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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생활탐구] 3화 :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2)

  • 작성일 2022-05-01
  • 조회수 905

[문학생활탐구]

문학생활탐구

설하한, 최아현

 

-3화-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2)

 

 


Q. 다른 독서모임과 교류한 적이 있니?


독서모임으로 교류한 적은 없어. 우리 모임 자체가 구성원들이 똘똘 뭉쳐서 누군가와 교류할 수 있을 정도의 결집력이 없어. 간신히 모임을 운영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 내가 개인적으로 여러 독서모임에 기웃거린 적은 있어도 모임 대 모임으로 교류한 적은 없어.

진숙집사
다른 모임과 교류한 적은 없지만 행사를 기획한 적은 있어. 전주의 선미촌이라는 구역에 성평등 전주라는 공간이 있어. 여성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성평등 관련 활동을 하는 공간이야. 그곳에서 우리 모임 사람들과 함께 SF 페미니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전시하는 행사를 기획했지. 또 성평등 전주에서 진행한 문화사업의 생활연구를 모임에서 주도적으로 해본 적도 있어. 최근에는 마가렛 애트우드 특별 기획전을 한번 해보자는 이야기도 하고 있어.

부추
엄청 실행력 있는 독서모임이구나. 활동적인 측면이 강한 것 같아.

진숙집사
응, 맞아.

부추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독서모임이 있구나. 너무 좋다.


Q. 요즘 모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책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어?

진숙집사
모임이 오래되기도 했고, 또 우연찮게 취향이 비슷해. 이야기가 짙고 깊은 걸 좋아하는 것 같아. 맛으로 비유하자면 이런 거지. 매울 거면 확실히 맵고, 달 거면 확실히 단것. 질문과는 조금 반대되는 이야기지만 내가 참여하는 독서모임은 선호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는 건 분명해. 말랑한 이야기는 유독 맥을 못 추는 편이지. 사회적 갈등을 다루면서 무겁고 진지하게 가슴을 훅 후벼 파는 이야기! 다들 이런 느낌의 책을 좋아해.


우리 독서모임에서 통일된 의견은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아. 굉장히 첨예한 취향의 대립이 있거든. 누군가가 극찬하는 작품이 곧 누군가가 극도로 싫어하는 작품이기도 하니까. 음,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이라…… 만장일치로 그런 평가를 받은 책이 잘 기억나지 않아. 도리어 기억에 남는 건 격렬한 토론이나 서로 다른 의견을 치열하게 주고받은 책이지. 오히려 모두에게 좋았던 책은 좋은 이야기만 하게 돼. 할 이야기가 별로 없지. ‘인물 묘사가 좋아요’,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그냥 재미있어요’ 이런 감상을 몇 마디 나누고 나면 할 말이 없어. 의견이 달라서 대립하게 만드는 책이 모임을 재미있게 만들어서 훨씬 기억에 남지.
그럼에도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은 책들은 특징이 있는 것 같아. 다양한 인간 군상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든지, 인간이나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작품들이 호평을 받았던 것 같아. 인물의 주변을 이루는 것들을 입체적으로 그리면서 그것들과 연결된 이야기의 개연성이 충분하게 묘사되었을 때 사람들이 통찰력 있고, 잘 쓴 작품 같다고 말하거든.


Q.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적이 있니?

진숙집사
우리 모임은 취향이 다들 비슷해서 그런 경험은 없는 것 같아. 대체로 그 책이 가진 주제의식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페터 한트케의 『관객 모독』이라는 작품이 있어. 그 책도 내 추천으로 다 같이 읽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어. 『관객 모독』이 원래는 극 작품이야. 나는 연극 공연도 서너 번씩 찾아볼 정도로 되게 좋아했던 작품이고. 당연히 연극으로 볼 때랑 책으로 볼 때랑 다르지. 나도 사실 연극이 조금 더 재미있었고. 그러다 보니 책만 읽으신 분들은 ‘얘가 왜 이걸 이렇게까지 극찬하면서 추천했을까?’ 이런 반응이었어.
내가 실험적이고 은유가 많은 작품들을 좋아해. 그래서 몇 달을 밀어서 겨우겨우 투표를 통과한 책이 『롤리타』를 쓴 작가의 『사형장으로의 초대』야. 그 책도 은유가 많아서 나는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이런 은유를 생각했을까 싶었지. 하지만 참여자 중 한 분이 ‘난 『세월의 거품』도 안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이 책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어. 주로 취향의 문제가 좀 더 강한 것 같아. 은유가 많고, 이야기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을 읽자고 하면 다들 읽어 오긴 하지만 재미있어 하는 경우는 반반인 것 같아. 앎 씨 취향 가끔 못 따라가겠다고 말하기도 해.


Q. 너희가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궁금해.


나는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하는 책이야. 논픽션인데 소설처럼 읽혀! 궁금하지? 책이 담고 있는 철학이나 반전들이 무척 인상 깊어. 또 조디 피코의 『작지만 위대한 일들』이라는 소설도 무척 좋아.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소설이야. 단순히 혐오 범죄만 다루는 게 아니라 일상 속의 미묘한 차별들을 이야기해. 이게 인종차별이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 말이야.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나도 모르게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든지. 이런 모습을 무척 잘 보여주는 작품이야. 내가 주로 재미있게 읽는 책들은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 섬세하게 묘사된 책인 것 같아.

진숙집사
나는 요즘 예전에 나온 책을 다시 꺼내 읽고 있어. 그중에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추천할게. 왠지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 같아. 요즘 글쓰기를 시작했거든. 참, 글쓰기 이야기를 하니까 책이 또 생각났어. 글쓰기에 관심은 많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읽고 있는 책이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것도 잘 읽었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와 감각으로 글을 써야 할지 공부하는 중이야.


Q. 진숙집사는 글쓰기를 공부한다고 했잖아. 글쓰기를 공부하게 된 게 모임하고 연관이 있니? 앎도 모임이 다른 활동으로 이어지는 게 있어?

진숙집사
이전에는 한 번도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일기를 쓴다든지 소소한 글쓰기는 해봤는데 본격적으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엄두도 내지 않았지. 그런데 책방을 운영하면서, 많은 책을 접하면서 글을 본격적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 용기를 얻었다고 할까? 수많은 책들이 주는 영감이 있잖아. 모임에서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차원인 것 같네. 책들이 주는 영감 속에서 내 안에 있는 사유들을 꺼내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어. 지금 쓰려고 하는 건 내 이름으로 하는 뉴스레터야. 책방에서 경험한 것들, SF 단편에 대한 이야기, 인터뷰 이렇게 세 가지 주제를 준비 중이지.


나는 글쓰기를 마음속 과업으로는 가지고 있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못 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고 있어. 이렇게 많은 책을 읽는다고 잔뜩 이야기하고 보니 책 읽는 시간만 줄였어도 글 쓸 시간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 어쨌든 글쓰기 관련된 모임은 하고 있지 않아. 다만 하는 일 자체가 글 쓰는 것과 아예 연관이 없지 않아서 주로 직업적 글쓰기를 많이 하고 있어. 참, 요즘 하고 있는 건 아닌데 예전에 모임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쓴다거나 연극 시나리오를 쓴 적은 있어.


Q. 독서모임이 너희의 삶을 변화시킨 경험도 있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

진숙집사
삶의 지향점이 확고해지는 경험을 종종 하는 것 같아.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말이야. 나는 비건을 지향하고 있어. 아무래도 독서모임에서 만난 책들을 통해 지향점에 대한 확신을 얻기도 하지. 또 SF 페미니즘 소설을 읽다 보면 끔찍한 디스토피아들이 자주 묘사되곤 하잖아. 인간의 방만한 물질적 탐욕이 불러오는 재앙을 보면 결국 약자를, 동물을 향한 시선이 문제점으로 두드러지는 것 같아. 당연히 모임의 대화에서 페미니즘도, 비거니즘도 빠질 수 없지. 결국 모든 문제는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 그러니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스스로가 무척 밉고 싫을 때도 있지. 사람들이 왜 그럴까, 나는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나 하는 자책도 들어. 그런데 나는 계속 삶을 살아야 하잖아. 건강하게 풀어내는 방법도 고민해야지 않겠어? 이제 이걸 알았으니 잘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것으로 어떤 재미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지.


독서모임을 7년쯤 하니까 책을 딱히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 당연히 읽고 있는 거지. 그러니 독서 습관 자체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 사람이 주는 영향도 있어. 우리 모임은 매주 수요일 저녁에 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저녁 시간에 안정적으로 야근을 하지 않고 시간을 낼 수 있는 교육직에 종사하는 분들이 꾸준히 오는 편이야. 덕분에 책을 읽고 토론을 통해서 도출해 낸 어떤 가치나 필요성을 교육에 녹여내는 방식에 관한 고민들이 종종 나와. 혹은 요즘 학생들이 어떤 경향을 보이는지, 교육에서 어떤 것들이 고민인지, 교육 제도의 문제 같은 것들을 말하기도 해. 막연히 내가 학생이었을 때와 어린 동생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통해 교육을 바라볼 때와 교육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각각 모든 것이 너무 달랐어. 덕분에 교육에 대해서 관심도 갖게 되고,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었어.


Q. 독서모임과 관련되지 않은 독서 생활은 또 어떤 모습이니?


처음에는 모임을 위한 책만 읽어도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모임 외의 책을 읽기 어려웠어.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다른 책들도 많이 읽을 수 있지. 여전히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은 게 문제지만…….
우리 모임은 주로 세계문학을 읽다 보니까 현대문학이라든지 다른 장르의 책들은 읽기가 어려웠거든? 그래도 시간이 나면 틈틈이 페미니즘 관련 도서나 직업에 대한 책을 읽어. 원래 에세이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요즘 직업에 관한 에세이가 많이 나오잖아? 그래서 최근에 여러 직업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됐어. 나는 간호사입니다, 소방관입니다, 공무원입니다, 이런 책들 말이야. 각각의 직업 분야에서 어떤 고민과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소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지.
지금은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고 있어서 그곳에서 추천하는 책들 중에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 읽기도 해. 모임 외의 책들은 그냥 손이 가는 대로 그때그때 끌리는 대로 읽게 돼. 이 책을 먼저 읽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쌩뚱 맞게 다른 책을 읽기도 하고. 옛날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을 열심히 읽으면서 허세를 부렸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고. 읽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소화하려면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깊이 있는 철학책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에세이, 현대 소설, 혹은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게 되는 것 같아.

진숙집사
나는 책방을 운영하니까 세상 사람들한테 좀 더 질이 좋고, 더 의미 있고, 사람들의 감성이나 삶을 풍성하게 도와줄 수 있는 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책을 보려고 해.
나도 예스24 북클럽을 보고 있는데 아무리 책방 사장이라 하더라도 들어오는 모든 책을 알 수는 없잖아? 신간은 수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경향을 살피기 위해서라도 북클럽도 보고, 도서관 신간 코너도 둘러보면서 살펴보게 되는 것 같아.


Q. 독서모임이 앞으로 어떤 모습이면 좋겠어?


거창한 것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매해 독서 인구가 줄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잖아.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있어. 점점 사람들이 글을 읽지 않아서 짧은 요약이나 유튜브로 정보 습득을 대신하고 있잖아. 심지어는 문해력이 자꾸 떨어지고 있다는 말도 있고. 독서가 단순히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잘난 척하기 위한 게 아니라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 특히 독서모임에 와서 책을 읽고 이야기하면 그 폭이 훨씬 넓어지는 것 같아. 단순히 나 혼자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소설 속의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잖아. 이 인물들이 소설 속 사회 구조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이게 왜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인지, 혹은 아닌지, 사랑 이야기라면 사랑은 무엇인지. 이렇게 수없이 많은 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게 되잖아. 이걸 통해서 사고와 관심이 넓어지고 다양해진다고 생각해. 나는 책 읽는 걸 재미있다고 느끼고, 이런 대화와 만남들이 즐겁다고 느끼는 경험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지금 독서는 소수의 취향처럼 치부되는 것 같아 아쉬워.

진숙집사
나는 책을 읽고 모임을 하는 것들이 문화운동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해. 세상 속 이야기의 흐름을 건강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변화의 시작 말이야. 그럼 우리는 또 어떤 활동으로 이 흐름을 이어 나가야 할까? 어떻게 확장해야 할까? 이런 것들을 덩달아 고민하지. 2017년부터 책방을 통해서 하는 활동이 있어. 모임 형태로 유지되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모여서 책을 읽고 발언하는 작은 행사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비정기적인 행사인 셈이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일이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면 풍남문 광장에 모이는 거야. 그게 세월호가 될 수도, 기후위기가 될 수도, 페미니즘이 될 수도 있지. 이런 것들을 세상으로 호명할 수 있는 책을 함께 읽고, 발언하는 퍼포먼스 형식으로 진행하곤 해.


Q. 독서모임이 없어진다면 문학 생활이나 독서 생활이 어떻게 변화할 것 같아?


독서모임이 없어져도 책은 계속 읽을 것 같아. 그렇지만 읽는 책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편중될 수는 있다고 생각해. 내가 관심 있는 책,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많이, 더 많이 읽을 수 있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모르는 책, 내가 평소라면 읽지 않는 책을 읽을 기회가 없어질 것 같아. 물론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으니까 그게 장점이기도 할 텐데 또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어. 내가 몰랐던 것, 내가 관심 없던 것을 계속 접하고 싶고 그런 것들을 계속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독서 생활에서 문학의 비중은 확실히 줄어들 것 같아. 지금도 읽어야 된다고 말만 하고 못 읽는 책들은 주로 문학이 아닌 책이거든. 왜냐면 문학은 독서모임을 통해서 조금씩 읽으니까. 독서모임이 없으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책들을 더 읽겠지? 그만큼 시간도 더 많이 들이고. 그런 식으로 문학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 것 같아. 이러다 보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만 겨우 읽는 정도가 될지 모르지.

진숙집사
우선 내 책방과 다른 작은 책방들이 사라질 거야. 책을 읽는 인구수가 줄고, 책을 가볍게 생각하고, 책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더 사로잡기 어려운 시대가 펼쳐질지도 몰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머릿속에 가득 들어 있는 생각이 독서모임으로 환기되거나, 영감을 주거나, 더 풍성해지거나 하는 체험은 사라지는 거잖아. 독서모임이 사라지면 혼자만의 오롯한 생각으로 책을 소화하게 될 테니까 책 읽는 게 외로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책방 운영을 시작하면서 ‘너 그 책 어떻게 읽었어?’ 하면서 같이 기뻐하고 교류하는 경험을 자주 하고 싶었거든. 책을 중심으로 대화하는 티키타카들 말이야. 책방의 매력은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모임이 사라진다는 건 작은 책방의 의미도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외로워질 거라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가. 어떤 책을 읽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독서모임이 사라지면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는 거잖아.
다행스럽게도 내 주변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은 편이야. 물론 내가 어떤 책을 추천할 수도 있고, 그 책에서 내가 느낀 감상들을 공유할 수는 있지. 하지만 그걸 추천할 때 스포일러도 조심해야 하고, 상대는 내가 말한 정도의 줄거리 안에서만 반응할 뿐, 실제로 나와 같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교감을 하거나 공감을 해주는 게 아니라서 아쉽거든.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상대가 그 책을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에 따라서 그 소통의 깊이가 굉장히 다를 거야. 그래서 독서모임이 없어지면 많이 외로울 것 같다는 말에 공감해.


Q. 문학이 없는 생활은 어떨 것 같아?


문학이 없는 세상을 묻는 줄 알고 깜짝 놀랐어. 다행이야. 문학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다가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떠올렸거든. 문학이 없이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상상이 잘 되지 않아. 아마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저 내가 무척 바쁜 탓일 거야. 일이 너무 많아서 문학을 읽을 수 없는 상황 말이야. 나에게서 문학이 없어지는 일이 생길까? 그건 공기가 아니라 산소를 마시는 삶 같을 거야.

부추
산소를 마시는 삶과 공기를 마시는 삶은 어떻게 달라?


공기를 마신다는 건 호흡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 말고도 다양한 것들을 함께 마신다는 뜻이었어. 그 순간의 분위기, 냄새, 그리고 또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겠지. 하지만 산소를 마시는 일은 생존에 딱 필요한 것만 취한다는 느낌이야. 산소만 마시는 삶은 생존만 하는 삶인 거지. 살고는 있지만 나에게 소화가 되고, 감각을 느끼게 하는 건 없는 거지.
물론 문학 없이 살 수도 있어. 문학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모두의 의미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만큼의 의미인 거지.

진숙집사
문학이 없다면, 영혼 없이 육체만 존재한 채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야? 사랑이 없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게 되고. 나의 삶은 그저 잊고, 먹고, 마시는 것만 남겠지. 인문사회 도서를 좋아하고 주로 읽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없어도 된다는 건 아니야. 문학은 분명히 각기 다른 개인의 삶을 더 깊게 관통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지.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그려내서 그 사람을 끝까지 쫓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소설 속 인물을 보면서 또 반면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기도 하니까. 결국 나를 돌아보는 도구가 되기도 해. 나를 밝히는 촛불 같기도 하고. 그러니 없어서는 안 되지!


맞아. 인문사회 도서와는 분명 다른 의미로 성찰과 인류애를 느끼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해. 인문사회 도서를 읽고 사람이 싫어졌을 즈음 문학을 읽으면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돌아오니까. 균형의 측면에서도 문학이 없으면 곤란하지.


Q. 혹시 참여해 보고 싶었던 독서모임이 있다거나 만들어 보고 싶은 독서모임이 있어?


나는 예전에 했던 페미니즘 독서모임이 유야무야 없어진 것이 아쉬워. 그 뒤로도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는 모임을 한번 꾸려 보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지. 지금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매주 하지 않으면 이미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지금 하는 모임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다른 모임을 할 계획은 없어.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다른 독서모임으로 옮겨간다면 아마도 페미니즘 책을 읽는 모임으로 갈 것 같아.
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이 혼자 읽기 도저히 어렵거나 마음먹고 시작하지 않으면 도통 손이 가지 않는 책을 읽는 모임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지.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적은 없고. 그래도 사람들이 이런 책도 함께 읽고 싶어 하는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는 된 것 같아.

진숙집사
나는 아까 말한 아나키즘 독서모임을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는데 앎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속 어딘가에 불이 지펴진 것 같아.


Q.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책이 있어? 나는 예쁜 책을 찢어서 내 꽁무니에 장식하는 게 좋거든.

진숙집사
아름다운 책이라……. 아주 많지! 요새 표지 예쁜 거 진짜 많이 나오거든. 『랩걸』도 예쁘고. 그리고 이디스 워튼의 『여름』도 표지가 무척 예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김초엽의 『지구 끝 온실』이라는 책도 표지가 예쁘다고 생각했어.

진숙집사
나 내용이 아름다운 책도 추천하고 싶어.


난 내용 따위 필요 없는데…….

부추
날 위해 추천해 줘! 나는 내용이 아름다운 책들이 더 궁금해!

진숙집사
좋아, 좋아. 움직씨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은 내용도 좋고, 표지도 아름다운 책들이 많아. 대만의 퀴어 고전물로 꼽히는 구묘진 작가가 쓴 『악어 노트』라는 소설이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소개받지 못한 저자이기도 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을 악어에 비유해서 풀어내는 대목들이 인상적이야. 또 이 책을 통해서 대만 소설은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고 이런 문체적 특징을 가졌구나 하고 느꼈어. 묘사를 할 때 보이는 특징들 덕에 대만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대화하고, 이렇게 다가가고, 이렇게 접근하는구나, 이런 감각들을 이 책을 통해 느꼈거든. 그래서 한번 읽어 봐도 좋을 것 같아.


내용이 아름다운 책을 말한다면 여러 번 언급한 『세월의 거품』! 내용이 정말 아름다운 책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사실 이 작가를 추천할 때마다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이 작가가 『세월의 거품』 외에 다른 이름으로 쓴 『너희들의 무덤에 침을 뱉으마』가 너무 여성혐오적이거든. 이 작가를 추천하는 게 맞을까 항상 고민하지만……. 어쨌든 『세월의 거품』이라는 책 자체는 내용이 아주 아름다워. 소설의 내용은 이래.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 여성이 병에 걸려. 심장에 수련꽃이 자라나는 병이지. 그런데 이 수련꽃이 여성의 수분을 다 빨아먹고 있는 거야. 주인공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 수련을 기죽이려고 화려한 꽃을 가져다가 온 집 안에 꾸며 놓기도 하면서 말이야.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책이 빼곡해. 그래서 읽는 내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굉장히 슬프면서 아름다워.
아름다움의 기준이 여럿 있겠지만 하나 더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안네마리 셀린코의 『데지레』라는 소설이야. 실화 바탕의 소설인데. 동화 같은 이야기인 동시에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역사적 사건들이 보여주는 역설이나 권력에 대한 통찰을 여성의 관점으로 잘 묘사하고 있어. 예리한 시선을 가지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느껴지는 책이야.

부추
너무 고마워! 둘 덕분에 아름다운 책을 더 많이 알게 되었어.


나도 부추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책들이 궁금해!

 

부추는 앎과 진숙집사에게 그간 만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와 친구들이 아름다운 책으로 꼽은 책들을 알려주었어요. 셋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부추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삑은 깜빡 잠들어 버리고 말았어요.

 

부추
삑아! 삑아! 일어나! 이제 가야지.


으음……? 벌써 이야기 끝났니?

 

삑의 말을 들은 부추는 크게 웃었어요. 옆에서 진숙집사와 앎도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답니다.

 

부추
지금은 아침이야! 삑아. 너는 어제 오후부터 지금까지 잔 거야. 어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녁이고 너도 자고 있기에 여기서 하루를 보냈지.

 

삑은 비몽사몽인 채로 다시 무지개 동산으로 갈 채비를 했어요. 부추가 옆에서 삑을 도왔답니다. 둘은 앎과 진숙집사에게 인사하고 다시 무지개 동산이 있는 동쪽으로 출발했어요.

 


부추야. 책이 그렇게 좋니? 앎도, 진숙집사도,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친구들도 모두 책의 내용을 좋아하네.

부추
그럼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너도 보면 푹 빠질 거야.


그렇담 나도 읽어 볼게.

 

삑은 멀지 않은 미래에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된답니다. 지금의 삑과 부추는 아직 상상도 못 하겠지만 말이에요. 훗날 삑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찢어서 꽁무니에 장식하는 즐거움을 알게 돼요. 물론 예쁜 책 표지를 찢어 장식하는 취미 역시 계속되었죠.

 

둘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날아갔답니다. 또 다른 친구가 있는 쪽으로요.

 

 

 

 

 

계속....

 

 

 

'그림 효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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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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