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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웹진》 2021년 기획 연속좌담 ‘등단’ 4차 : 현장

  • 작성일 2021-06-01
  • 조회수 2,512

[연속좌담]


   본 기획은 1966년부터 시행되어 온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이 2020년 재정적 부담을 사유로 폐지되고, 전통적 등단제도(신춘문예, 문예지 신인상 등)를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발표 활동을 하는 소위 ‘미등단작가’들이 활동하는 현 시점에 맞춰, 순수문학의 발전 정체와 폐쇄적 문학계 관행으로 지적받고 있는 ‘등단제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각층의 이야기를 모아 보고자 기획되었다.

   2021년 4월호부터 6월호 사이에 총 4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시선들
   - 2차 : 확장성
   - 3차 : 모색
   - 4차 : 현장



 

 

《문장 웹진》 2021년 기획 연속좌담 ‘등단’
4차 ‘현장’

 

 

 

 

ㅇ 회의명 : 《문장 웹진》 2021년 기획 연속좌담 ‘등단’ 4차 : 현장
   - 2021년의 ‘현장’을 마주하는 작가로서의 자기소개
   - 등단 이후의 (문단) 활동 분위기와 작가 정체성의 관계
   - ‘작가가 된다는 것’과 독자 및 등단의 관계
   - 뉴미디어 시대에 등단이라는 제도를 다시 사유하기
   - 2020년대에 등단이라는 제도 앞에 다시 선다면
 
ㅇ 참여자
   - 선우은실(사회, 문학평론가)
   - 김중일(시인)
   - 박민정(소설가)
   - 박세회(소설가)
   - 임정민(시인)

 

〈개회〉

 

 
2021년의 ‘현장’을 마주하는 작가로서의 자기소개

 

 

선우은실 :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좌담의 사회를 맡은 평론을 쓰는 선우은실이라고 합니다. 앞선 1~3차 좌담과 달리 저희에게 주어진 ‘현장’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 게 좋을까 고민을 좀 해봤어요. 문학의 현장이라는 것이 만약 현재, 지금이랑 관련이 있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이런 얘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여기에 등단제도와 관련한 논의를 위해 여러 작가분들이 모여 주셨는데요. 모두 나이대도, 성별도, 등단 시기도, 활동의 영역이나 시기도 다 다릅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런 맥락들 안에서 현재 등단제도라는 게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또는 ‘나는 작가다.’ 이렇게 생각을 했을 때는 작가로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독자로서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가 사실은 조금 다를 거 같아요. 그런 구체적인 맥락들 안에서 등단제도가 어떻게 보이는지,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려고 하는데요. 반드시 작품 활동을 한 시점으로 이야기를 해주실 필요는 없고요, 왜냐하면 등단이라고 하는 것과 ‘내가 작가구나.’라고 느낀 시점이랑 ‘내가 글을 본격적으로 쓴다.’라고 하는 시점은 다 구분이 돼서 생각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 점들을 고려해 주시고, 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박민정 작가님부터 말씀해 주실까요?

 

 

박민정 :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 쓰는 박민정이고요. 이렇게 “소설 쓰는 박민정입니다.”라고 소개를 하게 된 게 2009년에 등단하고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는 특별한 작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 등단하자마자 소설집을 계약하는 분위기였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도 등단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계약하러 갔던 거 같은데, 그 출판사에서 나와 주신, 소설을 읽고 계약을 하자고 해주신 처음 만난 비평가분들께서 소개를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비평 쓰는 누구입니다.” 그걸 보고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떤 분들께서는 “소설을 쓰는 누구입니다”, “비평을 쓰는 누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걸 조금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알고 있어요. 그게 왜 불편할까 생각을 해보니까 그 말 자체가 제도권 문학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는 걸 표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처음에 이 말을 배웠을 때 ‘굉장히 세련된 자기소개다.’라고 생각을 했던 게, “소설가 누구입니다”, “비평가 누구입니다”라는 말이 저에게는 그 제도권 문학을 표현하는 말처럼 들렸거든요. 그래서 그냥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좀 집중을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자기소개 방법이 아닐까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의미가 많이 바뀌었다…… 싶습니다. 당연히 의미는 유동하는 것이니까……. 어쨌든 자기소개를 하면서 서두를 이렇게 시작을 했는데, 제가 처음에 이 쓰는 행위에 집중한다고 생각을 했던 게 사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데뷔했고, 그러니까 문예지 신인상을 받은 사람도 있고, 신춘문예로 당선되신 분도 있고, 다른 매체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하신 분들도 계시는데, 전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내가 생산자가 되어서 임금을 받는 형태의 어떤 노동에 종사하겠다는 그런 의미의 직업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 문단에서는 ‘등단’이라고, ‘데뷔’라고 표현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행위, 내가 진짜로 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무관한 어떤 방식의 제도권, 제도 자체를 나 대신에 직업으로 표현하는 일에 작가들은 일종의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고, 자기소개만 하는 건데 너무 길게 이야기했을까요? (웃음)

 

 

박세회 : 제가 경력이 제일 짧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설 쓰기는 2019년 초에 시작을 했고, 이 등단 논의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상(償) 중의 하나인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등단을 두고 이야기한다기에 선뜻 하겠다고는 했는데, 이전 회차의 논의들을 보고 나니 과연 제가 합당한 논의자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고, 좀 망설여지게 되었습니다. (등단을 얘기하며) 문단의 폐해를 많이들 이야기하시던데 저는 작가가 된 이후로 글을 쓰는 사람이랑 이 자리가 제일 많이 모인 자리고요. 문단이라는 걸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건 제가 코로나 시대와 맞물려 작가 생활을 시작해 그런 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재미있는 건 제 아내도 2020년, 2021년에 등단을 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코로나 시대의 작가라 저희 부부는 문단이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지, 문단이란 무엇일까 항상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임정민 : 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는 임정민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렇게 시 쓰는 누구라고 소개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요. 앞에서 말씀해 주셨듯이, 문학과 관련된 제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항상 자기를 소개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비슷한 방식으로 덧붙이자면 저는 2015년에 《세계의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게 되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먼저 보내 주신 질문지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주셔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요. 저는 정체성이 없다, 혹은 정체성을 고정할 수 없거나 그것을 잘 모른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글 쓰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 가려고 개인적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쏟고 있기 때문에, 항상 그 두 가지 간극 사이에서 무언가 고정되지 않은 것 같은 감각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감각하는 정체성의 모호함은 특수한 게 아니라, 어떤 세대가 체감할 수 있는 공통적인 감각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이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위치에서부터 다시 작가로서의 방향성이나 문학의 제도가 갖고 있는 현재성, 그리고 그 안에서 지녀야 할 태도 같은 것을 고민해 보고 있습니다. 또,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느낀 시점에 관한 질문을 주셔서 조금 구체화해 보면, 등단했던 시기보다는, 최근에 출간을 염두에 두면서 원고를 묶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다른 때보다는 조금 넓은 방식으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서, 이런 걱정을 하게 되는 지금이 작가로서 시작하는 단계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중일 : 먼저 제가 사는 곳이 멀기도 하고 직장에서 일이 갑자기 생겨서 이렇게 화상으로 참여하게 된 거에 대해서 불편함을 끼친 거 같아 죄송스럽고요. 논의에 집중하시기 위해서는 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모이신 분들끼리 주로 많이 깊은 이야기를 나누셨으면 좋겠고, 제가 꼭 필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질문 주시면 조금씩 하겠습니다.
선생님들 이력을 보니까 제가 가장 연배가 높은 편인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렇게 된 거 같아서 약간 감개무량한데요. 일단 이건 공개된 사실인데, 저의 경우 원래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었고, 대학교도 공대생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학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고요. 대학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학생들끼리 모여서 하는 문학회, 꼭 문창과 학생들이나 국문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공대 형들도 많았어요. 학교에 다양하게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글 쓰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글은 안 쓰지만, 사람들이 좋아서 문학회 활동을 했던 사람들. 저는 당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문학에 대해서, 시에 대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가능하다면 등단이라는 것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던 것은 제가 군대에 있을 때였던 거 같아요. 시기로 봤을 때는 1999년~2000년도 그즈음이었던 거 같습니다. 운 좋게도 2002년도에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게, 등단이라는 것을 주로 목적하는 그런 학과들이 있잖아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표적으로 문예창작과, 저는 그 학과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개인적인 순수한 바람이었던 거 같아요. ‘반드시 등단해서 성과를 내겠다’ 이런 게 아니라 그 세계를 알았고, 알고 나니까 같이 동참하고 싶었고요. 현재는 매체의 발달로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서 발표하는 활동을 할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런 방법이 전혀 없었죠. 그냥 교내 문학회에서 동인지 내는 정도였어요. 당시는 인터넷이라는 게 보급된 지도 얼마 안 된 시기였고, 물론 스마트폰도 없었고요. 페이스북, 트위터 이런 것들도 2000년대 중후반에야 생겼잖아요. 그러니 가족, 친구들을 제외한 독자들에게 내가 쓴 작품을 보이고 평가받는 방법은 등단이 거의 유일했죠. 그래서 당시 등단제도에 대해 의심해 보지는 못했던 거 같아요. 다만 저의 경우는 등단이란 것을 못 한다고 하더라도 또는 등단을 혹시 하더라도, 형편상 제 전공에 따라 취업을 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했기 때문에 오히려 등단 성공 여부에 대해서 크게 부담을 갖지 않았던 거 같아요. 물론, 이건 일반화할 수 없는 제 개인적인 상황이란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어쨌든 운이 좋게도 2002년에 등단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조금씩 창작 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예정대로 직장을 다니면서요. 일상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제가 등단이란 것을 정말 했는지, 스스로 시인이라는 것조차도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이십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2000년대 초반 당시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통과한 신인들이 받는 ‘혜택’이라고 할까요? 아직 등단하지 못한 분들과 비교해 혜택이라면 잡지사의 원고청탁 정도일 텐데, 제가 부족해서겠지만 크게 체감하지 못했어요. 영 소식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잊고 살다 보면 불현듯 한 번씩 청탁이 오는 정도. 요컨대 저의 등단 초기는 등단은 했으나 문단으로부터 약간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 《현대문학》이나 《현대시학》 등의 잡지에서 신인 특집이 있긴 했지만 일회성이었고요. 당시 우연히 동인 활동을 하며 다양한 매체로 등단한 동년배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거의 상황이 비슷한 듯했고요. 그래서 동인 활동 하면서 동인들끼리 모이면 “이번 계절에는 누가 어디서 청탁을 받았다더라”, “못 받았다더라” 그런 얘기가 관심사였고요. 제 개인의 다소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있지만, 당시는 신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시기였다고 기억해요. 등단제도에 대한 관심의 크기란 것이 어쩌면 등단한 신인에 대한 관심의 크기와 연결된다고도 한다면, 그 정도가 시기별로 일정치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분위기가 조금 바뀌는 시기가 오는데, 시단의 경우 소위 미래파 시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2005년도를 기점으로 2000년도 후반 즈음 등단 신인들에 대한 관심이 꽤 많아졌다는 걸 당시 저는 느꼈거든요. 시인이든 소설가든 여러 출판사에서, 방금 박민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만, 2000년도 후반에서 2010년도 전후로 등단한 신예들 같은 경우에는 출판사에서 계약도 선제적으로 했던 것 같고요. 그랬던 시절의 기억도 있어요. 그러니까 등단이라는 것이 모든 시기에, 반드시 같은 정도의 관심과 기회를 주고 그러니까 비등단자에 비해 상당히 많은 혜택을 주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아시겠지만 사실 등단이란 것을 했으나 단지 한때의 이벤트로 끝나고 활동을 이어 가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거든요. 아무튼 저의 경우는 첫 시집의 출간이 예정되었을 무렵에야 내가 등단을 해서 이렇게 시집을 내는 작가가 되긴 되었구나 비로소 실감했던 것 같아요. 저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했는데, 또 이야기가 진행되면 관련해서 이야기를 더 드리겠습니다.

 

 

 
등단 이후의 (문단) 활동 분위기와 작가 정체성의 관계

 

선우은실 : 네, 감사합니다. 사실은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친구들한테 비슷한 것을 물어본 적이 있어요. “언제 작가가 됐다고 생각했냐.” 그런데 많은 경우 작품을 쓰기 시작한 시기와 본격적으로 뭔가를 하고 있다고 느낀 시기와 등단의 시기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등단 연차라는 것과 실제로 내가 어떤 작가로서의 자각을 가지게 된다거나 하는 것들에 격차가 조금 있지 않을까 싶어 이런 질문을 드렸던 것인데요. 방금 김중일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등단 시기별로의 환경이라고 할까요, 분위기라고 할까요? 그런 조건의 영향도 있을 것 같아 이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눠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선생님들께서 등단 연차를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정리해 보면 김중일 선생님 2002년, 그리고 박민정 선생님 2009년, 임정민 선생님은 2015년, 박세회 선생님 2019년이고, 저는 2016년입니다. 아까 박세회 선생님께서 코로나 시대의 신예의 삶이란 어떠한가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해주셨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2016년에 문단 내 성폭력이 딱 터지면서 저때도 문단 활동(?)이라고 할 만한 건 거의 사라진 시기였거든요. 이런 식으로 감각의 차이들도 있을 거 같아요. 어떠세요? (웃음)

 

박민정 :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이 각자 5~6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등단하셨어요. 연수로 따지면 2002년, 2009년, 2016년, 2019년인데요. 사실 3~4년만 지나도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는데, 저는 돌아보면 각각 다 다른 시기였던 거 같아요. 선우은실 선생님 등단하셨던 2016년도 그렇고, 2002년에 김중일 선생님 데뷔하셨을 때는, 저는 사실 잘은 모르지만, 2004년에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문창과였기 때문에 워낙 문단의 동향이랄까요? 그런 부분에 학생들도 굉장히 신경 쓰고, 그러니까 “요즘 문단은 어떻더라.”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2000년 이후에 20년 동안 계속 그 문단의 변화하는 분위기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감히 했고요. 결국 지금 와서, 코로나 이후에 비대면 시대까지 와서 변곡점(變曲點)이 될 만한 사건들을 보면 확실히 2010년도에 ‘문단 내 성폭력’ 폭로라는 사건, 미투(Me Too) 이후에 이 ‘문단’이라고 하는 곳의 ‘현장성’이라고 할까? 그게 굉장히 많이 달라진 거 같아요. 쓸데없는 만남의 자리는 대부분 없어졌지요. 거기다 이제 코로나까지 오니까 만날 수 있는 어떤 계기 같은 게 없어져서 그나마도 사라졌죠. 사실 항상 그런 이야기는 했던 거 같아요. “문단이 뭐지? 이게 실체가 있는 건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있다면, 굳이 있다면, 출판사에서 하던, 예전에 그런 거 했잖아요. 계간지 한 번 나오면 계간지 뒤풀이라는 거를 책거리처럼 했는데, 아마 김중일 선생님은 기억하시겠지만, (웃음) 봄호가 나오면 봄호 뒤풀이, 여름호 나오면 여름호 뒤풀이, 이런 데를 한 번씩 가거나 아니면 송년회, 출판사별로 송년회가 크게 연말에 있었고……. 사실 그때 아니고서는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출간 행사라든지 독자와의 만남이 많이 축소되었으니까 더더욱 그렇지만 예전에도 그런 행사가 있으면 모여서 이야기 좀 하고 그럴 때 ‘여기가 문단이라는 곳인가?’ 이런 생각을 했고요. 사실 이런 좌담 같은 것도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문단 내의 사람이구나.’ 하고 실감은 나거든요? 근데 그렇지 않고서는, 사실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 게 없으면 전혀 문단이라는 곳의 실체를 모르겠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문단이라는 거 자체에 대해서 이게 일본 근대문학, 저는 사실 외람되지만 이론 전공은 아니라서 (웃음) 문학사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 바대로 이야기하면, 근대문학의 형태 자체가 일본의 문단 문학이라는 제도를 좀 많이 벤치마킹(Bench Marking) 했다고 해야 될까요? 문예지도 그렇고, 문예지와 사실 이런 좌담, 대담 형태도 그렇고, 많은 것들이 20세기에 있었던 일본의 문단 문학이라는 것을 베껴 왔다고 해야 될까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문단이라는 것이 그냥 어떤 개념의 번역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나는 잘 모르겠고, 지금 사람들을 만나야 겨우 실감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없는 공동체?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말 있잖아요. 허구의 공동체 같은 그런 걸까? 라고 생각을 하다가 이 문단이란 말을 우리가 많이 쓰고 있지만 사실은 이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을 수 없는 개념 아닐까? 실은 일본에서는 그 실체가 있었던 거 아닐까? 사실 그런 공동체가 있었는데, 번역되고 의미가 한 번 소격(疏隔)되고 나서 단어만 남은 그런 말이기 때문에 우리한테 이렇게 와 닿지 않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봤던 거 같아요. 문예지라는 게 분명 있고, 그 문예지에서 분명 담론을 만들어내지만요. 작가들 개개인이 다 프리랜서처럼, 자영업자처럼 이렇게 일을 하고 있고, 그들이 한 번씩 모여서 술자리를 하는 이런 걸 가지고 문단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애초에 무슨 적립된 개념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일종의 우리 학계라고 이야기하는, 혹은 예술계 필드(Field)라고 표현하는 그런 정도의 공간성은 있었을 거 같다. 우리는 다만 그걸 잘 모르기 때문에 너무나 오랫동안 쓰고 있는 말이고, 그 의미를 모르면서도 계속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혼자서 해봤습니다. 그런데 박세회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실상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사실 체감할 수 있는 것은 결국에는 출판사 뒤풀이나 이런 곳이었기 때문에, 송년회나 이런 곳이었기 때문에…… 코로나 이전에 사람을 한참 만나던 때가 있었어요. 작가들을 만나던 때가 있었고 이를테면 이제 그런 건 있었죠. ‘내 작품을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읽을까?’라는 약간의 두려움 같은 거. 시인분들은 서로 활발하게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어요. 진짜인진 잘 모르겠지만 (웃음) 작품에 대해서 “지난번엔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데 뭐 어떻더라.”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는데, 제가 느끼기에, 저만의 생각일 수 있는데, 소설가들은 그런 이야기 잘 안 하는 거 같아요. 작품을 두고 토론하는 모습을 저는 사실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렇게 되면 그건 굉장히 무례한 거고, 싸움 나고 이런 게 아니라면 사실 생산적인 토론? 이런 거는 제가 봤을 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각자 일을 한다는, 우린 각자 자영업자고, 각자 구멍가게를 하고 있다, 이런 느낌이 굉장히 강한데, 그나마도 제가 미약하게나마 문단이라는 그런 어떤 공간성, 현장성을 체감했을 때의 느낌들, 나는 어떤 선배, 후배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죠. 이게 참 웃기는데, 저는 ‘선후배라는 게 없다.’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없는 게 나은 거 같은데, 2009년, 2010년 당시에 제가 처음 작가들을 만났을 때는 위계라는 게 명확하게 있었어요. 그리고 그런 게 굉장히 불편했어요. 누군가는 나에게 있어서 나이도 많고, 작품 활동도 일찍 시작해서 확실한 선배라는 개념이 있었고, 스스로 선배라고 일컬으셨던 분들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좀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이른바 후배라고 생각되는 작가들에게 “작품은 어떻게 쓰는 거다.”라는 식으로, 굉장히 폭력적으로 말씀하시는 것도 저는 들었고……. 저는 처음 등단을 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냐면 ‘나는 신입생이 된 거 같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박세회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 들으시면 공감이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웃음) ‘나는 이 작가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마치 대학교 1학년처럼 신입생이고, 신입사원 같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근데 저에게는 사실 이후에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위계 폭력 이야기를 할 때, 내가 경험상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어떤 문단에서의 위계질서와 폭력을 느꼈다면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죠. 특히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라고 하면 그분들이 강의 경력도 굉장히 많고, 그러니까 강의를 하고 있는, 이런 것도 다 저에게는 권력으로 다가왔던 거 같아요. 강의를 하고 있고, 출판사와 굉장히 많이 알고 있고, 많이 연락하고, 작품 활동도 많이 했고…… 작품 활동을 하다 보면 출판사들과 많이 연락을 하게 되고 어떻게 보면 인맥을 만들게 되잖아요. 그건 당연히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건데, 그런 일들 자체가 누군가는 경력이 오래되어서 그만큼 많은 작가들과 평론가들과 출판사 직원들과 편집위원들과 안다는 사실 자체가 권력적으로 될 수는 없는 거겠죠, 그런 것을 일종의 위계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종류의 그런 일로 만드는 분들이 있었던 거죠. 그 사실 자체는 폭력이나 권력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실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분들이 있었던 거 같아요. 명확하게 그런 분들이 있었어요. 그럼 저는 개인의 인성 문제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지, 진짜 품성 문제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지, 제도와 구조의 문제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런 걸로 인해서 새로 데뷔한 신인 작가들에게 매우 억압적으로 다가오고, 또한 어떤 사적인 관계를 그로 인해 유용하는 것, 이를테면 ‘나랑 친하게 지내면 그런 사람들 내가 좀 더 친하게 어울리게 해주겠다.’ 이런 식의,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그런 방식의 폭력적인 접근들, 이런 것들이 있었던 거 같고, 제가 사적으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단 내 성폭력 이후에, 게다가 코로나까지 겹쳐서 서로 안 만나니까 참 좋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사적으로는. “서로 안 만나니까 예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도 없겠지.”라고 이야기를 할 수는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이게 단지 그런 외부적인 상황들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구조의 변동이랄까요? 구조의 변동을 이 공간, 필드에 머무는 사람들의 어떤 각성이 없이, 이를테면 “문단 내 성폭력 때문에 불미스러운 고발이 많이 일어나니까 우리는 애초에 만남을 차단하자.”라고 해서 만남 자체를 없앤다거나, 코로나도 어쨌든 그런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이 대면이라는 계기 자체가 없어진 것인데, 만남을 차단하는 것으로 이 구조의 변동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고 해야 하나? 이것은 사실 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싶죠. 십 몇 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일들, 그런 일들이라고 제가 돌려 말할 필요는 없겠죠. 그러니까 코로나 때문은 아니고 문단 내 성폭력이라는 큰 사건이 이 현장에 구조의 변동을 일으켰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사실 예전에는 만났던 사람들이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가 변동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커다란 충격이라는 것이 줬던, 기존에 우리가 뭘 잘못하고, 문단이라는 것을 얼마나 잘못 인식했고, 문단이라는 것 안에서 위계질서를 어떤 방식으로 각자 착각하고, 오인하고, 착오했던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던 그런 비극들을 반성하고 자숙했던 시간들을 보냈다면 보냈다고 이야기하고 싶고요. 이야기를 정리해야 될 거 같아서……. (웃음)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현장이라는 것은 변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계속 외부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뭔가 의도치 않게 이런 식으로 흘러왔다는 식으로 이야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왜냐하면 어쨌든 문단 내 성폭력 이전에 정신 못 차리고 서로 착각한 상태로 문단이라는 단어 자체를 훨씬 더 오염시켰던 그런 행동들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었고, 그리고 충격을 받고 자숙하면서 ‘우리가 문단이라는 실체도 모르면서 그 단어를 너무 적극적으로 오염을 시켰구나. 작가라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사람을 만나고 안 만나고를 떠나서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장에 대한 의식 같은 것들로 인해서 장이 변화를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선우은실 : 네. 박민정 작가님이 방금 사실은 1, 2, 3부 나눠서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해주셔 가지고, (웃음) 이 이야기를 조금 분절시켜서 다른 분들에게 같이 돌려 보면 좋을 거 같아요. 방금 전 이야기를 정리하면, ‘작가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와 관련해서 등단이라는 제도가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위계에 대한 것도요. “내가 등단 몇 년 차야.” 이런 방식으로 발생하는 위계도 상당히 많았던 거 같고, 여전히 존재하는 거 같기도 하고요. ‘데뷔를 한다.’ 그러니까 ‘일정한 제도를 거쳐서 언제, 어디로 등단을 했다.’라고 하는 일종의 인식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걸 거쳐서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비슷한 일을 하는 집단을 만난다 함으로써 ‘내가 이제 작가인가?’라는 이런 정체성도 조금씩 이렇게 영향을 받는 거 같기도 해요. 방금 박민정 작가님이 소설가 같은 경우에는 같이 모여서 글을 본다거나, 나눈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작가 정체성을 확인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은 거 같진 않은데, 시 같은 경우에는 그런 문화가 조금 더 활발해 보인다고 말씀해 주셨지요. 시의 경우는 어떤지 들어 보고 싶습니다. 임정민 시인이 조금 전에 작가 정체성이라는 게 없거나, 아니면 정의하기 어렵거나 하는 방식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등단이라는 제도나 문단이라고 하는 어떤 관념적인 개념과 관련해서 그런 게 작가의 정체성이라는 것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임정민 : 제가 시 쓰는 사람들의 경우를 종합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제가 등단한 2015년 전후로 겪었던 상황들이나, 그 주변에서 뭔가 어렴풋이 짐작하던 문단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조금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을 하고 나서 글을 쓰게 된 케이스인데요. 문창과에 입학한 후에 글 쓰는 선배들이나 친구들을 만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주 모여서 합평이라는 것도 하게 되고, '아, 시가 좋구나. 재미있구나.' 하고 느끼면서 계속 쓰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등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 글을 쓰는 학생이라면 당연히 등단을 지향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계속 등단을 준비했거든요. 사실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겠지만 시를 쓰기 시작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합평을 할 때, 그 합평의 기준이나 목표가 단순하게 '등단'에 맞춰진 경우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분명 등단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 절차를 거치는 것이 앞으로도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과정이고, 그렇게 해서 문단이라는 곳에도 진입하면서 작가가 되는 것이라는 인식은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등단한 시기가 2015년인데요. 아까 앞에서 출판사 모임, 송년회 등을 말씀해 주셨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2015년이 지나고 2016년부터는 그런 공동의 자리에 참석해 보지는 못했어요. 등단을 한 후에 2016년부터는 모두가 알다시피 분명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실제로 모임의 자리도 많이 줄어들거나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요. 어떤 변화의 시기를, 달라지는 환경을 겪으면서 스스로도 제가 익숙하게 여겨 온 기존의 것들을 조금 빠르게 갱신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계속 느껴 왔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고민의 과정이 정말 중요한 것이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당시에 다소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제 경우 등단 직후에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주변에 시 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나 합평회 같은 자리가 갑자기 줄어들었고, 그래서 창작 활동의 동력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거든요. 이후에 좋은 기회를 통해 비슷한 환경에 있는 몇몇 시인분들을 만나서 시를 꺼내 놓고 의견을 나눠 보고, 내가 쓰고 있는 것들과 비교도 해보고, 학습할 만한 부분도 고민하고 또 새로움도 목격해 보고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이런 시기 덕분에 다시 시 쓰기를 이어 나가게 된 걸 보면, 이게 시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주변의 동료들과 교류하는 과정이 작가의 정체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등단 여부를 떠나서 어쨌든 동시대의 무언가를 계속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그걸 나의 영역과 부딪치게 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시를 쓴다는 감각? 시에 관한 체험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는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우은실 : 대답을 듣다 보니 추가로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생겼어요. ‘시나 소설을 쓴다.’ 하는 감각과 ‘내가 등단을 한다.’라고 하는 것이 분리되어서 생각될 수 있는 거라면, 그런 측면에서 등단이라는 것은 과연 필요한 제도인가? 이런 질문으로 이어 가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방금 임정민 시인께서는 이전에도 합평 활동을 계속하고, ‘아, 시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 것들을 많이 느끼고,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다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것과 관련해 조금만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임정민 : 네. 우선 합평이라는 방식에 대해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재미를 느꼈던 경험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에서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합평회와 같은 형식은 어떤 위계를 확인하는 장이 될 수도 있고, 합평 대상이 되는 작품의 가치가 불합리하게 훼손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측면이 언제든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거라고 보거든요. 글을 생산한다는 행위는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이 추진하는 개인적인 작업일 수 있는데, 합평과 같은 활동은 글쓰기를 공동의 영역으로 넘겨서 생각해 보는 것이잖아요. 이게 의미를 확장한다든지, 눈을 넓힌다든지 하는 경험으로 환원되면 좋지만 건강하지 않게 진행되는 경우도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등단이라는 것은 과연 필요한 제도인가'라는 질문과 관련해서도 비슷하게 따져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등단제도가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의 과정을 열어 주거나, 작가로서의 활동에 기점이 되거나, 혹은 또 다른 작가들을 만나게 해주는, 대면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더라도, 특정한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면 유효한 것이겠지만, 등단을 준비하는 과정이나, 등단을 한 후에 자기 세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 제도가 사람들의 경험을 통제하는 쪽으로 작동한다면, 등단이라는 게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글을 쓴다는 감각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목격해 보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하게 됩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과 독자 및 등단의 관계

 

선우은실 : 아까 박민정 선생님이 해주셨던 이야기들 중에 “소설 쓰는 누구입니다”, “시를 쓰는 누구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우리가 뭔가 비평‘가’, 시인, 소설‘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뭔가 행위를 하는 걸로 자기를 소개하는 것의 차이를 이야기를 해주셔서 제가 ‘어, 나도 방금 비평 쓰는 이라고 이야기를 했구나.’ 싶었어요. 직능인으로서 자기를 구별하는 것과 행위 하는 사람으로 자기를 정의하는 건 조금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등단제도로부터 이른바 유구하게 부여받아 온 권위(?)라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반응들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등단이라는 것이 사실은 글쓰기의 욕망이라는 것과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절차적인 것으로 기능하거나 조금은 분리되어서 여겨지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글쓰기 자체를 욕망하는 것과 등단을 목표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약간 바깥에 다른 여지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서 박세회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이제 작품 활동을 막 시작하신 입장이고, 이런저런 외부 상황 때문에 작가 집단이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마주침이 별로 많지 않다고도 하셨고, 본업이 따로 있으시지요. 소설을 쓰시게 된 계기,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 등이 어떻게 연결이 되었는지 들어 보고 싶습니다.

 

박세회 :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일은 없었지만, 소설을 좋아했고 《허핑턴포스트코리아(Huffingtonpost)》라는 곳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때 냈던 기획이 〈현재 작가〉라는 제목이었어요. 박상영, 장류진 작가, 이분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어요. 또 때마침 그때쯤에 아내가 소설 창작반에 다니게 되었어요. 그래서 소설 쓰는 걸 봤는데, 소설 쓰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저도 ‘소설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방금 언제 처음 작가라고 느꼈는지를 물으셨는데, 저는 등단한 작품이 처음 완성한 소설이거든요. 그때 처음 소설을 완성했을 때 ‘아, 이건 소설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그전까지 습작으로 썼던 건 제 눈으로 보기에는 소설 같지 않았거든요. 근데 첫 소설을 완성했을 때는 ‘아, 이건 소설이다.’라고 느꼈어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아, 이건 누군가한테 보여주면서 소설이라고 말해도 되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 작품을 수정해서 등단을 했습니다. (등단이라는 과정 전후에) 확실히 차이는 있는 거 같아요. (등단 전에는) 작가라고 느꼈다기보다는 ‘내가 쓴 이것이 소설이라고 말해도 되겠다.’라고 느꼈죠. 이런 생각도 들긴 해요. 예를 들면 자기가 피아노를 취미 수준으로 치는데, ‘연주자’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친구 중에 주말마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있는데 되게 잘 그려요. 그 친구도 어디 가서 자기가 화가라고 하지는 않거든요. 그건 내적 결론에 따라 이르는 거지, 사회적 결론으로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등단을 하고 나서도 당분간은 저는 어디 가서 소설가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거든요. 그건 다 상이한 거 같고, “넌 등단해서 소설가라고 말해도 돼.” 이런 것도 아닌 거 같고요. 굉장히 복잡(하고 개인적인) 문제인 거 같습니다.

 

박민정 : 말씀 들으면서 생각이 났는데, 저도 지금도 어디 가서 소설가라고 말을 하지는 못해요. 전 예전에는 항상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요즘에는 그냥 ‘학생들 가르친다.’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도 소설가라고 일컬어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작가들끼리 만났을 때 “소설 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했던 게 행위에 집중을 하는 호명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말 자체가 민망하잖아요. “나는 소설가다.” 시 쓰시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시인이니까. “저는 시인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민망하다고 제 친구들은 그러는데, 그렇죠. 스스로 나를 호명할 말은 아닌 거 같아요. 이를테면 사실 교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건 그게 호칭이기 때문이잖아요. 그 사람을 직업으로 부르는 게 별로 익숙하지 않잖아요. 근데 박세회 작가님은 글을 쓰는, 글을 완성하는, 그러니까 진짜 말 그대로 그 행위에 집중하는 그 일과 등단을 했던 시기가 조금 맞물리는 부분이 있잖아요. 아까 ‘내가 소설을 쓴다.’라는 그 행위를 하고 있다는 확신감과 등단을 했던 시기가 맞물리는 분인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학생들 작품을 합평하면서도 작가라고 표현하거든요? “이 작가는~” 이렇게. “이 작품을 쓰는 학생은~”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아요. “이 작품의 작가는~”, 혹은 “저자는~” 이렇게 표현을 해요. 작가, 저자라는 말이, 저자도 예전엔 ‘단행본 낸 사람만 저자다.’ 이렇게 누군가는 이야기를 하고, 작가도 ‘등단을 한 사람만 작가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라면, 제가 이 대학교 1, 2학년 학생들 작품들을 보면서 “이 작품의 작가는~”,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게 만약에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는 어불성설인 거잖아요. 하지만 이런 말을 입에 담으면서 내가 지금 학생들을 이상하게 호명하고 있다는 의심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냥 그 작품을 나는 보고 있고, 이 작품을 쓴 사람이 작가니까, 작품을 쓴 사람이 작가인 게 분명하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지 거기서는 이 사람이 직업인으로서 인증을 받았는지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데, 이런 건 있죠. 그러니까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썼는데 지금도 여전히 ‘내가 소설가다’, ‘작가다’라는 의식이 그래요. 작가라고 하는 건 괜찮아요. 소설가라는 말보다는. 근데 “소설가다.”라고 이야기를 하기가 지금도 되게 부끄러운 것처럼 고등학교 때도 혼자서 소설을 되게 많이 썼거든요. 사부작 사부작 쓰면서 ‘나는 작가야’, ‘나는 소설가야’ 이런 인식은 당연히 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건 대학교 때도, 문창과 다니면서 글을 쓸 때도 그렇고. 근데 등단을 했기 때문에 달라진 건 너무나 명백하게 있어요. 그전에도 항상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등단해서 달라진 건 입도선매하는 계약 방식이 유행하던 당시에 등단을 해서 책을 일찍 계약하게 되었지만, 그 계약한 책을 바로 작업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고, 첫 작품집이 나오기까지 4, 5년 걸렸는데, 일이 들어오지 않는 시기를 되게 오래 거쳤어요. 청탁이 없고, 작품을 주문받아서 쓰는 게 청탁이잖아요.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그런 매체라든지, 만약에 내가 이 시기에, 2020년 이후에 등단을 했다면, 문예지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계기 같은 걸 더 많이 찾았을 거 같은데 그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그렇게 하면 나의 작품을 존중하지 않는 일인 거 같고, ‘나는 그저 죽을 때까지 기다리더라도 주문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동안 더더욱 다른 사람들은, 일이 많은, 청탁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자기가 작가라는 인식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거는 그렇게 지면을 많이 받지 못했던 시기에도 ‘내가 그 이전과 다르다.’라는 생각은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나 자신이 나의 존재성이 달라진 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러니까 그전에는, 문창과 다닐 때는 합평을 받으려고 소설을 많이 썼죠. 합평 마감일이라는 게 나에게 주어져 있고, 항상 우리는 경쟁적으로 등단을 하려고 노력을 했으니까. 일 년에 거쳐서 신춘문예부터 문예지 공모전이 징검다리처럼 주르르 있잖아요.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작품을 쓰고 작품이 떨어졌는데 똑같은 작품을 다른 데 또 내면 그건 또 아닌 거 같으니까 또 쓰고, 또 쓰고 하는 과정에서 ‘나는 등단을 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다’, 혹은 ‘합평을 받기 위해서 쓴다’, 합평을 왜 받느냐면 퇴고를 하기 위해서 합평을 받는 거잖아요. 그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어딘가에 제출하기 위해서 썼던 거죠. 그렇게 해서 항상 목표는 ‘나는 잘 쓴 소설 하나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게 가장 큰 욕망이었고. 그런데 등단하고 나서는 이게 다른 거예요. 예전에는 한 편의 작품을 잘 만들어내는 게 중요했다면 이제는 나라는 작가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사람들한테 알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 어쨌든 지금 프로덕션 안에, 생산 시스템 안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런 자각이 굉장히 컸던 거 같아요. 비록 내가 지금 일을 많이 받고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예전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 글을 썼다면 사실 이제부터는 내가 문예지에 발표하면 한 명의 독자가 읽는다고 해도 그것은 돈을 받고 글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산자로서의 자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거. 이게 등단이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였거든요? 겸연쩍게 이야기하면 소설집을 내고서도 저에게 부끄러운 작품을 모았다고 개인적으로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이걸 돈을 받고 파는 입장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굉장히 강해졌고, 왜냐하면 누군가는 이것을 책값을 지불하고 샀을 텐데 나에게 부끄럽고 모자란 작품들을 모았다고 하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등단 이전과 이후를 생각해 보면 이전에는 내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글을 썼던 것, 이후에는 이제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파는 사람도 될 수 있으니까 파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거 이런 생각들을 굉장히 일부러 의식적으로 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선우은실 : 등단을 제도로서 사용할 수 있다면 또 중요한 하나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건으로 ‘독자’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군요. 관련해서 작가되기로서의 등단 경험과 독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합니다. 김중일 선생님께 먼저 질문 드리고자 하는데요. 한 가지 먼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실례지만 지금 어떤 전공의 교수로 재직 중이신가요?

 

김중일 : 시 창작, 문예창작과에 재직 중입니다.

 

선우은실 : 아, 그렇죠. 선생님께서 처음에 대학에서 공부하셨던 전공과는 지금 다른 전공에서 전문인으로서 활동을 하고 계셔서 확인차 여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등단 이후 활동한 시기도 굉장히 길고 좌담 시작 즈음 매체의 변화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주셨지요. 선생님의 활동 시기 동안의 매체 변화와 등단에 대한 인식의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1인 1PC라든지, SNS라든지, 스마트폰 같은 것이 없던 시기에 활동을 시작해서 지금은 선생님께서 지도하는 학생들은 1인 1PC에, 스마트폰 유저일 텐데요. 꼭 등단이라는 걸 거치지 않아도 자기가 독자들을 자생적으로 모아 볼 수도 있다는 환경적인 변화가 존재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입장에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두 시기를 다 경험하고 계시잖아요? 그런 입장에서 그 격차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그런 이야기를 폭넓게 들어 보고 싶은데요.

 

김중일 : 폭넓게요? (웃음) 글쎄요. 일단은 한 가지 느끼는 건 제가 등단을 했던 20여 년 전 당시의 문학 독자들은 지금에 비하면 조금 더 많았던 것 같고요. 물론 당시도 ‘문학의 위기’란 말은 있었지만, 그건 늘 있어 왔던 말인 것 같고. 학교에서의 지망생들도 많았던 것 같고요. 신춘문예 등의 등단 공모전 응모자의 계량적인 숫자들도 지금보다는 더 많았던 시기인 거 같고요. 당시는 아무래도 그만큼 순수문학을 지망하는 청소년과 대학생들, 혹은 학생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연령층에서 그 숫자만큼은 지금보다는 많았던 거 같아요. 제가 신춘문예 출신이라서 그런지 2000년대 초반 당시 신춘문예 응모자 수에 관심을 뒀던 기억이 있고요, 최근에 모 신문사 신춘문예 예심에 참여한 적이 있어서 자연스레 응모자 수를 알게 되었고요. 근데 재밌는 건,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신춘문예 응모자 수의 경우 20년 전이 지금에 비하면 평균적으로 높았던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지금과 2~3배 크게 차이 나지는 않는 거 같아요. 한 80%? 어떤 통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 제 개인의 체감이지만, 그에 비하면 전반적인 문학도서 판매량은 반토막 가까이 훨씬 더 줄어든 것 같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20년 전에 비해 지금은 학생들을 포함해 누구나 1인 1PC에, 스마트폰 유저이니까 어쩌면 ‘쓴다는 것’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진 것이죠. 반면 전자책이다 오디오북이다 많이 나오긴 했지만, 디지털 디바이스가 아직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에 ‘쓰는 것’만큼은 큰 영향을 못 주는 것 같아요. 아무튼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체감하기에는, 제가 대학생 시절에는 꼭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싶다며 준비하는 학생들이 문창과는 물론이고 국문과, 영문과, 불문과, 심지어 신방과, 저처럼 공대생까지 다양했는데, 현재는 문창과 학생들조차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해요. 현장에서 학생들과 소통하다 보면 순수문학으로 투신하려는 의지를 가진 학생들이 현격히 줄어 가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등단 관련한 공모전의 수나 참여자의 수가 비교적 유지되는 건 앞서 말했듯 분명 쓰는 것이 용이해진 환경의 변화 때문인 것 같고, 그렇다 보니 이렇게 ‘등단’이란 것에 대한 화두도 다시금 떠오르는 게 아닐까 싶네요. 저도 최근 몇 년 신춘문예 시 부문 예심을 보며 느낀 게, 십 수 년 전에 비해 작품의 밀도가 조금 가벼워졌지만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어쩌면 독자로만 남았을 수도 있는 분들이 새롭게 창작자로 유입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문창과 교육 현장에서 체감하는 것에 비해서는 물리적인 숫자는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고요. 또 말씀드리지만,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대학생들의 경우 ‘내가 순수문학 계열의 소설가가 되어야겠다’, ‘시인이 되어야겠다’ 이런 학생의 수는, 문예창작과 내에서도 한 10%에서 15% 정도 선인 거 같아요. 문예창작학과라고 하더라도 굉장히 소수라는 거죠. 웹소설이나 웹툰 쪽으로 많이 흡수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고요. 물론 여전히 시를 쓰고 싶어 하고, 소설을 쓰고 싶어 하고, 신춘문예나 혹은 ‘창비’나 ‘문동’ 등으로 등단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소수지만 존재해요. 제가 그 친구들하고 비교과 수업 등을 통해서 평균치에 맞춰 해야 하는 보통의 수업에 비해 다소 밀도 높게 창작에 관한 소통을 해보면서 느낀 게 뭐냐면, 만약 등단을 하지 못하고 어떤 특정한 시기를, 여기서 특정 시기라고 하면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는 아마도 졸업이겠죠? 취업이나 현실적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그러니까 시를 쓰는 게 좋고, 소설 쓰는 게 너무 좋고 그런데, 기왕이면 등단을 하고 싶은데, 만약에 졸업할 때까지 또는 졸업 이후라도 길지 않은 어떤 시점까지 내가 등단이라는 걸 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시나브로 시 쓰기나 소설 쓰기 같은 것들을 서서히 멈출 수밖에 없을 거 같다는 그런 생각을 비교적 뚜렷이 하고 있어요. 문창과생이라서 오히려 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계속 등단을 못 하고 5년, 10년이 되어서 20대 중반, 후반, 서른이 되면 그래도 계속해서 시를 좋아하고 동인회 같은 거, 사적인 모임 같은 거를 만들어서 모여서 품평회를 통해 이야기를 하고, 그럴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니라는 것에 가깝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요. 물론 조금 더 적극적이고 의지가 많은 친구들 같은 경우는 최근에 어떤 여러 가지 플랫폼을 이용해서 메일링 서비스 같은 것도 하고, 등단하지 않고도 활동하는 사례가 많고, 소위 비등단자지만 시집 원고를 투고해 볼 수 있고, 실제 성과를 내기도 하고요. 지금은 여러 가지 활동할 수 있는 방식들이 많지만, 제 경우가 좀 특수한지 모르지만, 제가 만난 대다수의 순수문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은 사실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없는 거 같아요. ‘등단’이란 것이 순기능이라면 내가 계속 글을 쓰기 위한, 혹은 잘 쓰기 위한, 아까 박민정 선생님도 말씀하셨듯이, 나의 글을 어찌 되었든 간에 읽어 주는 불특정한 누군가가 있을 거니까…… 나의 지인, 나의 동기, 나의 친구만 있는 것이 아닌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을 수도 있다는 그런 사실이 창작자에게 주는 의무감과 책임감? 이런 것들이 계속 글을 쓰고, 또 잘 쓰고 싶어 하는 의지를 유지해 주는, 그러니까 가라앉지 않게 계속해서 부양해 주는 기능이 있는 것인데, 반대로 그래서 등단을 하지 못하면 창작에 대한 탄력과 지속력이 시나브로 떨어지는 거죠. 문창과 학생의 경우에 더더욱요. 꿈같은 이야기지만, 만약에 등단이라는 제도가 어느 날 한날한시에 일괄적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어떨까 이런 상상도 해봤는데, 저는 오히려 어쩌면 우리가 존경하는 작가들처럼 평생에 걸쳐서, 평생은 아니더라도 일생의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꾸준히 계속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꽤 줄어들지는 않을까? 앞서 제 개인적인 사례라는 전제로 말씀드렸는데, 오늘의 주제가 등단이기도 하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지금 약 20년 정도 시를 쓰고 있는데, 만약 등단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껏 안 썼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 거예요. 지금처럼 꼭 등단 절차를 안 거치더라도 누구나 창작을 할 수 있는 용이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하더라도요. 직장 생활 하는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까 창작의 의지나 물리적인 여러 가지 조건 이런 것들이 정말 쉽지는 않죠. 아마 분명히 시 쓰기를 그만뒀을 거 같다는 생각이 100% 드는 거죠. 저의 경우 졸업 전에 운 좋게 등단을 하지 못했다면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의 끈을 과연 놓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게 제가 생각하는 등단의 순기능 같고요. 물론 등단을 함으로 해서, 그 제도가 갖는 위계의 문제나 이미 공론화된 부작용이 있는 것도 맞지요. 그것을 잠시 논외로 한다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우은실 : 등단제도라는 것과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게 하는 내적 동력이 무관하지가 않아서 우리가 제도를 돌아볼 때는, 아까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독자라는 존재로부터 추동 받는 책임감도 분명히 존재하고, 한편으로 지금은 이걸로 먹고살 수 있어야 된다는 문제도 개입되면서 문학이란 제도가 활용되고 인식되는 측면이 보다 다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잠시 휴식한 뒤에 과연 등단제도라는 것을 우리가 지속해야 할까? 아니면 고쳐 써야 할까? 아니면 완전히 없앨 수도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을 이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뉴미디어 시대에 등단이라는 제도를 다시 사유하기

 

선우은실 : 다시 좌담 이어 가 보겠습니다. 김중일 선생님께서 두루 짚어 주신 매체 감수성과 등단이란 것을 검토함에 앞서 등단제도라는 것의 역사성을 조금은 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이 좌담을 준비하며 참고한 자료에 따르면1) 등단제도를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었다고 보더라고요. 하나는 신문이나 잡지라는 매체, 그 매체의 혁신이라는 게 하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문가 문학인이라는 증명성, 즉 이데올로기적 전문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등단제도라는 게 단순히 ‘작가를 뽑아서 활동을 시킨다.’ 이게 아니라 그 당시의 영향력 있는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전문 문학인이라는 차별화된 존재다.’라는 그런 직능인으로서의 예술가의 자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확충되기 시작한 게 1920년대 등단제도라고 해요. 등단제도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작가를 탄생시켰으니까 작가가 가진 예술가로서의 전문성이나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이런 것들이 계속 부여되어 왔고, 그들이 하는 작품 활동도 결국에는 정치성과 멀어지거나 무관해질 수 없다는 메시지들이 계속 이어져 오기도 했을 텐데요. 이러한 맥락들 위에서 사실은 등단제도가 명맥을 계속 유지해 왔다고 할까요? 이때 그러한 토대 위에서 지속된 것과 그런 맥락은 과거에 구성된 것이어서 지금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부딪히면서 발생한 사건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까 박민정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던 문단 내 성폭력과 관련한 위계 문제라든지, 아니면 다른 작가분들도 경험하셨다던 합평 안에서의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라든지, 연차에 따른 권력의 발생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있을 테고요. 이런 맥락 위에서 구시대의 문화적 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등단제도가 2021년까지 이어져 왔을 때, 어떤 점에서 그 감각의 부딪힘이라는 게 발생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균열 속에서 등단제도라는 것이 유지되거나 폐지되어야 하는지 혹은 수정되어야 하는지 그러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1)  차혜영, 「근대문학제도의 성립」, 민족문학사연구소 엮음, 『새 민족문학사 강좌 02』, 창비, 2009.

 

김중일 : 네. 죄송한데, 질문의 요점을 이야기해 주시면…… (웃음) 듣다가 제가 좀 헷갈려 가지고…….

 

선우은실 : 네. (웃음) 질문의 요점은 뭐냐면 이렇게 과거에 이런 방식으로 유지되어 온 등단제도의 맥락이 하나가 있고, 그리고 지금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한테는 또 새로운 매체의 변화라든지 자기를 규정하는 새로운 감각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부딪히게 되는 것들이 생기게 되는 거 같아요. 위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라든지, 제도를 거친다고 하는 것의 인식이라든지, 이런 것들이요. 이런 차이를 추동하는 요인이 있다면 뭘까요?

 

김중일 : 질문 속에 이미 요인을 말씀하신 거 같은데, 저는 등단제도라는 것들이 일단은 그런 거 같아요. 지난번 다른 선생님들이 모여 같은 ‘등단’이라는 주제로 말씀하신 대화록을 조금 훑어봤는데, 등단제도, 혹은 신춘문예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들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있어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신춘문예를 중심으로 등단제도의 장단점에 대한 논의는 기왕에 있어 왔던 것이고, 여전히 지금도 있는데, 최근에 있었던 등단제도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 그 논의에 비해서 뭔가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기는 거 같아요. 굳이 등단제도를 유지해야 할까? 아니면 유지하지 않아도 될까? 이런 화두 자체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있었던 것이라면 또다시 그 이야기가 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신춘문예에 대한, 등단제도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과거에는 말씀하셨다시피 한 명의 어떤 지망생이 작가가 되고, 활동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문단이라는, 혹은 잡지라는, 혹은 신문사라는 플랫폼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사실상 거의 선택지가 없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알다시피 여러 가지 방식의 활동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히 이번 토론 자리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던 2000년도 중반의 문단 내 성폭력 이슈가 터졌을 때 등단에 관한 이슈도 함께 터졌었죠? 시 전문지인가요? 특정 시 전문지를 중심으로 해서 그런 것들이 아울러 터지면서 암묵적으로 문단이라는 것이 가져 왔던 공고한 권위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희석된 거 같아요.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등단하지 않더라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겠구나.’라는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점, 그런 부분이 이전과 가장 큰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이른바 문단 문학 장으로 편입되지 않고 하는 작품 활동에는 형식적인 자유로움도 덤으로 얻게 되죠. 그런 부분이 독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도 있고. 쉽게 말해 신춘문예 주관사나 잡지사에서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작품의 특정한 분량 같은 것도 이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몇 매 내로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집어넣어야 하니 영향이 없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말은 꽤 오래 전부터 있어 왔잖아요. 창작자마다 에너지와 호흡이 다르다면, 이 등단 작품에 대한 분량의 제약 같은 것도 어떤 독특한 개성의 작가들의 출연에는 허들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네. 짧게 저는 이 정도로…….

 

선우은실 : 박세회 선생님은 어떠세요? 지금 잡지 쪽에서도 일을 하고 계시지요. 독자라는 개념에 대해서 민감하실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매체와 독자와 관련해서, 등단이라는 걸 같이 집어넣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박세회 : 저는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에스콰이어》에서 일해요. 거기서는 피처 디렉터(Feature Director)라는 업무를 맡고 있어요. 그래서 문화와 관련된 것들을 기획․편집하고, 팀원의 원고를 데스킹 하는 게 주요 업무입니다. 기획하고 편집을 할 때는 확실히 어떤 기사가 읽힐지 염두에 두거든요. 그런데 최근의 경향은 원고는 점점 짧아지고 파편화되는 것 같아요. 작게 묶인 그런 자글자글한 것들이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잘 확산된다는 경향 같은 걸 느끼고는 있어요. 그러면 소설이라는 거는, (제가 시는 안 써 봐서 죄송한데, 주제넘게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일단 원고지 70매, 최소 14,000자가 단편이라고 불리고, 그런 것들을 과연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바이럴 해서 PV(Page View)를 얻어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소셜 미디어, SNS라고 하는 게 (소설을 바이럴 하기에) 적합한 플랫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사실 이미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웹소설 같은 걸 보면 되게 예쁜 사진, 사진 같은 그림과 함께 행갈이도 문장 하나 내지는 두 개로 짧게 해주죠. 웹소설가들이 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1강, 당신은 좋은 이야기를 쓰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독자의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잠시라도 만족스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대리만족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소설의 본령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제가 쓰는 소설의 본령과는 맞지 않죠. 시대는 변했는데, 나는 옛날 사람이니까 그냥 쓰던 거 쓰는 거지요. ‘내가 지금 시대에 다시 태어났다면 과연 등단을 필요시하는 이런 제도를 활용했을까?’라는 생각도 확실히 들긴 합니다.

 

선우은실 : ‘소설의 양식 자체가 지금 매체의 변화에 맞춰서 적응해야 되는 문제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라는 식으로 이해를 해도 될까요? 소설이란 형식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글자 수라는 게 있고, 그걸 적절한 방식으로 실을 수 있는 매체라는 것도 존재하는 셈인데, 그런 점에서 소셜 미디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지금까지의 소설의 양식이랑은 그렇게 맞아떨어지는 종류의 형식은 아닌 거 같다, 라고 이해했습니다. 맞나요?

 

박세회 : 아까 웹소설과 대비해 말씀을 드린 건 웹소설이 나쁘다거나, 그게 옳지 않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직접적인 재미라든지 대리만족의 세계를 제공하려는 것과는 다른 목적으로 소설을 쓴다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시간순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플롯이란 걸 만들어서 재밌는 이야기로 만드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 본성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살면서 내 모습 안에다가 남들의 이야기를 비춰 봤을 때 생겨나는 어떤 균열이 있는데 그걸 이야기라는 형태로 남한테 전달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저는 크게 이 두 가지 이유로 소설을 쓰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성취하려면 분명히 분량이 필요해요. (그런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세계로, 독자는 지금 처음 알게 되고, (작가인) 나는 이미 굉장히 많은 걸 알고 있는 세계 속으로 일단은 끌어들여야 하니까, 손짓을 해야 되고, 설명도 해줘야 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나야 하니까요. 사실은 우리가 단편소설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는 건 ‘이걸 하려면 (최소) 70매 정도는 필요하겠더라.’라는 의미거든요. 그리고 그 그릇의 크기라는 게 소셜 미디어와는 아주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우은실 :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등단제도라는 것을 논의할 때 단순히 매체 변화의 감수성만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점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등단이라고 하는 시스템이 사실은 요구하는 일종의 형식이라는 게 있잖아요. 분량이라든지, 주제라든지 여러 가지를 포함해서. 그런 것들을 다 생각해서 하다 보면 그냥 매체가 변하고 감수성이 달라졌기 때문에 등단제도에 대한 이런 것들이 나온다,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좀 어려워진 점도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박민정 작가님은 어떠세요? 짧고 긴 분량의 소설을 두루 쓰시면서 매체를 많이 활용해 보시기도 했을 텐데…….

 

박민정 : 매체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이즈음에는 SNS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금 우리한테는 SNS가 뉴미디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 매체라는 게 훨씬 더 광의의 개념이잖아요. 뭔가를 전달하는 형식이니까……. 단지 요즘에 논의를 할 때는 빠르고, 조금 인스턴트에 가깝고, 그런 형식을 갖춘 미디어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런 성격을 가진 매체에는 소설이 적합하다고 하기는 어렵죠, 사실. 박세회 선생님이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사실 또 한국에서는 소설을 분량으로 나눌 때, 분량을 기준으로 소설의 장르를 나누는 기준이 뭔가 엄격하게 있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한국에서는. 예를 들면 미국처럼 이름이 다르게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또 소설의 분량을 굉장히 다양하게, 예를 들면 엽편도 그렇고, 10매, 20매, 30매, 50매, 이런 식으로, 예전에는 진짜 100매에서 120매 사이의 그런 작품들만 청탁을 했던 거 같은데, 그것도 어느 순간 이후에, 아무래도 뉴미디어의 성격을 같이 논의하다 보니까 좀 짧아진 경향도 있고, 그리고 잡지의 볼륨도 예전에 우리가 흔히 문예지라고 하는 좌담 싣고, 인터뷰 싣고, 작품 몇 개 싣고, 비평 싣고 하는 그런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다 보니까, 잡지의 형식도 다양하게 추구되다 보니까 소설의 분량이 짧아지는데, 저는 솔직히 말하면, 작가 입장에서 봤을 때 사실은 그런 것들이 좀 불만스러웠죠. 이런 매체의 구조 변동에 우리가 희생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소설가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분량으로 담아야 하는데. 분량에 따라서 애초에 기획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고, 내가 10매를 쓰느냐, 20매를 쓰느냐, 아니면 100매 이상을 쓰느냐, 아니면 500매를 쓰느냐, 1000매를 쓰느냐에 따라서 기획 자체가 아예 달라지는데, 잡지들이 대체적으로 분량을 좀 줄여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다양한 기획을 못 하게 하는 거 같다는 그런 불만이 굉장히 강했고, 조금 더 까놓고 이야기하면 원고료 문제도 있죠. 원고료를 굉장히 축소하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이게 결국에는 원고료가 줄어드는 것 말고는 소설의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하기에는 사실…… 제일 좋은 거는 자기가 하고 싶은 기획에 맞게 알아서 하라고 지면을 주는 거죠. 물론 그게 단행본 한 편 정도의 분량이 되려면 500~600매 이상은 되어야 하니까. 그거랑 잡지에 실리는 소설이랑은 분량상의 볼륨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해 놓은 분량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매번 거기에 맞춰서 소화를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소설의 분량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틀, 이런 것들은 작가가 자율적으로 정했으면 좋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매체의 변화는 소설가들에게 좀 획일적으로, 전체적으로 좀 짧게 써라 하는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거 같아서 그게 좀 아쉬웠고, 그래서 아까 처음에 매체라는 것도 광의의 의미를 가진다고 이야기를 했던 이유가 뭐냐면, SNS에 한정지어서 이야기하면 거기에는 자본의 논리들이 되게 많이 들어 있는 거 같고요. 그런데 기존의 그런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문예지의 형식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그게 꼭 이 뉴미디어의 형식에 완전히 걸맞은 그런 가장 힙하고, 최신의 방식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매체의 성격은 더 다양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지금 시, 소설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장르들, 굳이 하나하나 예시를 들지는 않겠지만, 혹시 소설만이 아니라 여러 장르에 다 해당될 수 있는 그런 뉴미디어의 성격에 우리도 맞춰 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나마도 없는 독자를 붙들기 위해서 이런저런 기획을 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건 SNS에 한정되는 논의는 아닌 거 같고, 그렇게 말한다면 진짜 소설의 형식에 너무 안 맞는, 배반할 수밖에 없는, 훼손할 수밖에 없는 형식으로 갈 수밖에 없을 거 같고, 매체의 다양성을 논의할 때 소설 쓰기 형식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박세회 : (그 점에서는) 저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문예지라든지, 신춘문예라든지, 이런 등단을 주관하거나 등단과 관련이 있는 미디어들 외에 다양한 창구가 생기는 건 당연히 굉장히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만약에 등단이라는 제도 자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그러니까 더 활성화되고, 더 많이 읽히는 작가들, 그리고 더 좋은 독서를 독려하게 되는 작가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당연히 등단이라는 제도 자체가 시장 논리에 따라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대에 등단이라는 제도 앞에 다시 선다면

 

선우은실 : 단순히 미디어가 어떤 식으로 변화했다고 해서 문학의 형식이 반드시 그 흐름을 쫓아갈 필요는 없지만 분명히 역량 안에서 조금씩 모습을 바꾸거나 적응 가능한 형태들을 보완하고 있는 건 사실인 듯해요. 이번에는 모두에게 공통적인 질문을 드려 볼까 합니다. 방금 전 박세회 선생님께서 “‘내가 만약 이 시대에 작품 활동을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등단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하신 듯한데요.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을 조금 더 들어 보고 싶고,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만약 지금 내가 등단하지 않은 상태이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상태라고 했을 때, 지금의 이런 매체와 이런 여러 가지 감수성 속에서 과연 등단이라는 제도를 다시 경유하고자 할까? 그런 질문을 드려 보고 싶어요.

 

박세회 : 아까 말씀 드린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건 ‘지금 시대에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나이로 다시 돌아간다면’으로 더 정확하게 고치겠습니다. 2020년도에 제가 직업을 선택해야 되는 위치였다면, ‘지금 등단을 한다고 해서 전업 소설가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보장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게 첫 번째 이유고요. 두 번째로는 그 외에 너무 많은 콘텐츠들이 이야기 예술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 예를 들면 웹소설은 물론이고, 드라마를 포함한 다양한 시리즈물들이 있습니다. 요새는 극장에 개봉하지 않는 형태의 영화들도 굉장히 많이 제작되고 있고요. 2020년대에 제가 아직 직업을 선택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근데 저는 1980년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옛날 소설을 읽었고, 그걸 너무 좋아하다 보니 소설을 쓰게 됐지요. 이미 몇 십 년 동안 만들어낸 취향이라는 게 있고, 자아가 있어서 이걸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민정 : 연관이 될지 모르겠네요. 저는 제 조건을 생각해 봤을 때, 제가 지금 2021년에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라고 생각을 해보면, 어쨌든 다시금 인생을 돌이켜봐도 문창과가 아닌 저를 상상하기가 힘들어서 ‘난 여전히 문창과 학생이다.’라고 생각을 했을 때, 이 통시적이라는 거를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데, 방금 말씀하셨듯이 80년대에 태어나셨고, 그래서 굉장히 오랫동안 봐온, 다져 온 취향들, 뭐가 좋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눈, 그리고 전통이라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분명히 한 사람의 정신 속에 축적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마찬가지로 문창과 학생이라면 선생님들은 이 사람들일 거란 말이에요? 옛날 방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집단이고, 학문 공동체라는, 학문 공동체라는 게 서로에게 뭐가 좋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고, 자기 취향을 계속 설득하고, 납득하고, 그리고 꼭 위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선배 선생님들이 해왔던 어떤 것들, 그렇게 해서 좋았던 것들, 이런 것들을 나눠 주고 싶고 그러니까 선생의 역할이 있는 건데, 그러면 이 좋은 것들? 내가 새로운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그러니까 앞으로의 인생을 선택하고, 내가 활동의 방향을 선택할 때, 과연 지금 2021년의 젊은이인 나의 감각이라는 것이 미증유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선택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이 집단이라는 것이 계속 현존하잖아요. 원래 예전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했던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고, 그들이 선배로서, 선생으로서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건 정말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냥 정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나의 온전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여전히 그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 안에서 내가 좋은 것을 찾아내고요. 80년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거. 저는 그런 걸 느끼거든요? 학생들을 만났을 때 저는 매번 이 문학 안에서의 시간은 항상 정말 비가역적이라고 해야 될까요? 내가 1990년대에 만났던 문학 청소년들도 그렇고, 2000년대에 만났던 사람들도 그렇고, 10년대, 20년대까지 계속 되게 똑같은 부분이 있거든요.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가지고 있는 촌스러움이 있고, 똑같이 가지고 있는 전통에 대한 숭배가 있고, 그래서 지금 여러 가지 플랫폼들이…… 학생들이 지금 플랫폼들을 새로 만들기도 하고, 그렇게 만들어서 학교에서 지원금을 받기도 해요. 근데 그런 걸 보면 되게 고무적이고,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우리가 매체를 만들어서 지원을 받는다는, 학교 돈을 받아서 내가 매체를 만들고 그걸로 내가 등단을 하겠다, 이런 건 상상할 수 없었는데, 그 매체라는 것은 정말로 몇 십 년간의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그 안에 나를 속하게끔 하는 것, 그런 것이 내가 꿈꾸는 등단의 형태였는데, 요즘에는 학생이, 글을 쓰겠다고 하는 사람이 자생적으로 내가 글을 발표할 매체를 만들고, 그것으로 나는 선생들, 다른 사람들의 인증도 받겠다, 그런 것들을 시대의 변화로서 되게 고무적으로 느끼지만 그러한 어떤 움직임들 속에서도 이 문학의 형태, 그 문학이라는 것이 유통되는 형태에 대해서 갖고 있는 고집스러운 믿음과 그런 것들은 분명히 온존되고 있는 거 같아요. 내가 지금 다시 작가로서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때 외연은 넓어질 수 있겠지만, 이것이 완전히 예전 것을 배반하고…… 그 ‘파격’이라는 것도 파격적인 어떤 것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항상 그전의 것을 전제로 하는 거잖아요. ‘전의 것을 깨트리고 새롭게 나아간다.’라는 건데, 이전의 제도, 이전의 방식 같은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거 같고, 저는 오히려 ‘나는 완전히 그 예전과는 결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선택을 할 것이다.’라고 할 때는 오히려 거기서 새로운 보수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제가 이해하고 있는 통시적 역사성 안에서의 등단제도라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습니다. 선택지는 많아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오랫동안 계속 좋다고 말하고 있는, 믿고 있는 무언가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우은실 : 문학 유통 형태에 대한 믿음이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 SNS와 같은 매체 감수성이 조금 더 짧고, 간결하고, 이미지 중심적인 것들을 요구한다고 본다면 시는 거기에 나름대로 잘 적응할 수 있는 장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경우에는 ‘내가 2020년대에 다시 문학청년이 된다.’라고 했을 때 과연 등단제도를 거치고 싶을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접근도 가능할 거 같은데 어떠세요?

 

임정민 : 다른 분들과 비슷하기도 하면서 또 다른 지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등단을 다시 시도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제도가 있는 한 계속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전과 같이 등단을 시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등단의 방식이 아니어도 글쓰기를 지속할 수 형태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볼 것 같긴 해요. 이건 지금에 와서 제가 그런 시도와 성과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고, 이미 기민한 감각을 가진 작가들이 유의미한 계획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떠올리게 되는 지점인 게 분명하지만, 어쨌든 일방향적으로 등단제도를 통과하는 것만 추구하기보다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적절하게 혹은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내가 기획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내 보려고는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학성? 문학의 정체성? 이런 용어들이 글을 쓰는 자아의 선택을 경직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물론 기존의 것에 기대어서 어떤 파격을 시도한다는 게 실은 기존의 양식들을 수용하는 행위일 수도 있고 또 그 변화 자체가 권위가 될 수도, 다시 문학성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테지만, 문학성이라는 말을 수상하게 여겨 보는 게 지금에 있어서 꼭 필요한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성이라는 말을 문학 작품에 드러난 예술적인 수준이나 문학 작품으로서의 예술성 자체를 의미하는 걸로 봤을 때, 이 의미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상기되는 것은 그 수준과 정도를 수직적으로 평가하는 어떤 지위인 것 같거든요. 물론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작품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가치가 매겨지고 평가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중요한 활동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등단제도 안에서 지금 우리가 의식하는 문학성이라는 개념은 결국 도달해야만 되는 고정된 지향점이 있다는 것을 주입하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유념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한 말인 것 같고, 그래서 그야말로 문학성이라고 일컫는 하나의 불분명한 본체를 향하게 하는 방법론은 이제 좀 뒤로 밀어 둘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선 회차의 논의들에서 여러 번 아카데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저도 그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등단제도라는 게 예술 교육과 너무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또 등단제도와 창작 교육이 서로 호응하는 사이에서 가장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는 의심도 하게 되었어요. 물론 일련의 절차들과 질서, 등단제도, 예술 교육, 이런 각각의 요소들이 서로 영향력을 미치면서 한국 문학이 단단해지는 역할도 분명히 있겠지만, 이제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 고정된 질서를 권위로, 이를테면 권력 이데올로기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제도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대안이 있나 하면 명확한 방식을 제시하긴 어렵겠지만, 문학성이 아닌 관계성이 기준이 되는 방식으로 다시 편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 고민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인상 깊게 들었던 말 중에 하나는 등단을 하기 위한, 등단을 목표로 한 글쓰기가 분명 존재하고, 등단을 하고 나면 다시 겪게 되는 고충들이 따로 있다는 거였는데요. 이 점에 있어서 저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고민하면서 시작되는 싸움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그렇다면 ‘예술 교육에 있어서도 애초부터 문학성이라는 어떤 절대적인 개념보다는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 상대적이고 유동적으로 계속 변하는 관계성에 초점을 둔 교육이 지향될 수는 없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거든요. 어차피 글을 쓰면서 이런 경로를 천천히 따르게 되는 거라면 학생일 때부터 어떤 이후의 활동과 관련한 배움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사실은 조금 무책임한 생각도 하면서, 당연히 이미 여러 현장에서 다양한 연구나 시도가 생겨나고 있을 거고, 또 제가 짐작할 수 없는 한계들도 있을 텐데요. 그래서 저는 여기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시니까, 지금의 교육 현장의 모습은 어떠한지 그에 대해서도 한번 질문을 드려 보고 싶었습니다. (웃음) 요즘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선우은실 : 아카데미라는 지점이나 제도, 그러니까 결국에는 제도라는 말로 묶이는 것들이 계속 튀어나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는데, 만약 다시 선택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다시 등단을 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가 됩니다. 이에 덧붙여 등단이라는 것과 문학성이라는 것을 조금 분리를 시켜 보는 쪽으로 말씀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문학성을 완전히 폐기하는 방식으로. 그런 점에서 아카데미에서 오히려 그 이후의 진행 방향에 대한 것들을 같이 논의할 수 없는지, 그런 질문을 이어 받아 김중일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면 어떨까요? 2021년에 다시 청년이 된다면 등단제도를 선택하실 것인지, 그리고 교육인으로서 등단 이후까지를 바라보고 교육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중일 : 등단 이후까지를 바라보고 교육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고요. 존폐의 여부가 아니라면, 확실히 더 훌륭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등 등단제도라는 과정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제도가 오랫동안 존속해 오면서 낳은 이른바 문단 문학의 일률성, 폐쇄성 같은 것이 문제라고 할 텐데요. 다시 말하지만 예전에 비해 선택지가 생긴 건 사실인 거 같아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고요. 저는 소속 학생들이 만약 기존의 등단제도를 선택하고 성공한다면, 약간은 사적인 조언들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등단 후에는 오히려 문단 문학 장의 중심으로 안간힘을 다해 들어가려 하지 말고, 차라리 회사 생활 하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시를 쓰는 노하우 같은 것이요. 조금 농담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제 경험이 약간 묻어 있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사적인 조언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다시 질문의 원점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지금 현재 등단을 하지 않은 20대였다면…… 일단 제가 등단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떠나서 등단이라는 것을 시도할 것인가,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만의 글을 쓸 것인가, 라는 것들을 고민을 하자면 이게 결국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방금 박민정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가정의 영역이고, 상상의 영역인데, 아무리 상상을 하더라도 저는 그때 그 시절에 등단을 거쳤던 사람이고, 제가 이 좌담의 가장 초반부에 말씀을 드렸듯이 그때의 상황은 지금에 비해서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고, 그래서 만약에 시라는 것을 계속 쓰고자 한다면 결국은 저 역시도 등단을 하려고 하지 않을까. 솔직히 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다만 그 차이는 있을 것 같아요. 등단이라는 것을 못 하더라도 글을 쓰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 이외의 삶이 저한테는 있는 것이고, 그런 삶에 대해 나의 어떤 개인적인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펼칠 수 있다면 저는 또 그렇게 미련을 가질 것 같진 않습니다. 본질은 그거인 거 같아요. 내가 정말 욕망하는 것이 꼭 반드시 이것이어야 하는가. 그 대안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제게 등단제도의 무게는 달라지겠죠. 선생님이 주신 질문지 마지막에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개념으로 도입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고쳐 쓰는 게 좋을까, 라는 선택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저는 고쳐 써야 되지 않겠는가 싶고요. 그리고 지금 이런 자리 이런 방식의 논의 자체, 이런 것들도 이미 고쳐 쓰는 과정에 있는 게 아닌가……. 실제로 ‘등단제도를 반드시 전면 폐지해야 된다.’는 결론을 모두가 진심으로 원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그리고 방금 어떤 매체의 발달, SNS를 이야기하셨는데, 저는 이런 것들을 작품을 실제 게재하는 플랫폼으로서의 대안으로는 그렇게 주목하지는 않거든요. 조금 전 말씀에 소설의 경우에 SNS에 게재하는 건 사실상 쉽지 않다는 말씀도 하셨고요. 오히려 저는 등단제도의 아쉬운 점, 혹은 문단 내에서 발생한 이슈를 공론화하며 요컨대 고쳐 쓰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SNS, 20년 전엔 없었던, 지금은 존재하는 이 매체들이 그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고요. 공론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환경이 과거에 비해서는 개선이 된 건 사실이기 때문에…… 트위터도 그렇고요. 그래서 등단제도 자체를 ‘불필요하다’, ‘폐지하는 게 낫겠다. 그게 오히려 문단에 도움이 되겠다’ 이런 것보다는 고쳐 쓰는 방향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꼭 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검증의 욕망이 있다면 등단제도라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그렇지 않고 나는 또 이렇게 그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다면 굳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 학생들만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학생들하고 실제 대화를 해보면 등단에 대한 무게감이 예전보다는 굉장히 가벼워졌다는 걸 느껴요. 저때에 비해 등단제도를 통한 자기검증이란 것에 상대적으로 큰 무게를 두지 않는 것 같고요. 그냥 글 쓰고 싶으면 쓰는 거고, 등단하지 않더라도 원고를 시집으로 묶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기획된 기회도 있고요. 실제로 저희 학교는 졸업과 동시에 학생이 원하면 전자책으로라도 개인 작품집을 정식 출간해 주고 있어요. 다시 한 번 주신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 제가 등단 전으로 돌아간다면 등단에 대해서 실패하면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한 한 도전은 해볼 것 같아요. 솔직히 등단을 해보셨으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등단한다고 해서 알아서 준비해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실제로 생각보다 청탁은 거의 없고, 첫 시집이나 책을 내는 건 상당히 어렵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치면 무언가 조금 더 쓰고, 시도해 볼 최소한의 동기 정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는 점? 등단제도를 거침으로 해서 내가 계속해서 시라는 것을, 시라는 것을 반드시 쓰지 않아도 삶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가능하면 평생에 걸쳐서 계속해서 글쓰기를 놓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동기 부여가 지속된다는 점. 어렵게 책을 내고 또 다음 책을 준비하고, 이런 순기능을 저는 조금 경험한 편이기 때문에 저는 할 것 같아요. 네, 일단 그렇습니다.

 

선우은실 : 네,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사전에 질문지를 너무 빽빽하게 드려서 질문이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닐까 우려했는데, 해석을 잘 해주셔서 오늘 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누면서 각자 처해 온 환경이나 요소를 스스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현장이라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거나 구성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동 박수)

 

 

〈폐회〉

 

 

 

 

 

 

   《문장웹진 202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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