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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생활탐구] 3화 :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1)

  • 작성일 2022-04-01
  • 조회수 741

[문학생활탐구]

문학생활탐구

설하한, 최아현

 

-3화-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1)

 

 

부추
삑아, 힘들지 않니?


응? 전혀 힘들지 않아. 괜찮은데?

부추
이상하다. 평소라면 지칠 때가 됐는데. 체력이 늘었니?


무슨 소리야.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지친 적 없어. 부추야, 꽉 잡아!

 

삑은 뽐내듯이 더 빠르게 날갯짓을 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삑은 헥헥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날갯짓도 엄청나게 느려졌답니다.


 

부추
삑아, 지쳤니?


헥헥……. 그렇…지…… 헥헥… 않아…. 헥헥.

부추
여기 동산에서 잠깐 쉬었다가 가자.


나는… 헥헥… 하나도… 헥헥… 지치지…….

부추
내가 잠깐 쉬고 싶어서 그래.


헥헥……. 알았… 헥헥… 어….

 

그렇게 삑과 부추는 동산에 내려앉아 쉬고 있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삑과 부추에게 누군가가 다가왔어요.

 

  • (세계문학 독서모임을 하는 호랑이)
  • 진숙집사(페미니즘 SF소설 독서모임을 하는 책방 고양이)

 

 

진숙집사
너희 독서모임에 참여하려고 왔니?

부추
아니, 우리는 무지개 동산으로 가는 중이야.


무지개 동산?! 아, 들어 본 적 있어. 여기서 아주 멀지 않아?

부추
무지개 동산이 어디쯤 있는지 알아?


아니, 그건 몰라. 그냥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만 알 뿐이야.

부추
그렇구나. 그런데 독서모임? 너희 독서모임을 하니? 엄청 재밌겠다! 무지개 동산으로 가야 해서 참여는 못 하지만 너희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니? 독서모임이 너무 궁금해.

 

부추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진숙집사와 앎에게 말을 쏜살같이 쏟아냈어요. 진숙집사와 앎은 흔쾌히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답니다.

 


Q. 너희는 누구니?

 

진숙집사
나는 책방 주인인 진숙집사야. 주로 페미니즘에 관련된 책들을 다루고 있어. 환경이나 동물, 노동자 등 소수자와 관련된 책들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책방이기도 하지. 또 이런 책들을 알리면서 어떻게 하면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고민해. 책방 주인이면서 활동가로서의 정체성도 갖고 있는 고양이야. 요즘은 에세이를 많이 읽는데 은유, 양다솔, 이슬아 작가를 좋아하지.


나는 앎이야. 대학교 때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문학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어. 지금 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냐. 대신 2015년부터 매주 독서모임을 하고 있지. 얼마 전에 300회차 출석을 달성했어. 좋아하는 작가는 조금씩 바뀌지만 한국 작가로는 최진영 작가를 좋아하고, 도리스 레싱, 조디 피코도 좋아해.


Q. 양손 가득 든 책들은 뭐야?

진숙집사
두루미 출판사의 《물결》이라는 계간지의 창간호(2020. 겨울호)야. 동물권 운동을 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어. 동물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주제를 담고 있지. 이 주제에 맞춰서 여러 사람의 글이 짤막하게 들어 있어.


나는 좀 많지? 우선 〈시사IN 저널북〉에서 나온 『20대 여자』라는 책이야. 작년 8월에 20대 여성을 분석하기 위해 리서치를 한 적이 있거든. 그 내용을 기사로 다듬어 내보냈고 그 이후에 책으로 엮어서 만든 책이야. 최근에 이 책의 온라인 북토크에 참여했거든. 덕분에 가장 가까이에 있어. 그리고 옆에 이건 산도르 마라이의 『유언』이라는 소설이야. 한때 내가 이 작가에게 푹 빠져서 이 작가의 책을 전부 사서 읽은 적이 있었지. 그러다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읽었어. 조디 피코의 『거짓말 규칙』이라는 책도 있고…….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더 파이브』도 있어. 잭 더 리퍼 알지? 흔히 잭 더 리퍼의 희생자들 대부분이 성매매 여성들이고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고 말하잖아. 그런데 이 책에서는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매춘부’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노숙하던 빈곤 여성들이었음을 밝히고 각자의 인생과 서사를 조명하고 있어. 그동안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섯 여성을 연구해서 쓴 책이라고 해. 좀 많지?


Q. 멋진 책들이구나! 너희들이 독서모임을 시작한 계기는 뭐야?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이후에도 문학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 계속 직장, 집, 직장, 이렇게 다니는 데다 책도 혼자 읽으니까……. 지금도 혼자 잘 읽지만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좀 더 문학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그때 인터넷 검색을 하다 지금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발견하게 됐지. 우리 독서모임은 오프라인에서 진행했는데 당시에 리더를 맡아 운영하던 분이 개인 사정으로 참여할 수 없어서 내가 리더를 맡아서 이어 나가고 있어.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오프라인으로는 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진행해.

진숙집사
내가 운영하는 책방 안에서 정말 수많은 독서모임이 진행되고 있어. 그중 꾸준히 하는 모임으로는 SF 페미니즘 독서모임이 있어. 이 모임은 2018년도부터 진행했고 이 모임 외에 내가 운영하는 모임은 글쓰기 모임, 페미니즘 미학 읽기 모임, 한나 아렌트 읽기 모임, 기후위기 관련 도서 읽기 모임 등이 있어. 이런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손님의 요청으로 시작한 것도 있고, 내 개인적인 마음에서 시작한 것도 있어. 코로나 이전에는 보통 책방에서 모였어. 사실 처음 책방을 열었을 때는 공간이 무척 좁았지. 전주에 있는 남부시장 청년몰의 아주 작은 점포로 시작했거든. 모임을 진행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청년몰에 청년회관이라는 공간이 있어서 책방 대신 그곳에 모여 책을 읽었지. 이제는 조금 더 큰 점포로 이사했어. 여전히 청년몰에 있고. 덕분에 책방에서도 모임이 가능해졌지. 한참 많이 모일 때는 10명 넘게 모이기도 했어! 하지만 모두 옛날 일이야. 너희도 알지? 요즘 여럿이 모이기 어렵잖아. 아무래도 모임의 규모가 조금 작아진 건 사실이야. 진행이 영 어려울 때는 인터넷 화상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기도 해.


Q. 독서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혹시 첫 번째 독서모임도 기억해? 어땠어?


나는 지금 하고 있는 모임이 첫 번째야.

진숙집사
첫 번째라면 내가 할 말이 있지. 나의 첫 독서모임은 책방에서 연 페미니즘 읽기 모임이었어. 그해 5월이었나 6월이었나. 우리 책방이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어. 2017년도가 백래시(Backlash)도 심했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지. 그러다 보니 페미니즘 관련 책을 입고해 달라는 요청도 많았고, 모임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도 많았어. 그렇게 첫 독서모임을 시작했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아쉽게도 사람들이 이사를 가기도 하고 바빠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2, 3년 정도 모임을 지속했어. 대신 그 모임의 명맥은 유지하면서 다양한 독서모임이 생겨났지.


참, 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난 게 있어. 지금 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하다가 2016년에 나도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 읽기 모임을 했어. 그 시기에는 그런 모임도,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어.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했는데, 지금은 다들 취직하고 바빠지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렸어.


Q. 지금 참여하는 독서모임에 처음 갔을 때는 어땠어?

진숙집사
설렘 반 긴장 반? 이제 우리 책방에서도 독서모임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긴장되면서도 즐거운 경험이었지. 모이면 4시간 이상 했던 것 같아. 7시에 시작하면 어느새 새벽 1시가 됐지. 분노에 차서 각자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거지.


나는 네이버 밴드를 통해서 모임을 처음 찾게 됐어. 내가 문의했을 때가 모임 이틀 전쯤이었어. 대뜸 이번 주부터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당시 모임 참여자들이 약간 당황했던 것 같아. 내가 모임을 운영하면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오겠다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거든. 『인간 실격』이 첫 책이었는데 이미 읽은 데다 번역본을 여러 권 갖고 있었지. 모임 첫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번역본 네 권을 들고 신나는 마음으로 달려간 게 기억나. 모임 인원은 별로 많지 않아서 4명 정도였던 것 같은데……. 대부분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꾸준히 오신 분들이었고. 그때가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제 막 와가지고 열심히 참여하는 열정적인 사람이었지. 떠올려 보니 그 당시 모임에 있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없고 나만 남아 있다는 게 좀 아련해지네.


Q. 함께 책을 읽는다는 일이 무척 멋진 것 같아. 그럼 혹시 함께 읽는 것과 혼자 읽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진숙집사
그럼, 있지! 혼자 읽을 때는 두서없이 읽거나 자주 다른 생각을 하며 읽어도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지만 모임을 위한 독서는 달라. 혼자 읽을 때보다는 더 분석하는 방향으로 읽어야 하지. 이를테면 인문 사회 과학 책 같은 것들 말이야. 챕터별로 주제의식을 정리한다거나 유념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지. 반면에 소설 같은 걸 읽을 때는 일단 다 읽어야 한다는 마음이 큰 것 같아.


나는 모임에 가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한 권의 세계문학을 반드시 읽어야 해. 그래서 종종 다른 책을 읽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워. 다만 모임을 통해 책을 읽다 보니 분명 좋은 점도 있지. 내 취향대로만 책을 고른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것도 있잖아?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 책이나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책들을 모임을 통해 만나기도 해. 새로운 장르나 작가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지.
좋은 책도 나쁜 책도 있지만 끝까지 읽어내는 동력을 준다는 것도 큰 장점이야. 책을 읽지 않고 모임에 가면 대화에 참여하기가 어렵거든. 그러다 보면 의외로 첫인상과 다른 책을 만나기도 해. 좋은 예가 있지. 『롤리타』라는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무척 역겨웠어. 아마 모임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면 나는 성범죄 가해자를 미화하는 책은 도저히 못 읽겠다고 던져버렸을 거야. 이렇게 왜곡된 인식을 가진 화자의 이야기를 이토록 진지하고 자세하게 들어 줄 필요가 있나 싶었지. 하지만 마지막에 다다르면 결국은 그 화자가 자신의 입으로 그것이 강간이었고, 자신의 잘못이 분명하다고 인정하는 장면이 나와. 만약 읽기 고되다는 이유로 초반만 읽었다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몰랐을 거야. 덕분에 이 책의 마지막을 보고서 주변에 추천도 많이 했어. 그루밍 성범죄나 아동청소년 성범죄의 가해자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 봐도 괜찮다고 말이야. 물론 끝내 별로인 책도 있어. 하지만 이런 실패나 성공의 경험 덕분에 누군가 어떤 책을 물었을 때 좋거나 나쁘다고 대답해 줄 수 있는 효과가 있지.
지금은 아무래도 모임에서 소설을 읽다 보니까 남은 시간에는 페미니즘이나 퀴어를 주제로 한 책들을 읽어. 오히려 이런 책이 술술 읽히기도 해. 내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고, 이미 잘 알고 있는 분야여서 금방 읽기도 하지.


Q. 지금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의 구성원들은 어때?


내가 처음 참여했을 때만 해도 꾸준히 오는 사람들은 30대, 40대 사이였던 것 같고 성별 비율도 거의 비슷했어. 제일 사람이 많았을 때는 한 회 차에 19명씩도 왔지. 그때는 20대부터 50대까지 골고루 많이 왔던 것 같아. 그런데 5년, 6년 되어 가다 보니까 유입은 점점 줄어들고 기존에 오던 사람들이 안 오면서 인원이 줄었어.
2015년, 2016년도에 페미니즘 붐이 일어났잖아. 그때 당시에 여성 참여자들과 남성 참여자들 사이에 인식 격차가 많이 벌어지기도 했어. 남성 참여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20대, 30대 여성 참여자 위주로 남게 됐지. 그래도 매번 참석하는 건 아니지만 두 달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는 40대 남성 참여자도 있어. 요즘에는 여성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 남성 참여자가 있을 때 장점은 여성 참여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관점을 제시할 때가 있어. 남성 참여자가 오면 토론도 훨씬 활발해지고 할 이야기도 풍성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물론 여성들끼리도 재미있게 이야기하지만 관점이 다른 사람들, 연령대가 다른 사람들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을 때 모임이 재밌게 진행되는 것 같아.


참여자가 새로 생기지는 않아? 구성원들의 참여도는 어때?


유입이 많지는 않아. 꾸준히 참여하는 사람들로 모임을 이어 나가고 있어. 내가 홍보를 열심히 못 한 탓도 있는 것 같고, 밴드라는 플랫폼 자체가 점점 인기가 없어지는 것도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 20대는 취업하면서 안 오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고, 30대는 꾸준히 오는 분들은 계속 참석하는 것 같아. 40대, 50대는 간헐적으로 오는 경우가 많지. 연령대별로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우리 모임은 매주 수요일에 하는데, 수요일 저녁을 고정적으로 뺄 수 있어야 꾸준히 올 수 있잖아? 그래서 야근이 잦다거나 일정이 유동적이면, 아무리 마음이 있고 오고 싶어도 직업 때문에 못 오는 경우가 많아.

진숙집사
우리 모임은 2018년도부터 고정 멤버야. 앎의 모임처럼 우리도 30대, 40대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고, 퇴근 시간의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들이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 나오는 사람들도 좀 있는데 그런 경우는 대체로 야근 때문이고. 일 때문에 책을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는 분들도 많아.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여성분들이 적극적으로 독서모임에 참여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사회 운동적이고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이야기하는 정체성이 책장 곳곳에서 진하게 풍겨 나오다 보니 우리 책방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경향이기도 해.


우리 모임에는 40대, 50대 남성이 가입 신청을 하는 비율은 낮지 않아.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혹 들어 보면 우리 모임 말고도 다른 독서모임을 많이 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독서모임만 세 개 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고.


Q. 독서모임이 문학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어?


나는 여러 가지 사정상 문학을 읽겠다고 마음먹지 않으면 읽을 기회가 많지 않아. 그런데 독서모임을 하면서 문학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 그리고 독서모임 덕분에 모르고 있었던 다양한 책도 많이 읽게 돼. 또 독서모임 참여자들 대부분이 책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아. 굉장히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 같은 책을 두고 누구는 이 책이 좋았는데 누구는 싫었다고 할 수도 있고, 책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판단도 다 다르지. 그래서 책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게 돼. 예를 들어 어떤 캐릭터를 나는 그냥 나쁜 놈으로 봤는데 누군가가 얘기하는 걸 듣고 보니 ‘그 캐릭터가 이런 이유로 이런 행동들을 했구나’ 하고 좀 더 이해하게 돼. 깊이와 넓이가 다양해지는 것 같아 무척 즐겁고,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어.

진숙집사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정말 좋아했지만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어. 서사가 있는 것보다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인문 사회 도서나 전공서적인 심리학 도서, 철학서를 더 많이 읽었지. 후에 책방을 운영하고 SF 페미니즘 읽기 모임을 하면서 소설을 많이 읽게 되었어. 덕분에 책의 경향이 더 포괄적으로 넓어진 것 같아. 그리고 앎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깨달았지.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서 사유가 풍부해진 것 같아.


Q. 독서모임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기도 해?


그럼. 현재의 직장에 근무하기 전에 이미 2년이나 독서모임을 다녔어. 그러다 보니까 처음부터 회사에서 나는 수요일은 안 되는 사람이야. 다들 ‘아, 쟤는 수요일 저녁에는 절대 시간이 안 돼.’ 이렇게 알고 있지. 수요일에는 야근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든. 일상의 중요한 축인 셈이야. 사실 처음에 일하면서 매주 한 권의 책을 읽는 게 쉽지 않았어. 주말이나 출퇴근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어야 겨우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지. 그런데 이제는 그 루틴이 익숙해졌거든? 그래서 한 달에 많게는 열두 권까지 읽기도 해. 이게 다 습관이 되어서 그래. 독서모임 덕이지. 멋지고 신기하지 않니?
게다가 모임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이외에는 딱히 겹치는 것이 없는 사람들 말이야. 연령대, 직업 등. 내가 한 분야의 일을 하면 비슷한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기 마련이잖아. 그런데 독서모임을 하면 완전히 다른 직종,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가 내 일상에 소소하게 영향을 미치기도 해.

진숙집사
나는 책방 주인이기 때문에 조금 애매한 것 같아. 책에 둘러싸여 있는 생활이 일상이니까. 다만 책방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영향을 받는 건 사실이야. 모임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경향이나 관심사들을 기점으로 입고가 이루어지기도 하거든. 내가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 볼 수는 없으니까 모임의 대화에서 추천을 받거나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 대한 힌트를 얻기도 하지.


Q. 독서모임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경험이 따로 있어?

진숙집사
확실히 사람이 주는 영향이 있어. 아주 매력적이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게 무엇이고 책을 관통하는 시야를 관찰하는 재미가 독서모임의 매력인 것 같아. 페미니즘 모임에서 기억나는 특별한 사람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산 지 8년쯤 된 톰이라는 친구야. 지금은 지리산에 살고 있어. 캐나다 사람이고 아나키스트였지. 초창기 페미니즘 모임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모임에 정말 많은 영향을 줬어.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다가 아나키즘 읽기 모임을 따로 만들자는 의견을 냈어. 덕분에 아나키즘 읽기 모임도 했지. 그 친구를 중심으로 북토크도 같이하고, 다 함께 무주에서 2박 3일 워크숍도 했어. 이렇게 모임으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통해 얻는 경험이 있는 것 같아. 어떤 삶을 살고 있고, 그 책을 왜 그렇게 관통할 수밖에 없는지 그런 이유도 알게 되면 재밌더라구.

부추
지리산에서 전주까지 독서모임을 오는 거야? 지리산과 그 친구 이야기 더 해줘!

진숙집사
좋아. 그 친구는 자신이 거북바위 섬에서 왔다고 했어. 캐나다의 원주민들은 그곳을 거북바위 섬이라고 한대. 그래서 자신은 거북바위 섬에서 왔다고 소개했지. 톰은 지리산에 집을 직접 짓고, 집 앞에서 농사도 지으며 살고 있더라고. 지리산 곳곳에는 톰 말고도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살고 있었어. 덕분에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있는 지리산이 연결되는 공간,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인상이 생겼어. 무언가 신비로운 느낌도 있었고. 죄인이 도망가면 잡을 수 없는 구역 같은 그런 느낌! 또 톰은 무주에서 히치하이킹으로 전주로 오기도 했대. 정말 신기한 이야기들이지? 이런 경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친구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어.
물론 일반적이지 않은 경험이지만 우리 책방에는 활동 경험이 있는 분들이 많이 와. 선생님으로 근무하면서 페미니즘 동아리를 이끌고 있는 분이 오기도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도시재생 운동을 하는 친구가 오기도 하고. 우리 책방에서 진행하는 모임은 그런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아.


내게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사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힘들어 봤다 하는 거야……. 혐오 발언 때문에 힘든 경우도 있고. 모이는 날을 수요일로 고정해 놓다 보니 요일을 바꿔야 된다는 의견도 있었어. 이럴 때 의견을 어떻게 취합할까의 문제도 있고. 이 조그마한 모임에서 쓸데없이 파벌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 여러 가지 경험이 있지만 꼭 얘기하고 싶은 건 사람들이 변하는 과정을 본 거야.
처음 독서모임에 갔을 때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도 않았어. 『100년의 고독』을 읽고 주인공이 아내한테 성관계를 강요하는 장면을 부부 강간이라고 말하면 모든 구성원들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하냐며 놀라던 기억이 나거든. 소설 속에서 분명히 사람을 죽이고,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들고 아내한테 가서, 네가 성관계를 안 해줘서 내가 사람까지 죽였다면서 성관계를 요구하는 굉장히 끔찍한 상황인데도 모두가 차마 그것을 부부 강간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여성들 사이에도 그런 심한 말을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강남역 사건, 미투 운동 등 여러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났잖아. 나도 모임에서 이게 왜 문제인지 여러 번 이야기하기도 했고.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더니 이제는 그런 책을 읽으면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건 성폭력이라고 먼저 말하는 거야. 3년, 4년 모임을 함께하면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어. 독서모임이기 때문에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나의 가치관이나 나의 판단이 나오게 되잖아. 그냥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서 피상적인 일상을 나눌 때와는 달리 깊이 있는 이야기가 오가기 때문에 그런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부추
진숙집사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적 없니?

진숙집사
나는 의식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이 오다 보니까 혐오 발언을 직접적으로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확실히 없었던 것 같아. 약간 청정구역이라고 해야 되나?


나는 정말 힘들거든. 간혹 잘못 걸리면…….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 『포르노그라피아』를 읽을 때의 일이야. 소설 내용에 중년 남성이 10대 남성과 여성들을 바라보면서 ‘둘이 성관계를 했을 거다’, ‘저 10대 여성이 조숙해서 나를 꼬시고 있다’, ‘유혹하고 있다’ 이런 식의 성적인 망상을 하는 장면이 나와. 그때 참여자가 남성 셋, 여성 셋이었어. 남성 참여자 두 분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분위기였고, 다른 여성 참여자 세 분도 너무 기분 나쁘고 불쾌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뒤늦게 온 분이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주인공한테 너무 감정이입이 되고 공감됐다고 말한 거야. 싸한 분위기에서 모임을 진행해야 했던 순간이 정말 아찔했어. 그럴 때마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나 다양한데 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안 좋아질 수 있구나’ 생각했지.

부추
그러면 독서모임에서 책을 고를 때 젠더적 문제를 다루거나 성적인 내용이 나오면 피하게 되지는 않았어?


책을 열어 보지 않고서는 이게 젠더적 문제의식이 있을지 없을지 예상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여성 서사라고 다 젠더적 문제의식이 잘 돼 있는 것도 아니고. 혹은 남성 서사라고 무조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사실 좋은 책은 예상이 돼. 예를 들어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같이. 작가를 보면 대략 예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안 읽어 본 작가거나 책 소개만 봤을 때는 예상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
다행인 건 그런 싸한 분위기를 경험하고도 참여자들이 ‘그러니까 우리끼리 모이자’, ‘40대 남성은 받지 말자’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그런 분들도 와야 우리가 또 환기가 되고, 또 자극이 되니까 괜찮다고 말하지. 솔직히 운영자로서 가입 신청을 받을 때마다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한 적도 있었어. 걱정돼서 의견을 물으면 오히려 모두에게 모임이 열려 있었으면 좋겠고, 편향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책을 고를 때는 항상 참여자 모두가 추천하고 투표로 결정해. 나는 주로 젠더 관점이 괜찮은 책을 추천하기는 하지.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하게 별로였던 경우도 당연히 있고. 워낙 다양하게 추천하니까 투표에서 선정되면 읽는 편이야. 그래서 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편향적인 경향이 생기지는 않아.


Q. 모임을 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 있어?

진숙집사
아주 두껍고 긴 책들! 작년 겨울에 읽었던 『삼체』라는 중국 SF소설이 그랬어. 세 권짜리의 엄청 길고 방대한 이야기야. 게다가 무척 재밌지. 참, 마가렛 애트우드의 책도 기억이 나. 그것도 세 권짜리네. 아무래도 오래 읽게 되니까 긴 책들이 기억에 남아.


지금 막 생각나는 건 보리스 비앙의 『세월의 거품』이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지. 나중에 〈무드 인디고〉라는 영화로 나왔어. 이야기는 뭐랄까…… 일반적이지는 않아. 비유나 은유가 무척 많고, 환상적인 이미지가 무척 많거든. 그래서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자고 했을 때, 많은 구성원들이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거나 당혹스러워하기도 했어.
이 책 덕분에 재미있는 일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나중에 이 책의 매력을 알아차린 거였어. 한 번 읽을 때는 몰랐다가 다시 읽으니 무척 재미있었다는 거야. 사람들의 감상이 달라지니까 나도 신기했지. 반면에 이런 일도 있어. 독서모임을 오래 함께하다 보니 『세월의 거품』 자체가 어떤 기준이 되어버린 거야. 이해가 안 되거나 해독하기 어려운 책은 이 소설을 꼭 언급하기도 해. 혹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과 재미없게 읽은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계속....

 

 

 

'그림 효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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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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