, 평단의 좋은 평가도 있는 것 같아요. 작품도 기이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말로 어떤 리듬을 만들어내는 그러한 모습들이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페미니즘에 관해 좀 더 얘기를 나눠 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사실 저는 남성이기 때문에, 태생적 차이로 인해서 여성들이 겪는 것과는 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말하는 것에도 다소 제한적인 게 있고, 글쓰기에 있어서도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박탈' 같은 말 등으로 에둘러서 표현하곤 했어요. 왜냐하면 이건 제가 직접 겪은 게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마음과 생각들을 전해 받는 식으로 이해한 것이니까요. 어쨌든 저는 한 다리 이상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여기 이소호 시인 말고도 추천된 시인 중에 임솔아 시인의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도 있었죠. 그 시집에 실린 「사슴」이라는 시였던 것 같아요. 거기서도 여성이 받는 폭력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있기도 하고, 여기 계신 강지혜 시인과 정다연 시인 두 분의 시에서도 그러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 문제는 중요한 것 같아요. 이병국 시인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태까지 우리라는 이름으로 은폐되어 있던 여성의 삶, 고통 받고 억압받았던 삶에 관해서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요. 그런데 이런 문제는 지금까지 정당한 몫을 인정받지 못하기도 했고, 또 정당한 몫을 인정받으려고 수면 위로 부상하는 순간 기성의 권력이나 가치 질서와 부딪치게 되면서 파열음을 낳기도 했죠. 그런 점에서 시인들이 어떤 식으로 이러한 문제들과 싸우고 있는지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특히나 문단에서는 수면 위로 드러나서 정리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했던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문제로 한동안 남성 시인이든 여성 시인이든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죠. 이게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그 아픔 때문예요. 그리고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면서 나온 것들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임솔아 시인의 시집에 실렸던 성폭력 반대와 관련된 문구들, 그리고 서효인 시인도 『여수』에서 본인의 시에 들어가 있을지 모를 여성혐오적인 문구들을 편집자를 통해 다시 한 번 걸러냈다고 하죠. 이와 관련하여 정다연 시인께 한 말씀 부탁을 드릴까요?

 

정다연 : 질문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김태선 : 자유롭게 말씀해 주시면 되는데, 저도 사실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일동 웃음) 제가 스스로 너무나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라서요. 이것도 사실은 문제죠.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벽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도 제가 가진 어떤 죄의식일 테죠. 근데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강지혜 : 이게 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다 같이 공부해 가면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페미니즘에 관한 질문이 있기에 제가 다시 한 번 추천된 시집 열한 권을 확인해 봤는데요. 여기서는 여성 시인의 시집과 남성 시인의 시집 비율이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시집이 판매되는 비율은 그렇지 않죠. 시집이 판매된 양으로 따지면 남성 시집이 훨씬 많이 팔렸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이해했어요. 출판시장에서 독자를 상정할 때, 특히 시집은 여성 독자들을 주 소비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남성 시인을 마케팅 하는 게 훨씬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페미니즘이, 이 담론의 첫 번째가, 쉽고 익숙한 것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어렵고 불편하더라도 같이 가는 길, 함께하는 길을 찾아내는 거잖아요. 출판시장에서도 그런 부분을 고려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태선 : 사실 그런 문제가 굉장히 어려운 문제죠. 이미 운동장이 너무나 기울어져 있으니까요. 조금 전에 이소호 시인의 안티팬 중에 여성이 상당히 많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런 부분은 그런 게 있을 거예요. 자기 안에 내재한 어떤 남성적 정체성, 남성적 가치 질서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러한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이겠죠. 김혜순 시인의 『피어라 돼지』에 나타난 표현들로 이야기하자면 여성'하기', 여성에게도 여성을 '하는' 움직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물론 남성도 마찬가지겠죠. 다른 식으로 무엇'하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성 문제뿐만 아니라 퀴어 문제에 있어서도요. 누군가가 이성애자이고 신체적 성별과 일치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도 단순히 그러한 정체성만으로 온전히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없고 그들 안에도 나름의 소수자성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 소수자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은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긍정적인 가치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한국 문학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퀴어'이고요. 소설에서는 김봉곤 소설가, 박상영 소설가의 소설이 있었고, 황정은 소설가의 『디디의 우산』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에서는 김현 시인의 시집 『글로리홀』과 『입술을 열면』이 있고요.

 

정다연 : 저는 뭔가 페미니즘에 관한 얘기에서도 그렇고 퀴어에 관한 얘기에서도 생각이 들었던 게, 모를 수 있는, 안전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인 것 같아요. 그 점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위치는 계속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어떤 지점에서는 내가 약자이지만 또 다른 어떤 지점에서는 아니니까요.

 

김태선 : 그렇죠, 상대적으로 다수가 차지하고 있는 쪽이 권력이 되죠.

 

정다연 : 네, 그런 위치의 변동을 계속 겪으면서 확장해 나가는 일이 아까 강지혜 시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는 맥락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위치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고, 항상 그런 지점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태선 : 2010년대에 들어서서 주목해 볼 만한 흐름 중 하나가 페미니즘과 퀴어에 관한 문제, 더 넓은 범주로 이야기하자면 소수자 문제일 텐데요. 이와 관련한 담론과 작품들이 나오는 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의 틀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게끔 하는 것 같아요.

 

 

이병국 :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할 때가 있어요. 이성애자이고 남자이며 어느 정도 나이를 먹는 등 사회에서 인정하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너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것인지 이해하면서도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워요. 뭐가 질문만으로 제가 배제되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냥 가볍게, '난 페미니스트야, 이 말을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과 노력을 하고 있어.'라고 얘기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하는 행동이나 말에 어떤 전제를 달게 되더라고요. 특히 '남자로서'라고 하는 토를 달게 되는 거죠. 남자로서, 내가 생각하는 건 이래, 이렇게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방어막을 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도 했음을 반성합니다.

 

김태선 : 사실 이게 가장 큰 걸림돌이자 문제죠. 이렇게 어떤 하나의 정체성을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요.

 

이병국 : 자기도 모르게 자기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남자로서' 혹은 '남자라서'라는 말이 일단 방어막을 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죠. 그리고 그런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의견을 물어봤을 때 제가 대답을 하는 방법은 교과서적인 멘트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여자다움, 남자다움, 무엇답다를 말할 때의 그 '다움'을 강요하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차이를 인정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며칠 전에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하는 책을 읽었거든요. 거기서 보면 그 작가가 '결정장애'란 단어가 지닌 문제를 제기해요. 우스갯소리로 아, 내가 결정장애가 있어서 못 해, 라고 쉽게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느냐, 그 말 속에 이미 장애인에 대한 비하가 있다고 지적당했다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자신이 일상적으로 쉽게 쓰는 말이 지닌 차별의 요소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페미니즘 운동은 내가 생각 없이 하는 말이나 행동들을 되돌아보는 사소한 실천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만이라도 다시 생각하여 문제를 인식하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 좋은 방향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문학에서는 어쨌든 좋은 작품들을 계속 생산해 내고 있으니까 그런 움직임은 더 활발하게 진행될 거고요.

 

강지혜 : 정다연 시인님의 말씀에 첨언을 하고 싶은 게, 몰라도 되거나 모를 수 있는 게 권력이 될 수 있는 위치라고 하셨잖아요. 페미니즘을 전면에 깔고 나오는 작품이 많아지면 모를 수 있는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몰라도 된다'와 '몰랐구나'로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작품들을 계속 만나면서 아, 내가 몰랐던 부분이다, 이걸 알아야겠구나, 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 거고, 그것이 마냥 불편하고 싫어서 난 이거 몰라도 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죠. 물론 전자가 많을수록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겠죠. 그런데 지금은 후자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페미니즘이나 소수자를 얘기하는 문학들이 등장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몰라도 돼, 라고 말하는 사람이 몰랐으니까 알아야겠어, 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스스로 변화하게 만드는 게 좋은 방향이 아닐까 합니다.

 

이병국 : 맞아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지점이 계속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태선 : 사실 문학의 본령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요.

 

정다연 : 그런데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김태선 : 마지막이라고 안 하시고 더 말씀하셔도 돼요.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요.

 

정다연 : 아, 그런가요. 이소호 시인님의 작품이 경험에서 나온 게 있듯이, 저도 제 경험을 작품으로 쓴 게 있어요. 그때 들었던 말이, 그거 진짜야? 그거 네가 한두 사람 얘기만 듣고 시에 그렇게 과잉으로 쓴 거 아니야? 이런 식의 말들로 의심을 하더라고요. 제가 겪은 경험조차 의심을 받는 경우가 있었어요.

 

김태선 : 일종의 가짜 취급을 받는 거죠.

 

이병국 : 네가 당한 당사자야? 당사자도 아니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자꾸 이렇게 눌러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정다연 : 맞아요. 혹은 어떤 예민함, 과민함으로 치부하기도 하고요.

 

김태선 : 사실 문학에서는 그게 당사자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는 건데, 이런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도 늘 걸림돌이 되죠. 가령 김민정 시인의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서도, 그 안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시인이 실제로 경험한 게 아니고 시적인 어떤 인물을 창조해 낸 것이잖아요. 실제로 시인 본인은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데 시집 안에서는 그렇지 않고요. 그런데 그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굉장히 많은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강지혜 : 맞아요. 예를 들어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를 읽으면서는 그 당사자 여부에 대해 질문하지 않잖아요. 정다연 시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너 정말이야? 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시선으로 보인다는 거고요.

 

정다연 : 아까 말했듯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들이 많이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김태선 : 사실 하나의 정체성을, 페미니즘을 정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하나의 정체성을 요구받는다는 것 그 자체도 일종의 폭력이겠죠. 자기가 원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말하고 싶은 자유니까 상관없을 텐데,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기를 강요받는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병국 : 그런 건 꼭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분들이 물어보더라고요. (일동 웃음)

 

김태선 : 그렇죠.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분들이 굳이 너 페미니스트냐고 물어볼 이유가 없잖아요. 예를 들어 남자가 남자한테 너 남자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폭력적인 경우밖에는 없죠. 이어서, 아까 김혜순 시인의 시 얘기가 나와서 그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해요. 『피어라 돼지』 시집 같은 경우는 이제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동물에게까지 미치는 이 세계의 문제, 그리고 어떤 감정의 문제도 있고요. 2010년대에 많이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몇몇에서 주목을 했던 것 중 하나가 동물에 관한 문제였어요. 가령 시집 중에서도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와 같은 시집이 나오고 있죠. 강지혜 시인도 여기 참여하셨고요.

 

강지혜 : 정다연 시인도 같이 참여했습니다. (일동 웃음)

 

김태선 : 네, 제가 아직 꼼꼼하게 읽어 보지 못해서요. 아무튼, 그러한 시집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최근 시인들의 시편들을 보면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룬 걸 볼 수 있어요. 이번에 추천 시집으로 올라오진 않았지만, 이장욱 시인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냈던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시집에도 원숭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 시가 있었고요. 강지혜 시인과 정다연 시인은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에 참여하시면서 어떤 마음으로 임하셨는지 궁금해요. 특히 동물과 관련해서 단순히 옹호하는 시선만 있는 게 아니고, 항상 어디서든 새롭게 이야기되는 것들에는 반대하는 시선들이 나타나게 마련인데요.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셨는지요.

 

강지혜 : 저는 페미니즘의 문제나 소수자성의 문제나 동물에 대한 문제 다 비슷한 결이라고 생각해요. 동물 역시 인간보다 수가 더 적기 때문에, 또는 인간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의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에 보호받지 못하는 영역에 위치하는 상황이 되는 거잖아요. 그게 여성이나 소수자, 아동, 노인, 장애인, 이런 문제에서도 그렇고요. 여성 문제에서는 태생이 여성이므로 자연스레 불편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래서 담론이 생겨서 터져 나오는 거지만, 사실 동물과 관련한 부분은 잘 모르다가 키우게 되면서 알게 되는 거더라고요. 이들이 얼마나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에 대한 것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이 다시 인간한테 주는 그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한테서는 받을 수 없는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뭐라 해야 할까, 저는 정말 구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데, 제가 키우는 강아지를 보면서 아주 낮은 곳에 있는 존재가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시집이 기획됐다고 했을 때 무척 달갑게 느껴졌어요. 기획위원인 유계영 시인한테 전화를 받았었는데, 생각보다 제가 강아지를 키우게 되면서 썼던 시들이 많더라고요. 좀 전에도 알아야 한다는 얘기,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이게 세계가 계속 확장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동물을 키우지 않던 사람과 키우는 사람 사이에 확장이 되는 거고, 아이를 키우던 사람과 키우지 않던 사람 사이에 확장이 되는 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제 시 세계나 제 인생을 확장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죠. 재밌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김태선 : 그 표현이 좋은 것 같아요. 낮은 곳에 있는 존재가 오히려 나를 구원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일종의 가치의 전도잖아요. 그와 같은 경험으로 인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게 하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알아 가게 하고 그렇게 세계가 확장하게 되죠. 좋은 말씀이신 것 같아요.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 중 하나가 그런 것이겠죠. 나와는 다른 삶을 만나면서 몰랐던 것들을 알아 가게 되고, 세계를 확장하게 되고, 더 많이 공감하게 되고요. 정다연 시인은 어땠나요?

 

정다연 : 일단 전부 공감하고요. 정말로 반려견을 키우기 전과 후가 많이 달라졌어요. 근데 저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극명하게 느꼈던 게, 남성도 강아지를 키울 수 있고 여성도 강아지를 키울 수 있는데 격차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강아지를 데리고 나갔을 때, 여성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했을 때 겪게 되는 일들은 그냥 여성으로 밖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인 것 같아요. 사회적 약자에 위치한 여성이 더 약자인 존재와 함께 밖으로 나갔을 때, 가령 노키드존 같은 문제도 그럴 때 겪게 되는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상황이잖아요. 그냥 저 혼자로서만 지냈을 때는 몰랐던 세계로 확장이 되는 것이고요. 저도 동물을 키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동물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게 자연스럽게 삶으로 들어오고요. 말이 정리가 잘 안 되네요. (웃음)

 

김태선 : 아니에요. 말씀 잘 해주셨어요. 이병국 시인께서도 고양이를 키우시죠.

 

이병국 : 네, 고양이요. 고양이는 산책을 시킬 필요는 없죠. 제 얘기 말고 제 여자 친구 얘기를 할게요. 여자 친구가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요. 그래서 강아지와 산책을 많이 하죠. 하루에도 몇 번씩 시키니까요. 그런데 정말 저는 생각도 못 한 경험을 꽤 많이 겪었더라고요. 주변 차들이 이유 없이 경적을 눌러 놀라게 하는 것은 다반사고 강아지를 향해 위협적으로 차를 몰고 오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을 거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고요. 어떤 날에는 누가 뒤로 다가와서 여자 친구의 뒤통수를 때린 적도 있대요. 무슨 개를 데리고 다니느냐고, 밖에 데리고 다니지 말라고 하면서요. 그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었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남동생이 산책 시킬 때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대요.

 

강지혜 : 거기에서 또 소수자성이 있는 게, 저는 대형견을 키우는데 대형견을 끌고 다니는 여성에 대한 것도 있어요. 작은 개와는 또 다르게, 왜 그렇게 컨트롤도 안 되는 큰 개를 끌고 나오느냐는 말을 듣거든요. 그래도 저는 시골에 사니까 좀 덜한 편이긴 한데, 도시에 살면서 대형견을 핸들링 하는 여성들한테는 상당히 자주 그런 폭력적인 상황이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이병국 : 덧붙여 이야기하면, 여자 친구의 강아지가 지금 스무 살이거든요? 1월이면 스물한 살인데, 아주 노견이잖아요. 그럼에도 산책을 시키는 이유가 있거든요. 하지만 산책을 시키고 있으면 그 사정은 묻지 않고 왜 그렇게 잘 걷지도 못하는 개를 데리고 다니느냐고, 죽여라, 보내라,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만약 사람이었으면, 물론 노인에 대한 혐오도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었으면 과연 그렇게까지 얘기를 하겠느냐는 거죠.

 

정다연 : 아까 까먹었다가 다시 기억이 났는데요. 동물을 키우면서 또 동물과 저의 격차가 엄청나다는 것을 느껴요. 그러니까, 제가 가진 권력과의 격차가 엄청나다는 걸 느끼는데, 제가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강아지는 아예 그냥 못 나가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항상 생각하게 되는 게, 그러면 권력을 가진 '나'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권력이 있는 저는 선택할 수 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존재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럴 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 의무를 다하고 실천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태선 : 2010년대 시의 경향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앞서 박상수 시인 겸 평론가의 글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를 언급하면서 말씀드렸던 윤리적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2010년대에 이르러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윤리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한편에서는 이런 윤리적인 문제에 치중하다 보니까 평단에서는 그러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주체가 왜소해졌다, 시가 너무나 삶에 밀접해 있어서 실험의 공간이 없어졌다, 2000년대처럼 실험적인 경향의 시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시가 새로운 활력을 잃어 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어떤 비판적인 진단도 나온 적이 있어요. 일정 지점에서는 동의하시는 부분도 있을 것 같지만, 시인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왜소해진 주체라는 부정적인 표현에서요. 왜소해진 주체라는 경향을 띠는 시편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일상의 세계를 더 세밀하게 바라보는 작은 주체가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죠. 사실 이런 문제는 201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어떤 세계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요. 이를테면 '노오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죠.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이룰 수 있는 성취의 한계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열어 가겠다는 다짐도 있을 것 같고요. 이병국 시인께 한 말씀 들어 볼게요.

 

이병국 : 네, 저도 평론을 쓰지만 평론가들이 어떤 명칭을 짓는 것은 그것을 구체적인 용어로 적확하게 얘기하고자 하는 바도 있을 거고, 그 용어를 제시함으로써 어떤 권위를 선점하고자 하는 바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앞서 말씀하신 선택지를 제시하는 입장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지금 시인들이 윤리적 문제에 치중해서 쓸 수밖에 이유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시인은 결국은 세계의 어떤 문제들과 변화 양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왜소해졌다 하는 얘기들은 결국 세계가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2010년대의 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오는 것도 과거 2000년대와 2000년대 이전의 어떤 세계하고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봐요. 내가 그런 시대를 살아오고 경험하고 있으니까, 관통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내면화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게 그렇게 옳지 못한가 물으면 그것도 아니니까요.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감정적인 측면과 또 다른 연대로 실천해 나가려고 하는 태도나 페미니즘과 관련된 문제의식도 내가 그 시대를 관통해 오고 그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의 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겠죠.

 

김태선 : 네, 사실 이 문제는 정서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시대에 대한 슬픔, 최근 시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감정 표현의 낱말 중에 하나가 슬픔이죠. 물론 좌절, 분노, 이런 것들도 있지만 슬픔이 가장 많은 것 같아요. 신철규 시인의 시집 제목에 들어 있기도 하죠.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도 오다, 서럽다, 라는 신라 향가의 말을 한자로 음차해서 쓴 거잖아요. 연배 차이가 크고 다른 층위에서의 감정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서럽다는 감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겹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이유에서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양안다 시인의 시집에서도 슬픔에 관한 감정을 바탕으로 쓴 시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 슬픔의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사실 시인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실례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이미 시로써 발화한 것을 다시 산문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건 많은 고통이 따르기도 하잖아요. 양안다 시인께서는 동인 활동도 하고 계시잖아요.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동인분들 혹은 주변의 동료 시인들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도 궁금해요.

 

 

양안다 : 저는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한국 시는 슬픔이 조금씩 깔려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특히 2010년대는 더욱요. 사실 슬프지 않은 시를 상상해 보면 떠오르는 게 많지는 않거든요. 이것을 2010년대에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하나의 맥락으로 읽을 수도 있을 거고, 혹은 2000년대의 미래파와 상반되는 작품들로 인해서 2010년대 슬픔의 정서가 더 부각되는 것도 있을 거고요.

 

김태선 : 네, 그렇습니다. 사실 슬픔이란 게 말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긴 해요. 이미 표현된 것인데 이 표현을 다시 풀어서 말하라고 하니까요.

 

이병국 :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평론가들이 시인들한테 질문할 때 되게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어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시로 이미 다 썼는데 이걸 굳이 길게 풀어서 얘기해 달라고 하는 게 너무 실례되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어려워하죠.

 

김태선 : 그래 놓고 물어보죠. (웃음)

 

이병국 : 네, 얘기하기 싫어도 얘기하게 만드는 걸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확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강지혜 : 아까 왜소화된 주체 얘기를 하셨는데, 왜소화됐기 때문에 슬픔이 진해졌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사회가 주체 말고 타자들이 훨씬 거대해진 상황이죠. 어떤 부조리들이 훨씬 거대해지면서, 그러니까 '빌런'들이 다 거대해진 상황인 거예요. 그래서 인생을 살아갈 때 나라는 존재를 더 이상 지키기가 어려워진 상황인 거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왜소해진 상태인 거죠. 왜소하니까 슬픔이 좀 더 짙어지는 거고요. 왜소하지 않았을 때와 왜소할 때의 슬픔의 깊이에 차등을 둘 수는 없겠지만, 왜소하기 때문에 거기서 아주 미세하게 건져 올리는 슬픔이 있을 수 있는 거죠. 저는 시들이 갖고 있는 어떤 슬픔이나 처연한 감정도 사실은 살기 위해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으로 읽어요. 그래서 양안다 시인의 작품을 읽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되게 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들, 영화관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냥 정적으로 한 면만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사실은 주체가 그 안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고요. 인생이 굴곡지다는 것은 누구나에게 똑같은 거니까, 그런 일들이 그런 정적인 공간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 자체가 더 슬프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김태선 : 네, 그런데 평론가들이 바라보는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그 슬픔이라는 게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작용하는 게 아니고 슬픔으로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는 독특한 움직임들이 2010년대 한국 시단의 시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인 것 같아요. 이게 예전 같았으면 슬픔 같은 건 단순히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감정이었는데, 지금 2010년대에 나타나는 슬픔의 양상은 그것보다는 어떤 연대 정서를 만들어내는 측면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더 큰 힘을 내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가령 촛불 혁명 같은 것도 아마 그러한 시대적 정서가 연대의식을 만들어내서 이뤄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이영광 시인의 『끝없는 사람』에 수록된 시편들에 촛불 혁명이 있었던 광장에서의 체험에서 '나는 작아질수록 더 커진다'는 그런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도 아마 같은 맥락이었던 것 같아요.

 

이병국 : 지금 신철규 시인의 시집을 그냥 아무렇게나 딱 펼쳤는데, 방금 얘기하신 것처럼 그 슬픔을 드러냄으로써 카타르시스로 넘어가게 하는 시가 나오네요. 지금 눈앞에 있는 시 제목이 「슬픔의 자전」이라는 시인데, 첫 행이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로 시작하고, 끝에서 두 번째 연을 보면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준다'라는 문장으로 이어져요. 이런 시에서처럼 슬픔을 나누면서 함께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연대의 정서가 2010년대의 시가 품고 있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김태선 : 가장 많이 추천된 시집 열한 권 중에서 아직 많이 논의가 안 된 시집이 백은선 시인의 『가능세계』와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 진은영 시인의 『훔쳐가는 노래』가 있는데, 마침 이병국 시인께서 『훔쳐가는 노래』 시집을 가져오셨기에 이 시집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말씀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병국 : 저는 책을 읽으면 다 읽은 날짜와 시간을 적어 놓거든요. 제가 『훔쳐가는 노래』를 읽었다고 적어 놓은 때가 2012년 11월 10일 22시 22분이에요. 그 뒤로 부분부분 찾아 읽긴 했지만 다시 처음부터 읽은 것은 이 좌담에 앞서 추천목록에 올라온 걸 보고 나서였어요. 그랬더니 2012년에 이 시집을 읽었을 때 생각이 나는 거예요. 박준 시인과 황인찬 시인의 시집을 비슷한 시기에 읽기는 했지만 이 시집은 두 시인의 시집이 불러왔던 느낌과는 정반대였어요. 진은영 시인의 첫 시집부터 따라 읽어서 그런가, 저는 이 시집이 2000년대 어떤 경향을 정리하며 그 시대를 닫는 시집처럼 느껴지더라고요. 2000년대에 여러 가지 논의들이 있었고 진은영 시인도 그 논쟁의 가운데에 있었잖아요.

 

김태선 : 문학과 미학에 관한, 문학에서의 미학과 정치성에 관한 논의였죠.

 

이병국 : 네, 저는 이 시집이 시인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인식의 틀, 혹은 어떤 미학적인 것들을 가장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는 시집이었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때 당시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최근에 다시 읽으니까 그 생각이 맞았구나 싶었고요.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시를 읽을 때 좋은 시들에 표시를 해놓으면서 읽는데, 진은영 시인의 이 시집에는 표시를 안 했어요. 어느 걸 펼쳐도 다 좋았거든요. 정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좋아서, 굳이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까지도 기억나는 거예요. 정말 훔쳐오고 싶은 작품들이었죠.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저한테는 진은영 시인의 시집 『훔쳐가는 노래』는 2000년대를 정리하는 시집이자 다른 시인에게 바통을 터치해 주는 그런 느낌의 시집이었어요.

 

김태선 : 그렇군요. 혹시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나 백은선 시인의 『가능세계』에 관해서 이야기하실 분이 있나요?

 

강지혜 : 이소호 시인의 서가에서 『가능세계』를 처음 만났는데, 이소호 시인이 그 시집 너무 좋다는 거예요.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모르겠고 그냥 좋아'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이렇게 얘기를 해서 저도 읽게 됐는데, 저도 모르겠고 그냥 좋더라고요. 이게 뭐지? 이렇게 공감되고 있는 이 지점들은 뭐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작품이었고, 조금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 이소호 시인의 시집도 그렇고 백은선 시인의 시집도 그렇고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지금 30대를 보내고 있는 여성들이 갖고 있는 그 고통, 저희 세대가 갖고 있는 그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이 시집이 좀 더 주목받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주목을 그렇게 많이 받지 못한 것 같아요.

 

김태선 : 이번 추천에서요? 아니면 평단에서요?

 

강지혜 : 평단에서요. 물론 상도 받고 주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캣콜링』처럼 전면으로 대두되진 않았지만 여성의 삶에 관한 고통이 진하게 깔려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생각보다 논의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저는 그래서 페미니즘적으로 읽어 봐도 재밌는 시집이라고 생각해요.

 

김태선 : 저 개인적으로는 아마 가장 많이 인용한 시인 중에 한 명이 백은선 시인이었을 거예요. 물론 한 시인의 시집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건 아니지만, 뭔가 기획특집을 써야 할 때 꽤 자주 거론했던 시인이었어요. 공교롭게도 이 추천에는 넣지 않았지만, 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여성들의 어떤 정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그런 시집 중에 하나가 바로 『가능세계』가 아닌가 싶어요. 물론 이와 관련해서는 이소호 시인의 『캣콜링』의 등장인물도 이야기를 해야겠죠. 이번 결산의 추천 이유 중에 소설에서는 82년생 김지영이 있다면, 시에서는 88년생 이경진이 있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능세계』는, 요즘 말로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르잖아요, 밀레니얼 세대가 지니고 있을 법한 그런 세계인식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시집 중 하나가 『가능세계』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시집에 이미 끝이지만 더 끝장나고 싶다는 식의 표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끝났는데 더 끝을 바라는 그런 강렬함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병국 : 저에게 『가능세계』는 내용적인 측면보다 형식적인 측면, 쓰는 방식이 눈에 들어온 시집이었어요. 시 쓰기 방식 중에 많이 회자되는 것이 은유와 환유라고 이야기할 때, 이제니 시인의 시가 많은 문장을 계속 쭉 이어 가는 환유적인 방식의 시 쓰기라고 한다면, 백은선 시인의 시는 은유적인 방식의 시 쓰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첫 시부터 그런 부분이 포착돼요. 아주 은유적인 방식으로 시어를 밀고 나가 장시의 형태로 쓰는 것도 놀라웠고요. 그런 점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김태선 : 백은선 시인의 시를 장시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많이 있고, 이건 장시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길이만 길 뿐이지 장시 형식은 아니라고요. 그런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방식이죠. 왜냐하면 길게 쓸 수가 없는 표현의 방식으로 길게 쓰기 때문에. 그래서 놀라웠어요. 그런 쓰는 방식의 측면에서 지금 이제니 시인의 시가 굉장히 많은 지지를 받았는데요. 근데 저는 사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형식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또 어떻게 이야기해 주실지 궁금한데요. 이제니 시인의 시에 관해서 리듬에 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어떤 분은 미분이라는 굉장히 어려운 표현을 쓰면서 말씀해 주시기도 했는데, 이게 어떤 작은 차이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강지혜 : 저는 이제니 시인의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재밌게 느꼈던 게, 접속사를 많이 안 쓰는 게 특징 중 하나일 것 같아요. 접속사라고 하는 것이 다음 문장에 나올 개연에 대한 것을 독자들한테 계속 인지시키는 거잖아요. 근데 접속사를 쓰지 않고 문장을 내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시 안에 만들어진 리얼리티는 온전히 내가 책임진다'는 어떤 자신감이 느껴지는 시집이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매료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독자들에게 어떤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주는 문장으로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근데 그게 독자들한테 자연스럽게 읽히고요. 쓰는 사람이 자신감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평론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이제니 시인이 음악도 하시잖아요. 음악의 원리를 가지고 언어를 쓰는 방식이 되게 재밌게 느껴졌어요. 예를 들어, "눈물 다음에 너울이 온다, 너울 다음에 하늘이 있다,"라고 할 때, '눈물'이 '도'고, '너울'이 '레'고, '다음'이 '미'고, '온다'가 '시'고, 뭐 이런 식으로 수학적인 원칙에 의해서 음계처럼 읽히는 게 가능한 거죠.

 

김태선 : 음악에서 쓰는 코드의 진행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수학으로 따지면 어떤 행렬이 조금씩 변주되면서 가는 방식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강지혜 : 네, 음악에는 높낮이가 있어서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나타나는데, 언어는 그 높낮이에 수평적인 방식까지 더할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엄청 공감각적으로 시가 발성되게 만드는 그런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내서 쓴다는 것 자체가 멋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은 할 수 없고 자기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시집에서도 자신감이 느껴져서, 읽을 때 부럽기도 하고 좋게 느껴지는 시였어요.

 

김태선 : 참 재밌는 지점 중에 하나죠. 어떤 시인은 누군가의 작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어떤 시인은 너무 자신만의 개성적인 세계를 만들어 놔서 따라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게요. 한편, 이번에 추천을 많이 받은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 같은 경우는 사실 2010년대와 관련해 어떤 특징적인 지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 시인 자체가 생존한 시인 중에 시인을 대표하는 일종의 아이콘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선정된 것 같아요.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어떤 존재에 대한 사유의 방식이랄까요. 그리고 그 움직임들, 감정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죠.

 

이병국 : 맞아요. 이성복 시인님은 여전하시구나, 라는 느낌이었어요.

 

김태선 : 김혜순 시인과는 또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김혜순 시인도 이성복 시인과 마찬가지로 독보적인 시인이기는 하지만, 김혜순 시인은 갈수록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피어라 돼지』 이후에 나왔던 시집 중에 추천된 게 『죽음의 자서전』과 『날개 환상통』이 있죠. 『날개 환상통』에서 또 달라지는 지점이 있고요. 혹시 덧붙이실 말씀이 있나요?

 

강지혜 : 그게 저는 여성의 삶이라는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나, 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방식으로 계속 확장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김혜순 시인 같은 경우는 여성이고, 어머니고, 교사이고, 이런 식으로요. 이러한 방식을 삶에서나 시에서나 마찬가지로 적용하는 거죠. 문장을 만드실 때도 명사 또는 동사를 쭉 붙여 가면서 만드는 방식이 그냥 단순히 언어유희가 아니라 인식의 확장도 그렇게 되는 것 같아서, 그게 계속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하실 수 있는 힘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태선 : 2010년대에 들어 시단에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이라면 시집 출간 경로의 다양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성 출판사의 새로운 시인선도 있고, 신생 출판사의 시집들도 있죠. 그리고 독립 출판에서도 시집들을 내고 있어요. 예를 들어 유명 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를 패러디한 '문학과죄송사'가 만들어져 신춘문예에서 낙선한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내는 일도 있었죠. 기성 출판사 중에서는 문학동네 시인선이 2011년 1월 첫 선을 보였어요. 물론 예전에도 시집을 내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인 게 2011년 1월에 첫 번째로 최승호 시인의 『아메바』가 출간되면서부터죠. 이후로 2013년 8월에 시인동네 시인선, 2015년에 파란 시선, 2016년 5월에는 비록 두 권만 나오고 중단되었지만 삼인시선집, 2017년 6월에 시인수첩 시인선이 나왔어요. 2018년 3월에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2018년 4월에 걷는사람 시인선, 2018년 9월에는 아침달 시집이 나왔고, 아직 첫 책만 나오긴 했지만 2019년에는 봄날의 책에서 한국시인선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기 시작했죠. 이렇게 보니 2018년에 유독 많이 새로운 시인선이 출현했네요. 여러분들께서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이병국 : 방금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정말 다양한 출판사가 등장하여 시인선을 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저 역시 그중 한 곳인 파란에서 첫 시집을 출간했고요. 재밌는 것은 새로 시인선을 내는 대부분의 출판사가 시인들이 주도해서 만들어진 회사라는 점입니다. 특히 신생 출판사의 경우가 그렇고요. 눈에 띄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미 문단 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인데요. 어떤 의도로 시인선을 내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이런 시인선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시인들을 호명함으로써 시의 다양성 확충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실력은 있지만 등단제도의 문제로 등단하지 못한 시인의 시집을 출간하여 문단의 고질적 문제를 돌파하려는 측면도 주목해야 할 지점입니다. 또 가만히 시인선 목록을 살펴보면 그렇게 만들어진 시인선의 특징이 뭔가 하는 질문도 하게 됩니다. 시인 개개인은 고유한 시적 세계를 표현해 내겠지만 어느 정도 공통된 지점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출판사는 자신의 스타일에 합당한 시인의 시집을 시인선으로 묶음으로써 차별화된 방식으로 독자와의 접점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창비 스타일이나 문지 스타일로 묶인 시집들처럼요. 그런데 제가 아직 눈이 밝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 차별의 지점이 보이진 않습니다. 이는 기존 시인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방금 말했듯이 창비나 문지는 각자의 영역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의 시인선을 보면 차별화된 지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여전히 역사와 전통에 입각한 자신들의 스타일을 고수한 지점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많거든요. 전 차별화된 지점이 있어야만 시인선의 가치도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해요.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는 시인선은 아무리 많이 생긴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결국 기획의 문제, 기획자의 역량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걸까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2020년대에는 지금보다 더 다채로운 시인선이 나와 다양한 경향의 시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양안다 :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습니다. 특히 신인의 경우에는 기존 출판사보다 더 많은 경로가 생긴다는 게 반가운 일이라 생각하거든요. 문학상을 기준으로 말하기 좀 그럴 수도 있는데, 아침달에서 발간된 오은 시인의 시집, 그리고 걷는사람에서 발간된 김해자 시인의 시집이 수상한 일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상 수상이 유의미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신인의 입장에선 믿음이 더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새 출판사도 힘을 받아서 더 좋은 시집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고요.

 

강지혜 : 저는 새롭게 만들어진 시인선에서 시집을 내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혹시 기존 출판사와 계약할 때랑 크게 다른 게 있나요? 예컨대 인세의 비율이 현재의 것과 다르다거나 하는 부분이요.…… 출판사와 저자의 계약 관계가 기존의 것과 다르지 않다면, 사실 형식은 같지만 이름을 새롭게 한 시인선, 출판사가 등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기존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출판사의 시인선이 아닌 색다른 시인선이 등장해서 독자들이 보다 많은 시인, 다양한 스타일의 시를 접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요. 또한 등단이라는 기존의 제도가 아니라 시집 한 권을 충분히 묶을 수 있는 재능 있는 저자들이 시집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그 원고를 투고할 수 있는 창구가 많이 생겼다는 것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다연 : 저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편입니다. 아직 충분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과거에 비해서 다양한 형태로 책이 출판되는 것은 좋은 변화 같아요. 앞에서 나온 얘기 중에 주요하게 언급되는 시집들이 다채로운 것에 비해서 발표된 출판사의 경우는 제한적인 것 같다는 얘기도 나왔었잖아요? 그 점을 되짚어 보아도 이러한 변화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조금 결이 다를 수 있지만 저는 작품을 발표하고, 시집을 묶는 일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은데요. 제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작품을 발표하는 일도, 시집을 묶는 일도 등단이라는 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주변에 글을 쓰는 친구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요. 그런데 요즘은 아예 시집 한 권의 분량으로 투고를 하기도 하고, 등단 여부를 떠나서 작품을 문예지나 독립 잡지에 싣기도 하고요. 또 개인이 텀블벅 같은 플랫폼을 이용해서 직접 독자와 소통하고 책을 내기도 하고요. 그런 변화들을 눈으로 지켜보면서 책을 내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 좋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김태선 : 네, 여러분께서 말씀하신 것들 중 계약 조건 등의 처우는 달라지지 않아서 여전히 시를 쓰는 일만으로는 생계를 이어 나가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출간 경로는 다양해졌지만 오히려 출판사마다 시집의 특색이 사라져 각각의 특징이 없어 아쉽다는 점은 출판사의 편집자들도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인 것 같습니다. 이제 좌담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음은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문장 웹진》 2010년 총결산 중 비평가들에게 추천을 받지 못했거나 적게 추천받은 시집 중에서 이 시집만큼은 반드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게 있을 것 같아요.

 

강지혜 : 이영주 시인의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함기석 시인의 『오렌지 기하학』, 이성진 시인의 『미래의 연인』 등등 다양한 시집이 떠오르는데요.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시집은 조혜은 시인의 『신부 수첩』입니다. 『캣콜링』이 가려져 있던 '여성'이라는 존재를 색다른 방식으로 드러내서 페미니즘 담론에 불을 붙였다면, 『신부 수첩』에서는 『캣콜링』 이전에 이미 여성-딸-어머니-아내-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 대한 아주 뜨거운, 이야기를 한 바 있었습니다. 이 존재가 가진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매우 세밀하고 솔직한 묘사가 인상적인 시집입니다. 이 시집을 읽으면 꼭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결혼이라는 제도, 그 제도가 가져오는 일그러진 관계성에 대해서 충분히 감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수록된 시 편편이 가지고 있는 미적 가치도 뛰어난 시집입니다. 시집이 가진 힘과 완성도에 비해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정다연 : 저는 추천하고 싶은 분들이 여러 명 있는데요. 먼저 김이듬 시인의 작품들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2010년대에 다섯 권의 시집을 내셨는데, 언급되지 않아서요. 매 작품마다 놀라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유계영 시인의 시집들을 추천하고 싶어요. 각각의 시집들 모두 굉장히 많은 사랑을 받았고, 저 역시 좋아하며 읽었는데 언급되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그리고 언급은 되었지만 추천이 덜 되었던 작품 중에는 주하림 시인의 『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을 꼽고 싶습니다. 주하림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게 되어서 때마다 한 번씩 계속 꺼내 보는 것 같아요. 다음 시집도 기다리고 있어서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임솔아 시인의『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대상을 직시하는 임솔아 시인만의 시각을 정말 좋아합니다.

 

양안다 : 저는 반드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추천목록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추천이 적었던 여러 시집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두 분류로 나누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작가와 독자, 둘 다 언급이 많았던 첫 시집을 생각해 봤는데요. 김승일, 송승언, 유계영, 안미옥, 서윤후, 문보영 등 여러 시인의 첫 시집이 있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두 번째는 삶과 밀착되어 있거나 사회적인 맥락을 담고 있는 시집인데요. 김사이, 김중일, 송경동, 최지인, 박소란 등 여러 시인의 시집을 생각했습니다.

 

이병국 : 앞에서 적게 추천 받았던 안희연 시인의 시집을 언급하긴 했지만 이번 목록에서 보이지 않아 아쉬웠던 시집으로는 이혜미 시인의 『뜻밖의 바닐라』를 들고 싶네요. 전 이 시집이 상당히 흥미로웠는데요. 그 이유가 일상적 폭력의 양상을 시로 형상화해 내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요. 시집에 있는 시 중에 「스프링클러」라는 작품이 있어요. 전 이 시가 일상 속의 폭력을 재현하는 탁월한 시라고 봤거든요. 식물의 초록을 초록으로 만들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물이잖아요. 그런데 물을 스프링클러로 마구 뿌려대는 것은 폭력이죠.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뿌리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 행위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은 일상 속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수행된 행동들이 간과하는 폭력의 지점을 폭로한 것이라고 봤어요. 이혜미 시인의 이 시집 안에는 이런 시들이 꽤 많이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최근 활발히 논의되는 페미니즘을 문학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경향을 보여주는 시집이란 생각이 들어 주목되었어야 한다고 봐요.

 

 

김태선 : 이제 슬슬 자리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아요. 오늘 2010년대의 주목할 시집들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좌담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며 느꼈던 소감과 다가올 2020년대에 여러분께서 앞으로 계획하신 일들에 관해 묻는 것으로 좌담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병국 시인께 먼저 말씀을 부탁드릴까요.

 

이병국 : 이번 좌담을 계기로 2010년대 시를 다시 읽어 보게 되어 새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잊고 있던 어떤 한때를 건져낸 느낌이랄까요.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하게 된 부분도 깊이 새기게 될 것 같고요. 그런데 2020년이라고요? 나하고 상관없는 원더키디의 시대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가슴이 좀 아프네요. 당장 닥친 일들을 하면서 한 해를 보내게 될 것 같아요. 거창한 계획을 하기에는 당장의 먹고사니즘 문제로 빠듯한 게 현실이니까요. 그럼에도 오늘 이 자리로 말미암아, 2029년에는 제 시집이 언급될 수 있도록 세계를 민감하게 감각하고 표현하는 시를 정말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재밌었습니다.

 

양안다 : 질문 듣자마자 생각한 건데, 만약 2029년에 2020년대 결산특집 좌담회를 한다면 그때도 오고 싶습니다. 2020년대는 그때까지 그것을 목표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저는 오늘 많이 듣다 가는 것 같은데 2029년에는 보다 생산적인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지혜 : 오랜만에 서울에 상경해서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제주로 돌아가면 일단 열심히 마감을 해야 하고요. 또 현재 저에게 가장 큰 장기 프로젝트인 육아에도 열정을 쏟아야겠지요. 그렇게 확장되는 저의 세계를 작품으로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다연 : 2010년대의 주목할 시집을 갈무리하는 좌담에 참여해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뻤고요. 2020년대에는 또 어떤 시집들이 나올지 기대되기도 하고, 더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태선 : 네, 여러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2020년 경자년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계획하신 일들 잘 이루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김태선

사회 / 김태선

문학평론가.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강지혜

참여자 / 강지혜

2013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내가 훔친 기적』,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공저)』가 있다. 제주에 살면서 큰 개 한 마리와 작은 체구의 딸아이를 키우고 있다. 사실은 이들과 함께 자라는 중이다.

 

양안다

참여자 / 양안다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작은 미래의 책』,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

 

이병국

참여자 /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2019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정다연

참여자 / 정다연

시인. 2015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문장웹진 202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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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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