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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편(3) - 거울, 시홀

  • 작성일 2021-03-01
  • 조회수 1,515

[느린 기린 큐레이션]

 

 

〈느린 기린 큐레이션〉
2021년 3월(웹진 편 3)

 

 

조시현, 조온윤

 

 

 

 

 

    안녕하세요, 느리미와 기리니입니다. 한 달 동안 잘 지내셨나요? 지난 2월에는 떡국을 지어먹으며 나이도 한 살 더 먹게 됐던 설날도 있었고, 연인들이 단 과자를 주고받는 밸런타인데이도 있었죠. 긴 겨울방학을 보내던 학생들은 다시금 새 학기를 시작할 준비를 했을 테고요. 입춘이 지나면서는 차츰 기온이 올라가 제법 봄 느낌이 나기 시작했으니, 여러모로 설레는 마음으로 한 달을 보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새롭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계절인 만큼 여러분의 매일매일도 새롭고 아름답기를 늘 바랄게요! 저희 느린 기린 큐레이션은 지난달에 이어 3월호에서도 독자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웹진을 소개하려 합니다. 특히 이번 편에는 기존의 웹진 형식을 탈피한 온라인 전시 프로젝트 소개도 준비되어 있으니 재밌게 읽어 주세요. :)

 

 

 

① 환상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환상문학 웹진 《거울》

    느린 기린 큐레이션의 이번 웹진 편에서 첫 번째로 소개할 웹진은 국내 최장수의 장르문학 전문 온라인 매체이자 장르문학 작가들의 인적 네트워크로도 기능하고 있는 《거울》입니다. 다양한 장르문학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가 하면 직접 작가가 되어 자유롭게 작품을 선보이고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도 있는 문학 커뮤니티죠. 《거울》이 문을 열고 첫 호를 발행했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18년 전인 2003년 6월입니다. 온라인 매체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긴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아마 장르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웹진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 《거울》에서 소설집 발행, 원고 편집, 사이트 운영 등의 역할을 맡고 계시는 편집위원분들로부터 작가 네트워크 공간으로서의 《거울》과 장르문학에 관한 이야길 들어 보았습니다.

 

 

 

Q. 안녕하세요? 느린 기린 큐레이션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 대해서 짧게 소개를 부탁드려요.

A. 환상문학 웹진 《거울》(이하 괄호 생략)은 '환상은 현실의 거울'이라는 슬로건 아래 모인 장르소설가, 번역가, 비평가들이 자발적으로 출간하는 월간 웹진(문예지)이자, 장르문학 작가 공동체라는 인적 네트워크입니다. 창간부터 지금까지 장르 작가의 산실이자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Q. 방금 말씀해 주신 것처럼, 거울을 소개하는 페이지에 “필진의 경계가 불명확한 인적 네트워크”라고 쓰여 있는 걸 보았어요. 이렇게 자유로운 구조 속에서 웹진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거울이 운영되는 방식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거울의 전 구성원(필진)은 소설과 기사를 자유롭게 게재할 수 있으며, 2018년부터는 업데이트를 2회로 나누어 1일에는 소설(단편)을 15일에는 비소설(기사 및 리뷰 등)을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업데이트는 운영편집진에서 담당합니다. 작가 교류의 경우엔, 최근엔 조금 뜸합니다만 필진이 서로의 작품을 읽고 토론하며 서로의 창작 활동에 도움을 주는 단편소설 합평회가 운영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연도별 중단편선, 작가별 중단편선, 소재별 중단편선을 해마다 꾸준히 발행해 왔으며, 장르문학 최초의 비평선인 『B평』을 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2019년부터는 아작 출판사와 협업을 통해 연간 단편선을 정식 출판하고 있습니다. 올봄에도 어김없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Q. 온라인에서의 웹진 운영뿐만 아니라 합평회와 단편선 발간 등 오프라인에서의 활동도 무척 활발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거울에서 운영과 편집, 업데이트 등을 맡고 계시는 편집진분들은 누구신가요?

A. 2016년부터는 편집장 없이 운영편집진이 일을 분담하여 담당하며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운영편집진 임기는 연임 제한 없이 1년이며, 매년 10월에 필진 추천과 본인 지원을 받아 새로 구성됩니다. 운영편집진이 하는 일은 매달 웹진 업데이트, 소식지 발행 및 행사 진행, 장르문학과 관련된 프로젝트 기획, 장르문학 단체와 협업 추진 등입니다. 2021년 현재 운영편집진은 총 13명(고타래, 구한나리, 김수륜, 김인정, 김주영, 남세오, 엄정진, 심너울, 아밀, 이경희, 이서영, 이형진, 최지혜)입니다.

 

Q. 특정 대표자 없이 여러 명의 편집위원께서 운영 업무를 분담하는 게 특이한 구조인 것 같아요. 하나의 평등한 협동조합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거울이 2003년에 처음 문을 열었으니까 올해로 운영한 지 18년 차가 되었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 전문 웹진이 아닐까 싶어요. 거울의 역사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A. 거울은 ‘환상문학’ 웹진으로 타이틀을 걸고 시작했지만 사실은 장르 경계 문학 단편소설과 작가 중심 웹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월 업데이트를 하고, 매년 연간 단편소설집을 내고, 프로젝트나 특집을 통해 공통된 주제의 소설을 쓰며 종이책으로 내기도 하고, 독자 창작에 평을 달아 창작을 독려하며 그 안에서 새로운 동료 작가를 맞이하는 것은 18년 동안 똑같이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1, 2, 3기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공동의 편집위원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 예전에는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던 업데이트일을 날짜로 바꾸고 현재는 픽션과 논픽션 부문으로 나누어 한 달에 두 번 업데이트한다는 것, 사이트에 좀 더 접근하기 편하게 메뉴 이름을 고치거나 업데이트가 덜한 메뉴를 없애거나 합치거나 새로 만든 것 등은 거울 자체 내에서 변화하고 바꾸며 적응한 부분입니다. 앞으로도 거울은 소속 작가들이 글을 쓰는 데 자극이 되도록, 세상의 대세와 맞지 않는 글을 쓸 때 위축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향상할 수 있는 요인이 되도록 할 수 있게 고민하면서 같은 길을 갈 것입니다.

 

Q. 말씀을 들으니 앞으로의 활동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거울을 통해 활동하시는 작가들도 무척 든든할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거울에는 개별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온라인 커뮤니티가 한창 활발하게 형성되었던 2000년대의 향수가 남아 있는 듯해요. 지금은 SNS가 특정 키워드나 해시태그를 통해 사람들을 그러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당시에는 관심 분야나 주제별로 개설된 카페나 개별 웹사이트가 그 역할을 했죠. 거울은 당연히 문학이라는 표지판 아래 사람들이 모였을 테고요. 2000년대와 비교했을 때 웹진의 분위기 변화, 혹은 최근 장르문학의 작품 경향이 달라진 게 있을까요?

A. 최지혜 : 예전에는 거의 모든 필진이 프로가 아니었는데, 그건 실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시장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글을 어떻게 하면 쓸까, 어떻게 하면 잘 쓸까, 어떤 게 좋은 작품일까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때도 지금도 똑같지만, 현재는 SF의 비약과 작가들의 프로 데뷔, 많은 수상 등으로 쓰고 나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음을 안다는 것이 다른 듯합니다. 장르문학적으로는 전반적으로 SF의 범위가 넓어지고 한국 작가의 장르물 자체가 활발해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밀 : 확실히 2000년대에는 훨씬 더 웹사이트 중심이었고, 구성원이 좀 많은 동인에 가까운 느낌이었어요. 가입 경로가 열려 있지 않았고,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의 작품들을 이 사이트에서 보여주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지금은 여전히 사이트를 기반으로 하지만 SNS를 통한 전파나 반향까지도 폭넓게 거울의 자장을 이루는 것 같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누구나 가입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율적인 작가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변한 것 같아요.

 

Q. Q. ‘거울 필진’이 아닌 독자들이 작품을 게재할 수 있는 창작 게시판도 운영되고 있어요. 매년 독자우수단편을 선정하고 있고요. 독자우수단편 및 필진 선정 제도에 대해서도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A. 김주영 : 독자우수단편 선정 제도는 소설을 창작하는 독자들이 자기 작품에 대한 피드백과 비평을 받아 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매달 독자우수단편 심사단에서는 창작 게시판에 올라오는 독자단편을 심사하여 심사평과 함께 우수단편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분기 우수작은 석 달에 한 번, 후보작 중에서 선정됩니다. 연말에는 분기 우수작 중에서 최종 우수작을 선정합니다. 분기 우수작으로 2회 선정되거나 연말 최종 우수작으로 선정되면 거울의 작가 필진이 될 기회가 제공됩니다. 또한, 이미 출간 작가인 분들도 지원을 통해 작가 필진이 되실 수 있습니다. 기사 필진의 경우는 6회 분량 이상의 기사·리뷰를 투고 받은 후, 운영편집진의 검토를 거치는 방식으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Q. 그런가 하면 ‘이달의 거울 픽’을 통한 서평과 작품 리뷰도 활발하게 업데이트되고 있는 것도 보았어요. 개인적으로 독서 스펙트럼이 협소한 편인데, 신간과 구간을 불문하고 다양한 책들을 추천받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혹시 이 지면을 빌려 장르문학 입문 독자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작품이 있다면 추천을 부탁드리겠습니다.

A. 김인정 : 거울 단편선을 읽어 주십시오!
 
김주영 : 장르문학 입문 독자들에겐 한국 장르소설계의 스카우팅 리포트, 거울 단편선 『아직은 끝이 아니야』, 『살을 섞다』(아작, 2020)를 강력하게 권합니다! 여러 작가가 각기 다른 색깔로 품어낸 다양한 장르문학을 접해 볼 수 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47866" align="aligncenter" width="500"] 작년에 발행된 《거울》의 환상문학 단편선 소설집.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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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감사합니다. 굳이 멀리 갈 필요 없이 거울의 단편선으로 입문을 해도 좋겠군요! 말이 나온 김에 방금 추천해 주신 거울 단편선 소설집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최근에 출간된 소설집도 소개해 주세요.

A. 최지혜 : 2020년에 출간된 2019 중단편선 『살을 섞다』는 최근 합류한 작가들의 글과 오랫동안 거울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글이 잘 섞여 있습니다. 터줏대감 곽재식 님과 전혜진 님의 글로 시작하고 끝나며, 가장 길지만 신선한 글의 주인공은 이로빈 님이고, 못지않은 터줏대감 엄정진 님의 글이 중간을 잡아 주죠. 남세오 님, 엄길윤 님, 심너울 님, 지현상 님, 온연두 님은 독자우수단편으로 먼저 만난 분들인데, 이분들의 작품이 SF 어워드에서 수상하거나 리디 웹툰으로 각색되는 등 많은 반응을 얻었습니다.거울의 연간 중단편선은 주제가 아니라 기간에 따라 묶이는 소설집이기 때문에 통일된 분위기가 없어야 하지만, 작가 또한 세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시기의 관심사들이 겹쳐 전체 기조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살을 섞다]의 경우에는 사람 사이의 관계와 생의 의미, 그리고 여성에 관한 관심이 느슨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또한 전반적으로 호러가 다른 해보다 조금 강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연간 단편선이 나온다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Q. 다양한 작가분들의 작품이 실린 만큼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필진 중 한 분인 곽재식 작가님이 최근에 TV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하신 걸 보았어요. 한국 요괴를 한데 묶어 소개하는 도감을 만들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에 정말 커다란 애정과 열정을 쏟는다는 게 방송을 통해서 느껴지더라고요. 작가님을 이렇게 빠지게 만든 환상문학의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이 기회를 빌려 조심스레 여쭈어 보자면, 거울 편집진분들께 장르문학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합니다. 어떤 계기로 장르문학에 매료되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A. 김인정 : 자연스럽게,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모두 장르문학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최지혜 : 어릴 때부터 장르문학을 접하고 자연스럽게 그 세계들에 매혹되었던 것 같아요. 좁은 집에 살지만 광활한 세계와 강력한 힘들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죠. 접할 수 있었던 책에 세계 3대 판타지 소설이 있었다는 게 결정적이었던 듯합니다. 무슨 책을 읽든 다 괜찮다고 했던 부모님 덕이기도 하고요.
 
고타래 : 글을 쓸 때는 치열하지만, 쓰기 전까지는 자유롭습니다. 장르문학이 그렇고, 내게 그런 상태를 유지하게 해줍니다. 뭔가 좀 모호한 말 같은데, 대충이라도 의미가 전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에 하는 일이 좀 힘들어서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가 없거든요. 실은 대학 다닐 때도 소설을 거의 안 읽었습니다. 수업에 필요한 소설들을 읽어야 하는데 재미가 없어서 읽기가 싫었거든요. 재미가 없다기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 내용에 공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미술이나 영화 같은 다른 예술 장르에 빠져들었고요. 그러다 우연히 일본 라이트노벨류의 작가들 소설을 접했는데, 충격이 대단했습니다. 유년 시절의 슬픔 같은 게 떠오를 정도로 비로소 무언가를 찾은 느낌이었어요.
 
아밀 : 현실의 규범을 넘어서 서사의 규칙에 따라 생각하고 즐길 수 있다는 점, 이 코드를 함께 향유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쾌감을 주는 것 같아요!

 

Q. 저의 경우도 문학에 대한 흥미를 돋워 준 건 이영도 소설가의 작품이었어요. 거기서부터 관심사가 다른 장르로 점점 넓어지게 됐죠. 출간 직후 큰 사랑을 받으면서 드라마로도 제작된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도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서 「사랑해, 젤리피쉬」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울이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작품 발표 및 활동을 시작하게 해주는 좋은 지면이 되어 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여러 고충도 따랐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랜 시간 매체를 운영하는 데 힘들었던 점은 없었나요?

A. 힘든 점이라기보다 고민하는 점은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다양한 시도를 해보지 못하는 것이랄까요. 웹진의 저변을 넓히려면 새로운 독자를 찾고 예비 작가를 발굴하고 기성 작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해야 하는데, 그러한 기획을 더 크게 이어 나가지 못해 아쉽습니다.
 
아밀 : 수익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인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최지혜 : 대체로 ‘돈’ 문제가 힘들었죠. 사이트를 바꿔야 하는데 제작비가 필요하다거나, 또한 거울 작가들의 글이 한동안 출간되다가 언젠가 암흑기처럼 출간이 잘 안 되고 덩달아 침체된 적도 있고, 웹진의 운영 주체가 크게 바뀐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굉장히 큰일이었지만 어쨌거나 해결돼서 현재에 다다른 게 굉장히 힘이 됩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Q. 문학 매체를 막론하고 문제가 되는 건 운영비군요. 그런데도 거울의 연혁을 보니까 재작년까지는 SF 교류 행사와 컨벤션에 참여하는 등 오프라인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해 오셨더라고요. 괴담 전문 출판 레이블 ‘괴이학회’와의 콜라보레이션을 기획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그런 활동들에 제한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혹시 올해 새로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있을까요?

A. 2020년 후반부터 안예은 가수의 노래에 맞춰 글을 쓰는 〈거울 속 난새〉 프로젝트가 올라왔고, 2021년 전반에는 아작과 결합한 전자책 총서 『거울 아니었던들』이 런칭 되었습니다. 또한, 언제나처럼 연간 단편선이 상반기 내에 출간될 예정이고요. 오프라인 활동은 거울에서 기획하기보다는 외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응해 나가고 있으니 외부 상황을 봐야겠지만, 새로운 필진을 맞이하고,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는 프로젝트는 소소히 계속 마련될 예정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147867" align="aligncenter" width="640"] 올해 상반기에 출간된 거울X아작 환상문학총서 『거울 아니었던들』(아작, 2021)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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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네, 다음에 이어질 프로젝트도 기대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거울에 대해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전해 주세요!

A. 최지혜 : 거울은 사이트 자체는 조용하지만, 사실 반응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소심하고 귀여운 사람들입니다. 편하게 읽고 예의를 잃지 않는 선에서 편하게 글 남겨 주세요.
 
아밀 : 오래오래 자리를 지키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대안 매체들이 앞으로도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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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인터랙티브 아트와 시가 만난 온라인 전시 《시홀》

    여러분은 전시회를 자주 관람하시나요? 요즘은 선뜻 전시장에 가서 관람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아마 전시를 준비하시는 분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비대면 상황이 길게 이어지면서 새로운 전시 형태의 온라인 전시회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기존의 오프라인 전시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고 웹이라는 특성을 활용해 여러 가지 참신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지죠. 이번에는 온라인 전시회와 시가 만났습니다. 느리미와 기리니가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곳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를 즐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시홀 : Seehole》입니다. 《시홀》에 전시된 시는 기존의 게재 방식처럼 단순히 읽는 것뿐만 아니라, 웹페이지에 숨겨진 시를 드래그해서 찾거나 360도로 회전하는 영상을 통해 감각할 수가 있었어요. 웹이라는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을 때 문학이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 전시회를 통해 느리미와 기리니도 시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지평이 한층 더 넓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시홀》을 기획한 이상민 기획자를 만나 보았습니다.

 

 

 

Q. 이상민 기획자님, 안녕하세요! 기꺼이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시홀》에 대해 자유롭게 소개해 주세요!

A. 《시홀》(이하 괄호 생략)은 시를 읽고 보고 듣는 온라인 플랫폼입니다. 시인, 디자이너, 뮤지션, 프로그래머, 영상연출자가 모여 만든 전시 형태로 문학에 시청각적 접근을 시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Q. 이상민 기획자님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분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준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현대미술 기획 분야에서 일을 해왔고 재작년부터 영화에 대해 배워 보고 싶어서 대학원에 가게 되었어요. 영상 작업을 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영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글들은 갈 곳이 없는 것 같아 얼떨결에 시홀의 기획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시인’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저처럼 남몰래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고, 이를 보일 매체가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시를 보낼 수 있는 곳을 만들면 어떨까, 시를 소리를 통해 접근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기획을 구상했어요. 제 추상적이고 뜬구름 같은 기획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디자인 팀에는 염조흔 디자이너, 안종민 디자이너, 정휘윤 작가님이, 사운드 팀에는 유지완, 하헌진, 슬롬 님이, 개발자로는 문준석 님이, 영상연출자로는 이재진 님이, 행정팀에는 조성은, 김성준 님께서 함께해 주셨고, 서른여섯 명의 시인분들께서 시를 보내주셨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47869" align="aligncenter" width="640"] 《시홀》의 세 가지 전시 파트 중 하나인 <오늘 쓰고 버린 시>. 커서로 이미지를 문지르면 숨어 있던 시가 나타난다.
ⓒ시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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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작년부터 온라인 전시가 활성화된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온라인 전시를 통해 시를 관람하는 게 익숙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온라인 전시를 기획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왜 이름이 ‘시홀(seehole)’이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A. 시홀은 ‘시’를 보는(see) 구멍(ho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토끼굴처럼 알 수 없는 공간으로의 입구로도 상상해 보고 싶었어요. 사실은 기금 신청서를 급하게 쓰느라 내기 한 시간 전까지도 이름을 못 정해서 헤맸습니다. 그러다 ‘놈코어(normcore)’라는 단어를 고안한 《K-hole》이라는 실험 잡지가 떠올라서 막판에 시홀이 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라 부끄러웠는데, 보다 보니 정들어서 계속 쓰게 되었네요. 시홀은 지면이 아닌 스크린에서 읽는 글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유무와 관계없이 온라인 콘텐츠로 만들어졌을 것 같아요. 글을 읽는 것에 앞서 글을 본다는 것과 글에 도달하기까지의 인터페이스 또한 모든 경험의 일부로서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요소들을 고려하고자 했습니다.

 

Q. 시로 온라인 전시를 구상하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관람하는 입장에서는 시를 향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해 준다고도 느껴졌기에 개인적으로 무척 즐겁게 전시를 보았습니다. 더 많은 독자들이 더 다양하게 시에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그중 왜 하필 시라는 장르를 선택했는지, 어떻게 이런 방식의 전시를 구상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전시를 기획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정말 단순하지만 시 쓰는 게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시와 시가 아닌 것의 모호한 경계와 시처럼 생겼지만 시로 태어나지 않았던 것들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시가 아닌 것을 시라고 정의했을 때 도달하게 되는 범주에 대해 고민했고, 이에 따라 글뿐만 아니라 각 페이지의 사운드와 디자인, 코딩, 그리고 유저의 경험 자체도 시가 될 수 있는 스크린 내 공간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기획이 구체화됨에 따라 스크린에서 읽는 시를 위한 공간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지 웹이라는 매체를 통한 경험을 새롭게 구상해 보고 싶었고, 빠르게 스쳐가고 소비되는 온라인 콘텐츠의 속도를 어떻게 한 박자 늦출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시홀을 방문하는 관객은 시를 찾거나 이미지를 지우거나 3D 공간을 유영하는 등, 시를 보기 위해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어쩌면 접근성의 불편함 때문에 아예 안 읽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시를 읽는 보람의 일부가 되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작업했어요. SNS에 시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스타그램에 기재되는 많은 콘텐츠들은 가볍고 빠르게 소비되는 경향이 있고, 거기서의 시는 이미지, 혹은 글귀로 자리한다는 것의 한계를 느꼈어요. 동시에 시로 올린 것이 아닌데, 시로 읽히는 글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점도 눈에 띄었고요. 가볍지 않은 말들이 가볍게 읽히기도 하고, 때로는 가벼운 말이 묵직한 무게를 지닐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연장선에서 누군가의 시가 어떤 영상이나 개인 작업의 일부가 아닌 형식으로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플랫폼’과 ‘전시’라는 개념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를 실험의 기반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47870" align="aligncenter" width="640"] 시홀의 전시 중 일부인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 인터페이스를 조작해서 웹페이지를 탐색하다 보면 시를 발견할 수 있다.
ⓒ시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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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번 프로젝트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다고 소개해 주셨는데요. 사이트에 접속하면 메인 화면에서 전시에 참여한 분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디자인, 사운드, 영상, 코딩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함께해 주셨더라고요. 텍스트를 기본으로 하는 웹진들과는 또 다른 구성이어서 여러 감각을 적극적으로 동원해 시를 읽는 느낌이었고요. 좀 더 상호작용하는 느낌으로 시를 접할 수 있다는 점도 재밌었습니다. 각 분야의 작가님들이 어떻게 참여하셨는지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파편의 아이디어들이나 막연한 느낌들이 모여 최종 결과는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아주 짧은 작업 기간을 두고 많은 분들께서 고생해 주셨어요. 시홀의 중심이 된 움직이는 구멍은 처음부터 합류한 안종민 디자이너님께서 제안한 아이덴티티였어요.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는 염조흔 디자이너님과 뮤지션이자 기획자인 유지완 님, 오늘 쓰고 버린 시는 안종민 디자이너님과 뮤지션 하헌진 님께서 작곡을 해주셨고, 도망치는 시에는 기획 및 3D 작업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휘윤 작가님께서 360도 VR 영상을, 프로듀서 슬롬 님이 트랙을 만들어 주셨어요. 웹 전시이기 때문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매끄럽게 구현하기 위해 프로그래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문준석 개발자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영상 촬영과 편집은 이재진 님이 담당해 주셨고요. 조성은 님, 김성준 님께서는 행정과 홍보를 도와주셨어요. 또, 기획 단계와 섭외 부분에서 이우성 시인님과 박소현 감독님께 자문을 구해 값진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선보이게 된 시들은 청탁과 오픈콜을 통해 모집하였는데, 등단하신 시인분들부터 큐레이터, 영상 작가, 뮤지션, 대학생, 회사원 등 다양한 분들께서 참여해 주셨고, 2주 동안 진행된 모집에 투고된 180여 편의 시 중 36편을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Q. 전시를 보며 겹겹의 시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전시를 한참 보고 있자니 정말로 구멍을 헤매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시홀은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 <오늘 쓰고 버린 시>, <도망치는 시>까지 세 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구멍(hole)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각 구멍의 주제는 “고립”으로부터 은유적으로 파생되었습니다.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를 구상하면서 거리두기 시대에서 할 수 없는 크고 작은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귀에 대고 시를 읽어 주는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청각적, 신체적 가까움을 인터페이스를 통해 촉각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유저는 알 수 없는 피부 표면들 속을 마우스로 훑으며 숨겨진 시와 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몸과 입과 귀가 가까워지며 비밀을 속삭이듯, 스크린에서 손가락은 지도 같은 표피를 유영하고 소리를 나침반 삼아 숨겨진 시를 찾는 행위로 이어지며, 시로부터 파생된 소리들은 쌓여 은밀한 기억처럼 중첩됩니다. 유지완 님이 디자인한 사운드 스케이프는 각 시에서 영감을 받아 선율이 아닌 소음이나 잔상 같은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각 사운드는 중첩되어 하나의 소음이 되기도 하고 더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잔상 같은 시가 되기도 하는, 그런 부분을 나타내고 싶어 부탁드렸는데 이런 추상적인 디렉션을 굉장히 잘 소화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오늘 쓰고 버린 시>는 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생겨나고 사라진 생각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손으로 이미지를 지우면 비로소 드러나는 글들은 읽힌 후에 다시 묻히듯 없어집니다. 사실 코로나 이후 매일 쓰고 버리는 마스크를 떠올리면서 고안한 주제였어요. 일회용이지만 없어지지 않는 물질들과, 고립된 상태에서 하루 동안 떠올랐다 사라진 누군가의 생각이 교차하는 접점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고 그런 상태를 닮은 시들을 기념하는 공간이에요. 고립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흔적 없이 사라질 때가 많잖아요. 비슷한 맥락으로, 내가 생산한 작업물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혼자 판단하기 어려워 밖으로 내보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렇게 지나간 것들을 모아 소중하게 여겨 보고 싶었어요. 때문에, 이미지들도 구멍 파는 영상을 확대해서 뽑은 스틸들을 사용했어요. 반복되는 행위를 담은 한 영상의 러닝타임이 마치 하루의 일과를 나타내는 것 같았고, 저화질 스크린샷들을 통해 빈곤한 이미지가 내포하는 가벼움이나 위계를 사용하고 싶었어요. 같은 주제로 하헌진 님께 작곡을 부탁했는데, 10분 만에 카톡으로 보내주신 녹음본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 저음질 데모 버전의 느낌이 저화질 이미지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쓰고 싶었는데 하헌진 님이 부끄러워하셔서 최종적으로는 녹음한 버전을 선보이게 되었어요.마지막으로 <도망치는 시>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곳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을 재현해 보았습니다. 지면이 아닌 세계에 존재하는 시는 낯선 환경에서 파묻히고 떠오르고 흐르기를 반복하며 언어가 표면이 되고 표면이 언어가 되는 미끄러운 시공간을 촉발합니다. 정휘윤 님께서 기존에 실험하시던 다양한 텍스처나, 몽환적이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요소가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섭외 요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시는 이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물체가 되기도 하는데 글이 풍경과 어우러져서 그림자가 지는 디테일부터 건축적인 스케일의 격차도 흥미로운 영상이에요. 슬롬 님의 사운드트랙 ‹패턴›은 365마디로 구성되어 1년의 시간을 아우르면서 반복되고, 노이즈의 개입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곡을 12분 40초의 트랙에 담아냈어요. 상업계에서 활동하는 슬롬 님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을 실험적인 영상과 접목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참여 요청을 드렸는데, 일상의 시간과 몽환적인 공간으로의 도피를 슬롬 님만의 방식으로 상상해 주셔서 흥미로운 협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47871" align="aligncenter" width="640"] 언어가 표면이 되고, 표면이 언어가 되는, <도망치는 시>의 매끄러운 시공간. 시홀에 접속하여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see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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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많은 분들과의 협업을 통해 참신한 프로젝트가 만들어진 만큼 만드는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을 것 같아요. 전시를 준비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A. 낭독 영상 제작을 진행하려던 와중에 팬데믹이 2.5단계로 격상되는 바람에 대면 촬영이 조심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해 낸 방식이 줌 촬영이었고 응해 주신 시인분들께서는 비대면 미팅을 통해 시 낭독을 해주셨어요. 줌을 사용해 보신 분들께서는 아시겠지만 정말 어색하고……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 심지어 시 낭독이라는 행위 자체도 특유의 부끄러움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인데 초면인 분들께서 줌 낭독이라는 이상한 제안에 응해 주셨다는 게 아직도 놀랍고 고맙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스치지 못했을 얼굴들을 만나 뵐 수 있어 재미있었고 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시홀에 도달하신 것이 신기했어요.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홀의 모든 낭독 영상들은 입만 보여요. 새뮤얼 베켓의 『Not I』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는데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 때문에 가려진 부분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어요. 담담하고 담백하게 낭독하는 것을 좋아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읽어 달라고 요청을 드렸는데, 흔히 말하는 ‘때깔 좋은’ 카메라나 녹음 장비 없이 스크린 녹화로 촬영한 이 낭독 영상들을 꽤 좋아합니다.

 

Q. 저도 영상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준비하거나 고려할 사항들이 오프라인 전시와 달라서 더 마음 써야 할 점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떤 점이었을지 궁금합니다.

A. 처음에 ‘시를 어떻게 모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덜컥 두려웠는데, 예상보다 굉장히 많은 분들께서 시를 보내주셔서 진행하는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아마 보낼까 말까 고민하셨던 분들도 계셨을 것 같아요……!)시를 최대한 많이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 시들을 어떻게 선정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더 많은 시를 선보일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사실 가장 큰 어려움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10월에 기금에 선정되었고 12월에 사업이 마감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어 한 달 동안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11월부터 진행하게 되어 굉장히 촉박한 일정 속에서 많은 분들이 고생해 주셨어요. 많은 요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엮어내되 과하게 이질적이지는 않은 포맷의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이 ‘균형’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시각적, 청각적 요소들의 조합이 인터페이스와 잘 어우러지고 시의 가독성이나 형식을 반영해야 하는 지점이었습니다. <도망가는 시>에서는 글이 표면이 되고 표면이 글과 엮이거나, 읽는 방식을 고려하여 조금 더 자유를 가지고 나름대로 실험도 해보았어요. 또, 문준석 개발자님께서 미묘한 디테일까지 신경 써주신 덕에 생각했던 디자인에 굉장히 가깝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이번에 뼈저리게 느낀 건 마땅한 한글 폰트가 영문에 비해 정말 없다는 것…… 그리고 호불호의 편차가 유독 심하게 갈린다는 점이었어요. 예를 들면 저는 도스명조가 귀엽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참여하신 거의 모든 분들께서 이 폰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caption id="attachment_147872" align="aligncenter" width="640"] 시홀 낭독 영상의 일부. 마스크로 인해 늘 가려질 수밖에 없는 부분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see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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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민하신 만큼 시각적, 청각적 요소가 잘 어우러진 것 같아요. 다만 조작법이 미숙해서 이 좋은 프로젝트를 즐길 기회를 놓치는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드네요. 시홀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기획자님께서 직접 알려주실 수 있나요?

A. 소리를 꼭 켜고 관람해 주세요! <귓속말로 읽어 주고 싶은 시>는 각 시에 해당하는 사운드가 있습니다. 숨겨진 시들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마우스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표면을 훑으면서 보는 방식이에요. 열한 편의 시를 모두 찾으면 소리를 선택적으로 재생하면서 다른 조합들을 직접 구성할 수 있습니다.<오늘 쓰고 버린 시>는 이미지를 커서로 지우면서 시를 관람하는 형식입니다. 지우기 전까지는 어떤 시가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모든 시를 한 번씩은 거쳐 가야 해요. 이 안에는 하헌진의 곡이 숨겨져 있어요. 더불어 선택적으로 이미지를 지우며 보이는 각자의 글자들은 다른 시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도망치는 시>는 360도 비디오입니다. 화각을 움직이면 볼 때마다 다른 것을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서 본 듯하지만 존재한 적 없는 공간 속에서 물체와 건축물은 정처 없이 둥둥 떠다니거나 회전하며 같은 소리가 반복되며 노이즈로 인해 변형되는 소리와 더불어 평안함을 교란합니다. 슬롬이 만든 사운드트랙은 켜놓고 집중하기에 좋은 곡인 것 같아요!

 

Q. 시홀 온라인 전시에 대해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하는 프로젝트예요. 이상민 기획자님의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덧붙여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자유롭게 전해 주세요!

A. 이름 모를 구멍에 용기 내어 시를 투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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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린 기린 큐레이션은 작년 문예지 편에 이어 올해 1월부터는 문학 웹진을 운영하고 계시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한소리, 전세은, 한윤희 님이 운영하고 있는 ‘아는 사람’들을 위한 문학 웹진 《아는사람》, 차현지 소설가님이 꾸려 가고 있는 텍스트 아카이브 프로젝트 《SRS》, 우리의 평범한 나날을 채워 주는 일상비평 웹진 《쪽》과 글 쓰는 용자들이 모이는 문학플랫폼 《던전》, 그리고 이번에 소개해 드린 《거울》과 온라인 전시 프로젝트 《시홀》까지, 저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문학을 읽고 감상할 수 있는 웹 플랫폼이었어요. 이제는 문학 텍스트가 더는 책과 종이라는 물성에 갇혀만 있지 않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섯 곳의 온라인 매체를 인터뷰하면서 운영자분들께 웹진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지는 않는지 조심스레 질문해 보기도 했는데요. 가장 힘들어하는 점은 운영을 영위하기 위한 자본이었습니다. 이는 종이 문예지와 웹진을 가리지 않고 문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매체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어요. 웹진의 경우 종이 문예지와 달리 인쇄와 배송 등의 과정을 거치지는 않지만, 웹사이트 유지비와 참여 작가들을 위한 원고료, 디자인 비용, 편집 인력에 대한 품값 등을 고려해 보면 일정한 유지비가 필요한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운영자분들이 바랐던 또 다른 희망사항은 웹진이 지금보다 더 활성화되는 것이었습니다. 몇몇 웹진의 경우, 리뷰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 크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앞으로 웹진을 이용하는 독자들과, 이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들이 점점 더 많아질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되기도 했습니다. 인터랙티브 아트와 현대 시를 결합시켰던 온라인 전시 프로젝트 《시홀》처럼 온라인 매체만이 시도할 수 있는 여러 장점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요. 책을 두고 나온 날에도 스마트폰과 PC, 혹은 태블릿만 있다면 어디서든 간편하게 즐길 수 있으니 느린 기린 큐레이션이 소개해 드렸던 웹진들을 즐겨찾기 해놓고 자유롭게 구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느리미와 기리니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을 거예요!
    저희 느린 기린 큐레이션은 앞으로도 문학 웹진들이 활성화되기를 응원하며 이번 웹진 편을 마치려고 합니다. 다음 활동을 미리 알려드리자면, 4월에는 메일링 서비스를 운영하는 작가들을 만나 직접 메일링 서비스의 운영 방식과 노하우 등을 알아볼 예정입니다. 모두들 설레는 마음으로 새 학기, 새 계절을 보내시길 바라며, 저희는 이만 물러가 있다 4월에 돌아오겠습니다. 안녕!

 

 

 

 

 

 

 

 

 

 

 

 

조시현

작가소개 / 조시현

2018년 실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2019년 현대시 상반기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조온윤

작가소개 / 조온윤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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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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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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