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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생활탐구] 4화 : 글을 쓰는 친구들!(2)

  • 작성일 2022-07-01
  • 조회수 523

[문학생활탐구]

문학생활탐구

설하한, 최아현

 

-4화-
글을 쓰는 친구들!(2)

 

 

 


Q. 글쓰기가 문학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어?

사노롱
   책을 더 많이 읽게 됐어. 예전에는 작법서도 많이 읽었어. 덕분에 어휘력과 문장력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됐지. 하지만 글쓰기를 계속하다 보니 작법서보다는 다른 작가들의 책을 더 많이 읽게 되더라고.

미루무
   나도 비슷해. 처음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작법서나 글쓰기 책을 읽었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쓰지 않고, 쓸 수 없고. 무엇보다 내가 몰라서 못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되어서 작법서를 읽는 게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후로는 정말 좋거나 너무 좋지 않아서 질문이 생기는 책들을 더 많이 읽었어. 아니면 좋아하는 작가들 책을 연달아 읽는다거나!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이 나한테 직접적으로 질문하지 않았지만 그 질문에 답해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 나도 그 질문에 대해 잠정적인 결론을 내고 싶을 때 글을 쓰고 싶기도 해. 허수경 시인의 글을 읽고 그런 경험을 많이 했지.
   작법서를 읽고 내가 뭘 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좋은 글을 읽었을 때 나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쓸 때 더 많이 읽게 되었어. 그래서인지 읽는 걸 그만두는 순간 쓸 것도 없어지더라고. 최근에 책을 못 읽으니까 일기를 쓰는 것도 어려워. 그냥 내 이야기를 쓰는 건데도 말이야. 읽는 건 문이 되는 것 같아. 읽기 자체가 쓰기로 가는 문이고, 쓰기가 읽기로 가는 문인 것 같아.

사노롱
   취향은 오히려 넓어졌지. 사실 크게 구분 없이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어. 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싶고, 세상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읽었으니까 손이 닿는 대로 책을 읽었지. 그런데 오히려 글을 써보고 난 뒤부터는 안 읽게 된 책들이 있어. 작법서와 자기계발서야. 작법서는 몇 권 읽어 봤어. 기본 문장에 관한 글도 읽어 봤고, 소설 작법에 대한 책도 한참 읽던 때가 있었거든. 그런데 사실 내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잖아? 어느 순간부터는 문장력과 전문성을 가진 글을 써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자유롭게 쓰고 더 넓어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작법서를 읽는다고 그런 문장을 쓸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보다는 각자의 시선을 보여주는 책들을 더 많이 읽게 됐어. 세상에 다양한 작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어디서 영감을 받고,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고, 이런 것들을 상상하면서 책을 읽게 됐지. 아이러니하게도 읽지 않는 것들이 생겼기 때문에 취향이 넓어졌다고 느껴.

미루무
   나는 해석하려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 이 인물을 왜 넣었을까? 왜 이런 배경을 설정했을까? 한참 글을 써보려고 할 때는 이런 마음으로 글을 읽었던 것 같아. 왜냐하면 내 글이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거든. 폭폭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 보려고 했던 거지.
다른 것 하나는 시야가 생긴 것 같아. 예를 들면 지금 단편 작품집을 읽고 있는데 모든 단편의 이야기가 다 다르잖아? 주제가 다르고 소재들이 제각각인데 어떤 면에서는 인물들이 가진 질문이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어. 문학은 시대 안에 있으니까 공통적으로 흐르는 맥을 분명히 보면서 책을 읽게 됐어. 그러다가 이 공통된 맥이 너무 나와 맞닿아 있어서 피로하다고 느껴지면 한 번씩 시대가 전혀 다른 고전을 읽기도 하지. 예전보다는 훨씬 덜 휘둘린다는 느낌이야. 쏟아지는 책들 사이에서 내가 스스로 조율하면서 책을 읽게 되었달까? 또 한편으로는 작가와 작품을 연결해서 보기 시작한 것 같아. 나도 주어지는 모든 책들을 읽었거든. 베스트셀러도 읽고, 신간도 읽고. 그런데 글을 쓰면서 작가에게도 관심이 가고, 작가가 한 인터뷰나 다른 글들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책을 고르게 됐어. 어떤 작가가 인터뷰에서 불필요하거나 불편한 발언을 했을 때 ‘작품성이 우수하고 모든 사람이 박수치고 있다고 해서 나까지 박수를 치고 소비를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해. 결국에 글은 꾸며 쓴 것이든, 사실을 쓴 것이든 그 작가의 일부고 어떤 면에서는 그 사람의 것이니까……. 소비하지 않는 것을 고르게 된 것 같아.

사노롱
   미루무의 말에 나도 공감해. 나도 그전에는 이것저것 다 읽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글을 열심히 쓰게 된 이후로 글에 생각보다 작가의 일상이나 가치관이 무척 많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 후로는 작가의 인터뷰나 짧은 기고 같은 것들도 찾아보기 시작했지. 그러면 나중에 작품을 읽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어. 문장과 장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녹여낸 사회적 문제는 무엇인지 같은 것들이 힌트가 되기도 했거든. 역으로 그게 책을 고르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부추
   그러면 사노롱과 미루무는 원래 작가와 작품이 어느 정도 별개라고 생각했던 거야?

미루무
   맞아. 사실 작가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쪽에 가까웠어. 작품은 작품으로 존재했고 작가는 글쎄……. 책은 나에게 물성으로 존재하고 있잖아. 작가는 책 뒤에 어떤 존재로 있고. 작가가 이 책을 썼다고 해서 나에게 비대하게 다가온다기보다는 책이라는 물성 자체가 더 중요했던 것 같아. 그런데 요즘은 어떤 흐름들을 상상하고 생각해 보면서 읽는다고 했잖아? 한 작가의 작품을 쭉 읽다가도 그런 것들이 느껴져. 이전에 썼던 글들과 달라진 면이라든지, 사람 자체의 시선이 바뀐 느낌이랄지. 그러니까 작가와 더불어 문학 작품 자체가 살아 있다고 느껴지기도 해. 그렇다면 결국 내가 어떤 창작물을 소비하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보내는 지지나 응원 같다고도 생각해서 투표하는 마음으로 책을 사기도 해.

사노롱
   나는 작품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편이었어. 작가가 어떤 글을 썼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의 가치관 전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창작자가 가진 시각이나 생각이 작품이 된 셈이니까 아주 연관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그래서 다양한 부가 정보와 함께 책을 읽거나 고르면서 나도 함께 고민하게 된 것 같아. 내가 여기에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별해서 받아들일 것인지. 나름의 분별력이 생겼다고 할까?


Q. 그러면 글쓰기가 삶을 바꾼 게 있어?

미루무
   불쾌한 상황이나 기분 나쁜 일들을 마주하면 이건 꼭 글로 쓴다고 생각하면서 넘기는 경우들도 있는 것 같아. 또 산책을 하면서 느꼈던 것이나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하는 일도 생겼어.

사노롱
   나는 말을 대충 하지 않기 시작했어. 말을 제대로 끝내고 있는지, 내가 이 말을 왜 하려고 하는지, 말이 되는 문장인지 이런 생각들을 먼저 하게 됐어. 전에는 생각하지 않고 대충 나오는 대로 말하기도 했는데, 문학적인 문장을 구성하고 글을 잘 쓰고 싶다고 생각한 이후로는 말을 대충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지. 말의 힘이 너무 크고 사람 간에 주고받는 모든 것들이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의 바탕이 될 수 있겠구나 싶거든.
   또 내 일상을 바로 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생겼어. 재밌는 상황이나 화가 나는 상황이 생겼을 때 그 순간의 감정은 지나가면 끝이잖아. 하지만 그 감정이 지나가고 나서도 분명 나에게 무언가 가져다주거나 남는 것들이 있고. 그럼 이걸 써보면 재미있겠다. 아니면 그 상황에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되짚어 보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이런 생각들을 자주 하면서 일상 속 사소한 것들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 별거 아닌 행동들을 생각해 본다거나 그런 습관들 말이야.

부추
   둘 다 하루가 두 배로 바빠진 것 같아.

사노롱
   바빠.

미루무
   정말.


   사노롱은 답답하진 않아? 말을 너무 고르면 답답할 것 같은데.

사노롱
   원래 말을 막 했다기보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면 지금의 대화는 이런 맥락이니까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생각을 글로 쓰면서 오히려 말하는 데 도움이 됐어. 글로 여러 번 정리해 보니까 말할 때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한결 빨라지고 편해진 거지.

미루무
   나는 감정을 쏟아낸 상황들이나 화가 났을 때 마구 키보드를 두드려. 어디로든 쏟아 붓고 싶은 것들을 쓰다 보면 금방 감정이 사그라지는 기분이거든. 덕분에 남에게 덜 상처 주지 않았나 생각해. 혹은 내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했을 때 나중에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해.
   마음에 걸리는 행동을 하고 나서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쓰는 편이야. 하지만 늘 마음먹은 대로 실천이 잘 되는 것은 아니지. 과거에도 잘 되지 않았다고 쓴 기록이 있으니까. 그래도 기록을 계속하다 보면 과정과 이유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잖아. 또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단단해지기도 하고. 그러면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사노롱
   정말 공감돼. 나도 똑같이 키보드를 바쁘게 두드리거든. 기억이 나는 대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말이야.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떤 실수를 했고, 경험했고, 느꼈는지를 제3자가 얘기해 주는 느낌이야.


Q. 둘 다 열심히 읽고 썼구나. 그러면 읽고, 쓰고, 또 공유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을 것 같아.

미루무
   나는 글을 써서 주로 블로그에 업로드 한다고 했잖아?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는다는 말이기도 해. 얼마든지 사람들이 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쉽게 읽고 쉽게 반응을 남겨. 한편으로는 이게 응원이 되고 긍정적인 경험이 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반응에 내 운신을 좁히는 정반대의 경험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 언젠가 내가 어떤 일에 대해서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쓴 적이 있어. 그런데 사람들이 그 글에 대해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인신공격성 댓글을 달기 시작하는 거야. 나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근거와 주장을 달아서 차근히 써내려간 글이었는데 맥락과 상관없이 사람을 깎아내는 댓글이 마구 달린 거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댓글이 달리니까 내 의견에 믿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글을 없애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공격적으로 댓글을 단 사람들은 그런 방식을 원할 테고, 나는 그런 방식으로 도망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어. 내 안전 문제도 걱정이 됐고. 칭찬 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래서 자꾸만 그런 공격을 받을 것 같은 글은 쓰지 않게 되고. 그러면 좋은 댓글이 달리니까 다음에도 그 반응에 맞춰서 글을 쓰게 되기도 했어.
   글을 쓰고 나면 글이 끝났으니까 모두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읽고 또 다른 이야기를 남겨 달라고 공개하는 것이잖아. 그랬을 때 누군가가 쓴 글을 존중하거나 의견을 남길 때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 좋겠어. 사실 비슷한 이유로 요즘 뉴스에 달린 댓글을 읽지 않잖아. 그런 것처럼 어떤 글이 있고, 그 글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방식에 대한 기준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노롱
   나에게 좋은 기억은 자기 개방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거였어.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고 대면했을 때 나의 경험과 기억들을 차분하고 온전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게 사실은 무척 어려운 일이잖아? 주변의 화제에 휩쓸려가기도 하니까. 그런데 글쓰기를 하면 내가 가진 생각과 경험을 천천히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풀어내면서 나를 개방할 수 있다는 게 무척 긍정적인 경험이었어.
   하지만 나도 온라인에 글을 공개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불특정 다수가 가지고 있는 해석이 너무 많이 따라붙는다는 거였어. 내 글을 읽고 서로의 생각과 해석에 관해 계속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경험들이 쭉 더 이어지면 좋을 텐데 댓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이잖아. 혹은 그 댓글마저 남기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독자는 본인의 경험과 판단대로 이해하고 나면 끝이기도 하고. 글을 쓴 사람이 있고, 그 글을 읽고 해석한 사람이 더 이야기해 보는 과정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물론 자유롭게 해석하는 게 문학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나는 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잖아. 개인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사고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고 느낀 감상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런데 글을 읽고 대체로 말없이 내가 볼 수 없는 각자의 해석 영역으로 넘어가니까 조금 답답했던 거지.
   실은 이런 적이 있어. 내가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올렸고, 그건 나의 경험이 아니었거든? 일정 수준 내가 본 것들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대부분 나에게는 없던 일들을 만들어 쓴 글이었어. 때로는 어떤 뉴스를 보고 재구성해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책의 결말을 이어서 쓴 적도 있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게 나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거야. 그러면 나는 무척 당황스럽지. 그런데 무턱대고 이건 저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해 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Q. 글을 쓰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구나. 일상 속의 변화를 조금 더 자세하게 묻고 싶어. 글쓰기가 사소한 취향이나 습관 같은 것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어?

사노롱
   메모장 앱을 공들여서 선택하기 시작했어. 이전에는 휴대폰에 있는 기본앱을 썼거든? 자고로 메모장은 빨리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떤 앱은 절차가 복잡하고 기능이 많아. 이제 그런 건 기피하게 됐지. 그래서 간편하고 빠르게, 내 손에 잘 익는 걸 찾아서 이것도 써봤다가 저것도 써봤지.

미루무
   글쓰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뀐 건 아니지만 아침을 길게 사용하게 됐어. 퇴근 후에는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거든. 퇴근 후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는 오늘 무엇을 했다 정도뿐이야. 누구와 이야기를 했다, 먹었다, 누구랑 만났다. 책도 마찬가지야. 무거운 글은 눈에 들어오질 않더라고.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거나 여가 시간을 보내고 출근하는 식으로 생활 시간표가 바뀌었어. 5시쯤 일어나서 2시간 반 정도 시간을 보내고 출근 준비를 해. 잠은 10시쯤에 자는데, 요즘은 저녁에 이것저것 해서 11시쯤 잠들어.


Q. 그럼 앞으로 자신의 문학 생활에서 글쓰기는 어떤 모습일 것 같아?

미루무
   나는 욕심이 없어진 것 같아. 전에는 일기도 멋지게 잘 쓰고 싶고, 단편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내보기도 했거든. 그런 욕심이 있어서 글을 써봤는데 지금은 그만한 욕심이 들지는 않아. 오히려 내가 정말 즐겁게 쓸 수 있을 때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커. 그래서 창작물 자체를 만드는 데 욕심을 내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었을 때 기쁜 마음으로 서평을 더 자주 남길 것 같아. 게다가 요즘 내가 워낙 바빠서 말이야……. 문학적인 글쓰기와는 조금 서먹해졌어.
   그리고 무엇보다 욕심이 줄어든 큰 이유가 있어. 생각보다 즐겁지 않더라고. 좋은 글을 많이 읽던 경험이 즐거웠으니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어. 즐거워지려고 시작했는데 영 아니더라고. 가장 힘든 건 내가 쓴 글을 내가 고치기 위해서 다시 읽는 거였어. 열심히 고치고는 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이 글을 고치고 있는 것인지, 더 뭉개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더라고. 그렇게 둔해져서 글을 고치면 어느 순간에는 내가 이걸 왜 쓰려고 했는지, 뭘 말하려고 했는지조차 잃어버리게 됐어. 그런데 이런 과정들이 생각보다 견디기 어려웠어. 역시 업이 아닌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그래서 이제는 힘을 빼고 내가 즐거운 글쓰기를 하고 싶어.

사노롱
   나도 마찬가지야. 사실 취직하고 나서 문학적인 글쓰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아. 특히 어떤 허구의 이야기를 쓰려면 많은 시간이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상황을 겪고, 그 일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사고하고 쓰기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의 생활에서는 그게 쉽지 않아. 글로 잘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잘 해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거든. 그런데 요즘에는 그 욕심 자체가 많이 사라진 느낌이야. 책을 읽는 시간 자체가 줄어들고, 생활이 무척 단조로워지는 상황에서 여러 상상을 할 여유가 없달까? 생각이 점점 납작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해.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언가 써내려면 나를 비틀어 짜는 기분이 드는데 그럼 내가 즐겁지 않잖아. 그러면 인물도 이상해져. 꼭 자아가 여러 개인 사람 같아. 시간과 체력이 될 때마다 쪼개 쓰다 보니까…….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진 이야기라기보다는 쓴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거야. 오늘은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다가 다음 주에는 저런 사람으로 쓰는 식이지. 예전에 한 호흡으로 즐겁게 쓸 수 있었던 건 나에게 그만한 여유와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쓰려는 글과 비슷한 책이나 소설을 실컷 읽고 나에게 집어넣고 이런저런 생각과 경험을 할 시간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일을 하면서 그런 시간을 갖기가 무척 어려워졌지.

미루무
   호흡이 딸리는 기분이지. 내 삶을 살아내는 데도 벅찬데 글을 쓰기 위해서 책상에 앉고 새 호흡을 찾아야 하는 거잖아. 그게 쉽지 않은 거야. 내 하루를 정돈하는 일기를 위한 호흡은 금방 준비되지만…… 단편소설을 쓴다고 상상해 보자고. 일과를 다 보내고 저녁에 앉은 내가 책상에 앉아 준비하기에는 조금 벅차지. 한 호흡에 쭉 달려서 쓴 글과 매일 두 시간씩 분절적으로 시간을 내서 쓴 글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전자가 훨씬 좋아. 그런데 나는 후자의 형태로 호흡할 수밖에 없고. 결국 이야기가 자꾸만 파편화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오늘까지 쓴 내용이 내일 가면 또 달라지는 기분이 드는 거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그새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다른 그림의 퍼즐 조각을 매일 같은 판에 붙이려고 하니까 될 리가 있나. 그걸 또 수정하려고 다시 들여다보면 힘들지. 내가 읽은 책들은 정련된 작가들의 글인데 억지로 끼워 둔 퍼즐 그림 같은 내 글을 보고 있자면…… 그 과정들이 너무 힘들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Q. 그렇다면 혹시 글쓰기가 없는 문학 생활은 어떨 것 같아?

미루무
   문학을 읽고 사랑하는 일은 멈추지 않겠지. 그래도 쓰기가 없는 문학 생활은 너무 답답할 것 같아. 문학 옆에 있다 보면 언제나 질문이 떠오르는데, 그 질문에 나의 대답을 정리할 수 없단 거잖아. 기억이 유실되고, 했던 질문을 다시 반복하게 될 것 같아. 어쩌면 아주 포기해 버리고 하나의 질문만 손에 쥐고 살아갈지도 모르겠어. 사랑하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많이 애써야 할 거야.

사노롱
   사실 읽는 것의 의미도 굉장히 크잖아. 덩달아 그 의도를 찾아서 이야기를 이어 간다는 재미도 있었지. 하지만 이미 문학적인 글쓰기는 점점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해. 점점 바빠지고 있거든.
   글쓰기를 할 수 없다면 분명 아쉬울 테지만 글을 쓰는 건 내 일상이 풍부해야 이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쓰기에 골몰하다가 내 삶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고. 어쨌든 처음 읽고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런 방향을 원했던 건 아니니까. 아쉽지만 살면서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글쓰기가 삶에서 아주 사라진다면 굉장히 납작한 하루를 살게 되겠지.


Q. 만약 생활 속에서 문학도 없어진다면 어떨 것 같아?

사노롱
   화가 더 많이 날 것 같아. 왜냐하면 문학을 접하는 건 단순히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채로워지는 시간이라고 느끼거든. 오늘 읽은 글에서 화자가 어떤 말을 했을 때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았나 되묻기도 하고. 또 화가 너무 많이 나거나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 때 새벽에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을 문학을 읽으면서 쳐내기도 했는데 만약에 그런 시간이나 환경이나 기회가 없어진다면 말라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아.

미루무
   나도 좀 비슷한 맥락에서 외로워질 것 같다고 생각해. 문학은 늘 나에게 존재했거든.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시간을, 원하는 장소에서 뭔가 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문학이었어. 굳이 내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받는 위로가 있지. 내가 다양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건 문학이야. 문학을 통해 감각하는 경험들이 없어진다면 즐겁지 않겠지. 사람을 만나거나 영상으로만 다른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면 많이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문학은 내 머릿속에서 내가 상상하는 만큼으로 그릴 수 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 누군가 주는 만큼만 봐야 하고 주는 만큼 다 받아들여야 한다면 또 외로워지지 않을까? 내 상상 속의 공간이 없어지는 거야. 책을 읽으면 내가 상상하는 내 공간에 있다고 느껴. 책을 읽을 때 나는 조금 더 두루 볼 수 있는 바깥에 있지. 동시에 내 안에 계속 질문을 넣거나 내 안의 문장을 다시 따라가서 읽는 과정들이 있기도 해. 그래서 책을 읽으면 내가 있다, 라는 감정이 더 크게 느껴져. 문학을 읽는 과정이 없어지면 내 상상 속 공간이 없어지는 거니까 거기서 오는 소외감이나 외로움이 커지지 않을까 생각해.

사노롱
   맞아. 무척 공감이 가. 내가 없어진다는 느낌을 많이 받을 것 같아. 지금 직업을 갖게 된 것도,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내 관점에도 문학이 많은 영향을 줬어. 문학은 단지 아름다운 것만으로 역할하기도 하지만 사회에서 문제점을 고발하는 역할도 하잖아? 문학을 통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접했고 그런 모습들을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도입해 보기도 하는 것 같아. 그러면 나만 아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되겠다거나 나는 잘살고 있는지 가치관 정리를 자주 하게 됐어.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는 거고. 그런데 만약에 문학이 없어진다면, 내가 문학 속으로 계속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어진다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들이 사라질 것 같아.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게 될까 생각해 보면 그냥 주변인으로 남을 것 같아. 별 문제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그냥 넘어가도 되는 문제니까 괜찮다면서 문제 상황 안에 들어가거나 발언하지 않는 그런 주변인 역할 말이야. 이미 삶에서 피로감을 너무 많이 느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언가를 바꾸려는 일을 하고 있는 건 문학을 접하고 공감하면서 옳지 않은 게 무엇인지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만약에 문학을 접하지 않는다면 정말 낡고 딱딱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불안감도 있어.


   참, 중요한 걸 묻지 않았네! 너희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책이 있어? 나는 예쁜 책을 찢어 꽁무니에 꽂아 장식하는 게 취미거든.

미루무
   장식으로 쓸 표지가 아름다운 책? 그렇다면 당연히 그림책이지. 나는 『할머니의 여름휴가』와 『수박 수영장』을 추천할게. 특히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책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표지, 내지, 내용 모든 것이 말이야. 한 할머니가 손자가 준 소라 속으로 여름휴가를 간다는 내용이야. 수박 한 덩이를 들고 바다로 연결된 소라로 들어가는 거지. 무척 아름다운 수영복을 입고 말이야. 같이 사는 반려견과 함께! 다녀오고 난 뒤에는 몸에 모래가 묻어 있는 장면이 특히 멋있어. 여름이 되면 꼭 읽어야 하는 그림책이지. 사실 할머니가 수영복을 입는 모습을 자주 보지 못했잖아? 그런데 그런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나와서 무척 좋아해.

사노롱
   나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추천할게. 표지가 다양한데 모두 무척 예뻐. 사진이 표지인 원서도 아름답지. 그렇지만 나는 2007년에 들녘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표지가 제일 마음에 들어. 저녁의 기차역이 그림으로 멋있게 그려져 있거든.

부추
   Q. 나는 너희가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궁금해! 혹시 소개해 줄 수 있니?

사노롱
   그렇다면 추천할 책은 『작별하지 않는다』야. 나는 이 책을 최근에 읽었어. 한강 작가가 책을 잘 내지 않는 분이라 신간은 또 5년 뒤에나 나올 것 같은 거야. 아무래도 천천히 읽어야 될 것 같아서 최대한 아끼고 있었지. 읽고 나니까 쓰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알겠다는 느낌이 들어. 이 책은 제주 4·3사건을 바탕으로 쓴 책이야. 소설에는 그 사건에서 누군가가 죽는 묘사가 나오는데 잘 못 넘기겠더라고. 평소에는 잘 그러지 않는데 누군가가 피 묻은 채로 죽어가는 묘사들이 계속 잔상에 남아서 읽기가 어려웠어. 대신 계속 곱씹게 됐지.
   그리고 나는 요즘 『젊은 작가상』 시리즈를 읽고 있거든. 지금 읽고 있는 건 『2014 젊은 작가상』이야. 황정은 작가의 「상류엔 맹금류」가 대상을 받은 해인데, 황정은 작가는 이런 분위기를 참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내가 그 상황에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글이었어.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상황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익숙하지 않지만 애써 괜찮은 척하는, 사실은 불편한 상황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미루무
   나는 요즘 선택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최근에 숙제로 읽은 책은 『시설사회』라는 책이야. 이 책을 읽고 토론 연수에 참여해야 하거든. 이 책은 (사)장애여성공감이라는 단체에서 만든 책이야. 장애인의 탈시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책을 읽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정말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내가 당사자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냐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외면하기도 했어. 그런데 그 책에서 주변인으로서도 곁을 지키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걸 전달하더라고.
   그리고 미국 원주민 출신 작가 로빈 윌 키머러가 쓴 『향모를 땋으며』라는 책도 재미있게 읽었어. 이 책은 포타와토미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그들이 자연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책이었는데 무척 좋았지. 올해 초에 읽었지만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될 것 같아. 포타와토미족은 제사를 지낼 때 향모라는 풀을 땋아서 그걸 태우면서 제의를 올려. 그런 의식을 통해서 땅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내용들이 이어지지.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나오고…….
   그 책에는 윈디고라는 괴물이 하나 나오는데 그 괴물은 허기를 계속 느껴서 모든 걸 먹어치워. 자기 입술까지 먹어버리는 바람에 입술이 없어. 이 이야기를 인간의 모습에 비유하면서 우리는 윈디고인가 하고 묻는 부분도 있어. 우리는 윈디고가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야. 엄청 두꺼웠지만 다시 읽고 싶은 책이야.

부추
   오늘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워. 아주 재미난 이야기였어.


   맞아. 오늘 말해 준 책들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꼭 꽁무니를 장식하는 데 이용하도록 할게.

미루무
   나도 오늘 즐거웠어.

사노롱
   맞아, 재미있었어!

 

이후로도 삑과 부추 그리고 미루무와 사노롱은 한자리에 머무르며 오래도록 이야기했어요. 부추와 삑이 무지개 동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도요.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잊었을 무렵, 사노롱의 거북이 친구가 사노롱을 데리러 왔답니다. 바다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죠. 삑과 부추는 아쉽지만 사노롱과 미루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무지개 동산으로 출발했어요.

 

 

계속....

 

 

 

 

※ 이 글은 2022년 5월 8일 16시 온라인에서 2시간가량 진행한 인터뷰를 각색한 것임을 밝힙니다.

 

 

'그림 효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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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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